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2

법현, 현장, 의정, 혜초스님의 기행문을 통해서 본 서역 구법활동 고찰

수선님 2020. 10. 11. 11:15

 법현, 현장, 의정, 혜초스님의

 기행문 통해서 본  서역 구법활동 고찰

               


운문승가대학  대교반
    종 률   

 


Ⅰ. 서론 
............................................................................................1

1. 연구목적.................................................................................1
2. 연구방법.................................................................................2

Ⅱ. 구법승들의 생애 및 활동상 분석...................................4

1. 구법승들의 생애....................................................................4

1) 법현(340-420)  2) 현장(602-664)  3) 의정(635-713) 4) 혜초(704-780)

2. 당시 시대적 상황 및 역경활동 중심지.................................7

1) 법현(4-5세기)  2) 현장, 의정(7세기)    3) 혜초(8세기)

 

3. 구법의 목적 및 구법경로....................................................12
1) 구법 목적.....................................................................................15

(1) 법현       (2) 현장      (3) 의정      (4) 혜초

2) 구법 경로..................................................................................15

(1) 법현       (2) 현장      (3) 의정      (4) 혜초

 

Ⅲ. 구법승들의 기행문 분석.....................................................26

 

1. 출간저서 소개............................................................................26

1) 법현      2) 현장      3) 의정      4) 혜초

2. 4대 기행문 분석........................................................................30



Ⅳ. 결론..............................................................................................37




*부록.........................................................................................................................41
*참고문헌..................................................................................................................54

 


Ⅰ. 서론

 

1. 연구배경 및 연구목적
 기원전 4~8세기에 걸쳐 수많은 구법승들이 서역 천축으로 구법의 길을 떠났다. 그들 중 돌아와서 그 이름이 전해지는 자보다 여행 도중 객사하여 이름이 알려지지 못한 자들이 훨씬 많았던 그 길을... 단 하나뿐인 목숨을 걸고서라도 사막을 넘고, 거센 파도를 헤치고, 묵묵히 가게 한 것은 부처가 되고자 발원하는 납자의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실크로드 역사상 서역에서의 구법승들의 활동상은 중국, 한국등지에 인도의 불교사상교리를 전파시켰으며,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실크로드 동, 서간의 교류의 개통과 중앙아시아의 문화 및 종교, 역사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등의 인류 평화와 화합의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불교승려들에 의해 쓰여진 세계 4대 여행기는 후래의 수행자들에게 서역구법에 대한 나침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데 지침서가 되어왔다. 
미래의 우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우리를 돌이켜 보고, 현재의 우리를 직시함으로서 가능하듯이 우리 인류 역사와 문화의 재창조는 그 누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본 논문에서는 문화의 창조적 계승 및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문화 고고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법현, 현장, 의정, 혜초스님의 기행문을 통해서 서역에서의 구법활동의 결과가 당시 종교, 문화 역사 교류의 변천사적 측면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으며, 종교로서의 불교가 인류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4대 기행문을 남긴, 4-5세기(법현), 7세기(현장, 의정), 8세기(혜초)의 활동상을 분석하는 것은, 구법초기 단계부터 구법의 가장 왕성한 시기까지 분석, 비교하는 것으로, 중국승으로 최초로 구법에 성공하여 견문록을 남긴 6c법현, 가장 방대한 견문기록을 보여주는 7c현장과 구법 고승들에 대한 전기와 육로와 남해안 일대의 풍부한 기록을 남긴 의정, 8c 한 문화권에서 입당, 서역 구법하여 아랍(대식)및 페르시아에 까지 진출한 기록을 남긴 최초의 신라인 혜초의 활동상을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한국, 인도간의 동/서 문물교류, 중앙아시아의 정황 및 문화교류사, 인류학 변천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특히, 구법승들의 구법을 통해 중앙아시아, 인도, 한국에 전파된 불교의 시대적 흐름 및 종교로서의 불교가 인류문화에 미치는 영향을 시대적으로 비교, 고찰 하는 것은 사료적 가치가 크다.
지금까지의 인도구법승들의 활동상에 관한 연구사례
1)를 살펴보면, 이재성(1991)은 주요 입축승의 사적및 여행기를 표로써 법현, 현장, 의정, 혜초에 관해 간단히 서술하였고, 임기중(1994)은 중국의 대표적 구법승인 현장스님과 한국의 대표적 구법승인 혜초스님에 관한 비교를 서술하고 있었으며, 무함마드깐슈(1994)는 8c서역불교 전파현황을 살펴봄에 있어 혜초를 중심으로 법현, 현장, 의정을 비교, 인용하였고, 이재창은 5-8세기를 대표하는 여러 기행문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인도 4대 기행문을 남긴 법현, 현장, 의정, 혜초의 여행기를 언급했으며, 변인양(1999)는 옥여담의 위치를 결정하는데 있어 혜초의 저서인 『왕오천축국전』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법현과 현장, 의정과 비교했을 뿐, 구법승들의 자취가 각각 개별적으로 서술되기는 했으나 아직, 시대별로 몇몇의 구법승을 묶어 비교, 분석한 사례는 없었고, 중국의 수많은 구법승들 중인도 여행을 통해 대표적인 4대 기행문을 남긴 법현/ 현장/ 의정/ 혜초 스님에 관해서도 구도의 생애를 비교하거나 분석한 논문은 아직 없었다.

 

2. 연구방법
본 연구의 분석은 서역구법승들의 전반적 구법생애를 비교, 고찰한 것으로, 크게 2단계로 나눠 분석하였다.
1 단계는, 서역 구법승들의 생애 및 활동상 분석으로, 3차례에 걸쳐 분석하였다. 1~3단계의 각각의 세부적 분석은 서로 유기적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행문을 남긴 스님들의 구법생애를 간략히 밝히고, 구법 전과 구법당시의 활동상의 분석, 비교로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먼저 구법승들의 생애를 개략적으로 분석하였고, 두 번째, 당시 시대적 상황 및 역경활동 중심지별 분석으로, 구법 전 활동상을 보여주는 분석이다. 세 번째. 구법목적 및 구법경로 분석으로, 구법당시 활동상을 엿볼 수 있는 분석이다.
2 단계는, 구법승들의 기행문 분석으로, 구법 후 활동상을 보여주는 분석으로, 출간저서의 소개와 4대 기행문인 법현의 『불국기』, 현장의『대당서역기』, 의정의 『남해기귀내법전』,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을 분석, 비교하고 각 기행문이 가지는 의의 및 가치를 서술하였다.

 

구법생애(개략적)

 1.    구법승들의 생애

1 단계 분석;구법승들의 생애 및 활동상 분석

구법생애(전반적) 

구법전 활동상

 2. 시대적 상황 및 역경활동 중심지

구법 활동상

 3.         구법목적및           구법경로

구법후활동상

      출간저서 소개 및          4대 기행문

2 단계 분석; 구법승들의 기행문 분석(구법활동의 산물분석)

 

각 지명 및 구법경로를 나타내기 위해 지도 작업을 하였는데. 방법은 먼저 수작업으로 지면상에서 규명한 지역과 경로를 Scan을 한 뒤 컴퓨터 화면상에서   ‘PhotoShop’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경로선과 지명을 명시하여 나타내었다.

 

분석과정에서 문헌자료에 있는 옛 지명을 지도에서 규명하여 찾는 것이 가장 어려웠으며, 혜초의 활동상 분석에 있어서, 혜초는 신라승이고, 중국으로 입당한 후 입축하였기 때문에 당시 신라와 중국, 인도 간의 활동상을 비교하여 분석하였으며, 혜초전기에 관련되어 전해지는 자료의 미흡으로 인해, 혜초와 동시대에 함께한 두 스승, 금강지와 불공삼장의 활동상과 비교하여 분석, 고찰하였다. 4대 기행문의 여행경로분석에 있어서도, 최근 혜초의 국내연구가 활발해진 것을 참고하여, 혜초의 경로를 기준으로 삼아 나머지 3가지의 기행문에서 접합되어 동일시되는 경로를 중심으로, 5천축의 각 천축에서 분석함으로서 당시 인도에서의 문화, 종교적 상황을 비교, 고찰하였고, 또한, 중앙아시아 내의 분석, 비교, 고찰한 것과 다시 비교, 고찰하여 4-8세기 구법당시 중앙아시아 및 인도 변천사를 살펴보았다.  
문헌에서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생졸 연도 및 활동 연도 내에서 활동사항을 추측하는 것이 난해 했다. 밝히지 못한 부분도 있고 기재된 부분 또한 정확도에 있어 한계점이 있지만, 이 글에서는 그 개략적 여정을 살펴봄에 그 의의를 둘려 한다. 

Ⅱ. 구법승들의 생애 및 활동상 분석





1. 구법승들의 생애

 

중국의 승려로서 최초로 서역에 구법하고 돌아온 승려는 260년 삼국시대 주사행주사행으로 그 뒤에도 서역으로 향한 구법승의 행렬은 끊이지 않았다.

지도 1. 법현, 현장, 의정, 혜초의 출생지

 

법현, 현장, 의정, 혜초스님의 출생지 분포는 평양, 낙양, 하북성 탁현, 신라로 중앙아시아 동북부 지역에 해당하며, 이 네 분의 출가에 있어 공통된 특징은 모두 동진출가라는 사실이다.


1) 법현 (340-420)

형주 형주 땅 호북성 강릉현 신사신사에서 열반에 들 때 까지 법현의 생애를 돌아보면, 법현은 낙양 근처 산서성 평양 무양인으로 속성은 공공이다. 그의 형 2명이 병고로 일찍 죽게 되자 그 화가 법현에게 미칠까 두려워한 아버지는 법현나이 3세 때 출가시켰으며2), 법현 10살 때, 아버지가 떠나자 숙부가 법현에게 환속하여 어머니를 부양하길 권했으나 법현은 그 어린나이에도 ‘출가한 목적은 아버지가 건강해서가 아니라 세속과 번뇌와 멀어지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한다. 20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미지의 세계로만 알려져 있던, 인도 서역구법을 그의 나이 60세에 결심을 하게 된다.
『불국기』의 발문에서 법현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돌이켜 지나온 바를 생각해보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이 움직여 땀이 흐른다. 높은 곳에 오르고 험준한 곳을 밟아 이 몸을 아끼지 않은 연유는 무릇 뜻이 있기 때문이니, 그 우직함을 오로지 하는 까닭에 죽음의 땅에 목숨을 던져 만분의 일의 소원을 이루었다.”
3) 최초의 서역 인도구법에 성공한 중국승려 법현의 발자취는 중국 역사상 불교, 문화뿐 아니라, 서역, 인도문물의 장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2) 현장 (602-664)

현장은 낙양 구시현인으로 속성은 진진, 이름은 위위로, 어려서부터 유교, 도교 등, 제자백가에 두루 통하였으며, 학자가풍이던 현장집안의 맥락적 영향4)으로, 둘째 형 장첩이 먼저, 낙양 정토사로 출가 하였으며, 형과 같이 경을 공부하다가 11살, 사미의 신분으로, 비구 승적에 올랐으며, 622년 21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현장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아비달마 유식계통으로, 수나라 말 혼란기에 장안, 형주, 상주, 조주 등지에서 강경을 하였으며, 『성실론』,『구사론』등의 가르침을 받았다.5)
구법을 떠날 때는 국가의 법을 어기는 비밀출국이나 다름없었으나, 제왕들의 비호를 받으며, 현장의 구법여행은 대체로 원활하게 이뤄진 편이다. 나란다대학에서 보낸 시간은 현장에게 유식에 대한 갈증을 식혀주었으며, 현장이 후대에 중국 법상종을 열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서역인도에서 ‘외국인 법사’로서 명성을 날린 현장은 중국 땅에도 그 명성이 전해져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귀국하였으며, 귀국 후에도 20여년의 역경사업을 통해 불교 역사상 사상최대로 많은 역출을 하였다.  “현장의 성격이 꼼꼼하여 매일의 일과를 정해서 차질이 생기면 밤늦게라도 분량을 채웠다한다.”6) 할 정도로, 그가 남긴 '직역직역의 번역법'은 후대 역경가들의 본보기가 되었으며, 역경 사에 있어서 구역/신역으로 나뉘는 시발점을 제공하였으며, 현장은  63세의 나이로 열반에 들기 까지 그의 번역작가운데 가장 방대한 양을 차지한 『대반야경600권』을 완성 하였다.

 

3) 의정 (635-713)

의정은 하북탁현인으로 속성은 장장, 자는 문명 문명으로, 동진 출가하여, 두루 여러 선지식들을 참알하고 많은 서적을 열람하고 있던 중 법현과 현장에 대해 전해들은 구법기는 감정이 풍부한 15세 청년기의 의정에게 불법연구에 대한 동경을 가지게 하였다. 20세에 구족계를 받았으며, 현장이 입적한 뒤 7년 뒤에 구법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의정은 ‘승려의 생활이 어떠해야하는가’ 하는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법현이나 현장과 같이 육로로 가지 않고, 왕복 해로로서 그의 나이 30대 중반에 떠나 25여년의 세월을 타지외국땅에서 보내고, 60여세에 낙양에 도착하여 20여 년간 역경사업을 펼쳤다. 인도 당시 유행했던 설일체유부의 율의 대부분이 의정에 의해 한역화 되었고, 화엄경 신역과 계율, 유식, 밀교 등의 한역화에 참여하였으며, 구마라집, 진제, 현장과 더불어 ‘4대 역경가’ 라 불릴 만큼 명성을 떨쳤다.
특정한 종파의 개조도 되지 못하고, 뒤를 잇는 후계자도 없었으나, 그가 남긴 저작인 당시 인도 율의 형태는 중국(당) 승단의 풍토를 재조정하고 흐트러진 계율 및 조직의 체계를 바로 잡을 수 있는데 경각심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믿어 의심치 않는다. 
7)



4) 혜초 (704-780)


혜초의 생애분석에 있어서 안타까운 것은 그 년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이다.8) 지금까지의 혜초의 생애연구는 혜림의 『일체경음의』와 불공삼장이 남긴 유서가 실려 있는 『대종조증사공대변정관지삼장화제표제대종조증사공대변정광지삼장화상표제』를 바탕으로 연구하여 왔으며, 혜초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었던 두 스승인 금강지와 불공에 관련된 자료와, 당시 신라의 구법승의 활동상을 통해 혜초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다.
혜초의 출생은 704년
9)으로, 동진출가10) 하였다. 719년 (신라경덕왕 18년, 개원 7년) 16세에 입당하였으며, 723년 그의 스승 금강지의 권유에 의해 20세에 구법을 떠났으며, 구법 후 장안에서 금강지와 불공문하 에서 밀교연구를 하였으며, 밀교의식을 주관하였다. 불공의 6대 제자 가운데 2인자로 유촉 받았으며, 불공의 입적 후에도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을 직접 작성 하였고 대덕고승들의 법력으로만 주관할 수 있는 국가적 차원의 기우제를 주관한 것 등으로 볼 때, 스승 금강지와 불공의 폭넓은 관심과 외국 승으로서, 종교가로서 깨달음을 향한 간절한 구도애와 그전 까지는 없었던, 페르시아, 아랍 일대의 중앙아시아 까지 미친 구법활동의 자취를 국가 측에서 크게 평가한 것이 아니겠는가.

2. 당시 시대적 상황 및 역경활동 중심지    

   
분석에 있어 시대적 상황은 법현, 현장, 의정, 혜초의 구법전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으며, 역경활동 중심지 분석에 있어서도 구법 전 상황을 서술하면서, 그 지역이 중국 역경사에서 가졌던 중요성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법현(4-5세기)은 동진시대, 현장과 의정(7세기), 혜초(8세기)는 당대에 해당하며, 법현, 현장, 의정, 혜초가 역경활동의 중심으로 삼았던 곳은 건강, 장안, 낙양, 오대산 등으로 이곳은 당시 사회, 문화, 사상적 중심지 이었으며, 중국 동북부지역에 해당하며, 네 사람의 출생지가 동북부인 것과 비교해 보면, 출생지별 분포지역과 크게 차이나지 않고, 동쪽으로 건강, 서쪽으로 장안, 북으로 오대산을 기준으로 분포하는 특성을 보였다.

특히, 역경활동지 분포지역 가운데,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 한곳은 ‘장안’으로, 중국역사상 으뜸가는 도읍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문화 교류의 장소였고, 7-8세기 현장, 의정, 헤초의 주요 역경활동 중심지임이 밝혀졌다.

 

 

시기

역경활동의 중심지

   

법현(340-420)

강남 동진 (317-418)

건강의 도량사

현장(602-664)

당 초기(618-907)

장안대자은사 내 번경원

 의정(635-713)

 당 초중기(618-907)

낙양의 불수기사장안의 대천복사 내 번경원

혜초(704-787)

당 중후기(618-907)

장안 천복사장안 대흥선사오대산 건원보리사

법현, 현장, 의정, 혜초가 역경활동의 중심지로 삼은 곳은 오대산, 낙양, 건강, 장안으로 이곳은 당시 사회, 문화, 사상적 중심지 이었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역경활동 중심지로 중국 동북부 지역에 해당하며, 출생지별 분포지역과 크게 차이나지 않고, 동쪽으로 건강, 서쪽으로 장안, 북으로 오대산을 기준으로 분포하는 특성을 보였다.



1) 법현(4-5세기)


법현(340-420)은 동진대 승으로 이 당시 불교의 성격은 ‘귀족불교’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에는 귀족층에서 출가한 승려가 많아 서역이국의 사상을 이해하는 폭도 넓었다. 또한 동진 불교는 불교사의 일대전환기의 시기로11)로 그 성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도2.  16진과 동진


첫째, 구마라집(350-413)등과 같은 서역고승들과 중국의 여산 혜원, 법현 등의 많은 고승들의 범본 경전의 한역화와 혜원의 백련사 염불결사로 인해 불교는 중국 사람들에게 좀 더 쉽게 대중 불교로서 다가가게 되었다.

