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따와나 일묵스님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거머쥐기 위한 것이 아니다-제따와나 일묵스님(4/4)

수선님 2020. 2. 23. 13:15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거머쥐기 위한 것이 아니다(1/4)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거머쥐기 위한 것이 아니다(2/4)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거머쥐기 위한 것이 아니다.(3/4)

우리가 법을 배우는 목적은 무엇을 집착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해 배우는 것인데

이게 잘못하면 여러분들 이런 교학이나 이런 것을 굉장히 논리적으로 만들어놓은 이런 것들이 일종의 아비담마. 교학 중에서도 최첨단의 아비담마 이런 것들이 있는데요. 그거 자체가 우리 번뇌를 버리는데 활용한다면 그건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근데 이게 자칫 잘못하면 그것의 교리 자체에 집착을 해가지고 이 교리가 맞고 다른 것은 틀렸다. 이 교리 외엔 다른 것은 없다 이렇게 될 수도 있다 이거예요.

예를 들면 아비담마란게 두 개가 큰, 예전에 부파불교 시대에서 그 부파불교가 자기의 여러부파가 나눠지면서 자기 부파 이론이 더 우수하고 더 정확히 이해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게 아비담마인데, 그런 아비담마 중에서도 부파들이 있다가 큰 세력이 있는건 남아 있고 세력이 약한건 다 사라졌단 말이예요. 그 중에 현재 남아 있는 아비담마 중 크게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상좌부 아비담마, 요즘 우리 나라에서 각묵스님과 대림스님이 번역하신 아비담마길라잡이 그건 상좌부 아비담마입니다. 또 하나가 아비담마구사론이란 것이 있어요. 이건 설일체유부의 아비담마 교리를 바탕으로 해서 약간 경양부 입장에서 정리했다고 하죠. 이게 되게 유명한 거고, 또 하나 보탠다면 대승으로 가서 유식에서 한 법을 정리한 게 있어요.

근데 보면 상좌부아비담마에선 사위-네 가지 카테고리를 가지고 72가지 법으로 나눠 놨습니다. 근데 설일체유부에선 5가지 카테고리로 75가지 법을 만들었어요. 근데 또 유식으로 가면 5가지 카테고리로 100가지 법으로 나눕니다. 그러면 예를 들면 상좌부 입장에서 보면 다른 것은 틀린 거잖아요. 법을 나누는 자체가. 다른 부파에서 보면 다른게 틀린 거예요. 그럼 어떤게 진리라고 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진리는 하나라 그랬거든요.

하나이지 둘은 아니라 그랬어요. 그럼 이걸 진리의 입장에서 바라봤을 땐 이건 맞고 이건 틀렸다는 거밖에 안되잖아요. 그러나 이걸 단순히 진리라는 의미보다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 법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 나름대로 법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바라보면 이건 건너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걸 통해서 만약에 내 집착을 버리는데 도움된다면 그걸로 족한 거잖아요.

법의 분류라는건 사실 진리의 입장에서 말할 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다. 이건 변함 없는 진리입니다. 어느 그거에서도 말할 수 없고 조건 따라 생겼다는 것. 우리가 현상계를, 아비담마라는 법을 분류하는 작업은 관점에 따라 되게 다를 수 있거든요. 분류 작업은. 어떤 관점에서 분류하냐에 따라 법을 요렇게도 분류할 수 있고, 스무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부처님께선 이걸 너무 여러가지로 분류하지 않고 딱 다섯 가지로 분류했어요.

오온.

또는 육처.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정도까지만 분류했지 너무 세세하겐 분류안했죠. 그래서 어쨌든 이런 이론이나 이런 것들은 하나의 법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그거에 도움을 주는 요소로만 이해해야지 그 자체가 진리다! 이것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라고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린 그런걸 비난하고자 하는게 아니라 우리가 법을 대하는 태도는 이 법이 우리가 괴로움을 소멸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 법을 건너가기 위한 그런거에 포커스가 맞춰져야지 이 법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이런거에 너무 초점이 맞춰지다보면 그건 원래 부처님이 말씀하신 뜻에 좀 어긋난단 말이예요.

부처님께서 원래 신사빠숲(?)이란 경에 보면 그런 말씀 하시거든요. 신사빠숲이 엄청 큰 숲인데 거기서 나뭇잎을 한줌 쥐어갖고 하시는 말씀이 이 손에 있는 것과 숲에 있는건 비교가 안되잖아요? 내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너희들에게 설한건 이정도밖에 안된다는 거예요. 당신이 아는건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왜 그것만 설했느냐.

