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의 번뇌
김재성/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metta4u@empal.com
I. 머리말.
II. 초기불교의 번뇌.
Ⅲ. 맺는 말.
[요약문]
고타마 붓다는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만을 가르친다고 했다. 괴로움의 구조의 해명과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론으로 제시된 가르침이 사성제이며, 12연기이다. 사성제에서는 괴로움의 원인으로 갈애[愛, taṇhā]가 제시되었고, 12연기에서는 무명, 갈애, 그리고 집착의 세 가지 번뇌가 제시되었다. 본고는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무명과 갈애를 포함하고 있는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를 고찰한다. 초기경전에서 번뇌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로는 āsava, akusala, kilesa, upakkilesa, mala, anusaya, nīvaraṇa, saṃyojana, māra(-senā), bandhana, ogha, micchatta 등이 있다. 번뇌를 의미하는 이러한 용어에는 서로 중복되는 것들이 많다. 이러한 다양한 번뇌의 종류 및 범주, 상호관계가 본론의 관건이다. 초기불교의 번뇌는 탐진치의 3 불선근(不善根) 또는 삼독(三毒)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 무지(無知) 또는 무명(無明)이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하지만 무명도 다른 번뇌(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무명의 번뇌)와 상호조건 관계에 있다. 그렇지만 탐진치 삼독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는 번뇌는 무명이며, 궁극적으로 무명이 완전히 사라질 때,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 것임을 10가지 족쇄에 대한 가르침에서 확인된다. 초기불교에서는 이러한 번뇌들을 잘 파악하고, 번뇌를 극복하는 길로 제시된 계정혜 삼학 또는 팔정도를 통해 신구의(身口意)의 세 가지 행위와 관련된 모든 번뇌를 제거할 수 있다고 한다.]
Ⅰ. 머리말
불교는 인간의 괴로움과 그 소멸에 대한 가르침이다. 붓다의 첫 번째 설법인 『전법륜경』)에서 설명한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가 바로 괴로움을 바탕으로 한 그 원인과 소멸과, 소멸에 이르는 구조를 보여주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다. 붓다는 중생들이 빠져 있는 괴로움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구들이여, 이 윤회는 그 처음을 알 수가 없다. 최초의 시간은 알려질 수 없다. 무명(無明)에 의해 덮여 있고(avijjānīvaraṇānaṃ), 갈애(渴愛)에 의해 속박되어 있는(taṇhāsaṃyojanānaṃ) 중생들은 이 생사의 세계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삶과 죽음을 되풀이한다.
무명이라는 번뇌에 덮여있고3), 갈애라는 번뇌에 의해 속박되어 있는 중생들은 괴로운 윤회의 생존을 반복하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무명과 갈애는 초기경전에서 가장대표적인 번뇌이며, 12연기의 첫 번째와 여덟 번째에 제시되는 번뇌)이다.
무명(無明)으로 한역된 avijjā(skt, avidyā)는 한정된 학문영역이나 주문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될 때의 vidyā(vijjā)의 반대말이라기보다는 앎 또는 지혜를 의미하는 jñāna(pāli. ñāṇa)의 반대말이다.5) 무지(ignorance), 근원적인 잘못 또는 환상으로 삶의 가치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초래한다. 즉,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해 모르는 것, 무지(aññāṇa)를 말한다.
무명(avijjā)에 대해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말로 이 무명은 큰 어리석음[迷妄]이다. 그것에 의해 이 긴 윤회가 나타났다. 하지만 지혜에 이른 중생은 다시 [윤회의] 생존으로 돌아오지 않는다.”6) “무명에 의해, 무지(無知)에 의해, 어리석음[미망]에의해 과보를 받는다.”7)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무지[사성제(四聖諦)에 대한 무지]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yaṃ kho bhikkhave, dukkhe aññāṇaṃ dukkhasamudaye aññāṇaṃ dukkhanirodhe aññāṇaṃ
dukkhanirodhagāminiyā paṭipadāya aññāṇaṃ ayaṃ vuccati bhikkhave avijjā.(SN II p. 4; MN I p. 54.)
무명(無明)은 또한 존재의 갈애와 관계가 깊다.
“어리석음이 가득 찼기 때문에 존재의 갈애가 가득 찬다.”9) 이 두 번뇌는 완전히 알아야 하며 끊어버려야 할 법이다. “어떤 것이 완전히 알아야 하고 끊어야 할 법인가? 어리석음과 존재의 갈망이다.”
(SN II p. 4; MN I p. 54.)
괴로움은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통칭해서 번뇌라고 한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발생, 또는 원인의 고귀한 진리(苦集聖諦)로 갈애(渴愛)가 제시된다. 갈애란 또 다른 생존을 초래하며, 쾌락과 탐욕을 동반하는, 이른바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비존재에 대한 갈애(無有愛)를 말한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갈애(kāma-taṇhā, 欲愛)는 여섯 가지감각기관(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대상에서 감각적 쾌락을 얻고자 하는 갈망을 말한다. 존재에 대한 갈애 (bhava-taṇhā, 有愛)는 주로 섬세한 물질의 세계(色界)나 물질 없는 순수한 정신적인 세계(無色界)에 대한 갈망으로 행복한 상태로 존재하고자 하는 갈망이다. 인간에게는 죽은 후에도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과 같은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상견(常見)과 관련이 있다. 비존재에 대한 갈애(vibhava-taṇhā, 無有愛)는 죽은 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단견(斷見)이라는 사견에서 나온 갈망으로, 자아와 육체를 동일시하는 잘못된 유물론에 근거하여 죽음에 의해 세상은 끝이라고 하여 괴로움에 처해 있는 자신을 비관하여 파괴하고, 영원히 죽고자 하는 갈망을 말한다.
감각적 욕망으로서의 갈애는 감각기관과 관련된 법의 계열에서 발생한다.
"갈애는 무엇에서 생겨나며,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이 세상에서 즐거운 대상, 즐길만한 대상이 있는 곳이면 그 어디에서나 이 갈애는 생겨나고 그곳에 머문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六根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생겨나고 거기에 머문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맛, 육체의 촉감, 마음의 현상들[六境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생겨나고 거기에 머문다. 그리고 각각 여섯 가지 식[六識], 여섯 가지 접촉[六觸], 여섯 가지 접촉에서 생긴 느낌[六受], 여섯가지 지각[六想], 여섯 가지 의지[六思], 여섯 가지 갈애[六愛], 여섯 가지 일으킨 생각[六尋], 여섯 가지 지속적 고찰[六伺]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생겨나고 거기에 머문다. 이것을‘괴로움의 발생’의 고귀한 진리(苦集聖諦)라고 한다.”
(DN II pp. 308-310)
갈애는 우리의 감각기관과 인식, 사고, 의지 등의 영역에서 즐거운 대상이나 즐길만한 대상이 있을 때 어디에서나 생겨나고 생겨난 곳에서 머물게 된다. 감각과 관련된 경험세계 전체가 갈애가 발생하는 터전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애는 생겨난 곳에서 소멸된다. 이 갈애는 어디에서 버려지며, 어디에서 소멸해 버리는가? 이 세상에서 즐거운 대상, 즐길만한 대상이 있는 곳에서 이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한다. 이 세상에서, 눈, 귀, 코, 혀, 몸, 마음(六根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한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맛, 육체의 촉감, 마음속의 현상들[六境: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한다. 그리고 각각 여섯 가지 식[六識], 여섯 가지 접촉[六觸], 여섯 가지 접촉에서 생긴 느낌[六受], 여섯 가지 지각[六想], 여섯 가지 의지[六思], 여섯 가지 갈애[六愛], 여섯 가지 일으킨 생각[六尋], 여섯 가지 지속적 고찰[六伺]이 즐겁고 즐길만한 대상이라면 그곳에서 이 갈애는 버려지고, 소멸한다.
