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팔정도 聖八支道

수선님 2022. 5. 22. 11:58
팔정도
聖八支道

The Noble Eightfold Path
Way to the End of Suffering


Bhikkhu Bodhi
비구 보디 지음|전병재 옮김


The Wheel Publication No. 308-311 1984
Second edition(revised) 1994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Kandy·Sri Lanka

 



* 이 책에 나오는 경(經)의 출전은 영국빠알리성전협회(PTS)에서 간행한 로마자 본 빠알리경임.
* 로마자 빠알리어는 이탤릭체로 표기함.
* 각주는 원주(原註)이며, 역자주는 [역주]로 표기함.
* 이 역서는 개정되어 나온 단행본(1994)을 저본으로 했기 때문에 Wheel series (No. 308-311 1984)로 나온 텍스트와는 상이한 부분이 다소 있음.


▲ 차례

시작하는 말 6

Ⅰ ‘고’가 끝나는 길 11
Ⅱ 바른 견해 35
Ⅲ 바른 의도 63
Ⅳ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91
V 바른 노력 125
Ⅵ 바른 마음챙김 150
Ⅶ 바른 집중 184
Ⅷ 지혜의 계발 207

맺는말 231

   저자소개 233
   부록 1: 팔정도의 요소별 분석 234
   부록 2: 추천 도서 목록 238


 

시작하는 말


  부처님 가르침은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의 두 핵심 원리로 요약될 수 있다. 사성제는 교의(敎義)에 해당하며 교의는 무엇보다도 이해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이와는 달리 팔정도는 실천의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넓은 의미의 율(vinaya)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의 구성 체계 안에서는 이 두 원리가 하나의 불가분의 통일체로 맞물려 있는데 우리는 이를 법­율(Dhamma­vinaya), 또는 줄여서 법(Dhamma)이라 부른다.1) 사성제의 마지막인 도성제(道聖諦)가 곧 팔정도이고 또 도성제, 즉 팔정도의 첫 항목이 사성제에 대한 바른 이해인 정견(正見)이라는 사실은 불법의 내적 통일성을 잘 보여 준다. 요컨대 사성제의 체계 속에 팔정도가 들어 있고 팔정도는 다시 사성제를 수렴하는 식으로 이 두 원리가 서로 삼투(滲透)하여 각기 상대를 품고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맞물려서 하나의 통합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더 큰 가치를 지니는가, 즉 교의가 더 중요한가, 아니면 실천도(實踐道)가 더 중요한가를 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굳이 물어온다면 답은 도(道)라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생명력을 가져다주는 것이 바로 도이기 때문이다. 도는, 자칫 추상적 교리를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 되기 쉬운 법[Dhamma]을 진리의 지속적인 시현(示顯)이 되도록 살려낸다.
  팔정도는, 부처님께서 당신 가르침의 서두로 삼으신 ‘고’에서 벗어나는 출구에 해당한다. 뿐만 아니라 팔정도는 부처님 가르침의 목표인 ‘고(苦)로부터의 해탈’이 우리의 경험세계 속에서 접근 가능한 것이 되도록 해준다. 그럴 때에만 해탈은 비로소 실다운 의미를 띠게 된다.

  팔지성도(八支聖道), 즉 팔정도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앎의 문제가 아닌 실천의 문제다. 그러나 팔지성도를 바르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올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제로 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 그 자체가 바로 실천의 주요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바른 이해’야말로 팔정도의 여타 항목을 이끄는 선도자이자 길잡이 구실을 하는 첫 번째 항목으로서의 정견(正見)의 진면목인 것이다.
  열정에 들뜬 초심자에게 지적 이해라는 과제는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성가신 일이어서 뒤로 미루어두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우리의 수행이 궁극적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 바른 이해가 없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책자는 팔정도의 여덟 항목과 그 각각의 구성 요소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밝힘으로써 팔정도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돕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필자는 도(道)의 항목들을 설명함에 있어 부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들, 다시 말해 빠알리 경장에 나오는 말씀들을 주축으로 하여 되도록이면 간결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경전을 접하기 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이미 고전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냐나띨로까 스님의 《붓다의 말씀》2)이라는 단행본에 담긴 부처님 말씀을 주로 인용했다. 그러나 그 인용구들 중에는 필자의 생각대로 조금씩 고친 경우도 없지 않다. 때로는 의미를 부연 설명하기 위해 주석서를 인용하기도 했다. 특히 제 7장과 8장에서 ‘집중’과 ‘지혜’를 필자 나름으로 설명할 때에는 5세기경 붓다고사 스님이 저술한 《청정도론》3)에 크게 의지했는데 이 책은 도의 실천 체계를 자세히, 그러면서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방대한 백과사전적 저작이다.
  여기에서는 지면 관계상 각 항목을 속속들이 다루지는 못했다. 이런 결함을 보완하는 뜻에서 책 말미에 독자를 위한 추천 도서 목록을 실었다. 그 책들을 통해서 팔정도 항목 하나하나에 대해 더 상세한 설명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實)수행에 전념할 경우, 특히 정(定)·혜(慧) 공부를 본격적으로 닦으려 할 때에는 책임 있는 지도를 해 줄 수 있는 스승과의 만남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해 둔다.

비구 보디     

 


 

I ‘고’가 끝나는 길


  고통을 겪다 보면 그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길을 찾게 된다. 그러나 그 길은 빛이나 황홀경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고뇌, 실망, 혼란 등의 세찬 역풍 속에서 비틀거리며 시작된다. 한편 참된 정신적 탐색을 낳을 수 있는 고(苦)는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고통 이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고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손쉽게 빠져드는 안이한 타성을 꿰뚫고, 저 밑바닥에 계속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위험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할 수 있는 내면적 각성을 촉발시키는 것이어야만 한다.
  비록 순간일지라도 이런 통찰을 하게 되면 그것은 개인의 삶을 중대한 변환국면으로 몰아갈 수 있다. 즉, 이런 통찰경험을 한 번만이라도 겪게 되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삶의 목표와 가치관을 뒤집어엎어버리고, 습관적으로 열중해왔던 일들도 하찮게 여기며, 지금껏 즐겁기만 했던 일들이 불만스러워 다시는 돌아보지 않게 된다.

  처음에는 이러한 변화가 대체로 달갑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통찰경험이 가져다주는 새로운 비전을 굳이 거부하려 하고, 뻔한 사실을 놓고 쓸데없는 의심을 일삼고 있다고 생각하려 든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일을 추구함으로써 당면한 불만을 외면하려 애쓴다. 그러나 탐구의 불길은 일단 점화되기만 하면 계속 타기 마련이다. 우리가 수박 겉핥기식의 자기개선에 몸을 내맡기거나, 낙관적 견해에 빠져들지 않는 한, 처음에는 미미했던 통찰의 불씨가 세찬 불길로 타오르고 우리는 다시 고통의 본질에 직면하게 된다. 빠져나갈 길이 모두 막혀 버린 바로 그 때 우리는 비로소 불안한 상태를 끝낼 수 있는 방도를 찾아 나서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감각적 쾌락을 갈구하거나, 기성의 지배적 사회규범의 압력에 떠밀려 표류하는 인생을 살 수 없게 된 것이다. 더 깊은 진실이 우리에게 손짓한다. 우리는 한층 안정된, 진정한 행복의 소리를 이미 들었다. 이제 우리는 그 행복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편안히 앉아 쉴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일단 이러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하고 거기에 필요한 가르침을 찾다보면 너무나 다양하고 서로 다른 교시들이 널려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금의 정신적 유산을 쌓아놓은 서가에는 제각기 가장 높은 경지의, 가장 빠르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심오한 길임을 자처하는 수많은 정신적 가르침과 수련 방식들이 시장 바닥의 상품들처럼 즐비하게 펼쳐져 있다. 구경(究竟)의 경지를 향한 우리들의 탐구를 위해 필요한 지식들이 단 한 권의 책으로 정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로 다른 수많은 가르침들 속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과연 어느 쪽이 진실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어 줄 것인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해결책인지, 또 어느 길이 잘못된 곁길인지를 올바로 판단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요즘 인기 있는 해결책 중 하나는 절충식 접근 방식이다. 여러 전통에서 편리한 대로 취사선택하여 자기 입맛에 맞게 꿰어 맞추는 것이다. 불교의 마음챙김 명상법을 힌두교의 만트라 암송과 조합할 수도 있고, 기독교의 기도를 수피즘의 춤과, 유태교의 카발라를 티베트 불교의 심상(心像)수련과 결합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절충주의는 우선 아쉬운 대로 세속의 물질주의로부터 벗어나 정신적인 삶의 색조를 띠게 하는 데는 다소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색깔은 얼마 못가서 바래게 마련이다. 절충주의는 잠시 쉴만한 길가 주막집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종착점까지 타고 갈 수 있는 믿음직한 수레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절충주의가 안고 있는, 서로 맞물린 두 가지 결함 때문이다. 그 중 하나는 절충주의가 끌어대고 있는 전통들 각각의 신뢰성을 떨어뜨린다는 점이다. 삶의 질이 손쉽게 고양되기를 원한 나머지 위대한 여러 가지 전통들이 제시해 놓은 수행법들을 제멋대로 오려내고 붙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만한 성과가 나올 수 없다. 그 까닭은, 위대한 정신적 전통일수록 그것이 제시해 놓은 수행법들은 각각의 독립된 기법들을 단순히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전체로서만이 완전체가 되는 그런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실재의 본질과 정신적 탐구의 궁극적 목적에 대한 수미일관한 통찰의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무릇 정신적 전통이란 발을 살짝 담갔다가 쉽게 뺄 수 있는 얕은 개울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강물 같아서 우리 삶의 마당을 온통 덮쳐 버릴 수 있다. 우리가 그 강을 타고 여행하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배를 띄워 깊은 곳까지 나아갈 만한 용기를 지녀야 한다.

  절충주의가 갖는 두 번째 결함은 첫 번째 결함으로부터 나온다. 원래 정신적 수행 체계들은 각기 제 나름의 진리관과 궁극적 선(善)에 대한 인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서로 간에 상보관계를 이룰 수 없게 되어 있다. 실제로 이러한 전통들의 가르침을 꼼꼼히 검토해 보면 각기 세상 보는 눈에서 중요한 차이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차이들은 단순히 동일한 내용에 대한 표현상의 차이라고 손쉽게 간주해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그 차이들은 최고의 목표와 그 목표에 이르기 위해 걸어야 하는 길이 보여 줄 매우 상이한 경험들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상이한 정신적 전통들이 제시하는 시각과 수행법들이 본원적으로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절충주의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어느 한 길을 택하여 진지하게 전념해 볼 태세가 갖추어지면 또 다른 중대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 과연 어떤 길이 참된 깨달음과 해방으로 이끌어 줄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난제의 해결을 위한 한 가지 지침은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무엇인지 자문자답해 보는 일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자유 그 자체인가, 아니면 자유로워져서 무엇을 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러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신중히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고’의 종결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일이다. 결국 그 모두가 고의 문제로 귀착된다. 따라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고를 ‘철저히’, ‘최종적으로’ 끝장내는 길이다. 여기서 이 두 수식어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 길은 모든 고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끝낸다는 의미에서 ‘철저한’ 것이어야 하고 또 어떤 고이든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최종적인’ 것이어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것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당위의 문제라면, 실제로 고를 철저하게, 최종적으로 끝장내 줄 길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는 점은 이와는 별개의 현실 문제로 다가온다. 우리가 어떤 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전에는 그 길이 어디로 이어져 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어떤 길을 끝까지 따라가 보기 위해서는 그 길의 효험에 대한 충분한 신뢰가 필요하다. 정신적인 길을 선택하고 추구하는 것은 새 옷을 고르는 것과 같을 수 없다. 새 옷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옷을 거울 앞에서 직접 입어보고 그 중 가장 보기 좋은 것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정신적인 길의 선택은 오히려 결혼하는 일에 더 가깝다. 평생을 함께 살아갈 배우자를 구할 때에는 누구나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믿음직하고 한결같은 반려자와 만나기를 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게 되면,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를 안내해 줄 길이란 어디에도 없으니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 보거나 아니면 동전을 던져 점이라도 쳐 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선택을 할 때 걱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맹목적이고 아무런 정보가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도 유용한 지침은 있기 마련이다. 정신적인 길은 대체로 총합적 가르침의 틀을 갖추어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의 틀을 잘 검토해 보면 그 틀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길이 과연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다.

  이런 문제를 검토할 때에는 다음 세 가지를 평가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첫 번째 기준은 그 가르침이 고(苦)의 범위에 대해 충분하고도 정확한 그림을 제시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 가르침이 제시하는 고의 그림이 불완전하거나 결함이 있으면, 그런 가르침이 제시하는 길 또한 흠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마련해 주지 못할 것이다. 환자에게 자신의 병에 대해 충분하고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는 의사가 필요한 것처럼, ‘고’로부터의 해방을 구하는 우리에게도 갖가지 고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 대해 믿음이 가는 설명을 해주는 가르침이 필요하다.

  두 번째 기준은 고를 일으키는 원인을 정확히 분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 가르침은 외적 증상을 개괄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드러난 증상 아래 깔려있는 근본 원인까지 꿰뚫어보고 그 원인들을 정확하게 설명해주어야 한다. 어떤 가르침이 원인분석에서부터 잘못되어 있다면 그 치료가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세 번째 기준은 치료 처방, 즉 길 그 자체와 관련된 것이다. 어떤 가르침이든 그것이 제시하는 길은 반드시 고를 근원적으로 제거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그 길은 고의 원인부터 제거함으로써 고를 완전히 종식할 수 있는 방법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그 길이 고의 문제를 근본적 수준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궁극적 의미에서 그 길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런 식의 가르침은 병의 증상을 가시게 함으로써 병이 완전히 치료된 것처럼 느끼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뿌리가 속에서 계속 자라는 치명적 병에 걸린 사람이 겉으로 성형수술이나 받고 만족할 수 있겠는가.

   요컨대 고를 종식하는 참된 길을 제시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라면 다음 세 가지 조건을 제대로 갖춘 것이어야 한다. 첫째 고의 범위와 깊이에 대해 완전하고도 정확한 그림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고, 둘째 고의 원인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내놓아야 하며, 셋째 고의 원인을 뿌리째 뽑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이 글은 세상의 온갖 수행법들을 이 세 가지 기준에 비추어 일일이 따져보는 자리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Dhamma)과 법이 고의 문제에 대해 제시하는 해결책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갖추고 있는 본연의 성질, 즉 사물의 시종을 설명하면서 덮어놓고 믿음을 강요하는 식의 종교적 교의의 형태를 취하지 않고, ‘고’로부터의 해방을 경험을 통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전언(傳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선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전언은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를 실제로 종식할 수 있는 길을 구체적인 수행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길이 바로 성팔지도(聖八支道 ariya aṭṭhaṅgika magga)이다. 이 성팔지도, 즉 팔정도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심장이나 다를 바 없다. 팔정도를 발견함으로써 부처님의 깨달음이 개인적인 깨달음에 머물지 않고 보편적 의미를 띠게 되었고 그래서 그분은 일개 현자나 자비로운 성자의 지위를 넘어 ‘세상의 스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제자들의 눈에 비친 그분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그려지고 있다.

  일찍이 생긴 적이 없었던 길을 생기게 하신 분, 일찍이 만들어지지 않았던 길을 만드신 분, 일찍이 선포된 적이 없었던 길을 선포하신 분, 길을 아시는 분, 길을 보시는 분, 길을 안내하시는 분. (《중부》108경)


  그분 자신도 다음과 같은 말로 구도자들을 고무하고 그들에게 약속하신다.

  그대 자신이 분발해야 한다. 모든 부처는 단지 길을 가르치는 스승일 뿐이다. 이 길을 나아가는 선(禪)수행자들은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법구경》276게)


  팔정도가 과연 해탈로 안내하는 확실한 길인지 점검하기 위해 우리는 앞서 언급한 세 기준에 비추어 부처님께서 고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잡는지, 또 그 원인을 어떻게 분석하는지, 그 치료책으로 어떤 처방을 제시하는지를 검토해 보는 것이 좋겠다.


‘고’의 범위

  부처님은 고의 문제를 슬쩍 건드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당신 가르침의 초석으로 삼으신다. 그분은 당신 가르침의 요약인 사성제의 첫머리에서 우리의 삶이 고(苦 dukkha)라고 부르는 것과 결코 분리될 수 없게 묶여 있다[生卽苦]고 선언하셨다.
  빠알리어 ‘둑카’는 흔히 ‘고통(suffering)’이라고 번역되고 있으나 이는 통상적으로 느끼는 아픔이나 고통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뜻한다. 이 말은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들을 제외한 모든 중생의 삶을 관류하는 근본적 불만족성을 일컫는 것이다. 이 근본적 불만족이 때로는 슬픔, 비탄, 실망, 절망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은 사물이 완전해지는 일은 결코 없다거나, 우리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으로 기대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등의,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는 모호한 것,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일종의 느낌으로서 우리 알아차림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는 그러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고’야말로 참다운 정신적 문제로서 유일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밖의 다른 문제들 - 수세기에 걸쳐 종교적 사색가들을 우롱해 온 신학적, 형이상학적 문제 같은 것들 - 은 ‘자유로워지도록 돕는 것이 못된다’해서 조용히 옆으로 젖혀두신다. 부처님은 당신이 가르치는 것은 ‘고’와 ‘고의 종식’, 다시 말해 둑카[dukkha 苦]와 둑카의 멸(滅)일 뿐이라고 말씀하신다.

  물론 부처님은 고를 개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가 취하는 다양한 모습을, 분명한 것은 분명한 대로 미묘한 것은 미묘한 대로 구체적으로 드러내 보여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비근한 고, 즉 생명 그 자체의 생체적 과정에 내재한 고로부터 시작하신다. 고는 태어나고 늙고 죽는 일에서, 병들기 쉽고 사고당하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일들로,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드러난다. 또 고는 가슴 아픈 이별, 불쾌한 만남,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함 등에서 비롯되는 노여움, 슬픔, 좌절, 두려움으로 드러난다. 심지어는 즐거움조차도 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 즐거움은 그것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행복을 안겨주지만 그런 즐거움도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즐거움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아쉬움뿐이다.
  우리들의 삶은 대부분 쾌락의 목마름과 고통의 두려움 사이를 오가고 있다. 즐거움을 좇거나 고통을 피해서 하루하루를 허둥대며 살다보면 만족스러운 평화는 거의 누리지 못하고 만다. 진정한 만족은 우리가 도달하지 못할, 지평선 저 너머 멀리 있는 것으로만 보일 뿐이다. 그러다가 평생 쌓아올린 자기 존재도 포기하고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것,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뒤로 한 채 결국은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죽음마저도 우리를 고의 종말로 데려다주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생의 흐름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이 한 곳에서 한 육체와의 인연을 끝맺음할 때 ‘식(識)의 연속’, 즉 ‘의식의 흐름’은 어디선가 새로운 육신을 물질적 바탕으로 삼아 다시 이어진다. 이처럼 삶의 순환은 존재의 상태를 계속 누리려는 욕구, 즉 갈애에 추동되어 거듭거듭 생·노·사를 이어나간다.
  부처님이 윤회(saṁsāra), ‘헤맴’이라고 부른 이 재생의 사이클은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대를 줄곧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계속 이어간다. 이 과정은 첫 공간적 출발점도 시간적 기원(紀元)도 없다. 아무리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우리는 항상 삶을 영위하고 있는 존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존재는 바로 우리 자신의 전생(前生)으로서, 한 존재 상태에서 다른 존재 상태로 방랑하고 있는 모습이다. 부처님께서는 지옥계, 축생계, 인간계, 천상계 등 재생이 이루어지는 다양한 세계를 그려 보여 주셨다. 그러나 이 중 어느 것도 최후의 안식처는 아니다. 이 중 어느 차원의 세계에서도 삶이 있는 한 죽음을 피하지는 못한다. 그만큼 삶은 무상한 것이고 따라서 가장 깊은 의미의 고(苦 dukkha)인 불안정성이라는 특징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고의 완벽한 종말을 열망하는 사람은 세속적 성취나 삼계(三界)에서의 어떠한 위치에도 만족해서 머무를 수 없다. 고의 최종적 종말은 오직 불안정성의 소용돌이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다.


‘고’의 원인

  이미 말했듯이 고를 끝장내는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고가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나는지를 믿음이 가도록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고를 멈추기 위해서는 고가 시작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고를 그 원인과 함께 멸해야 한다. 이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과연 무엇이며 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철저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고의 생겨남[生起]에 관한 진리[集聖諦]’를 밝히는 데 부처님은 당신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셨다. 그 발단이 우리 마음 안에 있다는 것, 즉 우리 존재에 속속들이 스며들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남과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해치는 근본적 질병으로 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주셨다. 이 질병의 징후는 정신적으로 불건전한 상태에 빠져들기 쉬운 우리 기질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불건전한 상태는 빠알리어로 ‘낄레사(kilesa)’라 하고 보통 번뇌(煩惱), 또는 정신적 오염원이라고 번역된다. 번뇌의 가장 깊은 뿌리는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이다. 탐욕(貪欲 lobha)은 자기중심적 욕구이다. 즉, 쾌락과 소유를 향한 욕심, 생존의 욕구, 권력ㆍ지위ㆍ명예를 통해서 자긍심을 굳건히 하고자 하는 욕구 등이 그것이다. 진에(瞋恚 dosa)는 부정적 반응을 뜻하는 것으로 거부, 짜증, 저주, 미움, 적개심, 분노, 폭력 등의 형태로 드러난다. 치암(癡暗 moha)은 정신적 어둠을 뜻한다. 즉, 명료한 이해를 차단하는 무감각의 두터운 덮개를 가리킨다.

  이 세 뿌리로부터 자만, 질투, 야심, 무기력, 오만 그 밖에도 각양각색의 다른 번뇌들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모든 번뇌가 아우러져 뿌리와 가지를 이루면서 다양한 형태로 고를 빚어낸다. 고통과 슬픔으로, 공포와 불만으로, 생사를 되풀이하는 지향 없는 표류의 형태로. 따라서 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번뇌들부터 없애야 한다. 하지만, 이들 번뇌의 제거는 아주 체계적으로 도모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다. 이 일은 없애야겠다는 의지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없어졌으면 하는 소원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이 일에는 철저한 탐구와 분석이 필요하다. 번뇌가 무엇에 의지하는지부터 알아내야 하고 그런 다음에는 그 의지하는 것들의 뒷받침을 제거해내는 것이 우리들의 능력으로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가능한지를 규명해 내어야 한다.

  부처님은 다른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하나의 번뇌, 모든 번뇌를 자리 잡게 하는 하나의 뿌리가 있다고 가르치신다. 이 뿌리가 무명(無明 avijjā)이다.4) 무명은 단순한 지식의 부재, 특정 정보에 대한 앎의 결여가 아니다. 세부적 지식을 아무리 많이 축적해도 무명은 여전히 건재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럴수록 더 무섭게 약삭빨라지고 빈틈없게 된다. 고의 근원적 뿌리라 할 때의 무명은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근본적 어둠을 말한다. 어떤 때는 무명은 단순히 올바른 이해를 흐리게 만드는 소극적 태도를 연출하다가 어떤 때는 적극적인 역할을 떠맡고 나온다. 큰 사기꾼이 되어 수없이 왜곡된 지각(perceptions)과 개념(conceptions)을 그려낸다. 그러면 마음은 자기 자신의 현혹된 미망이 그런 것들을 만들어 내는 줄은 모르고 그것들을 세상의 속성으로 이해해 버린다.

  이렇게 잘못된 지각과 관념들(ideas)이 번뇌를 키우는 토양으로 작용한다. 마음은 즐길 거리가 됨직한 것을 겉만 보고는 애착을 일으켜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버리는데 그 결과가 탐욕[貪]이다. 우리는 기쁨을 얻기를 갈망하지만, 장애가 나타나거나 방해를 받게 되면 성이 나고 반감이 치밀기 십상이다. 혹은 모호성 속에서 허둥대다 보면 어느덧 시야는 흐려지고 마침내 미망[癡]에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간단히 살펴보아도 고를 키우는 터전은 쉽게 발견된다. 무지[無明]는 번뇌로, 번뇌는 고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다. 이 인과(因果)의 기반이 버티고 있는 한,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여전히 감각적 즐거움, 사회적 즐거움, 지적·정서적 즐거움 등 온갖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즐거움을 경험하더라도, 아무리 고통을 잘 피하더라도, ‘고’라는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존재의 핵심에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는 고의 영역 안에서 계속 맴돌 수밖에 없다.


‘고’의 원인 제거

  고로부터 충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고의 뿌리를 뽑아버려야 하는데, 이는 곧 무명(無明)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무명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무명의 반대인 명(明)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답은 분명해진다. 무명이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무명 제거에 필요한 것은 곧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는 지식이다. 단순한 개념적 지식, 관념으로서의 지식이 아니라 ‘앎’이면서 동시에 ‘봄’이기도 한 지각으로서의 지식이다.
  이런 종류의 앎을 지혜[慧 paññā]라고 부른다. 지혜야말로 무명이 범하는 왜곡 작업을 교정하도록 돕는다. 지혜는, 우리 마음이 실재와의 사이에 통상적으로 만들고 있는 관념, 견해, 가정(假定) 등의 장막에 구애되지 않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똑바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무명(無明)을 없애자면 지혜가 필요하다. 그럼 지혜는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지혜란 사물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확연한 앎이므로 이는 단순히 학습에 의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관련 자료를 수집·축적한다고 해서 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혜는 계발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일련의 조건을 갖춤으로써 지혜는 생겨나는데, 이들 조건을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조건들이란 실은 심적 요소들로서 특정 목적지로 뻗어있는 행로, 즉 도정(道程)이라 부를 수 있는 체계적 구조를 이루는 의식의 구성요소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목적지는 고의 종식이고 거기에 이르는 도정은 여덟 항목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팔정도이다. 이 여덟 항목이란 바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의도[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부처님은 이 길을 중도(中道 majjhimā paṭipadā)라 부르신다. 팔정도를 중도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고에서 벗어나는 데 있어 두 가지 잘못된 시도, 즉 양극단을 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하나는 욕망을 충족시킴으로써 불만을 해소하려는 시도로, 감각적 쾌락을 극단적으로 탐닉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쾌락을 주지만 그렇게 얻은 쾌락은 허망하고 순간적이어서 결코 깊은 만족을 주지 못한다. 부처님은 감각적 욕구가 인간의 마음을 강력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감각적 쾌락에 얼마나 강하게 집착하게 되는지도 속속들이 꿰뚫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은 또 이런 쾌락이 욕심을 놓아버리는 데서 오는 행복감에 비해서 매우 저급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구경의 경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감각적 쾌락을 끊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되풀이해서 가르치셨다. 요컨대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행위를 “저열하고, 범속하고, 세속적이고, 고귀하지 않고, 목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다른 하나의 극단적 방법은 고행, 즉 육체를 괴롭힘으로써 해탈을 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 방법은 구원을 얻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이런 고행은 아무 소득 없이 고생만 하게 만드는, 잘못 설정된 가정(假定)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고행의 방법은, 문제의 근원이 탐·진·치 삼독에 사로잡힌 마음에 있는데도 애꿎은 육신을 속박의 원인으로 보고 다그치는 데 문제가 있다. 번뇌로부터 마음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육신을 괴롭히는 것은 부질없는 일일뿐 아니라 해탈을 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인 소중한 몸을 훼손하고 쇠약하게 하는 자기 파괴적인 짓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두 번째 극단적인 방법을 “고통스럽고, 고귀하지 않고, 목표에 이를 수 없는” 것이라 말씀하셨다.5)

  이 두 가지 극단적 접근방식을 떠난 것이 곧 팔정도이다. 그런데 이를 중도라 한다 해서 양극단을 적당히 타협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다만 이들 각각에 내포되어 있는 잘못을 피하고 그 둘의 한계를 넘어선다는 뜻이다. 팔정도는 욕망의 허망함을 알고 그것을 놓아버리게 하는 데에 초점을 둠으로써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는 극단을 피한다. 감각적 욕구와 쾌락은 진정한 행복의 수단이기는커녕 오히려 고통의 원천이기 때문에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리는 수행이라 해서 육신을 괴롭혀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것은 정신적 수련이므로 몸은 이런 내면적 작업에 적합한, 튼튼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는 잘 보살펴서 건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 한편, 정신적 기능들은 해탈을 위한 지혜를 발생시키도록 훈련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곧 팔정도라는 중도로서 ‘눈(cakkhu)을 생겨나게 하고 지(智 ñāṇa)를 생겨나게 하고 평화(upasama)로, 직지(直智 abhiññā)로, 깨달음(sambodhi)으로, 열반(nibbāna)으로 이끄는’ 길이다.6)



 

Ⅱ 바른 견해[正見 sammā diṭṭhi]


  팔정도의 여덟 가지 항목은 하나하나 차례로 밟아 올라가야 하는 계단 같은 것이 아니라 구성요소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비유를 들자면 팔정도는 여러 가닥으로 꼰 밧줄 같은 것으로, 그 밧줄이 최대한 힘을 받기 위해서는 그 모든 가닥 하나하나의 협력이 필요하다. 공부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면 이 여덟 가지 항목은 서로 도우며 동시에 드러난다. 하지만 그 지점에 이를 때까지는 길을 열어나가는 데 어떤 순차를 밟아나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수행에 임하는 입장에서는 팔정도의 여덟 가지 항목들을, (1)‘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가 만드는 도덕적 연마의 묶음[戒蘊], (2)‘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이 만드는 집중의 묶음[定蘊], (3)‘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가 만드는 지혜의 묶음[慧蘊] 세 단계로 나누어 보기도 한다. 이렇게 세 가지 묶음으로 분류하고 보면 그 셋은 더 높은 도덕적(moral) 훈련, 더 높은 의식(consciousness)의 훈련, 더 높은 지혜(wisdom)의 훈련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7)

  세 가지 훈련의 순서는 도정의 전체적 목적과 방향에 의해서 결정된다. 팔정도가 지향하는 최종적 목적, 즉 고로부터의 해방은 결국 무지[無明]를 발본색원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달렸기 때문에 무지에 정면으로 맞서는 훈련단계야말로 마땅히 이 도정의 극치가 될 것이다. 이것이 지혜훈련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지의 기능을 일깨우게 기획된 것이다. 지혜는 물론 점차 열려온다.
  그러나 아무리 희미한 수준의 것일지라도 통찰이 섬광을 발하려면 동요와 산만함이 제거되어 집중을 이룬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집중은 도정의 두 번째 묶음인 정(定)의 공부, 즉 지혜의 개발에 필요한 적정(寂靜)과 차분함을 가져오는 한결 높은 식(識)의 공부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음이 집중되어 통일되기 위해서는 평소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선하지 못한 성향들부터 먼저 다스려야 한다. 불선한 여러 성향은 우리의 주의력을 잡다한 관심거리로 분산해버리기 때문이다. 불선한 성향들이 몸과 말을 통해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으로 드러나도록 방치해 두는 한 그것들은 언제까지나 마음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여섯 가지 기능들[六根]이 번뇌의 도구로 전락하지 않도록 수행의 초장부터 이들의 활동을 철저히 제어할 필요가 있다. 이 과업은 도덕적 훈련[戒行]이라는 도정의 첫 번째 묶음에 의해 이룰 수 있다. 이와 같이 도정은 집중[定]의 기반으로서의 계(戒), 혜(慧)의 기반으로서의 정(定), 그리고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직접적 도구로서의 혜(慧), 이 세 단계로 뻗어나간다.

  팔정도 항목들의 배열이 삼학(三學)의 계·정·혜 세 묶음의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혼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를 내용으로 하는 지혜가 삼학에서는 마지막 단계이다. 그러나 도정에서는 이 두 요인이 첫머리에 놓여 있다. 성전(聖典)이라면 엄정한 일관성이 유지되어야 할 터인데 왜 팔정도에서는 이 두 가지가 맨 마지막에 나오지 않고 오히려 서두에 나오는 것일까. 그러나 이러한 배열은 조심성 없는 실수로 인한 것이 아니라, 방편상 신중하게 고려한 뒤에 이루어진 것이다. 즉, 예비적 형태의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의도[正思]가 공부 시작 단계에서는 삼학에 들어서도록 유도하는 박차로서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른 견해’는 수행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제공하고, ‘바른 의도’는 수행을 위한 바른 방향 감각을 제공한다. 물론 이 두 가지는 이런 예비적 역할만으로 그 임무가 끝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계와 정의 수련으로 순화되면 더 뛰어난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에 이르게 되고 그때는 더 높은 지혜 공부에 걸맞게 된다.

