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불교 Early Buddhism

초기불교의 연기와 무아

수선님 2022. 6. 19. 13:26

『아함경의 이해』

초기불교의 緣起와 無我

 

 

 

 

   목 차  

 

1. 머리말

 

2. 제법의 법칙, 緣起

1) 연기법의 발견

2) 연기로 이루어진 제법의 실상

 

3. 연기로 성립된 존재, 無我

1) 다섯가지 작용의 집합체, 五蘊

2) 연기를 모르는 존재의 괴로움, 十二緣起

3) 인간의 의식세계, 六境 六根 六識의 결합

4) 네가지 특성, 四大

5) 연기와 무아의 관계

➀ 꽃향기 비유

➁ 강물의 비유

➂ 수레의 비유

6) 무아에 대한 몇 가지 의문

➀ 무아라는 슬픔

➁ 윤회의 주체

➂ 존재의 사후세계

➃ 형이상학적 질문

 

4. 연기와 무아의 사상적 의의

1) 기존 절대신 체계에 대한 실증적 반격

2) 인과법을 통한 도덕률 제시

3) 자비 평등사상 고취

4) 개인적 내적 성숙 유도

5) 실천수행체계 구축을 통한 존재의 지고한 완성을 뒷받침

6) 인류사 최초로 의존적 미신적 관습에서 탈피한 주체적 평화 사상

 

5. 맺음말    

 

❇ 참고서적

 

 

1. 머리말

 

불교에 접근하고자 할 때, 원전을 통해야만 비로소 깊이 있게 들어갈 수 있고, 그 첫걸음은 초기경전, Tripiṭaka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장, 경장, 논장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을 보면 선뜻 발을 담그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경율론 삼장을 관통하는 불교의 핵심은 단순하다. 부처님의 최초의 제자인 앗싸지가 불교를 다음과 같은 짧은 게송으로 전한다.

 

모든 법은 원인에서 생겨나는데, 여래는 그 원인을 설하셨네.

또한 그것들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위대한 수행자는 설한다네.

<마하박가 1-40>

 

연기법과 연기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법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다. 경장에서는 자연법칙으로써 일체만유를 운용원리로써 연기법과 이에 근거한 제법의 실상인 삼법인, 일체존재에 대한 사념처, 오온, 십이처, 십팔계 등의 법수들과 실천수행에 대해 반복적으로 설명한다. 논장에서는 여기에 논리적으로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고, 율장에서는 실천적 앎과 행위규범에 대한 사건들을 나열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연기법에 대해 이치적으로 실천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 삼장의 요지라 할수 있다. 때문에 연기에 대한 명확한 이해는 불교의 정수에 다가가는 초석이다.

 

2. 제법의 법칙, 緣起

 

1) 연기법의 발견

 

B.C.E. 531년, 부처님이 우루벨라 마을의 네란자라 강변 보리수 아래서 정각을 이루신 직후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셨는데, 그 내용이 바로 緣起이다. 그것을 가장 간명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경이 있다.

 

참으로 진지하게 선정에 든 수행자가 법을 깨달았을 때, 의심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緣起의 법을 알았기 때문이다.

<南, 小部經典1, 自說經, 菩提品>

 

부처님은 연기의 발견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나는 것은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았거나, 그 원리가 정해진 것이며, 진리로써 확립된 것이며, 진리로써 결정된 것이며,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올바로 깨닫고 꿰뚫어 알았으며, 올바로 깨닫고 꿰뚫어 알고 나서, 설명하고, 교시하고, 시설하고, 확립하고, 개현하고, 분석하고, 명확하게 밝힌다. 그리고 여래는 ‘보라!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이 생겨난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여실한 것, 허망하지 않는 것, 다른 것이 아닌것, 구체적인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 이것을 연기라 부른다.

<쌍윳따니까야 2-25 조건의 경>

 

부처님은 연기법을 체험하고 正覺을 이루었으며, ‘나는 누구인가, 존재는 어디서부터 왔는가, 삶의 어디로 가는가’ 등에 대한 모든 의문을 해결했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핵심인 緣起란 과연 무엇인가?

 

 

2) 연기로 이루어진 제법의 실상

 

연기는 팔리어로 paṭicca-samuppāda이며, 의존하여 함께 일어난다는 뜻이다. 모든 현상은 因과 緣의 상호작용으로 성립되므로, 원인 없는 결과가 없으며, 이것이 諸法의 生起消滅의 법칙이다.

그러므로 독립해서 실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는 없으며, 서로 의존하며 끊임없이 생멸변화하는 離合集散의 속성을 가진다. 이러한 원리는 사리불의 갈대묶음 비유로 잘 설명된다.

 

여기 두 개의 갈대 묶음이 있다고 하자.

그 두 개의 갈대 묶음은 서로 의존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다.

그러나 두 개의 갈대묶음에서 어느 하나를 떼어낸다면 다른 한쪽은 넘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므로 이것 또한 없는 것이다.

<쌍윳따니까야 2-67 갈대묶음 경>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나고, 이것이 소멸하므로 저것이 소멸한다는 시간적 측면을 無常이라 한다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다는 공간적 측면을 無我라 할수있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연기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면, 苦가 생긴다. 그런데 연기의 법칙이 너무나 심오하여, 중생들이 바르게 보기 어렵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도달한 이 법은 깊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고요하고 숭고하다.

