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주. 대승불교의 실천
▒ 8강. 정진, 선정, 지혜의 실천 ▒
정진바라밀
육바라밀 중 네번째는 정진바라밀이다.
바라밀은 생사의 고해를 건너 저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는 것이다.
정진바라밀은 이 언덕을 향해 생사의 바다를 건너가는
열반호의 동력이고 추진력이다.
이 열반의 배는 큰 배이므로 동력이 약해서는 안 된다.
강한 힘과 추진력이 있어야 무사히 생사의 바다를 건너갈 수 있다.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쉼 없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위없는 깨침을 이루고 일체의 중생을 모두 건지겠다는
보살의 큰 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더 없는 자기 정진이 필요하다.
부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슬퍼하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였다.
“너 자신을 등불 삼고 너 자신에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그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여서는 안 되느니라.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정진은 학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는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하물며 진리를 깨쳐 일체의 중생을 건지겠다는 원을 세운 보살에게
정진은 말할 수 없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정진에는 우선 목표가 바르게 서는 것이 중요하다.
방향이 바로 잡히고 나서 정진을 해야지
방향이 비뚤어져 있는데 무턱대고 정진을 하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산에 가야 할 사람이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속력을 내면
더욱 엉뚱한 방향으로 갈 것은 뻔한 노릇이다.
보조국사 지눌도 『수심결』에서 정진에 앞서
방향을 잘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설령 하루에 한끼만 먹으며 앉아서 눕지 않고,
또 피를 뽑아 경전을 쓰며 온갖 고행을 다해도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처럼 정진에는 바른 원과 목표가 선행되어야 한다.
지눌은 스스로 목우자(牧牛子)라는 자호를 썼다.
‘소치는 사람’, ‘소먹이는 사람’이란 뜻을 지닌 목우자는
정진의 자세를 잘 나타내는 이름이다.
소먹이는 사람이 어디 잠깐인들 한눈 팔 수 있겠는가?
한 눈 팔면 소가 벌써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절단내고 만다.
따라서 목우자는 꾸준히 정진하는 자세를 뜻하는 호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지눌은 그런 삶을 살았다.
전기에 보면 그는 우행호시(牛行虎視), 즉
‘소걸음과 호랑이 눈’으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호랑이 눈’이란 현실 직시의 눈이다.
호랑이는 곁눈질을 하지 않고 정면을 꿰뚫어 본다.
이와 같이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될 때
삶의 굳건한 목표와 방향이 정립될 수 있다.
실제로 지눌은 12세기의 타락한 고려 불교의 현실을
호랑이 눈과 같은 통찰로 꿰뚫어보고,
‘고려 불교를 바로 잡아야 되겠다.″ 라는 비원(悲願)에서
정혜결사라는 목표와 방향을 정립했다.
요즈음 한국 불교의 미래를 걱정하고
정혜결사의 의미를 재조명하려는 작업이 여기저기서 일고 있다.
이렇게 지눌은 호랑이의 눈과 같은 통찰로 정혜결사의 원을 확립하고
평생을 일관해서 소걸음의 실천으로 정진해 갔다.
한국의 선, 나아가서는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소걸음″의 삶이 바로 그 목표를 향한 정진이었다.
그리고 ‘소걸음″은 그 육중한 몸을 싣고 결코 서두르지 않고
게으름도 피우지 않으면서 목표를 향해
착실하고 꾸준하게 정진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정진, 그런 실천의 발이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
보살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굳건한 삶의 목표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소걸음의 실천은
인간답게 살려는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새기고 본받아야 할 삶이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 자체는 말할 수 없이 번거롭고
눈앞의 일이 우리를 얽매이게 한다.
그럴수록 내가 선 시간과 공간을 직시하고,
또 내 능력과 소질을 감안해서 바른 삶의 목표를 세우고
꾸준히 정진해 갈 때 우리다운 삶이 가능하리라고 믿는다.
우리는 정진바라밀에서 바로 그런 교훈을 얻다.
각자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이며,
또 그 목표를 향해 얼마만큼 정진하고 있는가를 한번 돌아봐야 할 것이다.
몸은 아침 이슬 같고 했고 목숨은 지는 해와 같다[身如朝露 命若西光]고 했다.
우리에게는 정진이 필요하다.
선정바라밀
선정(禪定)은 범어인 디야나(Dhyana)의 역어로서
그 뜻은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이다.
여기서 정려(靜慮)를 고요히 생각하는 것이라 하고,
또 사유수를 조용히 사유하는 수행이라고 풀이하는데 좀 달리 표현하고 싶다.
