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상즉상입설, 그 의미와 구조
- 數十錢法의 전개와 관련하여 -
석 길암(외대 강사․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
Ⅰ. 들어가는 말
화엄교학 또는 화엄사상에 있어서 ‘상즉상입’ 곧 ‘상즉설’은 화엄일승원교의 무장무애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핵심 교설이라고 할 수 있다. 화엄의 상즉상입설이 실제로는 중국불교, 더 멀리는 인도불교의 중관사상에서 비롯된 ‘상즉’ 개념의 궁극적인 형태라는 점을 감안할 때는 ‘상즉설’로 통칭하는 것도 그다지 무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상즉과 상입은 그 의미에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상즉 내지 상입이라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卽’이라고 하는 불교 특유의 논리에 입각해 있다. 이러한 ‘卽의 논리’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空’을 바탕으로 하는 대립과 모순 곧 차별이 전제되어야 하고, 이로부터 서로 수용되고〔相入〕 서로 인정되는〔相卽․相是〕 곧 ‘평등화’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화엄교학에서는 이러한 ‘卽의 논리’가 궁극적으로 구현되는 것을 ‘사사무애법계’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상즉상입설의 구체적인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점이 발견된다. 상즉상입설이 화엄가들에게 수용되는 단계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화엄가들에게 수용된 이후 그것이 더 구체화되고 조직화되는 과정은 수십전유의 전승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처음에 지엄이 ‘數十法’을 설하고, 의상은 그것을 ‘수십전법’으로 체계화했으며, 그것은 다시 원효를 거쳐서 법장에 이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수십전법은 더욱 세분화되기도 하고, 각 화엄가들의 사상적 입장에 따라서는 해석의 변화를 낳기도 한다. 논자는 상즉상입설에 대한 화엄가들의 이해를 수십전법의 전승과 변화를 통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상즉상입을 설명하기 위해서 화엄가들이 수십전법의 비유를 사용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이해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변화를 통해서 화엄의 상즉상입설이 의도하고 있는 바를 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고에서는 수십전법의 전승과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卽’과 ‘中’, ‘空有’, ‘有體無體’, ‘同體異體’, ‘有力無力’ 같은 몇 가지 개념들을 중심으로, 수십전법의 전승과정과 관련하여 상즉상입설의 주요 논점들 중의 일부를 다루고자 한다.
상즉상입을 말하는 데 있어서 또 고려되어야 할 것은 중관 내지는 吉藏으로 대표되는 삼론학파의 상즉과 상입설이다. 물론 길장으로 대표되는 삼론사상과 화엄사상에서의 ‘상즉’ 사이에는 그 범위와 지향점에 차이가 있다. 그러나 화엄의 ‘상즉’ 개념이 삼론의 ‘상즉’ 개념을 매개로 삼아 형성된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길장에게 있어서의 상즉과 상입의 성립을 간단히 살펴본 다음, 화엄에서의 상즉상입설의 전개를 고찰한다. 그런 후에 길장과 화엄교학 사이에 나타나는 ‘상즉설’의 차이에 대해서 논하기로 한다.
Ⅱ. 吉藏에게 있어서의 相卽과 相入
상즉이든 상입이든 ‘즉’의 논리에 의해서 구현되는 세계관을 지향한다. 곧 같은 것일 수 없는 것이 동일화되는-주로 생사와 열반, 색과 공, 속제와 진제, 중생과 부처라고 하는 ‘전혀 다른’ 개념태를 지닌 어떤 것들이 동일화되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대승불교에 공히 통용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으며, 연기의 이해가 ‘공’이라고 하는 새로운 개념에 의지하면서 도출되는 논리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卽’이 불교사상에서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上田義文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연기세계의 논리는 객관화 입장의 논리, 즉 형식논리의 동일율을 완전히 깨버리는 것과 같은 논리이다. 色卽空․空卽色이라든지 一卽多․多卽一 등은 그러한 논리를 나타내고 있다. 공은 말할 것도 없이 색의 부정이므로, ?반야경?에도 “색이 공이면 색이라 이름하지 않는다”라고 하듯이 색이 있는 곳에 공은 없고 공인 곳에 색은 없다. 이처럼 상호간 연속성 내지 동일성이 전혀 없는 색과 공을 ‘卽’이 묶고 있다. 그것은 동일성이 없는 색과 공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 절대적인 모순 대립성과 절대적인 동일성을 동시에 갖춘 것이 ‘卽’이다. 여기에는 연속성이 조금도 없고, 따라서 ‘발전’은 없다. 이러한 것은 소위 ‘논리’가 아니며, 사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즉’의 기본적인 개념을 확인할 수 있다. 곧 절대적인 모순 대립성과 절대적인 동일성을 동시에 갖춘 것을 ‘상즉’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중관을 비롯하여 삼론학에 이르기까지 이 ‘즉’의 논리는 주로 생사와 열반, 진제와 속제, 색과 공의 ‘즉’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주로 사용되는 것에서 보듯이, 이제의 ‘상즉’이라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이제의 ‘상즉’이라고 하는 것은 화엄의 사법계관에 비추어보면 理와 事의 ‘상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화엄에서는 이것을 좀더 철저히 설한다는 것에 화엄교학의 상즉상입설의 의의가 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일까?