둘째, 불교의 중심이 장안, 낙양에서 각 지방으로 보급된다. 여산, 건강은 강남불교의 중심지로 특히, 건강은 동진의 주요도시로, 법현 및 불타발타라(각현), 혜관 등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는데12), 특히, 법현은 서역, 인도를 15년간 유람한 뒤, 동진 말 여산과 함께 남방불교의 중심지가 된 이곳 도량사도장사에서 많은 경률을 번역하게 된다.13)
셋째, 서진이 양쯔강이남으로 이동함으로써 강남에 중국문화를 전파, 발전하였으며, 사회사상적 측면에서 노장사상이 성행하여, 청담풍조가 유행하였다. 불교는 도교의 사상과 융합 절충된 모습인 격의불교의 형태로, 대중 불교로서 민중 속에서 싹틀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법현이 역경활동의 중심지로 삼은 건강 도량사14)는 동진 말기에 혜원이 활약한 ‘여산’과 더불어 남방불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곳으로 강남의 대표적 사찰이었다.
2) 현장, 의정 (7세기)


현장(602-664)과 의정(635-713)의 생몰연대로 살펴본 시대적 공유시기는 635-664년으로, 수나라 말기-당초로 분석되어지는데. 이연이 수나라를 멸망시키고, 당을 세우는 시기이다. 15)
당대 불교의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종파불교의 시대’라 할 수 있다. 당대에서는 불교가 종파불교로서의 본격적인 발전을 하여, 천태종/화엄종/율종/법상종/밀교의 종파가 형성되어 교리가 체계화 되었다.17) 불교학자들은 사원경제의 독립성을 부르짖었으며, ‘교상판석’의 방법론을 도입하여 불교의 교리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게 된다.
현장, 의정이 활동하던 7세기 당의 불교는 수나라에 이어 중국불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18)실크로드(비단길)를 통해 서역과의 문화적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 졌는데, 당시 그 중심이 된 것은 장안장안과 낙양낙양이다. 장안19)은 중국 역사상 저명한 옛 도읍지 중의 하나로 한--당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간 조정의 으뜸이 되는 도시였으며, 중국 초기불교가 외래승과 서북방 민족들의 교역로가 장안에서 비롯, 발전되었다. 구마라집, 현장, 의정, 불공 삼장 등의 대 역경가들이 이 곳, 장안에서 많은 역경사업을 펼쳤으며, 종파불교 또한, 이곳, 장안을 중심으로 흥성하였다.
장안을 근거지로 현장은 대자은사
대자은사20) 내 번경원에서, 의정은 대천복사대천복사21) 내 번경원을 역경활동 중심지로 삼았는데, 대자은사는 현장역경의 대부분이 완성된 곳으로, 절 서북쪽에 ‘번경원’을 설치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번역하게 하고, 인도 구법 후 가져온 경전, 사리를 안치하는 등 현장의 역경사업에 대해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곳이다.
대천복사는 측천무후가 고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절로써 사내 번경원에서 의정은 역경활동을 하였으며, 인도승 금강지와 실차난타 등이 역경사업을 펼치던 곳이기도 하다.

 

낙양낙양22)은 중국역사상 장안과 더불어 중요한 도읍성으로 수대 ,당대에 이르러 ‘불교발전의 중심지’로 일컬어졌다. 또한, 이곳은 중국초기 문물이 전해진 곳으로 후한 명제때 가섭마등, 축법란 등이 불경과 사리 등을 싣고와서 소개한곳으로, 유명하였다. 낙양을 근거지로 , 의정은 불수기사불수기사23)에서 역경을 넓히는 근거지로 삼았으며,  구법후 신역화엄경 80권 번역에 참여하였다.

3) 혜초(8세기)


  생몰연대로 살펴본 당대 현장/의정/혜초의 공유시기는 8세기 당대 초(704-713)로 ,혜초가 중국으로 입당 하기 전이며, 중국의 여러 종파들이 신라 입당승에 의해 전해지고 있던 시기인데, 특히, 의상24)이 신라에 돌아와 화엄종을 전래하고 있던 시기이다. 
혜초가 활동할 당시 8세기 
중국 및 한국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시기, 중국에서는 밀종과 선종이 융성하였는데25), 밀종은 인도 출신인 금강지, 선무외, 불공삼장등이 중국으로 들어와 밀교를 떨쳤는데, 720(개원8)에 금강지(50세)는 중국에 불법이 성행하다는 말을 듣고, 제자 불공(16세)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와 밀교를 전래, 초조가 되었다. 특히, 밀교의 전래는 민중불교로 보급되어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하게 된다. 혜초가 중국으로 입당하기 100여 년 전 중국과 신라의 불교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중국은 당초기로 율종, 유식, 화엄종이 제창되었는데, 율종에 있어 도선율사의 ‘계율남산동’, 유식에 있어 현장규기의 ‘법상유식’은 신라에 전해져, 율종, 유식이 발전되어 도선율사와 현장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증가하였으며, 중국의 종남산 지상사 화엄 2조인 지엄화상의 화엄종은 신라입당승 의상이 전수받아 한국화엄의 초조가 되었다.26)
8세기 
한국의 신라는 신라중기 가운데 성덕왕-경덕왕의 시기로, 아미타(미륵)신앙과 미타신앙이 주룰 이루었다.27) 대중 불교로서 정토신앙이 백성들에게 폭넓게 확대되었으며, 향가 등의 보급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불교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주술적 신앙을 띠는 밀교에 대한 관심도의 증가는 자연스럽게 신라에 스며들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혜초가 입당할 당시(719년)는 성덕왕(702-737)의 재임기간으로 이 시기에 신라입당구법승의 수가 가장 많았으며, 특히, 밀교승과 법화승의 입당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 당시
 신라구법승들은 중국 장안 및 낙양에서 활동하였는데28), 장안지역에 가장 많이 분포하였다. 장안을 중심으로 오대산, 형산, 성도, 동해안 까지 확대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혜초도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리라 추측된다. 혜초가 입당한 후 인도로 가기 전 까지 720-723년 사이에 광주에서 인도출신 밀교승 금강지에게 사사받았는데, 장안, 낙양등지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금강지의 밀교 활약상을 보고 인연이 되어 출가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혜초가 역경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던 곳은 장안의 천복사천복사29), 대흥선사대흥선사30), 오대산 건원보리사건원보리사31)로 혜초가 구법 전에 이 절에 머물면서 역경사업을 한 것에 대한 기록은 살펴볼 수 없으며, 다만 구법 후에 역경 활동한 지역으로만, 자료에 남겨져 있다. 혜초가 중국으로 온 뒤 4-5년 만에 구법을 떠났고, 스승 금강지에게 사사받은 후 2-3년 만에 구법을 떠난 것에 견주어 볼 때, 역경사업을 했기 보다는 밀교경전을 익히고, 앞으로 구법할 지역에 대한 경로의 인지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3. 구법의 목적 및 구법경로

 

1) 구법 목적

  『고승법현전』32)에서는, 총령총령33)을 넘으면서의 어려움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1월에 총령에 도달하니, 총령산에는 겨울에서 여름까지 눈이 있다. 또한, 독룡독룡이 있는데, 만약 의식을 잃게 되면, 독풍독풍이 삼켜버린다. 우설이 사막의 자갈돌을 날려버린다. 이것을 만나면, 만의 하나라도 온전하기 어렵다.’

 

이렇게 구법승들의 구도의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어려움은 사막과 총령의 험난함과 기후적인 난점을 극복하는 것이었다.34)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서역까지 구법의 길을 간 의도(목적)는 무엇이었을까?
4-8세기 구법승들의 구도의 목적
35)을 크게 몇 가지로 나눠보면,
첫째, 중국에 서역승의 출현으로 인해 경전의 한역화한역화가 이뤄지면서 범어로 된 원본경전의 미비함에 대한 아쉬움으로, 원본의 경전을 얻기 위해서,

둘째, 인도(천축) 고승들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셋째, 성지순례를 통해 성인의 자취를 탐방하기 위함이었다.
 
(1) 법현

 

 

법 현

현 장

의 정

혜 초

구법의 목적

경,율의 연구

  - 원전을 구하기 위해 - 유가론 및제경론연구 - 불적참배

율장을 구하기 위해

 - 밀교연구- 불적참배(단순한목적) 

 

중국에도 도안, 혜원과 같은 명승들이 출현했으며, 직접 가서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36) 법현은 중국 내 서역승들의 출현과 불경의 한역화가 진행 중이던 전반적인 분위기를 그 배경으로 불경을 연구하던 중 ‘승단의 규범이 약해지고, 경, 율의 번역이 미비함을 개탄하여, 경론을 구하기 위해’ 그의 나이 60세(399년, 융안3년) 동학승 혜경, 도정, 혜응, 혜외등과 더불어 총령을 넘어 천축(인도)로 법을 구하러 가게 된다. 37)


(2) 현장


수많은 입축승들 가운데 가장 심한 고생을 거듭하고 긴 여행을 가운데 정밀한 기록을 남긴 현장의 구법목적을 2가지로 나눠볼 수 있는데,
 첫째, 그 근원적 계기는 수나라 말기 혼란기에 장안장안, 성도성도, 형주형주, 상주상주등을 다니며, 대덕대덕에게 가르침을 받아 현장 자신의 명성은 높아갔지만, 가르침의 내용들이 기초로 하고 있는 기존의 연구 논서가 원본원본이 아니라 한문으로 번역된 한역본한역본으로 각각 견해자에 따라 그 내용이 일정치 않음을 개탄하여 
“철저하게 연구하기 위해서는 원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에 인도로 원전을 구할 결심을 하게 된다.
둘째, 그 구체적 계기는 평소에 현장이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한, 당시 인도에서 유행했던 
유가론(유가론;유가사지론)의 연구와 제경론의 연구, 부처님 유적을 참배하기 위해 구법을 결정하게 된다.

 

(3) 의정

의정은 현장이 입적한 후 7년이 지나 인도로 향했는데, 일찍이 현장 및 법현의 구법여행을 사모하여, ‘승려의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하는 실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도중 14세 때 ‘승려의 생활을 규정하는 것은 율이고, 그 원전은 5세기 초부터 번역하였지만, 당연히 알려져야 할 것이 결여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율장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유학할 목적(계기)을 세우게 된다. 38)

(4) 혜초

혜초는 신라승으로서 입당구법을 통해 서역구법을 감행하였는데, 구법의 목적과 배경 또한, 입당구법 서역구법을 나눠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혜초가 입당 구법할 시기39) 신라에서 입당승의 비율이 가장 많았던 시기며, 특히, 밀교승의 비율이 많았던 시기로, 중국 또한, 밀교가 인도의 금강지, 선무외, 불공등에 의해 활발히 전해지고 있었다. 따라서, 혜초가 입당입당한 목적 밀교의 연구에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밀교승 금강지에게 사사 받은 것도 우연이 아니라 미리 예측된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 할 수 있다.

혜초가 서역으로 구법을 떠날 당시 인도는 이슬람을 비롯한 아랍 등의 외도들의 침입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폐허가 된 터전위에서 불교가 일시적 부흥을 모색하던 시기이다. 혜초는 금강지가 중국에 밀교의 초조로 온지 3년 만에 스승 금강지의 권유로, 723년 광주에서 구법을 떠나게 되는데, 그 목적은 밀교연구 단순한 목적의 불적참배40)로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혜초의 구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금강지와 그의 제자 불공으로
41) , 혜초가 구법을 떠난 직후 이들의 활동사항을 살펴 볼 필요가 있는데, 혜초가 구법을 떠난 723년 금강지는 53세의 나이로 723년부터 장안 자성사와 천복사에 『칠구지불모준니대명다라니경』등 8부 11권의 비밀경전을 번역하기 시작하였으며, 혜초가 5년간의 구법을 마치고 중국 땅 구자에 도착하기 까지 그 사이 기간 내 724년 불공은 20세의 나이로 금강지 삼장을 모시고 대법과 밀교를 계승 받게 된다.


2) 구법 경로

 

구법경로를 살펴보는 데 있어 문서상 옛 지명을 현지도에서 규명하는 것이 가장 어려웠는데 그 개략적 경로를 살펴서 도식화 시켜 표와 지도로써 살펴보았다.
위 표에서 기술한 구법시기 및 경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법당시 연령과 여행 소요시간 별로 살펴보면, 법현은 인생의 고혼기라 할 수 있는 60대(399년, 60세)에 출발, 70대(413년, 74세)에 도착하여 구법에 소요된 시간이 총 15년이었으며, 현장은 20대(629년, 28세)에 출발, 40대(645년, 44세)에 도착하여 구법에 총 17년 걸렸고, 의정은 30대(671년, 37세)출발, 60대(695년, 61세)에 도착하여 구법에 총 25년 걸렸으며, 혜초는 20대(723년, 20세)에 출발, 20대(727년, 24세)에 도착하여 구법에 소요된 시간이 총 5년이었다. 의정은 나란다 대학에서 10여년 수학과정이 여행에 있어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현장은 최장거리의 왕복 육로여행을 통해 서역 각국에 대한 경험을 가장 많이 하였으며, 법현은 육로/해로의 여정을 통해 대륙과 섬의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었고, 혜초는 해로의 여행과 육로의 인도 및 아프카니스칸 및 당시 파키스탄과 대식(아랍일대)의 폭넓은 경험을 하였다.
구법여행을 개략적rute별로 살펴보면, 법현은 천산남로인 육로를 통해 -->해로로, 현장스님은 천산북로인 육로에서-->육로로, 의정은 해로로 가서 -->해로로, 혜초는 해로로 가서 육로로 돌아오게 된다.
인도에 체류한 기간42)을 비교해 보면, 인도 내 체류기간이 가장 길었던 사람은 의정 18년이며, 가장 짧았던 사람은 혜초로 3년이다.

이것은 법현, 현장, 의정이 인도에서 불법연구에 더욱 관심이 많았던 것에 비해 혜초는 그의 구법의 목적이 어떤 특별한 경, 률, 논을 구하는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지 순례 및 문화탐방의 순수한 목적에서 기인되지 않았을까 유추할 수 있다.43)  

 

법 현

현 장

의 정

혜 초

인도체류기간

11년(399-410)

16년(627-643)

18년(671-689)

3년(723-726)

 
(1) 법현

법현은 갈 때에는 천산남로의 육로여행을 하게 되는데, 399년(법현나이 60세)에 장안 출발-> 돈황을 거쳐 총령과 파미르고원(선선,언기, 우전 등)을 넘어 건타라국(간다라, 계빈국, 수도; 폐샤와르)을 거쳐, 인더스 강을 따라 북인도에 도착하게 된다. 중인도(룸비니, 붓다가야, 기원정사, 왕사성, 마갈타국(파탈리푸트라)등 8대성지를 거쳐 갠지스 강을 따라 다마리제국(현 Tanluk)에서 실론섬(현 스리랑카)을 거쳐 수마트라의 팔렘방과 자바 섬을 거쳐 중국 뇌산에 도착, 건강에 이르게 된다.
출발할 때에는 동학승 혜경, 도정, 혜응, 혜외, 지엄, 승소, 보운 등의 10여명과 함께 출발하였으나, 도중에 소식이 끊기고 (승소..), 귀국하는 사람(보운 etc..)도 있었으며, 혜응과 혜경은 북인도에서 죽게 되어  일행 중 중천축까지 함께 간 사람은 도정, 법현 두 사람뿐이었으며, 인도를 순례하고, 중국, 건강에 이르기까지 무사히 도착한 자는 법현 혼자였다. 여기에 파키스탄 중부지방에 남북으로 걸쳐있는 산맥인 소설산(소설산;슐레이만산맥 동북부)을 넘으며, 혜경의 죽음을 맞이한 부분에 대한 서술이 있는데, 
“소설산에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눈으로 덮여 있었다. 산 북쪽을 올라가고 있을 때, 차가운 바람이 사납게 몰아치자 사람들은 모두 숨소리도 못내고, 무서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일행 가운데 혜경은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고, 입에서는 흰 거품을 토하면서 법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 또한 살아날 수 없을 것 같군요, 빨리 가십시오, 우물쭈물 하다가 함께 죽어서는 안됩니다. ’ 이리하여, 혜경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법현은 그의 몸을 어루만지면서 비통해 하였다.  ‘우리들의 본래의 목적을 이루지도 못했는데 이런 곳에서 죽다니, 어인 일이오! 라고 울음을 터뜨렸다.-- 다시 힘을 내어 전진하여 드디어 고개를 넘을 수가 있었다” 44)
이렇게 "서역 실크로드여행"은 많은 희생을 강요했으며, 굳은 의지와 신념만이 힘이 되어줄 뿐이었다. 장안을 출발하여 돈황을 거쳐 총령과 파미르고원을 넘는 과정에서 선선선선->언기언기->우전우전등의 나라를 경유하게 되는데, 홍시 2년(400)에 서역에서 불교가 융성하였던 우전국에 도착한다. 우전국은 당시 ‘대승불교국가’로서 ‘개인집 대문 앞에 작은 탑을 세우고, 유행승을 머물게 하는 사방승방사방승방을 설치’ 하고 있었다. 법현 일행이 우전국에 도착했을 때 국왕은 당시 3000명의 승려가 수행하고 있는 대가람인 구마제사구마제사에서 그들을 맞이하였으며, 종과 목탁 등의 소리에 맞춰 공양하는 식당예법(식당작법)을 보았다‘는 『고승법현전』의 기록45)을 통해, 오늘날의 법공양이 1600여 년 전 중국에서는 벌써 행해지고 있었다고 하니, 당시 옛 승가와 현, 승가의 시간적, 공간적 거리가 아주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가?
당시, 우전국은 4월1일-4월15일까지 행해지는 부처님 오신 날 기념행사인 
’행상행상’46)으로 유명하였는데, 법현 일행 중 혜경, 도정, 혜달들 3인은 먼저, 길을 떠나고, 법현 등은 행상을 보기위해 3개월간 우전국에 머물게 된다. ‘행상’이라는 불교행사는 원래 인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서역 여러 나라에서 행해졌고, 중원지방까지 파급되었는데 이 행사를 보기위해 3개월간이나 머물렀다는 기록은 이 행상의 불교행사가 얼마나 우전국에서 성대하게 이뤄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법현은 그 후 우전국(호탄)과 건타라국(계빈국,간다라,수도:페샤와르)-->축살니라국(탁실라)-->인더
스 강 유역을 방문하면서 석가가 보살이었을 때, 살을 잘라 비둘기에게 준 유적과 몸을 던져 굶주린 호랑이에게 준 유적들을 감격적으로 순례하였다.