즉, 정려는 조용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조용히 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번뇌망상으로 가득 찬 생각을 비우고
조용히 하는 것이 바로 정려이기 때문이다.
또 사유수도 사유를 비우는 공부라고 풀이하고 싶다.
왜냐하면 선정은 생각 자체를 비우고
조용하게 하는 수행이고 공부이기 때문이다.
선정은 본래 인도에서
오래 전부터 있어 온 명상을 불교가 수용한 것이다.
무명의 바람으로부터 일어나는
번뇌, 망상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이러한 수행이 필요한 것이다.
팔정도의 정념과 정정이 이러한 실천에 해당된다.
또한 삼학에서도 정학(定學)은 매우 중시된다.
선정은 깨침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깨침은 존재의 실상을 여실히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산란하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따라서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안정되게 하는 선정이 필요한 것이다.
계의 그릇이 깨끗해야 선정의 물이 고이고
선정의 물이 고여야 지혜의 달이 비친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을 청정이 비우는 일은 불교수행의 특성이다.
그래서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그 마음을 허공처럼 비워야한다.
[若人欲識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대승의 선정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대승의 선정바라밀은 단순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차원을 넘어 서 있다.
『유마경』『제자품』을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유마경』은 대승 보살불교의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경전이다.
주인공은 출가승이 아닌 우리처럼 가정을 가지고 있는 유마거사이다.
유마거사가 병이 나자 부처님은 십대 제자들을 시켜 병문안을 가라고 했다.
그러자 부처님의 제자들은 유마거사의 도력(道力)이 뛰어나서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문병을 갈 수 없다고 사양을 했다.
유마의 병은 특이한 병이었다.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므로 내가 아프다.’고 했다.
이 세상의 갖가지 고난에 병들어 있는 중생들의 아픔이 바로 유마의 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과 내가 둘이 아닌 동체자비(同體慈悲)의 마음을 나타내는 위대한 병이다.
대승 보살은 바로 그런 병을 앓는 사람들이다.
부처님이 지혜 제일인 사리불에게 문병을 가라고 했을 때,
사리불은 “저는 유마거사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면서
과거에 유마거사를 만났던 일을 말씀드렸다.
사리불이 숲 속에서 조용히 좌선을 하고 있을 때 유마거사가 와서
‘그렇게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은 아니다.’라고 지적을 했다.
거사는 진정한 좌선이란 삼계(三界) 가운데
몸과 마음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어야 하고,
또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진정한 좌선이라고 했다.
그때 사리불은 대답할 바를 몰랐다고 하면서 부처님께 유마거사의 문병을 사양했다.
여기서 사리불의 좌선은 일반적인 의미의 선이다. 즉,
조용한 곳에서 마음을 안정시키고 번뇌를 끊기 위해서 앉아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유마거사는 참 선정, 대승의 선정은 그와는 달리 마음이 문제라고 했다.
따라서 세상 한 복판에 있으면서도 항상 마음을 청정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의 선정은 번뇌를 끊는 것이 아니라
본래 공하다는 실상을 체득하여 번뇌가 곧 보리인 것을 아는 실천이다.
따라서 대승의 선은 서거나 앉거나에 구애받지 않는 실천이다.
길을 가고 앉아 있는 것도 선이며 일상생활 그대로가 선이라는
활달한 입장이 대승적 전통이다.
이와 관련해서 남악회양 선사와 마조도일 스님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마조 스님이 남악 스님 밑에서 열심히 정진하고 있는데,
하루는 남악 스님이 이렇게 물었다.
“무엇하려고 그렇게 앉아 있느냐?”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그러자 남악 스님은 어디서 벽돌을 하나 주워다가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조 스님도 모른 척하다 궁금증이 나서 여쭈었다.
“스님, 왜 그렇게 벽돌을 갈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그러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됩니까?”
“종일 그렇게 앉아 있다고 부처가 될까보냐?"
그 말에 마조 스님이 크게 깨쳤다고 한다.
이것은 유마거사가 보여준 대승의 선과 같다.
소승적인 선은 깨침을 위한 방법으로서 깨침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선정은 몸을 조용히 하고 번뇌를 끊는 2중 구조로 되어 있다. 즉,
번뇌와 보리, 생사와 열반이 둘로 구분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이 둘인 한, 깨침을 이룰 수는 없다.
번뇌가 보리이고 생사가 곧 열반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번뇌와 보리가 ‘하나’이고 생사와 열반이 ‘하나’이기 때문에,
대승불교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수행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수심결』에서도 “성문들은 마음마다 미혹을 끊지만
그 끊으려는 마음이 바로 도둑이다.” 라고 했다.