간단하게 무명과 갈애에 대해서 살펴보았지만, 본고는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무명과 갈애를 포함하고 있는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를 넓은 의미에서 고찰해보려고 한다. 번뇌에 대한 선행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고, 초기경전에서 언급하고 있는 번뇌의 종류 및 범주에 대해서 정리해 본다. 그 과정에서 번뇌를 극복하는 순서나 방법들이 어느 정도 정리될 것이다.
Ⅱ. 초기불교의 번뇌
초기경전에서 번뇌를 의미하는 대표적인 용어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āsava(번뇌, 루), akusala(불선, 좋지 않음), kilesa(오염원, 번뇌), upakkilesa(오염원, 부수번뇌), mala(더러움), anusaya(잠재성향, 번뇌), nīvaraṇa(덮개) saṃyojana(족쇄), māra(-senā)(마, 마군), bandhana(속박),
ogha(폭류), micchatta(삿됨). 하지만 이러한 용어에 포섭되는 번뇌들은 서로 중복되는 것들이 많다. 각 번뇌의 의미와 내용을 초기경전에서 확인해본다.
1. āsava, 漏, 煩惱
āsava는 한역으로는 루(漏)로 번역된다. 본고에서는 번뇌로도 번역한다. 에노모토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초기경전에서 āsava는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14) ①āsava(skt. āsrava)는 자이나 경전과 같이 초기경전에서도 윤회의 홍수 가운데에서 신체로 윤회의 원인이 ‘새들어 옴 漏入’을 의미하고, 그것을 방지하는 수행을 감각의 제어를 의미하는 saṃvara라고 불린다. ②새들어 오는 것의 내용은 번뇌뿐만 아니라, 윤회의 원인인 업(業)과 수행자가 경험하는 고난도 포함한다. 이 가운데 업은 자이나교 고층경전과 공통되는 사상의 원류에 기초하고, 고난은 멀리 아타르바 베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③후대에 āsrava가 ‘번뇌의 누출(漏出)로 해석되는 배경에, 동일한 어원을 가지지만 의미가 반대인 누출의 āsrāva와 혼동되어 사용되었고, 번뇌의 작용면에서 밖을 향해 움직인다는 점에 있다. 이처럼 번뇌와 업이 밖에서 들어온다는 의미와 내부의 번뇌가 밖을 향해 흘러나간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āsava는 불교의 번뇌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스웨덴의 심리학자인 르네 요한슨도 『초기불교의 역동적 심리학』에서 루(漏)에 대하여 자세히 논의하고 있다. 요한슨에 의하면 이 용어는 번역하기 어렵지만 기본적인 의미인 유입(influx)으로 해석한다.
한편 무명에서 벗어나(avijjāvirāgā)16), 지혜(vijjā)가 생겼기 때문에 신구의가 단속된 사람에게 어떤 원인 때문에 미래에 괴로운 느낌을 가져올 번뇌(āsava)가 내생으로 흘러 갈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자이나교 신자 왑빠의 말을 붓다는 부정한다. 몸과 말과 마음의 폭력(samārambha)과 무명을 조건으로 속상함과 열병을 초래하는 번뇌(āsava)가 일어나지만 이러한 폭력과 무명을 여읜 자에게는 번뇌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새로운 업을 짓지 않고, 오래된 업을 겪는 즉시 소멸된다. 그런 사람에게 미래(내생)에 괴로운 느낌을 가져올 번뇌들이 흘러 갈 가능성은 없다고 붓다는 설명한다. 이 경전에서 번뇌는 미래(내생)로 흘러 갈 수 있음을 논하고 있다. 아직 무명이 없어지지 않은 자에게 번뇌는 미래로 흘러갈 수 있다.
경전에 다음과 같이 번뇌(āsava)를 설명하고 있다.
악기웨사나여, 어떤 자라하더라도 오염원(kilesa)을 가지고 있고, 새로운 생으로 이끌며, 두려움이 있고, 괴로움의 과보가 있으며, 미래에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있는, 번뇌(āsava)가 끊어져 있지 않은 자, 그를 나는 우매한 사람(sammūḷho)이라고 한다. 악기웨사나여, 왜냐하면, 번뇌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매한 사람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yassa kassaci aggivessana ye āsavā saṅkilesikā pono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appahīnā tam ahaṃ sammūḷho ti vadāmi. āsavānaṃ hi aggivessana appahānā
sammūḷho hoti.(MN I p. 250.6-9.)
번뇌(āsava)가 있다는 것은 오염원(kilesa)이 있는 것이며, 윤회를 하고, 두려움과 괴로움을 겪고,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 늙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19) 번뇌āsava의 소멸의 체험은 붓다의 깨달음을 얻은 과정에서 등장한다. 사문 고타마는 자신의 전생을 아는 숙명지(宿命智), 다른 중생들의 죽음과 태어남을 아는 사생지(死生智), 그리고 네 가지 고귀한 진리(사성제)를 체득함에 의해서 모든 번뇌를 끊어버린 누진지(漏盡智)를 얻어 붓다가 되었다.
누진지에서 끊어진 번뇌에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欲漏, kāmāsava), 존재의 번뇌(有漏, bhavāsava), 어리석음의 번뇌(無明漏, avijjāsava)가 있으며, 이것이 3 가지 번뇌인 삼루(三漏)이다.21) 번뇌로서의 루(漏)는 주로 3 가지로 구성되며, 『디가 니까야』의 일부 경전에서 사견의 번뇌[見漏 diṭṭhāsavā]가 추가된 사루(四漏)가 제시되기도 한다. 사견(邪見)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diṭṭhi23)가 추가되었지만, 주석서에 의하면 존재의 번뇌는 색계와 무색계의 생존에 대한 탐욕과 상견(常見:자아는 영원하다는 견해)과 단견(斷見: 자아는 죽은 뒤 완전히 소멸한다는 견해)을 동반하는 선정에 대한 욕망을 말하기 때문에, 사견의 번뇌는 존재의 번뇌에 포함된다고 한다. 따라서 루(漏)로 표현되는 번뇌는 삼루(三漏)로 대표 된다고 볼 수 있다. 세간의 정견(正見)25)에 반대되는 사견(micchādiṭṭhi)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사견이란 무엇인가? 보시되는 것은 없다. 헌공되는 것은 없다. 공양 받는 것은 없다. 선행과 악행의 업의 결실과 과보는 없다. 이 세계는 없다. 저 세계도 없다. 어머니는 없다. 아버지는 없다. 화생(化生)의 중생은 없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스스로 분명히 알고, 스스로 체험하여 말하며, 바르게 나아가고, 바르게 실천하는 사문과 바라문은 세상에 없다는 이것이 사견이다.
katamā ca bhikkhave micchādiṭṭhi. natthi dinnaṃ, natthi yiṭṭhaṃ, natthi hutaṃ, natthi ukaṭ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natthi ayaṃ loko, natthi paro loko, natthi mātā, natthi pitā, natthi sattā
opapātikā, natthi loke samaṇabrāhmaṇā sammaggatā sammāpaṭipannā ye imañ ca lokaṃ parañ ca
lokaṃ sayaṃ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pavedentīti ayaṃ bhikkhave micchādiṭṭhi.
(MN III pp. 71.27-72.3)
12지 연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괴로움의 근원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어리석음[無明]이 있는데, 어리석음은 다시 세 가지 번뇌[三漏]와 상호조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다. “번뇌[漏]가 생기므로 어리석음[無明]이 생기고, 번뇌가 소멸하므로 어리석음이 소멸한다.