  ‘바른 견해’는 팔정도 전체를 이끄는 여타 모든 항목의 선도자이다. 바른 견해를 통해 우리는 출발점과 목적지, 그리고 수행이 진행되면서 통과하게 되는 순차적인 이정표들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바른 견해’라는 기반이 없이 수행을 해보려고 시도하는 것은 무모하게 덤비다가 길을 잃게 될 위험을 무릅쓰는 짓이나 다를 바 없다. 이는 마치 지도를 들여다보거나 경험 있는 운전자의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무데로나 무턱대고 자동차를 몰고 가려는 경우와 같다. 자동차에 성급하게 올라 출발을 서두르다 보면 갈수록 목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표로부터 점점 더 멀어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원하는 장소에 도착하자면 대충이라도 그 방향과 거기로 가는 길에 대한 예비지식을 가져야 한다. 도의 수련과정에 있어서도 이치는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수행은 어디까지나 바른 견해가 만들어주는 이해의 틀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바른 견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진실이라든가 가치라든가 하는 핵심적 쟁점에 관해 우리가 평소에 어떠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가가 어떤 이론적인 확신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사실에 비추어서도 분명해진다. 이러한 시각은 우리의 태도, 우리의 행위, 삶을 대하는 우리의 방향 감각 전체를 지배한다. 견해라는 것은 애당초 우리 마음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이 믿는 바를 희미하게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견해가 선명한 것이든 아니든, 말로 표현된 것이든 아니든 그 영향은 지대하다. 견해는 우리의 지각을 특정 체계로 조직화하고, 가치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에게 해석해 주는 관념의 틀로 결정화(結晶化)한다.

  따라서 이들 견해는 행동의 조건이 된다. 우리가 무엇인가 선택하고 목표로 삼고, 그리고 그 목표를 이상으로부터 현실로 전환하려 노력할 때 그 배후에는 반드시 이들 견해가 도사리고 있다. 행위 자체가 결과를 결정하겠지만 사실은 그 행위와 그로 인한 결과는 그들의 원천이 되는 견해에 의해 좌우된다.
  견해는 무엇이 진실이며 참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 즉 ‘존재론적 개입’을 뜻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바른 견해와 바르지 못한 견해의 두 부류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바른 견해는 진실한 것과 상응하는 반면, 바르지 못한 견해는 진실에서 벗어나 거짓이 확고하게 자리 잡도록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두 종류의 상반되는 견해가 본질적으로 아주 다른 행동노선으로 치달아 결국 정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가르치신다. 만약 우리가 바르지 못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 비록 그 견해가 흐릿한 것일지라도 결국에는 고로 귀결되는 쪽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바른 견해를 채택하면 그 견해는 우리를 바른 행위로 나아가게 할 것이고 그런 행위에 의해서 고로부터의 해방 쪽을 향해 방향타를 조종하게 될 것이다. 비록 이 세계에 대해 우리들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개념화하는 일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해로울 것도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앞으로 전개될 모든 과정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도 불건전한 마음상태를 일으키는 데 잘못된 견해만큼 책임이 큰 요인도 없고, 건전한 마음상태를 일으키는 데 바른 견해만큼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 생류(生類)의 고[不善法]를 일으키는 데 잘못된 견해만큼 책임이 큰 것도 없고 생류의 낙[善法]을 증진시키는 데 바른 견해만큼 강력한 것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증지부》1법집 17경)

  가장 넓게 보면 바른 견해[正見]는 부처님 가르침 전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포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범위는 법 그 자체의 범위와 맞먹는다. 그러나 실(實)수행을 위해서는 두 가지 바른 견해가 특히 중요한 것으로 부각된다. 하나는 세속의 굴레 속에서 기능하는 견해, 즉 세속적 정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으로부터 해탈로 이끄는 수승한 정견, 즉 출세간적 정견이다. 세속적 정견은 육도를 윤회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정신적 향상을 관장하는 법칙으로서 높은 단계 또는 낮은 단계의 생으로 태어나는 원리 및 세속적 고락과 관련된 것이다. 이에 비해서 출세간적 정견은 해탈에 필수적인 원칙들에 관련된 것으로서 우리가 생을 거듭하는 가운데 정신적 향상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할 뿐 아니라 반복되는 생과 사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궁극적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세속적인 바른 견해

  세속적인 바른 견해에는 업의 법칙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포함된다. 여기서 말하는 업은 물론 행위의 도덕적 효력을 말한다. 이를 다시 정확하게 규정지은 바에 따르면 ‘업의 귀속에 대한 바른 견해(kammassakatā sammādiṭṭhi)’가 되는데 이를 설명하는 표준적 정형구는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는 자기가 지은 업의 주인이자 자기 업의 상속자다. 그들 각자는 자기 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며 자기 업에 매여 있고 자기 업으로 지탱된다. 선악 간에 어떤 업을 짓든 그들은 그 업의 상속자가 될 것이다.8)


  더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도 경전에 나온다. 예컨대, 남에게 무엇을 주거나 보시를 하는 등의 덕스러운 행위는 도덕적 중요성을 띤다는 것, 선행과 악행은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수반한다는 것, 누구나 어머니와 아버지를 섬길 의무가 있다는 것, 재생이 있으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넘어선 세계가 있다는 것, 또 스스로 체득한 높은 깨달음에 기초해서 법을 설하는 사문이나 브라만들이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을 확언하는 경 구절들9)이 있다.

  이렇게 표현되고 있는 ‘바른 견해’가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열쇠가 되는 용어인 업(業 kamma)이라는 말의 의미부터 먼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업’이라는 용어는 행위를 의미한다. 불교에서 그런 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의욕이 빚는 행위, 그 중에서도 도덕적 측면이 관건이 되는 의욕이라는 의미의 행위이다. 왜냐하면 의욕이야말로 행위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행위와 의욕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데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으셨다. 업을 분석하는 한 경에서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내가 업(kamma)이라 부르는 것은 의욕[思 cetanā]10)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의욕이 생겼기에 사람은 몸[身], 말[口], 뜻[意]으로 업을 짓는다.”11)고 언명하셨다. 업을 의욕 내지 의지작용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결국 업을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고, 마음의 욕구·성향·목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정신적인 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의욕은 몸이나 말, 또는 뜻[意]의 세 가지 통로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이 셋을 세 가지 ‘업의 문[業門 kammadvāra]’이라 부른다. 몸을 통해 표현되는 의욕은 신업(身業)이며, 말을 통해 표현되는 의욕은 구업(口業)이고, 생각·계획·사상·기타 정신적 작용이 밖으로 표현되기 이전 상태의 의욕을 뜻으로 짓는 의업(意業)이라 한다. 따라서 의욕이라는 한 가지 요인은 그것이 드러나는 경로 여하에 따라서 세 가지 형태의 업으로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업에 대한 이런 정도의 개괄적 뜻풀이만으로는 ‘바른 견해’를 갖기에 부족하다. 바른 견해를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첫째, 업에는 윤리적으로 구분될 수 있는 선업과 불선업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둘째, 구체적으로 무엇이 선업이고 무엇이 불선업인지를 아는 것, 셋째, 이런 업이 솟아나오게 되는 근원적 뿌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경에 나오듯이 “고귀한 제자가 무엇이 불선업인지를 알고 그 불선업의 뿌리를 알고, 또 무엇이 선업인지를 알고 그 선업의 뿌리를 알면, 그는 곧 ‘바른 견해’를 가진 것”12)이다.

  (i)이런 점들을 정리해 보면 먼저, 업은 불선한(akusala) 것과 선한(kusala) 것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선업은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 정신적 계발에 방해가 되는 것, 나와 남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다. 반면에 선업은 도덕적 면에서 권장할 만한 것, 정신적 계발에 도움이 되는 것, 나와 남에게 이로움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ii)선·불선, 이 두 가지 경우 각각에 해당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지만 부처님께서는 중요한 것을 열 가지씩 선택하여 이를 열 가지 불선업 및 열 가지 선업이라 부르셨다. 이 열 가지 중 세 가지는 몸으로, 네 가지는 말로,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는 뜻으로 짓는 업이다. 열 가지 불선업의 과정을 그것이 표출되는 문(門)에 따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업(kāyakamma)
  1. 생명을 해침[殺生]
  2.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함[偸盜]
  3. 감각적 쾌락 면에서의 그릇된 행위[邪淫]
구업(vacīkamma)
  4. 거짓말[妄語]
  5. 말전주[兩舌]13)
  6. 거친 말[惡口]
  7. 쓸데없는 말[綺語]
의업(manokamma)
  8. 탐심[貪]
  9. 악의[瞋]
  10. 그릇된 견해[癡]


  이 열 가지 불선업에 반대되는 것이 바로 열 가지 선업이다. 다시 말해 앞의 살생에서부터 쓸데없는 말까지의 일곱 가지 불선업을 짓지 않고 탐심과 악의에서 헤어나고, 바른 견해를 견지하는 것, 이 열 가지가 선업이다. 설령 앞의 일곱 가지 불선업을 짓지 않으려는 생각이 오직 마음에서 그칠 뿐 명백한 외적 행위를 수반하지 않더라도 이들을 신체적, 언어적 선업으로 간주하는 것은 그런 마음상태가 몸과 말의 기능을 제어하는 데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iii)업은 앞에서 ‘뿌리(mūla)’라고 부른 그 기저 동기들에 입각해서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며, 이 기저 동기에 따라 이에 수반되는 의욕의 도덕적 성질이 달라진다. 그래서 업은 그 뿌리가 선한지 불선한지 여하에 따라 선한 것이 되기도 하고 불선한 것이 되기도 한다. 선업과 불선업의 뿌리는 각각 세 갈래이다. 불선의 뿌리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탐욕(lobha), 진에(dosa), 치암(moha)의 세 가지 번뇌이다. 이들 번뇌로부터 비롯된 행위는 모두 좋지 못한 업이 된다. 세 가지 선의 뿌리는 이와 반대의 것으로서 옛 인도 어법대로 부정의 접두사 ‘a[無]’를 붙여 무탐욕(alobha), 무진에(adosa), 무치암(amoha)으로 표기되는 것들이다. 이 세 가지가 어휘상으로 부정적 형태를 띠고 있어도 그것은 이 세 가지 번뇌가 없다는 것을 뜻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에 수반되는 덕성까지도 포함한다. ‘무탐욕’은 (욕심)버림[出離], 초연함, 관대함을 내포하고 ‘무진에’는 자애, 연민, 친절을, 그리고 ‘무치암’은 지혜를 내포한다. 이 세 가지 뿌리에서 나오는 행위는 어떤 것이든 선한 업이 된다.

  업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어떤 행위의 윤리적 성질 여하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는 효능에 있다. 우주에 편재하는 하나의 법칙이 있어 이 법칙의 작용으로 일체의 의욕이 빚는 행위는 응보적 결과로 끝을 맺는다. 이 결과를 업보(vipāka) 또는 과(果 phala)라 한다.14) 행위와 그 과보를 잇는 이 법칙은, 불선한 행위는 고통을 가져오고 선한 행위는 행복을 가져온다는 단순한 원리로 작용한다. 과보는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꼭 금생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도 아니다. 업은 여러 생에 걸쳐서 작용할 수도 있고 여러 겁을 잠재해 있다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의욕이 빚는 행위를 할 때마다 그 의욕은 식의 흐름에 흔적을 남기고 이 흔적은 잠재력으로 저장된다. 저장된 업이 숙성을 도와주는 조건들을 만나면 잠재 상태에서 깨어나 어떤 결과를 촉발시켜 원래의 행위에 상응하는 과보를 가져오게 한다. 이런 과보는 금생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다음 생, 또는 그 다음의 어느 생에서 나타날 수도 있다. 업은 재생의 원인이 되어 다음 생의 존재 형태를 결정할 수도 있고, 한 생애 속에서 행복과 고통, 성공과 실패, 발전과 퇴보 등 다양한 경험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때 어떤 방식으로 업이 성숙하든 선업은 좋은 결과를, 불선업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는다는 보편법칙에는 변함이 없다.

  이 원칙을 인정한다는 것은 곧 세속적인 바른 견해를 견지하는 것이 된다. 일단 이런 견해가 확립되면 다른 다양한 형태의 잘못된 견해와는 공존할 수 없으므로 잘못된 견해들을 그 즉시로 배제할 수 있다. 즉, 금생의 내 행위가 미래의 나의 운명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를 확실히 인정하게 되면, 우리의 삶이 금생에서 끝나고 우리의 의식은 죽음과 더불어 끝난다는 허무주의는 설 자리가 없게 된다.
  또 이 견해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원칙에 입각하여 선과 악, 정과 사를 구분하기 때문에 선악을 개인적 의견의 단순한 발로나 사회 통제를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 주장하는 윤리적 주관주의와도 상반된다. 또 이 견해는 사람들이 자기가 처한 상황 속에서 어느 정도 제약이 있기는 해도 자유롭게 행위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따라서 우리의 선택이 언제나 어쩔 수 없는 필요에 따라 내려질 뿐이고 그러므로 자유의지란 환상이며 도덕적 책임 역시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완고한 결정론적’ 노선과도 상반된다.

  업과 그 과보를 바로 살펴보라는 ‘바른 견해’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함축하고 있는 내용 중 어떤 부분은 오늘날의 사고경향과 상충되는 면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 차이점을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바른 견해’에 대한 가르침은 선과 악, 정과 사의 문제가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무엇이 좋고 나쁘며 무엇이 옳고 그른가 하는 상투적 의견들을 초월하는 심오한 문제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한 사회 전체가 무엇이 도덕적으로 바른 가치인지에 대해 혼란에 빠질 수 있고, 그래서 심지어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어떤 특정 행위를 옳다고 손뼉을 치고 그와 다른 행위를 그르다고 비난한다 해서 그 도덕적 가치가 진정으로 옳거나 그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는 도덕적 기준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이며 따라서 가변적일 수 없다. 행위의 도덕성 여부는 그 행위가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느냐 하는 조건에 매여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어떤 행위를, 또는 그 행위를 이루는 배경인 도덕규범을 평가할 도덕성의 객관적인 기준은 엄존한다.
  도덕성에 대한 이러한 객관적 기준이야말로 담마[dhamma 法]가 담마 되는 소이(所以)이다. 의욕이라는 모태에서 행위가 나오며 행위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사실, 그리고 행위와 그 결과간의 상응성은 근본적으로 의욕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은 법의 타당성에 초개아적 기반이 되는 것이며 담마가 진리와 정의로움에 대한 객관적 법칙이 되는 소이인 것이다. 여기에 신과 같은 재판관이 있어서 상벌을 통해 전우주적 상황전개를 관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직 행위 그 자체가 원래 띠고 있는 도덕적, 비도덕적 성격으로 인해 그에 알맞은 결과를 발생시키고 있을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업과 그 과보에 관한 바른 견해라는 것은 스스로 깨달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에는 도덕적 업력이 있다고 가르치는 저명한 정신적 스승들의 말씀을 받아들여 알고 있는 수준일 것이다. 비록 스스로 확인해서 알게 된 것은 아니더라도 업의 원리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여전히 정견으로서의 일면은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올바른 견해는 이해하는 일, 특히 사물의 전 체계[法界]에서 인간의 위치를 이해하는 일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수준의 견해 그 자체로도 ‘정견’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욕이 빚는 행위가 도덕적 힘을 발휘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만큼 우리 존재의 본질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제대로 파악한 셈이 된다. 뿐만 아니라 행위가 갖는 업력(業力)에 대한 바른 견해는 우리 이해범위 저 너머에 있는 순전히 믿음의 대상만은 아니다. 이 업의 원리는 우리가 직접 볼 수 있는 사실이 될 수도 있다. 깊은 정신집중의 어느 단계에 도달하면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도 볼 수 있는 초감각적 투시력인 ‘천안(天眼 dibbacakkhu)’이라는 특수한 기능을 계발할 수 있다. 이 특수 기능이 발달하면 그 눈을 살아있는 존재의 세계로 돌려 업의 법칙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펴 알 수 있다. 이 천안의 능력을 갖게 되면 존재들이 죽었다가 그 업에 따라 어떻게 재생하게 되며, 그들이 선업이나 악업의 숙성으로 행복을 누리거나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직접적 지각을 통해서 스스로 바로 볼 수 있게 된다.15)


더 높은 바른 견해

  업과 그 결실에 대해 이처럼 바른 견해를 갖게 되면 도덕적으로 건전한 행위를 할 충분한 근거를 마련하게 되고 따라서 윤회의 세계에서 상당히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해탈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사람은 모처럼 업의 원리를 수용했음에도 막상 자신이 지향하는 목표를 세속적 성취에 한정시켜버리고 만다. 결국 선한 업을 짓는 동기가 지금 여기에서 번영과 성공을 가져올 선업을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버린다. 즉, 사람으로 행복하게 다시 태어나거나 또는 천상세계에서 천복을 누리는 데에 목표를 두게 되는 것이다. 사실 업의 인과논리 안에는 업과 보의 윤전(輪轉)을 초탈하고자 하는 의욕을 일으키는 요소가 결핍되어 있다. 윤회라는 존재질서로부터 완전히 해탈하는 데 필요한 추진력을 얻기 위해서는 좀 더 깊고 차원이 다른 안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가장 높은 세계에 속하는 존재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형태의 윤회적 존재가 본래 가진 결함과 그 결함이 안고 있는 고의 성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낳는 그런 안목이어야 한다.

  해탈로 인도하는 이 출세간적 바른 견해는 곧 사성제(四聖諦)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이 올바른 이해가 팔정도의 첫 번째 항목으로 등장하는 바른 견해, ‘성스러운 바른 견해’라는 이름 그대로의 바른 견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바른 견해의 내용을 사성제와 연관시켜 명백하게 규정하셨다.

  바른 견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고’에 대한 이해이고, ‘고의 집기(集起)’에 대한 이해이고, ‘고의 소멸’에 대한 이해이고,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에 대한 이해이다.16)

  팔정도 수행은, 사고와 성찰의 방식을 통해서 어슴푸레하게 밖에는 이해될 수 없는 사성제의 개념적 이해로부터 시작되어 궁극적 깨달음과 동등한 수준의 명철함을 통해서 사성제의 진리성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될 때 그 절정에 도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제에 대한 바른 이해야말로 고를 종식시키는 길의 시작과 완성 모두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사성제의 첫 번째는 ‘고(苦)’, 즉 존재라는 것이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본래적 불만족성에 관한 진리이다. 이 ‘고’는 모든 형태의 삶에 본유하는 무상, 고통, 그리고 영속적 불완전성으로 드러난다.

  이것이 ‘고에 관한 성스러운 진리’이다. 태어남이 고이며, 늙음이 고이며, 병듦이 고이며, 죽음이 고이며, 슬픔, 한탄, 고통, 고뇌, 절망이 고이다. 즐겁지 못한 것과 마주치는 것이 고이며, 즐거운 것과 떨어지는 것도 ‘고’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 역시 고이다. 요컨대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五取蘊]이 고이다.17)

  위의 마지막 구절은 주의해서 살펴보지 않고서는 그 뜻을 잘 이해할 수 없는 포괄적인 언명이다. ‘다섯 가지 집착의 쌓임[五取蘊]’은 우리 존재의 본질을 분류적 접근방식에 의해 규명한 결과이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결국 우리 존재라는 것은 물질적 형상[色], 느낌[受], 지각[想], 정신적 형성들[行], 의식[識], 이 다섯의 한 벌로 이루어졌으며, 이 모두가 집착과 얽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 다섯이고, 그 다섯이 곧 우리다. 무엇을 자신이라 여기든, 무엇을 자신의 자아라고 우기든, 그 무엇은 결국 이 다섯 쌓임이라는 한 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 쌓임이 함께 작용하여 만들어낸 온갖 종류의 생각, 감정, 관념, 성벽(性癖) 속에서 살고 있으니 이것이 곧 ‘우리의 세계’다. 이렇게 해서 다섯 쌓임이 바로 ‘고’라는 부처님의 언명은 사실상 우리의 모든 경험, 우리의 전 존재가 고의 범주에 속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부처님께서는 다섯 쌓임을 두고 꼭 ‘고’라고 단언해야만 했을까? 부처님은 다섯 쌓임이 모두 ‘고’인 이유는 그들이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순간순간 변한다. 생겨났다 꺼져버린다. 또 그들 배후에 따로 이 변화를 겪어내는 어떤 실체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존재의 구성요소들은 항상 바뀌고 있고 영속하는 어떤 핵심도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요소들 속에는 우리가 안전판으로 삼기 위해 붙들어 둘 만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끊임없이 해체되고 있는 흐름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영속을 구하는 욕구에서 붙들고 있다 보면 고에 함몰될 뿐이다.

  사성제의 두 번째 진리는 ‘고의 원인’을 적시하고 있다. 부처님은 고로 귀결되는 일련의 마음의 때[垢] 중에서 ‘갈애(taṇhā)’를 가장 파급 효과가 큰, 주된 ‘고의 원인’으로 집어내셨다.

  이것이 고의 집기(集起)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반복되는 존재를 낳고, 즐김(nandi)·욕망(rāga)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그리고 여기저기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곧 이 갈애이다. 이른바 감관의 즐거움을 구하는 갈애[欲愛], 존재를 구하는 갈애[有愛], 무존재를 구하는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18)


  세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이 인과 관계를 역으로 뒤집은 것이다. 갈애가 고의 원인이라면 고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갈애를 제거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이것이 고의 멸이라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그것은 이 갈애의 완전한 시듦이요, 그침이며, 놓음이요, 버림이며, 벗어남이요, 초연해짐이다.19)


  갈애가 제거되었을 때에 오는 완전한 평화 상태가 열반, 곧 모든 조건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로, 이는 우리가 금생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탐·진·치의 불길이 꺼지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네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고의 멸에 이르는 길’, 열반의 실현으로 가는 길을 드러내 보인다. 이 길이 곧 성스러운 팔정도 바로 그것이다.

  사성제에 관한 바른 견해[正見]는 두 단계로 발전한다. 첫 단계는 진리에 수순(隨順)하는 바른 견해(saccānu-lomika sammā-diṭṭhi)이고 두 번째는 진리를 꿰뚫어보는[廓撤] 바른 견해(saccapaṭivedha sammā-diṭṭhi)이다. 진리에 수순하는 바른 견해를 얻기 위해서는 그 진리가 우리들 삶 속에서 갖는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이해는 처음에는 진리를 배우고 공부하는 데서 생겨난다. 그런 연후에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진리들[四聖諦]을 깊이 숙고해 나가면 그 이해가 더욱 깊어져서 드디어 그것의 진실성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이르러서도 진리를 아직 투철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진리를 이해했다 해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개념의 문제에 그칠 뿐 여전히 미흡하다. 진리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명상수행을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첫째 지속적 집중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이고, 그런 연후에는 통찰력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통찰력은 존재의 구성요소들의 참다운 특성들을 판별하려는 목적으로 ‘다섯 쌓임[五蘊]’을 관할 때 생겨난다. 이러한 관법 공부가 절정에 달하게 되면 마음의 눈은 ‘다섯 쌓임’을 구성하는, 조건에 매인 현상들을 떠나 모든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 즉 열반 쪽으로 옮겨 간다. 통찰력이 깊어지면 열반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시선의 옮김’의 결과 마음의 눈이 열반을 볼 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그 모두를 한꺼번에 꿰뚫어보는 일이 일어난다. 열반, 즉 고를 넘어선 상태를 보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오온을 파악할 수 있는 안목을, 그리고 오온이 단지 조건에 매인 것이며 끊임없이 변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고(苦)가 된다는 것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는 안목을 얻게 된다. 열반이 실현됨과 동시에 갈애는 멈춘다. 이때 비로소 갈애가 고의 진짜 원천이라는 사실이 이해된다. 열반을 보게 되면 존재가 빚어내는 소란으로부터 벗어난 평화로운 상태가 된다. 또한 팔정도를 수행함으로써 이런 경험을 하게 된 것이기 때문에 팔정도가 정말로 고의 종식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사성제를 꿰뚫어 볼 수 있는[廓撤] 바른 견해는 팔정도 수행의 시작 단계가 아니라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진리에 수순(隨順)하는 바른 견해, 즉 우선 배워서 알고 숙고를 통해서 강화되는 바른 견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로 이 바른 견해가 생기면 우리는 수행, 다시 말해 계·정·혜 삼학의 공부길에 들어서게 된다. 이 수행이 무르익으면 지혜의 눈이 저절로 열려서 진리를 꿰뚫게 되고 마음은 고(苦)의 굴레에서 해방된다.



 

Ⅲ 바른 의도[正思 sammā saṅkappa]


  팔정도의 두 번째 항목은 빠알리어로 ‘삼마 상깝빠’인데 우리는 이를 ‘바른 의도(right intention)’로 번역할 것이다. 이 용어는 ‘바른 생각(right thought)’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생각’이라는 말이 특별히 의지나 의욕과 같은 정신활동의 목적적, 능동적 측면을 지칭하며, 정신활동의 인지적 측면은 첫 번째 항목인 ‘바른 견해’의 몫이라는 단서를 붙인다면 ‘바른 생각’이란 표현도 수긍할 수 있다. 그러나 인지적 측면과 능동적 측면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마음의 이 두 측면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밀접하게 서로 얽히어 상호작용하고 있다. 감정적 선호가 견해에 영향을 미치고 견해는 감정적 선호를 결정한다. 그래서 깊은 숙고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바른 견해를 얻고, 탐구를 통해 그런 견해를 확인함과 동시에 가치체계는 재구성된다. 가치체계가 재구성되면 새로운 시각이 생기고, 이 새로운 시각에 상응하는 목표 쪽으로 마음은 움직이게 된다. 그러한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한 마음씀이 바로 ‘바른 의도(right intention)’이다.

  부처님은 바른 의도를 세 가지로 설명하신다. 욕심놓음(renunciation)의 의도, 선의(good will)의 의도, 해치지 않음(harmlessness)의 의도가 그것이다.20) 이 세 가지는 이에 대응하는 세 가지 바르지 못한 의도인 욕심냄(desire)의 의도, 악의(ill will)의 의도, 해침(harmfulness)의 의도와 각기 대립하고 있다.21) 이들 바른 의도는 각기 상대되는 바르지 못한 의도들에 맞선다. 욕심을 버리려는 의도는 욕심내려는 의도에 맞서고, 선의를 베풀려는 의도는 악의의 의도에, 그리고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는 해치려는 의도에 맞선다.

  이처럼 생각이 두 갈래로 나뉜다는 사실을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이미 알고 계셨다. (《중부》19경) 숲 속에서 명상 수행을 하면서 해탈을 추구하고 있을 때 자신의 생각이 두 가지 상이한 부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욕심냄·악의·해침의 의도를 한 쪽에, 욕심놓음·선의·해치지 않음의 의도를 다른 쪽에 세웠다.
  첫 번째 부류의 의도가 일어나는 것을 지켜볼 때마다 이런 의도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해로움을 끼치고, 지혜를 흐리게 하고, 열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이끄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깊이 숙고하면서 부처님은 그런 생각들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셨다. 반면, 두 번째 부류의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런 생각들이 이로운 것이며, 지혜의 증장에 도움이 되며, 열반의 성취를 돕는다는 것을 알아차리셨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런 바른 생각들을 더욱 강화하고 완성에 이르도록 하셨다.

  바른 의도는 팔정도 중 앞에서 두 번째 자리, 즉 정견과 그리고 정어로 시작되는 세 도덕적 요소들[正語·正業·正命]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마음의 의도적 기능은 우리의 인식상의 시각과 실제 활동양태를 잇는 필수적인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우선 행위 쪽에서 보면 행위는 언제나 생각에서 연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각은 몸과 말에 방향을 지시하고 그것들이 행위로 옮겨지도록 몰아세우고, 그들을 마음이 지니고 있는 목적과 이상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등, 언제나 행위에 앞선다.
  한편 이들 목적과 이상, 즉 우리의 의도는 이번에는 다시 한 걸음 더 되돌아가 그것에 앞서 지배력을 행사하는 견해 쪽을 돌아보게 만든다. 따라서 그릇된 견해들이 지배하고 있을 때는 거기서 산출되는 것은 그릇된 의도이며 다시 이는 불건전한 행위를 일어나게 만든다. 그래서 행위의 도덕적 효율성을 부정하고 성공의 척도를 오직 이득이나 지위에 두는 사람은 이득과 지위만을 열심히 추구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런 식의 추구행위가 확산되면 그 결과는 고(苦)뿐이다. 귀추(歸趨)는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부·지위·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애쓰는 개인, 사회집단, 국가들은 어마어마한 고를 겪게 될 뿐이다. 끝없는 경쟁, 갈등, 불의, 억압의 원인이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탐·진·치 삼독에 의해서 조종되는 생각들이 표출된 것, 의도가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의도가 바를 때는 행위도 올바를 수 있다. 그리고 의도가 올바르게 되는 데에는 올바른 견해만큼 확실한 보장도 없다. 행위에는 반드시 응보적 결과가 뒤따른다는 업의 법칙을 인지하게 되면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를 이 법칙에 준해서 설정하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의도의 표현인 행동도 ‘바른 행위의 규범[戒]’을 따르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사람이 바르지 못한 견해를 견지할 경우, 그런 견해에 바탕을 둔 행위·말·계획·목적은 고(苦)로 치닫게 되고, 바른 견해를 가질 경우, 그런 견해에 바탕을 둔 행위·말·계획·목적은 열반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런 이치를 간명하게 요약하신다.22)

  바른 견해를 설명하는 여러 체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사성제에 대한 이해를 들기 때문에 사성제를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바른 의도의 내용도 결정될 것이 틀림없다. 이런 사실은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사성제를 자신의 삶과 연관해서 이해하면 욕심놓음[出離]의 의도가 생겨나게 되고 다른 존재들과 연관시켜 이해하면 다른 두 가지 바른 의도, 즉 선의[無恚]의 의도, 해치지 않아야겠다는[無害] 의도가 일어난다. 우리의 삶에 고(苦)가 속속들이 스며있으며, 이 고가 갈애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욕심놓음 쪽으로, 즉 갈애와 그 갈애의 대상들을 버리는 쪽으로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다. 다시 다른 존재[有情]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사성제에 비추어 보면 공부를 해나갈수록 선의를 베풀고 해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크게 자라난다. 모든 다른 존재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를 겪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는 고찰은 선의의 생각, 즉 모든 존재의 안녕과 행복, 평화를 기원하는 자애심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모든 존재가 고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해치지 않겠다는 생각, 즉 그들도 고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기원하는 연민심이 생겨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팔정도의 계발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 두 항목은 힘을 합쳐 세 가지 불선한 뿌리, 즉 탐·진·치를 약화시키기 시작한다. 인식에 있어 주된 때[垢, 煩惱]인 치암(癡暗)은 지혜의 싹이라 할 수 있는 바른 견해의 저항을 받게 된다. 바른 견해가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로 발전해야 비로소 치암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겠지만 깜빡거리는 미미한 수준의 바른 견해들도 각각 치암의 완전한 파괴에 이바지한다. 다른 두 가지 뿌리인 탐욕과 성냄은 감성의 때이기에 의도의 방향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버림, 선의, 무해에 대해 적극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탐욕과 성냄에 대한 교정수단이 된다.

  탐욕(貪慾)과 성냄[瞋心]은 뿌리가 깊어서 쉽게 다스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효율적인 전략을 구사하면 이들을 극복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부처님이 고안한 팔정도는 간접적 접근방식을 활용한다. 즉, 탐욕과 성냄을 정면으로 공략하기보다 먼저 이들이 일으키는 생각부터 다룬다. 탐욕과 성냄은 ‘생각’의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에 그와 정반대되는 생각으로 대체시켜 나가는 일련의 ‘생각 바꿈’ 과정에 의해서 그 뿌리를 부식(腐蝕)시키는 일이 가능하다. 버림을 의도적으로 거듭 생각하는 것은 탐욕을 다스리는 좋은 약이다. 탐욕이라는 때[心垢]는 관능적인 생각, 획득하려는 생각, 소유하려는 생각 등 욕심스러운 생각들로 표출된다. 한편 버림의 생각은 무탐욕이라는 선한 뿌리로부터 솟아나며, 개발하면 할수록 무탐욕의 뿌리를 더 활성화시키는 환원적 기능을 한다. 서로 상반되는 생각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버림의 생각이 일어나면 욕심스러운 생각은 밀려나게 된다. 그래서 무욕이 탐욕의 자리를 대신하게 만드는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선의와 해치지 않음의 생각도 성냄[瞋心]에 대해 해독작용을 한다. 성냄은 화·적의·복수심 같은 악의의 생각으로, 아니면 잔인·공격·파괴충동 같은 해악의 생각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선의의 생각이 악의(惡意)를, 무해의 생각이 해악(害惡)을 막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성냄이라는 불건전한 뿌리 그 자체를 잘라 들어가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려는 의도

  부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라 하셨다. 세상의 길은 욕망의 길이며, 이 길을 따르는 깨닫지 못한 중생은 바깥 대상에서 행복을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그 대상을 좇아 행복을 갈구하며 욕망의 흐름에다 자신을 내맡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버림의 소식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길이다. 욕망의 유혹에 저항해야 하고 종국에는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하신다. 욕망 그 자체가 도덕적으로 나빠서가 아니라 고의 뿌리이기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23) 따라서 갈애와 갈애의 충동질을 외면해 버리는 이 버림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열쇠가 되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 된다.

