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벳불교 - 딴뜨라(탄트라) : 무상요가 수행 I
들어가는 말
“무상요가는 기본적으로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욕계(欲界) 인간들의 근기에 맞게 안배된 수행입니다.
아버지에게서 뼈와 골수와 정(精)을 받고 어머니에게서 살과 피부와 혈(血)을 받아 여섯 가지 원소로 구성된 몸을 가진 인간들을 위한 것입니다.
무상요가의 특징을 보면, 수행을 통하여 부처를 이룬 결과인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역주: 불교 딴뜨라에는 이외에도 사신(四身), 오신(五身)으로 확장된 불신(佛身)의 개념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삼신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다.)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악한 몸을 가진 인간의 속성으로 인해 거치게 되는 죽음, 중음(中陰), 탄생의 과정을 완전히 정화할 수 있는 방법들을 담고 있습니다.
더불어 앞에서 이미 어느 정도 밝힌 것처럼, 무상요가의 심오한 특징은
(1) 원인 딴뜨라(基), (2) 수행 딴뜨라(道), (3) 결과 딴뜨라(果)의 세 가지 딴뜨라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딴뜨라 모두 궁극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정광명의 본래 마음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들의 중요성을 바르게 이해하고 나면,
사꺄빠 전통에서 설명하는 독특한 원인 딴뜨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원인 딴뜨라는 모든 것의 근본이며, 거기서 청정한 만달라의 세계와 본존이 생기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실제로 근본 바탕에서 생긴 것입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일반적인 수준(俗諦)에서 각각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모든 현상은
근본 바탕 안에서 나타란 것이며,
수행을 통해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깨달음의 속성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 결과적으로 나타난 부처의 모든 상태는 잠재적인 형태가 드러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닝마빠 전통에서는 ‘근본과 결과의 동일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나타나는 결과적인 상태는 모두 근본 바탕에 잠재된 형태로 이미 있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완전한 몸과 완전한 지혜’는 결합될 수도 나누어 질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몸과 지혜를 색신(色身)과 법신(法身)이라는 용어로 표현합니다.
미륵(彌勒) 보살의「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Uttaratantantra)」(1장 51게송 참조.)을 읽어 보면, 마음에 장애는 주변 환경이나 외부에 있으며, 마음의 긍정적인 속성은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깨달음과 모든 긍정적인 속성이 마음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보다는,
오히려 깨달음과 긍정적인 요소가 정광명의 근본 마음 안에 잠재적인 형태로 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절 하나하나를 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인도의 힌두(Hidus) 철학의 전통인 ‘상키야(Samkhya, 數論派)’ 학파와 같은
비불교도의 주장과 비슷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보이지는 않지만] ‘새싹은 이미 씨앗일 때부터 그 안에 있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역해: 이와 같은 철학적 논쟁은 샨띠데바 보살의「입보리행론(入菩提行論)」제 9 장 지혜품(智慧品)에서 아주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불교적 절대 진리와 비불교적 절대 진리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단계의 지성에 이른 사람들만이 이것을 이해해 왔다. 나아가 수행적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일면 딴뜨라 수행의 많은 부분은 이미 불교와 비불교가 그 구체적인 정보를 서로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고도의 논리적 성찰을 이루지 못한 일반적인 눈으로 보면, 무엇이 차이가 나는지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바른 법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논리와 경험을 동시에 쌓아 나가는 정진의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특히 이 샹키야 학파의 견해는 인도의 힌두 철학에서 수행하는 요가의 철학적 기초이다. 이들이 여기서 ‘새싹이 씨 안에 이미 있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절대적 창조의 근원인 범아(凡我, Branhma-atma)에서 이 모든 것이 현현(顯現)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분명히 불교적 세계관과는 다른 토대위에서 나온 것이다. 앞에서도 끊임없이 설명해 온 것처럼, 불교적 세계관은 절대적 창조의 근원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의 법칙을 바탕으로 한 공성에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 원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구분은 고도의 논리적 성찰과 직관을 요구하기 때문에, 거친 세상에 드러난 것만으로는 구분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고도로 발달한 비불교도의 철학적 내용을 스스로 완전히 구별해서 체득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불교 딴뜨라에 있는 또 다른 구절을 살펴봅시다.
