불교

대승경전(大乘經典) 성립

수선님 2020. 2. 23. 11:37

<대승경전(大乘經典) 성립의 배경>

당시에는 이미 불타가 직접 설하신 경전인 <아함경>이 있었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그와 달리 불타의 참뜻을 나타낼 새로운 표현이 필요하게 됐을까. 이것은 대승불교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설하려 했던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맥을 같이한다. 다시 말해서, 대승불교는 어떻게 흥기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된다. 대승불교는 원래 불탑을 중심으로 모여서 불탑공양을 통해 불타를 찬미하고 숭배한 재가신자들을 주로 하는 집단에 의해 일어난 새로운 신앙운동이었다.

<초기 대승불교의 연구(1968)>라는 논문은 일본 불교학자 히라카와 아키라(平川彰, 1915~2002)에 의해 발표된 논문으로, 이 논문은 대승불교 기원에 대한 것이다. 그 때까지 대승불교의 기원은 주로 부파불교(部派佛敎) 가운데 대중부(大衆部)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히라카와는 그 기원을 재가신자(在家信者)를 중심으로 하는 불탑교단(佛塔敎團)이라고 지적해 경제적 기반을 불탑에 주어지는 보시(布施)라고 추정했다. 불탑교단 기원설은 세계 불교 연구의 역사 중에서도 독특한 것이며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학설은 현재는 여러 가지 방면에서 비판,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연구사적인 의의는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새로운 신앙운동은 재래의 여러 부파들의 불교가 승원중심의 불교로서 아비달마교학을 지향해 너무 전문적인 법(法) 중심의 불교를 전개시키고 있었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출발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불타의 절대성과 자비성이 무한하다는 것으로서, 이는 불멸 후 나타난 불타 신격화의 일환이었다. 즉, 불전(佛傳)과 본생담(本生譚) 등을 통해 점차 심화돼가던 불타에 대한 고찰의 결과, 불타는 과거에 무한의 수행을 한 과보로서 성불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고 했으며, 인행(因行)으로서 이타행을 주로 하는 육바라밀행을 설하게 됐는데, 그러한 불타의 체험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결의했던 곳에 새로운 운동의 출발점이 있었다.

그리고 되도록 많은 중생이 성불하는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새로운 운동을 대승이라 불렀다. 대승경전(大乘經典)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한 자연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전생, 그 전생에 이미 성불 하셔서 불타가 되셨는데, ― 이것을 본생성불(本生成佛)이라고 함 ― 이 세상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오셨다고 보는 입장에서 편찬한 경전이다.

소승경전은 현생성불(現生成佛)의 입장의 경전이다. 현생이라고 하면 금생에 성불하신 것으로 보는 금생성불(今生成佛)을 말한다.

대승경전은 본생성불(本生成佛)의 입장이다. 본생이라고 하는 이 ‘본(本) 자’는 과거의 과거, 전생이라는 의미와 같다. 전생, 그 전생에 성불하셨는데,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여러 중생들에게 기쁨을 주고자, 또 즐거움이 있는 세계를 보이고자 일대사인연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불타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고, 출가하는 모습, 고행하는 모습, 성불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것을 자비방편(慈悲方便)이라고 하는데, 자비방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의 입장이다.

소승경전에서는 금생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금생에서 성불했다, 이렇게 보는 것으로 불타를 인간으로 보는 것이고, 역사적인 인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경전에서는 전생, 즉 본생에 성불했다고 해서 불타를 역사를 초월한 초역사적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고민도 하시고, 출가도 하시고, 도를 닦으신 것은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자비와 그 자비를 성취시키는 방편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이렇게 불타를 보는 입장에서 편찬한 것이 대승경전이다. 즉, 대승경전은 불법의 멋진 확장이다.