  부처님은 모든 사람이 가정생활을 떠나 절로 들어가도록 요구하지도 않으셨고 또 따르는 사람들에게 모든 감각적 즐거움을 당장 포기하라고 이르지도 않으셨다. 버림을 실천함에 있어 어느 정도 버려야 할지는 각자의 성향과 처지에 달린 문제이다. 그러나 해탈을 증득하려면 갈애를 완전히 근절시켜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수행의 엄정한 지침이다. 갈애를 극복하는 그만큼 공부의 진척은 촉진되기 마련이다. 물론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그 필요성은 엄존한다. 갈애가 고의 원인인 이상 고를 끝장내려면 갈애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음을 버림 쪽으로 향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나 집착을 놓아버리려 노력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강력한 내적 저항에 부닥치게 된다. 마음은 집착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장악력을 포기하기를 원치 않는다. 그토록 오랫동안 손에 넣고, 거머쥐는 데 익숙해진 습관을 마음 한 번 먹었다고 해서 쉽게 놓아버릴 수는 없다. 버림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고 집착을 버리기도 원하지만, 막상 그 필요성이 현실로 다가오면 마음은 뒤로 물러나 욕망의 손아귀 안에서 안주하고 계속 즐기려 든다.

  그러므로 욕망의 족쇄를 과연 어떻게 부숴버릴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부처님은 결코 억압적 방법을 해결책으로 제시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마음이 가득 찬 채로 욕망을 몰아내려 덤비는 방법은 해결책이 아니라고 보시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문제를 표면 아래로 가라앉힐 뿐이다. 문제는 계속 뿌리를 뻗는다. 마음을 욕망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부처님께서 일관되게 제시하시는 도구는 이해력이다. 진정한 버림은, 마음속으로 미련을 가진 채 억지로 사물을 포기하도록 자신을 다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더 이상 우리를 묶을 수 없도록 사물을 보는 눈 그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우리가 욕망의 성질을 이해하게 될 때, 날카로운 주의력을 기울여 욕망을 면밀히 점검할 때, 욕망은 싸울 것도 없이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욕망의 장악력을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는 욕망은 언제나 어김없이 ‘고’와 밀착돼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결핍감과 충족감이 끝없이 반복하는 욕망이라는 현상은 모두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 눈에 의해서 좌우되는 문제이다. 우리가 욕망에 매인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욕망을 행복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욕망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되면 욕망의 힘은 줄어들게 되고, 그 결과는 마침내 욕심놓음 쪽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의 인식을 바꾸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지혜로운 숙고[如理作意 yoniso manasikāra]’다. 인식이 생각에 영향을 미치듯이 생각도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 평소 우리들의 인식에는 ‘지혜롭지 못한 숙고(ayoniso manasikāra)’가 섞여 있다. 보통 우리는 사물의 겉모습만 보거나 당장의 관심과 욕망에 이끌려 대충 훑어볼 뿐,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일의 뿌리를 파 보거나 장기적으로 미칠 결과를 철저히 탐구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행위의 기조를 이루는 어떤 숨어 있는 특정한 정신 상태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그것들이 가져올 결과를 탐구하고, 우리의 목표가 지니는 가치를 평가해 보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고려, 즉 ‘지혜로운 숙고’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점검할 때 우리의 초점은 무엇이 즐거운 것이냐가 아니라 무엇이 참된 것이냐에 맞추어지게 된다. 우리는 편안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참된 것을 찾아나갈 준비와 각오를 하게 된다. 진정한 안녕은 편안한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참된 쪽에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욕망에는 항상 고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때는 고가 아픔이나 짜증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불만에 의한 긴장상태로 지속되기도 한다. 어떻든 욕망과 고, 이 둘은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동반자이다. 이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서 욕망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그 전 과정을 살펴보면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욕망이 처음 고개를 쳐들 때에는 부족감, 즉 결여의 고통을 만들어낸다.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애를 쓴다. 만약 이런 노력이 실패하면 우리는 좌절과 실망, 때로는 절망마저 느끼게 된다. 성공의 즐거움 역시 이런 고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처럼 얻은 자리를 다시 잃게 될까봐 걱정한다. 우리의 지위를 확보하고 우리의 영역을 보호하고 더 많이 얻고, 더 높이 올라서고, 더 확고한 지배체제를 세우고 싶어 안달하게 된다. 이렇듯 욕망이 내세우는 요구는 끝없이 펼쳐진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개개의 욕망은 그 대상이 영원하기를 요구한다. 우리가 얻은 것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욕망의 대상들은 사실 영원하지 않다. 부(富)나 권력은 사라져버리고 사람은 언젠가는 헤어질 수밖에 없다. 헤어짐의 고통은 집착의 강도에 비례한다. 강한 집착은 큰 고통을 가져오고 적은 집착은 적은 고통을 가져오며 집착이 없으면 고통도 없다.24)

  욕망에 내재해 있는 고에 대해 관(觀)하는 것 역시 마음을 버림 쪽으로 돌리는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버림이 가져다주는 이익을 곧바로 관하는 것이다. 욕망에서 버림으로 이행하는 것을 혹자는 행복으로부터 슬픔으로, 풍요로부터 빈곤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상상할지도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칠고 뒤엉킨 쾌락에서 고양된 행복과 평화로, 노예 상태에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주인의 입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욕망은 궁극적으로 두려움과 슬픔을 낳지만 욕심놓음은 두려움 없음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에 더해서 욕심놓음은 계·정·혜 삼학(三學)이 제각기 단계적 임무를 완수하도록 촉진시켜 준다. 다시 말해 계는 정을 위한 기초가 되고, 정은 혜를 위한 기초가 되며, 또 혜는 더 높은 수준의 계를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다. 욕심놓음은 행위를 순화하고 집중력을 도우며 지혜의 씨앗을 틔운다. 사실 수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전 과정은 놓음이 발전해 가는 과정이며, 놓음의 궁극 단계인 열반, 즉 ‘존재를 형성하는 모든 기반 요소들을 놓아버림(sabb'ūpadhi-paṭinissagga[棄捨])’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렇듯 욕망의 위험과 버림의 이로움을 체계적으로 관하게 되면 점차로 우리 마음을 욕망의 지배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 집착은 늦가을 나뭇잎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이런 변화가 갑자기 오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히 수행하기만 하면 언젠가는 틀림없이 오기 마련이다. 거듭거듭 관하고 있는 동안에 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쫓아내고 버림의 의도가 욕망에 찬 의도를 제거하게 된다.


선의를 베풀려는 의도

  선의의 의도는 악의의 의도, 노여움과 성냄에 지배되는 생각과 맞선다. 욕망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악의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두 가지 적절치 못한 방식이 있다. 한 가지는 행동이나 말로 분노나 혐오를 표현함으로써 악의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 접근방식은 긴장을 당장 해소하고 분노를 자신의 몸 밖으로 뱉어버리는 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위험을 불러온다. 이런 접근 방식은 남의 원한을 사고 보복을 불러오며 적을 만들고 인간관계를 악화시키고 불선업을 생기게 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에 가서는 악의가 몸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몸속으로 더 깊이 스며들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계속 망가뜨리게 된다. 다른 한 가지 접근 방식은 악의를 억압하는 것인데 이 또한 악의의 파괴적인 힘을 없애버릴 수는 없다. 이 방식은 다만 악의의 힘을 돌려서 안으로 밀어 넣는 꼴이 되는데 이렇게 되면 이 힘은 자기비하, 만성우울증이나 이성을 잃고 폭력을 휘두르는 경향 등의 이상한 형태로 변하게 된다.

  악의에 대응하는 처방으로, 특히 그 대상이 사람일 경우, 부처님께서 권하신 처방이 빠알리어로 ‘멧따(mettā)’라고 하는 자비심이다. 이 말은 ‘친구(mitta)’라는 말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일상적인 우정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여기서는 차라리 이 말을 ‘사랑어린 친절[loving kindness 慈愛]’이라는 복합어로 옮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이 복합어가 다른 존재들에 대해 이기심 없는 짙은 사랑의 느낌을 그들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진심어린 관심으로 외사(外射)한다는 본래의 의도를 가장 잘 살려낸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자애’는 단순한 감상적 선의도, 도덕적 의무감이나 신의 뜻에 양심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형태의 의무감과도 무관해야 하며 자발적인 따뜻함을 특성으로 하는 깊은 내면적 느낌이어야 한다. ‘자애’의 염(念)이 절정에 달하면 ‘범천(梵天)이 거주하는 저 높은 세계[Brahmavihāra]’에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그곳은 일체 중생의 안녕을 기원하는 염력을 사방으로 방사(放射)하는 염(念) 중심의 거룩한 세계이다.

  ‘자애’가 뜻하는 사랑은 관능적 사랑과 구별되어야 하며 물론 특수한 개인적 관계에 얽힌 사랑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관능적 사랑은 일종의 갈애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고, 개인적 관계에 담긴 사랑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집착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쾌락이나 즐거움을 주기 때문에, 우리의 가족이나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자아상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애정의 느낌이 자기와 관련된 요소를 완전히 벗어나는 경우는 아주 드물고 설령 벗어난다 해도 그 범위는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런 애정은 특정한 개인이나 특정 집단 구성원들만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결국 누군가는 제외시킬 수밖에 없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자애’가 담고 있는 사랑은 몇몇 개인들에 대한 특정한 관계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자기와의 사적 관련성이 전혀 없다. 우리는 남들을 향한 자애의 염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 자애의 마음이 완전한 것이 되려면 아무런 제한이나 유보 없이 일체 중생에게 퍼져나가는 보편적 마음상태로 계발되어야 한다. 자애에 이런 우주적 차원의 보편성을 주입하는 길이 바로 명상 훈련을 통해 자애를 계발하는 방식이다.
  아무런 훈련 없이 저절로 생기는 선의의 감정을 진심(瞋心)에 대한 치유책으로 삼기에는 너무 산발적이고 범위도 제한되어 있다. 사랑을 의도적으로 계발한다는 발상은 억지스럽고 기계적이며 계산적인 것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사랑은 일부러 불러일으키거나 노력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일 때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기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다만 불교에서 문제 삼는 것은 사랑이 어떻게 자발적으로 우러나는가 하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사랑하라고 마음에 명령할 수는 없기에 그것을 계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시작 단계에서는 의도적인 노력이 다소 필요하다. 그러나 수행을 해나가는 동안 사랑의 느낌이 마음에 차츰차츰 깊이 배어들어 자연스럽고 자발적인 성향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 자애의 계발 방법은 ‘자애에 대한 명상(mettā-bhāvanā)’으로 불교 명상에서 아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수행은 자기 자신을 향한 자애의 계발에서 시작한다.25) 자기 자신을 자애의 첫 대상으로 삼는 이유는 진정한 자애는 자기 자신에게 참다운 사랑을 느끼는 경우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분노나 적개심의 대부분이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부정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애가 자기 자신을 향하도록 하면 우리의 부정적 태도가 만들어 놓은 두꺼운 껍질을 녹아내리게 해서 친절과 동정이 밖으로 흘러나갈 수 있다.

  자기를 향해서 자애의 감정을 키워가는 데 익숙해지면 그 다음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자애의 감정을 펴는 단계이다. 자애의 확장은 자기 의식을 변화시키고 자기의 정체성을 통상적 한계성 너머로 넓혀서 남들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 변화는 방법론상 순전히 심리적인 것이며 모든 존재에 보편적 자아가 내재해 있다는 식의 신학적, 형이상학적 주장들과는 전연 무관하다. 이 변화는 단순하고도 매우 수월한 투영과정에서 시작되며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주관을 공유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세상을 적어도 상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 절차는 자기 자신에서부터 출발한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우리 존재의 기본 추동력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바람임을 알게 된다.
  일단 자신 속에서 이런 사실을 보게 되면, 우리는 곧바로 모든 중생이 이 같은 근본적인 바람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모두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남들을 향해 자애(mettā)를 계발시키려면 먼저 행복을 바라는 그들의 내심을 상상력을 통해 공유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우리는 행복을 향한 우리 자신의 욕구를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이 욕구를 남들의 근본적 추동력으로 경험해 보고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와서 그들이 궁극적 목적을 성취하기를, 그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을 그들을 향해 펴 보내는 것이다.

  자애를 펼치는 방법은 처음에는 특정 그룹에 속하는 개인들을 향해 자애의 염(念)을 보내는 데서 시작한다. 이들 그룹의 배열순서는 먼저 자기와 가까운 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점차적으로 먼 쪽을 향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부모나 스승과 같이 친애하는 어느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다음에는 어느 한 친우에게로, 다음에는 중립적인 어느 한 사람에게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에게 적대적인 어느 한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이런 관계 유형은 나와 그들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 계발해야 할 사랑은 그런 관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의 공통적 행복 염원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각자에 대해 그의 영상을 초점에 떠올리고는 “그가 편안하기를! 그가 행복하기를! 그가 평화를 누리기를!”하는 생각을 방사한다.26) 그 사람을 향해 선의와 친절의 따뜻한 느낌을 일으키는 데 성공한 다음에야 그 다음 사람을 향한다. 개개인에게 보내는 것이 어느 정도 성공하면 더 큰 단위를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모든 친우들을 향해, 모든 중립적인 사람들을 향해, 모든 적대적인 사람들을 향해 자애를 계발하려 노력한다. 그 다음에는 동쪽, 서쪽, 남쪽, 북쪽, 위, 아래 등 여러 방향으로 펴나가는, 방향에 따른 펼침에 의해 자애가 넓어질 수 있고, 그리고는 아무런 구별 없이 모든 존재로 확대될 수 있다. 마지막에는 온 세상을 ‘방대하고, 숭고하고, 한량없고, 미움도 싫음도 없는’ 자애의 마음으로 가득 채운다.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는 잔인하고, 공격적이고, 난폭한 생각에 반하여 일어나는, 연민(karuṇā)에 이끌리는 생각이다. 연민은 자애를 보완해준다. 자애가 남들의 행복과 안녕을 기원하는 특성을 갖는 데 비해서 연민은 남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특성을 가지며 이 기원 역시 일체 중생에게로 한량없이 뻗어나가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이 생각은 남들의 주관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내면세계를 깊이, 그리고 총체적으로 공유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존재가 우리 자신과 같이 고에서 벗어나기를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고통과 두려움, 슬픔, 그 밖의 여러 가지 형태의 고로 인해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연민은 생겨난다.

  연민을 명상 수련의 한 방식으로 삼으려면 실제로 고통 받고 있는 그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시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연민의 정은 실제 고통 받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는 자연스럽게 우러나오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고통을 직접 목격한대로, 아니면 상상력을 써서 그려보는 식으로 깊이 숙고한다. 그리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도 ‘고’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내 마음에 비추어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반복하면서, 가슴 속에서 강한 연민의 정이 솟아오르게 될 때까지 깊은 숙고를 지속적으로 훈련한다. 그런 다음, 우리는 그 감정을 표준으로 삼아서 다른 개인들에게도 돌려가며 적용시켜 그들이 각각 어떻게 고통에 노출되어 있는지 생각하면서 그들에게 따뜻한 연민의 정을 방사한다. 연민의 폭과 밀도를 더 높이려면 유정(有情)들이 접하는 가지가지 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고의 여러 가지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사성제의 첫 번째인 고성제가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있다. 늙음을 피할 수도, 병에서 벗어날 수도, 죽음을 비켜갈 수도 없는, 그리고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 등등에 지배당하게 되어 있는 일체의 존재들을 관한다.

  직접 고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관함으로써 연민을 일으키는 공부가 높은 수준에 도달한 후에 우리는 다시 부도덕한 수단을 통해 얻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내 눈앞의 사람들 쪽으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행복을 누리는 듯 보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틀림없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내면적 고민의 흔적을 표출하지는 않지만 결국 악행의 쓰디쓴 과보를 받게 될 것이고 그 과보가 심한 고통을 안겨다 줄 것은 자명하다. 결국 이렇게 해서 이 관법의 적용범위는 일체 살아있는 유정물에까지 확대된다. 다시 말해 일체 유정이 자신의 탐·진·치에 떠밀려 생과 사를 돌고 돌면서 윤회의 보편적인 고(苦)에 매여 있는 모습을 관하게 된다. 전연 낯선 존재들에 대해 연민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을 경우에는 ‘시작이 없는 저 윤회의 길고 긴 과정에서 한 때 나의 부모 형제 자식이 아니었던 사람을 찾기는 어려우리라’는 부처님 말씀은 큰 도움이 된다.

  요약하면 버림, 선의, 무해의 세 가지 올바른 의도는 욕망, 악의, 해악의 세 가지 그릇된 의도를 저지한다. 이런 올바른 생각들이 일어나도록 성찰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성찰법은 단순히 이론적 섭렵의 대상이 아니라 계발되어야 할 실다운 방법으로 가르쳐져 왔다. 버림의 의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세속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고와 밀착되어 있다는 점을 성찰해야 한다. 선의의 의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 얼마나 행복을 갈구하는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무해의 의도를 계발하기 위해서는 모든 존재가 얼마나 고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불선한 생각은 마음속에 박혀 있는 썩은 나무못과 같고 선한 생각은 이것을 대체하기에 알맞은 새 못과 같다. 실제적 성찰행위는 새 못을 대고 두들겨 박아 낡은 못을 쳐낼 때의 망치치기에 해당한다. 새 못을 박는 일이 곧 수행이며 성공을 거두기까지 이러한 수행을 꾸준히 거듭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은 성공을 보증하셨다. 무엇이든 우리가 자주 마음을 쓰면 그것이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는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음란하거나 적의가 담겼거나 위해를 가하려는 생각을 자주 품으면 욕망, 악의, 해악이 우리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고, 그 반대쪽으로 마음을 자주 쓰면 버림, 선의, 무해가 우리 마음의 성향으로 자리 잡는다. (《중부》19경) 여기서 우리가 선택하는 방향은 우리 자신에게로 되돌아 와서 인생의 매 순간순간에 일으키게 되는 의도에 반영된다.


 

Ⅳ 바른 말[正語 sammā vācā], 바른 행위[正業, sammā kammanta], 바른 생계[正命 sammā ājiva]



  팔정도의 다음 세 항목인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는 팔정도를 계·정·혜로 나눌 때 그 첫 번째인 계온(戒蘊 sīlakkhandha)에 해당한다. 따라서 계로서의 공통된 성격을 살리는 의미에서 이들을 한꺼번에 다루고자 한다. 비록 이 원칙들이 비도덕적 행위를 억제하고 선행을 증진하는 것이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윤리적이기보다는 수행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항목들은 단순히 행위에 대한 지침을 마련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순화를 돕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다운 삶의 척도인 윤리는 부처님 가르침 속에서 특유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은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그러나 팔정도라는 특수한 맥락에서의 윤리적 원칙은 고로부터의 해탈이라는 팔정도가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에 비추어 보면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수련[戒]이 팔정도에 어울리는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는 이 수련이 어디까지나 팔정도의 처음 두 항목인 바른 견해와 바른 의도의 바탕 위에서 다루어져야 하고, 뿐만 아니라 집중[定]과 지혜[慧] 수련으로 나아가는 길잡이 역할도 할 수 있어야 한다.

  도덕적 수행이 계·정·혜 삼학 중에서 맨 처음 것에 해당한다고 해서 이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이 계행은 다른 수행의 성공을 위해서 필수적이며 모든 팔정도 수행의 기반이 된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리 사소한 잘못이라도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위험을 보라” (《우다나》4장 1)고 하시면서 계율을 철저히 지킬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셨다. 한 수행승이 부처님을 찾아가서 ‘수행에 대한 말씀을 간략하게 해주십사’고 청하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먼저 선법(善法)의 시작인 청정한 계행과 바른 견해를 확립하라. 너의 계행이 청정해지고 견해가 곧아지면 다음으로 사념처를 닦아야 할 것이다. (《상응부》47상응 3경)


  우리가 ‘계’라고 번역하는 빠알리어 ‘실라(sīla)’는 경전에서 중첩되는 여러 의미들로 나오고 있는데 모두 바른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맥락에서는 이 말이 도덕적 원칙에 부합되는 행위를, 또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원칙 그 자체를, 또 어떤 경우에는 도덕적 원칙을 준수한 결과로 생기게 되는 성격의 덕스러운 자질을 의미한다. 교훈이나 원칙이라는 의미에서의 ‘실라[戒]’는 윤리적 수련의 형식적 측면을 나타내고, 덕성으로서의 ‘실라’는 활기찬 정신을, 바른 행위로서의 ‘실라’는 현실상황으로 드러나는 덕성을 의미한다.
  ‘실라[戒]’는 ‘불선한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그만 두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정의되고 있다. 이런 정의는 외형적 행동에 역점을 두기 때문에 피상적인 것으로 보일 위험이 있다. 그러나 다른 설명들도 있어서 이런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뿐 아니라 이 말이 처음 언뜻 이해한 것보다 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예컨대, 아비담마에서는 ‘실라[戒]’를 심적 요소의 세 가지 절제(viratiyo) ―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와 대등한 것으로 보는데 이렇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면 도덕 지침인 계의 준수를 통해 실제로 계발되는 것이 결국은 마음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실라’의 수련은 사회적으로 해로운 행위를 금하는 ‘공적인’ 이익도 가져오지만 정신적 순화라는 개인적 이익도 수반하여 번뇌가 우리에게 이런저런 행동노선을 따르라고 명령하지 못하도록 막아준다.

  영어의 ‘morality(도덕)’이라는 말과 그 파생어들은 불교의 ‘실라’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있는, 의무와 구속의 뜻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함축적인 의미는 아마 신학적 배경을 갖고 있는 서양 윤리학 특유의 산물일 것이다. 불교는 비신학적 구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불교 윤리는 ‘복종’이 아닌 ‘조화’라는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주석서들에는 ‘실라’를 ‘사마다나(samādhāna)’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말은 ‘조화’ 또는 ‘동위화(同位化)’를 의미한다.

  계를 준수하면 사회적 차원, 심리적 차원, 업(業)의 차원, 선정의 차원에서 조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는 계의 원칙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를 맺도록 도와준다. 제각각 여러 갈래로 서로 다른 개인적 이해와 목표를 가지고 사회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군중을 하나의 응집력 있는 사회질서 속으로 융화시키며, 개인들 간의 갈등도 비록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감소시키는 효과는 있다. 심리적 차원에서는, 계의 준수가 마음에 조화를 가져다주고, 도덕적 비행으로 인한 죄의식과 자책 때문에 생기는 심적 갈등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업의 차원에서 계의 준수는 업의 보편적 법칙과 조화를 이루게 하고 장차 윤회과정에서 좋은 결과를 보장해준다. 마지막으로 선정의 차원에서 보면, 계는 마음의 예비적 순화가 이루어지도록 돕는다. 이렇게 이루어진 마음의 순화는 더욱 심도 있게, 더욱 철저하게 적정(寂靜)과 통찰력을 체계적으로 계발해 나감으로써 완성되는 것이다.

  계(戒) 수련의 항목들이 간단히 정의될 때에는 대개 무엇을 하지 말라는 식의 부정적 언사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계에는 잘못을 삼가는 것 이상의 뜻이 있다. 계에 포함된 각 원칙들은, 곧 보겠지만, 실제로 두 가지 측면을 갖추고 있는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수행 전반에 필수적인 것이다. 첫째는 불선을 삼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을 열심히 행하는 것이다. 앞의 것은 ‘피함(vāritta)’이라 하고 뒤의 것은 ‘실행(cāritta)’이라 한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수련의 시작 단계에서는 피하는 쪽을 강조하신다. 불선을 삼가는 것으로 충분해서가 아니라 수행의 단계를 순서대로 올바로 세우기 위해서이다.
  《법구경》의 유명한 게송에서 “모든 악행을 멀리 하는 것, 선을 계발하는 것,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183 게)”라고 하여 이들 단계가 시간적으로 보다는 논리적으로 자연스러운 순서에 따라 적시되어 있다. 다른 두 가지 단계, 즉 선을 계발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단계도 물론 충분한 고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그 여러 단계를 밟아 계의 수련에 확실하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불선을 피하겠다는 결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결의가 없이 선한 자질부터 계발하려고 서둘다가는 결과적으로 그 자질은 뒤틀리고 위축되고 말 것이다.

  계의 수련은 밖으로 행동이 드러나는 두 가지 주요 통로인 말과 몸뿐 아니라 생계를 영위하는 방식이라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관심 영역을 관장한다. 그래서 이 수련에는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의 세 가지 요소가 포함된다. 이제 팔정도를 설명할 때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순서에 따라 이들을 하나하나 검토해 나가기로 하자.


바른 말[正語 sammā vācā]


  부처님은 바른 말을, 거짓말[妄語] 멀리하기, 말전주[兩舌] 멀리하기, 거친 말[惡口] 멀리하기, 쓸데없는 말[綺語] 멀리하기의 네 가지로 나누셨다. 말이 미치는 효과는 신체적 행위의 효과처럼 당장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중요성과 잠재력을 가벼이 보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말이나 그 방계격인 글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사실 동물과 같이 언어 이전 단계의 수준을 살고 있는 존재의 경우에는 몸짓이 중요할 수밖에 없겠지만 언어로 의사를 소통하는 인간에게는 말이 훨씬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말은 인생을 망칠 수도 있고 적을 만들 수도 있고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는 한편, 지혜를 줄 수도 있고 분열을 화해시킬 수도 있고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특히 현대사회에 와서는 의사소통의 수단, 속도, 범위가 놀라울 정도로 증가 확대됨에 따라 말의 긍정, 부정 양면의 효과가 엄청나게 커지고 있다. 말이든 글이든 언어로 의사 표시를 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점은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특성이다. 이 점에서 보더라도 이 독특한 능력을 인간의 장점을 더 높이는 쪽으로 잘 사용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귀한 능력이 인성후퇴의 징표로 쓰이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이다.

(1) 거짓말 멀리하기(musāvādā veramaṇī)

  이 문[佛門]에서 수행자는 거짓된 말을 피하고 이를 멀리한다. 그는 진실을 말하고 진실에 헌신하며 믿을 수 있고 신뢰할 만하며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공식 회합에 참석해서든 비공식 모임에서든 또는 사사로운 친척들의 모임에서든 공공적인 사교석상에서든 또는 조정에 나가서든 어떤 처지에서도 아는 바를 얘기해 달라거나 증언해 주도록 요청받으면 그는 대답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경우,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또 아는 경우에는 “나는 안다”라고,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면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고, 보았으면 “나는 보았다”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도, 또 어떤 종류의 이익을 위해서도 결코 고의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27)


  부처님의 이 말씀은 계율의 소극적인 측면과 적극적인 측면, 두 면을 다 드러내고 있다.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 측면이고 진실을 말하는 것은 적극적 측면이다. 이 계율을 어기는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 요소는 남을 속이려는 의도이다. 거짓을 진실이라 믿고 사실과 다르게 말하는 경우는 속이려는 의도가 없기 때문에 계율 위반이 되지 않는다. 또 모든 거짓말에는 속이려는 의도가 들어있지만, 그 속임수가 취하는 외형은 속임의 동기에 따라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탐욕이 주된 동기일 경우의 거짓말은 자기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위한 물질적 부, 지위, 존경, 칭찬 등등 무언가 일신상의 이익을 얻어내려는 거짓말로 되어버린다. 미움이 주된 동기일 경우의 거짓말은 악의적인 속임수, 다시 말해 남을 해치거나 손상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속임수의 형태를 띠게 된다. 비합리적인 거짓말, 강박관념에서 나오는 거짓말, 재미있는 과장, 농담으로 하는 거짓말 등등 미혹이 주된 동기일 경우, 그 결과는 좀 덜 유해한 형태의 거짓말이 될 수 있다.

  부처님께서 거짓말을 이토록 나쁜 것으로 말씀하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거짓말은 무엇보다도 사회적 응집력을 해친다. 사람들이 같이 어울려 살려면 상호신뢰의 분위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그런 분위기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들이 진실을 말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온갖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불신을 조장할 경우, 거짓말이 만연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사회적 결속은 해이해지고 무너져 내려 사회생활은 혼돈상태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회구성원들이 알고 있어야 한다. 개인적 면에서도 거짓말이 초래하는 결과는 이에 못지않게 파괴적이다. 또 거짓말은 새끼치기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일단 한 번 거짓말을 해버리면 그 거짓말이 탄로 나지 않도록, 그래서 자신의 신용도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앞뒤가 맞게 부득이 또 거짓말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아귀를 맞추기 위해 거짓말에 거짓말이 가지를 쳐서 뻗어나가게 된다. 그 결과 그 사람은 좀체 헤어날 수 없는 거짓말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이런 양태를 보면 거짓말은, 자아라는 주관적 환상이 빚어지는 과정, 즉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라는 착각을 둘러싼 전 과정을 축소시켜 놓은 전형적 예인 셈이다. 두 경우 모두 자신만만한 거짓말 창조자가 자신의 속임수에 휘말려들어 결국은 속임수의 희생물이 되고 만다.
  부처님께서, 계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당신의 어린 아들 라훌라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해주신 것도 아마 거짓말의 이런 측면을 생각하셨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루는 부처님께서 라훌라에게로 오셔서 물이 약간 담긴 대야를 가리키며 물으셨다.
  “라훌라야, 이 대야에 조금 남은 물이 보이느냐?”
  “예, 보입니다.”라고 라훌라는 대답했다.
  “라훌라야,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문의 정신적 성취도 이와 같이 보잘 것 없느니라.”
  이어서 부처님은 그 물을 쏟아 버리고 대야를 내려놓으며 말씀하셨다.
  “라훌라야, 물이 버려진 것이 보이느냐? 고의로 거짓말을 하는 자는 자신이 쌓은 정신적 성취를 이처럼 쏟아 내버리고 있는 것이니라.”
  부처님은 다시 물으셨다.
  “너는 이 대야가 이제 비어 있는 게 보이느냐? 거짓말하면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자의 정신적 성취도 이와 똑같이 비어 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그 대야를 뒤집어 놓으시고 말씀하셨다.
  “라훌라야, 이 대야가 뒤집어져 있는 것이 보이느냐? 이와 똑같이 고의로 거짓말하는 자는 자신의 정신적 성취를 뒤집어놓기 때문에 향상을 할 수 없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농담으로라도 고의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며 부처님은 말씀을 맺으셨다.28)


  깨달음을 추구하며 수없는 생에 걸쳐 기나긴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보살[깨닫기 이전의 부처님]이 여러 계율을 어기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 어떤 경우에도 진실을 말하겠다는 서원만은 결코 어기지 않았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결코 흘려듣고 넘길 범상한 말이 아니다. 진실에 전념하는 일은 윤리[戒]의 영역은 물론 정신적 순화[定]의 영역마저 넘어서, 우리를 지혜와 진리의 영역에까지 나아가도록 만드는 중차대한 의미를 띤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진실된 말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영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개인적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지혜가 차지하는 비중과 맞먹는다. 진실된 말과 지혜, 이 두 가지는 각각 참된 것을 지키려는 동일한 노력이 내적·외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지혜는 진실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진실(sacca)은 말로 된 명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 그 자체이다. 진실을 실현하려면 혼신을 기울여 우리 전 존재가 있는 그대로의 사물, 즉 사실[실상]과 부합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이와 의사소통을 할 때에도 진실만을 말함으로써 사실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게끔 되어야 한다. 진실된 말은 우리 내면의 세계와 현상의 참 성질 사이에 일치성을 확립시켜서, 지혜가 생겨나도록, 그래서 현상의 참 성질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해준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 진실된 말을 지켜내는 것은 윤리적 원칙의 범주를 훨씬 넘어, 우리가 환상이 아닌 실상에, 욕구가 빚어낸 공상이 아니라 지혜로 파악한 진실에 발을 딛고 서게 되는 일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2) 말전주 멀리하기(pisuṇāya vācāya veramaṇī)

  이 문에서 수행자는 말전주를 피하고 이를 떠난다. 여기서 들은 말을 저리 가서 옮기거나 저기서 들은 말을 이리로 옮김으로써 불화를 조성하지 않는다. 서로 틀어진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사람들의 화합을 북돋운다. 화합은 그를 기껍게 해주고, 그는 화합을 기뻐하고 즐긴다. 이와 같이 그가 말로써 널리 퍼뜨리는 것은 바로 화합이다.29)


  말전주란 의도적으로 적개심과 분열을 조장하는 말, 개인이나 집단을 남들과 소원해지도록 만드는 말을 일컫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동기는 보통 진심(瞋心)인데, 경쟁자의 성공이나 덕성을 미워하는 용심, 남을 헐뜯고 모욕을 가하려는 의도 등이 그 뒤에 숨어 있다. 여기에 다른 동기가 끼어드는 수도 있다. 남들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잔인한 의도, 환심을 사려는 비열한 욕구, 친구들의 틀어진 모습을 보는 것을 재미로 삼는 뒤틀린 마음씨 등이다.