무상요가 계열인 헤바즈라(Hevajra, 呼金剛) 딴뜨라에 보면, ‘비록 모든 중생이 완전히 깨달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외부의 장애에 가려져있다.’ 마찬가지로 깔라짜끄라(Kalacakra, 時輪)에서는 정광명의 본래 마음을 강조하고 있지만, ‘금강편공(金剛遍空, mKha' khyab mkha'i rdo rje can)’이라는 다른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용수 보살은 구히야삼마자(Guhyasamaja, 秘密集會) 딴뜨라의 구경원만차제에 대한 다섯 단계를 담은 주석서인「오차제(五次第, Pañcakrama)」(J항 folio 210b 참조.)에서, ‘수행자가 환(幻)에 대한 선정에 들어 있을 때는 모든 현상이 그와 같이 인식된다.’라고 말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무상요가의 구경원만차제 단계에 있는 수행자가 전문적인 용어로 ‘환신(幻身, sGyu lus)’이라고 부르는 극히 미세한 몸을 생기할 수 있게 되면, 그의 인식은 모든 현상으로 확장되고, 따라서 모든 것이 현현(顯現, 펼쳐진 상태)한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즉 모든 것은 정광명의 본래 마음에서 나타난 한편의 ‘연극’이요, ‘운동경기’인 것을
직접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을
정광명의 본래 마음에서 나타난 한편의 연극놀음처럼 인식하는 것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가 환(幻)처럼 나타난 것의 근본에는 정광명의 본래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우주의 외적인 환경까지도
정광명의 본래 마음에서 생기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을
유식(唯識, Cittamatra) 혹은 오직 마음에서(一切唯心造) 생긴 것이라는 식으로만 인식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이 외부의 모든 환경까지도 단순히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유식학파는 이 모든 외부의 현상까지도 거울에서 비춘 대상처럼 마음에서 비친 그림자와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외부의 현상을 부정합니다.
하지만 용수 보살의「오차제(五次第, Pancakrama)」에서는 이것과 조금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습니다.
주변 환경과 외부에 나타난 현상은 마음의 속성 안에서 비춰진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근본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상요가의 구경원만차제를 수행하는 수행자가 한번 이 정광명의 본래 마음을 경험하게 되면,
모든 거친 의식의 과정과 그것을 움직이는 풍기(風氣, rLung)는 해체되고 융해되어 더 이상 기능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극히 미세한 마음을 청정공성(淸淨空性)이라고 합니다.
이 상태는 공성을 직접적으로 깨달은 선정 상태와 같습니다.
무상요가 딴뜨라에서는 죽음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정광명의 본래 마음을 활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수행자는 이 근본 마음을 깨달음의 길에 들어가기 위한 긍정적인 목적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현교의 체계 안에서는 일반적으로 죽음의 마지막 순간의 의식은
선(善)도 불선(不善)도 아닌 지극히 중립적인 상태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딴뜨라에서는 이 마지막 순간의 의식을 활용하는 방법들을 말합니다.
무상요가의 수행을 통해서 보면,
마지막 순간의 의식은 중립적으로 남아있지 않으며, 오히려 긍정인 상태로 전환됩니다.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보다 긍정적인 상태의 마음이 보다 근본적인 마음의 속성이라는 것은 합당합니다.
더불어 선한 마음은 죽음의 순간이나 다른 순간들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정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역주: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말은 수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윤회의 한 과정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부정적인 마음의 상태는
이러한 정광명의 상태가 나타나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채 바로 윤회의 어둠 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까규빠(bKa 'brgyud pa, 口傳傳承, 티벳 불교의 4대 종파 중 하나)의 마하무드라(Mahāmudrā, 大印) 전통이나 닝마빠의 족첸(Dzog chen, 大究竟) 전통 모두 정광명의 본래 마음을 성취하기 위한 수행이라는 면에서 같은 맥을 가지고 있습니다.
닝마빠의 구부승(九部乘)에서는 족첸 수행을 최고의 경지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마음을 활용하는 나머지 팔부승(八部乘)과는 달리,
족첸에서는 가장 근본적인 의식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모든 무상요가의 수행은 다 이 정광명의 본래 마음을 활용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은 도둡 직메 뗀뻬 니마(Dodrup Jigme Tenpai Nyima)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모든 무상요가는 실제로 정광명의 본래 마음을 개발할 것을 강조한다. 다만 차이는 방법적인 것이다.’
