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승택의 초기불교순례]
26. 무상(無常)의 가르침
“늘 변한다는”는 변혁의 메시지
무상(無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항상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모든 것이 변화의 여정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우리는 나날이 변해가며 또한 새롭게 태어나고 죽어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르다. 현재의 ‘나’가 10년 후 혹은 100년 후까지 지속되지는 않는다.
불교에서는 바로 이 변화한다는 사실만큼은 고정불변의 진리로 여긴다. 따라서 진리의 인장 즉 법인(法印)이라는 표현으로써 이것을 분명히 한다. 무상의 진리는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 가운데 최초의 것에 속한다. 초기불교는 이와 같이 단순하면서도 자명한 진리에 근거한다.
무상의 진리는 결코 난해한 것이 아니다. 사실 변화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소중히 여기는 재산이나 명예 혹은 가치 따위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하여 그러한 요인들에 약간이라도 변화가 발생하면 안절부절 동요하는 모습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의 일에 대해서는 의연하게 대처하다가도 막상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평정심을 잃기 일쑤다. 바로 거기에서 우리는 무상의 가르침에 투철하지 못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붓다 당시 쭐라빤타까라는 머리 나쁜 출가수행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의 기억력은 단 한 구절의 경전도 외울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먼저 출가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형님이 계셨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형조차 그의 어리석음에 실망하여 환속을 종용했다고 한다.
절에서 쫓겨나 울고 있는 그를 발견한 붓다는 우선 얼굴에 묻은 먼지를 닦으라고 일렀다. 그런 다음 ‘먼지 닦음(rajoharaṇaṁ)’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되뇌도록 하였다. 그러자 쭐라빤타까는 먼지가 닦이어 없어지듯이 마음의 번뇌와 어리석음도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이러한 체험을 통해 쭐라빤타까는 무상의 도리를 깨우치게 되고 마침내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다. 이 이야기는 궁극의 깨달음이 머리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붓다는 깨달음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이지적인 능력보다 심리적인 안정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즉 어떠한 가르침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사고력보다는 그것에 접근해 나가는 심리적 태도와 마음가짐의 문제를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따라서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현실의 삶에서 그의 가르침을 실현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갖가지 문제들에 노출되어 괴로움을 겪곤 한다. 그러나 탐욕 따위에 눈이 멀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당장 사라져 갈 분노에 사로잡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상처 입히는 사례가 그러하다. 그러한 격정의 와중에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마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진다. 오로지 분노하고 있는 상황 자체와 하나가 될 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탐욕과 분노의 충실한 노예가 되고 만다. 이렇듯 우리는 정서적인 장애들로 인해 스스로의 생각과 입장에 사로잡히게 되며, 또한 그것이 달라질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마저 수용하지 못하곤 한다.
무상의 가르침은 외부의 객관적 실재에 대한 언급이라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의 뜻이 강하다. ‘나’의 실존을 구성하고 있는 갖가지 느낌과 생각과 충동과 이미지들에 대해 돌이켜 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과 정서에 휘둘리지 않는 여유와 인내를 배우게 된다. 또한 이것이 전제될 때 특정한 문제에 대해 올바른 해결책을 구할 수 있게 된다.
초기불교에서 제시하는 무상의 진리는 ‘나’ 스스로의 생각과 태도에 자리하는 변화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데에 초점을 모은다. 따라서 이것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변혁의 메시지로 그 성격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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