단순한 사색에서 벗어나 미묘하여 슬기로운 자만이 알수 있는법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착하기 좋아하여 집착을 즐긴다.

그런 사람들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도리와 연기의 도리를 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마하박가1->

 

이처럼 연기법이 너무나 중요하고 심오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 9연기 10연기 11연기 12연기 등으로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설하셨다. 나아가 연기에 기반한 존재의 특성을 오온, 사대, 12연기, 12처, 18계등으로 전개하여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것을(無我) 역설하셨다.

 

3. 연기로 성립된 존재, 無我

 

1) 다섯가지 작용의 집합체, 五蘊

 

부처님은 존재라는 말 대신, 다섯가지 작용의 집합체로써 五蘊(pañca khandhās)이란 개념을 즐겨 사용하셨다. 蘊은 쌓아 모은다는 의미이며, 色 受 想 行 識의 다섯 가지 작용이 차곡차곡 모여서 존재의 다발을 이룬다고 보았다.

 

① rūpa(色): 외부의 인식대상. 일정 공간을 점거하며 생멸, 변화하는 것.

② vedanā(受): 色과 접촉에서 일어나는 감각느낌, 苦•樂•不苦不樂의 감수작용

③ saññā(想): 표상작용, 지각작용, 과거경험으로 인해 마음에 상이 떠오르는 것, 개념을 만드는 작용

④ saṅkhāra(行): 想과 결합한 의지작용, 의도(능동성을 가지고 7식으로 옮김)

⑤ viññāṇa(識): 반영현상, 판단 인식의 작용 및 그 주체로서의 마음

 

➞ 감각기관과 감각대상(色聲響味觸法)의 접촉을 피할 수 없고, 접촉으로 인해 苦·樂·不苦不樂의 감각느낌(受)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것이 과거경험들의 이미지와 결합하면(想) 의도(行)가 생기고, 이런 작용들을 토대로 분별 판단하여 마음에 저장된다.(識)

 

이러한 다섯가지 작용이 동시다발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존재의 참모습이며, 따라서 어느 한 순간에도 고정된 실체가 없고, 나라고 할만한 것도 없다.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세 존: 라훌라여, 물질(色,)은 영원한가, 무상한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세 존: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세 존: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이다’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라훌라: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이하 受想行識 생략)

<쌍윳따니까야 2-249 존재의 다발의 경>

 

이것을 五蘊皆空, 五蘊無我라고 하며, 아래 경전의 내용에서도 잘 나타난다.

 

비구들이여, 色은 무아이다. 만약 색이 참된 자아라면, 병이 생기지 않을 것이고, 色에게 나를 위해 이렇게 되어라 저렇게 되지말라하면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색은 무아이기 때문에 병이 생기고 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이하 受想行識 생략)

<마하박가1-8 무아법문>

 

이처럼 오온은 緣起하기 때문에 참된 자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중생은 감각기관을 나라고 여기고, 느낌을 나의 것이라 여기고, 정신작용들을 나의 자아라고 여기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하여 생사번뇌를 일으키고, 苦海에 빠지게 되는데, 이를 五陰盛苦라 한다.

 

 

2) 연기를 모르는 존재의 괴로움, 十二緣起

 

존재는 다른 존재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해체와 재구성을 통해 끊임없이 변한다. 이러한 연기의 실상을 바로 보지 못하면 苦가 생기는데, 이를 12단계로 구분하여 十二緣起 혹은 十二因緣이라 한다.

 

① 무명(avijja, avidyā, 無明): 연기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근본번뇌. 어리석음

② 행(saṅkhāra, saṃskāra, 行, 有爲): 의도를 가짐(유위법)

③ 식(viññāṇa, vijñāna, 識): 의도로 인해 근본의식이 생김, 인식 판단 분별작용을 하게됨

④ 명색(nāma rūpa, 名色): 識으로 말미암아 정신(名)과 물질(色), 주관과 객관이 나누어짐

⑤ 육입(ṣaḍ āyatana, cha āyatana, 六入): 眼耳鼻舌身意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色聲香味觸法의 객관세계가 들어옴.

⑥ 접촉(phassa, spraṣṭavya, 觸): 인식대상과 감각기관이 접촉이 생김.

⑦ 수(vedanā, 受): 접촉 다음 느낌(樂, 苦, 不苦不樂)이 발생

⑧ 애(taṇha, tṛṣṇā, 愛): 접촉 다음에 일어난 느낌에 대한 정신적 갈증.

⑨ 집착(upādāna, upalabdhi, 取):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밀쳐내려고 함

⑩ 유(bhāva, 有, bhava): 흔적을 남기면서 존재계는 三界 二十五有 四有로 세분화됨

⑪ 생(jāyate 生 ⓟjāti) : 각자의 업력에 따라 다시 존재계에 태어남

⑫ 노사우비고뇌(jarā 老 ⓟjarā, maraṇa 死 ⓟmaraṇa, śocya 憂 ⓟdomanassa, upahanti 悲 ⓟparideva, duḥkha 苦 ⓟdukkha, daurmanasya 惱 ⓟupāyāsa) : 태어나면, 죽음과 근심 슬픔 불만족스러움과 번뇌들을 피해갈 수 없게 되며, 이렇게 해서 삶이 전개된다.