무상요가 수행에서 근본 마음을 개발하고 드러내는 방법들은
생기차제(生起次第)를 시작하는 점진적인 과정과 생기차제를 수행한 결과로써 이어지는 구경원만차제
그리고 정광명을 성취하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족첸 수행에서는 정광명의 본래 마음을 드러내거나 발전시키기 위해 점진적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지요.
[*역주: 이 말은 한국에서 한 참 논쟁이 된 점(漸)과 돈(頓)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수행의 차원상의 문제이다.
쉽게 용어를 혼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족첸 전통에서는 수행의 처음 시작 단계에서부터
바로 본래의 의식을 활용하여 정광명의 마음 자체를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딴뜨라의 해석의 열쇠
무상요가를 공부할 때 항상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단순하게 보이는 단어 하나 조차 다양한 차원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반야부 경전(二轉法輪)을 논하면서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난 있는 요의(了義)와 깊은 뜻이 감추어져 있는 불요의(不了義)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사실 딴뜨라는 이 보다 더 깊은 차원의 해석을 요구합니다.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차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해석의 범위가 광범위합니다.
이론과 실제 모두 깊은 수준의 공부 양과 질을 필요로 합니다.
딴뜨라에서 사용하고 있는 하나의 단어는 네 가지 차원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딴뜨라를 이해하는 ‘네 가지 방식(Tshul bzhi)이라고 하는데,
(1) 문자적인 의미(Tshig gi tshul, 文字方式),
(2) 일반적인 의미(Phyi'i tshul, 外現方式),
(3) 감춰진 의미(sBas pa'i tshul, 內在方式),
(4) 궁극적인 의미(Don dam pa'i tshul, 勝義方式)의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문자적인 의미(Tshig gi tshul, 文字方式)는 문자 그대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문장에 대한 문법적 구조와 어휘의 기본 뜻만을 가지고도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두 번째 일반적인 의미(Phyi'i tshul, 外現方式)는
일반적인 선정 수행과 하급 딴뜨라의 차원에서도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일반적인(外現)’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함축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감춰진 의미(sBas pa'i tshul, 內在方式)에는 다시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각각
(1) 욕망을 취하여 깨달음의 길로 전환하는 감춰진 방법,
(2) 명백광(明白光) 증적광(增赤光) 득현광(得玄光)과 같이 감춰진 현상,
(3) 환신(幻身)과 같이 감춰진 세속적 진리(俗諦)를 말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무상요가에서는 가장 중요한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실제 하급 딴뜨라에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으며, 단지 감춰진 방식으로만 암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네 번째 궁극적인 의미(Don dam pa'i tshul, 勝義方式)에서 말하는 ‘궁극적인(勝義)’라는 말은
정광명 그리고 무상요가의 모든 수행과 경전의 궁극적인 대상들의 심오한 합일을 의미합니다.
또 딴뜨라들에는 무상요가의 경전에 접근할 수 있는 다른 전환의 장치들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섯 가지 한계(mTha'i drug, 六限界)’에 대한 인식이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 한계는 자연스럽게 경전의 의미를 제한하며,
서로 대조되는 두 개씩 세 쌍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
(1) 명확한 요의(了義)와 해석이 필요한 불요의(不了義)의 한계,
(2) 의도된 것과 의도하지 않은 것의 한계,
(3) 문자와 불입문자(不立文字)의 한계를 말합니다.
딴뜨라의 경전과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한 이렇게 다층적인 접근이 있는 것처럼,
실제 제자들에게 딴뜨라를 가르칠 때도, 일대일로 사자전승(師子傳承)하는 방식과
일련의 제자들을 함께 모아 놓고 하는 방식의 두 가지 유형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딴뜨라의 수행이 부처의 궁극적인 경지로 이끌어 주는 수승하고 증명된 불교 수행인 만큼,
딴뜨라의 논서들은 언제나 현교의 구조와 가르침을 바탕으로 그 주제를 드러냅니다.
