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혜『서장』의 일용선에 대한 고찰
이 논문을 전국 승가대학 학인논문 공모전에 제출함
2005년 10월 31일
운문사 승가대학 사집반 경석
1. 들어가는 말
문명과 과학의 발달이 물질적 풍요와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 전쟁과 폭행을 일삼아 자신만 잘 살기위한 이기주의가 팽배해지고 있다. 그로인한 자연의 파괴는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고, 인간 또한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서로간의 불신으로 인한 인간소외 현상, 학교와 가정의 폭력, 자살 등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다.
또한 넘쳐나는 정보로 인해 사람들은 더 이상 신에 대한 존재를 믿기보다는 이렇게 어지러운 세상에서 공허하게 사는 자신의 마음을 깨쳐 참 나를 알아 행복을 추구하기를 갈망하고 있다. 불교는 이런 현대인의 욕구를 충분히 채워 줄 수 있는 종교임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자신을 철저히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는 깨달음의 종교인 불교가 현대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알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임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소위 불자라고 하는 일반신도들 조차도 수행이란 조용하고 고요한 산속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특히 선 수행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 이로 인해 불교의 이해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더욱 커져서 자기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본고의 제목1)에서 보여주듯이 대혜선사가 『서장』에서 사대부들을 위해 일용처 즉, 가고, 머물고, 눕고, 앉고, 차 마시고, 밥 먹는 가운데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용선을 통해 일깨운 것을 볼 수가 있다.
대혜선사는 참선공부를 하는데 있어 좌복에 앉아서 하거나 조용한 곳에서 공부하는 것을 전혀 권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응병여약일 뿐,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가고 머물고 앉고 눕고 말하고 행동하는 일상의 모든 가운데서 수행하는 힘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고요한 가운데 있으면서 공부를 하지 아니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수없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선 수행은 고요히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 어느 곳이든 가리지 말고 성성하게 살아있는 자신을 관하는 것이라는 대혜선사의 선사상의 특징을 일용선이라는 단어로 정의를 내리고 일용선의 수행정신과 방법 등을 전개하고자 한다.
일용선이 나오게 된 역사적인 흐름과 『서장』에 나타난 일용선의 특징, 더 나아가 일용선이 미친 영향을 대혜선사와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대부와의 관계를 고찰해 봄으로써 현재 우리의 거울로 삼고자 한다.
2. 대혜 이전의 일용선
대혜선사 이전의 일용선을 뒷받침하는 사상을 법맥을 따라 짚어보자면 육조 혜능 까지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육조 혜능은『유마경』에 근거해 일행삼매란 일상의 행주좌와에 늘 직심을 행하여 일체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법상에 집착하고 일행삼매에 집착하여, 직심을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라고 하며, 망념을 제거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일행삼매라고 한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법은 무정물과 같아서 도리어 도를 가로막는 것이 된다. 도는 모름지기 통하여 흘러야 한다........또한 어떤 사람은 사람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라’ 고 가르치고 이것으로써 공부를 삼게 하는데, 미혹한 사람은 깨닫지 못하고 문득 거기에 집착하여 전도됨이 곧 수백 가지이니, 이렇게 도를 가르치는 것은 큰 잘못임을 알아야 한다.2)
도는 통하여 흘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고요한 곳에 앉는 것을 집착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육조 혜능은 『육조단경』에서 망념을 제거하여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선이라 하고, 앉아서 마음을 보고 깨끗함을 보되 움직이지 말고 일어나지도 않는 것이 정이라고 한 것이다. 즉, 고요히 앉아 수행하는 것이 선정이 아닌 것이다.
육조 이후 일상생활에서의 선사상은 마조의 ‘평상심시도’ 란 어구에서 엿볼 수 있다. 마조의 선에서 불심 즉, 깨달은 자의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 평상심인 것이다.『전등록』권28 ‘마조 도일(709-788)의 시중’에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오염되지 않도록 하라. 무엇을 오염이라고 하는가? 다만 생사의 마음을 가지고 조작하여 취향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오염이다. 만약 곧바로 그 도를 알고자 한다면 평상심이 바로 도인 것이다. 평상심이란 조작이 없고 시비가 없고 취사가 없고 단상이 없으며 법성도 없는 것을 말한다.… 다만 지금의 행주좌와와 환경에 순응하고 사물에 접하는 것이 모두 바로 도이다.”3)
이 설법은 마조로부터 시작되는 일용선의 기본 정신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마조는 도란 조작과 분별심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조작, 시비, 취사, 단상, 법성 등 일체의 차별적이고 분별적인 작위성이 없는 근원적인 마음이라 했고 보통의 평상심이 곧 부처라고 했다. 여기서의 평상심은 곧 자성청정심의 다른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평상시에 행동하는 모든 것이 불성의 전체 작용이기 때문에 따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마음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닦아야 한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그 자체가 벌써 조작성이 내포된 번뇌심이기 때문인 것이다.
마조이후부터의 선의 일상성은 현실 생활 속에서 전개되는데 선사상의 중국화와 그에 따른 교단의 체계인 ‘청규’를 제정한 마조의 제자 백장 회해(749-814)는 「일일불작 일일불식」을 주장해 노동과 수행을 동일하게 취급했으며, 행주좌와가 모두 선이라고 강조하고 있다.4) 이러한 사상은 바로 대혜선사의 일용선으로 이어진 것이다.
다음 임제 의현(?-866)에 의해 마조로부터의 일용선의 사상은 더욱 강조된다. 그를 대표하는 말은 바로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곳에 따라 자기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다면 어느 곳이나 진실의 세계라는 것이다. 즉, 대소변을 보고 옷을 입고 밥을 먹는 일상의 모든 일이 모두 부처의 행이라는 말이다5) 이것은 모든 권위와 형식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집착에서 벗어나 평범한 생활 불교를 추구하는 혁신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다.6) 또한 임제는 그의 어록에 가만히 앉아 참선하는 것을 비난하였다.
“어떤 눈먼 중은 배불리 밥을 먹고는 곧 좌선관행을 하며, 생각을 꼭 쥐고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며,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고 고요한 곳을 찾으나, 이것은 외도의 법이다. 조사가 말하기를, ‘그대가 만약 마음을 멈추고 고요함을 살피며, 마음을 들어서 밖으로 비추고 마음을 붙잡아 안으로 깨끗이 하며, 마음을 응결시켜 정에 든다면, 이와 같은 무리는 모두가 조작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대는 지금 이렇게 법을 듣는 사람인데, 어떻게 바로 그 사람을 닦겠으며 깨닫게 하겠으며 장엄 하겠는가? 그 사람은 닦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7)
임제는 눈앞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의 무조건적인 절대 존엄성을 강조한다. 살아 있는 인간 그 자체가 바로 참사람인 것이다. 육체 가운데 어딘가 닦을 것이 있다던가 장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가 바로 진인인 것이다.
이러한 대혜선사 이전의 일용선을 뒷받침한 사상은 대혜선사에 이르러 일용선의 구체적 수행방법이 제시됨으로써 꽃을 피우게 된다.