‘끊어야겠다.’는 마음을 갖는 것은 번뇌를 실체시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끊으려는 마음이 먼저 공(空)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行住坐臥 語?動靜)이 모두 선이 되는 것이다.
바라밀로서의 선정은 바로 이런 실천이어야 한다.
그래서 본래의 마음이 항상 드러나도록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선정공부를 하는 사람을 위한 점차적인 훈련이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몸을 먼저 고르고[調身],
다음에 호흡을 고르게 하고[調息],
마지막으로 마음을 고르게 한다[調心]는 단계적 설명도 있다.
먼저 고요한 장소에서 몸과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몸이 분주하면 자연히 마음도 분주해지기 쉽기 때문에
우선 몸을 고요히 해야 된다.
계율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리고 바른 자세는 선정에 필수적이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가부좌 혹은 반가부좌의 자세로 앉는다.
이 때 어깨에 긴장이 될 수 있으므로 몸을 전후좌우로 몇 번 흔들어 주면 좋다.
그 다음이 조식(調息), 즉 호흡을 고르는 것이다.
특별히 호흡을 멈출 필요는 없고 단전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 된다.
그리고 조심(調心)을 위해서는 마음을 밝게 해서 환히 비추어야 한다.
이것을 묵조한다고 합니다.
또 화두를 드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들은 모두 표층의 번거로운 마음으로부터
본래의 청정심에 돌아가는 훈련이다.
지혜바라밀
육바라밀 가운데 마지막은 지혜바라밀이다.
지혜는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낱말이지만,
본래의 뜻이 그대로 드러나지 못해서 미흡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지혜는 범어인 프라즈냐(Prajna)의 역어이며,
음역으로는 반야(般若)라고 옮긴다. 마하반야(摩訶般若)라고 할 때의 그 반야이다.
이 지혜는 인간의 근원적 예지가 환히 밝아져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실상을 여실히 보는 것을 뜻한다.
일찍부터 지혜는 광명으로 비유되어 지혜광명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어둠, 즉 무명이 완전히 가시고 모든 것이 일시에 환히 밝아져서
있는 그대로의 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 광명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의 마음자리에 갖추어져 있다.
그 밝음을 비유해서 ‘보름달 같다’, 혹은 ‘태양 광명과 같다’고도 한다.
옛 조사 스님들의 말씀에 보면 지혜를 천일조(千日照)라 하여
천 개의 태양을 한데 묶어 놓은 것과 같은 광명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그 밝음은 항상하여 꺼지지 않는 광명이라고 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광명을 등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에 있다.
우리는 항상 밖을 향해 치달으면서 살기 때문에
마음에 그늘이 지고 어둠이 생기는 것이다.
그 어둠 속에서 나타나는 착각으로 ‘나다’, ‘남이다’ 하는 분별이
독버섯처럼 일어나고 그로부터 탐·진·치 삼독이 전개되는 것이다.
지혜의 빛이 비칠 때 ‘나다’ 하는 착각은 비로소 사라지고
‘나다’하는 분별도 끊어져 자타가 ‘하나’될 수 있다.
지혜의 성격을 지식과 비교해 보면 이해하기 쉽다.
첫째로, 지식은 분별해서 아는 것이다.
눈으로 무엇을 보고 귀로 무엇을 듣고 아는 것이다.
또 생각으로 사량 분별하는 것도 지식에 속한다. 즉,
지식은 감각이나 지각을 통해 아는 것으로서,
나와 알아지는 대상이 분명히 나누어진 채 아는 것이다.
이처럼 지식은 주(主)와 객(客)이 항상
나누어진 채 아는 앎이기 때문에 이런 앎을 상대적인 앎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식은 항상 대립적이다.
나와 남, 선과 악, 옳고 그름이 항상 짝을 짓고 나타난다.
이런 지식을 분별지(分別知), 혹은 차별지(差別知)라고 한다.
여기에 비해 지혜는 분별 없이 아는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아는 나와 알아지는 대상이 ‘하나’가 되는 앎이다.
지혜는 항상 주·객이 ‘하나″로 융합되어 모든 분별이 끊어져 있다.
따라서 지혜는 감각, 지각하는 피상적인 차원의 앎이 아니라
존재의 심연에서 사물을 꿰뚫어 보는 본질적인 앎인 것이다.
지혜가 밝아질 때 차별상이 아니라 본래 나와 남,
나와 우주가 둘이 아닌 ‘하나″인 실상이 나타나게 된다.
