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녹취(문수경전)

법화경 대강좌 4강 - 2 (비유품 5~21)

수선님 2022. 12. 25. 12:50

법화경 대강좌 4강 - 2

 

 

  우리 도반 중에 그와 똑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어요. 그런데 그 소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몇 년 지나서 만나 봐도 또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왜 소견이 그렇게 돼먹었느냐고... 아주 친한 사이니까요.  

그래도 사람은 워낙 좋아서 막 윽박질러도 그것 다 수용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나도 이것이 반은 아닌 줄은 알아, 반은 아닌 줄은 아는데 아~ 아까워서 못 버리겠어.” 그러더라고요. 실지 그래요. 지금 저 남해에 살고 있습니다. 간혹 한번 씩 전화도 오는 스님입니다. 옛날에 용맹정진도 한철 같이 했습니다.

 

  부처님이 지적한 擔麻棄金. 딱 그 겁니다.

법에 있어서는요. 좋은 소견을 갖는데 있어서 특히 불법에 있어서 좋은 소견을 갖는 데는 얼른, 얼른 버려 버리고 정말 정법으로 돌아가야 되고, 좋은 법. 보다 더 차원 높은 법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여기에는 부처님이 가르친 대로 그대로 자기가 받아들여서 이것을 못 버리고 살아 갈 것 같이 그렇게 됐었는데 여기 그 다음에 보면,

 

5. 世尊 我從昔來 終日竟夜 每自剋責 而今 從佛 聞所未聞 未曾有法

    세존 아종석래 종일경야 매자극책 이금 종불 문소미문 미증유법

    斷諸疑悔 身意泰然 快得安穩 今日 乃知 眞是佛子 從佛口生

    단제의회 신의태연 쾌득안은 금일 내지 진시불자 종불구생

    從法化生 得佛法分(종법화생 득불법분 )

   

  世尊하 我從昔來로 제가 옛날로부터 終日竟夜토록 하루 종일 밤새도록, 每自剋責이다. 매양 스스로 아주 책망해. 지극히 책망해. 자기 자신을 아주 심히 책망하는 것을 剋責이라고 그래요.

책망하더니 지금의 부처님으로부터 聞所未聞 未曾有法이라.

듣지 못한 바 未曾有法을 듣사옵고 斷諸疑悔커늘, 모든 의혹과 뉘우침을 다 끊어버리고 나니 身意가 편안해. 몸도 마음도 泰然해져서

快得安穩입니다. 가뿐하게 安穩함을. 정신적으로 아주 편안해지는 아주 가뿐하게 얻었다. 快得은 하나 어려움 없이 얻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 다음에는 밑줄 그어야할 자리입니다.

 

  今日에사 乃知. 이에 알았습니다. 참다운 불자라고 하는 사실을.

그 전에는 참다운 불자 아니었어요? 열반을 증득하기까지는 참다운 불자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從佛口生입니다. 부처님의 설법 듣고 태어난 사람  입니다. 금강경에 依法出生分 있지요? 법에 의해서 출생하다.

새롭게 태어나야 됩니다. 정말 진리의 가르침에 의해서, 보다 더 차원 높은 가르침에 의해서 끊임없이 우리는 거듭거듭 태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從佛口生. 

 

  從法化生입니다. 법의 교화로부터 태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得佛法分 ←여기까지 빨간 줄 그어놔야 됩니다.

得佛法分. 불법의 부분을, 불법의 한 부분을 나누어서 얻었습니다.

부처님, 당신만 갖는 것이 아니다. 나도 충분히 가질 수 있다 해서 부처의 법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부처라고 하는 부분을 얻었다는 이 말입니다.

참 중요한 말입니다. 그래 법화경 논문 같은 것을 보면요.

이 구절이 의례히 등장합니다. 이것이 안목이거든요.

今日에사 乃知 眞佛子라. 참다운 불자임을 알았다. 또 알았다는 것은 다 해당이 됩니다. 부처님 입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법의 교화로부터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불법의 분을 얻었다 사실을 알았습니다. 알 知자가 다 포함이 되는 것이지요.