3. 대혜의 생애와 『서장』
1) 생애
대혜선사의 일용선 확립은 자신의 직접 체험을 바탕으로 체계화한 것이라는 것을 그의 일생을 통해 찾아 볼 수 있다. 대혜선사의(1089-1163) 전기를 전하는 기본적인 자료는 『대혜보각선사년보』8)가 있으며, 이외에도 『연등회요』제17권9)과 『가태보등록』제15권10) 등이 있다. 이에 의하면 대혜선사는 13세에 향교에 입학한 뒤 벼루를 던지고 놀다 잘못하여 스승의 모자를 맞히고 보상금 300전을 물어주는 일을 겪고 난 후 세간에 회의를 느껴 16세에 동산혜운원 혜제대사에게 출가한다. 17세에 구족계를 받고 19세부터 제방으로 행각하다가 처음에 조동종의 스님들을 뵈옵고 그 종지를 얻었으나 만족하지 않고 뒤이어 보봉의 문하에 들어가 임제종의 황용파인 잠당 무준(1061-1115)에게서 수학하게 된다. 선화6년(1124년) 대혜선사의 나이 36세때 원오는 경사 천녕사의 관리로 임명 받아 그곳에 주석하였다. 다음해 4월 대혜선사는 천영사의 회하에 들어가 원오 극근 선사의 지도를 받게 되는데 원오 밑에서 참구한지 몇 달이 경과한 무렵 설법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듣게된다.
어느 스님이 운문에게 묻기를“어느 곳이 제불의 출신처입니까?”
운문이 대답하기를 “동산수상행이다.”
라고 대답한 운문의 공안을 들어 법문하면서
원오 스님이 말하기를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만약 어느 곳이 제불의 출신처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훈풍이 남쪽에서 불어오면 전각이 서늘하게 되리라하겠다”
대혜선사는 이 말씀을 듣고 언하에 홀연히 전후제를 끊고 크게 깨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원오는 그에게 인가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후에 원오의 방에서 “유구무구가 마치 등나무가 다른 나무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고 한 고어를 참상케 했더니, 반년을 더 정진해서 대오하게 되고, 원오선사는 대혜선사를 인가하고 부촉하게 된다. 42세 때 금나라의 침략(1126)으로 시작된 전란을 피해 해혼의 운문암으로 거처 46세 때 복건의 양서로 옮기면서 묵조선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소흥7년(1137)49세 때 승상 장준의 추천으로 임안부 경산의 능인선원을 관리하면서 임재선의 선풍을 크게 중흥시켰다. 그 후 진회를 중심으로 하는 강화론자들은 시랑 장구성 등과 함께 주전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대혜선사와 대립하게 된다. 그러나 4년 후인 53세 때 금나라와 강화가 성립되자 강화론자들에 의하여 형주(호남성)로 귀양 가게 된다. 16년 만에 누명을 벗고 소흥 28년(1158) 왕명으로 임안 경산사 주지로 재임명되고, 1163년 8월9일 입적하시니 세수는 75세요, 하랍은 58세였다.
대혜선사는 한때 조동종에서 수학했으나 2년 후에 임제종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아마도 현실을 무시한 채 고요히 앉아 있는데 주력하는 조동종의 수행방법이 그와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아가 묵조선을 비판했던 것도 일상 생활하는 가운데서 수행하는 일용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신의 경험으로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서장』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2) 『서장』
『서장』은 대혜선사가 주로 사대부들에게 ‘선 공부에 관한 여러 가지 요지’를 답해준 편지글로서, 그의 제자 혜연이 기록하고, 정지거사 황문창이 중편 한 것으로, 『대혜어록』30권 가운데 25-30권에 해당된다.
예로부터 참선의 지도서이며, 선문의 요지를 간단명료하게 설명한 것으로 특히 당시의 사대부들이 묵조사선에 빠져서 선의 실천정신을 왜곡시키고, 안일하고 방종한 무사선으로 전략한 경향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일상생활 가운데 공부 짓기를 간절히 부탁한 공부 지침서라 할 수 있다. 특히 ‘충의지심’설을 통해 대혜는 보리심이 곧 충의심이며 그 이름이 다르지만 본체는 같다고 주장하였다. 일용선을 통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와 그 본질이 충의심이라는 현실적, 정치적 생활에서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세속적 가치와 동질적이라는 논리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대혜 자신은 비록 불법을 닦는 승려이지만 애군우국의 마음은 충의사대부등과 더불어 다름이 없다고 강조하고 이러한 사상은 『서장』의 곳곳에 잘 들어나 있다. 이러한 선사의 사상은 일용선이라는 특색을 지닌 수행법으로 거듭나서 자세하고 넓은 지견으로 당시의 정신적인 주축이 되었던 것이다.
4. 대혜의『서장』에 나타난 일용선
송대의 불교가 유교적 영향을 받아 현실적 경향을 반영하게 되고, 대혜 이전의 일상성을 중시하는 흐름과 연관되어 물을 긷고, 땔감을 하는 것도 모두 신통묘용이라는 가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쁠 때나 화날 때, 고요한 곳이나 시끄러운 곳, 사무보고 가사 돌보는 곳 등이 다 공부하기 좋은 곳이며 살펴 점검하는 시설인 것을 대혜는 ‘일용응연처’ 란 말로 제시하고 이러한 그의 일용선 사상을 『서장』의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증시랑에게 답한 편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다.
“평소에 마음을 아주 고요한 곳에 머물게 하는 것은 단지 시끄러운 가운데 사용하기 위할 뿐이다. 만약 시끄러운 가운데 힘을 얻지 못하면 도리어 일찍이 고요한 가운데 있어서 공부를 짓지 않음과 같다.……만약 고요한 곳으로써 옳음을 삼고, 시끄러운 곳으로써 그름을 삼을진대, 곧, 이 세간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진실한 모습을 찾음이며, 생멸을 버리고 적멸을 구함이라.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할 때에 꼭 힘을 붙일지니, 문득 시끄러운 가운데서 고요할 때의 소식을 쳐서 엎는다면, 그 힘이 능히 대로 만든 좌판과 창포로 만든 방석 위보다 천만 억 배나 더 뛰어나리니, 다만 자세히 들어봐라, 결정코 서로 잘못되지 않을 것이다.11)
당시의 사대부들이 늘 사량, 계교, 총명의식으로써 도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시끄러운 곳에 있을지라도 항상 화두를 들게 되면, 가만히 좌판과 창포로 만든 방석위에 앉아 공부하는 것 보다 천만 억 배 더 뛰어난다고 대혜는 말한다. 공부에 대한 지극한 마음만 있다면 장애 될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다.