다른 것들은 괴로움을 소멸하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 이거예요. 열반에 이르는데 도움이 안되고. 괴로움의 소멸에 도움도 안되고. 염오로 이끌어내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단지 지식의 향연, 하나의 유희, 지식의 유희로 빠질 위험이 있고 단지 괴로움을 건너기 위해선 내가 너희들에게 설한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게 제가 말씀드린 뭐가 우리가 계발해야 될 법이고 뭐가 버려야될 법인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건 무상하고 괴로움이 뭔지, 이 세상은 본질적으로 형성된 건 괴로움이란 사실, 본질적으로 벗어나는게 열반이란 이게 사성제잖아요. 그런 사성제의 내용이나 연기 정도를 그걸 이해하는데 필요한 정도면 충분하다. 그걸 갖고 건너가는데 노력해야지, 실제 뗏목을 타고 건너가면서 얻어지는 것과 실제 뗏목을 갖고 분석만 하고 있는건 되게 다릅니다. 거기서 배워지는거 자체가 틀려요.

실전 경험과 이론적인건 다르단 말이예요.

그런걸 부처님께서도 이 때 당시에 그때도 여러 외도들의 가르침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거에 대해서 다른 수행자들이 찾아와 질문했을 때 그런 거 자체에 집착하는 자체가 공부가 덜된거다. 그런거에 대해 좋아버리는게 진정한 열반이다. 법은 건너가기 위한 것이지 집착하기 위한 게 아니다. 거머쥐기 위한 것이 아니가. 이걸 잘 이해하시면 좋을 거 같아요.

깨달음을 불교수행에서 해탈한 성자는 어떤 모습이냐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연잎이나 연꽃 위에 물방울이 묻지 않는 것처럼 성자는 본것이나 들은 것이나 감지한 것 가운데 어떤 것에도 더럽혀지지 않는다.

우리가 연잎에 물을 떨어뜨리면 물이 미끄러지지 물이 묻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견문각지를 통해 세상을 알아나가되 그 알아나가는 어떤 것이라도 불교에서 집착하지 않는거-그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열반이죠.

우리가 법을 공부하고 부처님의 연기라든가 사성제 이런걸 배워서 배우는 목적은 적어도 부처님이 말씀하신 목적은 뭐란 거예요? 이 이론을 가지고 언어적 유희를 하거나 이론적으로 파거나 이런게 아니라 이걸 통해서 우리 괴로움-탐욕을 버리고 성냄을 버리고 어리석음을 버리는데 활용되는 것은 중요하다. 그건 바른 견해가 있어야 합니다. 바른 방법으로 노력해야 얻어지겠죠. 근데 이것을 노력하는, 실제로 버리는쪽보다는 이 안 것에 대해 안 것을 갖고 노는거죠. 안 것에 집착하고 그걸 갖고 견해를 세우고 남에게 다투고. 나를 내세우고 남과 싸우고 이런 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방향이 아니다는 거죠.

비록 바른 견해라 할지라도 그 바른 견해를 따라서 살아가면 되지 남하고 다툴 일은 아니다 그거예요. 그쵸?

우리가 안 것대로 살아가면 되잖아요 그쵸?

버리라 그럼 버리면 되고, 계발하라 그럼 계발하는 쪽으로 감 되는 거예요. 이걸 갖고 남들과 다투는건 바람직하지 않은거다. 이게 사실은 부처님께서 명쾌하게 말씀하셨는데요,

이 세상에 알아진 견문각지에 대해 물들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열반의 상태란 거죠.

우리가 수행을 해 나가면서 내가 아는 것에 대해 내세우고 나를 집착하면 아 내가 아직 수행을 잘못하고 있구나 여기 또 뭐가 달라붙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놓는 방향으로 수행해야 됩니다. 그런 방향성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죠. 자기가 수행을 통해서 알아지는 것도 실제 수행을 통해 알아지는 것도 천차만별이거든요. 그런 정보가 약한 사람들은 조금 그런 경험을 하면 그걸 과대하게 생각하면서 그것이 전부인거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수행은 절대 경계를 통해 청정이 얻어지는게 아니라는 거죠. 우리 마음의 애착을 버려 나가는 거지, 여러분들이 아주 신비한 경계-예를 들어 대상을 섬세하게 본다고 우리 경계가 버려지는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마음에 있는 번뇌를 섬세하게 보는게 훨씬 어려워요. 그래서 그거에 대한 이해를 계속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의 모습은 어떠냐 이거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제가 견문각지에 대해서 우리가 견문각지를 통해 앎도 생기고 견해도 생기고 자만도 생기고 집착도 할 수 있지만 우리가 이런 거에 대한 이해를 하고 이 견문각지를 통해 청정이 얻어지는건 아니다. 그래서 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면 견문각지를 통해서 바른 견해를 배우는건 사실이예요. 그치만 이 바른 견해를 통해서 이걸 가지고 여기에 빠지지 말고 이걸 통해서 어떤 우리 마음에 있는 집착들, 앎에 대한 집착들을 버려 나가면 나중에 어떤 상태가 되냐면,

단지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고, 감지할 땐 감지만 하고, 알 땐 알기만 하지 여기에 대한 집착이 달라붙지 않는, 어떤 것도 달라붙지 않는 그걸 깨달음의 경지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이걸 말룽까부따 경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말룽까부따여, 그대로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알아야 할 법들에 대해서 볼 때는 단지 봄만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 있을 것이니라.