부파불교 출가수행자들은 불타와 자신들과의 거리감 때문에 스스로가 아라한임에 머무르고자 했음에 대해, 대승불교에선 중생의 성불이야말로 불타의 본원(本願)이라고 주장해, 불타와 똑같은 깨달음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을 불타의 전신(前身)과 마찬가지인 ‘보살(보리살타)’이라는 새로운 인간상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사상을 표명하는 수단으로서, 불법을 멋지게 확장하는 수단으로서, 새로운 경전 ― 대승경전과 논서들을 편찬해갔다. 따라서 대승경전은 지금까지의 경전 ― 즉, <아함경>과는 전혀 다른 형태, 새로운 목표, 새로운 방법, 새로운 문학형식으로 생산하는 것이었다. 초기불교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경전이 여기저기서 꼬리를 물고 나타나게 됐다.

<대승경전의 성립>

불교의 경전으로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것은 매우 많다. 일체경(一切經)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 가운데, 한역 장경은 중국 후한(後漢)시대 이래 원대(元代)에 이르는, 무릇 1천여 년 간에 걸쳐 중국에서 한역된 경전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 수는 무려 1천 6백여 부, 6천 권 가량의 수량이 된다. 이들은 주로 산스크리트어에서 번역된 것이지만, 더러 빠알리어 등에서 번역된 것도 있다. 한역 경전을 중심으로만 놓고 볼 때도 불교의 경전은 실로 방대하다. 현장(玄奘) 스님이 번역 출판한 <600권 대반야경> 하나만 해도 기독교 성경의 24~25배 분량이고,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생각할 때 실로 경전의 분량이 얼마나 방대한지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런데 이 많은 경전들이 다 불타가 직접 설하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경전이 불멸 후 제자들의 결집에 의해 후대에 전해진 것이라고 하지만, 아무리 탁월한 불타라 하더라도 그 방대한 양을 다 설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경ㆍ율 중에는 후세의 사상 학설, 또는 그 때 일어났던 일들을 기재하는 것도 많다. 따라서 교의가 다양하고 서로 모순되는 것도 적지 않으므로 불타 한 분에 의해 연출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경전에 대해 일찍부터 대ㆍ소승의 구별을 세워 온 것도 사실이지만, 이른바 소승경전이라고 칭해지는 여러 부의 아함과 대승경전인 반야ㆍ법화 등을 비교해 보면 체재 자체가 다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아함이라고 해서 반드시 불타의 실록이라 단언할 수 없듯이, 대승경전이 아함의 뒤에 일어난 것이라 해도 모두 불설에 기초한 것으로서, 불설의 법의(法義)를 깊이 해석하고, 깊이 관해, 종래의 소극적 소승불교를 혁신하고 불법을 확장 심화하도록 했기 때문에 오히려 대승이 참다운 불교라고 칭해지기도 한다.

대승경전의 편찬은 불멸 후 4~500년, 즉 서력기원 전후에 생산되기 시작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대승경전도 한결같이, 「여시아문(如是我聞) -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밀로 시작한다. 그것이 전승돼온 불타의 말씀임을 표명하는 말이다. 그런데 초기졍전에서 이 말은 문자 그대로의 뜻이 있었다. 그러나 대승경전에서 이 말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일 수는 없었다.

이에 대해 <대지도론>의 저자 나가르주나(龍樹)는 이 문구를 다음과 같이 풀이한다고 일본의 불교학자 마스타니 후미오(增谷文雄)는 말하고 있다.