“벗이여, 이 세 가지 번뇌[三漏]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欲漏, kāmāsava], 존재의 번뇌[有漏, bhavāsava], 어리석음의 번뇌[無明漏, avijjāsava]이다. 어리석음이 생기므로 번뇌가 생기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므로 번뇌가 소멸한다.”
MN I p. 54.27-28. āsavasamudayā avijjāsamudayo. āsavanirodhā avijjānirodho. ; AN III p. 414.14
avijjā bhikkhave āsavānaṃ nidānasambhavo. ; AN III p. 414.25. avijjānirodho bhikkhave
āsavanirodho. ; MN I p. 55.10-12. tayome āvuso āsavā, kāmāsavo bhavāsavo avijjāsavo.
avijjāsamudayā āsavasamudayo, avijjānirodhā āsavanirodho.
여기에서 어리석음[無明]도 번뇌의 하나인데, 3 가지 번뇌에 의해 어리석음이 생겨난다고 할 때, 원인이 되는 감각적 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어리석음의 번뇌에 의해 결과인 어리석음이 생겨나며, 원인인 어리석음에 의해 3 가지 번뇌가 생겨난다는 상호조건적인 연기(緣起)관계를 말하고 있다. 감각적 욕망의 번뇌와 존재의 번뇌가 무명과 상호조건적이라는 점은 이해하기 쉬우나, 무명의 번뇌가 무명과 상호조건적이라고 하는 점은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의식의 계기적(繼起的)인 인과관계[等無間緣]의 속성에 의해서 전 찰나의 무명이 원인이 되어 후찰나의 무명이 결과로 생겨난다고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원인으로서의 무명에 의해 결과인 무명이 지속적으로 생겨나는 순환구조라고 해석할 수 있다.
2. akusala, 不善. 온전치 않음, 해로움, 좋지 않음.
선(善, kusala)의 반대어인 불선(不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선(善)의 의미를 살펴본다. kusala는 악(惡, pāpa)의 반대어인 puñña(善行 또는 功德)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는 유명한 칠불통계게(七佛通誡偈)인 모든 악을 행하지 말라. 모든 선을 행하라.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붓다들의 가르침이다.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에서 확인할 수 있다. kusala-mūla는 善根으로 kusala-dhamma는 善法으로 번역되었다.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L. S. Cousins은 ‘Good or Skilfull - Kusala in Canon and Commentary’31)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Cousins은 기본적으로 불교의 수행(bhāvanā)과 관련해서 능숙한(skillful)이라는 의미로 kusala를 번역하고 있다. 본 논문에 의하면 kusala는 4단계로 의미가 발전했다. 1. 본래의 의미- “지적인”,“현명한”. 2.(브라흐마나 문헌에서) 마술과 희생의례를 잘 하는 것. 바라문들은 이를 위한 지혜가 필수적임. 3A. (팔리 경전에 의하면 다른 전통에서의) 명상 또는 고행 수행에 능숙한 것. 수행을 도와 주는 행위 즉 계(sīla) 등에 능숙한 것도 포함됨. 3B. 보시(dāna)와 희생제(yañña)를 하는 것에 능숙함. 불교의 윤리 용어로 해석되고, 계 등을 잘 지키는 것과 관련되었다. 4. 후대의 불교와 자이나 문헌에 의하면 온전하거나(wholesome) 좋은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로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팔리 문법서인『삿다니티』에서 다음과 같이 어원 설명이 나온다.
“앞에서 비난 받아야할 악한 법을 덜어내고, 멈추게 하기 때문에 지혜가 kusa라고 하는 것이다. 그 kusa에 의해 얻어져야 할 것, 펼쳐져야 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kusala이다.”
ṭattha kusalanti kucchitānaṃ pāpadhammānaṃ sānato tanukaraṇato ñāṇaṃ kusaṃ nāma, tena
kusena lātabbaṃ pavattetabbanti kusalaṃ.(Sadd pp. 432.4, 433.29-31)
『담마상가니』의 주석서(As, Dhs-a)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또한 [kusala라는] 말의 의미는 비난 받을 악한 법을 흔들고, 움직이고, 떨리게 하고, 부수기 때문에 쿠살라라고 한다.”
파니니 문법의 용례에 의하면 고전 산스끄리뜨에서 kuśala는 형용사로는 “능숙한skilful”(Pāṇ 2.3.40), 명사로는 “안락welfare”(Pāṇ 2.3.73)이라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선의 세 가지 뿌리인 3불선근(akusala mūla)은 탐욕[貪], 분노[瞋], 미망[痴]를 말한다.
삼불선근(三不善根)은 좋지 않음의 세 뿌리, 세 가지 좋지 않은 뿌리, 좋지 않음의 근본이 되는 탐진치(貪瞋痴)의 세 번뇌로 나쁜(bad), 악한(evil), 죄악의(sinful), 건전하지 않은(unhealthful), 불행한(unlucky)의 의미로 선(善), 불선(不善), 무기(無記)kusalaṃ, akusalaṃ, avyākataṃ, 악하고 좋지 않은 법 pāpakā akusalā dhammā, pāpakā akusalā vitakkā43)으로도 쓰인다. 명사의 의미로는 죄(sin), 악한 행위(evil deed), 악덕(demerit). 악한 행위를 버리고, 선한 행위를 닦는다등으로 쓰인다. 초기불전연구원의 대림스님, 각묵스님은 kusala를 ‘유익한’, akusala를 ‘해로운’으로 일관되게 번역한다.
kusala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에] ‘도움이 되는’, ‘이로운’, ‘유익한’, ‘온전한’이라는 의미이며, akusala는 그 반대로 [불교의 궁극적 목적인 열반에] ‘해로운’, ‘방해되는’, ‘유익하지 못한’,‘온전치 못한’이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akusalamūla는 악(sin)의 뿌리(root), 근원(principle)을 말한다.46) mūla는 원래 나아서 기르는 것(生長, rohana), 확립(patiṭṭhāna)의 의미이며,47) 근거, 이유, 원인의 의미로 사용된다.48)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있다.
벗이여, 고귀한 제자는, 온전치 못함[不善]과 온전치 못함의 뿌리[不善根]에 대해서 알고 있고, 온전함[善]과 온전함의 뿌리[善根]에 대해서 알고 있다. 벗이여,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 고귀한 제자는 바른 이해가 있는 것이며, 진리[法]에 대해서 흔들리지 않는 청정함을 갖추고 있는 것이며, 이 정법(正法)에 이른 것이다. 벗이여, 온전치 못함과 온전치 못함의 뿌리란 무엇인가? 온전함과 온전함의 뿌리란 무엇인가? 먼저 온전치 못함이란 무엇인가?
<3 가지 신체 행위[身業]>①생명을 해치는 것은 온전치 못하다. ②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 ③잘못된 성행위. <4 가지 언어 행위[口業]>④거짓말, ⑤이간시키는 말, ⑥거친 말, ⑦꾸며서 하는 말. <3가지마음의 행위[意業]>⑧탐욕, ⑨악의, ⑩잘못된 견해(micchādiṭṭhi)는 온전치 못하다. 벗이여, 이것들을 온전치 못함[不善]이라고 한다. 이 열 가지 법을 온전치 못한 행위의 길[십불선업도]이라고 한다. 벗이여, 온전치 못함의 뿌리[不善根]란 무엇인가 ? 탐욕[貪], 성냄 [瞋], 어리석음[痴]이 온전치 못함의 뿌리이다.