또, 부추밀에게 답한 편지를 살펴보면,
“열반회상에 ‘광액도아가 소 잡는 칼을 놓아버리고 문득 성불했다’12)고 하니, 그가 어찌 고요한 속에서 공부를 지어왔으리요?……만약 참으로 고요함을 요할진대 모름지기 나고 죽는 마음을 깨뜨릴지니, 공부를 짓지 아니하여도 나고 죽는 마음이 부수어지면 곧 스스로 고요하게 되리라. 옛 성인께서 말씀하신바 ‘적정방편’이 바로 이를 위함이거늘, 이로부터 말세의 삿된 스승들이 옛 성인께서 방편으로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 따름이다.”13)
대혜선사는 광액도아의 성불을 인정하고 구참과 노소를 논하지 않는다 했다. 광액도아는 무수한 생명을 죽인 가장 업이 두터운 사람이었으나 열반회상에서 사리불의 법을 듣고 즉시에 깨친다. 광액도아는 고요한 데서 참선해서 깨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청정한 마음을 알아차림으로 해서 깨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선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일체 차별을 두지 않고 마음을 발하는 자는 누구든지 공부를 성취할 수 있음을 광액도아를 예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진소경에게 답한 편지에
“옛날 위부의 노화엄께서 말씀하시길 ‘불법이 일용처에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곳과, 차 마시고, 밥 먹는 곳과, 말로써 서로 문답하는 곳과, 짓는 일과 해야 할 일의 곳에 있으니 마음을 들고 생각을 움직이면 또한 도리어 옳지 못하리라’ 고 하시었으니, 그런 까닭에 바로 피하여 숨으려 하나 피할 수 없는 곳을 당하여 간절히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서 점검하려는 생각 짓기를 꺼릴지어다.”14)
평상시 생활하는 모든 경계는 피하려고 하나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고요한 곳을 찾아 공부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곧 장애임을 말씀하신다.
허사리에게 답한 편지에
“조사가 이르시되 ‘다만 마음을 두어서 분별로 헤아려 잰다면 자기 마음으로 뚜렷이 헤아린 것들이 실로 모두가 꿈이니라. 만약 마음이 적멸하여 하나라도 생각이 움직이지 않는 곳이라면 이름이 정각이다’고 하시니, 깨달음이 이미 바른 즉, 평상시 하루 종일 가운데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들으며, 향을 맡고 맛을 알며, 느낌을 깨닫고 이치를 알며,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담연하지 아니함이 없되, 또한 스스로 전도된 생각을 짓지도 아니하여 생각이 있고 생각이 없음이 모두 다 청정하리라.”15)
대혜선사는 분별로 헤아린 자기 마음 모두가 다 꿈이라 하시면서 마음의 적멸이 곧 정각이고, 깨달음은 평상시의 모든 것들이 다 담연하여 전도되지 아니하는데 있다고 정의를 내렸다.
또 유통판의 편지에
“만약에 한결같이 생각을 잊고 애써 지니기만 하고 나고 죽는 마음을 깨뜨리지 못한다면 음마가 그 틈을 얻고는 허공을 잡아서 막아 끊어 두 조각냄을 면치 못하리니, 고요함에 머물러 있을 때 한없는 즐거움을 받고 시끄러움에 머물러 있을 때 끝없는 고통을 받으리라.…하루 종일 가운데 놓아 하여금 더없이 넓게 비울지니 홀연히 옛 습관들이 별안간 일어나더라도 또한 마음을 써서 억누르려 하지 말고 다만 별안간 일어나는 곳으로 나아가 화두를 간하되 ‘개에게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조주스님이 ‘없다’라고 하면, 바로 이러할 때에 붉은 화로 위에 한 점의 눈과 같으리니, 눈으로 판단하고 손이 친숙한 것을 한번 뛰어넘어 초월해야만 바야흐로 나융이 말씀하신 흡흡16) 히 마음을 쓸 때에 흡흡히 마음 없이 씀이니, 넌지시 하는 말은 이름과 모양이 수고롭고 곧은 말은 번거롭거나 중복됨이 없음이라.”17)
하면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화두를 들게 되면 일어나는 망상을 억지로 막으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진다고 하시면서 화두는 모든 망상을 녹이는 화로와 같은 것이니 그저 화두 드는데 힘쓸지언정 고요하고 시끄러움에 연연치 말라 하신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혜선사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일용선을 너무도 간절히 주장하시면서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깨달음의 희망과 수행의 힘을 한껏 높여주어 당당한 불교인이 되게 하는데 큰 몫을 하셨다.
5. 대혜 일용선의 특징
1) 묵조선 비판
대혜선사는 『서장』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교시에서도 끊임없이 묵조선을 향한 비판을 하고 있다. 간화선과 묵조선의 차이는 단적으로 말한다면 참선하는 중에 공안 즉, 화두를 드느냐, 안 드느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굉지의『묵조명』에서 말하는 묵조란, 묵은 묵묵히 좌선하는 것이며, 조는 심성의 영묘한 깨달음의 작용을 말한다. 즉, 묵묵히 좌선하는 가운데 영묘한 마음의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혜가 가지고 있는 좌선에 대한 생각은 공부의 한 수단으로서는 가치가 있지만, 앉는 것 그 자체에 절대성이 있는 것이 아니며, 일용처에서 적극적으로 공부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므로 대혜선사는 이러한 묵조선이 못마땅했던 것이다.
송대의 조동종을 재흥시킨 사람은 단하 자순(단하자순:1088-1151)의 법을 이은 굉지와 진헐 청료(1088-1151)임이 확실하지만,『서장』에서 대혜선사가 묵조선을 비판한 대상이 누구였는지는 확실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러나 대혜선사가 묵조사선이라고 비판한 대상이 굉지선사로 알려져 있지만, 자료적 근거가 없다. 대혜선사가 공격한 묵조선의 대표자가 진헐 청료라는 사실을, 동시대의 자료로서 주자의 만년인 순희14년(1187)경의 이야기를 정가학(1152-1212)이 기록한『주자어류』제126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옛날 요노(진헐청료)는 한결 같이 사람들에게 좌선을 하도록 했다. 고노(대혜종고)는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정사론』18)을 저술하여 배척했다. 훗날 종고선사가 천동에 주석했을 때에 청료선사는 순수하게(종고선사를) 스승으로 예배하였다. 그래서 종고선사는 그를 인정하고, 입적에 즈음하여 비명을 지었다”
또『진헐청료선사어록』하권「신심명념고」의 끝에 첨가되어 있는 의원의 발문에 ‘소흥년 간에 묘희(대혜)는 동산(5조 법연선사)의 정법을 이어 묵조선을 비난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19)
또『대혜어록』13권에는
“진헐은 항상 학인들의 눈앞의 감각을 인정하고 지견을 구하며, 회해를 찾아서 쉴 때가 없음을 보며, 사람들을 각외를 향해 승당케 하고 있다20)
이렇듯 대혜선사는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안일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진헐의 묵조선을 비판한 것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 여기서『서장』을 중심으로 묵조선을 비판한 내용을 살펴보면,
“요즘 제방의 칡통 같은 무리들은 단지 방편을 붙들고 버리지 않으며, 가르침을 고정시켜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을 뿐, 많은 사람들의 눈을 어둡게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변사정설(변사정설)』을 지어 그들을 잘 인도하려고 한다. 근래에는 마법이 강하고 정법이 약하여 담연부동한 곳에 돌아가고 담연 부동한 곳에 합하도록 하라는 말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자가 수없이 많다”21)
일용선의 좌선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에 기초한 좌선이라 할 수 있다. 곧 앉아 있는 의미라기보다는 일체처에 상을 내지 않고 취사를 버리며 일체행위의 행주좌와에서 직심을 지녀 나아가는 마음의 자세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묵조선은 좌선 그 자체만을 중시해 묘오를 무시하며 수행자를 적묵의 경지로 향하게 해서 고생시키고 있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엉터리 장로들이 그대로 하여금 ‘고요히 앉아서 부처되기를 기다려라’고 하니, 어찌 허망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또 말하기를 고요한 곳에는 잃음이 없고, 시끄러운 곳에는 잃음이 있다고 하니 어찌 세간의 모습을 무너뜨리고 참된 모습을 구함이 있겠는가?”22)
대혜스님은 고요한 것으로 옳음을 삼고, 시끄러운 것으로 그름을 삼는다면 세간상을 떠나 실상을 구하는 것이니, 일상생활을 벗어나 말없고 고요한 곳을 가려서 좌선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또 류보학에게 보낸 답서에는 묵조선의 잘못된 지도법을 비판한다.