  말전주야말로 가장 심각한 도덕적 일탈행위이다. 그 뿌리가 되는 증오만 해도 이미 충분히 무거운 불선업이다. 그런데 이 행동은 미리 생각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에 사전계획이 갖는 무게까지 첨가되어 그만큼 부정적인 힘은 더 강해진다. 더구나 이렇게 이간질하는 말의 내용이 거짓일 경우, 거짓말과 말전주 이 두 가지 잘못이 결합해서 매우 강력한 불선업을 낳는다. 경전에는 무고한 사람을 중상한 탓으로 바로 악도에 떨어지게 되는 사례들이 여러 군데 실려 있다.

  말전주에 반대되는 말은 부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친목과 화합을 증진시키는 말이다. 이런 말은 자애와 연민, 즉 자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다. 따라서 이런 말은 남들의 신뢰와 애정을 사게 된다. 자비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속마음을 털어놓더라도 그것을 악용해서 자기를 해코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기 때문이다. 친목과 화합을 증진시키는 말은 금생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익이 있을 뿐만 아니라, 다음 생에서도 그 선업의 결과로 남들의 말전주에 놀아나지 않는 충실한 벗들을 얻게 된다는 이점30)도 있다.


(3) 거친 말 멀리하기(pharusāya vācāya veramaṇī)

  이 문에서 수행자는 거친 말을 피하고 이를 떠난다. 그는 점잖고 듣는 이를 편하게 하며 애정이 깃든 말, 가슴에 가 닿을만하며,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많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는 말을 한다.31)


  거친 말은 화가 나서 내뱉는 말로서 듣는 사람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는데 그 중 세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는 ‘독설’이다. 즉, 화가 나서 신랄한 말을 하거나 욕하거나 꾸짖는 형태의 말이다. 둘째는 ‘모욕’이다. 상대방에게 인신공격성 어투로 자존심에 상처를 줌으로써 해를 입히는 말이다. 셋째는 ‘빈정거림’이다. 즉,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 하지만 그 억양이나 말투로 보아 빈정대는 의도가 분명히 드러남으로써 남을 괴롭히는 형태의 말이다.

  거친 말의 주된 뿌리는 화냄의 형태로 표출되는 진심(瞋心)이다. 거친 말은 깊은 생각 없이 충동적으로 저질러지기 때문에 비방의 경우보다 죄가 덜 무겁고 일반적으로 그 업보도 덜하다. 그러나 거친 말은 남뿐 아니라 나에게도, 지금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불선한 행위이기에 자제해야만 한다. 참는 것이 최선의 대응책이다. 남들의 비난과 비판을 참고 듣기, 그들의 모자람을 이해하기, 나와 다른 견해를 존중하기, 앙갚음하겠다는 생각 없이 욕설을 참아내기 등의 마음가짐을 익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참아내라고 하셨다.

  비구들이여, 강도나 살인자가 비록 팔과 다리나 뼈마디를 톱으로 자른다 할지라도 그 때문에 화를 내고 만다면 그대들은 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지 않는 것이 된다. 그대들은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흐트러지지 않고 여일할 것이다. 마음을 사랑으로 가득 채운 채, 어떤 숨어있는 원한도 없는 채로, 미움과 증오에서 벗어난 넓고 깊고 한량없는 사랑으로 넘쳐나서 저 사람을 감화시키고 말리라.”32)



(4) 쓸데없는 말 멀리하기(samphappalāpā veramaṇī)

  이 문에서 수행자는 쓸데없는 말을 피하고 이를 떠난다. 그는 때에 맞게 말하고, 사실에 부합되게 말하고, 유용한 말을 하고, 법과 계율을 말한다. 적절한 때에, 절도를 잃는 일 없이 온유하면서도 사리에 꼭 맞게 하는 그의 말은 보석과도 같다.33)


  쓸데없는 말은 목적도 깊이도 없는 무의미한 말이다. 이런 말은 아무 가치도 없는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자신과 남들의 마음에 번뇌만 일으킨다. 부처님은 쓸데없는 말을 억제해야 하며, 말은 가능한 한 아주 중요한 일에만 한정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방금 인용한 문구에서처럼, 수행승의 경우 말을 가려서 해야 하고 주로 법에 관한 말만 해야 한다. 재가자는 출가자와는 다를 수밖에 없어 친구나 가족끼리의 정 깊은 사사로운 이야기, 아는 사이끼리의 예의바른 이야기, 생업과 관련된 이야기 등을 해야 할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대화를 할 경우에도, 무언가 달콤하고 맛난 먹을거리를 갈구하며 끊임없이 헤매고 있는 들뜬 마음에게 오염될 기회만 실컷 제공하고 마는 결과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잘 챙기고 있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쓸데없는 말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은 쓸데없는 말을 스스로 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부처님과 옛 주석가들의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이 시대의 특이한 발전양상을 보고 있으면 이 가르침에 또 하나의 해석을 추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즉, 텔레비전, 라디오, 신문, 속된 잡지, 영화 등 현대기술의 산물인 새로운 통신매체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저 쓸데없는 수다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지 말라는 해석이다.34) 이 놀라운 매체들이 쓸모없는 정보와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오락거리를 퍼부어대는 동안 사람의 마음은 갈수록 수동적이 되고, 공허하고 황량해진다. 우리가 순진하게도 ‘진보’의 산물로 받아들이는 이 모든 문명의 이기들은 우리의 심미적, 정신적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어 수행이라는 한층 더 높은 삶이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하게 만든다. 해탈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열성적 구도자는 어떤 언어적 환경에 귀기울여야 할지를 판별해야 한다. 요컨대 이런 종류의 오락물이나 불필요한 정보 역시 쓸데없는 말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를 피하려는 노력은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바른 행위[定業 sammā kammanta]


  바른 행위는 불선한 행위가 몸을 그 자연스러운 표현수단으로 삼아 일어나는 것을 삼간다는 의미이다. 팔정도의 ‘바른 행위’라는 항목의 핵심은 물론 ‘자제’라는 심적 요소이다. 그러나 이 자제가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행위에 적용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바른 행위’라 부르는 것이다. 부처님은 바른 행위를 구성하는 세 가지 행위, 즉 살생 멀리하기, 주어지지 않은 것 취하기를 멀리하기, 부정한 성행위 멀리하기를 말씀하셨다. 이 세 가지를 순서대로 간략하게 살펴보자.

(1) 살생 멀리하기(pāṇātipātā veramaṇī)

  이 문에서 수행자는 살생을 피하고 이를 멀리한다. 몽둥이도 칼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이 도덕에서 벗어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남들에 대해서는 동정심으로 가득 차서 모든 유정들이 편안하기를 염원한다.35)


  ‘살생을 멀리한다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하지 않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그 적용 범위는 훨씬 더 넓다. 이 계율은 그 어떤 유정물(有情物)도 살상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유정물(pāṇī, satta)’이란 마음 또는 의식을 지닌 생물로서 실제로는 사람과 동물, 그리고 곤충을 의미한다. 식물은 어느 정도의 감수성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유정물 여부를 규정짓는 기준인, 의식을 제대로 갖춘다는 기본 속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생명을 해치는 일’은 의도적인 살상, 즉 의식을 지니고 있는 존재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파괴하는 행위다. 살생을 멀리한다는 원칙은 모든 존재는 살고 싶어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에 근거하고 있다. 이 계율의 위반 여부를 결정하는 핵심적 요인은,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일으키는 살생 의욕이다. 자살도 일반적으로 불살생 계율을 어기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생명을 앗으려는 의도가 없는 우발적 살상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계율은 일차적인 행위와 이차적인 행위 모두에 적용된다. 일차적인 행위는 실제로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고, 이차적인 행위는 죽이지는 않더라도 다른 존재를 의도적으로 해치고 괴롭히는 행위다.

  해치지 말라는 것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은 매우 간결하고 직설적인 데 비해서 후대 주석가들은 이 계율을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태국의 한 박학한 승왕(saṅgharāja)은 이전의 방대한 자료를 매우 꼼꼼히 논문으로 정리했으며36)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살생은 도덕적 무게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나눌 수 있고 거기에 따르는 결과로 죄값이 제각기 달라진다. 도덕적 무게를 결정하는 세 가지 주요 변수는 대상, 동기, 그리고 살생에 쏟은 노력이다. 대상과 관련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과 동물을 죽이는 것은 그 심각성이 다른데 사람을 죽이는 것이 더 무거운 악업을 짓는 것이다. 사람이 동물에 비해 훨씬 더 발달된 도덕적 의식과 더 큰 정신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살해당한 사람의 자질에 따라서, 또 살해자와의 관계에 따라서 업의 무게는 달라진다. 따라서 부모나 스승과 같이 은혜를 베푼 사람이나 정신적으로 수승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특별히 무거운 업을 짓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살생의 동기 역시 도덕적 무게에 영향을 미친다. 살생행위는 욕심, 증오, 미망 등에 의해서 추동된다. 이 셋 중에서 미움 때문에 죽이는 것이 가장 엄중한 것이 되며, 사전계획의 정도에 따라 그 무게도 비례해서 증대된다. 마지막으로 그 행위에 기울인 노력의 강도 역시 중요하다. 어느 정도로 그 마음의 때가 강한 힘과 강제력을 가졌느냐에 정비례하여 업의 불선한 정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살생을 피하기 위한 적극적 대처방법은 부처님이 지적하셨듯이 다른 존재에 대해 자비심을 키우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는 생명을 빼앗는 행위를 피할 뿐 아니라 모든 존재의 안녕을 염려하는 연민심으로 충만한 삶을 산다. 해치지 않도록 노력하고 남들의 안녕을 위해 마음 쓰는 것은 이미 팔정도의 두 번째 항목인 바른 의도[正思]를 선의와 무해의 형태로 실천하고 있는 것이 된다.


(2) 주어지지 않은 것 취하기를 멀리하기(adinnādānā veramaṇī)

  이 문에서 수행자는 정당하게 얻은 것이 아닌 것은 가지기를 피하고 이를 멀리한다. 마을이나 숲 속에 있는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훔치려는 의도로 가져가지 않는다.37)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정당한 소유물을 훔치려는 의도에서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소유권이 주장되지 않은 돌이나 나무, 심지어 땅에서 캐낸 보석까지도 소유주가 없는 경우에는 비록 주어지지 않은 것이라 해도 이를 취하는 것이 계율을 어기는 것은 아니다. 남에게 당연히 주어야 할 것인데도 이를 주지 않고 버티는 것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계율을 어긴 것으로 간주된다.

  주석서들은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는’ 행위가 범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를 언급하고 있다. 그 중 가장 흔한 것을 예로 들자면 다음과 같다.
  1) 절도 : 남에게 속한 물건을 가택 침입, 소매치기 등과 같은 방법으로 주인 몰래 취하는 것.
  2) 강도 : 남에게 속한 물건을 강제로 또는 협박을 가해서 빼앗는 것.
  3) 날치기 : 남에게 속한 물건을 반항할 틈 없이 갑자기 낚아채는 것.
  4) 사취(詐取) :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자기 것이라 거짓으로 주장하여 취하는 것.
  5) 속임수 : 엉터리 저울이나 자로 고객을 속이는 것.38)

  이런 행위는 훔친 물건의 가치, 피해자의 자질, 도둑의 심리상태 등 세 가지에 의해 도덕적 무게가 결정된다. 첫째로, 도덕적 무게는 훔친 물건의 가치에 비례한다. 둘째로, 도덕적 무게는 피해자의 도덕적 품격에 따라 달라진다. 셋째로, 도덕적 무게는 가해자의 동기에 따라 달라진다. 도둑행위는 탐심이나 미움이 그 동기가 될 수 있는데 대체로 탐심이 가장 흔한 동기이다. 미움이 그 동기가 되는 것은 물건이 탐이 나서라기보다는 소유주를 해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할 경우다. 이 두 가지 중, 미움 때문에 도둑질하는 것이 단순한 탐심에 의한 것보다 더 무거운 악업을 짓는 것이 된다.

  주어지지 않은 것을 취하지 않기 위한 적극적 대처방법은 ‘정직하기’로서, 여기에는 타인의 소유권과 향유권을 존중해주는 것이 포함된다. 여기에 관련되는 또 다른 덕목은 지족(知足)으로, 비양심적인 방법으로 부를 증식시키고자 하지 않고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다. 훔치고자 하는 마음에 대처하는 가장 빼어난 덕목은 보시행인 바, 자기의 부와 소유물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다.

(3) 부정한 성행위 멀리하기(kāmesu micchācārā veramaṇī)

  이 문에서 수행자는 성적 불륜행위를 피하고 이를 멀리한다. 부모 형제, 친척들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들과 성관계를 갖지 않고 결혼한 사람, 여자 죄수, 그리고 남과 약혼한 여자들과도 관계를 갖지 않는다.39)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계율이 지향하는 목적은 결혼관계를 외부적 충격으로부터 보호하고 결혼 당사자들 간의 신의와 정절을 증진시키는 데 있다. 정신적 향상의 관점에서 볼 때, 이 계율은 성적 욕구가 커지는 성향에 제동을 걸고, 이욕(離慾)의 방향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가 마침내 출가수행자가 독신생활[梵行]을 준수하는 데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나 재가불자의 경우 이 계율은 부적절한 대상과의 성적 관계를 금하는 정도에서 그친다. 완전한 성관계를 갖는 경우 이 계율을 전적으로 어기는 것이며, 완전한 성관계에 이르지 않는 갖가지 성적 행위도 어느 정도는 이 계율을 어기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계율에서는 부적절한 대상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주로 제기될 수 있다. 부처님 말씀은 남자에게 부적절한 대상을 규정하고 있지만 이후 논서들에서는 이 문제를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의 입장에서도 자세히 다루고 있다.40)

  남자에게 부적절한 상대는 다음 세 부류의 여자들이다.

1.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한 여자 : 여기에는 다른 남자와 이미 결혼한 여자 이외에 한 남자의 합법적인 처가 아니면서도 그와 함께 살거나 그의 보호를 받고 있거나 기타 그의 짝으로 간주되어 일반적으로 그와 같이 사는 사람으로 인정되고 있는 여자도 포함한다. 이런 여자들은 모두 그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게는 부적절한 대상이다. 이 범주에는 다른 남자와 약혼한 여자도 포함된다. 그러나 과부나 이혼녀는 별도의 사유가 없는 한 부적절한 관계로 간주되지 않는다.
2. 아직 보호받고 있는 여자 : 부모, 친척, 기타 합법적 보호자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녀나 여인들을 말한다. 이 규정은 보호자의 뜻을 어기고 애인과 함께 도망간 여자나 비밀결혼을 한 여자는 제외한다. (이 조항은 보호자의 허락 없는 가출이나 비밀결혼을 막기 위한 것이다.)
3. 관습에 의해 금지된 여자 : 사회적 전통이 짝으로 금하는 근친, 독신을 맹세한 비구니나 그 외의 여자, 그리고 국법에 의해 상대자로 삼지 못하도록 금하는 여자들이 포함된다.


  여자에게는 다음 두 부류의 남자들이 부적절한 상대이다.

1. 결혼한 여자에게는 남편이 아닌 모든 남자들은 부적절한 상대이다. 따라서 결혼한 여자가 남편에게 한 정절 서약을 깨는 것은 곧 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나 과부나 이혼한 여자는 다시 결혼할 수 있다.
2. 가까운 친척이나 독신을 맹세한 남자 등, 관습이 금하는 남자는 어떤 여자에게도 부적절한 상대다.


  이 외에 폭력적이거나 강압적으로 이루어지는 성적 결합은 계율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위반행위는 가해자에게만 해당되고 강제로 당한 쪽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성적 불륜이 해서는 안 될 사항이라면 재가자가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은 결혼의 정절을 지키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성실해야 하고 헌신적이어야 하며 부부관계로 만족해야 하고 다른 상대를 넘봄으로써 결혼관계의 파탄을 초래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성적 관계를 반드시 결혼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적 관습 여하에 따라 융통성 있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 있다. 이미 말한 대로 이 규범의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성적 관계를 예방하려는 것이다. 독립적 개체로서의 성인 남녀는 비록 결혼하지 않았더라도 자유로운 합의에 의해 성적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다.

  구족계를 받은 비구와 비구니, 사미와 사미니, 그리고 하루 밤 하루 낮 동안 팔계를 받아 지키는 재가남녀는 금욕생활을 지켜야 한다. 이들은 성적 불륜을 피해야 함은 물론이고 적어도 그들이 서원을 세운 기간 동안에는 성과 관련된 일체 행위는 금해야 한다. 가장 높은 경지의 성스러운 생활은 생각, 말, 행동에 있어서 완전한 청정성을 지향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성적 욕구를 잠재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바른 생계[正命 sammā ājīva]


  바른 생계라는 항목은 우리가 생계를 올바른 방법으로 꾸려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부처님은 재가불자들이 부를 축적할 때 다음과 같은 기준들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재물은 반드시 합법적으로 획득해야 하며 불법적으로 획득해서는 안 되고, 평화적으로 벌어야 하며 강제나 폭력을 써서는 안 되고, 정직하게 벌어야 하며 사기나 속임수로 얻어서는 안 되고, 어떤 경우에도 남에게 해나 고통을 끼치지 않는 방법으로만 획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해를 입히는 다음 다섯 가지 생계수단을 구체적으로 들고 이를 피하라고 말씀하신다.41)

1) 무기 거래

2) 생명체의 거래(도살을 위해 동물을 사육하는 것. 노예 매매, 매춘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3) 육류 생산 및 도살업

4) 독약 거래

5) 술이나 마약 거래     (《증지부》5법집 177경)


  또 부정직하게 부를 획득하는, 사기, 배신, 점술, 속임수, 고리대금업 등을 잘못된 생계수단으로 열거하셨다. (《중부》117경)
  바른 말과 바른 행위를 어기게 만드는 직업이라면 무엇이건 다 잘못된 생계수단임이 분명하다. 술·마약의 거래 같은 직업은 그 자체가 이런 계율을 어기게 만들지는 않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므로 역시 나쁜 것이 된다.

  앞서 인용한 태국 승왕의 논문은 바른 생계를 논하면서 편의상 행위와 관련하여 올바른 것, 사람과 관련하여 올바른 것, 그리고 대상물과 관련하여 올바른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42) ‘행위와 관련하여 올바른 것’은 일꾼들이 근무시간을 허송하거나, 근무시간을 늘여서 보고하거나, 회사의 물건들을 제 호주머니에 넣는 따위의 짓을 하지 않고 부지런히 양심적으로 자기가 맡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과 관련하여 올바른 것’이라 함은 고용주, 고용인, 동료, 고객들에게 응분의 존경과 배려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고용주가 고용인들에게 일을 맡길 때 그 사람의 역량에 맞게 맡겨야 하고, 적절한 임금을 지불해야 하고, 승진을 해야 할 때 승진시켜주어야 하고, 때때로 휴가와 상여금을 주어야 한다. 동료끼리는 서로 경쟁하는 대신 협동해야 하며, 상인들은 고객과의 거래에서 공정해야 한다. ‘대상물에 관련하여 올바른 것’이란 사업상 거래나 판매를 할 때 거래 품목을 정직하게 제공해야 함을 의미한다. 허위광고, 양이나 질에 대한 거짓표시, 부정직한 술책 등을 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



 

V 바른 노력[正精進 sammā vāyāma]


  앞의 세 항목, 즉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로 청정한 행위가 확립되면 이는 도의 다음 단계, 즉 집중의 부분[定蘊 samādhikkhandha]으로 나아가는 기반이 된다. 도덕적 자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적인 정신훈련에 들어가는 수행의 이 단계는 바른 노력, 바른 마음챙김, 바른 집중의 세 항목으로 이루어진다. 이 단계를 집중의 부분[定蘊]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단계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지속적 집중력이기 때문이고, 집중 그 자체는 통찰지를 위한 토대로 꼭 필요하기 때문이며, 다시 그 통찰지는 해탈을 이루는 데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로부터 나오는 꿰뚫어 보는 능력은 먼저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모아져야만 비로소 갖추어질 수 있다. 바른 집중은 적절한 대상에 부동(不動)의 초점을 맞추어 마음을 통일함으로써 지혜를 이루는 데 필요불가결한 적정(寂靜)을 갖추도록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바른 집중의 항목은 바른 노력과 바른 마음챙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바른 노력은 이 과업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해 주고, 바른 마음챙김은 주시할 때마다 확고한 초점들을 제공한다.

  주석가들은 집중 부분[定蘊]의 이 세 항목들이 어떻게 서로 돕고 있는지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세 소년이 공원에 놀러 간다. 공원을 거닐다가 그들은 어떤 나무 꼭대기에 핀 꽃을 발견하고 그 꽃을 따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그 꽃은 그 중 가장 키가 큰 소년도 딸 수 없는 높이에 있다. 그때 한 친구가 몸을 굽히며 자기 등에 올라서라고 한다. 키 큰 소년이 올라서지만 등에서 떨어질까 두려워 꽃을 향해 손을 마음껏 뻗지 못한다. 이에 세 번째 소년이 자기 어깨에 기대라고 한다. 첫 번째 소년은 두 번째 소년의 등에 올라선 채 세 번째 소년의 어깨에 기대고는 손을 뻗어 마침내 꽃을 따 모은다.43)

  이 비유에서 꽃을 따는 키 큰 소년은 마음을 통일시키는 기능을 하는 집중을 나타낸다. 그러나 마음을 집중하고 통일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하다. 등을 대준 소년의 경우처럼 바른 노력이 제공하는 에너지가 그 역할을 한다. 집중은 또 어깨를 대준 소년의 경우처럼 마음챙김이 제공하는 안정시켜주는 알아차림을 필요로 한다. 바른 집중이 이런 도움을 받게 되면, 마침내 바른 노력에 의해 힘이 강화되고 바른 마음챙김에 의해 균형이 잡혀서 흐트러진 생각의 가닥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마음을 확고하게 목표에다 고정시킬 수 있게 된다.

  바른 노력의 이면을 이루는 심적 요소인 에너지(viriya)는 건전한 형태로도 불건전한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다. 같은 요소이지만 한편으로는 욕망, 공격, 폭력, 야심 등에, 다른 한편으로는 보시, 지계, 자비, 집중, 이해에 연료를 공급한다. 바른 노력에 포함되는 정근(正勤 padhāna)은 건전한 형태의 에너지이지만 좀 더 특수한 것으로서, 곧바로 고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하는 건전한 의식상태에 들어있는 정진력이다. 여기서 ‘곧바로 고로부터의 해탈을 지향한다’는 수식구는 각별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유익한 에너지가 도에 기여하려면 반드시 바른 이해와 바른 의도의 안내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도의 여타 항목들과 유기적으로 작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건전한 마음상태의 에너지가 대개 그렇듯이, 생사윤회 속에서 공덕 쌓기에 불과할 뿐,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이루어내지는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부지런함, 분발, 해이해짐이 없는 불굴의 인내, 이 세 가지 노력의 필요성을 거듭거듭 역설하셨다. 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해탈은 각자 스스로 이루어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해탈에 이르는 길을 열어 보이는 것으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셨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일인데 이 일에는 정진력이 필요하다. 이 정진력은 마음을 계발하는 데 소요되며 마음의 계발이야말로 전체 도의 핵심을 이룬다. 출발점은 미혹된 괴롭고 오염된 마음이고, 목표점은 청정하고 지혜로 밝아진 해탈한 마음이다. 오염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바꾸는 것은 오로지 꾸준한 노력에 의해서이다. 자기 계발이라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고, 또 남이 대신해 줄 수 있는 일도 아니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부처님 당신과 그리고 큰 공부를 해낸 그분의 제자들이야말로 이 과업이 우리가 이루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산 증거이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은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든 같은 목표 지점에 반드시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노력 없이는 안 된다. “나는 대장부다운 꿋꿋함과 활력과 분투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을 다 이루어내기 전에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44) 이런 결심으로 실천 공부를 지속하지 않는다면 목표에 도달할 수가 없다.

  심적 과정의 성질상 바른 노력[正精進]은 다음 네 가지 ‘훌륭한 노력[四正勤]’으로 분류할 수 있다.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노력,
(2) 이미 일어난 불선한 상태를 버리려는 노력,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상태를 일으키려는 노력,
(4) 이미 일어난 선한 상태를 유지하고 완전하게 만들려는 노력.

  불선한 상태(akusalā dhammā)란 행동으로 표출되거나 아니면 마음속에 갇힌 채로 있는 번뇌들, 그리고 거기서 비롯된 생각과 감정, 의도들이다. 선한 상태(kusalā dhammā)란 번뇌로 오염되지 않은 마음상태들, 특히 해탈에 도움이 되는 마음상태들이다. 이 두 가지 마음상태에 대해서는 각각 두 가지씩 할 일이 있다. 불선한 상태의 경우, 아직 잠재해 있는 번뇌들이 표출되지 않도록 막고, 그리고 이미 활동을 벌이고 있는 번뇌는 쫓아내는 일이다. 선한 상태의 경우, 아직 계발되지 못한 해탈의 요소들을 일단 생겨나도록 하고, 그 다음에는 충분히 성숙한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그 요소들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가는 일이다. 이제 우리는 바른 노력으로 분류한 이 네 가지 부분이 가장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명상을 통한 마음의 계발’이라는 텃밭을 효과적으로 가꾸어 나가는 데에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면서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불선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막기

  이 문에서 제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하고 불선한 상태가 일어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지를 일으킨다. 그래서 그는 노력하고 힘쓰고 마음을 분발하고 진력한다.45)

  바른 노력[正精進]의 첫 번째 면은 번뇌로 때 묻은 마음상태, 즉 불선한 상태를 극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집중을 방해하는 측면에서 살필 때는 이 번뇌들을 ‘다섯 가지 장애[五蓋 pañcanīvaraṇā]’46)라는 한 묶음으로 거론하는 것이 보통이다. 다섯 가지 장애란 감각적 욕구, 악의, 둔감과 졸림[昏沈], 들뜸과 걱정[掉悔], 의심이다.47) 이들은 해탈로 가는 길을 가로막기 때문에 ‘장애’라고 부른다. 이 장애가 자라나면 마음을 덮어서 향상에 필요불가결한 고요함[止 samatha]과 통찰[觀 vipassanā]이라는 두 수단을 일어날 수 없도록 막아버린다.
  탐욕과 진에라는 불선의 뿌리들을 각기 대표하는 처음의 두 장애인 감각적 욕구와 악의는 그 다섯 중에서도 특히 강력해서 선정의 발전에 가장 강력한 장벽 노릇을 한다. 나머지 세 가지 장애는 앞의 것에 비해 독성은 덜하지만 역시 방해가 되는 것들로 치암의 곁가지들이며, 흔히 마음의 다른 때[垢]와 결합된 상태로 존재한다.

  ‘감각적 욕구’는 두 길로 해석된다. 좁은 의미에서, 마음에 드는 볼거리, 소리, 냄새, 맛, 접촉 등 ‘다섯 가닥의 감관적 쾌락에 대한 욕망’으로 이해되기도 하고, 보다 넓은 의미에서 감관적 쾌락, 부, 권력, 지위, 명예 등 애착이 붙는 모든 것, 즉 모든 형태의 갈애를 포괄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두 번째 장애인 ‘악의’는 혐오감과 동의어이다. 악의는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 또는 대상물이나 상황을 막론하고 이들을 향한 불만, 미움, 노여움, 원망, 반감 등 모든 어두운 측면을 포함한다.
  세 번째 장애인 ‘둔감과 졸림’은 정신적 불활발성이라는 공통된 특성에 의해 연결된 두 요소의 혼성체로서 그 중 하나는 마음의 굼뜸으로 나타나는 둔감(thīna)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 까라짐, 마음의 무거움, 지나친 졸음 등에서 볼 수 있는 졸림[沈 middha]이다.
  이와 정반대가 네 번째 장애인 ‘들뜸과 걱정’이다. 이는 불안정성을 공통적 특성으로 하는 두 요소의 혼성체이다. 들뜸(uddhacca)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빠르고 격하게 오가는 교란되고 흥분된 마음이고, 걱정(kukkucca)은 과거의 실수에 대한 후회와 이런 실수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에 대해 불안해하는 마음이다.
  다섯 번째 장애인 ‘의심’은 고질적인 우유부단함, 즉 과단성의 결여를 의미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권장하신,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비판적 지성과는 전혀 다른 의심하는 태도, 다시 말해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 부처님의 길에 대하여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해서 좀체 마음공부의 길로 뛰어들지 못하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을 뜻한다.

  장애와 관련해서 해야 할 첫 번째 노력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장애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예방하는 일이다. 이는 제어 또는 방호하려는 노력(saṁvarappadhāna)이라고 한다. 장애를 제어하려는 노력은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나 수행을 발전시켜가는 과정 내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장애가 일어나면 주의를 분산시키고 알아차림의 눈을 흐리게 해서 고요함과 투명함을 해치기 때문이다. 장애는 마음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 생긴다. 장애는 ‘마음·연속체’ 깊은 곳에 항상 잠재해 있으면서 표면으로 드러날 기회를 노리고 있는 특정한 성향이 활성화되어 표출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애가 활성화되도록 촉발시키는 것은 감각적 경험이 제공하는 정보이다. 몸이라는 유기체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어서 그 각 기관에 해당하는 특정 자료, 즉 눈은 형상을, 귀는 소리를, 코는 냄새를, 혀는 맛을, 몸은 접촉을 받아들인다. 감각 대상들은 계속해서 감각기관들에 와서 부딪치는데, 이때 감각기관들은 받은 정보를 마음으로 중계한다. 그 정보는 마음에서 처리되고 평가되어 적절한 반응을 일으킨다. 한편 마음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인 감각인상들을 초장에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다르게 처리한다. 마음이, 입력되는 자료를 ‘지혜롭지 못한 고려(ayoniso manasikāra)’로 부주의하게 맞이하게 되면 그 감각 대상은 불선법을 부추기게 된다. 감각 대상이 직접적 충격으로 작용하여 반응을 즉각 촉발할 수도 있고, 간접적으로 기억 흔적으로 저장되었다가 후에 오염된 생각, 이미지, 환상 등등의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한다. 통례로 미루어 보건대, 대상은 그에 상응하는 번뇌를 일으킨다. 마음을 끄는 대상은 욕망을 일으키며, 마뜩찮은 대상은 악의를 일으키고, 이도저도 아닌 대상은 치암(癡暗)과 연계된 번뇌를 일으킨다.

  감관에 들어오는 감각적 입력에 대해 제어되지 않은 반응을 할 경우 잠재해 있는 번뇌를 자극하여 활성화시키기 때문에 이들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막으려면 두말할 것도 없이 감관을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장애를 제어하는 수련방법으로 ‘감각기능 방호[根律儀 indriya-saṁvara]’라 불리는 공부를 말씀하셨다.

  수행자가 눈으로 형상을, 귀로 소리를, 코로 냄새를, 혀로 맛을, 몸으로 촉감을, 마음으로 대상을 지각할 때, 그는 바깥대상의 전체상(全體相)이나 세부상(細部相)을 붙잡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감각기능을 미처 단속하지 못해 일어나게 될 불선한 법, 탐애와 근심이 생겨날 연(緣)을 물리치기 위해 진력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감각기능을 단속하고 억제한다.48)


  그러나 감각기능을 방호한다고 해서 감각기능을 부정하거나 감각세계에서 완전히 물러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뿐더러, 설사 가능하다 해도 진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게 된다. 왜냐하면 번뇌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 감각기관이나 감각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각기능 통어(統御)의 열쇠는 “전체상이나 세부상을 붙잡지 않는다”는 말에 담겨 있다. ‘전체상(相 nimitta)’이란 대상의 대체적인 겉모습인데, 그 중에서도 이 겉모습을 포착하는 것이 때 묻은 생각들을 불러일으키는 바탕으로 작용하는 경우에만 해당된다. ‘세부상(anubyañjana)’은 대상의 잘 드러나지 않는 특징이다. 만약 감각기능을 통어하지 않고 내버려두면 마음은 감각의 영역들[六外處]을 거침없이 쏘다니게 된다. 먼저 ‘전체상’을 붙들 것이고 그러면 번뇌가 발동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세부상’들을 정밀히 탐색해냄으로써 그들 번뇌가 늘어나 무성해지게끔 만든다.