지도 3. 구법 여행경로 (법현/현장/의정/혜초)

 

천축(인도)에 도착한 법현은 북인도를 거쳐, 중인도(룸비니, 붓다가야, 기원정사, 왕사성, 마갈타국etc,,)의 8대성지를 순례하게 되는데, 인도중부에 있는 파탈리푸트라(Pataiputra, 마갈타국 수도, 현 파트나patna)의 천왕사천왕사에서 3년간 머무르면서 호서와 호어를 배웠으며, 대중부의 율장을 필사하는데 열중 하였으여, 설 일체 유부의 율장인 <대반열반경대반열반경>도 구입하였고, <살바다율초살파다율초>, <잡아비담심론잡아비담심론>, <방등니원경방등니원경>등과 <마하승기율 마승기율>등을 연구하는 등 불경과 불상들을 얻게 된다.47)돌아오는 길은 해로해로를 통해 오게 되는데 인도의 항구도시인 다마리제국(다마리제국) 48) 에서 2년간 수학하면서 경전을 필사하였고, 이곳을 기점으로, 해로를 통해 사자국(세일론Ceyon;현 스리랑카)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때, 동행한 11명중 남은 것은 법현 한 사람뿐이었다. 사자국에 도착한 법현은 ‘5000명의 승려가 살고 있는 무외산무외산의 불전에서 2자높이의 옥으로 된 불상을 보고는 고향을 향한 향수로 인해 감정이 복받쳐 올라 있었는데, 옆에 있던 상인이 준 중국 흰 부채를 공양 받고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다한다.’49)
 당시, 사자국은 설일체유부가 유행하던 곳이라50) 법현은 이곳에서 2년간 머물면서 화지부화지부 의 율장과 설일체 유부의 경전을 얻게 되는데, <미사세율미사세율>,<잡아함경잡아함경> <잡장경잡장경>등의 호본을 얻게 된다. 이 후에 상선을 타고, 동쪽으로  돌아 야바제국야파제국(자바섬)을 경유하여 중국, 광주에 도착하려 했으나, 도중에 풍랑을 만나 200일 이상을 바다위에서 표류하다가 413년(의회9년) 중국 산동성 로산만 부근인 청주 장황군 뢰산에 도착, 건강에 이르게 된다.51)



(2) 현장
태종 정관 원년627년, 현장은 뜻 맞는 동지들과 함께 ‘천축에 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싶다’고 탄원서를 냈지만, 당시 중국(당)은 혼란기로 말미암아 서역과의 교류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거절당하였다. 그 후 2, 3번에 걸친 탄원서에도 허가가 떨어지지 않자 뜻을 함께한 동지들은 구법을 단념하였으나 현장만은 구법의 뜻을 굳게 지닌 채 몰래 국금국금을 어기고 비밀출국하게 된다.52)
현장은 17년간, 5만 리의 여정 육로로써, 왕복 횡단하였으며, 629년 장안 출발하여 천산북로의 길을 택하였다.

돈황의 맞은편에 있는 옥문관을 거쳐, 난주, 양주, 감주 등의 오아시스가 펼쳐져 있는 하서회랑지대을 지나 과주->고비사막을 건너게 되는데, 당시 쇄국쇄국의 단속이 엄했기 때문에 낮에는 잠복하고, 밤을 통해 길을 떠나, 겨우, 과주과주에 도착하게 되지만, 과주에서 고비사막을 넘는 동안 ‘석반타석반타’란 길 안내인에게 목숨을 잃을 뻔도 하고, 길을 잘못 들어 목말라 죽게 되어 살아있는 늙은 말의 간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고 ‘이오이오’에 도착하게 된다. 이오에는 마침 고창의 대신(사자)이 있었는데, 불교의 열렬한 신도였던 고창왕 국문태는 ‘이오’에서 돌아온 사자에게서 “중국의 유명한 승려가 오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잘 길러 교육시킨 준마 수십 필로 환영사절단을 보내니, 현장은 원래 이오에서 천산산맥 북쪽을 통해 서쪽으로 가려했으나, 경로를 바꾸어 ‘고창’으로 향하게 된다. 여기 고창에서 『인왕반야경인왕반야경』을 강의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4-5세기경부터 한인의 식민지국으로 번영을 유지했던 고창에서 현장은 그의 지식과 인품에 대해서 대 환영을 받게 된다. 특히, 국왕 국문태는 현장에게 인도유학을 그만두고, 고창의 국사가 되어주길 권하였으나, 현장은 구법의 결의를 확실히 밝혔으며, 『인왕반야경』을 강의해 달라는 청탁을 수락하게 된다. 이에 국왕, 대신, 고승들을 대상으로 『인왕반야경』을 강의하였으며, 1개월 후 현장이 떠나려 하자 고창왕은 4명의 종자를 비롯하여, 법복 30벌, 여비로 황금100냥, 은전 30,000매, 능견 500필, 말30두, 인부 25명 등을 선물하였으며, 인근 제방국가 및 특히, 당시 천산남북로의 실권을 쥐고 있던 서돌궐 통엽호카간에게 정중한 의뢰장 및 선물을 지참시켜 보내게 하여, 현장의 구법여행을 순조롭게 하기위한 적극적 지원을 해 주었다.  이러한 고창왕 국문태의 지원 가운데, 당시 불교문화가 유명했던 천산남로의 국가인 아기니국(언기)->쿠차국(구자)등을 따라 여행하게 된다. 능산(능산;베달 고개)을 넘어 이삭쿨 호반Issylk kul을 돌아 소엽성소엽성에 이르기까지 능산 에서는 눈이 깊게 쌓여 13-14명이 얼어 죽고, 많은 소와 말을 잃었으며, 도적에게도 2-3번 당했다. 소엽성은 당시 서투르게스탄 각국 상인들이 모여 상업도시를 형성하고 있었다. 소엽성 근방에서 현장은 서돌궐 카간을 만나게 되는데, 카간은 그의 본부인 아장아장에서 고창왕이 전해준 선물과 의뢰장(친서)을 받아 보고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이제, 현장은 유목민인 통엽호 간(돌궐제국왕)의 보호 하에 여정을 떠나는 특권을 가질 수 있게 되는데, 카간은 인근의 국왕에게 보내는 친서와 비단 등의 선물, 중국어, 투르케스탄 등의 다국어에 능통한 통역인까지 동원시켜, 서북인도, 카필시국까지 무사히 갈수 있도록 지원해 주게 된다. 이렇게 천천(소련의 탈타부근)에서 ->타쉬켄트(샤수)를 지나 사마르칸트에 이르게 되는데, 당시 사마르칸트는 ‘토양이 비옥하고 온화한 기후로 좋은 말이 많이 나며, 베짜는 기술이 특히 뛰어난 곳’으로 각국의 진귀한 상품들이 모였던 나라’로 기술되어지고 있다. 사마르칸트에서 남하하여 철문을 지나 활국에 이르게 되는데 활국은 서돌궐 카간의 큰아들(장자)가 주재하고 있던 나라였으며, 왕비 또한, 고창왕의 누이였는지라, 고창왕이 그의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었지만, 현장이 도착했을 당시, 왕비는 죽고, 왕인 달도설도 병환에 있었는데 달도설의 장남이 가하돈이라는 왕비와 내통하여 아버지를 독살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새로 부임한 왕의 권고를 통해 박트라를 거쳐 바미얀대굴(Bamiyan,범연나국범연나국)에서 유적을 참배하고, 카필시국의 사락가사사락가사에서 보내었으며, 그 후에 남파국->건타라국(간다라, 페샤와르)->탁실라를 지나 중인도에 도착, 8대 성지를 다니며, 마가다국에 도착하니, 그의 나이 31세(631)가 된다. 현장은 마가다국의 왕사성 북쪽, 교외에 있는 나란다 대학에서 5년간(631-635)공부하게 되는데, 이 당시 인도는 대승불교가 흥기하고 있었으며, 특히, 나란다대학53)에서는 교수 1700여명과 학승 1만여 명을 수용하고 있었으며, 대ㆍ소승 불교 및 여러 종교와 문화, 사상, 학문을 섭렵하고 있어 7c 현장이 인도 유학시 좀 더 폭넓게 배울 수 있는 계기적 시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장은 나란다 대학에서 주로, 계현논사 문하에서 유식의 주요 논서인 『유가사지론유가사지론』을 사사 받았으며, 『구사론구사론』, 『바사론파사론』, 『인명학인명학(논리학)』등을 연구하였다. 그 후 7년 간 인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지식을 배알하는 등, 641년 (41세) 인도에 유학한지 12년 만에 나란다 대학에 돌아오게 된다. 계현논사의 뜻에 따라『섭대승론섭대승론』『유식결택론유식결택론』을 강의하였는데, 그때에 사자광이 『중론중론』,『백론백론』을 강하면서 현장의 설을 반박하니, 현장이 중관론과 유가의 2종을 회통하여 『회종론회종론』을 지어 3000여개의 게송으로 의심을 파하였으며, 후에 『파악견론』1600여송을 지어 오다국(오다국)의 소승논사들의 『파대승론』을 파해서 꺾어주니, 오천축에서 현장의 명성이 떨쳐지게 된다.
당시, 중인도를 통일한 계일왕(계일왕, 하르샤르왕)은 현장의 명성을 듣고, 예로써, 배알하려 했다 한다.
642년(42세)에 현장이 중국으로 돌아가고자 하자 계일왕이 
곡여성(곡여성)에서 사를 위해 대법회를 열어주었는데, 이것이 불교 역사상 이름을 드날린 “곡여성변론대회곡여성변론대회”로 5인도 18국왕의 좌석이 균등하게 있었으며, 대, 소승 및 바라문 7000여인들이 참석한 대규모의 법회였다. 현장은 이 법회에 논주가 되어 대승을 크게 칭량하여 호평을 얻었다 한다. 이 법회 기간 중 ‘논문『진 유식량 진유식량』의 게송을 제출하여 법회도량 문밖에 매달았다’는 기술54)이 있는데 아마도 이 당시에는 법회 때 논문을 게송으로 지어 산문밖에 매달아 놓음으로, 대중들이 함께 보고, 논할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 같다. 법회 18일간 이 논문에 대해 힐난하는 자가 한사람도 없었다 하니, 얼마나 완벽한 내용이었나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법회 기간 중 계일왕은 더욱 현장을 숭배하였으며, 법회 후에 18개국 왕들이 사에게 귀의하여 제자가 되었다. 법회 후에 현장이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하자 그래도 아쉬움이 남았던지라 계일왕은 현장의 전송을 높여주기 위해 수도 발라나가성 발라나가성에 18개국의 왕들을 모아 75일간의 무차대회 무차대회를 열어주었다.
이에, 정식으로, 계일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643년(정관17년, 43세)에 드듸어 귀향길에 오른 현장은, 지금의 신강성 남쪽 길을 경유하여 남파국 ->가즈니->카불->활국->카슈가르->우전국(호탄)에 도착하여, ‘그동안 잠시 잃었던 경전을 모으고, 당 태종에게 입국허가를 요청하는 문서를 보내었다. 몇 개월 후 태종으로부터 ’모든 편의를 도모할 터이니,. 하루 빨리 귀국하라‘는 정중한 편지를 받게 된다.  이 후에 현장의 심정이 얼마나 기쁨에 부풀고, 떨렸는지 그 표현을 어떻게 기술할 수 있을까? 서역남로(비마성->니야성->토하라->찰마다나등)의 모래 길을 경유, 사주사주로 향하는데,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이 당시 남도의 오아시스가 황폐하며, 성곽은 있으나,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 누란이 멸망하고 실크로드의 하나였던 서역남로가 황폐해졌음을 살펴볼 수 있다. 55)645년(정관19년) 현장나이 44세에 곤명지를 지나 장안에 도착하게 된다. 이 부분에 대한 기술을 살펴보면, ‘곤명지에서 장안으로 들어오는 샛강위에 한척의 배가 정박을 서두르고 있었다. 배 위에는 많은 짐과 이상한 사람의 복장을 한 승려 한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바로,17년의 여행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현장이었다. ‘현장이 장안 도착 시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들어 길을 가는 것도 불가능했다56) 할 정도로 이렇게 장안을 출발해서 단신으로 인도로 유학 갈 때는 비밀출국이나 다름없었으나, 17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무사히 돌아왔으면 하는 왕의 바램과 국민들의 염원이 함께 동반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당시 현장의 명성이 중국(당)에 알려져 국가의 왕과 국민의 지지를 얼마나 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장안에 돌아올 때, 불상8구, 불사리 150과, 경ㆍ율ㆍ론 원전520협, 657부 범본을 20마리의 말에 싣고 돌아왔다. 당태종과 고종은 현장을 흠모하고, 존경하여, 궁궐에 공양 청을 내어 불렀으며, ‘삼장법사삼장법사’라는 시호를 내리게 된다. 
57)

  
(3) 의정

 

의정은 나이 15세에 법현과 현장이 서쪽인도에 유행한 것을 사모하였고, 현장이 서쪽인도로 여행할 당시, 의정은 20세의 나이로 구족계를 받은 시기였다. 의정은 현장이 입적한 뒤 7년 후에 인도로 향하게 되는데, 의정의 인도유학으로의 여정은 왕복 해로를 통해 이루어 졌다. 671년(함형2년) 의정나이 37세에 장안을 출발하여 동쪽의 양자강을 따라 광주에서 남해항로를 따라 배를 타고, 수리비자야국(수마트라)의 팔렘방에 도착하게 된다. 당시, 수리비자야국은 소승의 ‘설일체유뷰’가 융성하고 있던 때인지라. 여기에서 현장은 1년 이상 머물면서 공부하게 된다.

673년 인도 타무라리페(현 캘커타지방인근 Tamluk지역)에 상륙하여 영취산, 계족산, 녹야원, 기원정사 등 불교성지를 순례하였으며, 나란다 대학에서 부지런히 10년간 불교를 공부하게 된다. 돌아오는 길은 685년 인도 캘커타에서 출발하여 수리비자야국(수마트라)의 소문답랍(팔렘방 인근지역)에서 7년간 유행하며 배웠는데, 여기서 『남해기귀내법전』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2권을 집필하였으며, 의정은 이 여행에서 30여개국의 유행을 통해 얻은 범본과 경론 약400부 사리300과를 가지고, 695년 61세, 낙양에 도착하니, 측천무후가 친히 동문 밖에 이르러 영접했다.


(4) 혜초
지금 전해지는 『왕오천축국전』은 앞뒤가 떨어져 나간 227행 1권이 절약본으로, 여행경로 전모를 다 알수는 없으나, 다만, 핵심부라 할 수 있는 인도/중앙아시아 행적은 여행기 속에 기록되어 있고, 혜림의 『일체경음의』100권 에서 ‘혜초왕오천축국전’ 3권에 나타난 주요경로58)를 통해 여정을 살펴볼 수 있다.
혜초 구법경로의 문헌적 증거
59)를 찾아보면 가는 길이 ‘해로’ 였다고, 명확히 기재된 문헌을 찾을 수 없으나, 당시 당대 신라의 구법승들은 대부분 해로(계절풍)60)을 통해 인도로 진입하였으며, 『일체경음의』상권에서 ‘남해 해안 도서지방의 특산물, 지세, 주거상황’등의 해양에 관련된 어귀들을 통해 갔던 길이 해로 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으며, 오는 길이 ‘육로’에 대한 증거는 『왕오천축국전』내에 ‘소륵(안서)으로 동쪽으로 한 달 가면 구자국(언기)에 이른다’는 내용을 통해 여기서 부터 동쪽은 모두 당의 영역임을 혜초가 육로를 이용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지의 권유로 구법을 떠난 혜초는 스승 금강지가 당시 인도의 고승이었고, 중국에 와서 포교를 한 것을 미루어 볼 때 여행경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충분했으리라 추측된다.
혜초는 답사지역에 있어 어디서부터(종), 어느 방향(동, 서, 남, 북), 얼마동안(일, 월), 가서(행), 어디에 이르렀다(지)‘라고 하는 관용 시문구로 분명히 표시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61) 여정지역을 규명하는데 있어 모호한 지역은 ’나인국62)‘에 대한 명시인데, 니코바르제도의 ’말레이반도 북부‘로 보는 견해와 인도 내 바이샬리(폐샤리국)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확증된 바가 없어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혜초는 갈 때에는 해로를 이용하였는데, 광주에서 출발하여 계절풍을 이용하여 항해를 떠나 수마트라의 팔렘방
63)을 거쳐 동인도에 도착하였다.
혜초가 천축에 도착한 후 중국 땅 언기에 돌아가기 까지 
개략적인 경로를 살펴보면 인도에서는 동천축->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 순으로 방문하였고,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대식(아랍) 순으로 서역 일대를 순방한 뒤 중국 안서 도호부가 있는 언기에 도착하게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동천축 다마리제국(현탐루크)에 도착한 혜초는 황하강과 줌나강 양쪽에 위치한 성지순례를 한후 중천축로 와서 쿠시나가라-> 바라나시-> 왕사성-> 붓다가야 순으로 불교 4대성지를 순례한후 슈라바스티(사위국)의 급고독원, 비야리성의 암라원탑, 가비야라국탑, 삼도보계탑인 4대 성탑을 순례한 후 중천축 수도 ‘갈라굽차’에 도착하여 5천축국의 기후, 풍습을 총괄적으로 서술한다. 갈라굽차에서 3개월
64)걸려 현 데칸고원 지방인 남인도에 도착, 용수보살의 신력으로 세운 대사원을 돌아보았으며, 그 당시 남천축(서찰루키아국)의 수도였던 ‘나시크(Nasik)65)를 지나 남천축에서 출발한지 3개월 이상 걸어 서천축 수도인 알로르66)에 도착하였으며, 3개월 걸려 북인도 수도인 판잡지방의 ‘잘란달라’에 도착하게 된다.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은 육로로, 북인도에서 서쪽으로 1개월 가면 파키스탄 영토 내 탁실라(토사국/토카리스탄)에 도착하며 신두고라에 가서 석가가 설법한 바 있는 다마삼마나사를 순례한 뒤 잘란달라로 돌아와 캐시미르에 도착하기 까지 15일이 소요된다. 캐시미르(가섭미라국)에서 서북쪽으로 1개월 가서 간다라에 도착하여 카니시카에 세운 큰절을 보았으며, 간다라에서 북쪽으로 3일 가면 오장국(우디아나)에 도착하며, 오장국에서 동북쪽으로 15일 가면, 치트랄(구위국)에 도착하여 현 아프카니스칸 영역인 남파국을 순례한 뒤 간다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간다라에서 서행하면, 계빈국(카불)에 도착하고, 계빈국에서 서쪽으로 7일 가면 가즈니(자브리스탄)에 도착하며, 가즈니에서 북행으로 바미얀(범인국)에 들어가며, 바미얀에서 20일 걸려 페르시아(파사)에 도착하게 되고, 페르시아에서 북쪽으로 10일 가면 대식국 내 중앙아시아 통치지역인 ‘나이싸불
67)’에 도착하게 된다.
대식(대식)은 ‘아랍’을 지칭하는데, 아라비아 여러 나라들에 대한 온전한 명칭은 아니고, 아랍나라들과 여러 피정복국(아랍제국)에 대한 통칭으로, 여기에는 1000여개의 나라가 포함되며 당, 의정(635-713)의 『서역구법고승전』중에서 “다씨” 라고 언급하였으나, 이것은 문단 가운데 지나가는 말에 불과하며, 정확한 국명으로 대식을 소개한 최초의 문헌은 신라승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으로 이것은 아랍에 대한 기록의 효시며, 페르시아와 아랍간의 정복/피정복 역사를 언급하고 있다.
68)
혜초의 구법경로에서 대식은 서역진출의 끝부분으로 혜초 구법여정의 서단이 ‘대식’이라 하는 근거69)는 먼저 문면상문면상의 근거로 ‘토하라로부터 서행한달만에 페르시아에 이르렀고, 북쪽으로 10일 가서 대식에 도착하였다’는 기행문의 관용 시문구로 살펴볼 수 있고, 두 번째, 기행문이 페르시아, 대식에 관한 종교 신앙(특히 불교), 정치, 생활풍습 등의 기술이 정확성을 가진다는 것이며, 셋째, ‘기행문에서 처음으로 대식을 거론하면서 ’서천축은 대식의 내침을 받아 나라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트랜시옥시아나에 있는 6개 호국과 시르디리아강 동남유역에 있는 페르가나국과 코탈국이 모두 대식의 지배하에 있었다’등의 대식국에 대한 역사인식을 통해 토하라를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 일대가 이미 대식국(아랍국)지배 하에 들어갔었음을 알 수 있으며, 혜초는 대식(아랍)과 당 의 영향 하에 있었던 토하라로부터 대식국 영토 내 어느 한곳을 방문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대식에서 혜초는 부하라(안국), 카부단(조국), 키시시(사국, Kishsh), 펜지켄트(미국), 사마르칸트(강국), 큐샤니아(하 국)의 호국 6국과 우즈베키스탄(페르가나), 쿠탈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들었다. 동쪽으로 가서 토하라(토카리스탄)에 도착하고, 토하라에서 동쪽으로 7일 가면, 와칸(호밀국)에 이르고, 보름을 더 가서 파미르 고원(총령)
70)에 이르러 1개월 후에 카슈가르에 도착하고, 1개월 후 당의 영토인 안서도호부 쿠자(구자국/귀현)에 도착하게 되는데, 때는 당, 현종 개원 15년(727)11월 상순71)에 해당된다. 다음에 도착하는 곳은 언기로 언기 이하 부분은 내용이 결락되어 장안까지의 정확한 경로 및 노정을 알 길이 없으나, 『일체경음의』에 나오는 성국(성국)이 고창왕의 성이었다는 점에서 혜초의 경로는 서역북도를 따라 고창->돈황을 거쳐 728년 장안에 도착했으리라 추측할 따름이다.72)