“근래 선법이나 불법이 쇠퇴하고 있다. 두찬의 장로들은 원래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업식이 망망하여, 어떤 의지처와 아무런 착실한 방편도 없이 수행자들을 받아들여, 모두들 자기처럼 캄캄한 곳에 몰아놓고 눈을 꼭 감게 하고 있다. 이를 일러 묵묵히 하여 항상 비추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충이 이러한 무리들 속에 있다는 것은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다.”23)
즉, 눈을 감고 좌선하는 것을 비판한 내용이다. 눈을 감고 참선하게 되면 눈을 감고 있는 동안에 심식이 잠시 쉬어 안정된 것 같지만, 방선하고 나면 마치 풀을 덮어 놓았던 돌을 치운 것처럼 그 풀이 다시 더 왕성하게 성장하는 것과 같이 분별심이 더 치성하다는 것을 주의시키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비판은 조태위의 답서, 부추밀의 답서, 장사인의 답서 등에서 보이는 것 이외에『서장』의 도처에 산재해 있다.
“오늘날 일종의 머리 깍은 외도가 있어 자기의 심안도 열지 못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안주한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안주하고 있다면, 천불이 중생제도를 위해 이 세상에 출현한다 하여도 안주하지 못하며 마음만 어둡게 할 따름이다. 또 중생에게 인연대로 받아들여 망정하고 묵조하여 비쳐보고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점점 미혹만이 증가하여 깨달을 시기는 없을 것이다.…그러나 나(대혜)는 이러한 무리를 언제나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의 심안도 열지 못하면서 오로지 글 속의 말만을 통하여 사람을 가르친다.”24)
여기서 대혜선사는 묵조선의 깨달음에 대한 착각을 밝히고 또 그런 깨달음을 남에게도 가르쳐 남의 눈까지도 멀게 하는데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이상으로 살펴 본 바와 같이 대혜선사는『서장』의 여러 편지에서 묵조선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묵조선 자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묵조사배들에 의해 잘못 가르쳐진 선사상과 시대에 맞지 않는 수행법이 대혜선사의 비판 대상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로써 당시의 묵조선과 대혜의 일용선의 차이는 곧, 좌선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즉, 좌선 그 자체를 목적, 내지 수단으로 간주하는가하는 수증관의 차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용선에서의 좌선은 앉아있는 의미라기보다는 일체처에 상을 내지 않고 취사를 버리며 일체행위의 행주좌와에서 직심을 지녀 나아가는 마음 자세에 중점을 두는 반면 묵조선은 묵묵히 앉아 자신의 체구불성을 자각하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25)
대혜는 이러한 묵조선 사상에 큰 회의를 느끼게 되고, 묵조선이 불교 수행의 한 맥락임에도 불구하고 대혜선사의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아마도 묵조선의 사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잘못된 수행자들을 자각시키고, 무엇보다 ‘상구보제 하화중생’ 해야 할 수행자들이 자비심과는 먼 자신의 착각 속에 빠져 혼란한 현실을 외면한 채 묵묵히 고요한 곳에서 좌선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라고 한 잘못된 수행 정신에 대한 자각이 필요했기 때문인 것으로 본다.
2) 간화선과 무자화두
대혜선사가 일용선을 주장하게 된 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요청이라고 본다. 사회는 혼란하고 할 일은 많은데 그 와중에서 가만히 앉아 수행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기에 일상생활 가운데서 매순간 자신이 처한 곳에서 수행하는 방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 그러한 수행을 위해서는 그것에 알맞은 수행법이 제시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혜선사가 새롭게 등장시킨 것이 간화선이다.
간화선은 말 그대로 ‘화두를 본다’는 의미이다. 옛 조사들의 깨닫게 된 기연인 공안을 참구하는 새로운 선 수행 방법이다26)
공안이란 ‘관공서의 문서’란 뜻으로 사적인 감정이 개입될 수 없으며, 반드시 준수해야할 절대성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간화선은 이런 공안을 필수로 하는 수행법이며, 대혜선사가 묵조선을 비판하는 무기로 사용한 것이 바로 이 공안이라 할 수 있다. 공안이라는 말은 중봉 명본(1263-1323)의 『산방야화』에 공이란 성현들이 그 길로 함께 갈 수 있도록 하는 지극한 가르침이며, 안이란 성현들께서 그 깨달은 이치인 도에 나아가는 올바른 방법을 기록한 것이라고 되어 있다.