길장에게 있어서 상즉과 상입은 각각 전혀 다른 차원에서 별도로 논해지고 있으며, 양자 사이의 결합은 아직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의?에서는 ‘상즉’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大師가 옛날에 이르기를, 假名有라고 하고 假名空이라고 한다. ‘假名有’라고 하는 것은 世諦라고 하고, ‘假名空’이라고 하는 것은 眞諦라고 한다. 이미 假有라고 이름하면 바로 非有를 有라고 하고, 이미 假空이라고 이름하면 곧 非空을 空이라고 한다. 非有를 有라고 하면 空과 다르지 않은 有이며, 非空을 空이라고 하면 有와 다르지 않은 空이다. 空과 다르지 않은 有를 空有라고 이름하고, 有와 다르지 않은 空을 有空이라고 이름한다. 有가 空有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空有는 곧 有空이며, 空을 有空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에 有空은 곧 空有이다. 師가 해석한 相卽義이며, 方言이 이와 같다.
이것은 앞에서 인용한 上田義文의 ‘즉’에 대한 해석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길장은 ‘非一非異’ 곧 ‘같지 않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의 동시적인 성립이 ‘상즉’이라고 말한다. ‘같지 않다’는 것은 有와 空이 서로 모순대립관계에 있는 다른 것임을, ‘다르지 않다’는 것은 有와 空이 다르지 않다는 것 곧 동일성을 갖추고 있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둘의 동시적인 성립은 사유로서는 모순일 수밖에 없으며 오직 실천적인 체득에 의해서만 가능해진다. 그런데 길장의 이 같은 ‘상즉의’는 성실론사들의 ‘상즉의’에 대한 반성에서 전개된 것이다. 곧 “開善은 二諦는 一體라고 밝혀서 卽是卽을 사용하고, 龍光은 二諦가 各體임을 밝히고 不相離卽을 사용한다. 여러 스승이 많다고 하더라도 이 둘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개선 법사는 ‘卽是卽’의 입장에서 이제의 체가 동일함을 밝혔다는 것이고, 용광 법사는 ‘不相離卽’의 입장에서 이제의 체가 각기 다름을 밝히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은 一體를 말하든 아니면 各體를 말하든 간에, 무언가 實有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얻을 것이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삼론종과 길장은 이 둘의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자신의 ‘상즉의’를 밝히고 있는 것으로, 一과 異의 어느 것도 취하지 않는 입장 곧 非一이면서 非異라는 데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취한다. 그리고 二諦가 言敎의 二諦라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것은 實有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無得’이라는 입장이 실천적으로 체득되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곧 동일성과 차별성이 동시에 성립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며 실천적으로만 체득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길장의 주장은 절대적인 모순대립성과 절대적인 동일성을 동시에 갖춘다고 하는 上田의 주장과 통하게 된다.
