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녹취(문수경전)

법화경 대강좌 4강 - 1 (비유품 1~4)

수선님 2022. 12. 4. 12:43

법화경 대강좌 4강 - 1 

 

 

  오늘 법화경 4번째 시간인데 교재에 보면 妙法蓮華經 弟二卷 그랬어요.

 이것은 옛날에 책을 지금처럼 하지를 않고, 책을 두루마리로 했기 때문에 말 권자를 썼지요. 적당한 量이 되어야 펼쳐서 감당할 수 있을 만치 페이지 수가 되면, 그것이 한권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 권은 크게 의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 권수로는 법화경은 7권이지요. 이런 것도 書誌學(서지학)적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법화경은 7권으로 만들었는데 품수로서는 第三品, 譬喩品을 공부할 차례입니다.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정말 법화경 안에는 우리가 공부해야할 것이 대단히 많구나.

  

  속속들이 숨어있는, 숨어 있다기보다 그 속에 이미 담겨 있는 것을 우리가 미처 잘 모르니까 숨어있다고 표현을 하는데 법화경 한 구절, 한 구절을 소개하는 데는 그런 심오한 진리의 가르침을 우리가 제대로 공부해서 그것을 해설해 내는 일이 참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니까, 앞에서 본 법화경 안목이라고 하는 방편품 한 품만 가지고도 불교를 알리는 좋은 경전이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문품은 관음경이라고 해서 한 권의 경으로 받들고 있지 않습니까?

방편품의 내용은 사실 알고 보면, 보문품하고 비교할 바가 아니지요. 그 만치 아주 심오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봤듯이 정말 三止三請章이라든지, 또 十如是章이라든지,

開示悟入 佛之知見이라고 하는 이야기라든지, 一大事因緣이라든지,

5000명이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五千退席章. 또 五佛. 다섯 분의 부처님이 증명했다는 五佛章의 이야기라든지, 방편품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萬善成佛.

조그마한 작은 선 도 그것이 성불의 因이 되어서 사실은 皆已成佛道.

다 이미 성불해 마쳤다는 아주 말은 쉽고, 간단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속에 담겨있는 무궁무진한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내용들이 방편품에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방편품 하나만 가지고 한 권의 책으로서도 내용이 충분하다는 생각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늘 욕심이 그래요. 공부하는 사람이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여기 150~160명 등록을 해서 공부하시는데, 같이 合作을 해도 좋고, 혼자해도 좋고, 모두 법화경에 대한 그 나름대로 어떤 애착이라든지, 거기에 소견이 열린 것이라든지, 좋아서 했든지, 어쨌든 조그마한 성과물이라도 하나씩 만들어 냈으면 하는 욕심을 가르치는 사람은 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방편품을 볼 때, 야~ 참, 이것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방편품 한 품만 가지고 연구해서 설명해도 참 좋은 책이 되겠다.

 

  그리고 또 오늘 공부할 비유품. 비유품도 방편품 못지않게 양도 상당히 많지요. 비유품도 한 권의 책으로서 아주 훌륭한 내용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서 원문을 넣고 그 다음에 번역을 넣고, 그 다음에 거기에 따른 속속들이 아주 세세한 해석을, 다른 해석 책을 참고해 가면서 또 강의한 것을 거기다 삽입시키면서, 그리고 자신의 소견을 거기에 보태면서 이렇게 하면 비유품도 그거 하나만으로도 아주 훌륭한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것을 준비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런 점에 착안을 해서, 이제 벌써 4회째입니다. 슬슬 그런데 대한 준비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법화경에 대한 보다 더 깊이 있는 공부도 되고, 자신의 공부의 성과물도 되겠다는 욕심도 한번 내봅니다.

 

  오늘 비유품 이라고 하는 것은 품 이름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문에 나옵니다만, 지혜 있는 사람은 비유로서 알아듣는다. 그랬어요. 그래서 지난 시간에 약간 말씀드렸지만, 제3강 유인물 끝에 보면 三周說法에

   상 근기를 위한 法說周.

   중 근기를 위한 譬說周.

   하 근기를 위한 因緣周.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법설주가 방편품을 중심으로 해서 설해졌습니다.

과목을 보면 본격적인 비유는 사실은 비유품 중간에서부터 비유가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法說周는 부처님이 법을 설했다는 말입니다.

진리를 설했는데 그것을 上根. 사리불이 領解했다고 그랬거든요.