주요 공안집으로는 단하 자순(1064-1117)의 송고에다가 임천 종륜이 평창을 붙인『허당집』, 원오 극근의『벽암록』, 만송 해수(1166-1246)의『종용록』. 문무 해개의『무문관』, 허당 지우(1185-1269)의『절중록』등, 송 ․ 원대에 많은 공안집이 등장하게 된다. 대혜선사 당시에도 수많은 공안이 나왔다. 그러나 대혜선사는 옛 조사의 언구를 통해 본래심을 자각하지 않고 문학성과 언어문자를 사량 분별로써 헤아리는 것이 극에 달하는 것을 보고 스승의 저서인『벽암록』까지도 태워 버리고 공안선을 다시 조직하고 대성하여 선을 ‘무’의 철학으로 새롭게 전개해 이 무를 일체의 사량 분별을 막는 ‘절대의 무’로 보고 간화선을 확립하게 된다. 즉, 공안은 어디까지나 주체적인 의심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에서 무자를 채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장』에 나타난 화두 중에 조주의 방하착이 7번, 운문의 수미산이 6번, 일구흡진서강수화(일구흡진서강수화)가 2번, 건시궐화(건시궐화)가 8번, 동산수상행화(동산수상행화)가 1번, 그리고 구자무불성화(구자무불성화)가 33번이나 인용되는 것을 보아도 그가 무자화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조주의 무자 공안에 처음으로 주목한 사람은 오조 법연(?-1104)이다. 즉 그는『오조록』권하의 상당법어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27)
“여러분들은 평소에 어떻게 참선을 하고 있는가? 나는 언제나 단지 무자만을 참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이 만약 이 무자 하나를 투과하여 체득한다면, 천하의 그 누구라도 여러분을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대답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또한 없다고 대답하는 것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대답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법연의 대를 이은 대혜선사는 공안선 참구와 수행에 이 무자 화두를 씀으로써 간화선의 체계를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혜선사는『서장』에서 무자 화두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대는 다만 의정을 깨뜨리지 못한 곳을 향하여 참구하되 평상시의 모든 행위에 반듯이 놓아 버리지 말지어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되 ‘개에게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니 조주스님께서 ‘없다’ 고 한 이 한 글자는 바로 나고 죽는 의심을 깨뜨리는 칼이니라. 이 칼자루는 다만 본인의 손안에 있는지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손을 쓸래야 쓸 수 없으니, 모름지기 본인의 손씀이라야 비로소 옳다.”28)
고 하면서 의정을 깨뜨리는 칼이 바로 무자 화두임을 말하면서
“홀연히 사량으로 미치지 못한 곳에서 이 한 생각을 부수면 바로 3세를 요달한 곳이다.…천만 의심이 다만 한 의심이니, 화두 위에서 의심을 부수면 천만 의심이 한꺼번에 부서진다. 화두를 부수지 못하면 얼굴 위쪽에서 화두와 겨룰지어다. 만일 화두를 버리고 도리어 다른 문자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의 가르침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고인의 공안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용간의 진로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키면 모두가 삿된 마구니의 권속이다.”29)
고 해서 화두에 대한 간절한 의심이 그 생명이며, 간절한 의심이 일어나면 활구이지만, 그렇지 않고 사량 계교하면 사구로 간주하면서 문자나 경전, 고인의 공안, 진로 가운데서 의심을 일으키면 마구니의 권속이라 하였다.
“어느 스님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조주는 ‘무’라고 대답하였다. 이 무 한 글자야 말로 여러 가지 왜곡된 지각을 풀어주는 무기이다. 이 무를 깨닫는데 유무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도리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의근 아래를 향하여 사량으로 헤아리지 말며, 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박거리는 곳을 향하여 뿌리를 박지 말며, 언어의 길 위를 향해 살림살이를 짓지 말며, 일없는 가죽껍질 속을 향하여 드날려 있지 말며, 문자 가운데를 향하여 인증하려 하지 말고, 다만 하루 종일 행주좌와 속을 향해 때때로 잡아 이끌며, 때때로 들어 깨닫게 하되 ‘개에게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르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을 일용에 여의지 말고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 살펴보면 어느 달 아무 날엔 문득 스스로 볼 수 있으리니, 한 고을 천리의 일이 도무지 방해롭지 않으리라”30)
또 대혜선사는 위와 같이 무자화두의 열 가지 병을 열거하면서 화두를 참구할 때 사량으로 분별할 필요도 없고, 알음알이를 구할 필요도 없이 단지 한 마음으로 그 재미없는 화두를 참구해 방일하지 말고,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 잡듯,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간절히 하면 공부하는데 힘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부추밀에게 답한 편지를 살펴보면,
“그대가 나를 믿고 따를 수 있다면, 시험 삼아 시끄러운 곳을 향하여 ‘개에게도 불성이 없다’라고 하는 화두를 살펴볼지언정 ‘깨닫고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이야기 하지 말지니, 바로 마음이 시끄러울 때를 당하여 아무렇게나 붙잡아 겨루어서 알아차려 살펴보아라. 도리어 고요함을 알아차리는가? 마는가? … 혼침 ․ 도거는 옛 성인들께서 꾸짖는 바이다. 고요히 앉을 때에 문득 이 두 가지 병이 뚜렷이 나타남을 알아차렸거든 다만 단지 ‘개에게도 불성이 없다’라고 하는 화두를 들면, 두 가지 병은 힘써 물리쳐 보내지 않더라도 그 자리에서 안정되리니, 날이 가고 달이 깊어지면 겨우 힘 들림을 알아차릴 때가 문득 힘을 얻는 곳이니라. 또한 고요한 가운데 공부를 짓지 않아도 그대로 곧 공부 이니라.”31)
수행자라면 혼침과 도거 때문에 수행의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화두가 살아 있으면 이 두 가지 병을 없애려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물리쳐 진다는 것이다.
“만약 당장에 쉬어버리고자 할진댄 마땅히 종전의 재미를 얻었던 곳을 따라 전혀 상관치 말며, 만질 수도 없는 곳과 재미도 없는 곳을 물리쳐버리고 시험 삼아 뜻을 두어보라. 만약 뜻을 둘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을진댄 돌이켜 잡을 만한 손잡이도 없음을 깨달아서, 이치의 길과 뜻의 길에 심․ 의 ․식이 전혀 미치지 못한 곳이 마치 토목와석과 같을 때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라. 이것이 당인의 신명을 버릴 곳이니라.……과연 생사를 벗어나 쾌활 자재한 사람이 되고자 할진댄 모름지기 단칼로 두 동강을 내서 심 ․ 의 ․ 식의 길을 절단하여야만 조금은 상응할 분이 있으리니, …”32)
당시의 사대부들이 늘 사량, 계교, 총명의식으로써 도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는 것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또한 공에 떨어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간화선에서 화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즉, 사량분별을 화두 하나에 응집시켜 근본무명을 타파하도록 하는 수행인 것이다.
따라서 대혜는 무자 공안으로 자기의 도거와 혼침을 제거하는 목표로 삼아 무자 삼매에 들어 내외가 타성일편이 되는 심경에 도달하여 그것으로써 모든 분별 망상의 삿된 생각을 불식시키려 했고, 그 둘째 목표는 공안에 대해 대의단을 불러 일으켜 대의 대오하게 만든 것이다.
