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기획논단 -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불교신문)

수선님 2022. 6. 5. 14:10

기획논단3 - 중도(中道)란 무엇인가

 

각묵스님/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막연한 중간’이 아닌 ‘바른 깨달음의 길’

초기 경전이 제시하는 중도는 ‘팔정도’

공허한 철학적 사유로 이해해서는 곤란

치우침 없이 총체적으로 실천수행해야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연기(緣起)다. 연기는 세계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이기도 하다. 무릇 수행자는 연기적 가르침을 실천함으로써 해탈을 얻는다. 연기적 가르침의 실천은 곧 중도로 연결되는데, 팔정도로 대변되는 중도는 ‘원융과 조화’를 실현하는 첫 단추이기도 하다.

중도(中道)의 가르침은 부처님 최초의 설법이다.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이렇게 천명하신다.

 

“비구들이여, 출가자는 이들 두 가지 극단을 따라서는 안 된다. 무엇이 둘인가? 감각적 욕망의 즐거움에 탐닉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하나의 극단이다.)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며 고결하지 않고 해로움과 함께하나니 이것이 (다른 하나의 극단이다.)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철저하게 깨닫고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었나니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중도인가? 바로 이 여덟 가지로 구성된 성스러운 도(八正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S56:11)

〈초전법륜경〉뿐만 아니라 37조도품을 중도라고 설하고 계신 〈증지부〉의 한 곳(A.i.295)을 제외한 모든 초기경들에서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이 되고 있다. 물론 37조도품도 팔정도가 핵심이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반열반하시기 직전에 찾아와서 마지막 제자가 된 수밧다라는 유행승에게 부처님께서는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팔정도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이 없다. 그러나 나의 법과 율에는 팔정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불교교단)에만 사문이 있다”(D16)고 단언하셨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45년 설법의 최초와 최후 가르침으로 팔정도를 설하셨으며 이것이 바로 중도이다. 그러므로 중도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부처님께서 초기경들에 정형화해 분명하게 밝힌 팔정도의 정형구를 정확하게 살펴봐야 한다.

첫째, 바른 견해(正見)는 “괴로움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지혜,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지혜”로 정의되고 있다. 한마디로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를 말한다. 그리고 〈가전연경〉 (가전연경은 팔정도인 중도를 설한 경이 아니라 중(中)으로 표현되는 바른 견해를 설한 경이다)에서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를 질문 드리는 가전연 존자에게 부처님께서는 “깟짜야나여,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이 없다는 것은 두 번째 극단이다. 깟짜야나여, 여래는 이들 두 극단을 따르지 않고 중(中)에 의지해서 법을 설한다”라고 명쾌하게 말씀하신 뒤 12연기의 순관과 역관의 정형구로 중을 표방하신다.(S12:15) 즉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바른 견해이다.

이처럼 바른 견해는 사성제에 대한 지혜와 연기의 가르침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사성제 가운데 집성제는 연기의 유전문(고의 발생구조)과 연결되고, 멸성제는 연기의 환멸문(고의 소멸구조)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사성제와 연기의 가르침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것을 바르게 보는 것이 팔정도의 정견이다.

둘째, 바른 사유(正思惟)는 “출리(욕망에서 벗어남)에 대한 사유, 악의 없음에 대한 사유, 해코지 않음(不害)에 대한 사유”로 정의되는데 불자들이 세상과 남에 대해서 항상 지녀야할 바른 생각을 말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초기경들에서 부처님께서 강조하신 자애, 연민, 같이 함, 평온의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四無量)을 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셋째, 바른 말(正語)은 “거짓말을 삼가하고 중상모략을 삼가하고 욕설을 삼가하고 잡담을 삼가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넷째, 바른 행위(正業)는 “살생을 삼가하고 도둑질을 삼가하고 삿된 음행을 삼가는 것”이다.

다섯째, 바른 생계(正命)는 “삿된 생계를 제거하고 바른 생계로 생명을 영위하는 것”이다. 다른 경들의 설명을 보면 출가자는 무소유와 걸식으로 삶을 영위해야하며 특히 사주, 관상, 점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서는 안된다. 재가자는 정당한 직업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처럼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를 실천하는 지계의 생활은 그 자체가 팔정도의 고귀한 항목에 포함되고 있는 실참수행임을 우리는 명심해야한다.

여섯째, 바른 정진(正精進)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악하고 해로운 법(不善法)들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사악하고 해로운 법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善法)들을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일어난 유익한 법들을 사라지지 않게 하고 증장시키기 위해서 의욕을 생기게 하고 정진하고 힘을 내고 마음을 다잡고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정진은 해탈열반과 향상에 도움이 되는 선법(善法)과 그렇지 못한 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전제되고 있다. 선법.불선법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것은 결코 바른 정진이 아니다.