(「中部」9 正見經. MN I pp. 46.32-47.19. 냐나틸로카(2008) pp. 81-84. 온전함과 온전함의 뿌리는 다음과 같다. 벗이여, 온전함이란 무엇인가?<신체 행위[身業]> ①생명을 해치지 않는 것, ② 주지 않는 것을 취하지 않는 것, ③ 잘못된 성행위를 삼가는 것, <언어 행위[口業]>④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⑤이간시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⑥거친 말을 하지 않는 것, ⑦꾸며서 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마음의 행위[意業]>⑧탐욕이 없는 것, ⑨악의가 없는 것, ⑩바른 견해. 벗이여, 이것들을 온전함[善]이라고 한다. 이 열 가지 법을 온전한 행위의 길[十善業道]이라고 한다. 벗이여, 온전함의 뿌리[善根]란 무엇인가 ? 탐욕이 없음[無貪], 성냄이 없음[無瞋], 어리석음이 없음[無痴]이 온전함의 뿌리이다. katamaṃ panāvuso akusalaṃ, katamaṃ akusalamūlaṃ, katamaṃ kusalaṃ, katamaṃ kusalamūlaṃ. pāṇātipāto kho āvuso akusalaṃ. adinnādānaṃ akusalaṃ, kāmesu micchācāro akusalaṃ, musāvādo akusalaṃ, pisuṇā vācā akusalaṃ, pharusā vācā akusalaṃ, samphappalāpo akusalaṃ, abhijjhā akusalaṃ, byāpādo akusalaṃ, micchādiṭṭhi akusalaṃ. idaṃ vuccatāvuso akusalaṃ. katamañcāvuso, akusalamūlaṃ, lobho akusalamūlaṃ, doso akusalamūlaṃ, moho akusalamūlaṃ. idaṃ vuccatāvuso akusalamūlaṃ.) MN I p. 47.3-11
10가지 불선(不善)의 근원에는 3 가지 불선의 뿌리가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생명을 해치는 데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다. 탐욕을 원인으로 하는 것, 성냄을 원인으로 하는 것, 미망을 원인으로 하는 것이다.’
pāṇātipātaṃ p‘ahaṃ bhikkhave tividhaṃ vadāmi, lobhahetukam pi dosahetukam pi
mohahetukam pi.(AN V p. 261.20-21)
붓다는 탐욕과 성냄과 미망의 단절, 수많은 악하고 좋지 않은 법들[惡不善法]의 단절을 말한다고 한다. 삼독(三毒)으로도 불리는 세 가지 불선근 가운데에서도 미망의 허물이 가장 깊고 벗어나기 어렵다. 탐욕과 성냄과 미망의 차이점(viseso)과 특별한 점(adhippāyyāso) 다른 점(nānākaraṇan)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탐욕은 허물이 적지만, 더디게 벗어난다. 성냄은 허물이 크지만, 빠르게 벗어난다. 미망은 허물도 크고, 더디게 벗어난다.
ahaṃ hi sīha vinayāya dhammaṃ desemi rāgassa dosassa mohassa anekavihitānaṃ pāpakānaṃ akusalānaṃ dhammānaṃ vinayāya dhammaṃ desemi.(AN I p. 200.4-5)
앞서 살펴보았듯이 무명(avijjā)은 무지(aññāṇa)와 미망(moha)의 동의어이다. 무명과 무지와 미망의 관계에 대한 경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정말로 이 무명은 큰 미망이다. 그것에 의해 이 긴 윤회가 나타났다. 하지만 지혜에 이른 중생은 다시 [윤회의] 생존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무명에 의해, 무지(無知)에 의해, 미망에 의해 과보를 받는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발생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무지[즉,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무지]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moha는 어원적으로 헤매다(get bewildered), 정신 못 차리다. 미혹에 빠지다, 격정에 휩싸여 제 정신이 아님을 의미하는 동사muh(muyhati)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따라서 moha를 미망(迷妄)이나 어리석음으로 번역한다.
모든 불선법은 무명을 근본으로 하고 무명과 결합되어 있어서, 무명을 끊어버리면 모든 불선법도 끊어진다. 삼불선근 또는 삼독과 구성 내용이 같은 용어에 세 가지 더러움(mala), 세 가지 불(aggi)이 있다. mala는 垢, 더러움, 때를 의미한다. 세 가지 더러움(三垢)의 내용이 바로 탐욕, 성냄, 미망이다. 더러움 가운데에서 무명이 최고의 더러움이라고 하기 때문에 세 가지 불선근에서 미망 또는 무명이 가장 근원적인 번뇌라고 해도 좋다.
3. kilesa, klesa 오염원, 번뇌. upakkilesa : 오염원, 번뇌, 부수번뇌
kilesa는 더럽히다(become dirty or stained), 도덕적으로 오염시키다(become morally stained), 문제를 일으키다(troubles), 괴롭히다(afflicts), 괴로움을 느끼다(feel pain)는 의미의 동사, kilisati, kilisnāti, kilissati의 명사형이다.
upakkilesa는 upa(접두사)와 kilesa의 복합어. kilisati와 같은 의미의 동사 upakkilissati(또는 upakilissati)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초기경전에서는 kilesa와 upakkilesa는 동의어로 쓰이며, 후자가 많이 쓰이고 있다. 마음의 오염원(cittaklesa)63) 외부에서 들어온 오염원[āgantuka upakkilesa 客塵煩惱]64)등의 용법으로 사용된다.
번뇌가 외부에서 들어온 것[客塵]이라는 용어는 팔리 니까야에서는 이『앙굿따라 니까야』와『자타카』에만 나오며, 한역 아함에서는 검색되지 않는다.
『앙굿따라 니까야』에 의하면, 마음은 밝고 깨끗한데, 밖에서 들어온 오염원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법을 듣지 못한 범부는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마음의 닦음이 없다. 마음은 밝고 깨끗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밖에서 들어온 오염원에서 벗어나 있다. 그것을 법을 들은 고귀한 제자는 있는 그대로 안다. 그 때문에 법을 들은 고귀한 제자는 마음의 닦음이 있다.
마음이 밝고 깨끗하다는 점과 밖에서 들어온(āgantuka) 오염원에 의해 더렵혀져 있다는 점에 의해서 마음이 본래 청정하다는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는 다섯가지 덮개라는 오염원에 오염된 마음은 부드럽지도 않고, 다루기 부적합하고, 빛이 나지 않고, 잘 부서진다는 아래의 경전 내용을 통해서 다시 확인된다. 따라서 대승경전에 전승된 심성본정설의 근원은 『앙굿따라 니까야』에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⑴ 세 가지 불선근(不善根)인 오염원
『맛지마 니까야』에서는 탐욕, 성냄, 미망은 마음의 오염원이라고 하여(MN I p. 91.8-9. lobho cittassa upakkileso, doso cittassa upakkileso, moho cittassa upakkileso ti), 세 가지 불선근 또는 삼독(三毒)을 오염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마음을 더럽히는 오염원도 근본적으로는 삼불선근과 같은 내용임을 알 수 있다.
⑵ 오염원으로서의 덮개[蓋, nīvaraṇāna]
쇠, 구리, 주석, 납, 은이라는 불순물(오염원)이 섞여있으면 금은 부드럽지도 않고, 다루기 부적합하고, 빛이 나지 않고, 잘 부수어지며, 세공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것처럼, 마음에 다섯 가지 오염원이 있어, 그 오염원에 오염되면 마음은 부드럽지도 않고, 다루기 부적합하고, 빛이 나지 않고, 잘 부서지며, 모든 번뇌(āsava)를 소멸하기 위하여 바르게 삼매에 들지 못한다. 다섯 가지는 감각적 욕망에의 희구, 악의(惡意),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회의적인 의심이다.