또 길장의 상입에 대한 논의는 ?淨名玄論?의 ‘明境不思議’ 중의 ‘俗境不思議’를 해명하는 가운데 ‘大小相入’에 대한 언급에서 볼 수 있다. 곧 “처음 俗境不思議를 해석한다는 것은, ?성실론?에서 ‘더 나아가서 작은 풀도 아무리 사유하고 관찰하여도 오히려 알지 못하는데 하물며 일체법을 알 수 있겠는가? 사리불도 한 마리 새의 始末을 알지 못했는데 하물며 일체 중생이겠는가.’ 하였으니, 때문에 俗境不思議임을 안다. 여기에서는 大小用入의 한 가지 뜻에 의지하여 그것을 해석하겠다. 묻기를, 크고 미세한 것은 다른 형상이며, 또한 증감이 없는데 어떻게 서로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하는가?”라는 문장 다음에, 南方의 설과 北土地論師의 대소상입설을 든 이후에 길장 자신의 설을 제시하는 순서로 전개하고 있다. 또 ?維摩經義疏?에서는 “큰 것이 작은 것에 들어가는 것을 보지 못하면 범부라고 하고, 그것을 보기는 하되 이해하지 못하면 二乘이며, 그것을 보고 능히 깨쳐서 알면 보살상근기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길장이 설한 상즉과 상입의 관점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길장의 이제상즉은 言敎二諦라고 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통해 空有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中道 곧 無得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길장의 이제상즉이 체득되어진 결과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破邪에서 顯正에 이르는 방향성의 제약이 있다는 의미이다. 곧 差別에서 無差別로의 전개라는 방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無差別에서 差別로의 방향성은 크게 고려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길장이 설하고 있는 대소상입설에서의 상입은 상즉과 짝하는 것으로는 고려되지 않는다. 길장은 대소상입설을 그저 ‘不思議’를 설하는 예증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凡夫와 二乘, 菩薩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으로서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후대의 화엄가들은 이 같은 길장의 상즉과 상입설을 매개로 그 개념태에 있어서 상당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상즉상입설을 전개하게 된다.
Ⅲ. 華嚴敎學에서의 相卽相入說과 數十錢喩
길장의 ‘상즉설’과 화엄교학의 ‘상즉설’을 비교하여 화엄교학의 ‘상즉설’이 좀더 철저하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화엄에서의 상즉상입은 길장의 이제상즉과는 달리 상입을 함께 설한다는 점, 그리고 사와 사의 상즉상입을 구극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논자는 화엄교학에서 삼론에 비하여 더욱 철저히 상즉을 설한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여기에 두었다고 생각한다. 길장이 설한 ‘상즉’과 화엄에서 설한 ‘상즉’이 어느 것이나 ‘절대적인 모순대립성과 절대적인 동일성의 동시적인 성립’을 기본적인 논리로 삼는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점 때문에 화엄의 ‘상즉’은 삼론의 ‘상즉’을 중요한 매개로 삼아 성립한 것이라고 평하는 것이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는 단순히 ‘철저하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상즉과 상입을 함께 설한다는 것 외에도, 삼론과 화엄의 지향이 근본적으로 다른 데서 오는 중요한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삼론에서는 破邪와 顯正이 동시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향은 破邪→顯正이라고 하는 일방향성이 강하다. 곧 差別에서 無差別로의 지향이 주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고 있는 것처럼 화엄은 그 반대의 방향 무차별에서 차별로의 지향성이 주가 된다. 삼론과 화엄이 지니고 있는 사상본연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방향성의 차이는 각자가 설하는 상즉론에서의 차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화엄에서는 상즉과 상입을 함께 설하여 ‘무장무애’로 이해하였으며, 또 왜 상입의 설이 화엄교학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상즉과 상입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점을 數十錢喩의 전승과 연관지어 살펴보기로 한다.
1. 義湘의 경우-中門과 卽門의 시설
화엄교학에서 수십전유의 경증이 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경문들이다.
(a) 비유하면 갖가지 數가 / 모두 다 수법인 것과 같아서
제법도 그러하여 / 그 性이 別異가 없다.
비유하면 열을 헤아리는 법과 같아서 / 하나를 더해 무량에 이르니
모두 다 본수이나 / 지혜인 까닭에 차별하다.
(b) 하나 가운데 무량을 알고 무량 가운데 하나를 안다.
(一中解無量 無量中解一)
(c) 하나가 능히 무량이 되고 무량이 능히 하나가 된다.
(一能爲無量 無量能爲一)
(d) 하나가 곧 多이고 多가 곧 하나이다.
(一卽是多 多卽是一/ 一卽多多卽一)
이 경문들 중에서 (a)가 지엄이 설한 수십법의 원형이 된 것이라면, 나머지 (b)와 (d) 등은 수십전유의 경증이면서 동시에 각기 中․卽門의 원형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경에는 ‘一中多 多中一’, ‘一卽多 多卽一’의 형태와 유사한 표현이 수없이 등장한다.
지엄은 이 경문들을 중심으로 수법설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상즉상입을 설하는 구체적인 예증으로서 사용한 것은 아니다. 이것을 상즉상입을 설하는 화엄교학의 교의로서 체계화시켜 논의한 것은 의상에 이르러서이다.