딴뜨라들에서 나타나는 미세한 차이점과 복잡성들은
수행자의 근기와 업력 그리고 물리적인 특성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딴뜨라의 입문을 위한 예비의 장에서는
입문 제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자질과 적성을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딴뜨라를 수행하려는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적합한 유형은 ‘보석 같은’ 수행자입니다.
딴뜨라를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설명하는 이유도
딴뜨라에 입문한 사람들에게 속제와 진제의 두 가지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제(二諦)는 현교에서 말하는 이제가 아니라,
무상요가의 관점에서 본 세속적 진리와 궁극적 진리를 말합니다.
딴뜨라의 경론을 해석하는 이와 같은 접근 방식은「길상지혜금강집(吉祥智慧金剛集, Jnanavajrasamuccayanamatantra)」이라고 부르는 해석 딴뜨라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딴뜨라의 또 다른 특징 중에 하나는
거의 모든 딴뜨라들이 종자음(種字音) ‘에(E)’와 ‘밤(Vam)’ 두 가지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종자음은 거의 모든 딴뜨라들의 의미를 단순히 문자적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분명한 뜻으로 포괄하고 있습니다.
모든 딴뜨라들은 다양한 음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결국 모아보면 모음(母音)과 자음(子音)으로 축약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음절은 ‘에밤(E-Vam)’ 안에 포함됩니다.
모든 딴뜨라가 기(基, 원인) 도(道, 수행) 과(果, 결과)로 모아지는 것처럼,
기(基) 도(道) 과(果)의 모든 면은 ‘에밤(E-Vam)’으로 모아집니다.
따라서 ‘에밤(E-Vam)’은 실제 모든 딴뜨라의 주제들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월칭(月稱, Candrakirti) 논사는 구히야삼마자(Guhyasamaja, 秘密集會) 딴뜨라의 주석서로 잘 알려진「등작명광석(燈作明廣釋, Pradīpoddyotanamatika)」의 귀경게(歸敬偈)에서 딴뜨라의 실체에 대하여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게송들에서 월칭 논사는 본존의 색신을 성취하기 위한 딴뜨라 수행의 첫 번째 단계는 생기차제이고,
마음을 본성을 관하는 것은 두 번째 단계이며,
속제에 대한 굳건한 성취를 이루는 것은 세 번째 단계에서,
그리고 속제에 대한 정화는 네 번째 단계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다섯 번째 단계에서는 이 속제와 진제에 대한 합일이 이루어집니다.
딴뜨라 수행의 각 단계를 보여주는 이 핵심적인 과정이 무상요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원주:「등작명광석(燈作明廣釋)」1장 2-4게송을 보면, (1) 생기차제, (2) 마음 고립, (3) 환신, (4) 정광명, (5) 합일의 다섯 단계(五次第)를 말하고 있다. 이때 각각에 상응하는 관정은 (1) 단계는 보병관정, (2)와 (3) 단계는 비밀관정, (4) 단계는 지혜관정, (5) 단계는 제4의 관정인 언어관정이 있다.)
월칭 논사의 논서는 딴뜨라의 전체 수행 과정을 첫 번째의 생기차제와 나머지 네 가지의 구경차제로 된 다섯 단계(五次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딴뜨라를 수행하는 데에 여러 단계가 있는 것처럼,
수행을 성숙하도록 안배하는 과정에도 그에 상응하는 관정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생기차제의 수행을 위해서는 보병관정이 주어지며,
두 번째 마음을 고립하여 환신을 이루는 수행에는 비밀관정이 주어집니다.
이 환신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세 가지 고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몸의 고립, 말의 고립, 마음의 고립을 위한 선정(禪定)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역주: 이 방식은 실제로 구히야삼마자(Guhyasamaja, 秘密集會)의 구경원만차제를 성취하기 위한 각각의 단계들이다.)
이것은 환신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예비조건들입니다.
세 번째 관정은 정광명을 깨닫기 위한 지혜관정으로써 앞에서 성취한 환신을 정광명으로 정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관정인 제 4의 언어관정과 함께 수행자는 완전한 수행적 합일을 이룹니다.
지복(至福) 그리고 공성(空性)
무상요가에서 사용하는 ‘합일(合一)’이라는 단어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주요한 방식이 있습니다.
하나는 속제와 진제의 이제합일(二諦合一)이고 다른 하나는 공성과 지복의 합일입니다.