  감관을 제어하기 위해서는, 감관이 감각 영역들과 만날 때[觸] 마음챙김과 분명한 이해[正念·正知]가 개입될 필요가 있다. 감각식(感覺識)은 각기 특별한 임무를 띠고 있는 순간적 인지 활동들의 연속 형태로 순차적으로 일어난다.
  이 순차적 연속의 시발 단계들은 자동적으로 작동한다. 처음에 마음이 대상 쪽을 향한다. 그리고는 그것을 포착한다. 그 다음에는 지각이 들어서는 것을 허용해서 대상을 검토하고 그 대상을 식별한다. 이 식별에 곧바로 이어 한 빈틈이 열리고 그 안에서 대상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가 이루어져서 어떤 반응을 할 것인지 선택하게 된다.
  이때 마음챙김을 확고히 하고 있지 못하면 표출될 기회를 찾아 부풀어 있던 여러 잠재적 번뇌들이 밀고 나와서 그릇된 생각을 유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대상의 전체상을 붙잡게 될 것이고, 다시 그 대상의 세부를 탐색할 것이고, 마침내 번뇌에 기회를 내주게 될 것이다. 탐욕 때문에 우리는 마음에 드는 대상에 정신이 팔리게 될 것이고, 싫은 마음 때문에 마뜩찮은 대상은 뿌리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챙김을 감각이 이루어지는[觸] 현장에 들이댈 경우 인지과정이 잠복상태에 있는 마음의 때를 자극하여 활성화시키는 단계로 진전되기 전에 그 싹을 미리 잘라버릴 수 있다. 마음챙김은 마음을 감각의 수준에서 동결시켜버림으로써 다섯 장애[五蓋]를 저지한다. 마음챙김은 특정 대상에 알아차림을 쏟아 부음으로써 마음이 입력된 자료를 탐·진·치에서 생기는 관념들로 윤색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이렇게 하면 이 명료한 알아차림을 길잡이로 삼아서 마음은 옆길로 흐르지 않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올바로 이해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2) 이미 일어난 불선한 상태를 버리기

  이 문에서 제자는 이미 일어난 악하고 불선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의지를 일으킨다. 그래서 그는 노력하고 힘쓰고 마음을 분발하고 진력한다.49)


  감각기능을 통어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번뇌는 여전히 떠오를 것이다. 번뇌는 ‘마음·연속체’의 밑바닥에서, 과거 축적물의 매립층에서 부풀어 올라 불선한 생각과 감정으로 응고되어 버릴 수도 있다.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새로운 종류의 노력이 필요하게 된다. 이 노력은 이미 일어난 불선한 상태를 지워버리려는 노력으로, 줄여서 ‘버리려는 노력(pahānappadhāna)’이라 한다.

  그는 이미 일어난 감각적 욕망, 악의, 또는 해악심의 생각들, 또는 그 외의 어떤 나쁘고 불선한 법들도 간직하지 않는다. 그는 그런 생각들을 버리고, 그런 생각들을 추방하고, 그런 생각들을 파괴하고, 그런 생각들을 사라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다.50)

  마치, 유능한 의사가 갖가지 병에 알맞게 여러 약을 쓰듯 부처님은 갖가지 장애에 대해 여러 가지 대응수단을 마련해 두셨는데 그 중 어떤 것은 두루 쓰이고 어떤 것은 특정 장애에 특히 잘 듣는다. 부처님은 산만한 생각을 쫓아내는 다섯 가지 기법을 설명하셨다.51) 그 첫 번째가 번뇌로 더럽혀진 생각을 그와 정반대되는 건전한 생각으로 몰아내는 방식인데 이는 마치 목수가 썩은 나무못을 뽑아내기 위해 새 못을 그 위에 박는 것과 유사하다. 구체적으로 이 기법은 다섯 가지 장애 각각에 대한 특수처방으로 각 장애를 약화시켜 무기력하게 만드는 특별히 강구된 일련의 명상법으로 되어 있다. 이 기법은 어떤 장애가 솟아올라 명상주제에 대한 집중을 중단시킬 때마다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혹은 어떤 장애가 반복해서 자신의 수행을 방해할 때 그 장애에 대처하기 위한 명상 주제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장애가 맹위를 떨칠 때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임시로 채택한 교정수단도 그것이 나름의 효과를 발휘하려면 최소한의 기간만이라도 그 방편주제를 근본주제로 삼아서 어느 정도 친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욕구’에 대처하는 요법으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무상에 대한 명상이다. 집착대상을 고정불변한 것이라 믿는 맹목적 가정이 바로 집착을 떠받치고 있는 지주인데, 이 명상은 그와 같은 가정을 떨어낸다. 관능적 욕망이라는 특정형태의 욕구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다룰 몸의 비매력적 측면에 대한 명상[不淨觀]이다.
  ‘악의’에 대한 적절한 치유법은 자애(mettā)에 대한 명상[慈悲觀]이다. 모든 존재의 안녕과 행복을 바라는 애타적 기원을 규칙적으로 방사함으로써 미움과 노여움의 모든 흔적을 씻어낼 수 있는 명상법이다.
  ‘둔감과 졸림’을 쫓기 위해서는 힘을 북돋우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 몇 가지 방법이 제시되고 있다. 밝은 빛 덩어리를 심상(心像)으로 떠올리거나, 일어서서 한동안 활기차게 행선(行禪)을 하거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거나, 아니면 단순히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는 것 등이다.
  ‘들뜸과 걱정’을 가장 효과적으로 없앨 수 있는 방법은 마음을 고요히 할 수 있는 어떤 간단한 대상에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들고나는 호흡의 흐름에 주의를 기울이는 호흡관이 여기서 일반적으로 추천되는 방법이다.
  ‘회의적 의심’의 경우 특별한 처방은 상세한 검토이다. 즉, 모호한 점들이 분명해질 때까지 무엇이 불분명한지 밝혀 문제점을 정리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검토 연구하는 것이다.52)

  산만한 생각을 쫓아내는 다섯 가지 기법 중에서 지금까지 설명한 첫 번째 방법이 장애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책이라면 다음의 네 가지 기법은 모든 장애에 대해 두루 효력이 있는 기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버리기 위해 부끄러워함[慙 hiri]과 도덕적 두려움[愧 ottappa]이라는 힘을 동원한다. 즉, 그 생각이 수치스럽고 저열한 것이라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그 생각이 가져올 달갑지 않은 결과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해서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에 대한 혐오감이 일어나게 하여 결국 그 생각을 몰아낸다.
  세 번째 방법은 의도적으로 주의를 다른 데로 돌리는 것이다. 불선한 생각이 일어나 끈질기게 주의를 끌면, 거기 빠지지 말고 마치 보기 싫은 장면에서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감아버리는 것처럼,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림으로써 그 생각을 차단하는 방법이다.
  네 번째 방법은 이와 반대되는 접근방식이다.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에 직면하여 그 성질을 검토하고, 원인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이 가라앉고 결국 사라진다. 불선한 생각은 마치 도둑과 같아서 모른 체 하면 문제를 일으키지만, 잘 살피고 있으면 활동을 그친다.
  마지막 다섯 번째 방법은 억누르는 것인데 이는 최후 수단으로만 사용해야 한다. 강자가 약자를 땅에 쓰러뜨린 후, 내리 눌러서 꼼짝 못하게 하는 것처럼, 불선한 생각을 의지력으로 철저히 제압함으로써 다스리는 방법이다.

  부처님께서는 이상의 다섯 가지 기법을 능숙하고 분별력 있게 적용하면 생각의 모든 통로를 지배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마음의 노예가 아니라 마음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고 싶은 생각은 무엇이든 생각할 수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생각은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쩌다 불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마치 벌겋게 단 냄비에 떨어지는 몇 방울의 물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리듯이 이 불선한 생각을 즉시 몰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3)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상태를 일어나게 하기

  이 문에서 제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상태를 일어나게 하기 위해 의지를 일으킨다. 그는 노력하고 힘쓰고 마음을 분발하고 진력한다.53)


  바른 노력은 번뇌의 제거와 동시에 선한 마음상태의 계발이라는 과업도 수행한다. 이 과업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상태를 일어나게 하는 것과, 이미 일어난 선한 상태를 성숙시키는 것 두 부분이 포함된다.

  이 둘 중 첫 번째 것은 계발하려는 노력(bhāvanāppadhāna) 이라고도 한다. 계발해야 할 법은 적정[止]과 직관[觀], 사념처, 팔정도 등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지만 부처님은 그 중에서도 마음챙김[念覺支], 현상의 검토[擇法覺支], 정진력[精進覺支], 희열[喜覺支], 편안함[輕安覺支], 집중[定覺支], 평온[捨覺支]으로 구성된 ‘깨달음의 일곱 인자[七覺支 satta bojjhaṅgā]’라 불리는 이 한 벌의 중요성을 특히 강조하셨다.

  그래서 그는 홀로 있음[遠離 viveka], 욕망을 멀리함[離欲 virāga], 그침[滅 nirodha]을 바탕으로 삼고 해탈 또는 놓음[棄捨 vossagga]으로 끝나는 깨달음의 인자들을 계발하나니 즉, 마음챙김·현상의 검토·정진력·희열·편안함·집중·평온으로 구성되는 깨달음의 인자들이다.54)


  이 일곱 가지 상태[法]는 깨달음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 벌의 ‘깨달음의 인자들’로 같이 묶을 수 있다. 그들은 팔정도의 예비 단계에서는 실현을 위해 길을 준비하고 끝에 이르면 깨달음의 구성인자로 남는다. 깨달음을 경험한다는 것, 달리 말해 완벽한 통찰력을 발휘한다는 것은 모든 속박을 끊어내고 고로부터의 최종적 해방을 가져오기 위해 이 일곱 가지 인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말한다.

  깨달음의 길은 마음챙김[念覺支]에서 시작된다. 마음챙김은, 모든 주관적 해석, 해설 및 주관투영을 벗겨내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현상을 밝게 조명함으로써 사물의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을 위한 준비작업을 한다. 마음챙김이 있는 그대로의 현상에 초점을 맞춰 놓으면 검토의 인자[擇法覺支]가 들어서서 그것들의 특성과 조건, 그리고 진행방향을 조사한다. 마음챙김은 기본적으로 수용적인 인자인 데 비해 검토는 현상의 기본 구조를 밝혀내기 위해 현상을 과감하게 탐사, 분석, 해부하는 능동적 인자이다.

  검토작업에는 정진력[精進覺支]이 요구된다. 깨달음의 세 번째 인자인 정진력은 세 단계로 발전한다. 첫 번째 시초단계의 정진력은 무기력을 떨쳐내고 초기 열정을 일으킨다. 관(觀)하는 공부가 진전되면서 정진력에 힘이 붙으면 두 번째 꾸준함의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해이해 지는 일이 없이 수행을 진척시킬 수 있다. 끝으로 정점에 이르면 정진력은 세 번째 단계인 불굴의 단계에 도달한다. 이 단계의 정진력은 장애들을 손쓸 여지없이 무력화시키면서 관(觀)공부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정진력이 증장되어 갈수록 깨달음의 네 번째 인자인 희열[喜覺支]이 촉진된다. 대상을 즐거워하는 감흥인 희열은 점차로 증장되어 마침내 황홀경에 도달한다. 극도의 행복감이 온 몸에 퍼지고 마음은 기쁨으로 달아오르며, 열성과 확신이 한층 더 강해진다. 이런 경험들이 힘이 되는 건 분명하지만 한 가지 결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들뜸에 가까운 흥분상태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더욱 밀고 나가면, 희열은 잦아들고, 고요한 기운이 감돌면서 편안함이라는 다섯 번째 인자[輕安覺支]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희열이 남아있긴 하지만 숨이 죽어 얌전해지고 관(觀)공부는 냉정한 침착성을 지니고 진전된다.

  편안함[輕安]이 무르익으면 여섯 번째 인자인 정[定覺支], 즉 마음이 한 점을 향해 겨냥된 상태가 된다. 집중[定]이 깊어지면 다음에는 마지막 깨달음의 인자가 우위를 이어받는다. 그것은 평온[捨覺支]으로, 흥분과 무기력[遲鈍]이라는 두 가지 결함에서 벗어나 내적 안정과 균형을 이룬 상태다. 무기력이 우세할 때는 정진력을 일으켜야 하고, 흥분이 우세할 때는 제어력을 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결함을 극복하고 나면 수행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아도 평탄하게 전개될 수 있다. 평온한 마음은, 말들이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어서 재촉할 필요도, 제어할 필요도 없이 마차에 편안히 앉아서 스쳐가는 경치를 그저 구경만 해도 되는 마부에 비유할 수 있다. 평온에는 이러한 ‘방관(傍觀)’의 성질도 있다. 다른 인자들이 균형을 유지하면 마음은 현상들의 놀음을 바라보면서 태연히 있을 수 있다.


(4) 이미 일어난 선한 상태를 유지하고 완전하게 만들기

  이 문에서 제자는 이미 일어난 선한 법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사라지도록 방치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을 키우고 성숙시키고 최대한 완벽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의지를 돋운다. 그래서 그는 노력하고 힘쓰고 마음을 분발하고 진력한다.55)


  네 가지 올바른 노력 중 마지막은 이미 일어난 건전한 요소들을 유지해서 성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유지하려는 노력(anurakkhaṇāppadhāna)’이라 불리는 이것은 ‘이미 일어난 유익한 집중대상을 마음에 확고하게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설명된다.56) 이렇듯 집중대상을 방호하는 공부는 깨달음의 일곱 가지 인자로 하여금 안정성을 얻어 점진적으로 힘을 키워 나가게 하고 종국에는 해탈을 실현시키는 깨달음에 이르도록 한다. 이것은 바른 노력이 절정에 달했음을 나타내며, 수 없는 생에 걸친 개인의 정진(精進)업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Ⅵ 바른 마음챙김[正念 sammā sati]


  부처님은 사물에 관한 궁극적 진실, 즉 법은 직접 볼 수 있는 것이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며, 와서 확인해 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뿐만 아니라 법은 언제나 우리 손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있으며, 법이 실현되는 곳은 바로 우리 자신의 내부라고 말씀하신다.57) 궁극적 진실인 법은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비로운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경험할 수 있는 진실이다. 따라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고, 그 경험의 근본을 꿰뚫어 보아야만 한다. 이 진실이 해탈을 가져다주는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런 매개 없이 진실 그 자체를 직접 대면해 깨달아야 한다. 단지 신심으로 받아들인 것이나, 또는 책이나 스승의 권위 때문에 믿게 된 것이나, 또는 꼼꼼한 연역이나 추리에 의해 생각해낸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실은 직관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며, ‘중간매개 없이 직접 앎’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앎에 의해서 파악되고 흡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경험의 영역[觸處]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통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심적 기능을 빠알리어로 ‘사띠(sati)’, 영어권에서는 보통 ‘mindfulness’라고 한다.[이하 ‘마음챙김’으로 옮김] ‘마음챙김’은 ‘지금 여기에 마음 둠(presence of mind)’58), ‘주의깊음(attentiveness)’ 또는 ‘알아차림(awareness)’이다.
  하지만 마음챙김과 관련된 알아차림은 일상에서 작용하는 의식 양태로서의 알아차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알아차림이다. 모든 의식에는 대상을 경험하거나 안다고 할 때와 같은 알아차림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챙김 수행에서 알아차림은 특정한 위치에서만 적용된다. 마음챙김의 알아차림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초연하게 바라보는, 이른바 ‘맨 주의(bare attention)’의 수준에 의도적으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다.
  바른 마음챙김을 닦을 때는 마음을 현재에, 열린 채로, 고요히, 또렷이 깨어있게 한 다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관하도록 훈련한다. 모든 판단과 해석은 중지되어야 하며, 만약 중지되지 않고 일어날 경우에는 단지 등록59)만 시킨 다음 떨쳐내야 한다. 이것은 파도타기 선수가 파도를 탈 때 취하는 방식처럼 사태의 변화는 타고 있되 어떤 일이 닥치든 닥치는 그대로를 단지 주시만 하는 지극히 단순한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산만한 생각들이라는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미끄러져 넘어지지도 않고 현재로 돌아와 지금 여기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항상 현재를 잘 알아차리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는 착각이다. 마음챙김 수련이 요구하는 대로 정확하게 현재를 알아차리고 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일상적 의식에서 우리 마음은 지금 이 순간 접수한 어떤 인상을 계기로 하여 인지과정을 시작하지만 그 인상에 계속 머물지는 않는다. 오히려 마음은 직접적 인상을 심적 구조물을 짓는 도약대로 이용하는데 이렇게 형성된 구조물들은 마음을 원래 자료의 진솔한 사실성으로부터 유리시켜버린다.
  인지과정은 대체로 해석의 과정이다. 마음이 대상을 개념화하지 않고 지각하는 것은 잠시뿐이고 마음은 대상의 초기 인상을 붙잡자마자 대상 자체를 해석함으로써 관념화과정을 시작한다. 즉, 대상이 속한 범주와 대상에 관한 가설 등으로 대상을 쉽게 파악해버리고자 한다. 그러한 작업을 해내기 위해 마음은 먼저 개념들을 설정하고 상호 뒷받침하는 개념들의 집합인 구조물에 이 개념들을 결합시킨 다음 이 구조물들을 복합적인 해석의 체계로 엮어나간다. 이렇게 되면 결국 처음의 직접 경험은 관념화의 과정에 함몰되고, 눈앞의 대상은 구름에 가린 달처럼 관념과 견해라는 두터운 장막에 가려 흐릿하게 보이게 된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심적 짜맞추기과정을 ‘빠빤짜[papañca 戱論]’라고 부르는데 이는 ‘다듬기’, ‘꾸미기’, 또는 ‘개념의 증식’을 뜻한다. ‘다듬기’는 제시된 현상의 현장성과 즉각성을 차단해 버린다. 다시 말해 대상을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오직 ‘거리를 두고서야’ 알 수 있도록 한다. 또한 다듬기는 인식을 가릴 뿐 아니라 대상에 주관을 투사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무지[無明]로 뒤덮인 미혹된 마음은 자기 자신이 만든 심적 개념구조들이 정말로 대상에 속하기라도 한 듯 밖으로 투사한다. 결국 우리가 최종적 인식 대상인 줄 알고 있는 것, 그리고 우리의 가치·계획·행위의 근거로 삼고 있는 것은 기실은 원래부터 그렇게 있던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으로 짜맞춘 가공물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가공물이 전적으로 허상이거나 완전히 환상인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직접 경험에 의해 주어진 것을 원료이자 주성분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마음이 가공해낸 다른 꾸밈들도 뒤섞여 있다.

  이러한 가공과정을 작동시키는 태엽은 눈에 띄지 않는 숨은 번뇌들이다. 이 번뇌, 즉 마음의 때[垢]는 꾸밈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 꾸밈을 밖으로 투사해서 번뇌가 표면으로 뛰쳐나오는 데 쓸 갈고리로 삼고, 그래서 일단 표면에 뛰쳐나오게 되면 번뇌는 더 심한 왜곡을 일으킨다. 잘못된 관념을 바로잡는 일은 지혜의 몫이다. 그런데 지혜가 자기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면 개념적 다듬기[戱論]에 의해 흐릿해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에 곧바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올바른 마음챙김의 역할은 인식의 장(場)을 깨끗이 청소하는 일이다. 마음챙김은 순수한 현장성 그대로의 경험을 훤히 밝힌다. 개념이라는 도료로 칠해지고 해석으로 덧칠되기 이전의 대상의 원래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따라서 마음챙김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지 않는 것이다. 즉, 생각하지 않기, 판단하지 않기, 연상하지 않기, 계획하지 않기, 상상하지 않기, 바라지 않기 등이다. 우리의 모든 ‘행함(doings)’은 실은 간섭의 갖가지 모습들이며, 마음이 경험을 조작하고 그것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노력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마음챙김은 단지 ‘주시할 뿐임’으로서 이러한 ‘행함’들의 엉킴과 매듭을 풀어 원상으로 되돌려 놓는다. 주시 이외의 다른 일은 일절 하지 않고, 다만 경험이 이루어질 때마다 그것이 일어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것을 지켜볼 뿐이다. 이렇게 지켜만 보는 데에는 집착할 여지도, 사물에다 욕망이라는 안장을 얹고 싶은 충동도 자리 잡을 수 없다. 거기에는 오로지 적나라한 현장성그대로의 경험을 주의 깊고, 정확하게, 그리고 끈기 있게 계속 지켜봄이 있을 뿐이다.

  마음챙김은 마음을 어떤 대상에 굳건히 자리 잡게 해준다. 마음챙김이 마음의 닻을 현재에 단단히 내리게 해주기 때문에 잘 챙겨진 마음은 기억·후회·두려움·희망 등에 떠밀려 과거나 미래로 표류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챙김이 되어 있지 않은 마음은 조롱박에, 마음챙김이 확립된 마음은 돌에 비유된다.60) 연못에 조롱박을 놓으면 물위에서 이리저리 떠다닌다. 그러나 돌은 그렇지 않다. 바로 물속으로 잠겨 바닥에 가라앉는다. 이처럼 마음챙김이 강력할 때에는 마음은 대상에 머물게 되고, 그 특성들을 깊이 꿰뚫어보게 된다. 마음은 더 이상 떠돌지 않으며 또 챙김이 결여된 마음이 하듯이 대상의 겉만 대충 훑어보지도 않게 된다.

  마음챙김은 고요함과 통찰력, 두 가지 모두를 쉽게 얻게 해준다. 마음챙김을 적용하는 방식에 따라 깊은 집중으로 이끌 수도 있고 지혜로 이끌 수도 있다. 내면적 고요함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가서 선(禪)이라는 몰입의 여러 단계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미망을 걷어내고 예민한 통찰지에 이를 것인가, 이 두 갈래 길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는, 마음챙김을 적용하는 방식의 작은 변이에 좌우된다. 고요함 쪽으로 나아가려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마음을 어떤 대상에 고정시키는 것이 마음챙김에서 우선해야 할 일이다. 이 경우 마음챙김은, 마음이 대상을 벗어나 지향 없는 제멋대로의 생각들 속에 빠져 길을 잃는 것은 아닌지를 확인하는 파수꾼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챙김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요소들을 살펴보면서 이들이 장애[五蓋]로 발전하여 각기 그럴싸한 위장을 하고 나타나서 해악질하기 전에 미리 붙잡아서 축출해 버리기도 한다.
  한편, 통찰지나 여러 가지 지혜의 완성에 이르려면 좀 더 특수한 방식으로 마음챙김을 수행해야 한다. 이 단계의 수행에 있어서 마음챙김이 해야 할 일은 법의 근본적 특성이 환하게 드러날 때까지 그 법을 철저하고 정밀하게 관찰하고 유념하고 판별하는 것이다.

  바른 마음챙김은 ‘마음챙김의 네 가지 토대[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 즉 몸[身], 느낌[受], 마음[心], 현상[法]의 네 가지 대상 영역에 대한 주의 깊은 수관(隨觀)이라 불리는 수행을 통해 계발된다.61)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바른 마음챙김인가? 이 문에서 제자는 몸에서 몸을 열심히, 분명히 알고, 마음챙겨 수관하면서 지낸다. 그런 가운데 세상과 관련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 채 머문다. 그는 느낌에서 느낌을 (…), 마음에서 마음을 (…), 법에서 법을 열심히, 분명히 알고, 마음챙겨 수관하면서, 세상과 관련된 탐욕과 근심을 제거한 채 머문다.62)


  부처님은 마음챙김의 이 네 가지 토대를, “청정을 이루도록,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도록, 고통과 근심을 끝내도록, 바른 길(팔정도)로 들어서도록, 그래서 열반을 실현시키도록 이끄는 유일한 길”63)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네 토대를 ‘유일한 길(ekāyano maggo)’이라고 한 것은 편협한 독단주의적 주장이 아니라 해탈은 바른 마음챙김 수행으로 얻어지는, 경험의 장(場)에 대한 통찰적 수관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마음챙김의 네 가지 적용 중에서 몸에 대한 수관은 존재의 물질적 측면과 관련된 것이고, 나머지 세 가지는 (전적으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주로 마음의 측면과 관련된 것이다. 수행을 완성하려면 이 네 가지 수행 모두를 필요로 한다. 수행해 나아가는 데 꼭 정해진 순서는 없지만, 대체로 몸을 수관의 기본 영역으로 먼저 다루게 되며, 다른 것들은 마음챙김이 힘과 명료함을 얻은 후에 시야에 들어오게 된다. 여기서는 지면관계로 이 네 가지 토대에 관해 충분히 설명할 수 없기에 각각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1) 몸을 관하기[身隨觀 kāyānupassanā 64)]

  부처님은 몸에 대해 설하실 때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ānāpānasati)’이라는 관법의 설명에서부터 시작하신다. 명상의 시작점이 반드시 이것이어야만 된다는 법은 없지만 실제수행에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이 ‘근본 명상주제(mūlakammaṭṭhāna),’ 즉 전체 수관과정의 토대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주제가 오직 초심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 잘못이다.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은 그것만으로도 수행길의 모든 단계에 이를 수 있을 뿐 아니라 최고의 깨달음에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 실제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날 밤에 택하신 것도 바로 이 명상주제였다. 부처님은 그 후로도 계속 홀로 머무시는 동안에는 이 명상주제로 되돌아오셨고, 비구들에게도 항상 이것을 “불선하고 불건전한 생각들이 일어나는 즉시 추방해 버리는, 평화롭고 고귀하며 순수 지복의 주처(住處)(《상응부》Ⅴ권 321쪽)”라고 높이 평가하시면서 이를 권장하여마지 않으셨던 것이다.

  호흡챙김은 명상주제로서 매우 효율적인 기능을 한다. 호흡과정은 우리가 언제든지 이용 가능한 생체 리듬이기 때문이다. 이 호흡과정을 명상의 기반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호흡을 관찰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호흡과정을 알아차림의 영역 안에 가져다 놓는 일이다. 명상은 특별히 정교한 지적(知的) 작업을 요하지 않으며 단지 호흡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공기가 들어오고 나갈 때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콧구멍이나 윗입술의 접촉지점에서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그저 자연스럽게 콧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으면 된다. 이때 호흡을 통제하거나 자기가 예정해 놓은 리듬 속으로 끌어들이려 해서는 안 되고 자연스럽게 들이쉬고 내쉬고 있는 과정을 그저 주의해서 관(觀)해야 한다.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 우리는 산만한 생각의 타래를 잘라내고, 헛된 상상의 미궁 속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고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현시점에 확고하게 서게 된다. 왜냐하면 호흡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그것을 진실로 알아차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과거나 미래에서가 아니라 현시점에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을 네 가지 기본 단계로 설하신다. 처음 두 단계는 길게 들이쉬는 숨이나 길게 내쉬는 숨을 일어나는 그대로 주의해서 바라보고, 짧게 들이쉬는 숨이나 짧게 내쉬는 숨을 일어나는 그대로 주의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여기서 들숨과 날숨 중 어느 쪽을 먼저 해도 상관없다. 호흡이 들고나는 것을 그대로 바라보되 가능한 한 면밀히 관찰하여 지금의 이 호흡이 긴지 짧은지를 주목하고 있도록 한다. 마음챙김이 점점 더 예민해지면 들숨의 시작에서부터 중간과정을 거쳐 끝날 때까지, 그리고 바로 이어서 날숨의 시작에서부터 중간과정을 거쳐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호흡운동의 온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게 된다. 이 세 번째 단계를 ‘호흡의 온몸[全(呼吸)身]을 분명히 느껴 알기’라고 부른다.
  네 번째 단계인 ‘몸의 기능[身行] 가라앉히기’는 호흡과 이에 관련된 신체 기능들을 극도로 가늘고 섬세해질 때까지 점차로 가라앉히는 것이다. 이 네 가지 기본적 단계 너머에는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을 깊은 집중과 통찰로 이끄는 좀 더 높은 수준의 수행들이 있다.65)

  몸을 관하는 또 다른 수련방법은 자세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이는 앉아서 하는 한 가지 고정된 자세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명상의 외연(外延)을 확장하는 수행법이다. 몸은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네 가지 기본자세와, 어떤 한 자세에서 다른 자세로 변화할 때 드러나는 다양한 몸가짐을 취할 수 있다. 자세에 대한 마음챙김은 몸이 어떤 몸가짐을 취하고 있든 있는 그대로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이다. 걸을 때는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 있을 때는 서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누워 있을 때는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세를 바꿀 때에는 자세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몸가짐에 대한 이와 같은 수관 공부는 몸의 무아(無我)성을 분명히 밝혀준다. 즉, 몸이 자아가 아니며 자아에 속한 것도 아니며, 단지 의욕이 이끄는 대로 끌려 다니는, 살아있는 물질의 배열상(配列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 다음 수련은 마음챙김의 외연(外延)을 한 걸음 더 확장시키는 것이다. ‘마음챙김과 분명한 파지(把知 clear comprehension) [satisampajañña 正念·正知]’라 부르는 이 수련은 ‘맨 알아차림’에 이해라는 한 요소를 더 첨가하는 수련이다. 무슨 행위를 하든 행위를 철저히 알아차리거나 분명히 파악하면서 그 행위를 하는 것이다. 가고 오고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돌아보고 몸을 굽히고 펴고, 옷을 입고, 먹고 마시고, 소변 보고 대변 보고, 잠에 들고 잠을 깨고, 말하고 침묵하고, 그 모두가 분명한 파지 속에 행해지면 명상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주석서에는 ‘분명한 파지[正知]’를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행위의 목적을 이해하는 것(sātthasampajañña), 즉 행위의 목적을 알고 그것이 법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하는 것,

(2) 적합성을 이해하는 것(sappāyosampajañña), 즉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아는 것,

(3) 명상의 범위를 이해하는 것(gocarasampajañña), 즉 행위를 하고 있을 때도 마음을 항상 명상상태로 유지하는 것,

(4) 미혹됨이 없이 이해하는 것(asammohasampajañña), 즉 행위를 통어하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는 무주적(無主的) 운동과정으로 보는 것.66)

  이 네 번째 설명은 지혜의 계발을 다루는 마지막 장에서 더 자세히 검토하게 될 것이다.

  몸에 대한 마음챙김 중 다음 두 단락에서는 몸의 진정한 성질을 드러내고자 하는 분석적인 관법이 제시된다. 그 중 하나는 바른 노력[正精進]을 논할 때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몸의 비매력적인 성질에 대한 명상[不淨觀]이고, 다른 하나는 몸을 네 가지 기본 요소[四大]로 분석하는 것이다.
  먼저 몸의 비매력적인 성질에 대한 명상인 부정관67)은 육체에 홀려 있는 상태, 특히 성적 욕구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성적 충동이 갈애의 한 표현이며, 고의 원인이 되므로 고를 종식하기 위해서는 먼저 성적 욕구를 반드시 약화시키고 근절시켜야만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 명상은 성적 충동을 일으키는 인식적 토대, 즉 몸을 관능적 유혹의 대상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자체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성적 욕구를 약화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관능적 욕구는 이 인식과 더불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한다. 우리가 몸을 매력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관능적 욕구가 생겨난다. 아름답다는 것에 대한 이런 인식이 사라지면 관능적 욕구도 시든다. 마음에 드는 인상만으로 몸을 피상적으로 파악하는 한, 신체적 매력에 대한 인식은 계속 지탱된다. 그러한 인식을 저지하려면 우리는 마음에 드는 인상에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냉철한 탐구적 자세를 가지고 몸을 더 깊은 차원에서 점검해 나가야 한다.