영국에 칸티바로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그분은 지혜를 ‘Wisdom gone beyond″ 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지혜란 일체의 대립과 차별을 멀리 떠난 앎이다.’ 라는 뜻이다.
무분별지로서의 지혜를 잘 나타낸 표현이라 생각한다.
둘째로, 지식은 사물의 겉모습을 잘 파악하도록 되어 있다.
어떤 사람을 보면서도 예쁘다, 밉다, 머리 모양이 아름답다,
그렇지 못하다 하고 표면만 본다. 그런데 예쁘다, 밉다 하는 것은
‘나다’ 하는 생각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사람 자체에 본래 예쁘고 미운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지식은 ‘나다″ 하는 색안경을 끼고 무엇을 아는 것으로서
겉모습을 보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는 것이다.
그에 비해서 지혜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앎이다.
인간의 경우에 있어서도 표면이 아닌 사람의 바탕을 꿰뚫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차별상을 뛰어넘어 여여한 부처의 성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하면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지식인도 그런 차별세계에 사는 사람에 불과하다.
불교에서는 지식인이 아니라 지혜인을 추구한다.
지혜인이 되어야만 사물의 실다운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지식은 무엇을 자꾸 쌓아 가는 것이다.
그래서 지식은 많을수록 보따리가 무거워진다.
그런데 지혜는 오히려 비우고 덜어버리는 것이다.
마음이 텅 빌 때 존재의 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정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인 마음, 청정한 마음이 됐을 때
지혜의 광명이 밝아져 존재의 실상을 환히 볼 수 있다.
넷째로, 지식은 알기는 해도 실천이 뒤따르기 힘든 앎이다.
따라서 지식은 아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하기 어렵다.
이것은 피상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 라고 물었을 때,
사랑의 실천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아는 것을 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
지식 차원의 앎은 사랑의 실천이 좋다는 것을 알려줄 수 있어도
그것을 실제로 행동할 수 있는 앎이 되지는 못한다.
이에 비해 지혜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
아는 것과 사는 것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앎이다.
지혜는 존재의 원천에서 폭발하는 체험적인 앎으로서 마치 대혁명과 같다.
비록 한 순간의 체험이지만 나의 온 삶이 전환되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지혜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면 지혜를 얻은 사람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지혜는 존재의 실상을 아는 깨침과 다르지 않다.
깨침은 나와 남을 가르고 있는 벽이 깨지는 체험이다.
그것은 ‘하나’인 상태에서 나오는 지혜의 샘물이다.
지혜와 깨침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지혜가 밝아졌을 때, 나와 남, 나와 다른 생명,
나와 우주가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있다는 존재의 실상을 알 수 있다.
그런 하나인 세계에서 나오는 삶이
일체의 모든 생명과 나를 하나로 보는 동체자비의 삶이다.
마치 손바닥의 앞뒤처럼 분리될 수 없는 하나가 지혜와 자비이다.
따라서 일체의 모든 생명을 하나로 볼 때 지혜가 밝아지며,
이런 지혜야말로 육바라밀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지혜는 육바라밀의 눈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교육도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증진시키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지나치게 지식 위주의 교육이 되다 보면,
아는 것은 많아도 사는 모습이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인은 많은데 세상은 더 혼탁해지고 살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우리 교육이 지식 위주의 교육,
직장을 얻기 위한 예비교육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사람되는 공부’가 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알고 있는 만큼 행할 수 있는 인간을 기르기 위해서는,
지식이 아니라 지혜를 증진시키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필자는 학생들을 대학생이라 하지 않고 대학인(大學人)이라고 부른다.
학생이란 말은 왠지 지식만 쌓고 많이 알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를 지닌 것 같아서
학생 대신 학인이라고 부른다. 학인이란 배우는 사람이다.
대학인은 단순히 대학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큰 학인을 가리킨다.
즉 소학인, 중학인이 아니라 ‘크게 배우는 사람’이란 뜻으로 대학인이다.
그러한 대학인은 삶의 기술만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문제삼고 풍요롭게 가꾸려는 사람이다.
또 대학인은 지식만이 아니라 지혜를 증진해 가는 학인이며
아는 것을 사는 것으로 실천하고 일치시키는 공부를 해 가는 사람이다.
부처님 말씀을 공부해 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큰 학인이다.
불교의 모든 것이 이 지혜를 얻는 일이기 때문이다.
[출처] 정진, 선정, 지혜의 실천|작성자 임기영불교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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