Ⅲ. 구법승들의 기행문 분석

1. 출간저서 소개

 

 

법현

현장

의정

혜초

대표적 역본

 - 각현과 공역 ; <대반니원경> 6권<마하승기율> 40권 <잡아비담심론>13권,<방등경>

<대반야경>600권, <유가사지론>100권,<대비바사론>200권,  <구사론>,<섭대승론><성유식론>,<해심밀경>5권,<순정리론>80권,<아비달마대비바사론>

<화염경>80권 번역참여 ;보리유지/실차난타/의정, 후에 실차난타/복례/법장에 의해 완성

<하옥녀담기우표>1편, <대승유가천비천발만수실리경>필수<대승유가천비천발만수실리경>서작성

여행기행문

<법현전>

<대당서역기> 12권

<남해기귀내법전>4권, <대당서역구법고승전>2권

<왕오천축국전>3권

 

구법 후 역출한 출간저서의 성격은 구법의 목적과 연관성을 가졌다. 중국 구법초기 단계에 구법한 법현은 구법목적이 경, 률 연구에 있었기 때문에 구법 후에도 소승의 대중부 율장계통과 대승경전계통의 역본이 많았다. 현장은 구법 전 유식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구법 후 역출한 것도 유식, 구사, 아비담 계통이 많은 비중을 차지했으며, 의정은 계율에 관심이 많아서 유부비나야 율장 대부분이 의정에 의해 번역되었으며, 혜초는 밀교승으로서 구법 후에도 밀교계 대표적 경전인 『대승유가대교왕경』연구에 평생을 보냈다.

 

 

1) 법현



법현은 413년(의회9년)에 , 구해 온 범본 경ㆍ율을 바탕으로, 건강의 도량사도장사에서 번역사업을 하게 된다. 그 중 414-416년간 건강에서 인도, 서역견문기인 『불국기불국기』(『법현전법현전』)을 남겼으며, 대표적 역본으로는 당시, 건강 도량사에서 번역사업을 하고 있던 북인도출신 승려 각현(불타발타라)과 함께 열반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번역한 『대반니원경』6권과 소승의 대중부의 율장인 『마하승기율』40권을 펴냈으며, ‘대승경전의 총칭’이라 할 수 있는 『방등경』등 63권에 해당하는 경전을 번역하였다.73)

 

2) 현장

 

현장은 ‘유학 후 당, 태종으로부터 불도를 버리고, 정치 돕기를 권유받자, “불문의 치문 계를 지켜 부처님께서 남기신 법을 첨양하고자 하나이다”하고, 3번을 거절하자, 태종이 오직 현장의 뜻을 쫒아 역경을 도왔으며, 장안에 역경원을 세웠다.’는 기록과 같이 현장은 645년 인도유학 후 당 재왕들의 위호를 받으며 17년간의 여행을 바탕으로 번역에 몰두하였는데, 특히, 당, 태종은 648년 장안의 대자은사 대자은사에 현장을 위해 번경원번경원이 설치토록 하여 현장의 역경을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664년 장안의 옥화사 옥화사에서 입적하기까지, 무릇 19년 동안 번역한 것이경율 75부 1335권으로, 실로 5일에 1권씩의 비율이었다.74)  주요 역본으로는 불교의 반야 공사상을 담은 『대반야경대반야경』600권, 유식사상의 기본서인 『유가사지론유가사지론』100권,『성유식론성유식론』,『해심밀경해심밀경』5권, 『순정리론순정리론』80권, 유식논서로 대승 교리의 우세성을 설명하고 있는 『섭대승론섭대승론 』, 소승불교의 교리체계를 설명하고 있는 『구사론구사론』, 『아비달마대비바사론아비달마대비파사론』등으로75), 이렇게 현장이 불교의 교리를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폭넓게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인도의 사회, 문화, 종교적 배경의 영향으로, 불교의 대, 소승을 망라하여, 고루 익힐 수 있는 기회 덕분이 아니었던가? 또한, 현장의 번역본 가운데 특이할만한 것은 '밀교관계의 경전이 적지 않게 많다‘는 점인데, 이것은 당시, 중국에서 유행한 인도, 서역밀교의 영향과 초기의 당왕조로부터 호국적 불교의 요청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추측 할 수 있다.76) 또한, 현장은 인도기행문으로 『대당서역기』를 남겼다.

 

 

3) 의정

 

의정은 695년(60세) 낙양에 도착하여 측천무후의 비호를 받으며, 낙양의 불수기사불수기사와 장안의 대천복사대천복사의 번경원에서 25년간의 인도, 서역여행을 바탕으로, 역경사업을 펼치게 되는데, 우전 인으로, 당대 역경승인 실차난타, 보리유지와 함께 『화엄경』80권을 번역에 참여하였으며, 후에 이것은 699년 실차난타, 복례, 법장 등에 의해 번역이 마쳐지게 된다. 또한 10여년 뒤인 706년에 장안의 대천복사의 번경원에서 입적 때까지 역경에 종사하게 되는데 경룡, 경운 연간(707-711)『용상공덕경』등 20부 88권과 『칭찬여래공덕신주경』12부 21권을 번역하였다.77)
의정이 집필한 여행기행문은 2가지로, 불교의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인도까지 건너가 수학하던 승려 60여분의 간단한 전기
78)인 『대당서역구법고승전』2권과 의정이 서역구법여행을 미치고 집필한 『남해기귀내법전』4권이 있다. 이렇게, 의정은 귀국당시에는 코탄의 승려 시쿠샤난타와 협력하여 『법화경』의 번역을 도왔으며, 화엄의 신역과 계율, 유식, 밀교 등의 전적을 한역화에 참여하였다. 699년(성역2년)으로부터 경덕 2년(711)에 이르기까지 13여년에 걸쳐 56부 230권을 역출했으며, 구마라집, 진제, 현장들과 더불어 ‘4대 역경가’라 불릴 정도로 ‘유부비나야’등의 율장의 대부분이 의정으로부터 번역되었다. 79)


4) 혜초



혜초는 5년간의 구법을 마치고, 727년 그의 나이 24세에 구자에 도착한다. 그 이후 6년 후에 733년 1월1일 장안에 도착하여 역경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장안의 천복사에서 8년간(733-71)금강지를 시봉하며, 밀교경전연구에 혜초의 대표적 출간저서는『대승유가대교왕경 대승유가대교왕경』서와 『하옥녀담기우표 하옥녀담기우표』, 여행기행문으로는 『왕오천축국전』을 남겼다.
혜초가『대승유가대교왕경』을 금강지에게 전수받아 그 서문을 남기기까지 그는 48년간 그의 생애절반이상을 이 경의 연구에 쏟았다.
80)
『대승유가대교왕경』의 서문이 출간되기 까지 혜초가 사사받은 두 스승 금강지와 불공사이에서 그 과정을 표 11을 참고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법 후 돌아와 733년 스승 금강지와 밀교연구시작,『대승유가대교왕경』을 사사받았으며, 737년 금강지가 현종황제에게 유가밀교경전을 올려 5월 5일 황제가 윤허해 주어 본격적으로 금강지는 『대승유가대교왕경』의 범본을 번역하기 시작, 740년 혜초나이 37세, 금강지는 혜초에게 이 경의 필수를 맡기게 된다. 741년 혜초38세에 금강지는 71세로 입적하였고, 이로 인해 이 경전의 한역작업은 일시 중단되었고, 유언에 따라 이 경의 원문은 인도로 보내졌다.
금강지가 입적한 해에 불공(37세)은 금강지의 유언을 받들어『금강정경』을 구하기 위해 인도로 구법을 떠났고, 42세에 중국으로 경, 논을 가지고 돌아왔다. 혜초와 불공이 만난 것은 773년 혜초나이 70세, 장안 대흥선사에서 불공의 강의를 수강하면서이다. 혜초는 불공의 상수제가가 되었으며, ‘관정도량’등 밀교의식을 주도하였으나, 그 다음해 774년 불공은 세수 70세로, 입적하였고, 유언으로 불공을 그의 6대제자중 2인자로 규명하였으며, 혜초는 스승을 위해 황제에게 표문을 올렸으며, 대흥선사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 하였다.
780년 혜초나이 77세에 4월15일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마지막 여정을 보냈는데, 5월 5일 까지 20일간에 걸쳐 전에 필수를 맡았던 『대승유가대교왕경』옛 한역본을 다시 얻어 채록하면서 서문을 작성하게 된다. 
81)

『대승유가금강성해만주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82)은 총 10권으로, 간략히 『천비천발만수실리경』, 『천발경』이라 하며, 금강지 삼장이 역출, 혜초가 필수 하였다.
『대승유가대교왕경』서는 간략히, 『천발경』서,『대교왕경』서라 한다. 짧은 서문이긴 하지만, 금강지 불공에게서 받았던 법문인 『대승유가천발만수실리경』의 비의(비밀뜻)이 약술되어 있다. 이 서문은 혜초의 행적과 교학연구자료로 유일하게 현존하는 자료로, 전승교법전승교법과 교학사상교학사상
의 일부분을 엿볼 수 있다.
『하옥녀담기우표하옥녀담기우표』
83)는 혜초나이 59세-76세(762-779)년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혜초가 당명에 의해 주옥현주옥현 옥여담에서 비가 내릴 것을 축원하고 비가 흡족히 내렸으므로, 옥여담이 기우기우에 효험이 있음을 경하’하는 내용으로 왕에게 올린 표문이다.
이 짧은 내용의 표문이긴 하지만, 혜초의 인도구법 후 행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 당시 금강지, 불공문하에 여러 뛰어난 제자가 많았겠으나, 고승, 대덕과 같은 법력을 가지고 있지 않고는 진행하기 어려운 일들을 왕은 외국인인 신라인에게 칙명을 내려 국가적 차원의 행사인 ‘기우제’를 주관케 했으며, 왕에게 올리는 표문을 쓰고, 밀교의 대표적 경전 서문을 쓰고, 필수를 맡아 역경사업에 동참했다는 사실은 혜초의 출중한 필력과 밀교승으로서의 재능을 타국중국땅에서 외국인 스승과 인정받고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사실이다.
84)




2. 4대 기행문 분석

일반적으로, 4대 기행문85)이라 하면, 법현의『불국기 불국기』86), 현장의 『대당서역기대당서역기』87)와 의정의『남해기귀내법전남해기귀내법전』88),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89)을 들 수 있는데, 이 4대 기행문의 비교에 있어 구별되는 특징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찬술저자에 있어, 또한, 『불국기』,『남해기귀내법전』, 『왕오천축국전』에 비해 『대당서역기』는 공동 찬술한 것으로 현장이 번역, 변기가 찬술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장의 기록에 비추어 변기가 편집하여 기술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90)

둘째, 기행문 찬술시기에 있어, 『불국기』와 『대당서역기』, 『왕오천축국전』은 여행 후에 기록된 것으로『불국기』는 414-416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13년 7월에 하안거를 마친 뒤 건업 땅에서 저술되기 시작한 것인데, 416년 도반들에게 간략히 기록되어진 약기『불국기』를 강연한 뒤, 그 해에 다시 상세히 기술되어 완성된 것이다.『대당서역기』는 646년 당, 태종의 칙령에 의해 쓰여졌다.『남해기귀내법전은』여행 도중에 기록한 것으로, 685년 캘커타를 출발하여 귀국하는 도중 슈리비자야국에서 7년간 머물면서 기록하였으며.『왕오천축국전』은 구법후인 727년 11월 이후에 기록된 것으로 예측된다.

 

셋째, 기행문의 내용적 가치및 중요성에 있서 기행문의 각각의 특징을 살펴보면, 인도, 서역 전역을 포함하는 가장 방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은 『대당서역기』로 친히 밟은 나라 110국, 전해들은 나라 28국으로,  가장 방대한 기록을 담고 있어 7c전반 인도, 중ㆍ아시아의 고대 지리연구에 있어 필수적 지침서로 거리, 방위, 물건의 크기, 원어 표기에 있어 정확히 표음하고 있다.
육로, 해로의 다양한 지역의 탐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불국기』과 『왕오천축국전』으로, 『불국기』는 중국승려가 성공적으로 서역 구법을 마치고 저술한 최초의 서역견문록으로서 ‘현존하는 최고의 전적’으로 여행한 곳의 중요한 견문을 정확히 기록하여 전하고 있으며, 5c초 서역, 인도의 불교/불교문화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왕오천축국전』은 한문화권에서의 최초의 ‘대식 현지견문록’으로, 국명으로 정확히 ‘대식’을 거론하였으며91), 8c초 중앙아시아 및 아랍지역에 대한 정세, 불교형태, 문화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당시 고대인도 초기역사, 동서 국제교류사, 중국불교발달사, 민속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율에 대한 집중적 설명 『남해기귀내법전』에서는 의정의 구법목적이 당시, 계율이 미비한 것에 대해 출발한 것에 비추어서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7c 말레이군도 및 인도 경ㆍ룰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설일체유부의 입장에서 율을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당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분포상황을 자세히 소개, 승가작법 승가작법(수계/자자/포살 등)및 행위 작법 행위작법(의식주생활 등)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으며, 인도와 남해의 계율의 실체와 승단생활을 중국승단의 풍토와 비교, 장ㆍ단점을 기술함으로써 중국 승려의 반성을 촉구하는 등 인도와 남해에 존속했던 불교교단의 조직/계율과 문화, 풍속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넷째, 당시 
서역 및 중앙 아시아 현황 시대별로 살펴보기 위해 혜초의 여행경로를 중심으로 인도 5천축과 중앙아시아 구법경로에 있어 법현(5c), 현장(7c), 의정(7c)의 구법지역이 동일한 부분을 각각의 지역별로 분석하여 비교하여 표로 나타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92)