 

➞ 연기의 실상을 그대로 보지 못하면서 의도를 일으켜 행동을 하면, 근본의식에 저장되고, 이로 인해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면서, 객관세계가 감관을 통해 들어오면, 접촉 후 느낌이 발생하고, 느낌에 대한 갈증으로 인해 좋은것은 취하고 싫은것을 밀쳐내려고 하는데, 이에따라 존재계에 흔적을 남김으로써, 다시 태어나고 삶을 전개한다. 이렇게 중중첩첩 얽히고 얽히어 존재한다.

 

부처님은 성도 직후 이러한 십이연기가 일어나고(順觀, anuloma), 소멸하는 것을(逆觀, paṭiloma) 관하셨다. 범부는 순관연기를 따라서 老死憂悲苦惱를 경험하지만, 연기를 보아 무명이 소멸하는 데로 역관연기를 따르게 되면 老死憂悲苦惱를 벗어나 대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사리뿟따 장로의 설명을 들어보자.

 

벗들이여 어떤것이 무명입니까? 괴로움에 대해 알지못하고, 괴로움의 원인과 소멸에 대해 알지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지못하는 것을 무명이라 합니다.

번뇌가 생겨나므로 무명이 생겨나고, 번뇌가 소멸하므로 무명이 소멸합니다.

...(중략)...

벗들이여, 고귀한 제자가 이와같이 무명을 잘 알고, 무명의 발생을 잘 알고, 무명의 소멸을 잘 알고, 무명의 소멸에 이르는 길을 잘 알면, 그는 완전히 탐욕의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고 분노의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고 ‘나는 있다’라고 하는 자아의식의 잠재적 경향을 제거하고 무명을 버리고 명지를 일으키며 지금 여기서 괴로움의 종식을 성취합니다.

...(이하 行·識·名色·六入·觸·受·愛·取·有·生·老死憂悲苦惱 생략)

<맛지마니까야 1-46, 올바른 견해의 경>

 

이는 제법의 실상이 연기임을 바로 보면, 일체존재가 無我임이 자연히 드러나게 된다는 의미이다.

 

 

3) 인간의 의식세계, 六境 六根 六識의 결합

 

인간의 의식세계는 매우 정교한 사유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5온과 12연기만으로는‘의식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고 하는데, 지금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등에 대한 해답을 주지는 못한다. 이에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고 경험을 축적하고 의식을 형성하는 원리로써 六境 六根 六識의 十二處와 十八界 개념이 등장한다.

 

❇ 육근 육경 육식

 

 

  • 十二處 : 인식대상인 六境과 수용감각기관인 六根의 결합法 dhamma : 色聲香味觸 이외의 인식대상이 되는 모든 것으로 六識 역시 여기에 포함되어 인식대상이 된다.
  • 十八界 : 인식대상(육경)과 감각기관(육근)과 마음작용(육식)의 결합식(viññāṇa, 識) : 감각기관을 통해서 입력된 정보가 의식에 반영되는 것 이전에 저장된 과거정보(기억)들과 결합, 발전해나가는 의식활동(마음)

 

인간은 눈·귀·코·혀·몸·마음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으로 외부정보를 수용하는데, 이것이 육식에 저장이 되어 기억과 경험을 구성한다. 이때 개개인이 경험하는 객관세계와 감각기관의 능력에 따라 육식에 저장되는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각 개인이 인식하는 세계와 마음작용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나게 된다.

그렇지만 육경 육근 육식 역시 모두 연기의 순리를 따라 변한다. 따라서 눈·귀·코·혀·몸·마음은 조건에 따라 변하고, 객관세계 색·성·향·미·촉·법 역시 끊임없이 변하며, 육식에 저장되는 내용(마음)도 끊임없이 달라진다. 만약 십이처 십팔계가 연기의 순리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며,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면 청정한 삶을 살수있다. 이는 다음 경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존자 우빠쎄나에게는 오랜 세월동안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아상의 잠재적 경향이 철저하게 뿌리뽑혀있기 때문에, 존자 우빠쎄나에게 시각이 ‘나’라든가, ‘나의 것’이 시각이라든가, 또는 청각이 ‘나’라든가, ‘나의 것’이 청각이라든가, 또는 후각이 ‘나’라든가, ‘나의 것’이 후각이라든가, 또는 미각이 ‘나’라든가, ‘나의 것’이 미각이라든가, 또는 촉각이 ‘나’라든가, ‘나의 것’이 촉각이라든가, 또는 정신이 ‘나’라든가, ‘나의 것’이 정신이라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쌍윳따니까야 4-40 우빠쎄나의 경>

 

4) 네가지 특성, 四大

 

四大(catur dhātu, 地水火風)는 존재의 고유특성을 네가지 범주로 나눈 것이다.

 

① 지대(pathavī dhātu) 땅의 특성 : 고체성, 딱딱함과 부드러움, 무거움과 가벼움

② 수대(āpo dhātu) 물의 특성 : 액체성, 흐름과 막힘, 팽창과 수출

③ 화대(tefo dhātu) 불의 특성 : 열성, 뜨거움과 차가움

④ 풍대(vāyo dhātu) 바람의 특성 : 흔들림과 뻗댐. 움직임

 

사대의 개념을 익히면,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여기는 육체도 단순히 地水火風의 물리적 특성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존재를 지탱하는 몸뚱이를 네 가지 객관적인 특성으로 인식하게 되면, 자아에 대한 애착이 무의미해 진다. 이를 부처님은 라훌라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라훌라여, 무엇이 땅의 세계인가? 안에 있는 땅의 세계와 밖에 있는 땅의 세계가 있다. 라훌라여, 안에 있는 각각의 거칠고 견고한 것과 그것에서 파생된 것, 예를 들어 머리카락, 몸털, 손톱, 이빨, 피부, 고기, 근육, 뼈, 골수, 신장, 심장, 간장, 늑막, 비장, 폐, 창자, 장간막, 위장, 똥, 그리고 기타 개체적이고 거칠고 견고한 것과 그것에서 파생된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안에 있는 땅의 세계라 한다. 이와 같이 안에 있는 땅의 세계와 밖에 있는 땅의 세계를 땅의 세계라 한다.