 

  우리는 후대에 사니까 대승불교를 다 거쳤고 또, 선불교까지 다 거쳤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 들어도 그야말로 身意泰然입니다.

몸도 마음도 태연합니다. 아무 감응도 없고, 감동도 없고 의례히 心佛及衆生是三無差別이란 말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이것은 그렇게 신기한 소리도 아닌데 그러냐? 지금 우리는 후대에 살아서 조사스님들의 그 고준한 가르침을 다 섭렵하고 있어서 그런 겁니다. 그만치 우리는 정신적으로 성숙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당시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도 남방 불교에는 보살이니 부처니 하는 말은 안 쓰잖아요.

아예 없잖아요. 중생이 부처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옛날 미개했던 시절에 아라한은, 지금도 아라한 밖에 못 된다고 그래요.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가 된다고 했으니, 아니, 저처럼 해석 아니 하고 경대로“앞으로 부처가 될 것이다.”←이렇게까지만 이야기해도 이것은 대단한 겁니다.

그런데 지금 선불교가 들어와서 그렇게 해석해서는 부족하다 이 겁니다.

불완전 하다 이 겁니다. “바로 부처다.”“그대로 부처다.”라고 하는 그 뜻이다 이 겁니다 어디를 봐도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부처님이다.”하는 법화경이야기라고 그렇게 했지만, 사이사이에 전부가 사람이 부처라고 하는 인불사상. 人佛思想을 법화경을 중심으로 해서 밝혀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밝혀낸 것이 좀 외람됩니다만,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치 “이런 해석이 당연히 나와야 된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6. 爾時 舍利弗 欲 重宣此義 而說偈言

    이시 사리불 욕 중선차의 이설게언

그 때 사리불이 欲 重宣此義하사 而說偈言하사대,

 

7. 我聞是法音 得所未曾有 心懷大歡喜 疑網皆已除

    아문시법음 득소미증유 심회대환희 의망개이제

我聞是法音하사옵고 제가 이 법의 소리를 듣사옵고, 이 法音이라고 하는 것은 방편품 이야기입니다. 누누이 지적했던 내용이지요.

得所未曾有하여 미증유하는 바를 얻었으며, 心懷大歡喜하여 마음에 크게 화희함을 품어서 疑網皆已除호이다. 의심의 그물을 다 이미 제했습니다.

 

8. 昔來蒙佛敎 不失於大乘 佛音甚希有 能除衆生惱 我已得漏盡

    석래몽불교 불실어대승 불음심희유 능제중생뇌 아이득누진

    聞亦除憂惱(문역제우뇌)

옛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입어서 大乘을 잃지 않았습니다.

佛音甚希有하사, 옛날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입었기 때문에 大乘을 잃지 않았다. ←이렇게 해석하면 순조롭지요.

佛音甚希有하사 부처님의 소리는 甚히 希有해서 能除衆生惱니다.

중생의 번뇌를 능히 제거합니다.

 

  그렇지요. 부처님의 설법을 제대로 듣는다면 어떤 번민이 있고, 어떤 고뇌가 있고, 어떤 아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원하게 다 제거 될 것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스승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三界大導師 四生慈父 ←이렇게 우리는 부처님을 추앙합니다. 중생의 괴로움. 번뇌. 어떤 괴로움도 다 시원스럽게 소멸되잖아요. 자식을 잃고 가히 미치다시피한 그런 고뇌에 빠진 사람들. 제도했다든지 별별 그런 사실이 다 있지 않습니까?

我已得漏盡이라. 나는 이미 漏盡을 얻었습니다.

번뇌 다 함을 얻었다. 聞亦除憂惱이라. 법문을 듣자마자 憂惱함을, 근심과 괴로움을 다 제거 했습니다.

 

9. 我處於山谷 或在樹林下 若坐若經行 常思惟是事 嗚呼深自責

   아처어산곡 혹재수림하 약좌약경행 상사유시사 오호심자책

   云何而自欺(운하이자기)

내가 山谷에 處했거나 산림수하에서 앉거나 經行하되,

常思惟是事하고, 항상 이 일을 思惟하고, 좌선이라는 말은 다 아는 것이고, 經行이라는 말은, 경전에 자주 나오는 말이고 중요한 것인데,

우리는 수행을 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참선을 한다든지 뭘 할 때는 꼭,

기도를 해도 앉아서 다리 아프게... 제가 옛날 기도를 해보니까 한 시간 서서하기 참 힘들더라고요.