“부처님 경의 도입부분에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이’라는 말을 쓰는가. 그것은 불법의 대해(大海)는 신(信)을 능입(能入)으로 하고, 지(智)를 능도(能度)로 삼는바, ‘이와 같이’라 함은 곧 신(信)이다.”라고 했다. 즉, 용수의 이 말은 이미 글자 그대로 들은 바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경전을 읽는 사람은 불타의 말씀을 믿고 읽으러 들어가야 하고, 지혜가 있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의미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시아문(如是我聞)’은 초기경전 결집 당시 불타의 제자들이 불타 말씀을 직접 들었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불타를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불타의 생존 당시도 아니고 불타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불타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 불타의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식어갈 때에, 대중들이 불법(佛法)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방편의 차원에서, 그리고 불법에 대해 불타나 그 제자들과 다름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위와 같은 확고한 믿음이 있어서, 대승경전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불법의 멋진 확장과 심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대승경전이 출현해 육바라밀을 시설한 불교혁신운동에 대해 보수파가 반발했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대승교도와 보수파와의 알력은 용수의 이런 말로 해결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의 알력은 <도행반야경> 등의 초기 대승경전 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그리하여 용수(龍樹)를 지나 무착(無着) 시대에 이르러 대승경전이 불설이라는 논증이 공공연하게 나타난다. 무착은 <대승장엄론>에서 팔인(八因 - 不記, 同行, 不行, 成就, 體, 非體, 能治, 文異)을 열거해 대승이 참다운 불설임을 논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무착은 <현양성교론>에서는 10인(十因)을 나열하고, <성유식론>에서는 7인(七因)을 설하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것들은 모두 추상적인 논의에 그치고 있어 사실적인 언급은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대승경전을 모두 불타 친설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고 본다. 종교 역시 인간문화사의 한 단면으로, 세태와 함께 변하고 발달해야하는 것이라면 불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소승에서 대승으로, 또 공교(空敎)에서 중도교(中道敎)로 발전했듯이 경전도 이에 맞추어 편찬돼 오늘에 이르렀음은 사실이다.

“오늘 날 대승불교 흥기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학자들은 대개 그 기원을 전통 부파교단의 연장선상에서 찾고 있다. 대승경전 역시 이전의 경전을 수용해 해석하고 새롭게 읽는 과정을 통해 종류와 분량이 확대돼 간 것이지 결코 ‘역사적 붓다’의 권위를 빌려 날조된 것이 아니며, 경전의 증광 또한 어디까지나 전통적인 경전해석의 패턴을 의식해 이루어진 것이지 결코 자유로이 무제한으로 전개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 권오민

그런데 이와 같이 대승경전이 불타 친설(親說)이 아니고, 시대를 따라 점차 편찬된 것이라 하더라도, 누구에 의해, 언제 어디서, 편찬이 이루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남아 있다. 당연히 이런 정도의 문제제기는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무리 그렇게 문제 제기를 하더라도 끝내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는 큰 난관이 가로막고 있다.

그 첫째 난관이란, 대승경전 편찬자들은 하나 같이 그 배후에 숨어있기 마련이어서, 즉 전면에 나서지 않으므로 편찬자를 알아내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불타의 이름을 빌릴지언정 스스로 나서서 감히 불타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경로로 봤을 때, 대승경전 편찬에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용수 보살(龍樹菩薩) 역시 숨어서 주도하거나 도울 뿐이지 외람되게 전면에 나설 수는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난관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으로 남아 있는 대승경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원본이 많이 남아 있어야 그들의 상호비교를 통해, 혹은 문맥의 어느 부분에서 유추해 조금의 실마리라도 찾겠는데, 그것조차도 불가능하다.

셋째 난관은, 중국인들의 그릇된 선입견이 한 몫을 한 것이다. 과거에는 정보통신의 한계 때문에 중국인들은 대승경전 모두가 불타의 친설이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난관은 기록문화의 전통이 없는 인도에서 문헌을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금에 와서는 ‘누구’의 문제는 거의 포기 상태이고, 연구의 초점이 ‘언제 어디서’로 옮아가 있다. 헌데 이것마저도 인도에서 그 실마리를 찾기는 어렵다. 이 역시 역사적 흔적이나 문헌기록에 근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중국에서 발간됐던 대승경전의 번역 연대로부터 추정해 그 대강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남북조 시대에 소위 교상판석(敎相判釋)이 성행해 이에 근거했으나 이는 전혀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허황된 이론이어서 믿을 것이 못된다. 그리고 중국에서 번역된 대승경전의 목록과 고고학적 발굴에 의한 산스크리트어본 경전 등에 의해 대승경전의 편찬 지역을 개략적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이들에 의하면, 시기적으로는 기원전후에서 6~7세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계속 제작됐고, 지역적으로는 한곳에 편중되지 않고 남인도, 중인도, 북인도, 중앙아시아, 심지어 중국 등 각지에서 편찬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서역을 거쳐 들어온 대승경전의 각 이본을 비교해 보면, 경전이 남인도에서도 편찬됐고, 북인도에서도 편찬됐다. 그리고 서역지방에서도 상당수의 대승경전이 편찬된 흔적이 보인다.

