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중국 당나라시대의 임제(臨濟義玄, ?~867) 선사의 언행을 담은 <임제록(臨濟錄)>에 나오는 말이다.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곳이 바로 진리(깨달음)의 세계이니 자기가 처한 곳에서 주체성을 갖고 전심전력을 다하면 어디서나 참된 것이지 헛된 것은 없다는 말이다.
‘수처작주(隨處作主)’란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뜻이다. 수처(隨處)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고 삶터이며, 작주(作主)란 인생의 주인공이 돼 주체적으로 살라는 뜻이다. 처하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는 말씀처럼, 모든 사람들 각자가 제 자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잘 해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입처개진(立處皆眞)이란 지금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라는 뜻이다. 모든 문제의 해결법은 멀리 있지 않다. 즉, 내가 서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이 풀어진다고 했다. 한마음 돌이키면 그 자리 모두가 진리인 것이다.
비슷한 말에 “입처즉진(立處卽眞)”이란 말이 있다.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의 말씀인데, “서 있는 곳이 곧 진리이다”는 말이다.
대체로 5조 홍인(弘忍)까지의 심성설(心性說)은 망념(妄念)이 진성(眞性)을 덮고 있으므로 망념을 걷어내어야 진성이 드러난다고 하는 진ㆍ망(眞-妄) 이원(二元)의 심성설이었다. 그러나 6조 혜능(慧能) 선사는 자성(自性)의 근원성을 강조하며 자성만 깨달으면 망념을 따로 걷어낼 것이 없다고 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장해, 자성일원론의 입장을 취했다.
이에 비해 마조(馬祖)는 혜능과는 달리 심(心) 일원론의 입장인 일심법(一心法)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마조의 심성설(心性說)인 일심법(一心法)에서는 즉심시불(卽心是佛)ㆍ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 심(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때 심(心)의 의미는 만법이 모두 마음으로부터 생겨나왔으니 마음이 만법의 바탕이라는 일체유심(一切唯心)이므로 일체법이 모두 불법(佛法)이어서 참[眞]을 떠나서는 설 곳이 없으니, 서는 곳이 곧 참[眞]이라는 입처즉진(立處卽眞)의 심(心) 일원론이다.
그리하여 마조 계통의 임제 선사는 <임제록(臨濟錄)>에서 ‘즉금목전현용(卽今目前現用)’을 강조했다. 참으로 중요한 진리는 바로 지금 눈앞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란 말이다. 네가 서 있는 그곳에서 진리를 찾으라는 말이다.
따라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란 어떤 경우에도,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 곳이 곧 참된 곳, 진실한 곳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주인은 현재 인식되는 ‘나’라고 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뜻한다. 그러므로 스스로 부처가 되면, 혹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게 되면, 그곳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고 정토이이며 극락이고 열반의 세계라는 말이다.
<임제록>에 나오는 앞뒤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師示衆云 道流 佛法無用功處 是平常無事 아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
사시중운 도류 불법무용공덕 시평상무사 아시송뇨 착의끽반 곤래즉와
愚人笑我 智乃知焉
우인소아 지내지언
古人云 向外作工夫 總是癡頑漢 爾且隨處作主 立處皆眞 境來回換不得
고인운 향외작공부 총시치완한 이차수처작주 입처개진 경래회환부득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 自爲解脫大海 今時學者 總不識法 猶如觸鼻羊 逢著物
종유종내습기오무간업 자위해탈대해 금시학자 총불식법 유여촉비향 봉저물
安在口裏 奴郞不辨 賓主不分 如是之流 邪心入道 鬧處卽入 不得名爲眞出家人
안재구리 노랑불변 빈주불분 여시지류 사심입도 요처즉입 부득명위진출가인
正是眞俗家人
정시진속가인」
임제(臨濟) 선사는 다음과 같이 대중에게 설법을 했다(윗글의 풀이).
「납자들이여, 불법은 애써 힘쓸 필요가 없다. 다만 평소에 아무 탈 없이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잠자면 그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나를 비웃는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안다.
