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그림자
*해진 산에 그림자가 생겨나듯 악행의 결과도 나타난다
"불에 타는 법과 불에 타지 않는 법이 있다.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지금 너희들을 위해 설명해주리라. 어떤 것이 불에 타는 법인가? 만일 어떤 남자나 여자가 계(戒)를 범하고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을 행하여, 몸으로 악행을 짓고 입과 뜻으로 악행을 지으면, 그는 뒷날 질병(疾病)으로 고통을 당하면서 자리에 누워 온갖 쓰라린 고초를 받을 것이니, 그 때에는 전에 행했던 모든 악을 다 기억하게 될 것이다.
비유하면 큰 산에 해가 지고 나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처럼, 이와 같이 그 중생이 전에 행했던 악, 즉 몸과 입과 뜻이 지은 업(業)의 온갖 악하고 착하지 않은 법이, 임종(臨終)할 무렵에는 모두 나타나나니, 그때서야 비로소 마음으로 후회하게 될 것이다. 슬프고 애달픈 일이다. 일찍이 착한 일을 닦지 않고 오직 온갖 악행만을 일삼다가, 나쁜 세계에 떨어져 온갖 고통을 받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기억하고는 마음이 불타고 마음으로 후회하게 된다. 마음으로 후회하고 나면 착한 마음을 얻지 못하고, 목숨을 마친 뒤에는 저승에서도 좋지 않은 마음이 계속해 생긴다. 이것을 이름 하여 불에 타는 법이라고 하느니라. 잡아함47
*최후의 순간에 남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업이다
그 때 바사닉왕은 그를 생각해 슬피 울고 옷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게송으로 말하였다.재물과 또 순금 보배와 코끼리와 말과 장신구들
종들과 여러 사환 아이와 많은 논밭과 또 그 집들
이런 것 일체를 모두 다 버리고 오직 벗은 혼만이 홀로 갔네.
그 복의 운수가 이미 다하여 사람의 몸을 영원히 버렸네.
이제 그에게 무엇이 있으며 그는 무엇을 가지고 갔는가?
그 어떤 일이라 하여 버리지 않으리 마치 형체 따르는 그림자 같은 것을.
그 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대답하셨다.
오직 그 죄와 복의 업만 있나니 만일 사람이 그런 것을 지으면
그야말로 그의 소유이거니 그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면서
나든지 죽든지 일찍이 버리지 못함이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 같다네.
마치 어떤 사람이 적은 양식 가지고 먼 길을 떠나면 고난을 당하듯이
그 공덕을 닦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나쁜 세계에서 괴로움을 겪으리.
마치 어떤 사람이 양식이 풍족하면 편안하게 먼 길을 갈 수 있듯이
순박하고 후하게 덕을 닦으면 좋은 세계에서 오래도록 즐거움 누리리.
마치 어떤 사람이 먼 길을 떠났다가 오랜만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면
그의 친척들과 친한 벗들이 반기고 기뻐하며 모여들 듯이
공덕을 잘 닦은 사람은 여기서 죽어 저승에 날 때
그의 여러 친척과 그 권속들이 그걸 보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리.
그러므로 마땅히 복을 닦아서 오랫동안 쌓고 모으면
그 복과 덕이 능히 그 사람 위해 다른 세상의 즐거움 마련하리라.
복과 덕은 하늘도 찬탄하는 것 바른 행을 평등하게 닦기 때문이니
현세의 사람들도 헐뜯지 않고 죽어서는 천상에 태어나리라.
잡아함46
*게송 2: 마음이 모든 현상에 앞에 가고, (모든 현상은) 마음이 으뜸이고 마음이 지어낸다.
깨끗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행복이 그를 따른다, 그림자가 그를 떠나지 않듯이.
(Manopubban.gama- dhamma- | manoset.t.ha- manomaya- | Manasa- ce pasannena | bhasati va- karoti va- | Tato nam. sukham anveti | cha-ya- va anapa-yinI-.)