불교경전이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진 것은 후한(後漢) 무렵이고, 일찍 안식국(安息國), 대월지국(大月支國), 강거국(康居國) 등 소위 서역이라 일컫는 중앙아시아의 사문이 경전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왔다. 따라서 이들이 가지고 온 불전이 통과했던 지역에도 불교가 전파됐고, 그 지역에 포교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개발됐던 실크로드를 따라 2세기 이후 후한시대에 중국으로 불경이 전해지게 되는데, 이때 산스크리트의 경전을 한자로 번역한 이들은 주로 실크로드 주변에 위치한 국가 출신의 불교인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아직 중국어에 능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중국인의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쳤으므로, 한자로 된 북방경전은 인도로부터 직접 전수된 경전에 비해 그 본래의 의미가 다소 변질되거나 이질적인 요소를 담고 있을 소지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즉, 경전을 번역할 때 원본을 첨삭 개조하기도 하고, 그 뜻을 이어 새로운 경전을 편찬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중국 찬술의 위경(僞經)이 다수 있다고 하는 것에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서역에서 편찬된 위경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 대승경전인 <도행반야경> 등에 의하면, 최초의 대승경전이라 할 <반야경>은 남인도에서 처음으로 편찬된 것 같다. 남인도에 연고가 있는 문수보살이 <도행반야경>의 처음에 미륵과 함께 등장하고, 또 <아사세왕경>, <수능엄삼매경> 등의 초기 대승경전에서도 문수의 활약을 서술하고 있어, 이들이 활약한 남인도에서 일부 대승경전이 편찬됐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후대에 가서 밀교가 전파되면서 금강지(金剛智, Vajrabodhi, 671~741)의 제자이고 중국에 많은 전적을 소개한 불공(不空, 705~774)은 실론 태생이며, 밀교경전이 모두 남인도 보타낙가산(補陀落伽山)을 설법 장소로 하고 있는 점으로 봐서 이 지방에서 밀교와 관음 계통의 경전이 편찬됐을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도행반야경>에도 반야바라밀은 남인도에서 차례로 전파돼 북인도로 전파됐다고 설하고 있다. 여기서 북인도란 설일체유부의 중심지인 카슈미르 지방과 간다라 지방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보수적이고 매우 교권을 중시한 상좌부의 일파인 유부의 근거지인 북인도 카슈미르 지방에서 먼저 대승이 발생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물론 후에는 이 지역을 포함해서 중앙아시아 일대에 걸치는 북방지역이 오히려 대승불교의 중심지로 부상한다.

〈도행반야경>의 최초 부분이 반야경전들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반야경전 대부분은 스스로 그것이 남방(南方)에서 기원한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대승불교가 다양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반야경은 부처 중심의 대승불교를 법(法) 중심의 종교로 전환하는 역할을 했다. 즉, 깨달음을 향한 수행의 도(道)를 고양하고 재가로부터 출가(出家)로 전환시켜 대승불교의 전문화로 발전했다.