 

  ‘앉아서 하면 안 될까?’  ‘앉아서 하면 안 될까?’ 지금 같으면 전부다 앉아서 했을 텐데, 그 때만 해도 어려서 꼭 서서 기도해야 되는 줄 알고는...

거기서 조금 소견이 나와 가지고는 이쪽 다리 들었다 저쪽 다리 들었다 그 정도로 했어요. 그래도 미안하더라고요. 다리를 딱 붙여놓고 해야 되는 줄 그렇게만 알았는데, 그것이 다 어리석은 생각이지요. 법당을 돌면서 하는 것이 좋고, 앉아서 하고 싶으면 앉아서 해도 좋고, 기도나 참선이나 뭐든지 그렇습니다.

經行이라는 것이 필수입니다. 도량을 도는 겁니다.

 

  법당을 빙빙 돈다든지, 요즘 짓는 법당은 전부 대중수용을 많이 하기 위해서 부처님을 바짝 뒤로 붙여 버리고 또 기둥 밖으로 발을 매가지고 그 뒤에다 부처님을 모시는데, 그것 참 잘못한 겁니다. 아무리 법당이 좁더라도 본기둥 밖으로 매가지고 부처님을 모시지 마세요. 그것은 부처님을 기둥 밖에다 내놓는 격이 되지, 어디 법당에다 모시는 격이 됩니까? 아니잖아요. 물론 터져서 부처님을 볼 수 있다손 칩시다. 그래도 기둥 밖에 나가는 것이 됩니다. 절대 그렇게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심한 경우 그렇게까지 하는데, 옛날에는 부처님이 법당거의 중심에 와 있잖아요. 왜 그러냐? 경행하기 위해서지요. 부처님을 돌기 위해서요. 예불이나 뭐나 염불이나 참선이나 부처님 돌면서 하면서 한번 씩 부처님 얼굴 쳐다보고, 뒤로 돌 때는 고개 척 숙이기도 하고, 얼마나 잘되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이치를 요즘은 행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그것을 무시해 버리고, 부처님을 저~ 뒤에다 바짝 붙여서 사람 중심으로 수용하려고 그렇게 하는데 이런 것들도 우리가 그렇게 실천하느냐 마느냐하는 것은 그 다음 문제이고, 알고는 있어야한다 이 말입니다.

經行이라는 것이 참 좋은 선법입니다. 첫째 졸음이 아니 오지, 걷느라고 예의주시 하지, 탑을 돌거나 법당을 돌거나 불상을 돌거나 그냥 도량을 그냥 다니거나, 경행수행법이 참 좋습니다.  嗚呼深自責호대, 오호라, 깊이 스스로 자책하되 云何而自欺어뇨. 어찌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것인가?

 

 10. 我等亦佛子 同入無漏法 不能於未來 演說無上道 金色三十二

      아등역불자 동입무루법 불능어미래 연설무상도 금색삼십이

      十力諸解脫 同共一法中 而不得此事 八十種妙好 十八不共法

      십력제해탈 동공일법중 이부득차사 팔십종묘호 십팔불공법

      如是等功德 而我皆已失(여시등공덕 이아개이실)

我等亦佛子라. 우리들도 또한 불자며 同入無漏法이건만 같이 무루법에 들어갔건만, 미래에 있어서 演說無上道 = 無學法演說하며, 능히 無學法를 演說하지 못하며, 또 金色三十二와 十力諸解脫 同共一法中. 그런 것들이, 이것은 32相은 외모지요. 十力解脫은 내심입니다. 정신적인 것이거나 외적인 것이거나 이 모든 것이 한 가지 법 가운데 같이 있거늘,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리를 얻지 못했으며,

    

  八十種妙好와 十八不共法. 80종호와 18가지의 특수한 법. 이런 법입니다. 부처님이 가지신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요.