중천축에서는 5세기에서 8세기로 갈수록 당시 인도의 8대성지의 화려했던 불교문화유적지들은 많이 페허가 되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었으며, 5세기에는 대승이 우세, 7세기 현장 때는 대, 소승이 병행, 의정 때는 소승이 우세하였고, 8세기에는 힌두교의 부흥으로 불교가 쇠퇴되었으나, 초기 불교의 한계점을 극복하려는 입장에서 대승교와 밀교가 대두되어 대, 소승의 병행형태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남천축에서는 7세기 현장이 방문 했을 때는 불사의 수와 이도들의 사원수도 많았으며, 불교 학술활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혜초가 방문한 8세기에는 혜초여행기에만 볼 수 있는 용수보살의 700년 장수설93)이 유행하였으며, 대, 소승을 병행하였고, 왕과 백성들이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였던 것으로 보아 불교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서천축은 7세기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아랍지역을 다씨’라고 서술하였는데, 서천축국 상황설명에 있어 8세기 혜초는 ‘대식의 내침에 의해 나라의 절반이 파괴되었다’고 기술함으로써 8c문헌상 대식(아랍지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볼 수 있으며, 7c는 아랍을 ‘다씨’, 8c에서는 ‘대식’으로, 명명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교는 7c의정이 방문했을 때는 ‘소승정량부’가 성행하였고, 8c혜초가 방문했을 때에는 대, 소승이 병행하고, 사원, 승려수도 많고 삼보를 지극히 공경했음을 볼 수 있다.
북천축에서는 8세기에는 대부분지방이 돌궐/호족 지배하에 있었으며, 일부는 대식국의 침입을 받았지만 잘란달라, 캐시미르, 간다라를 중심으로 부흥운동이 일어나 불교가 활성화 되었으며, 대, 소승이 병행되었고, 사원과 승려가 많았으며,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오
천축의 전반적 흐름을 살펴보면, 5세기에서 8세기로 올수록 소승보다 대승불교가 활발하였고, 오천축국 내에서도 중천축국에서 북천축국으로 갈수록 옛 인도의 찬란했던 문화가 황폐화 된 모습에서 불교가 부흥화, 활성화 되어 감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중앙아시아내의  5-8세기의 흐름
을 살펴보면, 점차 불교가 소승-->대승화 되어가는 추세를 보였으며,  8세기 혜초의 페르시아 및 아랍지역인 대식방문을 통해 폐르시아, 대식일대는 불교가 아직 전래되지 않았던 것을 살펴 볼 수 있으며, 특이할만한 객관적 사실은, 불교가 성행화 되고, 대승화 된 지역일수록, 백성들이 온순하고, 소박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페르시아, 파사 및 대식(아랍)일대는 불교가 전래되지 않았던 곳으로, 하나님을 숭상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불교전파의 서계94)로,  이곳 백성들은 투쟁문화로 전쟁하고, 살생하고, 침략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다섯째, 여행 비중에 있어서는95) 의정은 인도순례와 말레이 반도 및 해안남해안 지방을 순례하며 보낸 시간이 거의 동일하며, 법현과 현장은 인도순례에 투자한 시간이 서역지방순례에 투자한 시간보다 많았고, 비해 혜초는 다른 기행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아랍(대식)과 페르시아를 포함한 서역지방순례에 대한 비중이 인도순례에 대한 비중보다 많았다.
여섯째, 
기행문의 문학적 특징을 비교해 보면96),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서사적 여행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서정적 여행기로 볼 수 있다.  법현이 70대, 의정이 50대에 여행기를 저술한데 비해 『대당서역기』는 그의 나이 40대인 사유적나이에 저술한 것으로, 당대 태종의 칙명 하에 계획, 편집한 것으로, 변기의 합리성, 객관성을 바탕으로 사실적 자료에 근거하여 저술한 것이고, 『왕오천축국전』은 그의 나이 20대인 시적정서가 풍부한 나이에 구법하여 그 여정을 제약받지 않고, 그때의 상황을 수시로 기록한 ‘자유기고적 성격’을 뛴다.『대당서역기』는 광대한 규모의 대장정의 길을 25평의 ‘전설전설’에 근거를 두고, 지역을 서사문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반면, 『왕오천축국전』은 여행 시의 느낌을 ‘시’로써 서술하였는데, 답사지역 설명에 있어 간단한 시문구로 설명한 것과 5편의 시문구로 그때의 심정과 현황을 묘사한 것은 간결하면서도 정감적이다.
일곱째, 기행문에 대한 역본의 시기를 살펴보면, 『법현전』과『대당서역기』,『남해기귀내법전』는 19c부터 번역되기 시작하였고,『왕오천축국전』 20세기에 번역되었다. 특히, 번역되어진지 100여년 밖에 되지 않는 『왕오천축국전』97)은 1908년 프랑스 고고학자 펠리오가 천불동 계곡에서 두루마기 필사본으로 발견,『일체경음의』의 주해를 통해 혜초의 저작임을 간파하였으며, 1909년 중국(청)학자 나진옥에 의해 ‘『왕오천축국전』이 원래 3권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발견된 것은 1권의 절략본’ 임을 밝혀졌으며, 그가 이 여행기를 『돈황석굴유서』속에 수록함으로써 펠리오 주장을 확인,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인 후치타도요타치(승전풍인, 1911)은 중국 라진옥의 영인본을 기초로 다른 여행기 및 역사서를 참고하여『혜초왕오천축국전』을 발표하였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혜초는 중국인으로 알려졌으며, 1915년 다카쿠스준지로(고남순차랑)의 『혜초전고』에 의해 혜초가 신라인임을 밝혔다. 최초의 현대어로 번역은 Walter Fuch(1938)가 「720년경 서북인도와 중앙아시아 지방으로의 혜초의 순례여행기」를 독일어로 번역하였으며, 한국에서는 1943년 최남선의『신정삼국유사』
98)의 부록에 왕오천축국전의 원문을 싣고 간단한 해제를 붙여 발행함으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남해기귀내법전』은 18c중엽 일본학승 자운이 자세한 주를 달은 것에 대해 1896년 일본 고남순차랑(다카스쿠준지로)의 영역에 의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한다. 특히, 현장의 『대당서역기』는 10c이후 원ㆍ명 대에 구연구연, 희곡화 되어 『서유기』라 하여 세상에 출현했는데, 현대의 우리들도 『대당서역기』보다 『서유기』쪽에 더욱 익숙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중국 그 당시에도 『대당서역기』보다는 『서유기』쪽이 대중오락으로서 호평을 받았는데 그 이유는 서유기속에 등장하는 ‘손오공’의 활약적인 측면으로 아니러니컬한 면을 제공하였지만, 무엇보다도, 현장의 문화적 사업의 의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삼장법사’라는데 있어서는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불국기 불국기

대당서역기 대당서역기

남해기귀내법전 남해기귀내법전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

저자

동진 대, 법현

  - 번역; 당 대, 현장- 찬술; 변기 변기(현장의 기록에 비추어보아 변기가 편집 기술)

당 대, 의정

당 대, 혜초

성격/저술시기

 여행견문기414(413)-416년 (413 7월 하안거를 마친 뒤 건업에서 쓰기시작--> 416년 도반들에게 간략히 기록한 약기 『법현전』을 강연한 뒤 다시 상세히 기술)

여행견문기 646년(당 태종 칙령에 의해 기술) 

여행견문기685년(685년 캘커타를 출발하여 귀국하는 도중 슈리비야자야국에서 7년간 머무르면서 저술)

여행견문기 727년11월(구자도착) 이후로 예측 

내     용

1권 (구성; 9500자) 「동진사문석법현자기유천축사  동진사문석법현자기유천축사」「역유천축기전역유천축기전」「불국기 불국기」- 육로와 해로를 통해 17년 동안 30 여 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은 기행문- 인도의 구법과정을 기록--> 당시 ,인도, 중ㆍ아시아의 실정묘사

12권  --서역, 인도의 지리적 보고서적 성격, 친히 밟은 나라110국, 전해들은 나라 28국, 현장이 장안을 떠나 인도, 석란 등 138국을 두루 다닌 견문 등을 기술 - 당시, 인도 서역의 거의전역을 포함하고 있으며 오늘날 동ㆍ서투르스탄의 제국, 인도 제국의 영역, 기후, 풍토, 언어, 종교, 불교정세, 불사, 불적 등을 기록

4권 (구성;10절) - 약칭「기귀전」 - 의정이 인도서역을 여행하면서 25년간 보고들은 것, 불법유통의 상태를 기록 - 인도 및 남해 불교승려의 생활, 풍습, 관습 등을 상세히 기록 - 당시 인도에서 유행한 찬불게송, 문법서, 논리서 및 기타문헌 열거, 학자명 또한 용수이하 많이 열거하고 있다.

3권(상, 중, 하) - 현, 전해지는 것은 227행(1권)- 5년간 인도 서역, 아랍지역 구법견문록- 특히, 8세기 초 당시 중앙아시아 및 아랍지역에 대한 일반적 정치, 정세, 불교의 형태, 각 지방의 문화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가치  및  중요성

 - 중국승려의 인도여행기 가운데 현존하는 최고의 전적 - 여행지의 중요한 견문을 정확히 전함 - 5c초 서역, 인도의 불교/불교문화에 귀중한 자료제공 - 중고역사상 중요한 자료

 - 거리, 방위, 물건의 표기, 원어 표기에 있어 정확히 표음, 세밀한 기록을 보여줌 - 7c전반, 인도, 중앙아시아의 고대 지리연구에 최고(고대지리, 불교문화연구, 당시 국정, 불교전세형편, 고고학적 발굴/탐험에 있어 필수적 지침서) - 중ㆍ서 교역간의 지니는 가치가 크다.

 - 승가작법/ 행위 작법 등 다른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율에 관한 설명이 있다. - 인도와 남해에 존속했던 불교교단의 조직/계율의 실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문헌 - 인도 및 남해 생활/ 풍습을 이해하는데 중요자료- 말레이군도의 불교, 인도의 범문학, 의학,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경,률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 자료 

- 한 문화권에서의 최초의 ‘대식’ 현지견문록-‘오천축’ 이름을 명확히 밝힌 최초의 견문록- 8c초 사회발전사(고대인도, 초기역사, 동서국제교류사, 민속학) 연구에 원시적 자료 제공- 정확히 국명으로 ‘대식’을 거론한 최초의 문헌- 각국의 종교적 정황에 대해 기록하고 있어 종교적 색체가 짙으며, 중국불교 발달사 비교 하는데 있어  귀중한 자료이다..- 중세, 아랍, 이슬람문화와 한문화간의 교류사 연구에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Ⅳ. 결론 


서역구법승들의 활동상을 고찰하기 위해 세계 4대 구법여행기를 남긴 법현, 현장, 의정, 혜초스님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구법승들의 생애 및 활동상 분석과 구법승들의 기행문 분석의 2단계의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구법승들의 생애 및 활동상 분석은 구법 전과 구법당시 활동상을 엿볼 수 있는 분석으로, 개략적인 구법생애와 당시 시대적 상황 및 역경활동 중심지별 분석과 구법목적 및 구법경로의 3가지로 나눠 분석하였다.
먼저, 
생애분석과 당시 시대적 상황 및 역경활동 중심지별 분석결과 4명의 구법승들의 출가의 공통적인 특징은 ‘동진출가’라는 사실이며, 출생지별 분포지역(평양, 낙양, 하북성 탁현, 신라)과 역경활동의 중심지(오대산, 낙양, 건강, 장안)가 모두 중앙아시아 동북부지역으로 출생지와 역경활동지의 범위가 크게 벗어나지 않고 거의 일치하였다. 특히, 역경활동지 분포지역 가운데,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 한곳은 ‘장안’으로, 장안은 중국역사상 으뜸가는 도읍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문화 교류의 장소였고, 7-8세기 현장, 의정, 헤초의 주요 역경활동 중심지임이 밝혀졌다. 4-5세기 강남 동진의 귀족불교가 노장사상과 접목되어 격의불교로 대중화되던 시기에 법현은 건강의 도량사를 중심으로 7세기의 현장과 의정은 종파불교의 시대를 맞이하였는데 장안 대자은사 내 번경원과 대천복사 내 번경원, 낙양의 불수기사를 중심으로, 8세기 중국과 한국에서 밀교와 선종이 유행하던 시기 신라 입당승, 입축 구법승이었던 혜초는 장안 천복사와 대흥선사, 오대산 건원보리사를 역경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다.

두번째, 구법목적 및 구법경로별 분석결과, 법현은 당시 경ㆍ율의 미비함을 개탄하여 구법을 떠날 때에는 육로로 60대에 출발하여 돌아올때에는 70대에 해로로 도착하여 여행에 총 15년이 소요되었다. 현장은 특히 유가사지론의 연구 및 불적을 참배하기위해 그의 나이 20대, 육로로 출발하여 올 때에도 육로로 40대에 도착, 여행에 총 17년의 시간이 소요 되었으며, 의정은 율장의 미비함을 자각하여 그의 나이 30대에 해로로 출발하여 돌아올때에는 해로로 60대에 도착, 총 여행에 25년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혜초는 단순한 목적의 성지순례와 밀교연구를 목적으로 그의 나이 20대에 해로로 출발하여 돌아올때에는 육로로 20대에 도착하여 총 5년의 시간을 소요하였다.  여행에 소요된 시간이 가장 많았던 의정은 나란다 대학에서의 10여년의 수학과정이 여행기간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여행기간이 가장 짧았던 혜초는 구법의 목적이 특정한 경ㆍ율을 구하거나, 나란다 대학에서의 수학이 아니었고, 단순한 성지순례와 밀교의 연구, 문화 탐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구법승들의 기행문 분석은 구법 후의 활동상을 엿볼 수 있는 분석으로, 출간저서의 소개를 시작으로 4대기행문을 분석한 결과 구법 후 역출한 출간저서의 성격은 구법의 목적과 연관성을 가졌다.

 첫째, 기행문의 찬술저자와 찬술시기에 있어 왕의 칙령으로, 보호를 받아가며 공동으로 찬술한 것은 『대당서역기』로 현장이 번역, 변기변기가 찬술하였다.『남해기귀내법전』은 귀국 도중 슈리비자야국(현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에 7년간 머물면서 기록한 것이다.
둘째, 기행문의 
내용적 가치및 중요성에 있어 육로, 해로의 다양한 지역의 탐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불국기』와 『왕오천축국전』으로, 『불국기 불국기는 중국승려의 최초의 서역견문록으로서의 정확성을 가지며 현존하는 최고의 전적 이다.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은 한문문화권에서 대식(아랍)이라는 나라이름을 처음으로 거론하였으며, ‘천축’의 단어로서 5천축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인도, 서역전역의 가장 방대한 기록을 담고 있는 『대당서역기 대당서역기는 친히 밟은 나라만 해도 110국나 되며, 전해들은 나라 28개국으로, 거리, 방위, 물건표기, 원어표기에 있어 정확성을 가지며, 중앙아시아의 고대지리연구에 필수적 지침서로 알려져 있다. 률에 대한 집중적 설명을 하고 있는 『남해기귀내법전 남해기귀내법전은 설일체 유부의 입장에서 율을 설명하고, 당시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분포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등 인도 남해에 존속했던 불교교단의 조직, 계율, 풍속을 이해하는데 주요한 자료가 된다.
셋째, 당시 
서역 및 중앙아시아 현황 시대별로 살펴보기 위해 혜초의 여행경로를 기준으로 법현(5c), 현장(7c), 의정(7c)의 동일한 구법지역을 먼저 거론하고, 인도를 5천축(동천축, 중천축, 남천축, 서천축, 북천축)으로 나눠 각각 분석한 뒤 분석결과를 통해, 전반적인 인도의 시대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두 번째는 중앙아시아의 구법경로분석을 통해, 인도와 중앙아시아를 비교, 분석함으로써 구법의 전반적 흐름을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5세기에서 8세기로 올수록 오천축은 소승보다 대승불교가 활발하였고, 오천축국 내에서도 중천축국에서 북천축국으로 갈수록 한때 찬란했던 문화가 황폐화 되었다가 다시 활성화 되는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중앙아시아는 점차 불교가 소승에서 대승화 되어가는 추세를 보였으며, 특이할만한 객관적 사실은, 불교가 전래되어 불교가 활발하게 대승화된 지역일수록 고기를 먹지 않고 오신채를 먹지 않았으며 백성들이 온순하고 소박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소승불교가 전해졌거나, 파사 및 대식(아랍)일대 처럼 불법을 모르고 하나님을 숭상하는 지역일수록 고기, 파 등을 먹으며, 전쟁하고, 살생하고, 침략하는 투쟁문화를 좋아하였다.
넷째, 여행 비중에
 있어서 법현과 현장은 서역지방 보다 인도에 많은 시간을 투자한데 비해 혜초는 인도보다는 아랍(대식), 페르시아를 포함하는 서역지방에 많은 비중을 두었으며, 의정은 인도와 말레이 반도 및 남해안 해안지방을 순례하며 보낸 시간이 거의 동일하였다.
다섯째,
 기행문의 문학적 특징에 있어 법현이 70대, 의정이 50대에 여행기를 저술한데 비해『대당서역기』는 그의 나이 40대 사유가 왕성한 시기에 합리성, 객관성을 바탕으로 25편의 ‘전설’에 근거를 두고, '서사 문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반면,『왕오천축국전』은 시적정서가 풍부한 20대 나이에 여정을 제약받지 않고 자유기고적으로 ‘서정적’으로 묘사한 간결하면서도 정감적인 기록이다.
여섯째, 기행문에 대한 
역본의 시기를 살펴보면, 『법현전』과『대당서역기』,『남해기귀내법전』은 19c부터 번역되기 시작하였고,『왕오천축국전』은 20세기에 번역되었다. 특히, 저자가 중국인인줄 알고 있다가 신라인으로 밝혀진지 100여년도 채 되지 않는 『왕오천축국전』은 1915년 다카쿠스준지로고남순차랑의 「혜초전고혜초전고」를 통해  혜초가 신라인임이 밝혀졌다.

 

이상으로, 밝힌 4-8세기 구법승들의 활동상 분석결과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서역구법승들의 활동상은 실크로드(서역교류)의 전성기와 그 맥락을 함께하고 있었으며, 불교의 전래와 함께 점차 소승적 사고방식에서 사람들에게는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종자가 있다 는  대승적 사고방식으로 전환되는 과정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었고, 인간학적 측면에서 서로 의지하며 존중하고, 온순하고, 전쟁과 살생을 싫어하는 평화롭고 소박한 문화로 이어져오게 하는데 한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1200년경 전 한국의 문화는 세계적인 수준을 능가할 만큼 찬란했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드날린 원효와 의상, 혜초의 활약상이 있었고, 9세기의 장보고의 활약상으로 우리의 문화는 가까이는 일본에게 전해졌을 뿐 아니라 세계화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요즘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외국을 선호하여 유학 및 여행을 떠나고 있는가? 세계화의 시점에서 국수주의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경험을 쌓고, 세계 속의 한국을 드날린 사례도 많았지만, 한국인들의 무절제한 외국 선호에 의해 외국 관광지에서 조차도 한국인의 근성을 간파하여 물건을 상품화 시키고,  또한, 자녀들을 조기 유학시키는 것도 부족해서 관광통과의 목적으로 위장 입국하는 ‘원정출산’
1) 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라 하니, 옛 구법승들의 뼈에 사무치게 간절했던 구법의 결과로 이룩해 놓은 문화를 바라볼 때, 우리는 무엇을 후세에게 물려줄 것이며, 수준 높았던 문화를 계승, 발전하지 못한 것을 지금에 와서 우리는 ‘전쟁을 싫어하는 백의민족 이었다’는 플랜카드와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상 어쩔 수 없었다’고 치부해 버릴 것인가?

 

구법승들의 구법의 자취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문화와 화합의 결과를 가져왔기에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인류는 그들의 구법자취를 소중히 여기고, 우러러 본다. 이렇게 본 논문의 결과를 통해 불교수행자의 구법의 길이 자리적 개인수행인 동시에 이타적으로 연결되어 사회의식과 문화수준을 변화시키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며, 지금 이 순간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키고, 창조적 문화의 계승과 인류 사회 문화발전에 있어 고려해야할 요소로 인간존엄사상과 평등사상을 그 근본으로 하는 불교사상의 도입이 절실히 요구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가신 선배스님들의 구법의 그 길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광명의 불빛’으로 비추고 있음을.. 간절히 두 손 모아 감사를 드리며 이만 맺는다.








                          



    -   부  록   -

혜초구법

년 도

금강지 (671-741)

혜초 (704-780)

불공 (705-774)

구법전

719

 

(16세) 입당

15세, 금강지에게 사사받음

720

(50세)중국의 불법이 성행하다는 말을 듣고 사자국을 떠나 중국도착, 중국낙양에 들어가 대자은사에서 밀교를 크게 떨침.