그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이와같이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그것을 올바른 지혜로써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땅의 세계를 멀리 떠나 땅의 세계로부터 마음을 정화시켜야 한다.

....(중략)...

라훌라여 땅에 대한 명상을 닦아라. (중략) 땅에 대한 명상을 닦으면, 이미 생겨난 즐겁거나 괴로운 감촉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이하 물의세계, 불의세계, 바람의 세계 생략)

<맛지마니까야 62>

 

위와 같이 경전에서는 지대·수대·화대·풍대의 객관적인 특성을 관찰하는 것이 무아와 연기를 체험하는 중요한 수행방법의 하나로 나타난다.

 

5) 연기와 무아의 관계

 

경전에서 무수하게 흩어져있던 여러 개념들을 복잡하고 정교해보이지만, 가르침의 핵심은 緣起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개념들도 연기에 대한 설명, 연기법을 체험하기위한 수행방법으로 압축된다. ‘연기의 이치’를 근기에 따라 여러 각도에서 풀어내다 보니 다양한 개념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緣起의 이치를 설하면, 함께 등장하는 것이 無我이다. 연기와 무아가 어떠한 관련성을 가지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개별 존재에 연기법을 적용하면 무아가 된다. 緣起하기 때문에 無我인 것이다. 諸法의 속성이 緣起라면, 無我는 존재의 속성이다. 무아와 연기는 같은 원리이면서도 적용대상을 달리한 개념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따라서 연기하기 때문에 무아지만, ‘무아이기 때문에 연기다’고 하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된다.

 

전체집합 부분집합

U (만유제법은 연기) ⊇ S (존재는 무아)

 

 

이처럼 연기하는 만유제법 속에서 소우주로써의 자아는 순간순간 조건 지어져 작용하는 집합체일 뿐이다. 나(我, atta)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인연이 다하면 흩어져버린다. 이러한 이치가 다음 경에 잘 나타난다.

 

어떤 씨앗이 밭에 뿌려지면

흙의 자양분을 조건으로

습기의 공급을 조건으로

이 한쌍을 조건으로 성장하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과(오온) 인식의 세계(십팔계)

그리고 이들 감각영역들(십이처)들은

원인을 조건으로 생겨났다가 원인이 소멸하면 사라져버리네

<쌍윳다니까야 1-134 쎌라 경>

 

연기와 무아의 원리는 여러 가지 비유로 이해할 수 있다.

 

➀ 꽃향기 비유

 

케마카 : 벗들이여, 예를 들어 청련화, 홍련화, 백련화의 향기가 있다고 합시다. 누군가 그것이 꽃잎의 향기, 꽃받침의 향기, 꽃수술의 향기라고 말한다면 그는 옳게 말한다고 봅니까?

장로들 : 벗이여, 그렇지 않습니다. 꽃과 관련된 향기라고 설명하면 바른 설명이 됩니다.

케마카 : 벗들이여, 그와같이 나는 물질이나 물질 아닌 것을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느낌이나 느낌 아닌것을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각이나 지각 아닌것을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형성이나 형성 아닌것을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의식이나 의식 아닌것을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중략) .. 어떤 고귀한 제자가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들이 연기하는 원리를 관찰하면, 아직 끊어지지 않은 ‘내가 있다’는 자만과 욕망, 잠재적 경향이 두루 뿌리 뽑힙니다.

<쌍윳따니까야 3-128 케마까 경>

 

➁ 강물의 비유

 

비구들아, 갠지스강의 물결을 보아라.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실체도 없고 본질도 없다.

비구들아, 어떻게 물결에 실체와 본질이 있겠는가?

신체는 물결

감각은 물거품

표상은 아지랑이

의지는 파초

의식은 허깨비

이것이 세존의 가르침이다.

<남전 상응부경전3, p.219>

 

➂ 수레의 비유

 

나가세나 : 대왕은 걸어서 왔습니까, 무엇인가를 타고 왔습니까?

밀린다왕 : 스님 저는 걸어서 오지 않고 수레를 타고 왔습니다.

나가세나 : 수레를 타고 왔다면, 무엇이 수레인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수레채가 수레입니까?

밀린다왕 :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세나 : 그러면 굴대가 수레입니까?

밀린다왕 :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세나 : 바퀴, 차체, 차틀, 멍에, 밧줄, 살, 채찍 가운데 어느 하나가 수레입니까?

밀린다왕 :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세나 : 그렇다면 이것들 모두 합친 전체가 수레입니까?

밀린다왕 : 그렇지 않습니다.

..(중략)...

밀린다왕 : 수레채, 굴대, 바퀴, 차틀 등과 어울려 수레라는 명칭, 假名이 생겨난 것입니다.