三十二相. 十力. 十八不共法. 八十種好. 이와 같은 등의 공덕을 而我皆已失이라. 내가 다 이미 잃어 버렸다. 그런 세월이 있었다 이겁니다.

열반만 생각했지 부처가 된다는 것은 생각 못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11. 我獨經行時 見佛在大衆 名聞滿十方 廣饒益衆生 自惟失此利

      아독경행시 견불재대중 명문만시방 광요익중생 자유실차리

      我爲自欺誑(아위자기광)

我獨經行時에 내가 홀로 經行할 때에 見佛在大衆하니,

부처님이 대중 가운데에 있는 것을 척 바라보니 名聞滿十方이라.

아~, 부처님이 너무 부럽다 이겁니다. 부처님의 이름과 소문은 시방세계에 가득해. 廣饒益衆生시어늘, 널리 중생들을 饒益케 하는 겁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끼치는 그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 이것이지요.

 

  사리불은요. 석가모니부처님이 계셨으니까 그렇지, 사실 그 당시 인도 사회에서 사리불은 최고지성인입니다. 외모라든지 종족의 족성이라든지 자기 타고난 전형이라든지 지혜라든지 지식이라든지, 모든 분야에서 사리불 같은 이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가만히 보면 크게 다를 바 없는데, 부처님은 저렇게 훌륭하고 名聞滿十方입니다. 名聞滿十方이고 廣饒益衆生이라. 하~,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고 혜택을 베푸는데, 어찌하여 自惟失此利라. 나만 오직 이러한 이익을 잃어버렸으니, 我爲自欺이니라. 이것은 내가 내 스스로를 속이고 사기 치는 일이다 이겁니다. ←이런 말도 참 중요한 겁니다.

 

  이것은 부처님이 그렇게 안 가르쳐준 것 같이 이야기는 돌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손실은 내가 못나서 그렇고, 내가 나에 대한 어떤 잘못된 생활 때문에 그렇다. 나는 아라한이다 하는 생각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알고 보면 부처인데, 부처라고 생각할 줄 모르고 아라한이라고 밖에 생각 못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오직 이러한 이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었다는 말이지요.

 

12. 我常於日夜 每思惟是事 欲以問世尊 爲失爲不失 我常見世尊

      아상어일야 매사유시사 욕이문세존 위실위불실 아상견세존

      稱讚諸菩薩 以是於日夜 籌量如此事

      칭찬제보살 이시어일야 주량여차사

我常於日夜에 그래서 나는 항상 日夜에, 낮이나 밤이나

每思惟是事하고 나도 잘났다면 참 잘난 놈인데 어째서 이러냐?

그래서 계속 이 이일을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欲以問世尊은 爲失爲不失인가호이다. 그래서 세존께서 이것은 내가 잃어버린 것입니까? 잃어버리지 않은 것입니까? 라고 묻고자 했더라 이 말입니다. 我常見世尊이 내가 항상 본 세존이 稱讚諸菩薩하사옵고,

항상 諸菩薩을 칭찬하더라. 諸菩薩은 일반대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대승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모든 사람들을 칭찬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以是於日夜에 낮이나 밤이나 籌量如此事호이다.

이와 같은 일을 헤아리고 또 헤아리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여기에 사리불의 고민이 아주 많이 묻어나지요. 이 게송이 사리불의 고민이 아주 많이 묻어납니다. “나도 말이야 인도 사회에서 한다면 하는 사람인데...” 사실 그 자존심. 그 자부심. 그 긍지가 사리불을 따라갈 사람이 누구도 없었습니다. 불교 역사에 제일 화려하고 멋지고 근사한 절. 부처님을 모셨던 기원정사를 전부, 돈은 딴 사람들이 댔지만, 설계. 감독. 감리. 자재구입. 일체 사리불이 다 했습니다. 

 

  사리불이 감독을 다 해서 기원정사가 이뤄진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 아닙니까? 법만 아나요? 理事에 능통한 사람이지요.

우리는 이판사판이라고 하지만, 이와 사에 그렇게 뛰어났던 분입니다.

사리불은 정말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은 인물이었습니다.