이렇듯 대혜선사는 화두를 간하는 수행방법인 간화선을 일용선에 채택함으로써 초심자라 하더라도 화두를 들어 크게 의심을 일으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참구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자세히 밝히어 당시의 사대부들에게 수행에 대한 믿음을 준 것이 선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6. 대혜의 일용선이 당시에 미친 영향
1) 선종에 미친 영향
송대 불교의 일반적인 흐름은 수입된 불교가 전통적인 중국 고유 사상들과 접합하면서 긴 세월 동안 다듬어지고 실천하여 새롭게 중국인들의 생활 종교로 선과 정토불교를 펼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사선의 불교로서 꽃피우던 당대 선불교를 집대성 하는 것이 큰 특색이라 할 수 있겠다. 선종 오가의 최후를 장식한 법안 ․ 문익의 제자인 천태 ․ 덕소의 문하에서 배출된 영명 연수(904-975)가『종경록』100권을 편찬하여 중국 선종의 사상을 집대성하고, 선과 염불의 쌍수를 권장하는『만선동귀집』3권을 지었으며, 영안 도원은『전등록』30권을 편집하여 선불교의 역사와 사자상승의 기연어구 등을 집대성하였다. 특히『전등록』30권의 출현은 중국선종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하겠다. 1701명의 부처와 조사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으며, 뒷날 1700공안이라는 말도 여기에 등장된 불조의 숫자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것의 출현으로 송대 선불교는 새로운 전개를 할 수 있는 근거가 확립되었으며, 송고와 념고문학 및 공안선의 발전을 불러 오게 된 결정적인 문헌이 되었다. 송고란 조사 선승들의 언행과 선문답에 대하여 게송으로써 간결하게 독자적인 해석을 하여 종의를 선양한 것이며, 념고란 고칙공안을 념롱한 것으로 간명 적절하게 비평한 것을 말한다.
송고의 시도는 전등록에 입전되기도 했던 임제종의 분주 선소(분주선소)가 최초이니, 그는『전등록』100칙의 기연을 뽑아내어 여기에 송(송)과 염(념)을 첨가하여 선현일백칙(선현일백칙)과 대별일백칙(대별일백칙), 그리고 스스로 만든 공안 일백칙을 모아 송고대별삼백칙(송고대별삼백칙)을 편집하였다. 이어서 운문종의 설두 중현 (설두중현 ; 980~1052)이『송고백칙』을 만들었는데, 그 뛰어난 문학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당시의 수행자들이 여기에 매료되어 선풍이 이로써 바뀌게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설두의『송고백칙』은 뒤에 임제종의 원오 극근(원오극근)이 제창하여『벽암록』10권으로 재편하였는데, 이『벽암록』이 종문의 제일서로 높이 평가되어 유행하였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절강성을 중심으로 한 강남(강남)의 일대는 예로부터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항(소항)이 있다’고 할 정도로 기후가 온화하고 경치도 수려하며 생산이 풍요롭고 문물이 발달하였다. 이런 풍토 속에서 여유 있는 정신이 예로부터 문학성을 왕성하게 하였다. 고도의 문학적인 언구들로써 표현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대(당대)의 조사선이 일상생활의 종교로 전개되는데 반해서, 송대의 선은 선의 실천 수행과 더불어 잘 다듬어진 문학성이 곁들여진 선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설두 송고에 이어 임제동 양기(양기)의 법을 이은 백운 수단(백운수단 ;1025~1072)이 110칙의 송고를 지었으며, 이것에 의거하여 대혜선사가 110칙의 송고를 만들게 하고, 그리고 조동종에서도 투자 의청(투자의청 ;1032~1083) 단하 자순(단하자순 ;1091~1157)등이『송고백칙』을 지어 세상에 드날렸고, 굉지와 진헐청료(진헐청료 ;1090~1151)는 『신심명염고(신심명념고)』를 짓기도 했다. 그런 염송문학의 흐름은 뒤에 원(원) ․ 명(명) ․ 청(청)대에 이어져 나가게 된다. 그리고 고려에서도 진각국사 혜심(혜심;1178~1234)이 법계(법계)에 따라 고칙을 배열하여 『선문염송집(선문념송집)』을 편찬하여 보조에 의해 수입 ․ 제창된 간화선 수행을 뒷받침 하였던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33)
그런데 간화선을 대성시킨 대혜선사는 그의 스승 원오가 제창한 『벽암록』의 목판을 모두 모아 쪼개어 불태워 버렸다. 그 이유는 당시의 수행자들이 옛 조사들의 공안을 통하여 자기의 본래심을 자각하지 않고 뛰어난 문학성과 언어 문자에 천착하여 지해로써 선을 이해하려 하였으며, 당시의 사대부들마저도 선에 대한 관심이 이런 문학적인 경향에 편승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혜선사는 공안을 아름다운 시나 게송으로 읊으며 문자의 천착(천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양상을 보고서 공안 본래의 의미로 되돌려 각자의 심지를 계발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조주의 무자 공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스승인 법연의 설법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으로, 대혜선사는 이 무자 참구를 간화선으로 대성시켰으며, 이것이 남송이후 선종의 새로운 선수행의 실천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특히, 무문혜개(1183-1260)의 『무문관』에서 간화선은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혜개는 오조 법연의 5대 법손이며, 월림사관의의 법자이다. 『무문관』은 형식면에서 원오의 『벽암록』과 유사한데, 여기서는 수시가 없고 본칙 ․ 평창 ․ 송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칙에서 조주의 ‘무’자 공안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의 평창은 조사관으로서의 ‘무’자 공안에 대한 가장 훌륭한 찬사인 동시에 가장 밀도 있고 적절한 언어로써 그 의의를 말해주고 있다.
“참선은 모름지기 조사관을 뚫는 것이요, 현묘한 깨달음은 마음의 길을 궁구하여 끊어야만 한다. 조사관을 뚫지 못하고 마음의 길이 끈기지 않으면 모두가 초목에 붙어사는 도깨비들이다. 그럼 말해보라. 무엇이 조사관인가? 다만 이 한 개의 ‘무’자가 종문의 한 관문인지라, 이름 하여 ‘선종무문관’ 이라 하였다. 뚫어서 지날 수 있는 이는 비단, 조주를 친견할 뿐만 아니라, 역대 조사와 손을 맞잡고 함께 가고 눈썹을 겨루어 한 눈으로 같이 보고 한 귀로 같이 듣는 것이니, 어찌 경쾌하지 않으랴!