옛 성인이 말씀하시길, “밖을 향해 공부하지 말라. 그것은 어리석은 자들의 짓일 뿐이다.” 그러니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해도 꺼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임제 선사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설령 묵은 습기와 무간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요즈음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들 법을 모른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종과 주인을 가리지 못하며, 손님인지 주인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불교]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이해득실과 시시비비의 번잡스런 일에 곧바로 빠져버리니 진정한 출가인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바로 속 된 속인(俗人)이다.」
다음은 무비 스님의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상황에 꺼들리지 말고, 주체적 인간으로 살면 무엇을 하든 그 하는 일과 그 있는 자리가 모두 진실한 진리의 삶이다. 상황과 처지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고, 상황과 처지의 주체적 역할을 하라. 어떤 일도 주체적 역할을 할 때 그 일은 곧 온전한 내 일이고, 온전한 나의 삶이다.
이것이 철저히 살고 철저히 죽는 전기생 전기사(全機生 全機死)이며, 대기대용(大機大用-원숙한 경지)의 삶이다.
실로 천고의 명언이다. 이 한마디로 임제는 저 넓은 태평양이고, 허공이다. 수미산 꼭대기고, 히말라야 정상이다. 비상비비상천이고, 수 만 광년 저 바깥이다.
그러나 백보 끌어내려서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
“어디에 가건 지금 있는 그 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다. 그러므로 현재의 위치가 아닌,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를 바라고 꿈꾸지 말라.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상황이든 만족하고 행복 하라.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 초점을 맞추어 행복을 누리라.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 언제나 배고픈 아귀가 되지 말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족하고 넉넉하게 부자로 살아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되면 설사 옛날에 익힌 업장과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즉 부모를 죽인 일이나, 성인을 죽인 일이나, 부처님의 몸을 해치거나, 청정한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거나 하는 따위의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대해에 노니는 것이 된다.
설사 인간이 저질을 수 없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대로 해탈이 된다는 뜻이다.
어떤 상황에 있든 주인이 되라[隨處作主]는 말은 타인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든 자신은 거기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타인이 나를 때리고 욕하고 비방하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질투하고 내 것을 빼앗아 가고 큰 손해를 입히고 훼방하여 큰 곤경에 처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이고, 자신은 그것에 동요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것, 타인이 하는 일에 끌려가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본심으로 주체자가 돼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 행복하다. 그것이 진정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다.
자신에게 불이익과 손해가 돌아오고 비방이 돌아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다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반응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요즘 공부하는 이들은 이러한 마음의 법을 알지 못한다. 마치 양이 풀이고 나무고 가시고 간에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것처럼 아무런 말이나 다 받아들인다. 삿된 말과 마군이의 말을 잘도 받아들인다. 비방과 손해와 때리고 욕하는 일들을 잘도 받아들인다. 분별력이 전혀 없다. 방편과 진실을 전혀 가리지 못한다. 정법과 사법을 전혀 모른다.
그 말 많은 불교를 잘 변별해서 이제는 거품을 걷어내고 적확(的確)한 불교를 공부할 때다. 진정견해가 참으로 요구되는 때다. 좀 더 부연해서 말한다면 이런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불교에 들어와 있다. 이해득실과 시시비비 등등 정치적이거나 불교 외적인 것들에 열을 올리고 빠져들어 가위 박사가 돼있다.
불교 외적인 일들을 열거하기로 하면 끝이 없다. 정치문제, 사회문제, 경제문제, 환경문제, 명성과 이익, 학위나 운동이나, 예술이나 문필이나, 먹거리 마실 거리 등등 종류도 너무 많다. 이런 것들에 정신이 빠져 있으면서 불교를 운위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과 같다.
임제 스님은 이런 이들을 “참다운 출가인이라 할 수 없다. 참으로 속된 사람이며 저질이며 속물 그 자체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또는 영웅호걸의 큰 그릇이라 하더라도 불법지견(佛法知見)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백양사 고불총림 방장 서옹(西翁, 1912~2003) 스님이 늘 말씀하시던 ‘절대 현재 참사람(眞人)’도 같은 맥락의 가르침이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 속에서도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최고의 행복한 세계라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늘 변화의 흐름 위에서 살아간다. 변화하는 인생의 흐름 속에서 분명한 것은 ‘나는 나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고통을 받든 즐거움을 받든 주인은 바로 ‘나’이다. 아울러 고통과 즐거움을 만들어 내는 주인공도 다름 아닌 ‘나’이다.