의상은 “별교일승에 依하면 理와 理가 상즉함(理理相卽)도 되며, 事와 事가 상즉함(事事相卽)도 되며, 理와 事가 상즉함(理事相卽)도 되며, 그 각각이 상즉하지 아니함(各各不相卽)도 된다. 왜냐하면, 中과 卽이 같지 아니한 까닭…”이라고 하여, 상즉의 다양한 의미와 함께 中․卽이 서로 다른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연후에 의상은 “만약 연기실상의 다라니법을 관하고자 한다면 먼저 마땅히 數十錢法을 깨달아야 한다. 이른바 일전에서 십전에 이르는 것이니, 십을 말하는 까닭은 무량을 드러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一中十과 十中一이며, 다른 하나는 一卽十과 十卽一이다.”고 하여, 중문과 즉문으로 나누어서 수십전법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일중다 다중일’의 형태는 의상의 수십전법에서 중문을, ‘일즉다 다즉일’의 형태는 즉문을 구성하는 기본문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문은 상입에 즉문은 상즉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상의 수십전법에서 중문과 즉문에 대한 설명을 통해서 의상이 의도하는 바를 살펴보기로 한다.
초문(中門) 중에 둘이 있으니 向上來와 向下去이다. 향상래 중에 十門이 있어 같지 않다. 즉 첫째는 一이니 緣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 이는 곧 本數이다. 내지 열째는 一中十이니 만약 一이 없으면 十이 이루어지지 않으며 十은 一이 아닌 까닭이다. 나머지 門도 이와 같으니 예에 따라 알 수 있다. 향하거 중에도 十門이 있다. 첫째는 十이니 緣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十中一이니 만약 十이 없으면 一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 一은 十이 아닌 까닭이다. 나머지도 이와 같다.
먼저 향상문을 살펴보자. 첫 번째 동전인 一錢은 一錢이니, 一은 本數이고 緣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연으로 이루어진 一이므로 자성이 없는 一이다. 내지 十도 연으로 이루어진 十이기 때문에 역시 자성이 없는 것이며, 이로부터 일체 緣生法은 어느 한 법도 고정된 자성이 없음이 드러난다. 곧 一과 十으로 대표되는 無盡에 이르는 여러 수가 상입할 수 있는 근거가 ‘緣成’에 있음이 밝혀진다. 이렇게 해서 두 번째 동전의 二는 一中二가 되고 같은 방식으로 十은 一中十이 된다. 만약 자성이 있는 것이라면 一錢을 치워버려도 두 번째 동전이 첫 번째 동전이 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첫 번째 동전을 치우면 두 번째 동전이 일전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로 말미암아 열이 있고 열을 말미암아서 하나가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 수를 헤아릴 때 一이 없으면 헤아림에 바탕이 되는 것이 없어지고 一과 十이 구별되지 않는다면 전부 一이나 十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一은 十이 아닌 까닭이라고 말한다. 一을 本數라고 한 것은 동전에 첫 번째부터 열 번째에 이르는 지위를 주어서 열을 헤아리는 것의 처음의 一이기 때문이다. 十이 一 가운데 十이기 때문에 모두 본수가 될 수 있지만 이미 지위를 주고서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에 一이 本數가 된다. 향하문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향상과 향하는 일전에서 십전 쪽으로 헤아리면 향상이고 십전에서 일전 쪽으로 헤아리면 향하이다. 다만 향상에 ‘來’라고 하는 것은 일에서 십으로 헤아려 올라갈 때, 본수인 처음의 일전에 힘이 있어서 십전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반면에 향하의 경우에는 십전의 힘이 십전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去’라고 표현한다.
이 같은 점들을 고려하면 十이라고 해도 一과 관련된 十 곧 一 속의 十(一中十)이며, 一이라고 해도 十이 될 가능성을 지닌 一 곧 十 속의 一(十中一)이 된다. 이렇게 ‘一中一切多卽一’이 성립하므로, 서로 용납하고 걸림이 없어서 一門에 十門이 구족하게 된다.