부분, 부분에 그런 것을 경전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앞에도 있었지만 낮이나 밤이나 이 일을 籌量했다고 했잖아요. 헤아리고 생각했다.‘어째서 나는 요렇게 밖에 안 되는가?’ 그러다가

 

 13. 今聞佛音聲 隨宜而說法 無漏難思議 令衆至道場 我本著邪見

      금문불음성 수의이설법 무루난사의 영중지도량  아본착사견

      爲諸梵志師 世尊知我心 拔邪說涅槃 我悉除邪見 於空法得證

      위제범지사 세존지아심 발사설열반 아실제사견 어공법득증

      爾時心自謂 得至於滅度 而今乃自覺 非是實滅度

      이시심자위 득지어멸도 이금내자각 비시실멸도

    

  今聞佛音聲을 지금 부처님의 음성을 隨宜而說法. 편의를 따라서 설법함을 들으니, 아~, 부처님이 방편으로, 방편으로 그렇게 했으나 이것을 듣고 無漏는 難思議라. 새어남 없는 도리를 思議하기 어려움이라.

令衆至道場이니다. 대중들로 하여금 도량에 이르게 한 것이다.

道場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는 “깨달음의 경지”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가 있는 도량에서 깨달음을 성취했기 때문에 앞에도 나왔지만, 항상 道場은 “깨달음의 경지”라는 말입니다.

절도 물론 도량이지만, 부처님을 모시고 수행하는 스님들이 계시는 곳은 무조건 道場입니다. 도량에 살면 무조건 깨달아야 됩니다. 깨닫는 것이 목적이라고요. 왜냐? 우리는 도량에 사니까요. 부다가야 보리수 밑만 도량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든 곳이 다 도량이기 때문에 그래요.

 

  我本著邪見하야 내가 본래 삿된 견해에 집착을 해서 諸梵志의 스승이 되었더니, 제자가 많았지요. 250명인가 되었지요.

世尊知我心하시고, 세존께서 내 마음을 아시고,

拔邪說涅槃. 삿된 소견을 뽑아버리고 涅槃을 설했다.

我悉除邪見하야 나는 삿된 견해를 다 제거해서

於空法得證. 공의 도리에, 공의 도리에서 증득함을 얻었다.

空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니까 열반과 공은 같은 것이지요.   

涅槃. 번뇌가 다 사라졌다. 空의 도리를 성취했다 이 겁니다. 그리고서

 

  그 때 心自謂. 내 스스로 생각하기를,

得至於滅度. 아~, 내가 제도를 받았구나. 제도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涅槃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그래서

而今乃自覺 非是實滅度니라. 그러다가 그러나 지금에 스스로 진짜 멸도가 아니라는, 실다운 멸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겠습니다 이 말입니다. 진짜 열반이 아니다 이것이지요. 진짜 열반도 아니고 진짜 제도가 아니다. 이 멸도는요. 자주 나오지만, 돌아가신 것도 멸도이고, 또 번뇌가 다 사라진 것도 멸도이고, 그냥 막연하게 제도 되었다고 했을 때도 멸도라고 합니다. 멸도 = 제도 = 열반. 죽음까지도 멸도라고 그러지요.

이것이 사리불이 그 동안 자기 공부해온 것에 대한 이야기지요.

 

  세존이 내 마음을 아시고, 삿된 소견을 뽑아버리고

涅槃을 證得하게 했다.”“空의 도리를 證得다.” 이런 것이 그 동안의 공부이고, 이것은 곧 지금 아라한불교. 소승불교. 상좌부불교의 궁극의 경지입니다. 그런 관계를 우리가 아주 소상하게 알고 있어요.

“나는 소승으로 살더라도 불교의 전반적인 입장에서 볼 때 이치는 이렇다.” “나는 설사 소승으로 살더라도 부처님의 정말 진실한 가르침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는 일단 아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14. 若得作佛時 具三十二相 天人夜叉衆 龍神等恭敬 是時乃可謂

      약득작불시 구삼십이상 천인야차중 용신등공경 시시내가위

      永盡滅無餘(영진멸무여)

若得作佛時에 만약에 부처를 지었을 때에 三十二相을 갖추며,

天人夜叉衆과 龍神等이 恭敬하여서 是時乃可謂 永盡滅無餘니라.