나가세나 :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가세나의 이름(자아)도 신체의 각 요소들과 오온의 각 요소들이 인연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밀린다왕문경>

 

6) 무아에 대한 몇 가지 의문

 

부처님의 무아설은 당시 인도 주류사상 베다와 우파니샤드의 권위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梵我一如사상에서는 아뜨만(我, ⓢĀtman, ⓟatta)이 현상적 세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절대적 실체이며, 윤회의 주체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연기의 실상을 보게되면, 상주불변하는 실체란 무지의 소산이다. 인간이 두려움과 나약함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기보호와 자기보존을 위해 창조해낸 관념일 뿐이다.

부처님께서 성도직 후, “이 법은 흐름을 거스르는 것이고, 심오하고, 미세하여 이해하기 어렵다”고 傳法을 망설이셨는데. 당시 사상계흐름과 인간의 본성을 잘 알고 계셨던 까닭이다.

그래서 경전 곳곳에서 무아와 관련한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➀ 무아라는 슬픔

무아는 삶의 주체인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비판을 종종 받아왔다. 그러나 부처님은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나를 부정한 것이지, 현재 생각하고 행위하는 주체로써의 ‘나’를 거부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전에서는 무아에 대해 두려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견해를 가졌다 ‘우주는 저 아뜨만이다. 나는 죽은 뒤에 그것이 될것이다. 그것은 상주불변한다. 나는 그렇게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그가 여래나 그 제자에게 열반을 이루게 하는 교리에 감화되었지만 그는 생각한다.‘나는 파괴당할 것이다. 부수어질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존재치 않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한탄하고 슬퍼하고 정신이 혼미해진다.

<맛지마니까야 1>

 

그러나 無我無畏라는 말이 있다. 확고한 실체로써의 나에 대한 집착이 없어지면, 자연히 두려움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마치 나무로 인하여 나무 그림자가 나타났지만, 만일 나무 자체가 없다면 그림자가 나타날 인연이 없는 것과 같다. 무아의 이치를 알게되면 어떠한 두려움도 있을 수 없다. 무아의 이치에 대한 두려움은 믿음과 정진으로 극복해야 한다.

 

➁ 윤회의 주체

기존 브라만사상의 Ātman을 부정했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관해, 밀린다왕과 나가세나존자의 문답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밀린다왕 : 태어난 자와 사멸한자는 같습니까 다릅니까?

나가세나 :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습니다.비유컨대, 일찍이 갓난아이였던 대왕과 어른이 된 대왕이 같지 않음과 같습니다.

...(중략)...

나가세나 : 여기 어떤 사람이 등불을 켠다고 합시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그렇다면 초저녁에 타는 불꽃과 밤중에 타는 불꽃이 같겠습니까?

밀린다왕 : 같지 않습니다.

나가세나 : 그렇다면 초저녁의 불꽃과 밤중의 불꽃은 전혀 다른 것입니까?

밀린다왕 : 그렇지 않습니다. 불꽃은 똑같은 등불에 의해 밤새도록 탈 것입니다.

나가세나 : 인간이나 사물도 꼭 그와 같이 지속됩니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은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지 않고 동시에 계속됩니다.이는 마치 우유가 변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짜낸 우유는 얼마 후 버터가 되고 다시 기름으로 변합니다. 만일 우유를 버터나 기름과 똑같다고 한다면 그 말이 옳겠습니까?

밀린다왕 : 그렇지 않습니다. 버터와 그 기름은 우유를 바탕으로 변한 것입니다.

나가세나 : 인간이나 사물의 지속과 전변이 이와 같습니다. 생겨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이 별개지만 앞서거나 뒤서거나 하면서 지속되는 것입니다.

<밀린다왕문경> 

 

➂ 존재의 사후세계

존재의 사후세계에 대한 질문에 부처님은 주로 침묵하셨지만, 유행자 밧차곳따와의 문답에서 존재의 사후세계에 대한 부처님의 견해를 알수 있다.

 

[세존] 밧차여 그대앞에 불아 타오른다면, 그 불은 무엇을 조건으로 타오릅니까?

[밧차] 존자 고따마여, 그 불은 풀과 섶이라는 땔감을 조건으로 타오릅니다.

[세존] 밧차여 만약 그대앞에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은 이곳에서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간것입니까?

[밧차] 존자 고따마여, 그 질문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 불은 풀과 섶의 땔감을 조건으로 타오르고, 그 땔감이 사라지고 다른 땔감이 공급되지 않으면, 자양분이 없으므로 꺼져버립니다.

[세존] 밧차여 그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물질(色)로써 여래를 묘사하려하지만 여래는 그 물질을 버렸습니다. 여래는 물질의 뿌리를 끊고, 밑둥치가 잘려진 야자수처럼 만들고 존재하지 않게하여, 미래에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합니다. 여래에게는 사후에 다시 태어난다는 말도 타당하지 않으며, 사후에 다시 태어나지 않는말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이하 受想行識 생략)

<맛지마니까야 1-72 불의 비유와 밧차곳따의 경>

 

또 경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들은 연기와 연하여 생성되는 법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잘 보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하고 숙세로 거슬러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하고 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하고 현세에 의혹을 갖게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있는 그대로 이 연기와 연생의 법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

 

<쌍윳따니까야 2-25 조건의 경>

 

이는 전생과 현생·내생에 관한 논의자체가 無知의 소산이며, 연기의 실상을 체험하면 죽음에 대한 논의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➃ 형이상학적 질문

추상적 의문, 정신적 갈증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종교·사상이다. 이러한 측면해서 불교 역시 종교·사상으로써 형이상학적 질문을 피해갈 수 없었다. 더군다나 부처님 당시 인도에는 사변철학이 발달하여 형이상학적 논의가 정교하게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수준 높은 대응이 요구되고 있었다.