앎만 있을 것이면 그대에게 그것에 의한 것, 번뇌에 의한 그런 것은 없다 그런 말이거든요.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수행이 많이 된 사람들, 수행을 잘한다는 건 어떤 많은 경계를 경험해. 뭔가 하면 몸이 나라진다 쪼개지고 모 아주 작은 입자로 보인다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서 내 맘에 있는 갈애들이 얼마나 버려졌느냐 이게 더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런 경험이 중요한게 아니고. 그런 경계는 하나의 경계일 뿐이지 그런 경계를 경험했다고 해서 어떤 사람 뭐 걸어가는게 탁탁탁탁 떨어져서 보인다 그래서 내가 생멸의 지혜 도달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건 하나의 경계에 빠진 겁니다.

부처님께선 선정을 경험했다 해서 그걸 깨달음이라 하지도 않았거든요.

그런 경계를 경험하는 견문각지하는 마음에 갈애가 있냐 없냐 어리석음이 있냐 없냐 이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포인트가.

그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되면 다툼이 없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여러분들 깔라마경이라고 아시잖아요. 깔라마경에 보면 그런게 나옵니다. 이게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내용하고 비슷한데,

부처님께서 깔라마지방에 간거야. 거기 가니까 현대 우리가 하는거와 비슷해요. 어떤 스승이 와선 자기 가르침만 맞고 다른 건 다 틀렸다고 말한다는 거예요. 또 비라는 스승이 오면 자기 가르침이 최고고 다른건 다 틀렸다고 이야기한다는 거죠. C라는 사람도. 그래서 부처님이 오셨을 때 묻습니다. 사람들이 올때마다 이러니 우리 헷갈려서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렇게 물어요.

부처님께서 또 내 말이 옳고 다른건 틀렸다 말했다면 부처님도 비슷한 류가 됐을 겁니다. 근데 부처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신게 탐욕이 위험한 줄 아느냐, 압니다. 그럼 네가 하는 그것이 탐욕이 버려지만 행해라, 버려지지 않음 행하지 말라. 이런 식으로 오히려 지금 이야기한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네가 하는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간에 탐욕을 버리는 쪽이면 행해라 그러나 탐욕이 버려지지 않고 오히려 키워지는 쪽이면 하지 말라. 이것이 근본적인 방향성이라 이거죠.

근데 우리가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뗏목이 꼭 한가지만 있을 필욘 없잖아요 그쵸? 한가지 뗏목만 있다고 말할 순 없단 말예요. 부처님 당시에도 보면 부처님의 수많은 대제자들도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는 방식은 다 약간씩 다릅니다. 똑같지가 않아요. 근데 한 가지 방식만 옳고 다른 건 다 틀렸다 그렇게 말할 순 없잖아요 그쵸? 그냥 단지 여러분들이 여러분과 인연이 더 잘 맞는. 저렇게 하면 나와 잘 맞고 저렇게 하면 좀 더 효과적으로 번뇌를 버릴 수 있겠다 하는 그런걸 선택해서 수행하는 거지 그렇다고 이것만 맞고 다른건 틀렸다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쵸?

그런 것은 오히려 자만만 키운단 말이예요. 잘못하면 이것만이 유일한 길이고 다른건 다 틀렸다- 유일한 길은 팔정도만 유일한 길입니다.

팔정도만 유일한 길이예요.

수행방법이 유일한 길이라 말할 순 없어요. 우리가 가야될 곳은 견문각지한 어떤 것이라도 그걸 놓는게 중요한 거지 그것에 대해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하고 이런 것들을 갖고 수행을 이야기해선 안된다. 이게 가장 오래된 숫타니파타란 경전에서 이게 아마 그때 당시에 외도들 중에서 깨달은 분이 나셨다 하니까 부처님께 찾아와서 어떻게 하면 열반에 이를 수 있나를 묻는 이게 피안품이거든요. 열몇명의 바라문들이 와서 부처님께 묻고 답한걸 모아놓은게 피안품이예요. 거기서 나오는 내용들을 제가 중요한 것만 몇개 추려서 말씀드렸는데 여기 핵심은 그겁니다.

이 법이란 것이 단순히 법 자체를 지식을 쌓는 그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이 법을 통해 뭘 하는게 중요하단 거예요? 집착을 버리는 쪽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거죠. 이 자체에 집착하지 말고.

이 말은 한마디로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아까 말 한 그것이 한마디로 요약이 되는게,

법은 건너기 위한 것이지 거머쥐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법을 배우는 목적 자체가 탐진치를 버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 관점으로 법을 공부할 때도 내가 이걸 공부하면서 어떻게 내 번뇌를 버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번뇌가 버려질 것인가 하는 거기에 몰두해야 하는 거지 거기에 포커스를 맞춰야지 너무 이론 자체에 몰두해선 안된다 이런 이야기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수행의 방향성을 바로잡는데 도움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