?一乘法界圖圓通記?에서는 돈에 位錢․體錢․德錢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곧 “동전에 位錢이 있고 體錢이 있으며 德錢이 있다. 말하자면 처음의 一은 位錢이고 다음의 一은 體錢이며, 一中二 등은 德錢”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곧 位錢이란 동전을 나열할 때 놓이는 순서에 따른 것이고, 體錢은 각 동전에 고유번호를 붙여서 一錢에서 十錢까지를 구별한 것이며, 덕전은 중문 안에서의 상입에 따라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敎分記圓通鈔?에서는 ‘德錢’을 ‘行錢’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다음은 즉문을 살펴보자.
제2문(卽門) 중에도 둘이니 一은 向上去이고 二는 向下來이다. 초문(向上去) 중에 十門이 같지 않다. 첫째는 一이니 緣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一卽十이니 만약 一이 없으면 十이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이며 緣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 제2문(向下來)에도 또한 十門이 있다. 첫째는 十이니 緣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十卽一이니 만약 十이 없으면 一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도 예에 준한다. 이런 의미로 인해 마땅히 一一錢 중에 十門이 구족됨을 알아야 한다.
즉문은 刑奪門에 해당한다. 중문에서는 ‘去來’를 말할 때 一錢에 힘이 있어서 가지고 오느냐 아니면 十錢에 힘이 있어서 가지고 가느냐 하는 ‘힘의 유무’가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즉문에서는 곧바로 오고감(去來)의 뜻을 기준으로 한다. 그래서 법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처음의 一錢은 전체를 들어서 二가 되고 내지 十이 된다. 때문에 向去라고 할 따름이며, 將去에 기준하여 去라고 하지 않는다. 十에서 一을 향함은 전체를 들어서 來하는 것이며, 때문에 來라고 할 분이며 將來에 기준하여 來라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이 문이 바로 형탈문임을 말함이고, 때문에 그 자체의 ‘去來’의 뜻에 의거하였다.
이것은 중문에서의 ‘去來’의 기준이 힘이 어디에 있느냐를 따져서 그 力用에 따라서 ‘去來’를 말한 것과 달리, 즉문의 향상거에서는 一錢이 전체를 기울여서 곧바로 二가 되고 十이 되고, 향하래에서는 十錢이 전체를 기울여서 곧바로 一을 향해서 오기 때문에 ‘自體去來의 뜻’에 기준 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중문과 즉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卽과 入에 나아가면, 여러 사람들이 세운 이름이 같지 않다. 어떤 이는 “中門과 卽門이다.”고 하였고, 어떤 이는 “상즉과 상입이다.”고 하고, 어떤 이는 “相是와 相在이다.”고 하며, 어떤 이는 “相是와 相資이다.”고 하였다. 어떤 이는 “서로 모양을 빼앗은 體와 無體의 뜻이고, 서로 의한 力과 無力의 뜻이다.”고 하였다. 또 古人은 말하기를 “中門은 因果道理門이고 卽門은 德用自在門이다. 또 중문은 虛空建立門이고 즉문은 虛空動作門이다.”고 하였다.
묻기를, ‘入門은 因果道理門이고 卽門은 德用自在門이다.’는 것은 어느 글에 의지해서 세웠는가? 답하기를, 의상대덕은 말하기를 “다라니를 기준으로 하면 理와 用은 攝法分齊를 나타낸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理는 중문이고 用은 즉문이다.
중문은 인과의 도리에 따르는 문이고 인과 사이의 力․無力의 관계를 중심으로 바라본 것이다. 인과의 관계를 기초로, 즉 연으로 이루는 것이므로 허공에 건립하는 곧 무자성의 理라는 측면에서 논하는 것이 중문이라고 할 것이다.
한편 즉문은 덕용이 자재한 문이라고 설명된다. 덕용의 자재란 불보살의 덕용이 작용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또한 허공동작문이라고도 하였다. 불보살의 덕용이 중생계에 나툴 때에는 무위의 用이기 때문에 因果의 도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그 체의 유무에 따라 모양을 빼앗는 刑奪門이라고 부른 것이다.