  부정관수행이 맡고 있는 역할은 바로 그런 인식을 지탱하는 버팀목을 제거함으로써 밀물처럼 밀려오는 육욕을 물리치는 데 있다. 그러나 초심자들의 경우, 다른 사람의 몸, 특히 이성의 몸을 수행주제로 삼게 되면, 소기의 목적을 이루는 데 실패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 관수행은 자신의 몸을 대상으로 삼는다. 생각으로 몸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방법을 보조수단으로 써서 우리는 마음속에서 몸을 구성 요소별로 해부한 후, 그 하나하나를 검사하여 그것들이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밝혀 나가는 것이다. 경전은 머리털·몸털·손발톱·이·살갗·살·힘줄·뼈·골수·콩팥·염통·간·횡격막·지라·허파·큰창자·작은창자·위내용물·똥·뇌·쓸개즙·가래·고름·피·땀·굳기름·눈물·기름기(피부)·콧물·침·관절 활액·오줌의 서른두 가지68)부분을 열거하고 있다. 그 부분들이 혐오스러우면, 전체인 몸도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세히 살펴본 몸은 정말 비매력적이며,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야말로 신기루 같은 현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 명상의 목적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된다. 그 목적은 혐오감이나 역겨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니라 애착을 끊는 것, 육욕의 불을 끄기 위해서 연료 공급을 중단하려는 것일 뿐이다.69)

  다음의 분석적 관법수행은 몸을 다른 방식으로 다룬다. ‘요소별 분석(dhātuvavatthāna)’이라 부르는 이 수행은, 몸이 본질적으로 무주(無主)적 성질의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이 몸뚱이를 자기로 생각하는 내재적 성향에 대처한다. 이 수행이 택하는 방법은, 그 이름이 나타내는 대로, 마음속으로 몸을 네 가지 요소[四大]로 분해하는 것이다. 옛 용어로 지·수·화·풍이라 불리는 이 네 가지 요소는 실제로는 견고성, 유동성, 열기, 운동성 등 물질의 네 가지 주된 행태(行態)적 양상을 나타낸다. 견고성은 몸의 장기·근육·뼈 등과 같은 몸의 견고한 부분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나며, 유동성은 몸속의 액체에서, 열기는 체온에서, 운동성은 호흡과정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이들 요소가 드러나고 보이게 되면 시각이 확대되고, 그 결과 ‘나’ 또는 ‘나의 자아’와 몸을 동일시하는 인식은 역시 깨어지게 된다. 일단 몸을 요소들로 분석하게 되면 육체적 존재의 주요 특질인 이들 네 가지 요소가 육체와 끊임없이 상호교환하고 있는 외부 물질의 주요 특질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장기간의 명상을 통해 이 사실을 생생하게 깨닫게 되면 더 이상 몸을 자아와 동일시하지 않게 되고 몸에 대한 집착도 끊게 된다.
  몸은 변화하는 심리과정의 흐름을 지탱하고 있는, 변화하는 물질과정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여기에는 진실로 존재하는 ‘자아’라고 여길 만한 것이 전혀 없을 뿐더러, 개아(個我)로서의 나 자신이라고 느끼는 의식의 실제적 기반이 되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70)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마지막 수련방법은 죽은 후 몸이 해체되는 것을 관하는, 일련의 ‘묘지명상법’이다. 이 명상은 상상으로 하거나 실제로 시체를 마주해서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으며, 전자의 경우 그림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 중 어느 쪽을 택하든 썩고 분해되어 가는 몸의 형상을 마음속에 선명히 떠올린 후, 그러한 과정을 자신의 몸에 적용시킨다. “이 몸도 지금은 생명력으로 차 있지만 그와 같은 성질을 가졌고 그와 똑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몸의 붕괴 또한 막을 수 없으며 이 몸도 결국은 죽어서 썩고 분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명상의 목적 또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명상의 목적은 죽음이나 시체에 대하여 병적 환상에 빠져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우리의 자아론적 집착을 부숴버릴 수 있을 만큼 강력한 관법수행을 통해 그 집착을 분리하고 절단하는 데 있다. 우리의 존재가 영속되거나 영원하다는 따위의 증명되지 않은 가설을 맹목적으로 견지하는 한, 존재에 대한 집착 역시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체를 관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도 모호한 구석이 없이 ‘모든 형성된 것은 영원하지 않다[諸行無常]’고 단언하신 스승의 가르침을 생생히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2) 느낌을 관하기[受隨觀 vedanānupassanā]

  다음 마음챙김의 토대[念處]는 느낌(vedanā)이다. 여기서 ‘느낌’이란 단어는 마음챙김의 세 번째 토대인 ‘마음’이나 네 번째 토대인 ‘법’에 포함시키는 것이 타당한 복합적 현상으로서의 ‘감성’과는 그 의미하는 바가 다르다. 여기서 ‘느낌’은 보다 좁은 의미에서 경험의 정서적 색깔, 또는 ‘쾌락적 측면’이란 뜻으로 쓰이는데 이 느낌에는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의 세 가지 주요한 형태가 있다. 모든 앎의 작용에는 어느 정도의 정서적 색깔이 배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은 느낌을 의식과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라고 가르치셨다. 따라서 느낌은 무언가를 경험하는 매 순간 존재한다. 강할 수도, 약할 수도, 또 분명할 수도, 불분명할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이든 느낌은 반드시 인식과 함께 한다.

  느낌은 촉(觸 phassa)이라는 심적 사건을 의지해서 일어난다. 촉은 의식이 감각기능을 통해 대상과 만나는 것이다. 의식이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접촉’하여 마음에 스스로를 드러내게 하는 요소가 바로 이 촉이다. 감각기능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므로 여기에 상응해서 촉도 안촉, 이촉, 비촉, 설촉, 신촉, 의촉의 여섯 종류가 있으며, 느낌 역시 어느 촉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여섯 가지 느낌으로 나뉜다.
  느낌은 흔히 잠재되어 있는 번뇌를 활성화하기 때문에 특별히 중요한 관수행의 대상이 된다. 느낌이 분명하게 의식에 등재되지 않더라도 미묘한 방식으로 심적 경향을 불선한 상태로 부추기고 지속시킨다. 예컨대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탐욕이라는 번뇌의 영향을 받게 되어 이에 집착한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에는 불쾌, 미움, 두려움 등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혐오가 표출된 것들이다. 그리고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에는 일반적으로 그것을 주목하지 않거나 아니면 이런 느낌이 우리를 속여서 거짓된 안정감에 빠뜨리도록 방치한다. 이것이 바로 치암(癡暗)에 지배당한 마음상태이다. 이와 같이 각각 특수한 종류의 느낌들은 근본 번뇌를 일으키는 조건이 된다. 즉, 즐거운 느낌은 탐욕을, 괴로운 느낌은 진심(瞋心)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치암을 일으키는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모든 느낌이 번뇌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즐거운 느낌이 탐욕으로, 괴로운 느낌이 혐오감으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치암으로 예외 없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들 사이의 연결고리는 끊어질 수도 있는데 그것들이 끊어지려면 마음챙김의 역할이 반드시 필요하다. 느낌은 주시되지 않을 때, 즉 관찰의 대상이 아닌 탐닉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만 번뇌를 자극하고 번뇌를 일으킨다. 따라서 마음챙김을 통해서 느낌을 관찰의 대상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느낌에서 뇌관(雷管)을 제거해버릴 수 있게 되고 이런 느낌은 불선한 반응을 자극·촉발시킬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습관적으로 느낌을 애착·혐오·무관심과 관련짓는 대신에 수관(隨觀)을 통해 느낌을 경험의 본질을 이해하는 도약대로 삼을 수 있다.

  초기 단계의 느낌에 대한 관법공부에는 이미 일어난 느낌을 두고 그것이 즐거운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것인지 그 특성을 주시하는 일이 포함된다. 그 느낌을 자기와 동일시하지 않고, 즉 ‘나’ 또는 ‘나의 것’ 또는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냥 주시한다. 이때 알아차림은 덧칠됨이 없이 그냥 ‘맨 주의’의 수준을 견지한다. 느낌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그것을 단순히 하나의 느낌으로, 일체의 주관적 고려나, 모든 자아 지향성을 벗겨낸, 장식되지 않은 한낱 심적 사건으로 지켜보는 것이다. 단지 느낌의 질감이랄까 색조랄까, 즉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인지만 주목할 따름이다.

  그러나 정진이 진척되면 느낌 하나하나를 주시하면서 그것이 지나가도록 놓아주고, 그 다음, 또 다음을 계속 주시하게 된다. 그러면 주시의 초점은 자연히 느낌의 성질을 살피는 것에서 느낌 그 자체가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옮겨간다. 그 과정을 잘 살펴보면, 느낌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일어남과 사라짐의 지속적인 흐름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 흐름의 내부에는 영속하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느낌 그 자체는 일어나자마자 사라져버리는, 섬광같이 찰나지간에만 존재하는 사건들의 흐름일 뿐이다.
  이렇게 해서 무상에 대한 통찰이 시작되고 그것이 발전되어 나가면서, 탐·진·치라는 세 가지 불선의 뿌리는 파헤쳐진다. 거기에서는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도, 괴로운 느낌에 대한 혐오도,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군림하는 미망도 없다. 일체가 그저 쏜살같이 지나가는 허망한 사건들, 진정 즐길 것도 관여할 여지도 없는 사건들의 흐름으로만 보일 뿐이다.


(3) 마음상태를 관하기[心隨觀 cittānupassanā]

  이 수념처(受念處) 공부를 해나가노라면 마침내 우리는 느낌이라고 하는 한 특정한 심적 요소로부터 이 요소가 속하고 있는 전반적 마음상태에 대한 공부로 접어들게 된다. 이 단계의 공부가 가져오게 될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이해하려면 불교에서 마음을 이해하는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마음을, 연속적인 경험을 해나가면서도 그 자체는 변함없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지속적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비록 경험은 변화하더라도 그 변화하는 경험을 겪는 마음은 다소간의 변경은 있을지언정 여전히 동일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서는 변함없이 영속하는 심적 기관이라는 관념은 용납될 수 없다. 마음을 생각, 느낌, 의욕의 지속적 주체로 보지 않고, 각기 별개로 분리된, 순간적 의식이 이어지는 움직임들의 연속으로 본다. 뿐만 아니라 그들 간의 결합관계도 실체들 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연기적 관계성으로 보는 것이다.

  식(識)의 한 활동(a single act)을 빠알리어로 ‘찟따(citta)’라 부르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마음상태’로 번역할 것이다. 개개의 ‘찟따’는 식과 여러 가지 쩨따시까(cetasikā)로 이루어지는데, 이들의 우두머리가 식(識) 그 자체, 즉 대상에 대한 기본적 경험이다. 이때 식을 또한 ‘찟따’라 부르는데 이것은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을 가장 중요한 요소에 부여한 경우이다. 넓은 의미의 식, 즉 마음상태에서 모든 ‘찟따’는 쩨따시까라 부르는 심적 요소들을 수반하는데 이 쩨따시까에는 느낌, 지각, 의욕, 감정 등이 포함된다. 간단히 말해 이 쩨따시까에는 대상을 일차적으로 아는 기능인 찟따를 제외한 모든 심적 기능이 포함된다.71)

  식은 본래 대상에 대한 맨 경험일 뿐이므로 그 자체의 성질로는 구분될 수 없고 단지 연관되는 요인들, 즉 쩨따시까에 의해서만 구분이 가능해진다. ‘쩨따시까’가 ‘찟따’에 색을 입혀서 다른 것과 구별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찟따’를 겨냥한 관수행을 할 때에는 ‘쩨따시까’를 지표로 삼는 수밖에 없다. 마음상태를 관하는 수행을 설하시면서, 부처님은 ‘쩨따시까’를 기준으로 열여섯 가지 마음을 주시 대상으로 언급하셨다. 즉, 욕망이 수반된 마음과 욕망이 수반되지 않은 마음, 싫음이 수반된 마음과 싫음이 수반되지 않은 마음, 미혹이 수반된 마음과 미혹이 수반되지 않은 마음, 갇힌 마음72)과 흩어진 마음, 계발된 마음과 계발되지 못한 마음, 능가할 여지가 있는 마음[有上心]과 더 이상 능가할 수 없는 마음[無上心], 정정(正定)을 이룬 마음과 정정에 들지 못한 마음, 해탈한 마음과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 그 열여섯 가지 마음이다.73) 실천적 목적에서 보면 시작 단계에서는 이들 열여섯 가지 마음 중 탐·진·치의 여부와 관련된 여섯 가지 마음상태에 초점을 맞추어서 마음이 불선한 뿌리와 관련되어 있는지, 아니면 이로부터 자유로운지를 살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중 어떤 ‘찟따’가 있을 때 이를 단지 그런 ‘찟따’, 그런 마음상태로만 관한다. 그것을 ‘나’ 또는 ‘내 것’ 하는 식으로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으며 자아나 자아에 속한 어떤 것으로도 취하지 않는다. 그 찟따가 순수하건, 때 묻었건, 고상하건, 천박하건 상관없이 그 때문에 의기양양하거나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단지 그 상태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단순히 주시하기만 하면 그 상태는 바람직하다고 집착하거나, 바람직하지 않다고 거부됨이 없이 지나가게 된다.

  관수행이 깊어지면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은 점점 더 순화된다. 난무하던 생각, 상상, 감정들이 가라앉으면서 마음챙김은 더 분명해지고, 마음은 그 자체의 변화 추이를 주시하면서 또렷하게 깨어 있는 상태에 머물게 된다. 때때로 이런 변화 과정의 배후에 지속적인 관찰자가 존재하는 양 나타나 보일 수도 있지만, 수행을 계속하면 이 분명해 보이던 관찰자까지도 사라진다. 굳건하고 안정돼 보이는 마음 그 자체도 순간순간 명멸하면서, 오는 데도 없고 가는 데도 없이, 그러나 중단 없이 지속되는 하염없는 ‘찟따’의 흐름으로 녹아든다.


(4) 현상을 관하기[法隨觀 dhammānupassanā]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담마(dhammā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복수를 쓴다)’라는 말이 마음챙김의 네 번째 토대로 쓰일 때에는 경전의 설명처럼 상호 연결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한 가지는 앞서 마음에 대한 관법 공부 때에 보았듯이 담마는 마음상태에 색을 입히는 역할과는 완전히 별도로 그 자체로서 주목해야 할 심적 요소들(‘쩨따시까’)을 뜻한다. 다른 또 하나의 의미는 부처님의 교법 속에 조직화되어 있듯이 경험을 구성하는 근본적 요소, 즉 현존하는 사실 요인들을 뜻한다. 이 두 가지 의미를 지닌 ‘담마’라는 말을 나타낼 더 좋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여기서는 ‘현상들(phenomena)’로 옮기기로 한다. 그러나 이를 현상 뒤에 어떤 본체 또는 물자체(物自體 noumenon)가 따로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부처님이 무아를 가르치신 취지는 현존하는 사실세계를 구성하는 기본적 성분은 어떤 본체의 뒷받침도 없이 그저 일어나고 있을 뿐인 맨 현상들(suddha-dhammā)이라는 것이다.

  경에서 현상[法]의 수관(隨觀) 부분은 각기 다른 현상들을 다루는 다섯 가지 작은 항목으로 나뉜다. 다섯 가지 장애{이하 오개(五蓋)로 지칭}, 오온(五蘊), 각각 여섯 가지의 안팎 감각기반{이하 6내외처(六內外處) 또는 6처로 지칭}과 일곱 가지 깨달음의 인자들{이하 칠각지(七覺支)로 지칭}과 사성제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 다섯 가지 장애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인자들은 심적 요소를 뜻하는 좁은 의미의 ‘담마’이고, 다른 것들은 사실세계의 구성성분이라는 넓은 의미의 ‘담마’이다. 그러나 세 번째 묶음인 감각기반에 관한 부분에 나오는, 감각을 통해 일어나는 족쇄들 역시 ‘심적 요소들’에 포함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심적 요소’로 간주되는 ‘담마’의 두 묶음, 즉 오개와 칠각지만을 간단히 다루어 보기로 한다. 이 두 묶음 모두 제5장에서 바른 노력과 관련시켜 이미 언급한 일이 있지만, 여기서는 바른 마음챙김 수행과 관계되는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오온, 육처 등 다른 유형의 ‘담마’들은 마지막 장에서 지혜의 계발과 관련지어 논의하기로 한다.

  오개와 칠각지는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왜냐하면 해탈을 이루는 데 있어서 전자는 주된 장애가 되고 후자는 주된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감각적 욕구, 악의, 둔감과 졸림[昏沈], 들뜸과 걱정[掉擧], 의심의 다섯 가지 장애는 일반적으로 공부의 초기단계 즉, 시작할 때의 큰 기대감과 혼란에 가까운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미묘한 잠재성향들이 표면에 떠오를 기회가 열린 직후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불쑥 튀어나오면 그 존재에 주목해야 하고 그것이 차차 희미해져 갈 때에는 그 사라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장애들을 계속 확실하게 통제하기위해서는 파지력(把知力)이라는 특별한 마음의 요소가 필요하다. 즉, 이런 장애들이 어떻게 일어나며 어떻게 제거될 수 있고, 또 앞으로 다시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방지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74)

  이와 같은 파지력(把知力)은 마음챙김[念], 현상의 검토[擇法], 정진력[精進], 희열[喜], 편안함[輕安], 집중[定], 평온[捨] 등 깨달음의 일곱 인자들[七覺支]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 인자들 중 어느 것이든 일어나면 그것의 존재를 주시해야 한다. 그 존재를 주시한 후에는, 그것이 어떻게 생겨나며, 어떻게 하면 충분히 발달될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서 탐구해야 한다.75) 이들이 처음 솟아오를 때에는 힘이 약하지만, 지속적으로 계발해나가면 이들은 점점 힘을 축적하게 된다.
  마음챙김은 관(觀)의 과정이 시작되도록 한다. 관의 과정이 제대로 잘 정착되면 그것은 다시 지적 능력이 지니는 검토 기능[擇法]인 조사(調査)를 일으킨다. 조사는 다시 정진력을 끌어내고 정진력은 희열을 낳고, 희열은 편안함에 이르게 하고, 편안함은 한 점에 모아진 집중에, 다시 집중은 평온에 이르게 한다. 이렇게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전체 진전과정은 마음챙김과 더불어 시작되고, 마음챙김은 시종일관 마음이 맑고 깨어있고 균형 잡혀 있도록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통제력으로 작용한다.



 

Ⅶ 바른 집중[正定 sammā samādhi]


  도의 여덟 번째 요소[支]는 ‘바른 집중’인 바 빠알리어로는 ‘삼마 사마디(sammā samādhi)’이다. 여기서 ‘집중’이란 모든 의식상태에 존재하는 하나의 심적 요소를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이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one–pointedness of mind 心一境性 citt'ekaggatā]’이라 불리는 이 요소는 다른 심적 요소들을 인식 작업에 통합 동참시키는 기능을 한다. 모든 찟따(citta), 즉 심(心)활동으로 하여금 그 대상에 집중된 채 머물도록 해주면서 (특정 대상을 그 배경으로부터 분리하는) 의식[識 viññāṇa]의 개별화적 측면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요소이다.76) 어떤 순간에도 마음은 무언가를, 그것이 보이는 것이든, 들리는 것이든, 냄새든, 맛이든, 촉감이든, 정신적 대상이든 간에 그 어느 것을 인식하고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이라는 이 요소는 대상을 인식하는 작업에 마음과 그 부수 요소들을 통합시키면서 동시에 인식활동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대상 위에 집중하도록 만드는 기능까지도 수행하는 셈이다. 마음이 한 점에 겨냥되어 있다는 말은 어떤 의식활동에든지 거기에는 반드시 집중되는 중심 초점이 있기 마련이며, 의식의 대상이 되는 전(全)객관적 자료는 외곽 주변에서 그 내면의 핵에 이르기까지 이 중심초점을 지향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 점에 모아지고 있다 해서 모두 ‘사마디’일 수는 없다. ‘사마디’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종류의 것이다. 예를 들어 음식을 앞에 둔 식도락가, 누군가를 죽이려 하고 있는 암살자, 전장에 임한 병사 등등, 모두가 집중된 마음으로 행동을 하지만, 이때의 정신집중은 ‘사마디’의 특성을 갖추지 못한다. ‘사마디’는 오로지 선(善)한 면에서의 한 점을 겨냥하고 있음, 선한 마음상태에서의 집중인 것이다. 그런 경우 중에서도 다시 그 폭은 더욱 좁아진다. 선한 집중이라 해서 모두 ‘사마디’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더 높은, 보다 더 순수한 알아차림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의도적인 시도의 결과로 생겨난 집중의 강화만을 의미한다.

  주석서들은 ‘사마디’를, 마음과 심적 요소들이 한 대상에 똑바로, 그리고 고르게 집중된 것이라 규정한다. 건전한 집중으로서의 ‘사마디’는 보통 흩어져 분산되어 흐르는 마음상태를 모아 내적 통일을 이루어낸다. 집중된 마음의 두 가지 두드러진 특성은 대상을 향해 부단히 주의를 기울인다는 점과 그 결과 정신적 기능들[諸根]이 편안[輕安]해진다는 점인데 이 두 특성은 집중된 마음과 집중되지 않은 마음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집중 훈련이 되지 않은 마음은 분산된 채 요동하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물에서 건져 올려 마른땅에 던져진 물고기가 이리 저리 팔딱거리는 것에 비유하셨다. 그런 마음은 한 곳에 붙박여 있지 못하고 이 관념에서 저 관념으로,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가눌 길 없이 내닫는다. 그처럼 흐트러진 마음은 또한 미혹된 마음이기도 하다. 여러 가지 걱정과 관심에 휩싸여 항상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은 사물을 온전하게 제대로 보지 못하고 두서없는 생각의 잔물결에 일그러진 상태로서만 본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훈련이 된 마음은 대상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흐트러짐 없이 머물 수 있다. 이와 같이 일단 흐트러짐이 없어지고 더 나아가 유연함과 고요함이 생기게 되면 마음은 매우 효과적인 통찰 도구가 된다. 집중된 마음이야말로 미풍조차 없는 잔잔한 호수처럼 눈앞의 사물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신뢰할 수 있는 반사경이다.


집중의 계발

  집중은 다음 두 가지 방법 중 어느 하나에 의해 계발될 수 있다. 하나는 선(禪)의 경지에 해당하는 깊은 집중 몰입을 목표로 하는 수행체계에 의해서 계발되며, 다른 하나는 통찰력을 얻기 위해 팔정도를 닦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전자는 적정(寂靜)의 계발(samatha-bhāvanā), 후자는 통찰력의 계발(vipassanā-bhāvanā)이라 한다.
  하지만 이들 두 길은 모두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예비적 요구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계행(戒行)이 청정할 것, 각종 장애 요인들을 제거할 것, 명상수행에 임함에 있어 자신에 알맞은 가르침(가급적이면 스승으로부터 직접 받는 가르침)을 반드시 찾아낼 것, 그리고 수행에 도움이 되는 처소에 머물 것 등이다. 이런 예비조건들이 일단 갖추어지면, 적정을 닦는 명상자는 집중을 계발하는 데 필요한 명상의 대상, 즉 집중점을 결정해야 한다.77)

  자격 있는 스승이 있는 경우는 스승이 명상자의 근기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명상대상을 정해 줄 수 있다. 스승이 없는 경우에는 몇 가지 실험을 통해 스스로 대상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명상 안내서들은 적정(寂靜)의 명상을 위한 주제를, 명상자가 ‘명상작업을 하는 곳’이라는 뜻에서 ‘업처(業處 kammaṭṭhāna)’라 부르는 것 마흔 가지를 한 벌로 정리하고 있다. 그 마흔 가지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열 가지의 까시나(dasa kasiṇā)[十遍處]
  열 가지의 부정한 대상(dasa asubhā)[十不淨]
  열 가지의 상기(dasa anussatiyo)[十隨念]
  네 가지의 숭고한 상태(cattāro brahmavihārā)[四梵住處]
  네 가지의 비물질적 상태(cattāro āruppā)[四無色界]
  한 가지의 인식(ekā saññā)[一想]
  한 가지의 분석(ekā vavaṭṭhāna)[一析].


  ‘까시나’는 본원적 성질이랄 수 있는 것들을 상징하는 장치들이다. 그 중 네 가지는 지·수·화·풍 ‘까시나’로 사대(四大)를 나타내는 것이고, 다른 네 가지는 청·황·적·백 ‘까시나’로 색깔을, 그리고 다른 두 가지는 빛과 공간을 나타내는 까시나이다. 각 ‘까시나’는 그것이 나타내고 있는 어떤 보편적 성질을 대표하는 구체적 대상이다. 그래서 진흙을 다져 만든 둥근 판을 지(地) ‘까시나’로 쓸 수 있다. 지 ‘까시나’로 집중을 계발하려는 명상자는 그 둥근 판을 앞에다 놓고 거기에다 시선을 고정하고 “지, 지…” 하면서 관한다. 다른 ‘까시나’의 경우에도 그에 맞도록 적절하게 조정해서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된다.

  열 가지 ‘부정한 대상’은 부패 단계별로 본 주검들이다.78) 이 주제는 ‘몸에 대한 마음챙김[念身經]’79)에서 몸의 부패를 관(觀)하는 것과 비슷하다. 실제로 옛날에는 화장터가 이 두 가지 수련을 위해서 가장 적합한 장소로 권장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그 강조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 마음챙김의 경우에는 성찰적 생각의 적용에 강조점이 주어진다. 주검이 부패해 가는 광경은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닥치고 말 죽음과 붕괴를 생각하게끔 만드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고 있는 열 가지 ‘부정한 대상’의 경우에는 그와 같은 성찰을 하지 않도록 한다. 대신 한 점에 모아진 마음이 대상에 고정되는 것을 강조하며, 생각은 적을수록 더 좋다.

  열 가지 상기(想起)는 여러 가지로 구성된 혼성체다. 처음 세 가지는 불·법·승 삼보의 성질에 관한 경건한 명상으로, 경전에 나오는 정형구가 그 기초가 된다. 그 다음 세 가지 상기도 역시 옛날의 문구에 의존하는 데, 지계, 보시,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 잠재해 있는 천신과 같은 자질에 대한 명상이다. 그 다음이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 몸의 부정함을 관하는 일[不淨觀], 호흡에 관한 마음챙김이고, 끝으로 평화의 상기는 열반에 대한 추리적 명상이다.

  네 가지 숭고한 상태 또는 ‘거룩한 거처’는 자·비·희·사의 사무량심을 말하는데, 이들은 밖을 향한 사회적 태도로서 점차 범위를 확장시켜 나가 마침내는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生有]을 다 포용하는 보편적 방사(放射)로 발전된다.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네 가지 비물질적 상태는 특정한 심층 몰입을 위한 객관적 기초가 된다. 이들은 이미 정신집중에 숙달된 사람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대상이다. ‘한 가지 인식’은 음식의 역겨움에 대한 인식으로, 미각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줄이고자 의도된 추론적 주제다. ‘한 가지 분석’은 몸을, 이미 바른 마음챙김에서 논의한 대로, 지·수·화·풍의 네 가지 기본 요소[四大]로 관하는 것이다.

  이처럼 명상주제가 다양하게 제시되면 강한 향상심만 있을 뿐, 의지할 스승이 없는 경우에는 이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여러 지침서들은 이 마흔 가지 주제를 인격 유형에 따라 적합하게 분류하고 있다. 이 분류에 따르면 몸속에 있는 혐오스러운 대상과 몸의 각 부분에 관한 명상은 관능적 유형의 사람에게 가장 적합하며, 자비관은 남을 잘 미워하는 유형에게, 삼보의 특성에 관한 명상은 헌신적 유형의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수행을 할 때 초심자에게는 일반적으로 추론적 사유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되는 단순한 주제로부터 시작하도록 권하고 있다. 들뜨고 생각이 산만해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은 성격 유형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직면하는 공통된 문제이다. 따라서 사유과정을 늦추고 조용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명상주제는 기질에 관계없이 모든 수행자에게 도움이 된다.
  방황하는 생각들을 마음에서 쓸어내는 데 효과가 있다고 일반적으로 추천하는 것이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이것은 초심자에게는 물론, 깊은 명상에 들고자 하는 구참에게도 가장 적합한 주제로 제시되고 있다. 일단 마음이 가라앉아 자신의 사고성향을 관찰하기가 쉬워지면 그 때에는 어떤 특별한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다루기 위해 다른 주제들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성냄과 악의를 꺾기 위해서는 자비관을, 관능적 욕망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신체의 각 부분에 대한 마음챙김을, 신심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부처님 상기하기를, 긴박감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한 명상을 택할 수 있다. 그때그때의 상황에 알맞은 명상주제를 택하는 데에는 숙련이 필요하지만 이런 숙련 역시 실제 수행을 통해, 때로는 시행착오를 겪어나가는 가운데 발전될 수 있다.


집중의 단계들

  집중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발전한다. 집중의 모든 단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적정(寂靜) 명상의 전 과정을 처음서부터 끝까지 밟고 있는 수행자의 경우와, 이런 보통 수행자들보다 훨씬 더 빠른 진전을 보이게 될 사람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스승으로부터 명상 주제를 받거나, 아니면 자기 스스로 주제를 택한 후, 수행자는 조용한 곳으로 물러난다. 거기서 그는 올바른 명상 자세를 취한다. 다리는 편안하게 가부좌를 틀고, 상체는 똑바로 꼿꼿이 세우고, 양손은 포개어 배꼽 아래에 놓고, 머리는 바로 세우고, 입은 다물고 눈은 감고(까시나나 다른 시각대상을 사용할 경우를 제외하고), 호흡은 콧구멍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규칙적으로 한다.
  그 다음 그는 마음을 대상에 집중한 후 거기에 계속 고정시킨 채 깨어있도록 노력한다. 마음이 빗나가면 이내 알아차리고 그것을 붙들어서 부드럽게, 그러나 확고하게 대상으로 되돌려 놓기를 거듭거듭 한다. 이 초기 단계를 ‘예비적 집중(parikkammasamādhi)’이라 하고 그 대상을 ‘예비적 표상(parikkammanimitta)’이라 한다.

  초기의 흥분 상태가 가라앉고 마음이 본격적으로 정진하게 되면, 다섯 가지 장애가 깊은 곳에 숨었다가 부글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한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욕구, 분노와 후회, 혼침, 들뜸, 의심들이 때로는 생각으로, 때로는 심상(心像)으로, 때로는 강박감정(obsessive emotions)으로 나타난다. 이 장애들은 무서운 장벽처럼 보이지만, 인내심과 지속적인 노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극복해낼 수 있다. 그들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기민하게 대처해야 한다. 특정 장애가 강력해지면, 주된 명상 주제를 제쳐 두고 그 장애에 정면으로 대치하는 다른 주제를 들어야 할 경우도 있고 또 어떤 경우에는 계속 장애에 부딪치면서도 원래의 주제를 견지하여 마음을 그 주제로 되돌려 놓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야 할 때도 있다.

  집중이라는 외길을 따라 계속 분투 계발해 나가노라면 마침내 이러한 노력이 ‘다섯 가지 심적 요소들[五禪支]’을 활성화시켜 수행자를 돕게 한다. 이 요소들은 평상시의 이렇다 할 목적이 없는 의식에서도 간헐적으로 나타나긴 하지만 그때는 이 요소들이 결속력이 없기 때문에 뚜렷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나 명상 공부에 의해 활성화되면 이 다섯 요소들은 조금씩 조금씩 힘을 얻게 되고, 서로 연동되기 시작하여 마음을 ‘사마디’쪽으로 이끌고, 마침내 이들 각각이 선의 요소[禪支 jhānaṅga]가 되어 그 사마디를 지배하기에 이른다. 이 다섯을 일반적인 순서대로 열거하면 ‘시초의 마음기울임[尋 vitakka]’, ‘지속적 마음기울임[伺 vicāra]’, ‘희열[喜 pīti]’, ‘즐거움[樂 sukha]’, 그리고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一境性 ekaggatā]’과 같다.

  ‘시초의 마음기울임’은 마음을 대상 쪽으로 향하게 하는 일을 한다. 이것은 마음을 붙잡고, 들어올려, 목재에 못을 박듯이 마음을 대상에 박는다. 이것이 되면 ‘지속적 마음기울임’이 특유의 검토 기능을 통해 마음을 그 자리에 머물게 함으로써 대상에 붙들어둔다. 이 두 가지 요소 간의 차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 ‘시초의 마음기울임’은 종을 치는 것에 비유하고 ‘지속적 마음기울임’은 종의 반향음에 비유한다. 세 번째 요소인 ‘희열’은 대상에 대한 호의적 관심과 함께 나타나는 기쁨과 반가움인 한편, 네 번째 요소인 ‘즐거움’은 성공적인 집중과 함께 나타나는 유쾌한 느낌이다. 희열과 즐거움은 유사한 성질을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 혼동이 되기 쉽지만, 이 두 가지는 같지 않다. 그 차이는 ‘희열’을 사막을 가다 지친 여행자가 멀리 오아시스를 보고 반기는 것에 비유하고, ‘즐거움’을 못에서 물을 마시고 그늘에서 쉬는 만족감에 비유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선의 요소인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은 마음을 대상과 일체화시키는 결정적 기능을 한다.80)

  집중이 발전되면 이 다섯 선의 요소[禪支]가 생겨나서 다섯 장애들에 대처한다. 각 요소가 특정한 장애 하나씩을 떠맡는 것이다. ‘시초의 마음기울임’은 마음을 대상 쪽으로 들어 올리는 일을 통해 ‘둔감과 졸림’을 약화시킨다. ‘지속적 마음기울임’은 마음을 대상에 정박시킴으로써 ‘의심’을 몰아낸다. ‘희열’은 ‘악의’를 가로막고, ‘즐거움’은 ‘들뜸과 걱정’을 배제한다. ‘한 점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은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가장 큰 유혹인 ‘감각적 욕구’에 반격을 가한다. 이처럼 선지들이 강화되면 다섯 장애는 힘을 잃고 누그러진다. 그렇지만 장애들이 아직 근절된 것은 아니다. 근절되려면 팔정도의 세 번째 부류인 지혜에 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은 장애들이 숙지근해져서 집중이 더 강화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뿐이다.