그 때에야 비로소 가히 영원히 다 소멸해서 남음이 없다고 말할 수가 있다. 부처님자리를 꼭 三十二相을 갖추고, 天人과 夜叉와 龍神等이 恭敬을 해야만 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최소한도 이 당시의 분위기로는 부처의 경지를 그렇게 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5. 佛於大衆中 說我當作佛 聞如是法音 疑悔悉已除

      불어대중중 설아당작불 문여시법음 의회실이제

부처님이 대중 가운데서 說我當作佛하시니, 설하기를 우리들이 다 “부처를 지을 것이다.”라고 했으니, ←이 말은 사실 아니 했지요.

그런데 대중 가운데서 說. 말하기를 我當作佛.“내가 마땅히 부처를 지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라고 했잖아요. ←이것이 제가 누누이 강조하는 방편품의 皆已成佛道. “어떤 행위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이미 부처를 이뤄 마친 것이다.” 라고 하는 그 의미입니다. 그것이 곧 我當作佛.

우리들이 마땅히 부처를 지을 것이다. 라고 하는 그 말로 표현이 된 겁니다. 방편품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 말입니다.

  聞如是法音하고 같은 그 法音을 듣고 疑悔悉已除라.

의심과 뉘우침이 다 이미 제해졌습니다.

 

16. 初聞佛所說 心中大驚疑 將非魔作佛 惱亂我心耶 佛以種種緣

      초문불소설 심중대경의 장비마작불 뇌란아심야 불이종종연

      譬喩巧言說 其心安如海 我聞疑網斷

      비유교언설 기심안여해 아문의망단

初聞佛所說하고, 처음에 부처님이 설한 바를 듣고,

心中大驚疑호대 그렇지요. 아라한. 보통 사람은, 또 수행을 아무리 했다 하더라도 부처가 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는데, 心中大驚疑라고 했잖아요.

부처님이 “작은 행위 하나만으로도 皆已成佛道. 다 이미 부처가 된다.”고 했으니 마음에 얼마나 놀라겠습니까? 心中大驚疑라. 놀라고 의심했다.

저것이 혹시 마구니가 부처 모습을 지어서 저런 말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보십시오. 장차 마구니가 부처가 된 것이 아닌가? 또 마구니가 부처가 되가지고 우리들의 마음을 惱亂케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했었다는 것입니다.

 

  佛以種種緣과 부처님은 가지가지 인연과 비유와 능숙한 언설.

巧言說은 교묘한이 아닙니다. 아주 능숙하고 훌륭한 언로 其心安如海하야 그 마음 편안하기가 바다와 같고, 그리고 我聞疑網斷이라.

내가 그 말씀을 들으니까 의심의 그물이 다 끊어졌습니다.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이 남아있지 않고, 또 놀라지도 않고, 저 사람이 마구니가 부처 모습을 지어서 왔다는 생각도 아니 하고, 그대로 받아들여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하면, 이것은 다 된 경지지요.

더 이상 나아갈 바 없는 경지입니다.

그야말로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을 찾아가서 눈을 뜨고는,

黃檗佛法이 無多子라. 황벽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정도로 정말 마음의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진 그런 정도지요.

그래서 網斷이 다 끊어졌다고 그랬습니다.

 

17. 佛說過去世 無量滅度佛 安住方便中 亦皆說是法 現在未來佛

      불설과거세 무량멸도불 안주방편중 역개설시법 현재미래불

      其數無有量 亦以諸方便 演說如是法 如今者世尊 從生及出家

      기수무유량 역이제방편 연설여시법 여금자세존 종생급출가

      得道轉法輪 亦以方便說 世尊說實道 波旬無此事

      득도전법륜 역이방편설 세존설실도 파순무차사

 

  佛說過去世에, 부처님이 過去世에 無量滅度佛이 安住方便中하사

방편 가운데에 安住해서 皆亦說是法하시며, 또한 다 이러한 법을 설하시며, 또 과거 부처님도 그랬고, 그 다음에 現在未來佛이 其數無有量호대,

그 수가 한량이 없으되, 亦以諸方便으로 또 방편으로 이와 같은 법을 설했다. 끊임없이 방편으로 그렇게 3승법을 설해왔다는 말입니다.