(AN III p. 16.18-24 bhikkhave pañcime cittassa upakkilesā y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ṃ
cittaṃ na ceva mudu hoti na ca kammaniyaṃ na ca pabhassaraṃ pabhaṅgu ca na ca
sammāsamādhiyati āsavānaṃ khayāya. katame pañca. kāmacchando, vyāpādo,
thīnamiddhaṃ, uddhaccakukkuccaṃ vicikicchā)
앞서 머리말에서 인용한 경전에 의하면, 세상은 무명에 덮여 있다.(Sn 1039게, avijjāya nivuto loko) 즉 무명의 덮개(avijjā nīvaraṇānaṃ)에 가려져 있다. 무명의 덮개는 후에 상좌불교의 아비담마에서 다섯 가지 덮개와 함께 여섯 가지 덮개로 제시된다.
⑶ 16 가지 마음의 오염원(cittassa upakkileso)
『맛지마니까야』의 포유(布喩)경 (vatthūpamasutta)에서 16 가지의 마음의 오염원을 제시하고 있다. 그 내용은 탐욕과 잘못된 욕망 (abhijjhāvisamalobho), 악의(byāpādo), 분노(kodho), 원한(upanāho), 위선(makkho), 횡포(paḷāso), 질투(issa), 인색(macchariya), 허위(māya), 사기(sāṭheyya), 고집(thambho), 철면피(sārambho), 아만(māno), 지나친 아만(atimāno) 도취(mado), 방일(pamādo)69)이다. 탐욕과 성냄과 미망으로 분류될 수 있는 16 가지 오염원에 의해서 마음이 더렵혀진다. 마음이 이러한 오염원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으면 좋은 곳(sugati 善道, 善趣)이 예상된다. 이러한 오염원을 끊을 때, 붓다(담마, 상가)에 대한 불괴(不壞)의 淨信(aveccappasāda)을 얻게 된다. 주석문헌에 의하면 이 오염원들의 극복은 번뇌의 순서와 도(道)의 순서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각 성인의 깨달음에서 가능하다고 한다.
아라한의 도에서 끊어지는 오염원은 탐욕과 잘못된 욕망, 고집, 철면피, 아만, 지나친 아만 도취이다. 불환(不還)의 도에서 끊어지는 오염원은 악의, 분노, 원한, 방일이다. 나머지 경멸, 횡포, 질투, 인색, 허위, 사기의 여섯 가지 오염원은 예류(預流)의 도에서 끊어진다. 따라서 깨달음의 순서에 의하면, 경멸, 횡포, 질투, 인색, 허위, 사기의 여섯 가지 오염원이 예류도에서 먼저 끊어지고, 다음에 악의, 분노, 원한, 방일의 오염원이 불환의 도에서, 마지막으로 탐욕과 잘못된 욕망, 고집, 철면피, 아만, 지나친 아만, 도취는 아라한의 깨달음의 순간에 끊어진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는 위의 16가지 번뇌를 분명히 알기 위해서(abhiññāya), 완전히 알기 위해서(pariññāya),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parikkhayāya), 끊어버리기 위해서(pahānāya), 없애기 위해서(khayāya), 소멸시키기 위해서(vayāya), 벗어나기 위해서(virāgaya), 멸하기 위해서(nirodhāya), 떨어내기 위해서(cāgāya), 놓아 버리기 위해서(paṭinissaggāya),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아야 한다고 한다.
⑷ 세 범주의 오염원
먼저 거친 오염원(oḷārikā upakkilesā)에는 몸의 악행(kāyaduccarita), 말의 악행(vacīduccarita), 마음의 악행(manoduccarita)이 있다. 두 번째, 중간의 오염원(majjhimasahagatā upakkilesā)에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생각(kāmavitakko), 악의에 대한 생각(vyāpādavitakko), 해침에 대한 생각(vihiṃsāvitakko)이 있다. 섬세한 오염원(sukhumasahagatā upakkilesā)은 친족에 대한 생각(ñātivitakko), 지역에 대한 생각(janapadavitakko)77), 멸시받지 않음과 관련된 생각(anavaññattipaṭisaṃyutto vitakko)이다.
(친족에 대한 생각과 지역에 대한 생각은 분별론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거기에서 어떤 것이 친족에 대한 생각인가? 친족에 대해서 일으킨 사고, 생각, 사유, 마음기울임, 마음 쏟음, 마음의 고정, 삿된 생각이 친족에 대한 생각이다. 어떤 것이 지역에 대한 생각인가?
지역에 대해서 일으킨 사고, 생각, 사유, 마음기울임, 마음 쏟음, 마음의 고정, 삿된 생각이 친족에 대한 생각이다. Vibh. p. 356.16-22. tatthakatamo ñātivitakko ñātake ārabbha gehasito takko vitakko saṅkappo
appanā vyappanā cetaso abhiniropanā micchāsaṅkappo ayaṃ vuccati ñātivitakko tattha katamo janapadavitakko janapadaṃ ārabbha gehasito takko vitakko pe micchāsaṅkappo ayaṃ vuccati janapadavitakko. 나의 친족은 편하게 살고 있고, 성공했다(mayhaṃ ñātakā sukhajīvino sampattiyuttā)는 생각이 친족에 대한 생각이며, 우리 지역은 음식을 얻기 쉽고, 곡물이 풍부하다(amhākaṃ janapado subhikkho sundaro)고 생각하는 것이 지역에 대한 생각이라고 주석서(Vibh-a p. 490)에서 설명하고 있다. 浪花宣明(2004) p.795.)
위의 9 가지 오염원을 끊어버리면 법에 대한 생각(dhammavitakka)이 남게 된다. 법에 대한 생각은 열가지 위빠사나의 오염원에 대한 생각(dasa vipassanupakkilesa-vitakka)이다. 이처럼 주석문헌에 의하면 열 가지 위빠사나 오염원은 『앙굿따라 니까야』주석서, 『빠띠삼비다막가』와 그 주석서 그리고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十觀隨染(dasa vipassanūpakkilesā)을 말한다.
경전에서 법에 대한 생각이 오염원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자극과 노력으로 [오염원들을] 억누르거나 차단해서 [일시적으로] 얻은 마음의 상태라고 한다. 거친 오염원, 중간의 오염원, 섬세한 오염원을 누르며 경험한 법은 마음을 들뜨게 한다. 그 10가지 가운데 ①빛[光明 obhāsa],②이해력[知 ñāṇa], ③희열[喜 pīti], ④편안함[輕安 passaddhi], ⑤행복[樂 sukha], ⑥강한 신심[勝解 adhimokkha], ⑦정진[努力 paggaho], ⑧마음챙김의 현전[現起 upaṭṭhāna], ⑨평정[捨 upekkhā]까지는 좋은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마지막 ⑩이러한 경험에 대한 미세한 집착과 욕망[欲求 nikanti] 때문에 오염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안으로 확립하고 안정하고 하나에 집중하여 마음집중을 이룰 때, 그 마음집중은 평화롭고 뛰어나다. 『앙굿따라 니까야』에서 말하는 이 부분은 『빠띠삼비다막가』와 『청정도론』에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주석문헌으로 이어진 논의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수행 도중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좋은 경험에 대해서 집착하지 말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여래의 가르침인 법도 버려야 할 것인데 법 아닌 것은 말할 것이 있겠냐는 『맛지마니까야』(MN I p. 135.24-26, 뱀의 비유경(22경). kullūpamaṃ vo bhikkhave ājānantehi dhammā pi vo pahātabbā, pageva adhammā.)와 『금강경』(대정장 8, 749b10-11.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의 말씀을 확인할 수 있다.