이 두 개의 게송의 가르침은 마음에서 모든 느낌과 말과 행동, 선과 악이 나오기 때문에 마음의 중요성을 말한다. 자신이 경험하는 모든 현상은 바로 마음에서 나온다. 사람은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말하고 행동한다. 그런데 그 결과는 각각 다르다.
마지막 구절은 행동의 결과를 말한다. 악행은 악한 결과, 악업을, 선행은 선한 결과, 선업을 가져온다. 이것이 불교의 중요한 교리인 업 사상과 인과응보의 가르침이다. 법구경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였다. 용모 단정하게 생긴 실비리라는 사내가 부처님께 절하고 여쭈었다. “천상인이나 이 세상 사람들이나 먹을 것을 보고는 모두 기뻐하나니, 과연 어느 세상에 먹을 것으로 베푸는 공덕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은혜를 아는 깨끗한 믿음으로 남에게 베풀면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그가 있는 곳 어디라도 그림자처럼 복된 갚음이 따르나니 인색한 마음 버리고 조건없는 깨끗한 베품을 실천하라. 이 세상에서나 저 세상에서나 기쁨은 항상 거기 있느니라.” 〈별역잡아함경〉 제8권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고 메아리가 소리에 응답하듯
대체로 선이고 악이고 이미 베풀었으면 화나 복은 마치 그림자가 형상에 매인 것과 같으며, 악이 익어서 죄를 이루는 것은 메아리가 소리에 응함과 같으니, 악을 행하고 그 재앙을 없애고자 하는 것은 마치 씨를 심어놓고 나지 않게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니라. 보살이 부처님의 청정한 계를 받으면 차라리 눈을 뽑히고 죽을지언정 음란을 범하고 살아서 안 되느니라.육도집경
*달그림자를 잡아서 하늘의 보배를 구하려는 것
영화와 부귀가 허깨비와 같으니 누가 얻어서 길게 누릴 것인가. 몸은 접시 배인데 정신을 그곳에 실었으니 마치 달그림자를 잡아서 하늘의 보배를 구하려는 것과 같은지라. 마음만 수고롭고 몸만 고달플 뿐, 내게 무슨 유익함이 있으랴. 꿈과 허깨비는 다 공한 것이라. 하늘의 신도 세상의 영혼도 그 결말이 이와 같도다. 육도집경
*보시를 베푼 공덕은 그림자처럼 따르리라
만약 옷이나 밥이나 혹은 좌구로써 수계한 사람에게 베푼다면 커다란 보답을 얻으리라. 이 덕은 바로 진의 동반자여서 도처에서 사람들이 그림자처럼 따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선근을 심어 후세의 양식으로 함이 좋다. 덕을 갖추면 사람은 안락함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함 반니원경
*그러므로 마음에 물들어 있는 미한 눈을 돌이킬 수 있다면 거기서 분명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온갖 것이 내 마음의 그림자인 것을 알아서 그림자에 속지 않고 그림자에 빠져 들지 않도록 한다면 깨달음을 얻는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깨달음이란 이 미경계를 만들어 내는 의식을 깨달음의 의식으로 바꾸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능가경)
*“我亦頂戴觀音大聖, 十願六向, 千手千眼, 大慈大悲, 悉皆同等, 捨身受身, 此界他方, 隨所住處, 如影隨形, 恒聞說法, 助揚眞化.”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부처님을 정대함과 같이/ 제자 역시 관세음보살님을 정대하여/ 십원육향, 천수천안과 대자대비는 관세음보살님과 같아지며/ 몸을 버리는 이 세상과 새 몸 얻는 저 세상에서/ 머무는 곳곳마다 그림자가 물체를 따르듯이/ 언제나 설법하심을 듣고 교화를 돕겠습니다.” 의상 백화도량발원문
*不壞者 諸法緣集 起無所從 不異眞如 故不可壞 如鏡中影 以因鏡故 不可壞也.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법은 인연이 모여 일어난 것으로 자취가 없으니 진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다. 이는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가 거울로 인하여 생겨났기 때문에 그 그림자를 파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명추회요
*問法唯心說者 云何敎立五時 聽分四衆. 答 諸佛無有色聲功德 唯有如如及如如智獨存. 凡有見聞 皆是衆生自心影像 則說唯心說 聽唯心聽. 離心之外 何處有法. 如思益經 云. 梵天言 何故說 不聽法者 乃爲聽經. 文殊言 眼耳鼻舌身意不漏 是聽法也. 所以者何 於內六入 不漏色聲香味觸法 乃爲聽經.