?(720-723)추측, 광주에서 인도출신 밀교승 금강지를 사사

(16세)금강지를 따라 중국에 옴

구법

723

(53세)723년부터 장안 자성사와 천복사에서 『칠구지불모준니대명다라니경』등 8부 11권의 비밀경전번역

(20세) 금강지의 권유로 인도서역 구법을 떠남

 

724

 

 

(20세) 금강지 삼장을 모시고 대법과 밀교계승

727

 

인도서역 구법후 중국 땅 구자 도착(구법 5년걸 림)

 

구법후

733

 

-30세(1월1일)장안도착으로 추측(구법 10년 걸림)-장안 천복사 도량에서 733년부터 741까지 8년간 금강지를 시봉하면서 『대승유가』를 전수받았으며, 함께 밀교경전 연구

 

737

(67세) 현종황제에게 유가밀교경전을 올림. 5월 5일 황제의 윤허를 받음. 이로부터 금강지는 『대승유가천비천발만수실경』범본 번역 시작.

 

 

740

 

(37세) 금강지의 교하에 따라『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의 필수와 한역 작업시작.

 

741

  (세수71세,8월15일)        입적

(38세) 위 경전의 한역작업 일시 중단

(37세)금강지의 유언을 받들어 『금강정경』을 구하기 위해 5천축과 사자국에 밀장을 구하러 떠남

742

 

(39세) 금강지의 유언에 따라 위 경의 원문은 인도로 보내짐

 

746

 

 

(42세) 경ㆍ논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옴.- 궁중에 단을 만들고 관정을 받음1)

749

 

 

(45세)고국에 돌아갈 것을 허락받아 남해군남해군에 이르렀으나, 칙서로 다시 장안에 오게 되어 대흥선사에 머무름

765

 

 

(61세) 시수홍려경 시수홍려경이 됨

771

 

 

(67세) 번역한 경전 77부 101권의 목록을 만들어 황제로부터 대장경에 편입되도록 허락을 받음.

773

 

(70세)장안 대흥선사에서 ‘불공’의 강의 수강, 대교우가시지(대교유가심지)의 비밀법문을 택했으며, 불공삼장의 상수제자가 됨. 관정도량(관정도장)등 밀교의식 주도

 

774

 

(71세) 불공의 유언가운데 6대 제자가운데 2인자로 규명됨- 불공입적 이후 대흥선사에서 나라를 위해 기도.- 황제에게 올리는 표문작성

(세수 70세) 6월 15일 입적『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대변정광지불공삼장화상』시호받음

762~779

 

(59세-76세) 왕에게 ‘하옥녀담기우표’를 올림

 

780

 

(77세) 4월 15일, 오대산 건원보리사에서 들어가 5월 5일까지 20일간『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서문을 작성(옛 한역본을 얻어 다시 기록)

 

787

 

(84세) 불경 한역, 주석에 전력건원보리사에서 입적

 

 




구법지역

5-8c 서역 및 중앙아시아 지역 현황

서    역    구   법   승

혜초 (8세기)723-727

의정 (7세기)671-695

현장 (7세기)629-645

법현 (5세기)399-413

 인           도     

중       천       축 

- 바이샬리(폐샤리국); 삼보를... 맨발에 알몸이다, 외도는 옷을 입지 않은다. 

 

 

 

- 쿠시나가라‘성은 황폐되어 인이란 살지 않고, 탑만 남아있었으며, 매년 8월 8일 승려, 도인, 속인들이 한차례 불공을 드릴뿐이다

 

 

 

- 바라나시; 외도는 옷을 입지 않고, 몸에 재를 바르며, 대천(시바신)을 섬긴다. 

 

- 바라나시국① 일찍부터 힌두교의 성지로써 힌두교 천사가 100여소, 신도 수만 명으로 불교에 비해 사원, 신도수가 3배 이상 많았다.② 알몸에 옷을 입지 않고, 몸에는 재를 바르며, 근면고행을 한다.

 

- 마게타국; 오늘날 파트나 근처① 이 성은 갠지스 강을 굽어볼 수 있는 북안에 위치② 녹야원, 구시나, 사성, 마하보리 등 4대 영탑이 마게타국왕의 영역 안에 있다.③ 대, 소승이 함께 행해짐

-마게타국(마갈타);‘소승이 우세’      

- 마게타국(마가다국);‘500여명의 독각이 동시에 입적한 곳이다.’     

-마게타국(화씨성);수도‘파련불읍’에 3년간 머물면서‘여러 나라 중에서 이 나라의 도읍이 가장 크고, 사람들은 부유하며, 인의를 다투어 행하고 있다.’

- 룸비니(가비라) ‘성은 황폐되었고, 승려는 없고...길에 도적이 많아 예불하러 가기란 매우 어려우며...

 

- 룸비니(겁비라벌솔도국); 빈성이 수십 개나 되고, 매우 황폐해 졌으며, 내성의 둘레가 14리 이지만, 인적이 거의 없었다

- 룸비니(가유라위성);‘가유라위성 안에는 왕이건 백성이건 별로 없고, 대단히 황막하여, 승려와 백성을 모두 합쳐도 열 가구에 불과하다’

- 바이샬리성(비야리성) 사원이 다 페허가 되고, 중도 없었다. 비야리성의 ‘삼도보계탑; 승려만 있었음

 

- 바이샬리(페샤리)① 원숭이들이 꿀을 헌상했다는 곳에 스투바가 서 있었고, 그 곳에 원숭이 군상이 새겨져 있다.② 비야리성 암라원탑; 탑만 남아있고, 사 는 황폐되고, 승려는 그림자도 없었다. 

- 바이샬리(비야리성,암몰라녀원)

- 사위성(슈라바스티,무물불유국); 승도가 보이지 않는다        .

 

- 사위성(실라벌실저국) 수백소 사원이 대부분 파괴, 승려 수는 매우 적었으며... 승도들이 정량부를 배우고 있었다.②기원정사를 비롯한 여러 유적들이 여기에 있었다.     

- 사위성(구살라국)① 불교는 쇠퇴②성내에는 겨우 200여 가구밖에 없었고..③기원정사 주변에 9가람이 있어 중들이 주석하고 있었다.④96개소의 외도가 행인/출가자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고 있었다.

 - 갈나급차(카나굽차); 사원이 있고, 왕과 수령들이 삼보를 공경, 믿고 있었다.    

 

갈나급차(곡여성)① 서쪽으로 갠지스 강에 임해 있고, 천사 200여소, 불사100여소, 승도 1만여 명, 대, 소승을 함께 배우고 있었다.② 계일왕이 곡녀성 갠지스 강변에서 현장을 위한 법회를 열어줌

- 갈나급차(계요이성); ‘서쪽 6-7리 거리에 갠지스 강 북안에 불타의 설법처가 있다’고 함 

 

 

- 나란다; 불교도가 4천여 명, 힌구교도가 1만여 명

 

중천축내불교 상황

- 화려 했던 중천축 인도불교는 찾아 볼 수 없다. - 힌두교의 부흥으로 불교쇠퇴- 외도의 잠식- 교학불교의 폐단- 초기 불교의 한계성을 극복사려는 대승교와 밀교의 대두- 불교가 잔존하는 곳에서 대, 소승이 병립 (바라나시, 갈라급차에서 대, 소승병행)

- 소승이 우세

-힌두교도의 수가 불교도 보다 많았지만 대승, 소승, 대소승이 병행하는 다양한 양상을 보임.

- 불교가 쇠퇴한 모습도 보였지만 대승이 우세하였다.

인        도

남천축국∧NasIck일대∨

- 마랍파국① 사원수 100여소, 승도 2만 명② 소승 정량부 교법을 주로 전수하고 있었다.

 

- 마랍파국① 5천축국 내에서 중천축국의 ‘마갈타’와 함께 2대 학술 중심을 이룸② 불사에 맞먹는 천사가 수백소 있고, 이도가 많았다.

 

- 안달라국; 사원20여소, 승도3000여명

 

- 안달라국① 불사 20여소,     천사 30여소② 이도가 많았음

 

- 공건나보라국① 사원 100여소, 승도 1만여 명② 대, 소승법을 배우고, 각종 교와 학파가 공존하고 있었다.

 

 

 

남천축내불교 상황

- 대소승이 병행- 왕, 수령, 백성들이 삼보를 지극히 공경-『용수보살전』의 700년 장수 설은 혜초여행기에만 보임

 

- 불교의 학술활동 활발- 불사에 맞먹는 이도들의 사원수도 많았다. 

 

인 도

서 천 축 

 - 신드(신도국)① 대, 소승이 병행② 아라비아의 내침을 받아 나라 절반이 파괴되었으며, 사원, 승려가 여전히 많다.  

- 신드① 소승정량부가 성행② 왕, 수령, 백성이 모두 삼보를 숭상

 

 

-아점파시라국, 비다세라국; 신도국과 상황이 비슷

 

 

 

서천축 내 불교 상황

 ① 왕오천축국전에서 ‘대식’의 이름을 거론한 최초의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② 대, 소승 병행,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고,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

 ①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서는 아랍지역을 ‘다씨’라 언급 ② 소승, 정량부 성행

 

 

인          도

북  천  축

- 잘란달라  (사란타);‘7세기 중엽, 현조가 토번의 ‘문성공주’를 만나 이 나라에서 4년간 머무르면서, 국왕의 보호아래 경장, 율장을 연찬하며, 산스크리트어를 배웠다‘ 

- 잘란달라(사란달라)① ‘기온은 따뜻한 편이고, 사람들의 성품은 강직하나, 용모는 천하게 생겼다.② 집집이 다 풍요롭고, 가람은 50여소, 승도는 2천여 명③ 대, 소승이 병행    

 

- 잘란달라① 대, 소승 병행하고, 왕, 백성들은 삼보를 경신한다.② 다마삼마나사; 3000여명의 승려가 있었는데, ‘대벽지불’의 이빨, 사리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토사국(현, 탁실라, 판잡지방);① 사원, 승려가 많고, 왕, 수령, 백성들이 삼보를 크게 숭상② 대, 소승 병행   

 

- 토사국(책가)①‘이 나라의 둘레는 만여 리에 이르며, 동은 비아스강, 서는 인더스 강에 임해 있다.② 수도의 고성은 비록 피폐되었으나, 기반이 여전히 든든하며, 둘레가 20여리나 된다.

 

- 신두고라국① 『순정리론』의 주창자 ‘중현논사’의 고국② 낙타가 대단히 많고, 대식국의 침입으로, 나라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③ 사원의 승려가 많고, 삼보를 크게 숭상 하였으며, 대, 소승이 병행

 

-신두고라국(구절라국) ①‘둘레가 5천여 리나 되고, 땅이나 풍속은 소랄타국과 같다’‘소랄타국은 땅에 염기가 있어 꽃, 과실이 희소하고, 추위와 더위가 엇비슷하며, 바람이 잠잠할 때가 없다.’② 불아가람 남쪽 14-15리에 작은 가람이 하나 있고, 그 동남쪽 30여리에 오래된 가람이 또 하나 있다. 웅장한 이 가람의 한 모퉁이에서 옛날 승가발타라(당에서는 중현)논사가 『순정리론』을 지었다.

 

- 캐슈미르① 소승설일체유부의 대본영이다.② 현장때 보다 더 많은 사원과 승려가 있고, 왕, 수령, 백성들이 삼보를 매우 숭상.③ 대, 소승 병행(용왕이 매일 천여 명의 소승불교 수행자를 공양하는 전설이 유명하였는데, 아직은 ‘소승’이 우세하였다.

- 캐슈미르『대당서역구법고승전』중' 북방 어디에나 유부가 있는데, 주로 ‘대중부’라 하였다.     

- 캐슈미르① 사원 100여소, 승려 5천여 명②‘이 나라 둘레가 7천여 리나 되고,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에워싸인 좁다란 통로뿐이어서 인근 적들이 도저히 공략할 수 없다.   

 

- 간다라① 나라왕은 돌궐 인으로, 삼보를 매우 경신하고, 왕, 왕비, 왕자, 수령들은 절을 지어 삼보를 공양한다.② 왕은 해마다 2차례씩 ‘무차대제’를 열어 몸에 지니고, 애용하던 물건, 처, 코끼리, 말 등을 모두 시주한다.③ 대, 소승 병행④ 갈락가사; 카니시카왕이 세운 절로써, 세친, 무착보살이 이 절에 주석하였다.⑤ 성 동남쪽 부처가 ‘시비카왕’이 되어 비둘기를 놓아 보냈다는 곳과 부처가 머리와 눈을 던져 다섯 야차에게 먹였다는 곳에 사원/승려가 있어 공양하고, 대. 소송이 함께 하고 있었다.  

 

- 간다라(건타라)①‘동서로 천리이고, 남북이 8백여리, 동은 인더스 강에 임해 있고, 대 도성인 포로사포라 는 주위가 40여리에 달하며, 왕은 후예가 없어 카필시국(계빈국)에 복속되어 있다.’② 황폐된 승사10여소, 거의 파괴된 유적만이 남아 있고, 천사100여소, ‘이도’ 가 문란하게 거주하고 있었다.③ 갈락가 사; 협존자, 세친, 여의논사가 주석한 곳으로, 『건타라국」조 가운데 카니슈카왕이 석가 입적400년 후에 출현한 사람으로서 스투바를 세웠는데, 석가의 골육사리가 갈랄가사에 모일 것이라고 예언함

- 간다라(건타라국); ①402(원흥원년)늦여름에 도착② 이 나라의 본명이 ‘업파국’이라 하면서 에프탈에 의해 망해 2대째 ‘내극’이 재위중이라고 하였다.에프탈왕은 불교를 믿지 않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지만 백성들은 불교를 신봉하고, 경전을 탐독한다.③ 소승이 대승보다 우세.④갈락가사(작리부도)    

북천축내불교 상황

① 대분분 지방이 돌궐/호족 지배하에 들어감.② 일부는 대식국의 내침으로‘이방’으로 비쳐졌지만, 8세기 ‘일시적 부흥’의 주요인으로, 잘란달라, 캐시미르, 간다라 중심으로, 불교가 활성화 되었다.③ 대, 소승이 병행 하였으며, 사원, 승려가 많았으며, 삼보를 크게 숭상 하였다.

 

 

 

오천축내 불교 상황

중천축에서 북천축으로 갈수록 불교가 활성화 되었다.

  소승부 성행

옛, 찬란한 문화에 비해 황폐화 되었지만 북천축으로 갈수록 황폐한 가운데 부흥의 열기를 볼 수 있다.

중천축국에서는 대승이 우세, 북천축국에서는 소승이 우세함을 보였다.

     중    앙        아     시      아

- 오장국;① 승려가 속인보다 많다.② 왕은 삼보를 숭상한다.③ 백성들은 많은 몫을 절에 시주하고, 조그마한 몫만 자기 집에 남겨두어 의식에 충당하고, 매일 재를 올려 공양할 정도로 극성스럽다.④ 오로지 ‘대승’만 성행.

 

- 오장국①  4백소 사원에 만 8천명의 승려로 교세가 늘어남② 법현때 보다 대승으로 개신했음  

- 오장국; 500소 사원에 모두 ‘소승’이었다.    

- 구위국(치트랄)① 사원/승려가 많으며,② 왕은 삼보를 숭상     

 

- 구위국(상미)① 불법이 성행② 왕, 석종은 불법을 숭상하고, 백성들은 왕을 따라 귀의하고, 가람이 2곳이 있다.③ 콩, 맥류, 포도가 흔하다.

 

- 람파국① 사원, 승려가 많다. ② 사람들이 저마다 삼보를 숭상, 대승법이 행해진다.   

 

- 람파국; 주위는 천여 리나 되고 북쪽은 설산을 배경으로 하고, 삼면은 눈 없는 산으로 에워싸여 있으며, 수도는 둘레가 10여리나 된다.

 

- 계빈국① 왕, 병사는 돌궐인이고, 토착인은 호족이다.② 사원, 승려가 많고, 백성들이 삼보를 크게 숭상한다.③ 백성들은 집집마다 절을 지어놓고, 삼보를 공양④ 소승이 행해지고 있다.⑤ 돌궐왕이 여름에는 계빈에서 지내다가 겨울이면 간다라에 가서 보낸다 하면서 이곳은 간다라 왕의 관할 하에 있다.

 

- 계빈국(가필시국)① ‘옛날 큐산 왕조, 카니슈카왕의 위력이 대단하여 그 영토가 파미르고원까지 확장하였는데, 그는 겨울에 인도의 여러 나라에 있다가 여름이면 가필시국으로 돌아오며, 봄, 가을은 간다라에 머문다’고 함.② 여래의 정골 한 조각을 간직한 고왕의 가람이 있다.

 

- 사율국(자불리스탄, 오늘날, ‘가즈니’)① 대승이 행해지고 있다② 왕, 수령은 돌궐인으로, 삼보를 지극히 공경하며, 절이 많고, 승려의 수도 많다.

 

 

 

- 범인국; 오늘날 ‘바미얀’① 대, 소승이 병행②‘사람들은 다분히 사람들에 의지해서 살아간다’.

 

- 범인국(범연나국)① ‘사람들이 산과 계곡에 의지하여 읍을 이루고, 살고 있다.’② 가람 수십 개 소와 승려 수천 명이 있었으며, 소승의 설출세부를 따른다.③ 왕성의 동북부 산정은 높이가 140-150척이나 되는 입불석상 금색으로 장식되어 광휘를 발휘하고 있다.

 

- 토하라국①대식의 침입으로, 왕은 동쪽, 바닥샨으로 도망쳐 버린 상황② 사원, 승려가 많고, 왕, 승려, 백성들은 삼보를 깊게 믿고, 고기, 파 부추 등을 먹으며③ 이교는 믿지 않으며, 소승법을 따르고 있다.

 

- 토하라국(박갈)① 중앙아시아 요충지로 사원 100여소, 승도 3천여 명② 소승법을 따르고 있었다. 

 

- 파사; 페르시아 지역‘이 나라 왕은 전에는 대식을 지배했지만 지금은 대식에게 병합되어 버렸다.’②‘이 나라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며 하늘을 섬기고 불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③‘성품은 교역을 좋아해서 늘 서해에서 배를 타고 남해로 들어간다. 사자국(현, 스리랑카)에 들어가서 여러 가지 보물을 가져온다.’ 

 

- 파사① 사원2-3개소에 수백 명의 승려가 있고,②소승일체유부교법이 성행하고 있었다.         

 

- 대식 대식; 파사와 유사, 아랍지역①‘살생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믿고, 불법은 모르고 있었다.’② 왕과 백성의 의상은 한 가지로 구별이 없다.③ 식사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다 같이 한 그릇에서 먹는다.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들었으나 보기에 매우 흉하다.④ 이 나라 관행에는 무릎 꿇고, 절하는 법이 없다.