덕용자재의 즉문이든 아니면 인과도리의 중문이든, 어느 것이나 구경의 ‘상즉의’를 드러낸다고 하는 것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덕용자재는 중생의 입장이 아니라 부처의 위지에서 가능해지는 것이고, 부처의 덕용은 인과의 도리를 따르지 않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無所得, 無住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부처의 不思議한 德用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의상은 즉문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상즉의 즉문은 기본적으로 饒益衆生의 입장에 초점이 두어졌다고 할 수 있는 반면, 상입은 歸一心源의 입장에 초점이 두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길장이 설했던 상즉설과 의상이 조직한 수십전법을 통해서 보이는 상즉상입설에 서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의상은 상즉상입을 동시에 설하고 있다. 그리고 길장의 이제상즉이 차별과 무차별의 동시성립을 의도한다고 하더라도 차별로부터 무차별을 지향(차별→무차별/破邪→顯正)하는 일정한 방향성이 강한 것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의상의 경우, 인과도리문인 중문(상입)은 귀일심원 곧 차별에서 무차별로의 방향성을 보이는 것인 반면에 덕용자재문인 즉문(상즉)은 요익중생 곧 무차별에서 차별로의 방향성에 중점을 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길장이 이제상즉에서 卽이 의미하였던 바는 오히려 의상이 말한 상입의 중문에 가까운 것이 된다. 그리고 상즉은 새로운 방향성을 가지고 상입과 함께 ‘화엄상즉론’의 새로운 의미태를 구성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 상입의 경우에도 원효가 길장의 대소상입이 철저하지 못하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나, 법장이 ‘齊’의 관점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곧 길장 내지 삼론종의 대소상입설이 철저하지 못하다고 하는 화엄가들은 ‘齊’ 곧 평등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는 화엄가들이 대소상입을 논하는 관점이 평등성 곧 理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2. 법장의 경우-空有와 異體同體
법장은 의상이 설한 수십전유를 상당히 독특한 관점에서 재조직하고 있다. 법장의 수십전유는 ?화엄오교장?․?탐현기?․?금사자장?․?유심법계기?와 법장의 저술로 추정되는 ?화엄일승십현문? 등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화엄오교장?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법장의 수십전유는 의상만이 아니라 원효의 수십전유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가장 큰 특색을 꼽는다면 유식교학의 삼성설을 삼성동이로 種子六義를 緣起因門六義로 재조직하고 그것에 의해서 상즉과 상입을 논하는 점이라고 할 것이다.
일체법이 생기하는 원인에는 六義를 갖추어야 하는데, 공유력부대연(空有力不待緣), 공유력대연(空有力待緣), 공무력대연(空無力待緣), 유유력부대연(有有力不待緣), 유유력대연(有有力待緣), 유무력대연(有無力待緣)이 그것이다. 因의 體가 空하고 有한 두 가지 문에 각각 因에 힘이 있어서 緣을 기다리는 경우와 기다리지 않는 경우, 因에 힘이 있어도 緣과 함께 만나 일어나는 경우, 그리고 因에 힘이 없어서 언제나 緣을 만나야만 생기하는 경우의 여섯 가지로 나눈 것이다. 곧 空有, 有力無力, 待緣不待緣에 따라서 여섯 가지의 제법이 생기하는 원인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공과 유, 유력과 무력, 대연과 부대연은 서로 대립되는 쌍을 이룬다. 법장은 이것을 공유의 대립은 상즉에 의해서, 유력무력의 대립은 상입에 의해서, 그리고 대연과 부대연의 대립은 동체이체의 원리에 의해서 해결하고 있다.
의상이 중문과 즉문으로 수십전법을 대별한 반면에, 법장은 아래와 같이 동체이체로 대별하고 있다.
처음에 비유로 보이는 것은 수십전법과 같다. 十이라 말하는 까닭은 圓數에 응하여 다함없음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異體이고 둘째는 同體이다. 이 두 문이 있는 까닭은 모든 연기문 내에 두 가지 뜻이 있기 때문이다. 一은 不相由의 뜻으로 스스로 공덕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因 가운데 不待緣 등이 이것이다. 二는 相由의 뜻으로 待緣 등이 이것이다. 처음은 동체이고 뒤는 이체이다.
體의 空有와 因의 역용 有無에 관계없이, 연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는 인과 연은 서로 異體이다. 그러나 緣이 원래 因 중의 것이기 때문에 인이 연을 기다리지 않는 경우에는 인과 연은 동체여야만 한다.
이 이체문과 동체문 각각의 범주에서 다시 상즉과 상입을 설하게 된다. 상즉은 인과 연이 다 공유의 두 가지 뜻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因有이면 緣空, 緣有이면 因空이 되어서 인과 연이 서로 體의 공유에 의해서 상즉의 뜻을 성립시킨다. 또 인과 연이 서로 유력무력이 되는 것은 인의 역용이 연으로 들어가고 연의 역용이 인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상입의 관계가 생긴다.