조사관을 뚫고 저 하는 자가 있느냐? 360 뼈마디와 팔만 사천 털구멍을 가지고 온몸으로 저 의단을 일으켜서 ‘무’자를 참구하여 밤낮으로 잡아 밀어댈 것이니, 허무의 무로도 알지 말고, 있고 없고의 무로도 알지 말며, 마치 뜨거운 쇳덩이를 삼킨 것과 같이 토해 내려 해도 토할 수 없어서 종전의 나쁜 지각을 모조리 다 없애버리고 오래 순숙하면 자연히 밖으로 한 덩어리를 이루어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꾼 듯 다만 스스로만 알 뿐이다. 홀연히 깨치게 되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들어서 마치 관우 장군의 큰 칼을 탈취하여 손에 들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서, 생사의 벼랑 끝에서 대자재를 얻어 6도 4생 가운데서 유희삼매하리라. 그럼 어떻게 잡아서 밀어대야 하는가? 평생의 기력을 다하여 저 ‘무’자를 보되, 끊어짐이 없다면 법의 촛불을 한 번 당기 매 곧 불이 붙음과 같아서 좋을 지로다.”34)
무문은 이처럼 조주의 무자 공안에 대해 온몸이 의단으로 되어 참구할 것을 강조한다. 대혜가 주장한 무자 공안은 무문에 이르러 극치를 이루고 이것은 좌선과 명상을 통한 자기의 심지를 개발하기 위해 끊임없이 추구해 온 중국 선종의 오랜 구도행각의 귀결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무문에서 그 꽃을 활짝 피운 송대의 공안선은 원대 고봉 원묘와 증봉 명본으로 이어지면서 활성화 된다. 원묘의『고봉화상선요』는『서장』이나『무문관』에서 주장하는 공안선의 실천 방법을 한층 더 발전시키고 체계 있게 강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선요』의 「시중」에서 공안선의 수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만약 착실하게 참선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는 대신근이 있어야 한다. 분명히 깨달음이 있음을 알고, 마 치 수미산에 기대고 있는 것처럼 확고부동하여 수행함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두 번째는 대분지 이다. 마치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곧바로 단 한 칼에 끊어버릴 것 같은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셋째는 대의정이니, 마치 남모르게 어떤 비밀스런 일을 추진해 온 사람이 이제 급히 막 드러내 보이려고 할 때 아직 드러내 보이지 않을 때의 심경과도 같이 해야 한다. 하루 종일 이 세 가지의 요점을 잘 간직하고 수행에 힘쓴다면, 반드시 깨달음을 체득할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라가 병 속에서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확실하다. 그러나 만약 이 가운데 하나라고 결여된 것이 있으면, 다리 부러진 솥처럼 결국은 쓸모없게 되고 말 것이다.”35)
특히 간화선에서 의심을 일으켜야 된다고 강조한 것은 『무문관』이다. 원묘는 이러한 무문의 주장을 이어 이를 한층 발전시켜 간화선의 수행 구조를 신심, 분심, 의심의 세 가지로 체계화 시키고 있다. 여기서 의심이란 다름 아닌 조주의 무자 공안에 대한 의심을 말한다. 이렇듯 대혜선사의 사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2)사대부에 미친 영향
대혜선사가 적극적인 현실 참여의 경향을 표방하는 면과 함께 사대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임제종 양기파는 교세가 부각되면서 고위관료를 중심으로 한 사대부의 정치적 후원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송대의 사대부는 후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사상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출가하지 않더라도 거사로서 열정적으로 선 수행에 나아갔다. 따라서 세속의 정치적, 현실적 위기 상황에서도 참선 수행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사대부를 위한 수행체계론이 요구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던 대혜는 일용선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사대부의 현실적 요구와 성향을 충분히 감안하였을 것이다. 그 예로『서장』은 2명의 승려를 제외한 40명 이상의 사대부와의 교류를 통해 선 수행의 요지를 지도하는 데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대혜선사의 일용선이 사대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서장』을 통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대혜선사는 일반적인 간화선 수행론이라는 보편적 측면과 함께 사대부가 수행 상에 직면되는 특수한 문제점이나 경향을 제기했다. 그는 특히 차별심, 분별심의 초월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또한 사대부가 평소에 지견이 많아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장애가 되는 병폐를 갖는다고 지적하였다. 즉, 사대부가 화두를 참구하면서 갖는 수행상의 폐단은 총명이근에 의한 사량 분별로 기준을 삼는 것이며, 무엇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깨달음을 실체화시켜서 기다리는 마음이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아울러 사대부가 깨달음을 기다리는 마음을 내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대혜선사는 사대부가 수행에 있어 빨리 깨닫고자 하는 속효심을 내는 폐단을 경계하면서 경전과 선사의 어록으로 선문답을 흉내 내거나, 깨달음의 인증으로 삼는 등 간화선의 본질과 거리가 먼 방향으로 나아가는 폐단 즉, 혼침, 도거, 선병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오직 무자 화두를 참구할 것을 강조한다.
그런데 대혜선사가 사대부에게 간화선 및 일용선을 표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대부의 입장에서 남송대의 대외적 위기상황이라는 정치사회적 현실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간화선이 수용될 수 있는 현실적인 요구가 대혜선사의 간화선 체계에서는 사상적으로 반영된 것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은 무엇보다도 대혜선사가 사대부의 세속적인 생활과 선 수행이 현실적으로 조화될 수 있는 논리를 제시한 데서 잘 드러난다.
“조주의 ‘구자무불성’ 화두를 그대가 마치 도적을 잡음에 이미 숨은 소굴을 알고 있으나 다만 아직 잡지 못함과 같을 따름이니, 청컨대 정신을 바짝 차려서 조금도 사이가 끊어지지 않게 하고 때때로 가고, 머무르고, 앉고, 눕는 곳과 보고, 읽고, 기록하는 곳과 인 ․ 의 ․ 예 ․ 지 ․ 신을 닦는 곳과 존장을 모시는 곳과 학자를 제접해 가르치는 곳과 죽을 먹고 밥을 먹는 곳을 향하여 더불어 겨룬다면, 홀연히 식심을 쳐서 깨뜨릴 것이니, 대저 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36)
이렇듯 대혜선사는 사대부에게 현실생활 중에서 부지런히 실천하여 출가하지 않아도 능히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현실적인 입장과 요구를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대는 모든 일을 굳게 참되 역순 경계를 당하여 바로 힘을 잘 붙일 지니, 이른바 이 깊은 마음을 가지고 진찰을 받듦이 곧 이름 하여 국은을 갚음이 되느니라.…바로 바쁜 가운데 있으면서 마땅히 주상이 그대를 기용하신 뜻을 체달하여 눈 깜빡하는 동안도 가히 잠시라도 잊지 말고 스스로 깨우치고 스스로 살피되, 무엇으로써 그것에 보답할까?”37)
여기서 대혜선사는 화두 참구에 집중할 때처럼 국은을 잊지 말고 늘 주상이 기용한 뜻, 바로 신하가 가져야 될 충군애국의 자세를 잠시도 잊지 말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대부에게 있어 화두 참구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방향이 출가수행자와 같이 깨달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대부의 현실적인 입장이자 궁극적인 지향인 충군애국과 통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송대 사대부 계층에서 선사상이 성행되면서, 그들의 현실적인 요구에 적합한 선 수행체계가 적극적으로 요구되는 현실과 대혜선사의 일용선의 체계는 상당한 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혜선사 계열의 임제종 양기파가 남송대의 대외적인 위기 상황에서 적극적인 현실인식을 표방한다든지, 사대부에게 간화선을 선양하면서 적극적인 현실대응을 촉구하였던 경향은 간화선 및 일용선의 형성 과정이나 그 사회사상적 경향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체계화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38)
7. 맺는말
영국의 사회학자 토인비는 그의 저서『문명의 위기』에서 현대인은 참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의 원리를 진실하게 탐구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동양의 불교를 바탕삼지 않으면 안 되며 이것이 동서양의 화합의 길이라고 했다. 불교는 빠르게 서구 사회에 퍼져, 특히 명상과 선 수행이 그 관심을 끌고 있고, 심지어 외국인 출가자도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실정을 돌아보면 위빠사나 수행은 점점 더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반면, 간화선의 문제점은 자꾸 거론되고 있다. 수많은 조사들이 간화선법으로 깨달았음에도 불구하고, 간화선이 문제시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불법문중으로 출가한 수행자 스스로가 진정 대발심으로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는지가 가장 큰 의문일 것이고, 다음은 빠른 속도로 변하는 산업화된 이 사회 속에서 간화선의 수행법이 다양한 시대적 요청에 대응해야 할 시점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과 초학자에게 설득력 있는 언어와 보편적 언어로써 다가가지 못하는데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며, 또 하나는 스승과 제자간의 탁마하는 풍토를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크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한 불법은 조용하고 고요한 곳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초심자나 재가불자들이 간화선에 접근하기를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수행자인 한 사람으로써 이러한 문제점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기에 그 해결 방안을 대혜의 『서장』을 통해 찾아보기로 한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 본 대혜선사의 일용선은 절대로 특정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선 수행은 특별한 장소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대혜선사는 일체의 분별심과 차별심이 일어나는 그 곳에서 화두를 참구하여 일체 사량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근원적인 자기의 본래심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
무엇보다 눈여겨 볼 것은 대혜선사가 활동하던 당시의 사대부는 아는 것이 많아서 굳건한 신심을 내기도 어렵고, 그것으로 인해 깨닫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대혜선사는 화두를 간하면서 알음알이나 문자, 언어의 길 위에서 인증하려 하지 말고 그저 간절한 의심으로 공부하되 공에 떨어지기 두려워하지 말고, 어느 때 어느 곳이든 그 공부처를 가리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속세를 떠나야만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공부하는 것이 진정한 공부임을 강조하신다.