  안에서는 선지들이 장애들을 짓누르고 있는 동안 대상 쪽에서도 역시 어떤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집중의 초기 단계 대상인 예비적 표상은 순전히 물리적 대상이다. 까시나의 경우에는 그 대상이 어떤 선택된 요소나 색깔을 나타내는 둥근 판이고, 호흡챙김의 경우에는 숨결의 접촉 감각이다. 그러나 집중이 강화되면 원래의 대상은 ‘습득상[取相 uggaha-nimitta]’이라고 하는 또 다른 대상을 발생시킨다. 까시나의 경우, 대상은 마치 눈으로 원래의 대상을 보는 것처럼 마음속에 분명히 보이는 원반형상의 심적 영상으로 나타날 것이고, 호흡의 경우에는, 콧구멍 근처에 움직이는 공기의 흐름과의 접촉 감각에서 생겨난 반사 영상으로 나타날 것이다.

  습득상이 나타나면, 수행자는 예비표상을 떠나 주의력을 심적 대상에다 고정시킨다. 머지않아 다시 습득상에서 새로운 대상이 나타난다. ‘유사상[似相 paṭibhāganimitta]’이라 부르는 이 대상은 습득상보다 몇 배나 더 밝고 분명한 순화된 심적 영상이다. 습득상을 구름에 가린 달에 비유한다면 유사상은 구름에서 벗어난 달에 비유한다. 유사상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다섯 선의 요소들은 다섯 장애를 진압해 버린다. 그리고 ‘근접삼매(upacāra-samādhi)’라는 집중단계에 들어간다. 바로 이 근접삼매 단계에서 마음은 몰입상태에 가까워진다. 이제 마음이 몰입의 ‘이웃(upacāra의 의미를 살려서)’이 되긴 했지만 진정한 몰입, 즉 대상에 완전히 몰두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더 필요하다.

  수련이 더 진전되면 집중의 요소들이 힘을 얻어, 마음을 몰입[本三昧 appanā-samādhi]으로 이끈다. 근접삼매의 경우처럼, 몰입도 유사상을 대상으로 삼는다. 집중의 이 두 단계는 장애의 유무나 대상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양쪽에 공통된다. 이 두 단계의 차이는 선의 요소의 강도에 있다. 근접삼매에서는 선의 요소가 있지만 힘과 견실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이 단계의 마음은 걸음마를 갓 배운 아이에 비유된다. 이 시기의 아이는 몇 발자국 걷다가는 넘어지고 일어나서 또 몇 걸음 걷다가 넘어진다. 그러나 몰입에 든 마음은 걷고자 하는 어른과 같다. 그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마음대로 일어나서 앞으로 똑바로 걸어간다.

  몰입 상태의 집중은 여덟 가지 수준으로 나누어지며 각 수준은 그 전 수준보다 더 깊고, 더 순수하며, 더 미묘하다는 특징이 있다. 처음 네 수준은 네 가지 쟈나[禪 jhāna]라 부른다. ‘쟈나’라는 말은 막연히 ‘명상 몰입’이라 옮길 수도 있지만 딱 적합하지 않기에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쓰기로 한다.81) 나머지 네 가지 수준도 한 벌을 이루는데 이를 사무색계(四無色界 āruppā)라 한다. 이 여덟 가지는 앞의 것을 통달해야 뒤의 것을 성취하는 식으로 순차적으로 얻어질 수 있다.

  경전에서는 보통 바른 집중을 정의하여 네 가지 선(禪)이라 부른다.82)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럼 비구들이여, 무엇이 바른 집중인가? 이 문에서는 감각적 즐거움에서 멀어지고, 불선한 상태[不善法]에서도 멀어져 비구는 시초의, 그리고 지속적 마음기울임을 동반하고, 떨어짐[遠離 viveka]에서 생긴 희열과 즐거움으로 충만한 초선에 들어서 머문다.

  다음에는, 시초의 마음기울임[尋]과 지속적 마음기울임[伺]이 잦아드는 것과 더불어, 내면적 확신과 정신통일을 얻게 되면서 그는 제 이선에 들어서 머문다. 여기서는 시초의, 그리고 지속적 마음기울임이 그치고 이번에는 집중에서 생겨난 희열과 즐거움으로 충만하다.

  희열이 식어듦과 더불어 그는 마음챙겨[正念] 그리고 분명히 파악하면서[正知], 평온에 머문다. 그는 고귀한 분들이 “평온하고 마음챙긴 그는 행복하게 산다”고 말한 그대로의 더없는 행복을 본인 자신이 몸으로 경험한다.
  이렇게 그는 제 삼선에 들어 머문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버림과 더불어, 그리고 기쁨과 슬픔이 먼저 사라짐과 더불어 그는 제 사선에 들어 머문다. 그것은 즐거움도 아니고 괴로움도 아님[不苦不樂]과 평온에 기인하는 마음챙김의 청정함을 지니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른 집중이다.83)


  선의 단계는 그 구성 요소에 의해 구별된다. 초선은 원래의 다섯 몰입요소를 한 벌로 해서 이루어진다. 즉, 시초의 마음기울임, 지속적 마음기울임, 희열, 즐거움, 그리고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이다. 초선을 성취한 후에 명상자는 그것에 통달하도록 해야 한다. 한편으로 뭔가 이뤄냈다는 자기만족에 빠져서 수행을 계속하는 일을 등한히 하지 않아야 하며, 또 한편으로 지나친 자신감으로 다음 선을 얻으려고 급하게 서두르지 말아야 한다. 선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문제나 어려움 없이 선에 들고 선에 머물고, 선에서 나오고, 선을 되돌아보며 점검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해서 선에 들어 선의 기량을 완성시켜야 한다.

  초선에 숙달한 다음에 명상자는 자신이 성취한 것의 몇 가지 흠을 반성한다. 비록 초선이 보통의 감각 의식보다 월등하며 더 평화롭고 행복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이것은 여전히 감각 의식에 가까운 것이고 장애들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그 요소들 중 시초의 마음기울임[尋]과 지속적 마음기울임[伺]의 두 요소는 이내 다른 요소들만큼 정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일 뿐 아니라 오히려 조악한 것으로 보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명상자는 시초의 마음기울임과 지속적 마음기울임을 넘어서기 위해 집중 수행을 계속한다. 수행을 통해 그의 기능들이 숙달되면 이 두 요소가 잦아들면서 명상자는 제 이선에 들게 된다. 제 이선은 희열, 즐거움, 그리고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이라는 세 가지 구성요소만으로 되어있다. 또한 제 이선은 이 세 가지 외에 많은 다른 구성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확신이다.

  제 이선에서 마음은 더 평안해지고 더 철저히 통일된다. 그러나 숙달되면 이런 선의 상태마저도 조악해 보인다. 제 이선에는 기분을 돋우어 흥분으로 기울게 하는 요소인 희열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명상자는 이번에는 희열을 극복하겠다는 결의로 수련 과정에 임하게 된다. 희열이 사라지면 제 삼선에 든다. 여기서는 즐거움과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의 두 몰입 요소만 남는 반면, 몇 가지 다른 보조적 상태들이 대두되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마음챙김과 분명한 파지(把知), 그리고 평온이다. 그러나 명상자는 이 성취에도 여전히 결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즐거운 느낌이,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는 중립적 느낌에 비해 거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제 삼선의 고귀한 즐거움마저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이에 성공하면 그는 제 사선에 들게 되는데 제 사선은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음과 중립적인 느낌의 두 요소로 규정되고, 고도의 평온에 기인하는 특별히 청정한 마음챙김을 지니고 있는 선이다.

  이 네 가지 선 너머에는 네 가지의 비물질적 상태[四無色界]가 있는데 이 몰입의 경지에서의 마음은 네 가지 선에서 여전히 가끔씩 나타나곤 하는 시각화된 영상들에 대한 미세한 지각마저도 초월한다. 이 비물질적 상태들은 선(禪)처럼 심적 요소들을 순화시킴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순화시킴으로써, 비교적 조악한 대상을 더 미세한 대상으로 대치함으로써 얻어진다. 이 네 가지 성취는 각기의 대상에 따라 공무변처(空無邊處 ākāsānañcāyatana), 식무변처(識無邊處 viññāṇañcāyatana), 무소유처(無所有處 ākiñcaññāyatana),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라 일컫는다. 이 상태들은 너무나 미묘하고 아득해서 도저히 말로는 명확하게 설명할 길이 없는 수준의 집중 상태들이다. 그 중 마지막 네 번째는 정신 집중의 정점으로서 의식이 도달할 수 있는 절대, 극한의 통일 상태다. 그러나 적정(寂靜) 명상으로 도달한 이러한 몰입의 상태는 한껏 고양되어 있긴 하지만 통찰의 지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해탈에 이르기에는 여전히 충분하지 못하다.

  지금까지 논의한 집중은 마음을 오직 하나의 대상에 고정시키는 것으로서 다른 대상들을 얼마나 배제하는가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알아차림의 범위를 제한하는 데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집중이 있다. 이것을 찰나 집중(khaṇika-samādhi)이라 한다. 찰나 집중을 계발하기 위해서 명상자는 다양한 현상을 관심영역에서 의도적으로 배제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몸과 마음이 변하고 있는 상태 쪽으로 마음챙김을 향하게 하여, 나타나는 어떤 현상이든 가리지 않고 주시한다. 즉, 해야 할 일은 지각의 영역 안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일체 집착함이 없이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주시하기를 계속해 나가노라면 집중력은 순간순간 강화되고 마침내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건의 흐름을 탄 채로 한 곳을 향해 겨냥되어 있는 경지에 들게 된다. 대상이 아무리 변화해도 정신통일은 굳건히 유지되어 조만간에 근접삼매에서와 같은 정도로 장애를 누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처럼 융통성 있는 유동적 집중은 통찰의 길을 따라 사념처를 수행함으로써 발전된다. 이 집중이 충분히 강력해지면 드디어 지혜가 생기는 도의 마지막 단계로 들어가게 된다.



 

Ⅷ 지혜의 계발


  바른 집중이 성스러운 팔정도의 요소들 중에서 마지막 위치를 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른 집중 그 자체가 도의 최종적 절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定)을 성취했다는 것은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되었으며, 마음에 따라붙는 여러 부수적인 현상들[心所]을 통일시키고, 행복해지고 평온해지며 힘차게 될 전망을 활짝 열어젖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고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가장 높은 완성에 도달하는 데에 충분하지 않다. 고를 종식시키기에 이르려면 팔정도가 진리발견의 도구, 즉 사물의 궁극적 진실을 밝혀내는 통찰력을 낳는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팔정도의 여덟 요소 모두가 협동적으로 기여해야 하며 그러려면 정견과 정사의 두 요소가 새로운 차원에서 재가동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까지 이 첫머리의 두 요소는 예비적 기능만 수행한 셈이다. 이제 그들을 다시 취하여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지금까지 바른 견해[正見]는 현상을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데 그쳤지만 이제부터는 현상의 참 성질을 곧바로 꿰뚫어보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 바른 의도[正思]는 모든 번뇌를 놓아버림, 다시 말해 깊은 이해에서 우러난 진정한 놓음이 되어야 한다.

  지혜를 계발하는 문제로 돌아가기 전에, 왜 집중만으로는 구경해탈을 성취하는 데 충분하지 못한지 그 이유를 검토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집중이 해탈을 가져오기에 충분하지 못한 이유는 집중이 번뇌를 건드리면서도 그 근본 기층(基層)을 허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번뇌가 잠재적 성향의 단계, 드러나는[明示] 단계, 범(犯)함의 단계의 세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르치신다. 가장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잠재적 성향(anusaya)’의 수준으로서 여기서는 번뇌가 아무런 활동상도 보이지 않고 다만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두 번째 수준인 ‘드러나는(pariyuṭṭhāna)’ 단계에서는 번뇌가 여러 자극에 영향받아 갑자기 강화되어 생각, 감정, 의욕 등의 형태로 물밀듯이 표면에 떠오른다. 그리고 세 번째 수준인 ‘범함(vītikkama)’의 단계에서는 번뇌가 마음속에서 드러나는 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몸이나 말로 짓는 불선한 행위를 유발하기에 이른다.

  이들 번뇌의 세 층에 대응하여 그 각각을 적절히 저지하기 위해서 팔정도를 세 부분[三學]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계율수련은 불선한 신체적, 언어적 행위를 제어함으로써 번뇌가 범함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두 번째, 집중수련은 한층 더 깊이 들어가서 번뇌가 드러나는 단계에 대비하는 방어수단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집중은 이미 의식에 나타난 번뇌들은 지워내고 또 한편으로는 계속 유입해 들어오는 번뇌들로부터 마음을 지켜낸다. 그러나 완전 몰입의 깊이까지 집중을 추구해 들어가도 ‘심(心) 연속’ 내부에 잠복해 있는 잠재적 성향, 즉 고통의 근본적 원천까지는 건드리지 못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집중도 속수무책이다. 이 뿌리들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마음의 고요함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하다. 그래서 세 번째로, 통일된 마음의 평정과 고요함을 넘어 지혜(paññā)수련이 요구된다. 즉, 근원적 존재양식 차원에서 현상을 꿰뚫어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오로지 지혜만이 잠재적 성향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다. 번뇌를 구성하는 일습 중 가장 기본적 요소이자 다른 요소들을 키우고 자리잡아주는 것이 바로 무지[無明]이며 지혜가 바로 그 무지를 치유하는 약이다. 무지라는 단어가 ‘없을 무(無)’자를 앞세워 부정어 형태를 취하고는 있지만, 바른 앎이 결핍되어 있다는 실제적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무지는 오히려 우리 내면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는, 방심할 수 없는 들뜬 심적 요소다. 그것은 인식을 왜곡하고, 의욕을 지배하며, 우리 존재의 전체 색조를 좌우한다. 부처님 말씀대로 “무명(無明)이야말로 참으로 강력한 요소다.” (《상응부》14상응 13경)

  무명(無明)은 가장 기초적 작용 영역인 인지의 수준에서 우리의 지각, 사고, 관점에 침투해 들어와서 우리의 경험에 여러 겹의 미혹을 덮씌워 그 경험을 엉뚱하게 해석하도록 만든다. 이런 미혹 중에서도 다음 세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무상(無常)을 놓고 항상(恒常)하다고 보려드는 미혹, 고(苦)를 두고 낙이라 보려드는 미혹, 없는 자아[無我]를 있다고 보려드는 미혹이다.84) 모든 것은 변화하고 멸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어디서든 확인할 수 있음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과 세상을 견고하고 안정된 지속적인 실체인 양 여긴다. 또 그처럼 고통, 실망, 좌절을 거듭거듭 겪으면서도 우리는 즐거움을 누릴 천부의 권리라도 지닌 양 조금도 기죽지 않고 마냥 기대에 부푼 채 어떻게든 즐길 거리를 늘리고 즐김의 강도를 높이고자 애를 쓰고 있다. 또 우리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만들어내는 각종 관념과 상(像)들이 마치 우리의 정체성을 뒷받침하는, 반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진실이기라도 한 양 집착하면서 우리 자신을 일체가 구족된 자아로 인식한다.

  무지[無明]가 사물의 참 성질을 가리어서 감추는 데에 반해, 지혜는 왜곡의 장막을 걷어내고 직접적 지각 특유의 생생함[活發發]으로 현상을 근원적 존재양식 차원에서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지혜 수련은 통찰력의 계발[관법수행 vipassanā-bhāvanā]에 집중된다. 통찰력이란 우리가 직접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인 경험세계에서 존재의 진실성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의 본성에 대한 깊고 포괄적인 들여다봄이다. 보통 우리는 경험 속에 잠겨서 경험과 완벽하게 동일화되어 경험을 파악하지 못한다. 경험을 떠나 살 수 없으면서도 오히려 경험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맹목성 때문에 경험은 잘못 해석되고 영속성, 즐거움, 자아와 같은 미망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인식적 왜곡 가운데 자아라는 미망이 가장 깊게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가장 집요하다. 즉, 우리 존재의 중심에 진실로 확정된 ‘나'가 실존하며, 그것과 우리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관념이다. 부처님은 이 자아라는 관념이 그릇된 것이며, 가리키는 실질적 대상이 없는 순전히 가상(假像)에 불과한 것이라고 가르치신다. 그러나 순전히 가상에 불과한 자아라는 관념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가상의 자아는 실은 엄청난 재난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아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모든 것을 ‘나[我]’와 ‘나 아님[非我]’, ‘내 것인 것’과 ‘내 것 아닌 것’으로 양분하게 된다. 그리고 양분법에 사로잡혀서 이 양분법이 낳은 붙잡거나 파괴하려는 충동이라는 번뇌의 희생물이 되어 결국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모든 번뇌와 고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그것들을 지탱하고 있는 자아의 환상을 무아의 깨달음으로 폭파하고 축출해버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계발이 담당해야 할 과업이다. 이 계발의 도정을 나아가는 첫 번째 걸음이 분석하는 일이다. 자아라는 견해를 뿌리 뽑으려면 경험 세계를 여러 벌의 요소들로 구획한 다음 다시 이 여러 벌 중 그 어느 쪽도 단독으로나 합쳐서나 자아라고 할 것이 없다는 점을 확인할 때까지 조리정연하게 점검해 나아가야 한다. 다른 어떤 심리학보다 더 높고 심오한 문제를 다루고 있는 불교의 철학적 심리학의 특성은 ‘경험’에 대한 분석적 태도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 경험이 마치 시계나 자동차처럼 부속품들로 분해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경험은 하위 단위로의 분해가 불가능한 단일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단일성은 실체가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기능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단일성을 띤다고 해서, 경험의 구성 요소들과 분리된 하나의 통합된 자아, 끊임없이 변천하는 흐름 속에서 불변의 동일성을 견지하는 그런 자아를 가정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자주 사용하는 분석법은 ‘나’라는 존재를 물질적 형태[色], 느낌[受], 지각[想], 심적 형성물들[行], 그리고 의식[識], 이렇게 다섯 가지 집착의 덩어리들[五取蘊]로 관하는 것이다.85) 그 중 물질적 형태[色]는 존재의 물질적 측면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감각기능들과 함께 신체 조직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고 또 인식 대상으로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네 가지 집합체들은 마음의 측면을 구성한다. 느낌은 정서적 색조를 제공하고, 지각은 주목하고 확인하는 요소이며, 심적 형성물들은 의욕적·감정적인 요소들이며, 식은 모든 경험에 불가결한 기본적 알아차림이다. 오온의 방식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보지도 못한 ‘자아’를 맹목적으로 들먹이는 대신, 경험을 오로지 그 구성요소 면에서만 보려는 시도가 가능해지게 된다. 이런 안목을 얻으려면 강한 마음챙김을 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마음챙김을 네 번째 염처에다 적용하는 것, 즉 존재의 요소들에 관한 수관[法隨觀 dhammānupassanā]을 닦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수행자는 오온과 오온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수관하며 머물게 된다.

  불제자는 현상[法], 즉 오취온에 대해 수관[dhamme dhammānupassī]하며 머문다. 그는 물질적 형태가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느낌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지각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심적 형성물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의식이 무엇이며 어떻게 일어나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86)


  또는 수행자는 위의 방법 대신, 감각 경험의 여섯 안팎의 영역, 즉 여섯 감각 기능들과 그에 상응하는 여섯 대상들을 수관할 수 있고 그들 간의 감각적 접촉으로부터 생겨나는 족쇄, 즉 번뇌들을 주시하면서 지낼 수도 있다.

  불제자는 현상[法], 즉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기반[六內處·六外處]을 수관하며 머문다. 그는 눈과 형상,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닿음, 마음과 마음의 대상을 안다. 더 나아가서 그는 이들에 의지해서 생겨나는 족쇄도 안다. 그는 일어나지 않았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며, 일어난 족쇄를 어떻게 버리며, 버린 족쇄가 장차 어떻게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되는지를 안다.87)


  존재의 요소들을 분석적으로 접근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관계 구조의 측면에서 살피게 되면 자아관은 현저히 약화된다. 잘 살펴보면, 온(蘊)들이 조건에 의지해서만이 존재한다는 것이 바로 드러난다. 오온 중에서 ‘나’라는 가정(假定)에 대한 근거가 될 만큼 온전한 자기 충족성을 띠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몸과 마음의 복합체의 요소는 무엇이나 시공(時空)의 양면으로 외연, 확장되는 광대한 사건들의 그물망에 매여 서로 의존해서 생겨난다[緣已生]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우리 몸은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생긴 것이고 음식, 물, 공기에 의존해서 지탱된다.
  느낌, 지각, 심적 형성물들[行]은 몸과 감각기능들에 의지해서 생겨난다. 그들은 대상(예로 형상)과 그에 상응하는 의식인 안식(眼識), 그리고 감각기능(눈)의 매개에 의한 대상과 의식의 접촉에 의해 생겨난다. 이번에는 의식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의식은 의식대로 감각력을 지닌 기관과 그리고 서로 맞물려 함께 생겨나는 심적 요소들[受·想·行]의 전체 집합에 의존한다. 다시 이 모든 생성과정은 존재 사슬[輪廻] 속의 전생(前生)들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전 존재들의 모든 숙업(宿業)을 상속받고 있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자족적 존재 양태를 향유하지 못한다. 모든 조건에 매인 현상들은 다른 것들에 부수하고 의지해서 상호관련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위의 두 접근 방식, 즉 오온의 분석과 연기적 안목은 자아라는 관념에 대한 지적(知的) 점착(粘着)을 끊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만으로는 잘못된 지각에 의해 지탱되는 뿌리 깊은 자아에의 집착을 모두 파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미묘한 자아집착의 형태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그것을 중화(中和)하고자 하는 지각, 다시 말해 현상의 공허성, 즉 공(空)에 대한 직관이 필요하다.
  이러한 통찰력은 존재를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무상(aniccatā), 만족스럽지 않음(dukkhatā), 자아가 없음(anattā)이라는 세 가지 보편적 표징(標徵: 三法印)에 따라 수관함으로써 생겨난다. 일반적으로 이 세 가지 표징 중 우리가 맨 먼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 무상인데, 통찰지의 수준에서 무상은 모든 것이 결국 종말에 이르고 만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수준에서 무상은 더 깊고 더 편만한 그 무엇을 의미하는데 말하자면 조건에 매인 일체 현상[諸行]은 끊임없는 변천 과정 속에 있다는 것, 거의 생기자마자 바로 부서지고 없어져 버리는 덧없는 사건들이라는 것을 뜻한다. 감각에 나타난 안정되어 보이는 대상들은 실제로는 찰나적 형성들(saṅkhārā)이 이어진 끈들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난다. 일반 상식적 의미의 인간 역시 물질적 사건들의 흐름인 색온(色蘊)과 나머지 네 가지 온들로 구성된 정신적 사건들의 흐름, 이 두 가닥이 서로 꼬여 만들어낸 흐름 속으로 용해된다.

  무상을 바로 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면 다른 두 가지 표징에 대한 통찰도 곧 뒤따라온다. 온(蘊), 즉 쌓임들이 항상 해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속적 만족에 대한 희망을 거기에 걸 수가 없다. 즉, 오온의 변화하는 성질 때문에 오온에 거는 기대가 무엇이든 그 기대는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통찰지로 보면 오온은 ‘둑카(dukkha)’, 즉 가장 깊은 뜻에서의 ‘고(苦)’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온들은 무상하고 만족스럽지 못하기에 자아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만약 온들이 자아, 혹은 자아에 속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들을 우리 뜻대로 지배하고 조종할 수 있고 영원한 행복의 원천으로 만들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오온을 지배하기는커녕 오온이야말로 바로 고통과 실망의 바탕임을 깨닫게 된다. 오온에게는 어떤 지배력도 통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이지만 자아가 아니며, 자아에 속한 것들도 아닌 것(anattā)으로, 단지 조건들에 의존해서 일어나는, 공(空)한, 주인 없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통찰지 수행 과정에 들어서면 팔정도의 여덟 요소들은 이전과는 다른 강도를 띠게 된다. 그들은 우선 힘이 강해진다. 그리고 목표를 향해 밀어붙이는 응집력 강한 단일한 통일체로 융합된다. 이 통찰지 수행에서는 여덟 요소[八支]와 세 수련[三學] 모두가 하나의 유기적 통합체로 된다. 제각기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받쳐 준다. 다시 말해 모두가 공부에 있어서 자기만의 고유한 기여를 하는 것이다. 계학(戒學)에 해당하는 도덕적 훈련의 요소들[正語·正業·正命]은 강력한 주의력으로 탈선 성향들을 계속 감시함으로써 비윤리적 행위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만든다. 정학(定學)에 해당하는 요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건 간에 그것을 흠잡을 수 없을 만큼 꼼꼼하게[正精進], 잊어버리는 일 없이[正念], 산만함이 없이[正定] 수관(隨觀)함으로써 마음을 현상들의 흐름에 확고하게 집주(集注) 유지되게 한다. 혜학(慧學) 중 바른 견해는 이제 통찰 지혜로서 점점 더 예리하고 심오해진다. 또 바른 의도 역시 시종일관 차분하고 균형잡힌 수관이 되도록 도움으로써 편견을 벗어나 한결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본연의 자세를 견지한다.

  통찰명상은 오온에 포함되는 ‘조건에 매인 형성물들[諸行 saṅkhārā]’을 그 대상영역으로 삼는다. 통찰명상의 과업은 제행의 본질적 특성들, 즉 무상·고·무아의 세 표징[三法印]을 가리고 있는 장막을 벗겨내는 일이다. 아직은 이 수행이 조건에 매인 사건들의 세계[有爲法界]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통찰단계의 팔정도를 세간의 길(lokiyamagga)이라고 한다.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우리는 팔정도의 혜(慧)라는 것이 그 목표가 기껏 세간적인 것에 그치고, 따라서 그 목표를 성취한다 해도 윤회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초월을 희구하며 우리를 해탈로 이끌어준다. 다만 그것이 수관하는 대상계가 아직은 조건에 매인 세계, 즉 유위법계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이 조건에 매인 것에 대한 세간적 수관은 어디까지나 조건에 매이지 않은 세계, 즉 초세간적 단계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가 타는 수레인 것이다. 이 통찰명상이 그 정점에 도달하게 되면, 그래서 형성된 모든 것들의 무상·고·무아성을 완벽하게 파악하게 되면, 마음은 유위법을 돌파하여 무위법, 즉 열반을 깨닫게 된다. 마음은 열반을 직시하게 되며, 열반을 즉각적 깨달음의 대상으로 삼게 되는 것이다.

  무위로의 돌파는 출세간도(出世間道 lokuttaramagga)라 불리는 어떤 형태의 식(識) 또는 심적 사건(event)에 의해서 달성된다. 이 출세간도는 네 단계, 즉 네 ‘출세간도’로 나타나며 그 각각은 한층 깊은 수준의 깨달음을 증표하고 더 완전한 수준의 해탈을 이룩하며 마지막 네 번째 단계에서는 완전한 해탈을 이룬다. 이 네 가지 도는 서로가 아주 근접한 가운데서 달성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비상하게 예리한 기능[利根]을 갖춘 사람은 앉은 그 자리에서 이 모두를 이루어내기도 하지만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시간이 걸리는 것이 보통이고 심지어는 여러 생에 걸쳐지기도 한다.88) 이들 네 출세간도는 모두 사성제에 대한 통찰력을 공유한다. 이 네 출세간도에서는 사성제가 개념적으로가 아니라 직관적으로 이해된다. 여기서는 사성제가 시각적으로 포착된다. 자증(自證)의 확실성으로 사성제가 존재에 관한 불변의 진리임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들 네 출세간도가 제공하는 진리의 상은 한 순간에 완결된다. 사고력을 이해수단으로 쓰는 성찰의 단계에서처럼 네 가지 진리가 순차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네 진리가 한꺼번에 보인다. 출세간도로 하나의 진리를 보는 것은 사성제 모두를 보는 것이 된다.

  도가 네 진리를 꿰뚫는 순간 마음은 각 진리에 상응하는 네 가지 기능을 동시적으로 수행한다. 마음은 조건에 매인 모든 존재들이 불만족이란 도장으로 날인되어 있는 것을 봄으로써 고성제를 완전히 파악한다. 이와 동시에 마음은 갈애를 버리고 고를 반복적으로 생성하는 이기심과 욕구의 덩어리를 잘라낸다. 다시 마음은, 이제는 내면의 눈앞에 곧바로 드러나 있는 소멸[滅], 즉 불사(不死)의 계(界), 열반을 자각한다. 그리고 네 번째로 마음은 성스러운 팔정도를 진전시키는데, 이 팔정도의 여덟 요소들은 엄청난 힘을 받은 데다 출세간에 이르도록 충분히 성장했기 때문에 이제 마음껏 활짝 피어난다.
  정견은 열반에 대한 직시(直視)로, 정사는 열반에의 마음기울임으로, 정어·정업·정명의 세 윤리적 요소들은 도덕적 탈선에 대한 제어로, 정정진은 출세간도의 식[道-識]상태의 정진력으로, 정념은 알아차림의 요소로, 그리고 정정은 한 점에 모아진 마음의 초점으로 제각기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동시에 네 가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양초가 동시에 심지를 태우고, 밀랍(蜜蠟)을 소모하고,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주는 것에 비유된다.89)

  이 출세간도들은 번뇌를 근절하는 특별한 과업을 맡고 있다. 이 도들을 증득하기 전의 집중의 단계나, 심지어 관법수행의 단계에서도 번뇌는 잘려나가지 않은 채 더 높은 정신 기능을 수련하는 기운에 눌려 약화되고 저지되고 억압되고 있을 뿐이었다. 번뇌는 의식의 깊숙한 밑바닥에서 언제든지 드러날 수 있는 잠재적 성향의 형태로 계속 꿈틀대고 있다. 그러나 출세간의 도에 이르면 마침내 번뇌를 근절하는 공부가 본격화된다.

  우리를 윤회에 묶는다는 측면에서 번뇌를 파악, 분류하면, (1)개아가 실존한다는 견해[有身見], (2)의심[疑], (3)규준과 의식(儀式)에 대한 집착[戒禁取], (4)감각적 욕구[欲貪], (5)혐오[瞋], (6)색계존재에 대한 욕구[色貪], (7)무색계존재에 대한 욕구[無色貪], (8)자만[慢], (9)들뜸[掉擧], (10)무지[無明], 이렇게 열 가지로 이루어진 한 벌의 ‘족쇄(saṁyojana)’들이 된다. 네 가지 출세간의 도들은 각기 특정 번뇌의 켜를 제거한다. 첫 번째의 ‘흐름에 들어서는 단계로서의 도[豫流道 sotāpatti-magga]’는 이 중 가장 거친 앞머리의 세 가지 족쇄를 끊어내고 다시는 일어날 수 없도록 근절해 버린다. 개아(個我)가 실존한다는 견해(sakkāya-diṭṭhi), 즉 오온 속에 자아가 실존한다는 견해는 일체 법의 무자성(無自性)을 본 이상 끊어질 수밖에 없다. 부처님이 천명하신 진리를 파악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았기 때문에 ‘의심’이 또한 제거되고, 다시는 불확실성으로 인해 퇴행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해탈은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만 얻어질 뿐, 엄격한 도덕률이나 의식 준수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규준과 종교 의식에의 집착’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이 도(道)에는 ‘과(果 phala)’라는 또 다른 출세간의 의식[出世間識] 상태가 곧바로 따라오는데, 이것은 도가 행한 번뇌 제거 작업의 결과물이다. 각 도에는 그것 자체의 과가 뒤따르는데, 이 과에서 마음은 세간의식의 수준으로 다시 내려가기 전에 잠시 몇 순간 동안 열반의 더없는 행복과 평화를 누린다. 첫 번째는 ‘흐름에 듦’의 과로서 이 과를 경험한 사람은 ‘흐름에 든 사람(sotāpanna)’이 된다. 그는 구극의 해탈로 실어다주는 법의 흐름에 들어선 것이다. 이제 그에게 해탈은 기약된 것이고 더 이상 깨닫지 못한 세속범부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의 마음 됨됨이 속에는 여전히 번뇌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일곱 생까지도 걸릴 수 있겠지만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핵심적 자각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퇴전하는 일은 결코 없다.