문: ‘법은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설하는 사람이 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다섯 시기로 나누고 법을 듣는 대중을 넷으로 분리합니까?
답: 모든 부처님은 색과 소리로 드러나는 공덕이 없이 오직 ‘여여(如如)’와 ‘여여지(如如智)’만 있을 뿐이다. 무릇 보고 들음은 다 중생의 마음에서 나타난 그림자이니, 곧 설하는 것도 오직 마음이 설할 뿐이고 듣는 것도 오직 마음이 들을 뿐이기에 마음을 떠나 어떤 곳에 법이 있겠느냐. 이는 ‘사익경’에서 말한 것과 같다.
범천: 무슨 까닭으로 ‘법을 듣지 않는 것’이 ‘경을 듣는 것’이라고 하십니까?
문수: 눈·귀·코·혀·몸·의식에서 ‘시비분별하지 않는 것’이 ‘법을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눈·귀·코·혀·몸·의식이 색깔·소리·냄새·맛·느낌·경계에 집착하지 않아야 ‘경을 듣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명추회요
*乃至 梵天問得忍菩薩 汝等 豈不聽是經耶. 答 如我等聽 以不聽爲聽. 古德云 如來演出 八辯洪音 聞者 託起自心所現. 如依狀貌 變起毫端 本質已無 影像如在. 群賢結集 自隨見聞 依所聞見 結集自語. 良以 離自心原 無有外境 離境亦無內心可得. 諸傳法者 非授與他 但爲勝緣 令自得法. 自解未起 無以悟他. 自解不從他來 他解寧非自起.
범천이 득인 보살에게 질문하였다.
범천: 그대들은 어찌 이 경을 듣지 않습니까?
득인: 우리들이 듣는 것은 ‘분별해서 듣지 않음’을 ‘들음’으로 삼기 때문입니다.
옛 스님이 “여래께서 온갖 가르침을 거침없이 설파해도 듣는 사람은 자기 생각대로 듣는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모습에 의지하여 붓끝이 변한 것처럼 본질이 없어졌는데도 그림자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많은 현자들이 글을 쓴 것은, 자신이 보고 들은 것에 따라 그것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말을 써놓은 것이니, 참으로 자기 마음의 근원을 떠나 따로 바깥 경계가 없고, 바깥 경계를 떠나 또한 얻을 수 있는 마음도 없다. 법을 전하는 모든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법을 주는 것이 아니니, 다만 수승한 인연이 되어 스스로 법을 얻도록 할 뿐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깨우칠 수 없다. 자기의 앎이 다른 데서 온 것이 아닌데, 다른 사람의 앎도 어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겠느냐. 명추회요
*是故 結集及傳授者 皆得影像 不得本質 無有自心得他境故. 是知 結集乃是自心所變之經 至傳授者 傳授自心所變之法. 得影非質 思而可知. 若能常善分別 自心所現 能知一切外性非性 此人知見 可與佛同 所說之法 與佛無異. 悟入自覺聖智樂故. 寶性論偈云
이 때문에 경을 결집하고 법을 전하는 것이 모두 그림자일 뿐 본질일 수 없으니, 자기의 마음에서 다른 경계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알아야 한다. 경의 결집도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경이며 법을 전함도 자기 마음에서 나타난 법을 전하는 것이다. 그림자를 얻는 것은 본질이 아니니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약 항상 자기 마음에 나타난 바를 잘 분별하고 온갖 바깥 성품이 참성품이 아닌 줄 알 수 있다면, 이 사람의 지견은 부처님과 같고 설한 법은 부처님과 다를 게 없으니, 스스로 성스런 지혜의 즐거움에 깨달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보성론’ 게송에서 말하였다. 명추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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