4. anusaya86), 隨眠, 잠재성향, 잠재번뇌.
anusaya는 anuseti(skt. anu + śi)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자주쓰이지는 않지만 anuseti는 사람에 대해서 말할 때는 ‘들러붙다(to adhere)’, ‘매달리다(to cling to)’, ‘점유되어 있다(to be occupied about)’는 능동적인 의미가 있다.’ 대상(rāga, dosa 등)에 대해서 말할 때는 ‘잠재되어 있는(계속해서 다시 발생하는) [to lie dormant(continually arising again)]’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수면이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잠재된 번뇌를 말하며 3 가지 느낌과 관련된 3가지 수면인 탐진치의 수면과 7가지 수면인 감각적 욕망, 분노, 견해, 의심, 아만, 유애(有愛), 무명(無明) 등이 있다.
⑴ 세 가지 느낌[三受]과 세 가지 잠재번뇌
먼저 3 가지 느낌과 관련된 잠재번뇌를 보면, 즐거운 느낌[樂受]에는 탐욕의 잠재번뇌가 잠재되어 있고, 괴로운 느낌[苦受]에는 분노의 잠재번뇌가 잠재되어 있고, 무덤덤한 느낌[不苦不樂受]에는 무명의 잠재번뇌가 잠재되어 있다.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한 느낌은 그대로 방치하게 되면 세 가지 불선의 뿌리인 탐진치 삼독(三毒)의 번뇌로 연결된다. 이것이 느낌이 일어날 때 주의해야 하는 이유이다.
12연기에서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渴愛)가 일어난다[受緣愛]. 갈애는 갈망하는 마음이고, 갈망하는 마음은 적극적으로는 탐욕(rāga, lobha)과 관련이 있지만, 소극적으로는 부정적인 분노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바탕에는 어리석음이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느낌 다음에 갈애가 일어나는 12연기와 3 가지 느낌에 따라 3 가지 잠재번뇌가 생긴다는 위의 경전을 근거로 이러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느낌에 잠재되어 있는 세 가지 잠재번뇌는 대상을 만날 때 언제나 활성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느낌에 대한 철저한 파악을 통해 탐진치의 잠재번뇌가 활성화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⑵ 7가지 잠재번뇌
7가지 잠재번뇌는 감각적 욕망, 분노, 사견, 의심, 아만, 유애(有愛), 무명(無明)의 잠재번뇌를 말한다.90) 유애(有愛)에 색계에 대한 욕망과 무색계에 대한 욕망이 포함되어 있고, 사견(邪見)에는 유신견(有身見)과 계금취견을 연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7가지 잠재번뇌에 들뜸이 더 해지면 다음에 설명하는 10 가지 족쇄(十結)가 된다. 잠재번뇌는 언제라도 10 가지 번뇌의 형태를 띠고 나타날 수 있는 불씨와 같은 번뇌라고 할 수 있다.
5. saṃyojana 結, 족쇄
⑴ 10 결(結), 10 가지 족쇄(오하분결 + 오상분결)
열 가지 족쇄는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의 두 그룹으로 나뉜다. 5하분결(五下分結 pañcimāni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은 욕망의 세계[欲界]에 중생을 붙들어 매는 다섯 가지 번뇌로, ① 유신견(有身見) 또는 자신견(自身見) sakkāyadiṭṭhi(오온을 영원한 자아와 관련 지워 보는 견해), ② 회의적 의심 vicikicchā,(三寶에 대한 의심), ③계율이나 금지 조항에의 고집[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o, ④감각적 욕망에의 희구 kāmacchando, ⑤ 악의vyāpādo를 말한다.
5상분결(五上分結 pañcuddhambhāgiyāni saṃyojanāni)은 섬세한 물질의 세계[色界]와 물질 없는 [순수정신의] 세계[無色界]에 중생을 붙들어 매는 다섯 가지 번뇌로, ⑥색계에 대한 욕망 rūparāgo, ⑦무색계에 대한 욕망 arūparāgo, ⑧아만 māno, ⑨ 들뜸 uddhaccaṃ, ⑩ 어리석음[無明] avijjā이다.
聖人(四道四果)과 10가지 족쇄와의 관계92)는 다음과 같다.
聖人 10 가지 족쇄의 소멸
흐름에 들어선 분 預流, sotāpanno ①-③의 소멸
[욕망의 세계에] 한 번 오는 분 一來 sakadāgāmī ①-③의 소멸, ④-⑤의 약화
[욕망의 세계에] 돌아오지 않는 분 不還, anāgamī ①-⑤의 소멸
공양 받을만한 분 阿羅漢, ārahato ①-⑩의 소멸
10가지 족쇄로 다른 내용으로 구성된 예는 『대념처경 주석서에 보인다. 경전에는 ‘비구가 눈[眼; 시각기관]을 알고, 색[色; 시각 대상으로서의 모양과 색깔]을 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생겨난 (번뇌의) 족쇄[結; samyojana]를 안다.’93)고 하였고, 여기에서의 족쇄란 눈[眼]과, 색[色]을 조건으로 해서 생겨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탐착[欲貪, kāmarāga], 성냄[瞋, paṭigha], 아만심[慢, māna], 사견[見, diṭṭhi], 회의적인 의심[疑, vicikicchā], 계와 금기에 대한 집착[戒禁取, sīlabbata-parāmāsa], 존재에 대한 탐착 [有貪, bhavarāga], 질투[嫉妬, issā], 인색[吝嗇, macchariya], 어리석음[無明, avijjā]이라고 주석서에서 말하고 있다.
이 가운데 분노(paṭigha), 사견(diṭṭhi), 의심(vicikicchā), 아만(māna), 질투(issā), 인색(macchariya)은 다음에 말하는 7가지 족쇄에도 나오는 번뇌이다.
⑵ 7가지 족쇄
족쇄의 또 다른 분류는 갈애와 같은 의미의 수탐(隨貪, anunaya), 분노(paṭigha), 사견(diṭṭhi), 의심(vicikicchā), 아만(māna), 질투(issā), 인색(macchariya)의 족쇄라는 7가지가 있다. 여기에는 질투와 인색이 포함되는 것이 특색이다.
6. māra, 魔 , 魔羅
초기경전에 번뇌를 의미하는 용어로 māra가 있다. māra는 죽음의 신이기도 하며, 10 종류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10종류의 마군(魔軍 mārasenā)은 마라[魔]의 열 가지 군대로 번뇌를 마의 군대에 비유한 것이다. 이 마라의 군대는 고타마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보리수 아래에서 항복시킨 번뇌를 말한다. ①감각적 욕망; kāma, ②불쾌[憂愁]; arati, ③배고픔과 목마름[飢渴]; khuppipāsā, ④갈애(渴愛); taṇhā, ⑤혼침(昏沈)과 졸음[睡眠];thīna-middha, ⑥공포; ābhīrū, ⑦회의적 의심[疑]; vicikicchā, ⑧자신의 잘못을 감추는 것[僞善]과 고집; makkho, thambho, ⑨이익, 칭찬, 존경받음, 잘못 얻은 명성; lābho, siloko, sakkāro, micchāladdho yaso, ⑩자신에 대한 칭찬과 타인에 대한 비방 attānaṃ samukkaṃse pare avajānati. 이 가운데에는 ⑧⑨⑩은 일상생활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마음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숫타니파타』의 고주석인 「니뎃사」에서는 몸의 악행, 말의 악행, 마음의 악행, 탐욕, 성냄, 미망, 분노, 원한 ...중략... 모든 불선행(不善行, sabbākusalābhisaṃkhārā)을 마군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7. 다섯 가지 덮개[五蓋]
오개(五蓋)98)라고 하는 다섯 가지 번뇌는 오장(五障)99)이라고도 한다. 감각적 욕망에의 희구(kāmacchandanīvaraṇa), 악의(vyāpādanīvaraṇa), 혼침과 졸음thīnamiddhanīvaraṇa), 들뜸과 회한(uddhaccakukuccanīvaraṇa), 회의적인 의심(vicikicchānīvaraṇa)이다.