부처님은 형이상학적 논의에 대해 화살의 비유를 들어, 추상적 질문에 대한 답변보다 시급한 것이 현실적 무명을 해결하는 것라고 하셨다.

 

말룽캬 : 세계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무한한 것인가 유한한 것인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은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 부처님은 이러한 말씀은 전혀 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태도가 못마땅하고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씀한다면 수행을 계속하겠지만, 영원하지 않다면 부처님을 비난한 뒤에 떠나야겠다.

부처님 : 말룽캬, 너는 참 어리석구나.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일찍이 너에게 말한 일이 없고 너도 또한 내게 말한 일이 없는데, 너는 어째서 부질없는 생각으로 나를 비방하려고 하느냐? ...(중략)...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만약 부처님이 나를 위해 세계는 영원하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그를 따라 도를 배우지 않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 문제를 풀지도 못한 채 도중에서 목숨을 마치고 말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독 묻은 화살을 맞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을 때 그 친족들은 곧 의사를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이 화살을 뽑아서는 안 되오. 나는 먼저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소. 성은 무어고 이름은 무엇이며 어떤 신분인지를 알아야겠소. 그리고 그 활이 뽕나무로 되었는지 대로 되었는지를 알아야겠소. 또 화살깃이 매털로 되었는지 독수리털로 되었는지 아니면 닭털로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겠소.' 이와 같이 말한다면 그는 그것을 알기도 전에 온 몸에 독이 번져 죽고 말 것이다.

<長阿含 箭喩經>

 

또 다른 경전에서는 이렇게 논의를 일삼는 사람들에 대해서 따끔한 일침을 가하셨다.

 

질문 : 어떤 사람들이 ‘진리이다’ ‘허망하다’고 다투며 논쟁합니다. 어째서 수행자들은 동일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세존 : 진리는 하나일 뿐, 두 번째 것은 없습니다. 완전한 지혜를 가지게 되면, 그들의 견해는 똑같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아는 사람과 다투지 않습니다.

<숫따니파타 4-12 작은 전열의 경>

 

그리고 부처님께서 형이상학적 논의에 침묵하시는 이유에 다음의 경전을 보면 의문이 풀린다.

 

그때에 세존께서 손에 나뭇잎을 쥐시고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 이손 안의 나뭇잎이 많은가, 저 큰 숲의 나뭇잎이 많은가?

비구 : 세존이시여, 손안의 나뭇잎은 매우 적사오며, 저 숲속의 나뭇잎은 한량이 없어 백천억만 곱이나 되며, 내지 세거나 비유로도 견줄 수 없습니다.

세존 :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내가 바르고 동등한 깨달음을 이루고 스스로 본 법을 남을 위해 말하는 것은 이 손안의 나뭇잎과 같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그 법은 이치로 요익하게 하고, 법으로 요익하게 하며, 범행으로 요익하게 하고, 밝은 지혜로 바르게 깨달아 열반으로 향하기 때문이니라.저 큰 숲의 나뭇잎과 같이, 내가 등정각을 이루고 스스로 바른 법을 알아도 말하지 않은 것은 또한 저와 같다. 무슨 까닭인가? 그 법은 이치로 요익하게 하지 않고, 법으로 요익하게 하지 않고, 밝은 슬기로 바르게 깨달아 바로 〈열반〉으로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잡아함경 15 신서림경>

 

신이나 우주의 원리와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의 해답을 구하는 것을 부처님은 불필요한 논의로 보셨다. 형이상학적 대답보다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구체적인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불교의 핵심이고 매력이다.

 

 

4. 연기와 무아의 사상적 의의

 

1) 절대신 중심의 주류사상 부정

일체현상에 내재된 법칙이 절대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연기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연기법은 예전에도 있어왔고, 이전의 부처님들께서도 깨달은 진리이다. 브라만신은 인간의 불완전한 욕망이 창조해낸 산물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윤회의 주체인 브라만의 분신으로써 아뜨만을 전면 부정했다. 이에 대해 초전법륜경에서 아뜨만이 내 것이고 절대청정하다면, 왜 더럽혀지고 뜻대로 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셨다. 무엇보다도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윤회사상을 수용했을때, 파생되는 현실적인 문제점에 대해도 지적하셨다. 불필요한 살생를 동반한 희생제의와 맹목적인 신봉은 어리석음을 낳고 두려움과 번뇌를 증장시킬 뿐이다.

삼법인은 브라만 사상을 부정하는 개념으로 접근해보면 명확한 해답이 나온다.

 



브라만사상



부처님 관점








브라만과 아뜨만은 상주불멸하다



항상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無常



순수하고 청정하며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무상하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느낌들이 있다.







현상세계는 창조신 브라만이 주재하며,


신의 분신 아뜨만이 윤회의 주체



창조신은 없으며 연기법이 자연법칙이다.


상주불멸하는 아뜨만은 없다.