이처럼 법장은 이체문과 동체문을 설정한 연후에 그 각각의 문에 다시 상즉과 상입으로 나누고 있다. 이는 외형상으로는 원래 의상이 설한 수십전법이 상입과 상즉을 설하는 두 개의 문인 중문과 즉문만을 시설한 것에 비해서 훨씬 세분화된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이체문에서는 一錢이나 十錢이 나머지 아홉 개의 동전과 체가 다르다는 입장 곧 異體의 입장에서 향상수․향하수의 상입과 향상거․향하래의 상즉이 시설된다. 그리고 동체문에서는 一錢 또는 十錢이 나머지 아홉의 동전을 갖추고 있는 동체의 입장에서 일중다․다중일의 상입과 일즉십․십즉일의 상즉이 시설된다.
이체문과 동체문의 상입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이체문에서는 처음의 一을 뒤의 아홉 가지에 바라보아 異門에서 상입하는 것으로, 일다상용부동문으로 설명된다. 一과 多가 서로 용납하여 중중무진이 되지만 그 체가 같지 않아서(異體) 不同이기 때문이다. 동체문에서는 체가 같기 때문에 一 가운데 스스로 열 개의 一인 十을 갖추어 있는 것이다. 동체문에서는 체가 같기 때문에 “第一錢중의 十錢이 현료가 되고, 第二錢이 第一錢 가운데 十錢을 바라봄이 비밀이 되는 것”이어서, 이것을 보면 저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밀과 현료로 서로 숨고 드러남이 있지만, 하나가 이루어지면 나머지도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밀은현구성으로 설명된다.
이처럼 법장의 수십전유는 이체문만이 아니라 동체문도 설정하고 있는 점에 가장 큰 특징이 존재한다. 그러나 연의 대연과 부대연을 말미암아서 동체와 이체가 설정되기는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동체의 측면을 별도로 설정하지 않는다고 해도 화엄교학의 법계연기론에서 의도하는 事와 事의 상즉상입은 이미 달성된다. 곧 의상이 설한 이체문의 상즉상입만으로도 사사상즉은 달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체문의 설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게 된다. 균여의 ?교분기원통초?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묻기를, 열 가지 普法을 기준으로 하면 相應하는 것은 동체이고 각각 다른 것은 이체이니, 또한 所應이 합쳐지면 동체가 되는가? 답하기를, 오직 能應만이 동체일 뿐이며, 만약 所應이라면 동체가 아니다. 여러 곳에서 말하기를, “동체는 안으로 갖추고 이체는 서로 조망한다. 동체는 서로 말미암지 않고 이체는 서로 말미암는다. 동체는 부대연이고 이체는 대연이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하나 가운데 본래 열 가지 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동체는 안으로 갖추는 것이다.
자신의 하나(自一)에 머무름은 곧 異體이고, 바야흐로 능히 두루 응함은 곧 동체이다.
여기서 동체는 안으로 갖추는 것이고 이체는 서로 조망(相望)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의미만으로 보자면 이체와 동체는 즉과 입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동체의 의미를 추구할 때 단순히 ‘상즉’이라고만 표현할 때는 잘 나타나지 않던 能應이라고 하는 특징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역시 능히 감응시키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能應’만을 포함하고 감응의 대상인 所應은 동체에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것은 역시 불의 덕용자재의 입장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의상은 이체문의 중문과 즉문을 시설하여 화엄의 사사무애법계를 설하고 있는 것이라면, 법장은 여기에 다시 동체문을 설정하여 불의 덕용자재문을 더욱 강조한 점에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의상의 즉문만으로도 덕용자재라는 부분은 충분히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理의 측면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법장교학의 특징이 드러나는 일면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Ⅳ. 맺는 말
이상으로 길장을 매개로 하여 형성되는 화엄교학에서의 상즉상입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길장이 ‘상즉’에 대해 논의하는 단계에서는 상즉과 상입을 결부시켜서 논하는 예는 찾아볼 수 없다. 길장은 화엄의 입장에서 보자면 ‘상즉’을 주로 상입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곧 ‘즉’을 매개로 異體인 色과 空 또는 속제와 진제라고 하는 두 가지 대립 모순되는 것의 동일화라는 관점이 주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엄가들은 삼론에서 ‘즉’을 설하는 기본적인 논리는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그 지향과 내용에 있어서는 완연한 차이를 가지고 ‘상즉론’을 구성하게 된다. 우리는 그 차이를 화엄가들이 상즉의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던 수십전유의 구조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십전유는 의상이 지엄의 수십법을 받아들여 구체적인 형태의 화엄교의로 조직한 것이다.