다섯 가지 덮개가 생기는 원인을 살펴보면,101) 감각적 욕망에의 희구는 아름다운 모습(subha-nimitta)을 원인으로 하여 생긴다. 악의는 혐오스런 모습(paṭigha-nimitta)을 원인으로 하여 생긴다. 혼침과 졸음은 지루함, 졸음, 하품, 식곤증, 정신적인 태만을 원인으로 하여 생긴다. 들뜸과 회한은 고요하지 않은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 생긴다.
다섯 가지 덮개는 『대념처경』의 법념처에서 5가지 법의 범주( (1) 다섯 가지 덮개[五蓋; 욕망,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과 우울, 회의적 의심], (2) 다섯 가지 무더기, 오온五蘊[色受想行識], (3) 12가지 감각기관과 그 대상, 12처十二處[眼耳鼻舌身意와 色聲香味觸法], (4) 일곱 가지 깨달음의 요소, 칠각지七覺支[念, 擇法, 精進, 喜, 輕安, 定, 捨], (5)네 가지 성스런 진리, 사성제四聖諦[苦集滅道]) 중에 가장 먼저 나온다. 이는 마음챙김 수행[念處修行]을 할 때 처음 부딪히는 번뇌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섯 가지 덮개는 초선에서 [일시적으로] 끊어진다. 주석문헌에서는 다섯 가지 덮개는 초선에 접근해가는 근접삼매에서도 일시적으로 끊어진다고 하여, 순수 위빠사나 수행자는 이 근접삼매를 얻어 다섯 가지 덮개를 극복하고 본격적인 위빠사나에 들어간다고 한다.
(벗들이여, 첫 번째 마음집중[初禪]에는 (좋지 않은) 다섯 가지 요소[五蓋]가 끊어지고, (좋은) 다섯 가지 요소[五禪支]가 갖추어진다. 벗들이여, 여기에 첫 번째 마음집중에 도달한 비구에게는 (1)감각적 욕망에의 희구[kāmacchanda]가 끊어진다. (2)악의[惡意, byāpāda]가 끊어진다. (3)혼침과 졸음[thīna-middha]이 끊어진다. (4)들뜨는 마음과 회한에 잠기는 마음[uddhacca- kukkucca]이 끊어진다. (5) 회의적인 의심[vicikicchā]이 끊어진다. 첫 번째 마음집중에 도달한 비구에게는 (1)향하는 생각[尋, vitakka], (2)머무는 생각[伺, vicāra], (3)희열[喜,pīti], (4)행복[樂, sukha], (5)하나의 대상에 대해 집중된 마음[心一境性,cittekaggatā]이 작용한다 「中部」 43 有明大經. MN I 294쪽.
범부(凡夫;Puthujjana)가 성취할 수 있는 경지는 장애의 일시적인 정지나 부분적인 약화 정도가 고작이다. 그것들의 최종, 완전한 제거는 성자의 단계(Ariya-magga)에 가서야 비로소 가능하다. 회한과 의심은 제1입류도(Sotāpatti-magga ; 須陀洹道)에서, 감각적 욕망과 악의는 제3불환도(Anāgāmi-magga ; 阿那含道)에서, 해태와 혼침 그리고 들뜸은 아라한도(Arahatta-magga)에서 완전히 제거된다. (냐나뽀니까 스님(1988) )
주석문헌에 보이는 다섯 가지 덮개[五蓋]에 대한 대치법은 다음과 같다.
(中部『念處經』주석; MN-a I p. 281-6 = 長部 『大念處經』주석 : DN-a III pp. 778-82. 다섯 가지 덮개와 대치법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냐나뽀니까 스님(1988) 참조.)
(1) 감각적인 욕망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부정관을 할 것. (不淨相의 획득; asubbha-nimittassa uggaho)
② 부정관에 전념할 것. (부정관 수행에의 노력; asubbha-bhāvāanuyogo)
③ 감각기관을 잘 제어할 것. (감각기관의 보호; indriyesu guttadvāratā)
④ 음식에 대해서 소중한 생각을 지니고 양을 조절할 것. (식사의 양을 알 것; bhojane mattññutā)
⑤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āṇa-mittatā)
⑥ 감각적 욕망에 대한 말을 피하고 욕망을 제어하는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āyakathā)
(2) 분노[惡意]를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자관(慈觀)을 닦을 것. (慈相의 획득; mettānimittassa uggaho)
② 자관(慈觀)에 전념 할 것. (慈觀 수행에의 노력; mettābhāvanānuyogo)
③ 업은 자신의 것임을 생각할 것. (자신이 지은 업의 자성을 관찰;kammassakatāpaccavekkhaṇā)
④ 자관의 좋은 점과 분노의 해로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할 것. (관찰을 많이 닦을 것; paṭisaṅkhānabahulīkatā)
⑤ 분노를 잘 다스리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āṇamittatā)
⑥ 자관의 이로움과 분노의 불이익에 대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sappāyakathā)
(3) 혼침과 졸음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혼침과 졸음의 원인이 과식에 있음을 알 것. (과식에 대한 相의 획득; atibhojane nimittaggāho)
② 자세를 바꿀 것. (威儀의 전환; iriyāpatha-samparivattanatā)
③ 광명상(光明想)을 닦을 것. (광명상의 사유; ālokasaññā-manasikāro)
④ 지붕이 없는 곳에서 수행할 것. (露地에서 머물 것; abbhokāsavāso)
⑤ 잠자기를 즐기지 않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āṇa-mittatā)
⑥ 수면의 불이익과 깨어 있음의 이로움에 관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āyakathā)
(4) 들뜸과 우울(회한)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울 것. (多聞할 것; bahussutatā)
②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돼는 일을 두루 물을 것. (널리 물을 것; paripucchakatā)
③ 계율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 (율에 대한 분명한 앎; vinaye pakataññutā)
④ 계를 잘 이해하고 지키는 연장자[長老]와 함께 지낼 것. (老長老를 가까이 모실 것; vuddhasevitā)
⑤ 들뜸과 우울을 잘 다스리는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āṇa- mittatā)
⑥ 들뜸과 우울의 해로움과 마음의 고요함의 이로움에 관한 적절한 말을 할 것.(적절한 말; sappāyakathā)
(5) 회의적 의심을 없애는 6 가지 방법
①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배울 것. (多聞할 것; bahussutatā)
② 불법승 삼보에 대한 의심이 있으면 질문을 하여 의심을 풀 것. (널리 물을 것; paripucchakatā)
③ 계율을 잘 이해하고 있을 것. (율에 대한 분명한 앎; vinaye pakataññutā)
④ 삼보의 진실함에 대한 믿음을 기를 것. (신심[勝解]을 많이 닦을 것; adhimokkhabahulatā)
⑤ 삼보에 대한 신심이 지극한 좋은 벗을 가까이 할 것. (선지식; kalyāṇa- mittatā)
⑥ 의심의 해로움과 의심을 없애는 일의 이로움에 대한 적적한 말을 할 것. (적절한 말; sappāyakathā)
8. 버려야 할 법으로서의 여러 가지 번뇌
초기경전 가운데 『디가니까야』의 마지막 두 경인「衆集經」 Saṅgiti-suttanta과「十上經」dasuttara-suttanta은 논서의 법의 분류의 선구적인 경전이라고 할 수 있다. 두 경전 모두 사리풋타가 법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붓다가 자신을 붓다라고 부르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나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을 분명히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 그러므로 나는 붓다이다.
abhiññeyyaṃ abhiññātaṃ, bhāvetabbañ ca bhāvitaṃ, pahātabbaṃ pahīnaṃ me
tasmā buddhosmi. Sn 558게. MN II p. 143.29-30.