如今者世尊이 그러니까 과거 부처. 현재부처. 미래부처. 그리고 世尊. 이 말이지요.

 

  세존도 從生及出家하사. 태어나면서 부터 출가해서 得道轉法輪.

깨달음을 얻고 법륜을 굴리시되, 亦以方便說하시니, 또한 방편으로 설하시니, 世尊說實道요. 세존은 진실한 도를 설한 것이요.

波旬은 無此事라. 마왕 波旬은 이러한 일이 없다 이겁니다.

여기서 부처님을 아주 확신하고 들어가는 것이지요. 

방편품 에서 손 한번 들고. “나무 불.”하고, 절 한번. 고개 끄덕 한 것만으로도 다 부처를 이루었다는 여기에 조금도 의심이 없고, 거기에 대해 의심이 없는 것을 이렇게 피력을 하고 있습니다.

 

18. 此是我定知 非是魔作佛 我墮疑網故 謂是魔所爲

    차시아정지 비시마작불 아타의망고 위시마소위

此是我定知 非是魔作佛이라. 나는 이것이 마구니가 부처가 되지 않았다고 하는 사실을 결정코 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부처님의 말씀이지, 어떻게 마구니가 그럴 수 있느냐?

이런 말입니다. 그래서 我墮疑網故, 내가의심의 그물에 떨어졌던 고로

謂是魔所爲니라. 이것은 마구니가 하는 바라고 여겼었는데,

 

19. 聞佛柔軟音 深遠甚微妙 演暢淸淨法 我心大歡喜 疑悔永已盡

      문불유연음 심원심미묘 연창청정법 아심대환희 의회영이진

      安住實智中 我定當作佛 爲天人所敬 轉無上法輪 敎化諸菩薩

      안주실지중 아정당작불 위천인소경 전무상법륜 교화제보살

聞佛柔軟音이니, 부처님의 柔軟한 음성이 深遠甚微妙라. 깊고 멀고 지극히 미묘하사 演暢淸淨法. 청정한 법. 아주 뛰어난, 훌륭한 법.

여기서 淸淨法 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훌륭한 법. 정말 성스러운 법.

이런 것을 演暢하는 것을 듣고, 이런 말입니다.

我心大歡喜하며, 내 마음이 크게 환희하며, 疑悔永已盡이라. 의심과 뉘우침은 영원히 이미 다 하여, 安住實智中호이다. 실다운 지혜 가운데에 安住습니다.

 

  我 定當作佛하여, 내가 결정코 마땅히 부처가 되어서 天人의 所敬하는 바가 되며, 無上法輪을 굴려서 모든 菩薩 들을 敎化 것입니다. ←이렇게 사리불이 방편품의 교설을 듣고 깨달은 것을 피력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듣고 부처님이 가만히 있을 수 없지요.

이것이 佛述成이라고 해서 부처님이 부연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부연설명을 간단하게 하지요. 부연설명을 하는데.

 

20. 爾時 佛告舍利弗 吾今於天人沙門婆羅門等 大衆中 說 我昔曾於

      이시 불고사리불 오금어천인사문바라문등 대중중 설 아석증어

      二萬億佛所 爲無上道故 常敎化汝 汝亦長夜 隨我受學 我以方便

      이만억불소 위무상도고 상교화여 여역장야 수아수학 아이방편

      引導汝故 生我法中(인도여고 생아법중) 

    

  그 때에 부처님이 사리불에게 고하사대, 吾今於天人沙門婆羅門.

그리고 大衆 가운데에 我昔曾, 내가 옛날 일찍이 二萬億 부처님처소에서 無上道를 위한고로, 常敎化하여, 항상 그대를 교화했거늘, 汝亦長夜하야, 그대는 또한 깊고 깊은 밤중에 隨我受學일새. 나를 따라서 受學했을세.

여기 長夜라고 하는 것이 人生의 長夜지요. 無明長夜. 人生長夜.  煩惱長夜. 길고 긴 밤이지요. 지혜는 밝은 대 낮을 상징하고, 장야는 무명. 번뇌. 업장.