의상은 중문과 즉문으로서 상즉상입을 설한다. 이때 삼론의 이제상즉에서 보이는 관점은 상입으로 수용되고, 거기에 더하여 상즉이 화엄의 새로운 관점으로서 추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론의 ‘상즉설’은 기본적으로 차별에서 무차별로의 지향이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데, 화엄의 상입이 이와 같은 방향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화엄의 상즉은 이와는 반대의 방향성 곧 무차별에서 차별로의 지향을 보여 준다. 이 같은 점은 즉문(상즉)을 德用自在門이라고 하고 중문(상입)을 因果道理門이라고 하는 균여의 설명에 의해서 확인된다. 이것은 화엄사상이 궁극적인 측면에서 ‘性起’ 곧 佛行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길장이 ‘상즉’과 별도로 논하였던 대소상입의 설이 원효와 법장에게 수용된 이후에 평등성(理)의 관점에서 재해석되는 것도 화엄의 이러한 사상적 입장이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법장은 의상과 원효의 수십전법을 수용하여 새롭게 조직하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異體와 同體를 설정한 점이다. 법장은 유식의 삼성설과 종자육의설을 수용하여 삼성동의와 연기인문육의로 재구성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체의 상즉상입과 동체의 상즉상입이라고 좀더 세분화된 수십전법을 조직한다. 법장은 동체를 설정함으로써 화엄의 별교일승을 강조하는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상과 비교한다면 훨씬 복잡한 이론조직으로 수십전유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 이후의 수십전유는 말 그대로 비유로서의 의미가 훨씬 두드러지게 된다. 반면 의상의 수십전법이 간명한 반면에 관법으로서의 의미가 강해서 실천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이상으로 길장의 이제상즉설 및 수십전법의 전개와 연관하여서 의상 및 법장의 상즉상입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수십전법의 전승 과정 특히 의상에게서 법장에게로 전승되는 과정에는 원효가 깊이 개입되어 있을 가능성이 여러 곳에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원효의 수십전법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때문에 법장의 수십전법 성립에 관련된 몇 가지 언급들은 추후 수정의 여지가 남아있다는 점을 밝혀둔다.
주제어
화엄Huayen, 상즉상입entity and Mutual-Entering(相卽相入),
수십전법Huayen's metaphor of counting ten coins(數十錢法),
삼론sanlun, 의상Euisang
The Meaning and Structure
of the Mutual-Identity and utual-Entering(相卽相入)
in Huayen Buddhism
- centered on the developments of the metaphor of counting ten coins -
Seok, Gil-am
This paper examines the idea of the Mutual-Identity and Mutual-Entering(相卽相入) of Huayen Buddhism through tracing developments of Huayen's metaphor of counting ten coins(數十錢法).
Although Huayen buddhists accept the basic idea of Sanlun's Mutual-Identity(相卽) as it is, there is a definite difference in its explanation. The Huayen uses the metaphor of counting ten coins for it.
Euisang(義湘) unfolds his idea of the Mutual-Identity and Mutual-Entering upon the basis of two-fold structure of Jungmun(中門, Mutual-Entering) and Jeukmun(卽門, Mutual-Identity). He reconstructs the idea of Sanlun's Mutual-Identity as Huayen's Mutual-Entering, and adds Huayen's own idea of Mutual-Identity as a new view-point.
Jungmun means, he says, the concept of the differentiation aiming at the integration. On the contrary, Jeukmun can be explained as the integration pointing at the differentiation. In other words, this explains the side of Buddha's delivering sentient beings; and that does the side of sentient beings' seeking the enlightenme-
nt. Euisang's two-fold structure implies that Huayen's idea of Mutual-Identity emphasizes the equality much more than Sanlun's.
Fazang(法藏) systematizes Euisang's metaphor of counting ten coins. The most remarkable point in his reformed theory is the idea of the Substance-Differing Area(異體門) and the Substance-Sharing Area(同體門). He includes Euisang's Jungmun and Jeukmun in his own Substance-Differing Area, and creates the new area of Substance-Sharing Area. In his new area, we shall see Fazang's intention to emphasize that Huayen Buddhism is the only teaching for Ekayana not for any other.
- 불교학 연구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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