無我

 

부처님은 영원한 자아나 영혼에 대한 믿음은 기만적인 망상으로, 자아에 대한 집착을 일으켜 쾌락과 명성과 갈애를 낳고 괴로움을 불러온다고 보았다. 자아는 없으며 오로지 色受想行識 작용의 집합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부처님은 이렇게 발견한 진리에 대해서 손안에 움켜주고 감춘 것은 하나도 없으며, 지혜로운 자라면 누구든지 와서 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바라문과 외도들에게 열린 자세로 당당하게 대응했는데, 그 법이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며 실용적이었기에 많은 이교도들이 승단에 귀의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카샤파 삼형제와 목갈라나, 사리뿟따 등 이다.

 

2) 인과법을 통한 도덕률 제시

 

부처님 당시 자유사상가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단멸론·상주론·도덕부정론·운명론·회의론·극단적 이원론 등의 사상들이 등장했다. 이들 가운데는 인간의 성실성, 품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것들도 많았다.

부처님은 연기법에 따른 도덕률로써 인과법을 제시했다. 선한인연을 지으면 즐거움이 따르고 악한인연을 지으면 괴로움이 따른다고 했다. 이는 단순히 착한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사람은 재앙을 받는다는 보복적 성격의 도덕법칙이 아니라, 인간행위(業, kamma)에 근거하여, 선한자유의지를 발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하기에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이는 기존의 브라만적 윤회설에 따라 운명에 굴복하는 체념적 삶과 확연히 다르다.

나아가 구체적으로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불자로써 지켜야할 행위규범인 5계와 8정도 십바라밀 등을 제시하였다.

 

3) 평등사상 고취

 

고대인도사회는 카스트제도Cast System에 의해 운용되고 있었다. 카스트라는 엄격한 신분아래, 나면서부터 빈부귀천이 나뉘어 졌으며, 폐쇄적인 사회에서 개인의 계발은 극히 제한됐다.

그러나 불교의 입장은 달랐다. 연기법에따라 중중무진 상호작용하는 존재들 사이에 너가 있으므로 내가 있는데, 어찌 차별이 생길수 있겠는가. 현실적인 삶의 방식에 개인차가 있을뿐이지, 본질적으로 함께 윤회의 소용돌이에서 유전하는 중생들이다. 이러한 평등사상에 입각하여, 태나면서 귀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따라 귀천이 결정된다고 주창했다. 승단내부에서도 출가전의 신분에 관계없이 구족계를 받은 순서에 따라 차서를 정했다.

뿐만아니라 종교집단 최초의 여성출가자공동체를 결성하는데, 이는 장자상속제 하에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혁명적 사건이었다. 한번은 코살라국의 말리까 왕비가 공주를 출산하자 왕자를 기다리던 빠쎄나디왕에게 부처님은 이와 같은 게송으로 여성의 가치를 말씀하셨다.

 

여인이라도 어떤이는 실로 남자보다 훌륭하니

총명하고 계행을 지키며 시부모를 공경하고 지아비를 섬기네.

그런 여인에게서 태어난 남자는 세계의 영웅이 되니

그러한 훌륭한 여인의 아들이야말로 왕국을 지배할 수 있네.

<쌍윳따니까야 1-86 딸의 경>

 

여성이 지닌 위대한 힘에 대한 언급도 찾을 수 있다.

 

다섯가지 여성의 힘이 있으니 어떠한 것인가? 용모의 힘, 재산의 힘, 친족의 힘, 자식의 힘, 덕성의 힘이 그것이다.

<쌍윳따니까야 4-247 쫓아냄의 경>

 

위와 같은 양성평등에 대한 진보적 입장은 인본주의 종교의 실천적 모습을 보여준다.

 

 

4) 개인적 내적 성숙유도

 

인도인들은 유행기가 되면, 집을 떠나 정신적 이상을 추구했다. 그런 문화속에서 존재의 지고한 완성을 향한 구도행이 치열했고, 진리에 목마른 고행주의자 자유사상가들은 부처님께 해답을 찾았다. 연기법은 합리적이었으며, 제시한 실천수행을 통해서 누구든지 경험할 수 있었다.

연기의 가르침이 출가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교도 바라문 재가자 여성들에게까지 그들에 맞게 적용되었다. 그리하여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스스로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모든 것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데, 괴로움이 즐거움이 되고 즐거움이 괴로움이 되는것이 연기의 이치다. 슬퍼할 필요도 없고 집착할 필요도 없다. 자아를 갈구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가르침을 펴신 대표적인 예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교담미가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부처님을 찾아갔을 때, 교담미가 스스로 연기의 이치를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현실을 직시한 교담미는 비구니가 되어 도과를 증득한다. 또한 코살라국 빠쎄나디왕에게는 국가의 원수로써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서 현실적으로 설하시고, 음식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건강을 되찾을수 있는 법문도 해주신다. 바라문에게는 바라문으로써의 고귀한 삶을 영위하는 방법을, 재가여성에게는 지아비와 시부모님을 섬기고 아랫사람을 보살피는 방법을 설하셨다.

현실에서 지금 이 자리에서 연기의 이치에 맞게 나를 내려놓는 법을 알려준 것이다. 결코 진리에 대한 강요가 아닌, 스스로가 선택하여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5) 실천수행체계 구축을 통한 존재의 지고한 완성을 뒷받침

 

만유제법의 원리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실재로 도달할 수 없다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한 부처님 이전에도 진리에 도달한 성자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불교의 위대함은 진리(연기)의 발견과 더불어 누구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한데 있다.