어리석음을 長夜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아주 어리석고 못난 그런 세월 속에서 살아왔다 이것이지요. 거기에 있는 것을 늘 교화했다.

그래서 我以方便으로 引導汝故로 할 수 없이 방편으로서 그대를 인도하는 과정이니라. 生我法中에, 결국은 나의 법 가운데 태어났다.

 

  그러면 방편으로, 예를 들어서 아라한과를 최종 목표로 한다든지, 열반을 최종 목표로 한다든지 하는 것은 아직 부처님 법 중에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법화경에 근거해서 우리가 본다면, 아직 부처님 제자 아닙니다. 진짜 부처님 제자는 부처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있는 사람이 진짜 부처님 제자입니다. 부처님이라고 하는 자각이 없으면 아직 부족한 것이지요. 그것을 이런데서 읽을 수가 있습니다. 

我法中에 태어났다.” 이랬잖아요. 生我法中. 비로소 나의 법 중에 태어났다. 이때까지는 아직 내 법 중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21. 舍利弗 我昔敎汝 志願佛道 汝今悉忘 而便自謂 已得滅度

      사리불 아석교여 지원불도 여금실망 이변자위 이득멸도

      我今還欲令汝 億念本願所行道故 爲諸聲聞 說是大乘經 名 妙法蓮華

      아금환욕령여 억념본원소행도고 위제성문 설시대승경 명 묘법연화

      敎菩薩法 佛所護念(교보살법 불소호념)

    

  사리불아, 我昔敎汝 志願佛道는, 내가 옛날에 너에게 가르치기를 佛道. 부처의 도에 뜻과 원을 세우기를 가르쳤거늘, 그런데 지금 그대는 悉忘 하고, 지금까지다 잊어버리고,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다 잊어버리고, 而便自謂 已得滅度라.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멸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이겁니다. ‘열반을 얻었다.’‘모든 제도를 다 얻었다.’←이렇게 생각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滅度 佛道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佛道를 가르쳤는데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는 스스로 조그마한 열반 하나를 얻어 놓고는, 그것을‘佛道 얻었다.’←이렇게 생각 했을세.

  

   我今還欲令汝로 지금에 내가 지금 도리어 너로 하여금 億念. 기억하게 했다는 말입니다. 뭐냐? 本願所行道. 이것 중요한 말입니다.

本願所行道. 부처님께서 본래 원하고 있는 것. 本願의 행할 바 道. 부처님의 본래 소원이 뭐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을 부처로 만들어 주는 것. 부처임을 자각하게 하는 것. 부처의 아들 딸 이라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본래 소원입니다. 그것을 億念하는 까닭에 爲諸聲聞하사, 그래서 모든 성문을 위하사 說是大乘經하시니, 이 대승경을 설하니, 할 수 없이 이제 내 본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입니다.

 

  부처님이 그래요. 내 본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내 본래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이 大乘經을 설하는데, 그것이 妙法蓮華다. 敎菩薩法이며 佛所護念이다. 언젠가 그랬지요. 보살을 교화하는 법이며, 부처님이 護念하는바 다. 부처님이 늘 보호하고 아끼고 마음속에 깊이깊이 간직한, 정말 깊고 깊은 금고 속에 저~~ 안에 넣어 놨던 것을 끄집어내서 이제 최후로 설해 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본래의 소원이었다. 그 동안 내가 일러준 것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지금까지 열반이니 공이니 무상이니 무아니 하는 것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다 인줄 알고 있으니 참 안타깝고 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리불이 그런 내용을 이야기를 길게 게송으로 했는데,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부처님이 부연설명을 하는 겁니다. 이것을 佛述成이라고 그래요. 述成이라는 것이 부연설명입니다. 그 다음은 사리불에게 수기하는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 4강 - 3으로 이어집니다.-

 

 

 

 

 

 

 

 

 

법화경 대강좌 4강 - 2 (비유품 5~21)

법화경 대강좌 4강 - 2 우리 도반 중에 그와 똑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 공부가 어느 정도 되었어요. 그런데 그 소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겁니다. 몇 년 지나서 만나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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