우리는 삶의 대부분 시간을 주인으로 살지 못한다.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바로 화가 나고,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면 짜증이 난다. 경계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다. 이해(利害)라는 경계, 자존심이라는 경계, 습관적인 의심의 경계, 피해의식의 경계, 이기심의 경계에서 너무나 쉽게 자신을 잃어버린다. 주인이 아닌 객체가 돼서 이리저리 헤매는 까닭에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은 극락이 아니라 지옥이 된다. 만약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고, 주인으로 설 수만 있다면, 마음의 평정을 지킬 수 있고, 진리 그대로 살 수 있다.
<신심명(信心銘)>에 나오는 “육진불오(六塵不惡) 환동정각(還同正覺)”이란 가르침도 비슷한 말이다. 이 말은 중국 수나라 때 선종 제3대 조사 승찬(僧瓚) 대사가 하신 말로서, 여기서 육진(六塵)은 육경(六境)과 같은 말이다. 그 육경이 우리들 마음을 흔들어놓기 때문에 더러운 것이라 해서 육진이라 했다. 멋진 물건을 보면 가지고 싶고, 고운 목소리를 들으면 같이 놀고 싶고, 좋은 냄새를 맡으면 그 향기에 취하고… 이렇게 우리 마음을 흔들어놓는 것이기에 육진이다.
그 육진을 싫어하지 않으면 도리어 정각과 같음이라 하는 이 말은 육진이 자기 마음에서 나오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귀(耳)라는 근(根)으로 누가 엄청나게 모함하는 소리를 들었다거나 아니면 눈(眼)이라는 근(根)으로 남이 토해놓은 오물을 봤다거나 해도 내 본질, 내 근본 마음에 모함당한다거나 더럽다고 고통당하지 않고, 내 감정이 그에 흔들리고 끌려가지 않는다면 바로 모든 육진은 육진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한 좋은 것, 좋은 목소리, 좋은 냄새에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들이 육진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 “자기야 말로 가장 사랑스런 존재”라고 했다. 내가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할 때, 흔들리지 않는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상(我相)에서 나온 오만이 아니라 불심에 근거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주체적인 나를 세우라는 말이다. 서옹 스님 말씀처럼 ‘나는 나에게서 달아날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부처가 되면, 혹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알게 되면, 그곳이 바로 깨달음의 세계이고 정토이이며 극락이고 열반의 세계라는 말이다. 나를 떠나서는 그 어디에도 행복한 정토는 없다는 말이다.
임제(臨濟 ?~867) 선사의 속성은 형(邢)씨이고, 휘(諱)는 의현(義玄)이요, 조주(曹州) 남화(南華) 사람이다. 선사는 황벽희운(黃檗希運 ?~850) 스님의 법을 이어서 임제종의 개조가 됐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효성이 지극했다. 불교를 좋아하고, 출가한 후 경론을 많이 탐구하고, 특히 계율에 정통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갑자기 “이는 세상 사람을 구제하는 약의 처방전[경전]일 뿐, 경전 밖에 따로 전하는 뜻은 아니다.” 하며 탄식하고는 곧 옷을 갈아입고 제방을 행각했다. 맨 먼저 황벽(黃檗) 스님을 참례하고, 다음으로 대우(大愚) 스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황벽 스님의 인가를 받고 하북으로 가서 호타하(??河) 곁에 있는 작은 절에 머물렀으니, "임제(臨濟)"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서 붙여진 것이다.
어느 젊은 수좌가 임제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 진정한 불법이란 무엇입니까?”
이 말을 들은 임제는 그 수좌의 뺨을 갈겼다. ‘철썩’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를 밀어 땅바닥으로 처박았다. 이것을 본 다른 수좌들이 맞은 수좌에게 말했다.
“자네는 높은 법문을 듣고도 왜 절을 하지 않았느냐?”
높은 법문이란 바로 ‘철썩’하는 소리였다. 진정한 법문이란 ‘있는 그대로’란 뜻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여라. 무엇에도 사로잡히지 말고 얽매이지 말며 있는 그대로 자신을 살아라.’ 그런 말이다. 자기가 처한 곳에서 주체성을 갖고 전심전력을 다해 살라는 말이다.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맥은 모두 임제 스님의 법을 이은 임제 후손이다. 부처님 법의 산맥이 오랜 세월동안 흘러오면서 가끔씩 우뚝하게 솟은 산이 있었다. 마명(馬鳴)의 산, 용수(龍樹)의 산, 달마(達磨)의 산, 혜능(慧能)의 산, 마조(馬祖)의 산이 있었듯이 임제(臨濟)의 산도 높고 거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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