 

 

 

- 6개 호국지방일대(북부 중앙아시아지대 위치, 안, 조, 사, 석라, 미, 강국)2); 단 하나의 사원과 한 명의 승려만을 가지고 있는 강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조르아스터교‘룰 믿고 , 불교는 모르고 있었다.

 

 

 

- 골돌국골돌국, 호밀국호밀국; 파미르고원 서쪽지방 위치① 대식의 치하에 있었지만 사원과 승려가 여전하고, 왕과 수령, 백성들은 삼보를 숭상하고, 소승을 따르고 있다.② 특히, 호밀국(와칸)은 다른 나라보다 추위가 극심하며,  외도가 없다.

 

- 호밀국(달마실철제)         

 

- 식닉국① 불교가 없다.② 왕은 늘 20-30여명을 대 파밀 고원 보내 사신들의 물건을 겁탈하도록 하였다.

 

- 식닉국(구밀타)

 

- 총령진; 파미르고원의 옛 이름          

 

- 총령진(총령)① 이 나라의 둘레는 2천여기고, 가장 큰 도성은 대석령에 있는데, 배후에는 사다하가 흐르고, 성 둘레는 20여리나 된다.② 용모는 흉하고, 문자와 언어는 카슈가르, 소륵국과 대체로 같고, 불법을 숭상,‘소승불교 설일체유부’를 공부한다.③ 10여소 가람, 5백여 명의 승도가 있다.

 

- 카슈가르① 중국 군사들의 주둔② 절이 있고, 승려도 있고, 소승법이 행해진다.

 

- 카슈가르(실리흘율다저)① 가람 수백소, 승도 만여 명②‘소승설일체우부’를 공부한다.

- 카슈가르(갈차)

- 구자국 중국 군사의 대규모 집결처②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대승법’을 행한다.

 

 

 

- 우기국① 절도 많고, 승려도 많다.‘대승법’을 행한다.② 중국군사가 대규모로 주둔한다.③ 여기서부터 동쪽은 모두 당의 영역이다.

 

- 우기국(굴단)

 

- 안서; 중국인 승려가 주지로 있는 절이 2곳 있고, 대승법이 행해지며, 고기는 먹지 않는다.   

 

 

- 안서(아기니국)‘아기니국에서 서남쪽으로 2백여 리가서 작은산 하나를 넘고, 큰강들을 지나 서쪽 평원 7백리 가면, 쿠차(굴지국)에 이른다.’

- 언기① 중국군대 주둔② 왕이 있으며, 백성들은 호인이다.③ 절도 많고, 승려도 많고, 소승법이 행해지고 있다.④ 안서4진; 안서, 우기, 소륵, 언기에 해당한다.

 

 

 

 중 앙 아 시 아   내   불  교  상  황

 - 소승보다는 대승이 우세하였으며, 페르시아, 대식, 호국일대는 불교가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 비록, 일부지역이 대식의 지배하에 있기는 하나 불교는 활기를 잃지 않고 있었으며, 오장국과 같이 승려수가 속인수 보다 더 많은 곳도 있었다.  - 불교전파의 최종 서계(서쪽경계)는 7세기경 페르시아 동변으로 한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대식국에 관한 기록은 8세기 혜초의 기록에서만 살펴볼 수 있다.(중앙아시아에 거국적으로 영토 확장한 아랍지역에는 불법이 전해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안서4진(소륵, 구자, 우기, 언기 ; 파미르고원 동쪽지방 당영역에 해당)은 사원의 승려가 많았으며, 그중에는 한사나 한승이 있었는데, 한승들은 대부분 대승법을 행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대체로, ‘소승’에 편승하였으나, ‘우기’에서만은 ‘대승’이 행해지고 있었다. 

 - 7세기를 전후해서 소륵, 쿠차, 언기 등 오아시스 육로의 북도주변국에서는 소승불교, 우기 등 남도 주변국가에서는 ‘대승불교’가 유행하였다.    

 - 오장국은 법현때 보다 는 대승으로 전향되었으나, 소승일체유부가 유행하여, 소승이 우세함을 보여준다.- 가람, 승도가 많았다.      

 - 소승이 우세함.         

 















- 참 고 문 헌-



 

Ⅰ. 기본사료 


- 『개원석교록』권 7, 9
- 『경덕전등록』권5

- 『고려대장경』36권

- 『구당서본기구당서본기』권7
- 『당회요당회요 』권49, 승적
- 
『대당구법유래대당구법순예』권4
- 『대정신수 대장경』49, 50, 51, 52, 55, 54
- 
『불조통기』7
- 『삼국사기』권 47
- 『삼국유사』권4~5
- 『서안부지서안부지』권61
- 『석법현전석법현전』
- 『송고승전』권1~6
- 『신정삼국유사신정삼국유사』부록 17-29
- 『양고승전』권3
- 『역대삼보기』권12
- 『역대삼보기』권7
- 『정원신정석교목록』권15
- 『증보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권35
- 혜림, 『일체경음의』권 100

Ⅱ. 단행본

- 고병익, 「혜초」,『동아시아의 전통』, 일조각, 1979,
-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권7

- 계환, 『중국불교사』, 우리출판, 2000

- 고병익 외저,『삼국의 고승8인: 원효, 의상, 혜초 외』,  신구문화사, 1976
- 고병익,『혜초의 길따라』, 동아일보사, 1984

- 권오민,『인도불교사』, 경서원, 1995
- 김원중,『중국문화사』, 을유문화사, 2001
- 나가시와가즈도시저, 이재성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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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사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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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학술지


- 고병익,「왕오천축국전의 본문 교감 몇가지」,『두계이병수박사구순기념한국사논  
 총』, 1987
- 고병익,「혜초의 인도왕로에 대한 고찰」,『불교와 제과학: 개교팔십주년기념논    
 총』,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7
- 김상영, 『혜초의 구법여정 검토』, 『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혜초’ 』,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 김승호, 「구법여행과 그 부대설화의 일고찰; 귀국승의 용궁체험을 중심으로」, 
 김승호, 『한국문학연구』, 1992
- 김영태, 「신라승 혜초에 대하여」, 『가산학보』제3호, 1994
- 
깐수무함마드,「혜초의 서역기행과 8세기 서역불교」,『정신문화연구』17-1(54), 1994
- 려성구, 『입당구법승과 입축구법승』, 『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 ‘혜초’』,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 방상현,「혜초의 중앙아시아 역방고」, 경회대학교 사학위, 1996
- 북경대학한국학연구중심 편, 『한국학론논집』, 1995
- 변인양, 「고려고승 혜초가 기우제를 지낸 옥여담의 위치 비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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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창, 「법현전」, 『법시』통권104호 NO.75, 1973
- 이재창, 「중국의 법현전」, 『법시』, 1970
- 
임기중,「대당서역기와 왕오천축국전의 문화적 의미」, 『동국대 불교학보』31집, 1994
- 정병삼,「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 황시감,「혜초왕오천축국전」, 식독여론, 『불교학보』33, 1996
- 다카쿠스준지로(고남순차랑),「혜초왕오천축국전に취ぃて」,『종교계』11권7호, 1915
- 다카쿠스준지로(고남순차랑), 「혜초전고」,『대일본불교전서』, 유방전총서1, 1915
-오타니가쓰나오(대곡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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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와야마쇼신(상산정진),「혜초왕오천축국전연구」,『경도:경도대학인문과학연구소』, 1992

Ⅵ. 논문
- 강호숙, 「신라의 구법도독승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1982
- 김문경, 「당 고구려 유민과 신라교민」,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김문경,「당.고구려유민과 신라 교민」연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4
- 김태희, 「신라하대의 재당 신라인에 대한 고찰」, 이화여대 대학원, 1997
- 당아미, 「신라 입당 구법승에 관한 연구」, 동국대 대학원, 1994
- 려성구,「신라중대의 입당구법승 연구」, 국민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 조용성, 「실크로드(Silk Road)지역 선교현황과 전략적 배치에 관한 연구; GMS 중    심으로」, 서울총신대 선교대학원, 2004
- 주송백, 『신라 입당유학승에 관한 연구』, 경희대대학원, 1972
- 최승주,「혜초 왕오천축국전 연구」, 국민대 교육대학원, 1993


Ⅶ. 기타(인터넷 / 뉴스 / 신문)
 
- http: // www,mct.go.kr/kid/tradition/people (문화관광부 어린이 홈페이지)
- 브레이크 뉴스 2005년 9월 28일〔9:04〕
- 스포츠 한국 2005년 9월 27일자
- 동아일보 2005년 9월 27일자

 

1) 임기중, 「『대당서역기』와 왕오천축국전의 문학적 의미」, 동국대 불교학보 31집, 1994, pp. 249-275
깐수무함마드,「혜초의 서역기행과 8세기 서역불교」,『정신문화연구』17-1(54), 1994, p.25-47
법현저, 이재창역, 『현대불교신서 32, 법현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80, p.164
변인양, 「고려고승 혜초가 기우제를 지낸 옥여담의 위치 비정에 대하여」,『가산학보 』제8호, 1999, pp. 50-58
나가시와 가즈도시, 이재성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 1991, pp.241-242
2) ; ‘출가한 뒤에도 몇 년 동안 속가 집에 머물게 하였으나, 병이 죽을 지경에 이르러 다시 절에 오니, 2일 만에 회복되었고, 집에 돌아가지 않으려 했다. 어린자식이 눈에 걸렸던지, 어머니는 절 앞에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 (카마다시게오저, 장휘옥역, 『중국불교사』3, 장승, 1996, p.63)
3) 카마다시게오저, 장휘옥역,『중국불교사』3, 장승, 1996, p.77

   법현저, 이재창역, 『현대불교신서 32, 법현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pp. 161-162

4) ; ‘현장의 조부 강은 북제시대에 국자학 박사를 지냈고, 아버지 혜는 경술에 명성이 높았으나 수나라 말기 정치적 타락을 인식하여 오로지 ’고서‘에만 치중하며 살아가다가 현장의 둘째형인 장첩을 먼저, 낙양 정토사로 출가시키게 된다.’(현장법사저, 권덕주역, 『대당서역기』, 우리출판사, 1994, pp.378-379)

5) 현장법사, 권덕주,『대당서역기』,우리출판사, 1994, pp.378-381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5, p.2024
나가시와 가즈도시, 이재성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6) 와타나베쇼코 저, 한경수 역, 『불교사의 전개」, 불교시대사, 1992, p.189
7) 와타나베쇼코저, 한경수역, 『불교사의 전개』, 불교시대사, 1992, pp.191-193

카마다시게오, 정순일,『중국불교사』,경서원, 1996, pp.202-203
김길상편저, 『불교대사전 상』,홍법원 1998, p.345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6』,pp.5571-5572
8) ; 중국의 『송고승전』이나 『해동고승전』에서도 혜초의 전기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어떻게 성장했는지, 그 배경은 어떠했는지, 활동상 들을 구체적이고, 명확히 밝히는데 는 한계가 있다.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253,p.350

   김영태,「신라승 혜초에 대하여」,『가산학보』제3호, 1994, p.16
   
정병삼, 「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 p19
    황유복, 진경부저. ,『한중불교문화사교류사』, 도서출판까치, 1995, p.61

9) 700년설; 고병익, 「혜초」,『동아시아의 전통』, 일조각, 1979, p.131
   704년설; 무
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 p.350
          
하정옥, 「논 혜초 지“왕오천축국전”잔권」,『중ㆍ한 문화논집』, 중화학술원, 한국연구소, 대북, 1975
10) ; 혜초의 유년시절은 전해지지 않으며, 당시 신라승가의 전반적 흐름이 동진출가가 많았고, 혜초가 16세에 입당하였는데, 그 당시 또한, 대부분의 입당구법승들이 신라에서 출가, 구족계를 받고, 입당한 사실에 비추어 보아 신라에서 동진출가 하였음을 살펴볼 수 있다.

-『송고승전』권4-5, 『삼국유사』권4∼5

- 려성구, 『입당구법승과 입축구법승』, 『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p.14, p.17

11) 계환,『중국불교사』, 우리출판사, 2000 pp.39-40
12) 계환,『중국불교사』,pp.54-58
13)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6』,p.5648
14) ; 각현이 구마라집을 중심으로 한 장안 불교계와 마찰을 일으킨 뒤 혜원의 중재에 의해 위기를 모면하게 되는데, 418(의회14)년 지엄의 초청으로 이곳에 와서 법현과 함께 『마하승기율』,『대반니원경』,『60권화엄경』을 번역한 곳이기도 하다.

지관편역, 『가산불교대사림 』4, 가산불교문화원, 2001, pp. 903-904
  『역대삼보기』권7(대정장49, p.71b7), 『양고승전』권3, 『석법현전』(대정장 50 p.338b16)
16) 와타나베쇼코저, 한경수역, 『불교사의 전개』, 불교시대사, 1992, pp.182-183

15) ; 남북조 시대의 북조북조국가중의 한 나라로 수(518-618)나라 귀족관료 출신이던 이연은 수, 말기 수양제의 재정상 실패와 고구려와의 전쟁패배를 통한 국가권력 약화, 토목사업실패로 야기된 대홍수로 일어난 인민반란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국민 생활의 재건을 내세우며,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618년 당을 세우게 되는데16), 당(618-907)이 618년에 세워진 것에 비추어 현장이 당대를 접한 것은 그의 나이 16세로 청소년기에 해당된다.
17) 『불교의 이해』,p.145
  카마다시게오저,정순일역,『중국불교사』, 경서원, 1996, pp.201-205

18)  동봉, 『불교의 이해』, 고려원, 1997, p.144

19)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 』4, 불광출판사, p.3592-3593
20) 
지관편역, 『가산불교대사림 』4, 가산불교문화원, 2001, pp.602-603
 『불조통기7』(『대정신수 대장경』49, p.367a14)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권7, (『대정신수 대장경』50, p.259b8)
21) 지관편역, 『가산불교대사림 』4, 가산불교문화원, 2001, p.697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 』4, p.891
『개원석교록9』(『대정신수 대장경』55, p.56 6b5ㆍ568c23)
『구당서본기』권7

22)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 』4, pp.3885-3886
23) ; 낙양에 위치한 불수기사는 당대 측천무후가 건립한 것으로 693년 보리유지가 이 절에서 실우등의 경을 번역하였으며, 695년 실차난타가 중국에 왔을 시기에 의정도 구법을 마치고 범본 경문400여립, 사리300립등을 가지고 와 이 절에 봉안한곳이며, 699년 신역화엄경 80권이 이곳에서 완성되었는데, 의정도 참여하였다. 당시 불수기사는 낙양에서 그 명성을 날린 곳이었다.

   

   -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 3』, p.2658
   -『개원석교록』권7, 권9, 『송고승전』권1~6
24) 의상 입당구법시기; 650-671
25) ; 8세기 중국 밀교의 성격은 금강지, 선무외, 불공삼장에 의한 금칙계(금칙계) , 태장계(태장계), 두부대법(두부대법) 계통의 밀교가 선양되어 잡밀잡밀->유가밀유가밀->순밀순밀의 형태로 변화하고 있었으며, 혜초, 현초, 혜일, 오진 등의 신라 입당승에게 전래되어 8세기 중국선종은 혜능계통의 남종(남종)선문이 성숙해 짐에 따라 북종, 점오법문점오법문을 대체하였으며, 세력을 장강남쪽으로 넓히고, 발전시키는 시기였으며, 신라 입당승 무상, 도의 선사 등이 귀의하여 선법/돈문을 배워왔다. 이렇게 8세기 유학생들의 절반이상을 차지할 만큼 신라승의 밀교/선종에 대해 입당이 현저하게 많았음을 엿볼 수 있다.
  (황유복, 진경부저. ,『한중불교문화사교류사』, 도서출판까치, 1995, p.44 )
26) 황유복, 진경부저. ,『한중불교문화사교류사』, 도서출판까치, 1995, p.46
27) 려성구,「신라중대의 입당구법승 연구」, 국민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pp.ⅰ-ⅱ, p.40, p.48-50, p.58
28) ‘입당구법승들의 활동중심지는 강남(양, 제 통일된 수나라 30여 년간), 장안, 낙양(수당 통일, 특히, 당대)이 대표적이었는데, 당대에는 특히, 장안지역이 가장 많이 분포하였다. 장안을 중심으로 북방으로 오대산 하북성 경내(하북, 청주, 낙양, 오대산 등), 남방으로 형산, 서남방으로, 성도, 동쪽으로 바다까지 그 활약상을 보였다. ’
   (황유복, 진경부저,
『한중불교문화사교류사』, 도서출판까치, 1995, pp.47-48)
29) ; 법화도량으로 유명하였으며, 765년 법숭이 불공과 더불어 『인왕호국반야경』을 번역하였고, 혜초가 구법 후 733년부터 8년간 이 절에서 밀교경전을 번역하였던 곳이다.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 』4, p.743.

-『경덕전등록』권5

-『서안부지』권61

30) ; 장안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로 수/당 이래로 ‘장안’에서 제일로 칭해졌으며, 중국밀종의 발원지이며, 장안의 3대 역경장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였다. 756년 불공삼장이 이곳에서 ‘식재주법식재주법(재앙을 멀리하는 주문법)’을 행했으며, 관정도량, 수계시설을 한 후에 청룡사와 더불어 밀교의 중심도량으로 칭해졌던 곳이다. 혜초도 또한 금강지가 열반한 한 후 그의 나이 70세 되던 해에 이곳에서 ‘불공’의 강의를 수강하였으며, '관정도량'등의 밀교의식을 주도하였다.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 』4, p. 887

-『역대삼보기』권12
-『개원석교록』권7
-『정원신정석교목록』권15

- 변인양, 「고려고승 혜초가 기우제를 지낸 옥여담의 위치 비정에 대하여」,『가산학보 』제8호, 1999, p.48

31); 혜초가 77세에 들어가 마지막 여생을 보낸 곳으로 『대승유가금강성해만수실리천비천발대교왕경』의 서문을 쓴 곳이다.