일곱째, 바른 마음챙김(正念)은 “몸에서 몸을 관찰하고,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고,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고, 법에서 법을 관찰하면서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며 머무는 것”이다.

바른 마음챙김이야 말로 팔정도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수행기법이다. 부처님께서는 나라는 존재를 먼저 몸뚱이(身), 느낌(受), 마음(心), 심리현상(法)들로 해체해서 이 중의 하나에 집중한 뒤, 그것을 무상하고 고요 무아라고 통찰할 것을 설하고 계신다. 마음챙김에서 중요한 것은 해체이다. 중생들은 무언가 불변하는 참 나를 거머쥐려 한다. 이것이 생사윤회의 가장 큰 동력인이다. 무엇보다도 나라는 존재를 해체해서 관찰하지 못하면 진아니 대아니 마음이니 하면서 무언가 실체를 세워서 이러한 것과 합일되는 경지쯤으로 깨달음을 이해하게 되고 이런 것을 불교의 궁극으로 오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게 되니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여덟째, 바른 삼매(正定)는 초선과 제2선과 제3선과 제4선에 들어 머무는 것이다. 이러한 바른 삼매 혹은 선(禪)의 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혼침, 들뜸.후회, 의심이라는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장애들이 극복되어 마음의 행복과 고요와 평화가 가득한 경지를 순차적으로 정리한 것이 네 가지 선(禪)이며 이를 바른 삼매라 한다.

이상의 정형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몇 가지 관점에서 다시 중도를 음미해보자. 첫째, 거듭 강조하거니와 중도는 팔정도이다.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는 중도하면 팔불중도(八不中道)나 공가중(空假中)으로 정리되는 〈중론송〉 삼제게(三諦偈)를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경에서의 중도는 명명백백하게 팔정도이다. 특히 삼제게는 연기(緣起)적 현상을 공.가.중으로 통찰하는 것을 중도라고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송〉의 중도는 연기에 대한 통찰지이며 이것은 위에서 보듯이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용수스님을 위시한 중관학파에서 주창하는 중도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을 말하는 것이지 팔정도로 정의되는 실천도로서의 중도는 아니다.

둘째, 중도는 철학이 아니라 실천이다. 우리는 중(中)의 의미를 철학적 사유에 바탕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한 설명은 오히려 실천체계로서의 중도를 관념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크다. 중도가 팔정도인 이상 중도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정형구로써 정의하신 내용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중도의 도에 해당하는 빠알리어 빠띠빠다(patipada)가 실제로 길 위를(pati) 밟으면서 걸어가는 것(pada)을 의미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셋째, 중도로 표방되는 수행은 총체적인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도를 8가지로 말씀하셨지 어떤 특정한 기법이나 특정한 하나만을 가지고 도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8가지가 총체적으로 조화롭게 개발되어나갈 때 그것이 바른 도 즉 중도다. 그러나 우리는 수행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려 하지 않고 기법 즉 테크닉으로만 이해하려 든다. 그래서 간화선만이, 염불만이, 기도만이, 위빠사나만이 진짜 수행이라고 우기면서 극단으로 치우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중도가 아니요 극단적이요 옹졸한 도일뿐이다.

넷째, 중도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중도는 특정한 장소나 특정한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참선하는 시간이나 염불하고 기도하고 절하는 시간에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사찰이나 선방이나 명상센터라는 특정 장소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도는 모든 시간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매순간 머무는 곳, 바로 ‘지금.여기(ditthe va dhamme, here and now. 現今)’에서 실천되어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즉시현금 갱무시절(卽是現今 更無時節. 바로 지금 여기일 뿐 다른 호시절은 없다)이라 하셨다.

다섯째, 중도는 한 방에 해치우는 것이 아니다. 수행에 관한한 초기경에서 거듭 강조하시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은 “받들어 행하고, 개발하고, 거듭해서 많이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도는 팔정도를 많이많이 닦는 것이다. 범부는 깨달음을 실현하기 위해서 중도인 팔정도를 실천하고 깨달은 분들은 팔정도로써 깨달음을 이 땅위에 구현하신다. 주석서에서는 전자를 예비단계의 도라고 설명하고 후자를 완성된 도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중도는 한 방에 해치우는 극단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거듭해서 닦아야하고 구현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직계 제자 때부터 사사나(Sasana. 명령)라고 불렸다. 실천으로서의 부처님 명령은 극단을 여읜 중도요 그것은 팔정도이다. ‘팔정도를 닦아서 지금 여기에서 해탈열반을 실현하라’는 부처님의 지엄하신 명령은 저 멀리 내팽개쳐버리고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이용해서 자신의 명성이나 지위나 이속을 충족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각묵스님/실상사 화엄학림 교수
[불교신문 2193호/ 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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