이제의 합일이라는 면에서 보면, 궁극적인 절대 진리와 세속적인 환신이 합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둘이 하나로 완전한 합일을 이룰 때 이제의 합일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또 공성과 지복의 합일은
공성을 깨달은 지혜와 심오한 지복의 경험이 하나로 합일되는 보이지 않는 합일입니다.
이러한 합일은 이전에 깨달은 공성에 대한 지혜가 마음의 지복 상태 안에서 하나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의 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험입니다.
이러한 합일은 다시 지복의 심오한 경험을 활용하여 공성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줍니다.
다시 말해 공성과 지복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두 가지 순서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수행자들은 먼저 극히 미세한 맥관(脈管, rTsa)으로 녹아드는 정수(精髓, Thig-le, 明点, 菩提)로
마음의 지복 상태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그 힘으로 궁극적인 공성을 깨우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무상요가 수행자들은 공성을 먼저 깨우치고 나서,
그것이 실질적인 지복의 경험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습니다.
또 어떤 수행자들의 경우는 중관귀류논증학파(中觀歸謬論證學派, Madhyamaka- Prasangika)의 완전한 공성을 깨우치지 못한 채, 유식학파(唯識學派, Yogācāra)나 중관자립논증학파(中觀自立論證學派, Madhyamaka-Svatantrika)의 견해와 더 가까운 상태에 머무르기도 합니다.
이들은 무상요가의 실질적인 수행 방편인 풍기요가(風氣瑜伽)를 통해 몸의 맥륜(脈輪, Cakra)을 통하거나 ‘뚬모(gTum-mo, 臍輪火, 배꼽열)’를 수행하는 등의 방편을 활용하여, 몸 안에 있는 거친 요소를 녹이고 지복의 경험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모든 거친 요소를 해체시킬 수 있습니다.
이들이 경험하는 이렇게 깊은 차원의 선정은 공성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와 함께 일어난 것입니다.
이때 수행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극히 미세한 차원의 공성을 이해함으로써,
결국 모든 현상은 단순히 정신적 산물일 뿐이며, 바탕에서 일어난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대지복(大至福)의 경험은 수행자가 모든 산물을 단순히 미세한 풍기의 작용으로 인한 지복에서 나온 것일 뿐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도와줍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수행자는 가장 미세한 차원의 공성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먼저 지복을 경험하고 나중에 공성을 완전히 깨우치는 경우입니다.
사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은 무상요가에 입문하기 전에 먼저 공성을 깨우쳐야 합니다.
이런 경우는 공성을 깨달은 지혜가 지복을 경험하기 전에 먼저 일어납니다.
이렇게 수승한 수행자들은 ‘나(自我)’를 대상으로 한 실제 수행에 들어가 있는 동안
‘뚬모 수행’, ‘본존요가’, ‘몸의 미세한 풍기를 조작함으로써 맥륜을 통과’하는 등의 방법을 활용합니다.
이때 수행자는 근본 욕망의 힘을 일으켜 정수를 녹임으로써 대지복의 상태를 경험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전에 깨우친 공성과 지복을 하나로 합일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복의 경험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그것은 수행자의 몸 안에서 정수가 녹아내릴 때 중앙 맥관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경험입니다.
여기서 물리적인 지복의 강력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신적인 지복으로 일어나는 극히 미세한 차원의 경험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때 공성에 대한 깨달음으로 이 모든 것을 비추어 보면 저절로 공성과 지복의 합일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공성과 지복을 합일하는 방법입니다.
딴뜨라에서는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특히 다양한 맥락에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다차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와 같이 앞에서 설명한 지복에도 일반적으로는 세 가지 유형이 있는데,
(1) 재생액(再生液, 精과 血)이 방사되어 일어나는 지복,
(2) 맥관 안으로 풍기와 정수가 흐를 때 일어나는 지복,
끝으로 (3) 딴뜨라에서 ‘불멸의 지복’으로 알려진 지복이 있습니다.
공성을 깨닫기 위해 지복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무상요가의 많은 본존들이 성적인 합일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이러한 지복은 단순히 일반적인 성적 합일을 통해서 일어나는 경험과는 아주 다른 유형의 지복입니다.”
(달라이 라마 법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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