그런데 대승경전이 석가모니 부처가 직접 설한 것이 아님이 밝혀져 위경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석가모니 직설(直說)은 아니지만 진설(眞說)이라는 입장이다. 즉,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글과 말이라면 불타의 직설과 다름없다는 것이다.따라서 경전에 불설(佛說)의 핵심인 중도(中道)ㆍ연기(緣起)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한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정돼야 하며, 저자는 모두 붓다로 귀결돼야 할 것이다. 이처럼 불경에서의 저자의 부재는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집착을 넘어서기를 역설하는 불교의 보편적인 어법이 반영됐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모든 경전은 불타의 사상과 실천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편협한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대승경전들은 결코 불타의 사상과 실천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불타의 가르침과 사상을 미화하고 장엄하고 확장하는 향상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승경전 편찬자들은 그들 나름의 확고한 신념과 목표가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불타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다.”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고지식하게 불타의 말씀을 그대로 듣고 전하는 초기 성문들과 다르게 대승경전 편찬자들은 불타의 진의를 꿰뚫는, 시대에 맞는 이치를 대승경전에 나타내는 것에 그들은 주저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불타의 정신을 살리는 길임을 확신했다. 그러한 정신이 있었기에 대승불교가 꽃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문수(文殊), 용수(龍樹), 마명(馬鳴), 무착(無着), 세친(世親) 등과 같은 뛰어난 선지식들의 생각도 한결 같았을 것이다.

“요컨대 대승경전이 날조된 후대 창작이라는 것은 「불법=불설」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생각이며, ‘아비달마불교는 초기불교의 왜곡’이라거나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로 되돌아가려는 운동’이라는 말 또한 불교의 전통과 역사성을 무시하고 불교의 시대적 구분을 도식적으로 이해한데서 비롯된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함과 중아함은 유부의 전승이고, 5니까야는 상좌부의 전승으로, 초기경전 자체가 이미 아비달마화 한, 출가 승려를 위해 편찬된 교과서(E. 라모트; 櫻部建)였기 때문이며, 각각의 부파가 불타의 취지(dharma)를 밝히려고 했듯이 대승불교 역시 그러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의 모본이 된 원초적 형태가 있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의 확인은 사실상 불가능할뿐더러 비바사사(毘婆沙師)를 비롯한 다수의 대ㆍ소승의 논사들은 제1결집은 멸실됐으며, 그 후로도 무량의 경전이 은몰했다고 전한다.)” - 권오민

그리하여 BC 1세기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초기 대승경전으로 중요한 것은 <반야경>ㆍ<법화경>ㆍ<십지경>ㆍ<무량수경>ㆍ<아미타경>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독창적으로 편찬된 경전도 있지만 단편적으로 형성된 것을 하나로 모은 것도 있으며, 원래 있는 구본(舊本)에 증광한 것도 있고, 혹은 다소 수정을 간한 경전도 있었을 것이다. 한역된 경전 중에는 중역(重譯) 된 것이 상당수 있는데, 그들을 비교해보면 그 역본들이 완전하게 동일하지 않고, 후역일수록 항상 증광되고 있다. 그것은 중요한 경전이 일단 제작되면, 그것에 대해 증광과 수정이 가해져서 첨삭 개찬됐음을 말하고 있다. <반야경>, <화엄경> 등 대승 경전을 대표하는 것의 이본을 놓고 비교해 보면 더욱 확실해 진다.

<대승경전의 삼대 원류>

① 공관적(空觀的) 경전 ― 반야부 경전 ― 반야사상, 공(空)사상, 무아사상, 중관사상의 논서.

② 유심론적(唯心論的) 경전 ― 해심밀경, 무량수경, 아미타경, 법화경, 유식(唯識) 계통 논서.

③ 공과 유심을 모두 섭수한 경전 ― 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천수경.

<시기별로 편찬된 대승경전>

① 초기 대승경전 -- 반야부경전(般若部經典), 육바라밀경(六波羅蜜), 보살장경(菩薩藏經), 삼품경(三品經), 도지대경(道智大經), 반야삼매경(般若三昧經),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 아미타경(阿彌陀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

② 중기 대승경전 --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 해심밀경(解深密經), 유마경(維摩經), 승만경(勝鬘經),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능가경(楞伽經), 앙굴마라경(鴦掘魔羅經), 금강명경(金剛明經) 등.

③ 후기 대승경전 --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頂經) 등 주로 밀교계통 경전.---→대승불교(大乘佛敎)와 소승불교(小乘佛敎)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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