 

  -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1, p.828
  -『고려대장경』36권
  - 조명기,『한국불교대사전』2, 명문당, 1995

  - 김길상편저,『불교대사전 』하, 홍법원, 1998, p.956

  - 한국정신문화원, 『한국인물대사전』, (ㅇ~ㅎ 수록), 중앙일보, 중앙M&B, 1999, P.2445

 - 이정편,『한국불교 인명사전』, 불교시대사, 1993, pp. 351-352
 -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 p.353
 - http: // www,mct.go.kr/kid/tradition/people (문화관광부 어린이 홈페이지)

32) 『대정장51』,p.857

 김길상편저,『불교대사전』상, 홍법원, 1998, p.126

33) ‘파미르고원에 뻗어있는 산맥 계를 말한다’ ( 김길상편저,『불교대사전 』하, 홍법원, 1998, p.2553)
34) 계환, 『중국불교사』,우리출판사, pp.56-57
35) 카마다시게오저, 정순일역, 『중국불교사』, 경서원,1996, p.88
36) 남궁원, 강석규『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 일빛, 2002, p.82

나가시와가즈도시저 이재성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1991 pp.87-88

37) 계환, 『중국불교사』우리출판사, 2000,pp.54-58

카마다시게오저, 정순일역, 『중국불교사』경서원,1996, p.88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 』4, p.3435
길길상 편저,『불교대사전 상』홍법원, 1998, p.836 ,

38) 와타나베쇼코저, 한경수역, 『불교사의 전개』, 불교시대사, 1992, p.191

카마다시게오저, 정순일역, 『중국불교사』, 경서원,1996, p.202-203
길길상 편저,『불교대사전 상』홍법원, p.345

39);  신라중대의 입당구법은 국가적 파견보다는 개인적인 입당구법이 많았다. 국가대표승으로 구법의 근본목적은 불교의 학문, 종교를 탐구하여 독창적으로 신라불교화 시키는데 있었는데, 그 당시 귀족제도가 엄격하였고, 귀족층 출신 승려도 많았으며, 구법하고 귀국한 경우 각종파의 원조나 국사로 활약하는 등 왕의 예우나 신분상승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에 6두품이하 승려들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구법의 부차적 목적으로 삼기도 하였다.

 

  -『당회요 』권49, 승적
  - 려성구,「신라중대의 입당구법승 연구」, 국민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8, pp.27-30
  -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 p.351
40) ; 밀교연구는 밀교구법승으로서의 당연한 사명감에서의 목적이고, 단순한 불적참배로 볼 수 있는 것은 당시 구법승들의 구법 목적중 하나가 명성이 높았던 나란다 대학에서 수학하는 것이었는데, 혜초는 나란다에서 공부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까지 불교가 전혀 알려 지지 않은 페르시아, 아랍(대식)일대 까지 진출하여 그 시대의 상황을 서술하였던 것으로 볼 때, 오직 부처님 성지만 순례한 것만은 아니었으며, 단순한 목적의 불적참배였다고 볼 수 있으며, 혜초의 구법여정을 더 넓게는 불법의 진리를 얻기 위한 ‘문화탐방’의 의미로 재해석 할 수 있다.   

 

  - 한국정신문화원, 『한국인물대사전』, (ㅇ~ㅎ 수록), 중앙일보, 중앙M&B, 1999, P.2445

   - 다카쿠스준지로(고남순차랑), 「혜초전고」,『대일본불교전서』, 유방전총서1, 1915

41) ; 일반적으로, 혜초는 금강지의 권유로, 구법을 떠나게 되어 혜초의 구법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을 금강지로 보는데, 본 논문에서는 혜초가 금강지 열반 후 불공에게 사사받고, 그의 6대제자로 공인받았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혜초의 각 분석에 있어 금강지와 불공의 활동가운데에서 혜초의 활동사항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사료되었으며,  비교의 틀로서 제시하였다. 
42) ; 구법을 떠나 중국 땅 구자에 이르기까지 5년 걸렸고, 장안에 이르기 까지 10여년으로 본다면, 중국(광주)->중인도 도착
(당시 계절풍으로 광주--> 수마트라 까지는 1달소요, 수마트라->동인도 까지는 어느 정도 소요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총 소요된 시간은 1년으로 추론한다)까지 1년으로 추측하고, 북인도->중국(구자)에 이르기까지 1년이 안 걸린 것으로 볼 때, 혜초가 인도에 체류한 기간을 대략 3년으로 볼 수 있다. 

 

(정병삼,「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 p.23)
43)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p.363-364

   깐수무함마드,「혜초의 서역기행과 8세기 서역불교」,『정신문화연구』17-1(54), 1994, p.27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89-90

44) 나가시와가즈도시저 이재성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 1991, p.92
    카마다시게오저, 장휘옥역, 『중국불교사』3, 장승, 1997, p.67-68
45) 카마다시게오저, 장휘옥역, 『중국불교사』, 장승, 1997, p.355
46) ; 
4월1일부터 4월15일까지 행해졌던 ‘행상’에 관한 <고승전>기록을 살펴보면, “그 나라에는 4개의 큰 승가람이 있고 작은 것은 헤아릴 수도 없다. 4월1일부터 성안은 곧바로, 도로를 청소하며, 물을 뿌리고, 거리를 장엄하였다. 성문 위에는 장막을 펴서 장식하였으며, 국왕, 국왕부인, 궁녀들이 그 안에 머물렀다. 행상의 산차는 성에서 3-4리 떨어진 곳에서 만들어졌으며, 산차위에는 부처님의 입상이 있고, 2개의 보살상이 좌우에 모셔져 있었으며, 금은으로 새긴 천녀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구마제사 승려들은 대승을 배워 왕의 존경을 받았으므로, 가장선두에서 행상을 하였다. 성문에서 100걸음 떨어진 곳에 이르면, 왕은 왕관을 벗어 새 옷으로 갈아입고, 맨발로 꽃과 향을 든 시종들과 함께 성문을 나서 행상을 맞이했으며, 왕의 머리와 얼굴로 불상의 발에 예배하고 꽃을 뿌리며, 향을 피웠다. 행상이 성문에 들어서면, 성문의 누각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왕의 부인과 궁녀들이 많은 꽃을 비 내리듯 뿌렸다. 행상이 다 끝나면, 왕과 부인은 이내 궁전으로 돌아갔다. ...”이 구절을 읽으면서 마치 현장이 구법을 떠났다가 돌아올 때 맞이했던 환영의 행렬처럼, 우전국에서의 행상은 부처님의 탄생에 대한 환희로움과 국민각자가 불에 대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 -「고승법현전」,『대정신수대장경 』51중p.857, 
 - 카마다시게오저, 장휘옥역, 『중국불교사』, 장승, 1997, p.355-357

47) K.S.케네스첸/박해당 역,『중국불교』, 민족사, 1991, pp. 105-106

카마다시게오저, 정순일역, 『중국불교사』, 경서원 p.88
카마다시게오저, 장휘옥역『중국불교사』3,장승,1944, pp.69

48) ‘’탐라립저항으로 갠지스강 하구에 위치하며, 그 옛날 비단길로 인도에 건너갔다가 바닷길로 중국에 돌아왔던 법현이 귀국시 배를 탔던 항구이다.”의 내용과 기타 문헌의 내용을 참조하여 당시 ‘다마리제국’은 현캘커타지방인근 서남방지역으로 Tamluk지방으로 추정된다.’

 

 - 의정저, 이용범역, 『현대불교신서 26, 대당서역구법고승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80, p.190

- 법현저, 이재창역, 『현대불교신서 32, 법현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80, pp.132-133,
- 고병익, 「혜초의 인도왕로에 대한 고찰」, 『불교와 제과학: 개교팔십주년기념논 총』,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7, pp.873-887

- 나가시와가즈도시저, 이재성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 1991, p.14,
- 정병삼, 「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 pp.25-26)

49) 카마다시게오저, 장휘옥역『중국불교사』3,장승,1996, pp.69-70
50) K.S.케네스첸/박해당 역,『중국불교』,p.106
51) 카마다시게오저, 정순일역, 『중국불교사』, 경서원 p.88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 』4,p. 3435

52) 나가시와가즈도시저 이재성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 1991 p.96
53) 와타나베쇼코저, 한경수역, 『불교사의 전개』, 불교시대사, 1992, pp.187-188

이봉주, 『한국불교대사전1』, 한국불교대사전, 편집위원회, 보련각, 1982, p.499
권오민, 『인도불교사』, 경서원, 1995, pp.118-119

54) 『불광대사전』5, p.2025
55) 나가사와 가즈도시, 이재성 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 1991, p.102
56) 와타나베쇼코, 한경수 역, 『불교사의 전개』, 불교시대사, pp.188-189
57) 『불광대사전』5, pp.2025-2026
58) 
정병삼, 「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p.23
   혜림, 『일체경음의』권100, 『대정신수대장경』54-726하 ∼ 927하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373
59)정병삼, 「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pp.24-25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87

60) ‘ 당 문종대  l상인들은 계절풍을 이용해 항해하여 당에서는 6-7월 서풍이용, 일본에서는 8-9월 동북풍이용, 대부분 신라인들이 7월에 귀국한 것은 계절풍을 이용한 증거이다.’

 

-  엔닌(원인), 고승보, 점교『입당구법여행기』, 상해고적출판사, 1986, 『증보문헌비고』권35, 
-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521, p.524,
- 『삼국사기』,『삼국유사』『조선금석총람』

61) 깐수무함마드,「혜초의 서역기행과 8세기 서역불교」,『정신문화연구』17-1(54), 1994, p.27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364, p.373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p.81-82

62) ‘정수일(2004)는 의정의 구법여정의 나인국이 원시적 나형이 성행하던 니코바르제도, 말레이 반도 북부였던 것에 비해 혜초구법여정가운데, 나인국은 인도 내 중천축 바이샬리(폐샤리국, 비야리성)로 원시시대를 벗어난 나형국을 가리킨다고 기술하고 있다’
-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p.80-81
- 졸역, 『이븐 바투타 여행기』2, 창작과 비평사, 2001, pp.308-309

63) ; 캘커타 인근 서남방, 현재 Tamluk지역

   고병익, 「혜초의 인도왕로에 대한 고찰」,『불교와 제과학: 개교팔십주년기념논 총』,

  동국대학교 출판부, 1987, pp.873-887

64) 중인도->남인도까지 걸린 시간을 2개월로 보는 견해(김상영,『혜초의 구법행로 검토』p.45, 정병삼『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p.25)와 3개월로 보는 견해(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p.82, p.85,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p.374)가 있으나 『왕오천축국전』원문의 시문구 ‘ 즉종중천축국남행삼개여월 지남천축국왕(소)주’의 구절의 검토를 통해 중천축국에서 남천축까지는 3개월 걸린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본다.
65) ; 당시 나시크는 남천축(서찰루키아국)의 수도였다.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69, p.200,
66)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211
67) ‘대식국 영토 내 중앙아시아 지역은 후라싼 총둑부의 관할 하에 통치를 받는데 나이싸불은 대식국 내 중앙아시아 통치지역이다’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370)
68)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p.83-84, p.371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97
69)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p.364-373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p.90-99
70) ‘파미르 고원을 외국인들은 ’갈판단국‘이라 부르고, 중국에서는 ’총령‘이라 부른다.’
  정병삼,「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p.133
71) 깐수무함마드,「혜초의 서역기행과 8c서역불교」, 『정신문화연구』17-1, 1994
   카와야마쇼신(상산정진), 「혜초왕오천축국전연구」,『경도:경도대학인문과학연구소』, 1992, p.10
72) 정병삼, 「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p.27
73) 김길상편저,『불교대사전 상』, 홍법원, 1998, p.426, p.559, p.764
    나가사와 가즈도시, 이재성 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 1991, p.102

     법현저, 이재창역, 『현대불교신서 32, 법현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80, p.167

74) 『불광대사전』5, p.2026
   현장법사저, 권덕주역, 『대당서역기』, 우리출판, 1994, p.380
75) 김길상편저,『불교대사전 』상, 홍법원, 1998, p.1344, p.220

김길상편저,『불교대사전 』하, 홍법원, 1998, p.1633

76) 『불교사의 전개』p.186-191중?

카마다시게오저, 정순일역,.『중국불교사』, 경서원, 1996 , p.201-202
『중국 불교사상사』, 민족사, pp.114-115 중

77) 『불광대사전 』1, p.891
78) 의정저, 이용범역, 『현대불교신서 26, 대당서역구법고승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80, p.192
79) 『불광대사전 』5,p.5572

와타나베쇼코저, 한경수역『불교사의 전개』, 불교시대사, 1992, 191-193
카마다시게오저, 정순일역,.『중국불교사』, 경서원, 1996 p.202-203

80) 정병삼, 「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p.19
81) 최승주,「혜초 왕오천축국전 연구」, 국민대 교육대학원, 1993, p.5
82) 성운대사 감수, 『불광대사전』4, 불광출판사, p.828, 『고려대장경』36권,『대정장』권20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353

   김영태,「신라승혜초에 대하여」,『가산학보』제3호, 1994, p.25-27

  최승주,「혜초 왕오천축국전 연구」, 국민대 교육대학원, 1993, p.47
83) 『대정장』52·사전부4, 『대당구법순예』권4

김영태,「신라승혜초에 대하여」,『가산학보』제3호, 1994, pp.13-16, pp.25-27
변인양, 「고려고승 혜초가 기우제를 지낸 옥여담의 위치 비정에 대하여」,『가산학보 』제8호, 1999
; (변인양은 장안서쪽에 위치한 선유사가 ‘하옥녀담기우표’의 실제장소로 보았다.)


84)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 pp. 380-381
변인양, 「고려고승 혜초가 기우제를 지낸 옥여담의 위치 비정에 대하여」,『가산학보 』제8호, 1999, p.45-46, p.60
85) 이정편,『한국불교 인명사전』, 불교시대사, 1993, pp.3-351-352
(" '동양의 3대여행기'라 하면, 『법현전』,『대당서역기』,『왕오천축국전』을 들 수 있다. ")
법현저, 이재창역, 『현대불교신서 32, 법현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p.167)
86)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4』,불광출판사, p.3435 

- 대정장51 p.857  - 고려대장경 32-549  - 김길상편저,『불교대사전 』상, 홍법원, 1998, p.126
- 정승석편, 『불교해설사전』, 민족사, 1994 p.134
- 남궁원, 강석규,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세계사』, 일빛, 2002, p.82,
- 법현저, 이재창역, 『현대불교신서32 법현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80 , pp.164-167,
-
일찍이 서구학자들에 의해 19c부터 영/불/일로 번역되기 시작.

87) 현장법사저, 권덕수역, 「대당서역기」, 우리출한, 1944
  - 대정장 51 p.867

- 고려대장경 32 p.369  - 정승석편, 『불교해설사전』, 민족사, 1994p.69
- 김길상편저,『불교대사전 』상, 홍법원, 1998, p.420  - 
서구인에 의해 19c중엽부터 번역되기 시작.

88) 고려대장경 33-672 - 정승석편, 『불교해설사전』, 민족사, 1994,.56-57

- 의정저, 이용범역, 『현대불교신서 26, 대당서역구법고승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80, pp.192-193
- 의정의 영향으로 18c중엽, 일본학승 자운은 상세한 주를 달았으며, 1896년 일본 고남순차랑은 영역에        의해 세계적 주목을 받음.

89) 『대정신수대장경』51, pp.975-979,『대정신수대장경』54-726하~729하

- 성운대사 감수,『불광대사전』7, 불광출판사, p. 6047, - 혜림, 『일체경음의』권100
- 
조명기,『한국불교대사전』4, 명문당, p.866
-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 p.90-104
 - 변인양, 「고려고승 혜초가 기우제를 지낸 옥여담의 위치 비정에 대하여」,『가산학보 』제8호, 1999, p.58
- 황유복, 진경부저. ,『한중불교문화사교류사』, 도서출판까치, 1995, p.62-66

-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 pp.83-84, pp.364-373, pp.380-381, - 홍사성,『불교상식백과』상,하, 불교시대사, 1991, pp.890-892, - 정병삼, 「혜초와 8세기 신라불교」,『세계정신을 탐험한 위대한 한국인‘혜초’』, 가산불교문화원, 1999, p.23
- 1908(20c) 펠리오에 의해 『왕오천축국전』 돈황 천불동에서 두루마기 필사본으로 발견, 『일체경음의』의 주해를 통해 혜초의 저작임을 짐작하였고, 금강지의 제자로서 중국밀교계의 한역에 지대한 공헌이 있음이 증명되었으며, 현대의 최초의 번역은 1938년 Walter Fuchs의 독일어 번역이다.
90) 정승석, 『불교해설사전』, 민족사, 1994, p.69
91) ; 인도지역을 구분하는데 있어 ‘천축’이라는 이름은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와 인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3-5세기경 중국인들에 의해 붙여진 것인데 현장의 『대당서역기』에서는 ‘오인도’라고 하였고, 의정의 『남해기귀내법전』에서는 중인도, 북인도, 중천(중천), 북천(북천)이라고 하였는데, 최초로 ‘천축’이라는 단어로써 5천축을 분명히 명시한 것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 보여졌다. 
  -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54
92) 부록2. 법현, 현장, 의정, 혜초의 여행경로를 중심으로 살펴본 5-8세기 서역 및 중앙아시아 지역 현황
93) ; "사타바하나왕시대에 용수는 묘약을 써서 수백 년 장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장, 「교살라국」조,『대당서역기』권10,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204-205

94) 깐수무함마드,「혜초의 서역기행과 8세기 서역불교」,『정신문화연구』17-1(54), 1994, p.41

95) 의정저, 이용범역, 『현대불교신서 26, 대당서역구법고승전』,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1980, pp. 188-193
나가사와 가즈도시, 이재성 역,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민족사, 1991, pp.89-105
96)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p.81-82

임기중,「대당서역기와 왕오천축국전의 문화적 의미」, 『동국대 불교학보』31집, 1994, pp.192-193, pp.252-274

97) 무함마드깐슈,『신라서역교류사』,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4, pp.356-368
   정수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pp.37-?

최승주,「혜초 왕오천축국전 연구」, 국민대 교육대학원, 1993, pp.8-9
정승석편, 『불교해설사전』, 민족사, 1994, pp.245-246

98) 『신정삼국유사』부록 17-29
1); 출산하기 1-2개월 전 해외로 나가서 아이를 낳는 것을 ’원정출산‘이라고 한다. 원정출산을 하게 되면, 이민이나 유학 가는 것 보다 비용도 저렴하고, 더 편리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할 경우에도 외국인이라는 특권으로 세금감면을 받을 수 있다
- 2005년 9월27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에 3개월 이상 장기체류 목적으로 0세 이하 외국인은 2985명으로, 2000년 1812명, 2001년 2083명, 2002년 2510명, 2003j년 2789명으로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이 중 최소 절반은 ‘관광통과’ 목적으로 위장 입국한 ‘원정출산아’로 추정된다.( 스포츠 한국 2005년 9월27일자, 동아일보 2005년 9월27일자 )
- ‘ 헌법을 수정하지 않고도 불법체류 또는 원정출산자녀들의 시민권 자동취득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의회보고서가 제출되어 주목된다. ( 브레이크 뉴스 2005년 9월28일 〔9:04〕)

 

 

 

 

 

[출처] 법현, 현장, 의정, 혜초스님의 기행문을 통해서 본 서역 구법활동 고찰|작성자 노원앙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