이렇듯 대혜선사는 『서장』을 통해 자신이 수행하여 체득한 모든 것들을 다양한 근기와 상황에 맞게 그리고 제대로 가지 못하는 후학들에게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조사나 선승들처럼 출가하여 수행자 생활을 그대로 실행할 수 없었던 재가 불자들에게 근기에 맞는 해답을 일러주어 제자로 하여금 절실한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간화선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쉽게 설명해 주고 공부를 점검해 주신 자상함이 참으로 눈물겹다.
불교는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나 지금 여기를 중요시 하고 있으며, 지금 여기의 자신을 문제로 하고 있는 현실적인 종교이다. 그러므로 매 순간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처님도 대혜선사도 그저 순간순간 열심히 살다 간 순수한 수행자였음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수행은 절에서만 하는 것, 조용한 곳에서만 하는 것이라는 오해로 인해 수행하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현대 사회의 재가불자와 불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대혜의 일용선 수행을 널리 알려 자신이 처한 곳에서 순간 일어나는 번뇌 망상에 끌려가지 않는 힘을 기르게 하여 밥 먹고 일 하고 말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지혜로울 수 있게 하는 것이 빠르게 변하는 이 시대에 정신적으로 메말라 있는 현대인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본다.
◎참고문헌
* 대혜종고,『서장』,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2003.
* 김탄허 현토, 『합본 선요․서장』, 도서출판 교림, 1994.
* 정성본,『선의 역사와 선사상』, 삼원사, 1994.
* 정성본,『참선수행』, 동국대 경주캠퍼스 정각원.
* 김호귀,『묵조선 연구』, 민족사, 2001.
* 원 융, 『간화선』, 장경각, 1993.
* 조계종 교육원 불학 연구소, 『간화선』,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2005.
* 김태완,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 장경각, 2001.
* 여천무비 감수 ․ 지상 주해, 『서장』, 불광 출판부, 1998.
* 선우논강 1호 (2003. 8), 대한불교 조계종.
* 선우도량 6호
◎참고논문
* 조명제, 「고려후기 간화선의 수용과 전개」, 부산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문학 박사 학위 논문, 2000.
* 유 진, 「대혜 종고의 묵조사선 비판에 대한 소고」, 승가 16호.
1) 본고의 제목 중 ‘일용선’이란 단어는 대혜선사의 선사상을 대표하는 말로써, 동국대 불교학과 백옥수, 「대혜의 일용선 연구」(2004 불교학 결집대회 발표논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2) 『육조단경』(대정장 48권, 338중)
3) 『경덕 전등록』28권(대정장 51, p.440상)
4) 정성본, 『선의 역사와 선사상』, 삼원사, 1994.
5) 『진주임제헤조선사어록』 (대정장 47, P.498상)
6) 유진 ,「대혜종고의 묵조사선 비판에 대한 소고」, 승가 16호 참조
7) 『임제록』(대정장, 47권, p.499중)
8) 『명판가흥대장경』권1, pp.793-807.
9) 『만속장경』제136권, p.0515.
10) 『속장경』제137권.
11) 상게서, p.44.
12) 『열반경』17권(대정장 12권, 722중)에 “대왕이시여, 바라나국에 백정이 있으니 이름은 광액이라. 날마다 한량없는 양을 죽이더니, 사리불을 만나서 8계를 받고는 하루 낮 하루 밤을 지나고 그 인연으로 목숨을 마치고 북방천왕 비사문의 아들이 되었나이다. 여래의 제자도 이런 공덕의 과보가 있거늘, 하물며 부처님 이오리까?” 라 하였다.
13) 상게서, p.87.
14) 상게서, p.103.
15) 상게서, p.115.
16) 흡흡이란 일부러 마음을 일으키거나 생각을 움직여서 현실을 대하는 것이 아니고, 무심으로 경계를 대하는 것이다.
17) 상게서, p.130.
18) 오늘날 이 책은 전하고 있지 않지만 대혜선사가 이 책을 지었다는 사실은 『대혜서』「증시랑답」에서나 『대혜년보』에 대혜가 46살 때 지은 저술로 전하고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19) 정성본 ,『선의 역사와 선사상』, 삼원사, 1994, p.459참조.
20) 『대혜어록』(대정장47권 863상,중)
21) 상게서, p.48.
22) 상게서, p.131.
23) 상게서, p.119.
24) 상게서, p.39.
25) 김호귀, 『묵조선 연구』, 민족사, 2001.
26) 정성본,『선의 역사와 선사상』, 삼원사, 1994.
27) 유진, 「대혜종고의 묵조사선 비판에 대한 소고」, 승가 16호.
28) 대혜 종고, 『서장』, 조계종 출판사, 2004, p.96.
29) 상게서, p.181.
30) 상게서, p.80.
31) 상게서, p.88.
32) 상게서, 191p.
33) 『선우도량』6호, 현용 「간화선의 성립배경을 읽고」참조
34) 『무문관』(대정장 48권, 292하-293상)
35) 김탄허 현토, 『합본 선요 ․ 서장』, 도서출판 교림, 1994, p. 41
36) 상게서, p.206.
37) 상게서, p.285.
38) 조명제, 「고려후기 간화선의 수용과 전개」, 부산대학교 일반대학원 사학과 문학박사 학위논문, 2000.
[출처] 대혜『서장』의 일용선에 대한 고찰|작성자 노원앙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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