극단적인 고행으로 기약할 수 없는 내세의 행복을 기원하거나, 미신적인 희생제의로 번영을 약속하는 여타의 종교들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구체적인 수행체계인 37조도품(四念處∙四正勤∙四神足∙五根∙五力∙七覺支∙八正道)을 제시하여 연기의 원리를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수행체계에 따라 도과를 증득한 출가·재가자가 수없이 배출되었다. 아라한 한분의 감화력을 생각해본다면, 당시 승단의 위의와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연기법과 함께 효과적인 수행체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불교가 당시 인도의 대국인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모두 교화할 수 있었고, 승단의 교세가 북인도를 전역을 휩쓸었던 것이다.

 

 

6) 주체적 평화 사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2500년을 내려오면서 불교라는 이름으로 전쟁을 치른적이 없다. 많은 종교들이 평화를 외치지만 이렇게 묵묵히 평화를 지켜온 종교는 오직 불교뿐이다. 불교 교리적으로 연기법과 무아의 이치를 따른다면, 그 어떠한 전쟁도 번뇌망상의 악업에 불과하다. <숫타니파타 자애의 경>에서 부처님은 크거나 작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약하거나 강하거나 모두 어머니가 외아들을 보호하듯이 그렇게 자비롭게 대하라고 하였다.

연기와 무아를 체험하신 많은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말씀하신다. 깨달음의 결과는 무한한 자비로 나타난다고. 순간순간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인 번뇌가 일어날 때, ‘생각이 내가 아니며, 분노도 내가 아니며, 너와 나는 다르지 않다’는 이치를 상기하면, 평화주의적인 삶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사회집단이 강요해서 그러한것도 아니고, 연기하니깐 나와 같이 존중해 주게 된다.

연기법을 알면, 안으로 번뇌와 다투지 않고, 밖으로 다른 존재와 부딪칠 수 없다. 그저 평화가 구현된다.

 

5. 맺음말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맛지마니까야 1>

 

연기법은 만유제법의 구성원리이며 자연법칙, 과학법칙이다. 무아는 연기의 메커니즘 속에서의 존재법칙이다. 나라고 여기는 것은 오온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며 인연이 다하면 흩어진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것은 연기를 모르기 때문인데, 무명이 소멸하면 자아의식이 제거되어 苦가 소멸한다. 또한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들은 모두 육경 육근 육식의 결합에 지나지 않으며, 항상 변한다. 우리 몸뚱이 역시 지수화풍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으므로, 애착할 필요가 없다.

연기와 무아의 진리를 경전에서는 갖가지 개념과 비유로 훌륭하게 설하셨다. 연기하기 때문에 무아라는 진리에 대해 제기되는 의문들까지도 무지의 소산임을 분명히 깨우쳐 주셨다.

이러한 연기와 무아에 입각하여, 불교는 절대신 중심의 브라만사상과는 노선을 달리했다. 그리고 善人樂果 惡人苦果의 업설에 기반한 인과법을 원칙으로 올바른 도덕규범을 제시하고, 연기된 모든 존재의 평등을 주장했다. 또한 실제적으로 개개인의 현실적 성장을 도왔고, 무아의 이치를 체득하도록 구체적인 수행법을 제시했다. 이로써 안으로는 개개인의 지혜와 행복을 증장하고, 밖으로는 사회평화에 기여해왔다.

 

지금까지 초기경전을 기초로 삼법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 사대 십이연기 등을 연기와 무아로써 엮어 보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그럴듯한 설명일 지라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음을 상기해야 한다. 직접 실천하고 체험하지 않으면 빈 배에 알음알이만 채우는 격이 된다. 더욱이 우리가 다루었던 연기와 무아는 초기경전만을 근거로 접근한 것이다. 불교전체에 비추어 볼 때 표층적인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모든 논술을 맺고자 한다.

 

 

 

❇ 참고서적

 

<불교성전>, 동국역경원, 2004

<한글 아함경>. 고익진, 동국대학교출판부, 1991

<마하박가 1>, 최봉수 옮김, 시공사, 1998

<우다나-감흥어린 시구>, 전재성 역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9

<숫따니파타>, 전재성 역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4

<썅윳따니까야 2,3,4>, 전재성 역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2

<맛지마니까야 1,2,3,4>, 전재성 역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3

<大因緣經·正見經>, 중앙승가대학교 불전국역연구원, 2007

<伽山 佛敎大辭林 7>, 지관편저,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5

<석가>, 이기영전집, 한국불교연구원, 2007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있다>, 울뿔라 라훌라 저, 이승훈 역, 경서원, 1994

<原始佛敎思想>, 김동화 저, 보련각, 1992

<불교학개론>, 교양교재편찬위원회,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4

<불교길라잡이>, 곽철한, 시공사, 2001

<佛敎의 理解>, 케네스 첸, 분도출판사, 1994

<불교의 역사와 기본사상>, 쓰까모또 게이쇼 외, 대원정사, 1989

<삼법인, 중도>, 김현준, 효림 2007

 

 

 

 

 

 

 

 

 

 

 

 

ARAMA - 체계적인 불교 공부 - 초기불교의 연기와 무아

『아함경의 이해』 초기불교의 緣起와 無我 목 차 1. 머리말 2. 제법의 법칙, 緣起 1) 연기법의 발견 2) 연기로 이루어진 제법의 실상 3. 연기로 성립된 존재, 無我 1) 다섯가지 작용의 집합체, 五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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