  예리한 기능[利根]을 갖춘 열성적인 수행자라면 예류과에 도달한 후에도 노력을 늦추지 않고 되도록 빨리 모든 도를 마치기 위해 힘을 쏟는다. 그는 다시 통찰력 수관의 실천을 계속해서 통찰지의 오르막 단계를 통과하여 조만간에 두 번째 도인 ‘한 번 더 돌아오는 자의 도[一來道 sakadāgāmi-magga]’에 도달한다. 이 출세간의 도는 족쇄 중 어떤 것을 완전히 근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의 뿌리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이 도를 따라가면 수행자는 그것의 과를 경험하게 되고 이제 완전한 해탈을 얻기 위해 많아야 한 번만 더 이 세간으로 되돌아올 뿐인 ‘한 번만 더 돌아오는 이’가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수관의 과업에 몰두한다. 다음의 출세간 실현단계에서 그는 세 번째 도, ‘돌아오지 않는 자의 도[不還道 anāgāmi-magga]’에 도달하게 되고 거기서 ‘감각적 욕구’와 ‘악의’라는 족쇄를 끊어낸다. 이 시점 이후로는 어떤 경우에도 그는 다시 감각적 쾌락을 탐하는 욕구의 손아귀 속으로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며, 어떤 자극에 대해서도 분노, 혐오, 그리고 불만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돌아오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그는 어떤 미래세에도 사람이라는 존재 상태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금생에 마지막 도인 아라한의 도에 들지 않으면 죽은 후에 색계(rūpaloka) 중 상천[五淨居天]에 재생하여 거기서 바로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 수행자는 다시금 발분 노력해서 통찰력을 발전시켜 마침내 그 절정에서 네 번째의 길, 아라한의 도(arahatta-magga)에 든다. 여기서 드디어 그는 나머지 다섯 족쇄들 ― 색계존재에 대한 욕구, 무색계존재에 대한 욕구, 자만, 들뜸, 무지[無明]를 끊어낸다. ‘색계존재에 대한 욕구’는 네 가지 선에 의해서 접근할 수 있게 된, 보통 ‘브라흐마 세계[梵天]’라는 이름 아래 포괄되는 천상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이다. ‘무색계존재에 대한 욕구’는 사무색정의 성취에 의해 접근할 수 있게 되며, 사무색계에 태어나고자 하는 욕구이다. 다음으로 거론되는 ‘자만(māna)’은 자신의 덕성과 재능을 과대평가함으로써 곧잘 빠지게 되는 조악한 유형의 자존심이 아니라 개념적 차원의 명료한 자아관이 근절된 후에도 미세한 에고 관념이 지속되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자만을 경전에서는 ‘내가 있다는 만(慢 asmimāna)’이라 한다. 다음으로 ‘들뜸[掉擧 uddhacca]’은 미처 완전히 깨닫지 못한 마음에 남아있는 미세한 흥분이며, 마지막의 ‘무지[無明 avijjā]’는 사성제의 완전한 이해를 막는 근본적인 인식의 모호함이다. 두껍게 덮인 무지[無明]는 앞의 세 도에서 지혜의 기능[慧根]으로 마음에서 닦아냈지만, 아주 얇은 무명의 덮개는 심지어 ‘돌아오지 않는 이’에게서도 진리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라한의 도는 이 마지막 무지[無明]의 덮개마저 벗겨내고, 나머지의 모든 심적 번뇌들도 벗겨낸다. 이 도는 사성제의 완벽한 이해로 끝맺는다. 완벽한 이해는 첫째, 고의 진리의 깊이를 완전하게 파악한다. 둘째, 고가 솟아나는 원천인 갈애를 근절한다. 셋째, 고의 멸에 해당하는 것으로, 조건에 매이지 않은 경지인 열반을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깨닫는다. 그리고 끝으로 팔정도의 여덟 가지 요소들의 계발을 완성시킨다.

  네 번째 도(道)와 과(果)에 도달함으로써 수행자는 바로 이생에서 모든 결박으로부터 해방된 사람, 즉 아라한이 된다. 아라한은 팔정도를 그 끝까지 걸었고, 빠알리 경전에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그처럼 자주 언급되고 있는 궁극적 경지를 실제로 구현하는 삶을 살게 된다.
  “태어남[生]은 깨어졌다. 성스러운 삶이 영위되었다. 해야 할 일은 해 마쳤다. 이제 어떤 상태의 존재로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라한은 더 이상 도를 닦는 자가 아니라 도의 살아 있는 구현자, 곧 무학(無學)이다. 도의 여덟 가지 요소를 완성의 경지까지 발전시켰기 때문에 이제 이 해방된 자[解脫人]는 그 요소들의 결실인 깨달음과 구경의 해탈을 누리며 산다.



 

맺는말


  이것으로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고로부터 시작해서 해탈에서 끝나는 길, 즉 팔정도의 조망은 끝났다. 지금 우리 위치에서 이 도의 높은 경지에 이르는 것은 요원해 보이고, 팔정도 수행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는 것도 어렵게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실현의 고지들이 지금은 아득히 멀지라도 그곳에 이르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바로 여기 우리 발밑에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 도의 여덟 가지 요소들에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은 결단과 노력만 기울인다면 얼마든지 우리 마음속에 확립시킬 수 있는 심적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각자의 견해를 똑바르게 하고[正見] 의도를 분명히 하는 일[正思]부터 시작하면 된다. 다음으로 우리의 행위, 즉 말과 행동, 그리고 삶의 방식을 순화한다[正語·正業·正命]. 이런 조치를 기반으로 해서 우리는 정진력과 마음챙김을 수단으로 삼아 집중과 통찰력을 계발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 나가야 한다. 그러면 남는 것은 결과를 얻으려고 안달하지 않고 점진적으로 수행하고 발전하는 일에 스스로를 맡기는 것뿐이다. 그 진전은 사람에 따라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그러나 빠르다고 우쭐할 것도, 느리다고 안달할 것도 없다. 꾸준히 지속적으로 수행하면 해탈은 필연적 결과로서 반드시 따라온다. 최종 목표에 이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오로지 시작하는 일과 지속하는 일 두 가지뿐이다. 이 두 요구사항만 제대로 충족시키면 목표는 반드시 성취될 수 있다. 이것이 어김이 없는 정칙, 즉 불법[Dhamma]이다.




비구 보디(Bhikkhu Bodhi 1944- )

  보디 스님은 법랍으로 보아 ‘마하테라 보디(보디큰스님)’로 부르는 것이 마땅한데 본인이 겸양의 뜻 때문인지 ‘비구 보디’라는 호칭을 즐겨 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
  스님은 미국 뉴욕 출생으로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 후 스리랑카로 가서 불교교단에 들었다. 유명한 학승 발랑고다 아난다 마이뜨레야 스님 밑에서 빠알리어와 불법을 공부한 후, 1972년에 사미계를 받고 다음해에 비구계를 받았다. 그는 주요 경전 네 권과 그 주석서들의 번역을 포함한 상좌부 불교에 관한 많은 글을 썼다. 1984년부터 2002년까지 불자출판협회[BPS]의 편집을 책임졌고, 1988년부터는 회장직을 맡았으며 지금은 명예회장으로 있다.
  〈고요한 소리〉에서 번역, 출간된 저작으로는 보리수잎·열아홉《자유의 맛 The Taste of Freedom》, 법륜·열《보시 DĀNA― The Practice of Giving》가 있다.


 

부록 1 : 팔정도의 요소별 분석90)

 

빠알리어우리말 역어영어

sammā diṭṭhi 바른 견해[正見] Right view
dukkhe ñāṇa 고를 앎 understanding suffering
dukkhasamudaye ñāṇa 고의 생성을 앎 understanding its origin
dukkhanirodhe ñāṇa 고의 소멸을 앎 understanding its cessation
paṭipadāye ñāṇa 고의 소멸로 이끄는 길을 앎 understanding the way leading to its cessation
sammā saṅkappa 바른 의도[正思] Right intention
nekkhamma saṅkappa 욕망을 버리려는 의도 intention of renunciation
abyāpāda saṅkappa 선의를 베풀려는 의도 intention of good will
avihiṁsā saṅkappa 해치지 않으려는 의도 intention of harmlessness
sammā vācā 바른 말[正語] Right speech
musāvādā veramaṇī 거짓말 멀리하기 abstaining from false speech
pisuṇāya vācāyā veramaṇī 말전주 멀리하기 abstaining from slanderous speech
pharusāya vācāyā veramaṇī 거친 말 멀리하기 abstaining from harsh speech
samphappalāpā veramaṇī 쓸데없는 말 멀리하기 abstaining from idle chatter
sammā kammanta 바른 행위[正業] Right action
pāṇātipātā veramaṇī 살생 멀리하기 abstaining from taking life
adinnādānā veramaṇī 주어지지 않은 것 취하기를 멀리하기 abstaining from stealing
kāmesu micchācārā veramaṇī 부정한 성행위 멀리하기 abstaining from sexual misconduct
sammā ājīva 바른 생계[正命] Right livelihood
micchā ājīvaṁ pahāya sammā ājīvena jīvitaṁ kappeti> 그릇된 생계수단 을 버리고 바른 형태의 생계수단으로 살아가기 giving up wrong livelihood one earns one's living by a right form of livelihood
sammā vāyāma 바른 노력[正精進] Right effort
saṁvarappadhāna 때가 끼지 못하도록 하는 노력 the effort to restrain defilements
pahānappadhāna 때를 씻어내려는 노력 the effort to abandon defilements
bhāvanāppadhāna 건전한 상태를 개발하려는 노력 the effort to develop wholesome states
anurakkhaṇappadhāna 건전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 the effort to maintain wholesome states
sammā sati 바른 마음챙김[正念] Right mindfulness
kāyānupassanā 몸을 관하기 mindful contemplation of the body
vedanānupassanā 느낌을 관하기 mindful contemplation of feelings
cittānupassanā 마음상태를 관하기 mindful contemplation of the mind
dhammānupassanā 법을 관하기 mindful contemplation of phenomena
sammā samādhi 바른 집중[正定] Right concentration
paṭhamajjhāna 초선 the first jhāna
dutiyajjhāna 제이선 the second jhāna
tatiyajjhāna 제삼선 the third jhāna
catutthajjhāna 제사선 the fourth jhāna

 


 

부록 2 : 추천 도서 목록

 

  • 냐나띨로까 스님 지음·김재성 옮김《붓다의 말씀 The Word of the Buddha》 (BPS 14th ed., 1968/고요한 소리 2008)
  • Ledi Sayadaw《The Noble Eightfold Path and Its Factors Explained》 (BPS Wheel 245∼247)
  • 삐야닷시 스님 지음·한경수 옮김 《붓다의 옛길 The Buddha's Ancient Path》 (BPS 3rd ed. 1979/시공사 1996)

 

  • 냐나띨로까 스님 지음·이진오 옮김《업과 윤회 Karma and Rebirth》 (BPS Wheel 9/고요한 소리 보리수잎·스물하나)
  • 프란시스 스토리 지음·재연스님 옮김《사성제 The Four Noble Truths》 (BPS Wheel 34∼35/고요한 소리 법륜·열다섯)
  • Ñāṇamoli, Bhikkhu 《The Discourse on Right View》 (BPS Wheel 377∼379)
  • Wijesekera, O.H. de A 지음·이지수 옮김 《존재의 세가지 속성-삼법인 The Three Signata》 (BPS Wheel 20/고요한 소리 법륜·넷)

 

  • 냐나뽀니까 스님 지음·강대자행 옮김《거룩한 마음가짐-사무량심 The Four Sublime States》 (BPS Wheel 6/고요한 소리 보리수잎·다섯)
  • Ñāṇamoli, Thera 《The Practice of Lovingkindness》 (BPS Wheel 7)
  • Prince, T《Renunciation》 (BPS BL B36)

 

  • Bodhi, Bhikkhu《Going for Refuge and Taking the Precepts》 (BPS Wheel 282∼284)
  • Narada Thera《Everyman's Ethics》 (BPS Wheel 14)
  • Vajirañāṇavarorasa 《The Five Precepts and the Five Ennoblers》 (Bangkok:Mahamakuta, 1975)

 

  • 냐나뽀니까 스님 지음·재연스님 옮김《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 방법 The Five Mental Hindrances and Their Conquest》 (BPS Wheel 26/고요한 소리 법륜·아홉)
  • 삐야닷시 스님 지음·전채린 옮김《칠각지 The Seven Factors of Enlightenment》 (BPS Wheel 1/고요한 소리 법륜·열여섯)
  • Soma Thera《The Removal of Distracting Thoughts》 (BPS Wheel 21)
  • Nyanaponika Thera《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 (London: Rider, 1962; BPS 1992)
  • Nyanaponika Thera《The power of Mindfulness》 (BPS Wheel 121∼122)
  • Nyanasatta Thera《The Foundations of Mindfulness (Satipaṭṭhāna Sutta)》 (BPS Wheel 19)
  • Soma Thera《The Way of Mindfulness》(BPS 3rd ed., 1967)
  • Buddhaghosa, Bhadantacariya《The Path of Purification(Visuddhimagga)》 Translated by Bhikkhu Ñāṇamoli. 4th ed. (BPS 1979)
  • Khantipālo, Bhikkhu《Calm and Insight》 (London:Curzon, 1980)
  • Ledi Sayadaw《A Manual of Insight》(BPS Wheel 31∼32)
  • Nyanatiloka Thera《The Buddha's Path to Deliverance》 (BPS 1982)
  • Solé-Leris, Amadeo《Tranquillity and Insight》 (London:Rider, 1986; BPS 1992)
  • Vajirañāṇa, Paravahera《Buddhist Meditation in Theory and Practice》 2nd ed.(Kuala Lumpur, Malaysia: Buddhist Missionary Society 1975)

 


 

This translation was possible
by the courtesy of the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54, Sangharaja Mawatha
P.O.BOX 61
Kandy, Sri Lanka



법륜·열여덟
팔 정 도
聖八支道
2009년 9월 30일 초판 1쇄 발행
2011년 2월 15일 개정판 1쇄 발행
지은이 : 비구 보디
옮긴이 : 전병재
펴낸이 : 한기호
펴낸곳 : 고요한 소리
편집·제작 : 도서출판 초롱(02-738-5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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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등록 : 제 1-879호 1989. 2. 18
ISBN 978-89-85186-18-6
값 1,000원

 



▲〈고요한 소리〉는 근본불교 대장경인 빠알리 경전을 우리말로 옮기는 불사를 감당하고자 발원한 모임으로, 먼저 스리랑카의 불자출판협회(BPS)에서 간행한 훌륭한 불서 및 논문들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작은 책자는 근본불교·불교철학·심리학·수행법 등 실생활과 연관된 다양한 분야의 문제를 다루는 연간물(連刊物)입니다. 이 책들은 실천불교의 진수로서, 불법을 가깝게 하려는 분이나 좀더 깊이 수행해 보고자 하는 분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의 출판비용은 뜻을 같이 하는 회원들이 보내주시는 회비로 충당되며, 판매비용은 전액 빠알리경전의 역경과 그 준비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됩니다. 출판비용과 기금조성에 도움주신 회원님들께 감사드리며 〈고요한 소리〉모임에 새로이 동참하실 회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 해


1) [역주] 여기서 ‘법-율’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저자의 말대로 가장 넓은 뜻으로 해석하여, 우리가 따르고 지켜야 할 길이라는 점에서 율로 볼 수 있다는 말일 뿐 ‘경·율·론 삼장’에서 뜻하는 식의 엄격한 의미에서의 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2) [역주]《붓다의 말씀(The Word of the Buddha)》(BPS) 김재성 옮김, 고요한 소리 간행 2008 개정판. (이하 인용된 이 책의 쪽수는 우리말 번역본의 것임.) 본문으로

3) 《청정도론(Visuddhimagga)》붓다고사 지음, 냐나몰리 영역(英譯) BPS 1979. 본문으로

4) 무명(無明)은 사실상 불선근(不善根)인 치암(癡暗 moha)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그래서 부처님도 심리학적 문맥에서 정신적 요인에 관해 말씀할 때는 대체로 ‘치암(moha)’이라는 용어를 쓰시고 윤회의 인과적 근거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는 ‘무명(avijjā)’이라는 용어를 쓰신다. (이상은 저자의 주석)
  [역주] 그러나 경에는 무명(無明)은 대미망(大迷妄)이다(avijjā mahāmoha)라는 구절도 나오기 때문에 이 말씀이 적시하는 바를 음미해 볼 필요도 있겠다. (《숫따니빠따》3품 12경 730게송) 본문으로

5) 《상응부》56상응 11경;《붓다의 말씀》77쪽. 본문으로

6) 《붓다의 말씀》78쪽. 본문으로

7) adhisīlasikkhā, adhicittasikkhā, adhipaññāsikkhā 본문으로

8) 《증지부》10법집 206경;《붓다의 말씀》66쪽. 본문으로

9) 《중부》117경;《붓다의 말씀》94쪽. 본문으로

10) [역주] cetanā를 ‘의도’로 번역하는 것이 상례이나 저자가 cetanā를 volition으로, saṅkappa를 intention으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역자도 cetanā를 ‘의욕’으로, saṅkappa를 ‘의도’로 옮겼다. 본문으로

11) 《증지부》6법집 63경;《붓다의 말씀》65쪽. 본문으로

12) 《중부》9경 Ⅰ권 46-47쪽;《붓다의 말씀》82쪽. 본문으로

13) [역주] 말전주 : 이쪽 말을 저쪽에, 저쪽 말을 이쪽에 전하는 이간질. 본문으로

14) [역주] 중국 대승불교에서는 vipāka를 과보(果報:구역)·이숙(異熟:신역)으로, 그리고 phala는 과(果)로 옮기면서 종파별로 매우 상세하게 구분·해석하고 있다. 본문으로

15) 《장부》2경,《중부》27경 등 참조. 자세한 것은《청정도론》ⅩⅢ장 72~101절 참조. 본문으로

16) 《장부》22경 Ⅱ권 312쪽;《붓다의 말씀》81쪽. 본문으로

17) 《장부》22경; 《상응부》56상응 11경;《붓다의 말씀》37쪽. 본문으로

18) 《장부》22경 Ⅱ권 308쪽;《붓다의 말씀》60쪽. 본문으로

19) 《장부》22경 Ⅱ권 310쪽;《붓다의 말씀》70쪽. 본문으로

20) nekkhammasaṅkappa : 욕심놓음의 의도[出離思]
  abyāpādasaṅkappa : 선의의 의도[無恚思]
  avihiṁsāsaṅkkppa : 해치지 않음의 의도[無害思] 본문으로

21)kāmasaṅkappa : 욕심냄의 의도
  byāpādasaṅkappa : 악의의 의도
  vihiṁsāsaṅkappa : 해침의 의도
  kāma(欲)는 흔히 감각적 욕구를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보다 넓은 의미의 해석, 즉 모든 형태(욕계·색계·무색계)에서의 자아추구 욕구(desire)까지 포함하여 해석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22) 《증지부》1법집 17경. 본문으로

23) 엄밀히 말해서 탐욕 또는 욕망(rāga)은 살인, 절도, 간음 등과 같이 윤리의 기본원칙을 범하는 행위를 하게 만들 때에만 비도덕적인 것이 된다. 단순히 생각에 머물거나 아니면 좋은 음식을 즐긴다거나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성관계를 가진다거나 하는 것 등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지 않은 행위로 끝나는 한, 욕망은 도덕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도 여전히 우리를 고에 얽매이게 만드는 갈애의 한 형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본문으로

24) 감각적 욕망에 얽매인 고(dukkha)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중부》13경을 참조할 것. 본문으로

25) 이 말은 자애가 ‘자기와의 사적 관련성이 없다’고 한 이전의 말과 상충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외관상 그렇게 보일 뿐이다.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향해 자애를 증진시킬 경우, 자신을 객관적으로 제 삼자로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렇게 계발된 성질의 사랑은 자신을 소중히 여기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라는 존재의 안녕도 바라는 공평한 애타적 바람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6) 여기 제시된 공식적 언구 대신 다른 유효한 언구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이 점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냐나몰리 스님의《자비관 The Practice of Lovingkindness》(BPS Wheel 7) 참조.
  [역주] 아차리야 붓다락키따《자비관 Mettā:The Philosophy and Practice of Universal Love》(BPS Wheel 365-366) (고요한 소리 법륜·여덟) 참조. 본문으로

27) 《증지부》10법집 176경;《붓다의 말씀》117쪽. 본문으로

28) 《중부》61경. 본문으로

29) 《증지부》10법집 176경;《붓다의 말씀》117-118쪽. 본문으로

30) 《장부》의 복주(復註). 본문으로

31) 《증지부》10법집 176경;《붓다의 말씀》118쪽. 본문으로

32) 《중부》21경;《붓다의 말씀》118쪽. 본문으로

33) 《증지부》10법집 176경;《붓다의 말씀》119쪽. 본문으로

34) [역주] 오늘날 같으면 단연 첫 손가락에 꼽혀야 할 인터넷과 휴대 전화가 1984년에 발행된 이 글에서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이 새로운 사태추이가 얼마나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본문으로

35) 《증지부》10법집 176경;《붓다의 말씀》121쪽. 본문으로

36) 와지라냐나와로라사 왕자 승왕《다섯의 계와 다섯의 고귀하게 만드는 것들 The Five Precepts and the Five Ennoblers》(방콕 1975) 1-9쪽. 본문으로

37) 《증지부》10법집 176경;《붓다의 말씀》121쪽. 본문으로

38) 앞의《다섯의 계와 다섯의 고귀하게 만드는 것들》10-13쪽에 더 자세한 목록이 있음. 본문으로

39) 《증지부》10법집 176경;《붓다의 말씀》121쪽. 본문으로

40) 다음은 앞의《다섯의 계와 다섯의 고귀하게 만드는 것들》 16-18쪽 요약한 것. 본문으로

41) 《증지부》4법집 62경;《증지부》5법집 41경;《증지부》8법집 54경 참조. 본문으로

42) 앞의《다섯의 계와 다섯의 고귀하게 만드는 것》45-47쪽. 본문으로

43) 《빠빤짜수다니 Papañcasūdanī》(《중부》주석서). 본문으로

44) 《중부》70경 Ⅰ권 481쪽;《붓다의 말씀》129쪽. 본문으로

45) 《증지부》4법집 13경 Ⅱ권 15쪽;《붓다의 말씀》125쪽. 본문으로

46) [역주] 법륜·아홉 《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 방법》(고요한 소리 2010)참조, 법륜·열여섯《칠각지》(2006) 48쪽 참조. 본문으로

47) 이들의 빠알리어는 kāmacchanda, vyāpāda, thīna-middha, uddhacca-kukkucca, vicikicchā이다. 본문으로

48) 《증지부》4법집 14경 Ⅱ권 16쪽;《붓다의 말씀》125-126쪽. 본문으로

49) 《증지부》4법집 13경;《붓다의 말씀》126쪽. 본문으로

50) 《증지부》4법집 14경;《붓다의 말씀》126쪽. 본문으로

51) 《중부》20경〈생각의 진정 경〉;《붓다의 말씀》127쪽. 본문으로

52) 각종 장애를 하나하나 다루는 방법에 대한 충분한 설명은〈사띠빠따나 경〉(《중부》10경, 《장부》22경)에 대한 주석 참조. 소마 장로의《마음챙김의 길 The Way of Mindfulness》116-126쪽에 주석문과 복주(復註)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음. 본문으로

53) 《증지부》4법집 13경;《붓다의 말씀》127-128쪽. 본문으로

54) 《증지부》4법집 14경;《붓다의 말씀》128쪽. 이 일곱 가지 인자의 빠알리어 이름을 순서대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 satisambojjhaṅga, 2. dhammavicayasambojjhaṅga, 3. viriyasambojjhaṅga, 4. pītisambojjhaṅga, 5. passaddhisambojjhaṅga, 6. samādhisambojjhaṅga, , 7. upekkhāsambojjhaṅga. 본문으로

55) 《증지부》4법집 13경;《붓다의 말씀》128쪽. 본문으로

56) 《증지부》4법집 14경;《붓다의 말씀》128쪽. 본문으로

57) Dhammo sandiṭṭhiko akāliko ehipassiko opanayiko paccattaṁ veditabbo viññūhi.《중부》7경 등.
  [역주] 저자는 본문에서 다음과 같이 영역(英譯)하고 있다. The Buddha says that the Dhamma, the ultimate truth of things, is directly visible, timeless, calling out to be approached and seen. He says further that it is always available to us, and that the place where it is to be realized is within oneself. 漢譯은 ‘現前, 非時, 來觀, 導引的, 智者內證’으로 되어 있다. 보리수잎·서른여덟《왜 불교인가》(2001)13쪽;《장부》16경 Ⅱ권 93쪽;《붓다의 말씀》(2008)25쪽 주3 참조. 본문으로

58) [역주] ‘presence of mind’를 관용구로 보면 ‘침착’이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살려 마음챙김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본 뜻에 가까울 것 같아서 ‘지금 여기에 마음 둠’으로 옮긴다. 본문으로

59) [역주] 생각-과정 중 16, 17번째의 등록. 법륜·열셋《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고요한 소리 2009) 75쪽 참조. 본문으로

60) 《청정도론 주석서(빠라맛따 만주사)》487.《청정도론》XIV장, 주64 참조. 본문으로

61) satipaṭṭhānā라는 말은 때로는 대상 쪽에 강조점을 두어 ‘마음챙김의 토대’로 번역되기도 하고 때로는 관찰자 쪽에 강조점을 두어 ‘마음챙김의 적용’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경전과 주석서 모두 이 양 갈래의 해석을 다 용인한다. 본문으로

62) 《장부》22경;《붓다의 말씀》130-131쪽. 본문으로

63) 《장부》22경;《붓다의 말씀》130쪽. 본문으로

64) [역주] 수관(隨觀 anupassanā) : 영어는 contemplation. 법륜·열다섯《사성제》(고요한 소리 2009) 120쪽 [역주] 참조. 본문으로

65) 자세한 것은 《청정도론》Ⅷ장 145-244절 참조. 본문으로

66) 소마 테라《마음챙김의 길 The Way of Mindfulness》(BPS 3rd ed., 1967) 58-97쪽 참조. 본문으로

67) 부정관(不淨觀 asubha-bhāvanā) : 이 명상주제는 염오의 인식(paṭikkūlasaññā) 또는 몸에 관한 마음챙김[念身;至身念 kāyagatā sati]이라고도 부름. 본문으로

68) [역주] 여기서 32가지가 언급되고 있지만 이는 후기의 남방전통에 따른 것이고 경전(《장부》22경, 《중부》119경)에서는 뇌를 뺀 31가지를 들고 있다. 본문으로

69) 자세한 것은《청정도론》Ⅷ장 42-144절 참조. 본문으로

70) 자세한 것은 《청정도론》Ⅺ장 27-117절 참조. 본문으로

71) [역주] 남방불교 전통에서는 심(心)과 식(識)을 같은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저자가 편찬한 불교 전문용어 사전에는 citta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cognizance, (manner of) consciousness, mind(loosely synonymous with ceto, mano and viññāṇa, technically viññāṇa considered with its affective colouring, and classified as such into 89 kinds in Dhammasaṅgaṇi)’
  한편 유부와 대승의 유식론에서는 이러한 식 또는 찟따[心]를 심왕(心王)이라 하고 쩨따시까를 심소(心所)라 한다. 본문으로

72) [역주] 빠알리 원문은 saṅkhittaṃ cittaṃ으로 되어 있는데 저자가 the cramped mind라고 표현하고 있어 ‘갇힌 마음’이라고 옮김. 《장부》를 영역(英譯)한 T. W. Rhys Davis는 이를 ‘the mind is restricted’라고 번역하였고 Upalavanna스님은 ‘It is a non-scattered mind’(《중부》10경)라고 번역하였다. 본문으로

73) [역주] 이 16가지 마음은 사념처 중 심념처에 나오는 것으로 그 빠알리어는 다음과 같다.(《중부》10경;《장부》22경 등)
  sarāgaṃ cittaṃ---vītarāgaṃ cittaṃ
  sadosaṃ cittaṃ---vītadosaṃ cittaṃ
  samohaṃ cittaṃ---vītamohaṃ cittaṃ
  saṅkhittaṃ cittaṃ---vikkhittaṃ cittaṃ
  mahaggataṃ cittaṃ---amahaggataṃ cittaṃ
  sauttaraṃ cittaṃ---anuttaraṃ cittaṃ
  samāhitaṃ cittaṃ---asamāhitaṃ cittaṃ
  vimuttaṃ cittaṃ---avimuttaṃ cittaṃ. 본문으로

74) 이에 관한 충분한 설명은 소마 테라의《마음챙김의 길 The Way of Mindfulness》(BPS 3rd ed., 1967) 116-127쪽 참조.
  [역주] 법륜·아홉《다섯 가지 장애와 그 극복 방법》(고요한 소리 2010) 참조. 본문으로

75) 앞의《마음챙김의 길 The Way of Mindfulness》131-146쪽 참조. 본문으로

76) [역주] 남방불교 전통에서는 심(心)·의(意)·식(識)을 동의어로 본다. 본문으로

77) 여기서는 이 문제를 요점적으로만 살펴보기로 한다. 자세한 것은 《청정도론》Ⅲ-Ⅳ장 참조. 본문으로

78) [역주] 상좌부 불교 전통에는 시체가 변해가는 과정에 대한 명상법에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염신경》에 나오는 아홉 단계로 구성된 묘지명상법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열 단계로 구성된 시체명상법이다. 부풂[膨脹], 검푸러짐[靑瘀], 곪아 문드러짐[膿爛], 잘림[斷壞], 뜯어먹힘[食殘], 흩어짐[散亂], 잘려 흩어짐[斬矺離散], 피가 흘러내림[血塗], 벌레가 우글거림[蟲聚], 해골[骨]이 그 열 단계다.《Encyclopaedia of Buddism》Vol.Ⅱ 273쪽 참조. 본문으로

79) [역주] 금구의 말씀·하나《염신경 Kāyagatāsati Sutta》(고요한 소리 1991) 참조. 본문으로

80) 《청정도론》Ⅳ장 88-109절. 본문으로

81) 흔히 볼 수 있는 ‘trance(황홀경)’, ‘musing(묵상)’ 등으로 옮기는 것은 전적으로 그르치는 것이 되므로 폐기해야 한다. 본문으로

82) [역주] ‘쟈나’는 한자권에서도 마땅한 번역어를 찾지 못한 탓인지 음역인 선나(禪那, 중국발음은 챤나)를 주로 썼다. 이를 줄인 것이 선(禪)으로, 한국에서는 ‘선’, 일본에서는 ‘젠’으로 읽는다. 이 일본발음이 서구에 펴져 ‘Zen’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저자는 Zen에 담긴 북방불교 특히 선종의 특성을 의식한 듯 이 말을 피해 ‘jhāna’를 쓰고 있다. 그러나 초선, 이선 식으로 쓰면 경전의 뜻이 잘 반영되기 때문에 여기서는 ‘선’으로 옮기겠다. 본문으로

83) 《장부》22경;《붓다의 말씀》196-200쪽. 본문으로

84) anicce niccavipallāsa:dukkhe sukhavipallāsa:anattani attavipallāsa《증지부》4법집 49경. 본문으로

85) 빠알리어로는 >rūpakkhandha, vedanākkhandha, saññākkhandha, saṅkhārakkhandha, viññāṇakkhandha. 본문으로

86) 《장부》22경;《붓다의 말씀》167쪽. 본문으로

87) 《장부》22경;《붓다의 말씀》168-171쪽. 본문으로

88) 이 책 초판(1984)의 이 부분에서 필자는 이 네 도는 순차적으로 통과해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보다 아래 단계에 도달하지 않은 채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주석서들의 입장임에는 틀림없는 듯하다. 그러나 경전에는 범부의 단계에서 제 삼, 혹은 제 사의 도(道)와 과(果)에까지 곧바로 가는 사람들 얘기가 가끔 나온다. 주석가들은 이들이 각기 전 단계를 빠른 속도로 통과한 것으로 설명하지만 막상 경전에서는 이런 경과과정을 거쳤다는 표시를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아래 단계라는 중간 성취가 없는 채 상위 단계를 곧바로 증득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본문으로

89) 《청정도론》ⅩⅫ장 92-103절 참조. 본문으로

90) [역주] 이 부록에 나오는 영어 어휘들은 저자가 본문 중에서 일관되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용어를 정리해보자는 뜻에서 덧붙인 것 같다. 우리말 역어는 저자의 영역을 충실히 옮겨놓고자 선택한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 저자는 불교 주요개념을 영어로 번역함에 있어서 어떤 경우에는 그때그때의 문맥에 따라 다른 어휘를 택하면서 번역의 일관성을 고집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역자도 주요개념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문맥에 따라 다른 역어를 택한 경우도 있다. 역어 선택에 성급한 일관성 고집은 더 좋은 번역을 가로막는 장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여기서는 비교적 융통성 있게 역어들을 택하였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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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

법륜·열 여덟 팔정도 聖八支道 The Noble Eightfold Path Way to the End of Suffering Bhikkhu Bodhi 비구 보디 지음|전병재 옮김 The Wheel Publication No. 308-311 1984 Second edition(revised) 1994 BUDDHIST PUBL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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