이 게송에서 붓다가 끊어버려야 할 것(pahātabba)이라고 말한 것은 괴로움의 원인인 번뇌라고 할 수 있다. 초기경전에서 끊어버려야 할 것이라고 제시된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디가니까야』의「십상경」dasuttara-suttanta)에서는 다음과 같이 1법에서 10법에 이르는 총 55가지 버려야 할 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1법. 아만(我慢)(asmimāna. DN III p. 273.1)
2법. 무명(無明)과 존재에의 갈애[有愛](avijjā ca bhavataṇhā. DN III p. 274.1= AN II p. 247.8)
3법. 세 가지 갈애[三愛] : 감각적 욕망의 갈애[欲愛], 존재의 갈애[有愛], 비존재의 갈애[無有愛]
(tisso taṇhā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DN III p. 275.4-5)
4법. 네 가지 폭류[四瀑流] : 감각적 욕망, 존재, 사견, 무명.(cattāro oghā : kāmogho,
bhavogho, diṭṭhogho, avijjogho. DN III p.276.19-20.)
5법. 다섯 가지 덮개[五蓋] : 감각적 욕망에의 희구, 악의(惡意),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회의적 인 의심.(113) pañca nīvaraṇāni : kāmacchandanīvaraṇaṃ, vyāpādanīvaraṇaṃ,
thīnamiddhanīvaraṇaṃ, uddhaccakukuccanīvaraṇaṃ, vicikicchānīvaraṇaṃ. DN III p.
278.8-11)
6법. 여섯 가지 갈애[六愛] :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에 대한 갈애.(cha
taṇhākāyā : rūpataṇhā, saddataṇhā, gandhataṇhā, rasataṇhā, phoṭṭhabbataṇhā,
dhammatanhā. DN III p. 280.11-13.)
7법. 일곱 가지 잠재번뇌[隨眠] : 감각적 욕망, 혐오, 견해, 의심, 아만, 존재에 대한 욕망, 무명이라 는 잠재번뇌.(sattānusayā: kāmarāgānusayo, paṭighānusayo, diṭṭhānusayo,
vicikicchānusayo, mānānusayo, bhavarāgānusayo, avijjānusayo. DN III p. 282.16-18.)
8법. 여덟 가지 삿됨: 삿된 견해, 삿된 사유, 삿된 말, 삿된 행위, 삿된 생계, 삿된 정진, 삿된 마음챙 김, 삿된 마음집중.(aṭṭha micchattā : micchādiṭṭhi, micchāsaṃkappo, micchāvācā,
micchākammanto, micchāajīvo, micchāvāyāmo, micchāsati, micchāsamādhi. DN III
pp. 286.23-287.3.)
9법. 아홉 가지 갈애를 뿌리로 하는 법: 갈애를 조건으로 ①추구가, 추구를 조건으로 ②얻음이, 얻 음을 조건으로 ③판별이, 판별을 조건으로 ④욕망이, 욕망을 조건으로 ⑤탐착이, 탐착을 조건 으로 ⑥거머쥠이, 거머쥠을 조건으로 ⑦인색이, 인색을 조건으로 ⑧수호가, 수호를 원인으로 하여 ⑨몽둥이를 들고, 싸우고 말다툼하고, 분쟁하고, 서로 비방하고, 중상모략하고 거짓말하 는 수많은 악하고 좋지 않은 법들이 생겨난다.(nava taṇhāmūlakā dhammā : taṇhaṃ paṭicca pariyesanā, pariyesanaṃ paṭicca lābho, lābhaṃ paṭicca vinicchayo, vinicchayaṃ
paticca chandarāgo, chandarāgaṃ paṭicca ajjhosānaṃ, ajjhosānaṃ paṭicca pariggaho,
pariggahaṃ paṭicca macchariyaṃ, macchariyaṃ paṭicca ārakkho, ārakkhādhikaraṇaṃ
paṭicca daṇḍādānasatthādānakalahaviggahavivādatuvaṃtu aneke pāpakā akusalā
dhammā sambhavanti. DN III p. 288.29-8; AN IV pp.)
10법. 열 가지 삿됨: 삿된 견해, 삿된 사유, 삿된 말, 삿된 행위, 삿된 생계, 삿된 정진, 삿된 마음챙 김, 삿된 마음집중, 삿된 지혜, 삿된 해탈.(dasa micchattā : micchādiṭṭhi,
micchāsaṃkappo, micchāvācā, micchākammanto, micchāajīvo, micchāvāyāmo,
micchāsati, micchāsamādhi, micchāñāṇaṃ, micchāvimutti. DN III p. 290.24-27.)
위의 끊어버려야 할 번뇌를 정리해보면, 아만, 무명, 갈애(欲愛, 有愛, 無有愛), 사견, 감각적 욕망,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회의적인 의심, 삿됨(10가지)이다.
Ⅲ. 맺는 말
중생들은 무명이라는 근본번뇌와 갈애 또는 탐욕과 분노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다. 본고에서는 초기경전에 보이는 번뇌를 의미하는 다양한 용어를 초기경전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분류하면서 초기불교의 번뇌론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초기경전에 보이는 번뇌를 의미하는 용어 가운데 āsava(번뇌,루), akusala(불선, 좋지 않음), kilesa(오염원, 번뇌), upakkilesa(오염원, 부수번뇌), mala(더러움), anusaya(잠재성향, 번뇌), nīvaraṇa(덮개) saṃyojana(족쇄), māra(-senā)(마, 마군), bandhana(속박), ogha(폭류), micchatta(삿됨) 등의 용어를 중심으로 각각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초기불교의 번뇌는 탐진치의 3 불선근(不善根) 또는 삼독(三毒)을 근본으로 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에서 미망 또는 무명(無明)이 가장 근원적인 것임을 확인하였다. 하지만 무명도 다른 번뇌(욕망의 번뇌, 존재의 번뇌, 무명의 번뇌)와 상호조건 관계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탐진치 삼독 가운데 마지막으로 남는 번뇌는 무명이며, 궁극적으로 무명이 완전히 사라질 때, 아라한의 깨달음을 얻는 것임을 10가지 족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오염원(upallikesa)을 살펴보는 가운데 거친 것(10不善), 중간(욕망, 악의, 해침), 미세한 것(친족, 지역, 남의 이목)을 극복해야 하며, 이러한 오염원이 극복되어 경험하는 좋은 심리적 현상들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었다. 붓다가 마지막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극복한 번뇌에는 일상생활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다양한 번뇌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다섯 가지 덮개는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선정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향상시키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번뇌로 제시된 것이다. 수행과정에서 부딪혀서 겪고 넘어가야 하는 번뇌가 5 가지 덮개라고 하겠다. 잠재번뇌는 언제라도 자극이 주어지면 활성화될 수 있는 번뇌이며, 구성 내용에서 10가지 족쇄와 유사하는 점과 세 가지 느낌이 탐욕과 성냄과 미망의 삼불선근과 관련되어 있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디가 니까야』의 「十上經」에 제시된 끊어 버려야 할 법(1법에서 10법까지의 55법)을 정리해보면 아만, 무명, 갈애(欲愛, 有愛, 無有愛), 사견, 감각적 욕망,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과 회한, 회의적인 의심, (10가지의) 삿됨임을 알 수 있었다.
불교는 이러한 번뇌들을 잘 파악하고, 번뇌를 극복하는 길로 계정혜 삼학의 길을 통해 점진적으로 신구의의 세 가지 행위와 관련된 번뇌를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근본번뇌인 탐진치를 소멸시키는 것이 번뇌의 극복을 통한 열반의 성취가 될 것이다. 이렇게 초기경전에서 말하는 번뇌가 현재의 심리학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고찰을 다음 과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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