사리불이 깨달았다 이겁니다. 부처님이 설법을 하셨는데 그 설법을 듣고 사리불이 이해했다. 사리불이 깨달았다 이겁니다. 사리불이 이해한 것을 여기에 쭉 피력을 합니다. 사리불이 이해한 것을 피력을 하면,  부처님이 기기에 대해서 다시 보완 설명을 합니다. 그것이 佛述成입니다.

부처님이 그 깨달음에 대한 내용을 보완 설명을 하고, 그리고 그 설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수기를 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기를 줄 수밖에 없어서 여기에 첫 수기가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인물을 들어서 수기하는 것은 사리불이 맨  먼저 수기를 받는데 그것이 여기 비유품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법화경에 있어서 방편품의 萬善成佛. 조그마한 어떤 선행도 성불의 因이 된다고 해서 “나무불”한다든지 손을 한번 든다든지 부처님께 고개만 끄덕인다든지 아니면 어린아이의 장난으로 모래를 쌓아서 “부처님이다.”이렇게 해서 예배하는 그런 하찮은 일도 다 성불한다는 이 말이 사실은 수기입니다. 그런 것을 總受記라고 합니다. 뒤에 총수기라는 말도 나오는데, 말하자면 전체를 수기하는 것이지요. 방편품에서의 내용은 전체를 수기하는 것입니다.

 

  방편품에서 그러한 말이 사실은 수기하는 내용이고, 그 다음에 구체적인 인물을 들어서 수기하는 것이 여기 비유품에서 등장합니다.

법사품에 가면 법화경의 한 구절이나 한 문장만 들어도

“이미 그 사람은 부처님이 수기한 바와 같다.”고 해서 그것을 總受記라고 합니다. 전체적으로 전반적으로 수기를 한다는 뜻으로 되어있고, 잘 아시는 상불경보살 있잖아요. 상불경보살은 석가모니 전신이라고 그렇게 등장을 하면서 모든 사람을 부처님이 될 것이라고 표현을 하지만, 내용은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상불경보살의 입을 통해서 모든 사람을 수기 하게 됩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이해하는데 수기라고 하는 그 내용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수기의 문제만 가지고도 또한 얼마든지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은 일명 “受記經이다.”그래요.

왜냐? 방편품에서 그렇게 우리가 보아왔듯이 전체적으로 그대로 수기를 했고, 또 여기 비유품에서 사리불에게 수기를 하고, 신해품에서 4대 성문에게 수기를 하고, 그 다음에 수기품이 있지요. 수학무학인기품이 있지요.

수기만 전문으로 하는 품이 세품인가 또 있지 않습니까?

수기만 전문으로 하는 품 외에도 수기가 그렇게 많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법화경을 受記經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결코 지나친 표현이 아닙니다. 저는 아주 적합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법화경은 부처님이 열반을 앞두고 설해진 경전으로서 왜? 수기가 이렇게 많이 수기가 등장하는가?

이런 문제도 우리가 좀 깊이 이해해야할 내용입니다.

 

  오늘 나눠드린 “사람이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이것이 과거까지는 그렇습니다. 법화경을 공부하는데 수기의 문제, 특히 수기의 문제를 어디까지로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 사실은 이것이 큰 문제입니다.

“미래에 성불할 것이다.” 이러이러한 선행을 닦아서 그 공덕으로

“미래에 성불할 것이다.” ←여기까지 밖에 말 못했습니다.

일본 학자들은 법화경을 좋아하고 법화경을 많이 연구를 했는데, 그 사람들도 아주 조심스럽게 거기까지 밖에 이야기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완성품이 아닌, 완전하지 않은 해설이라고 저 나름대로 그렇게 봅니다. 왜인가하니 3강유인물 법화경 노트에도 약간 메모를 했듯이 “조사어록의 佛”이라는 말이 있지요.

 

  부처님의 第一聲으로서 제불의 지혜를 찬탄하고, 부처님은 이러이러한 분이라고 했지만, 사실인즉 그것은 하나의 치장에 불과한 것이고, 부처의 진면목은, 부처의 진면목은 見聞覺知. “조사어록의 佛”하는 것 見聞覺知가 是眞佛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이 기기묘묘한 능력. 이 불가사의한 능력. 정말 볼 줄 알고, 들을 줄 알고, 웃을 줄 알고, 화낼 줄 알고, 슬퍼할 줄 아는 이 불가사의한 능력. 이것이야말로 정말 진정한 부처이고 이 능력을 드러내느라고 방편품에서 뭐라고요?

부처님 앞에서 손만 한 번 들어도 皆已成佛道라고 했습니다.

 

  “다 이미 부처님이다.” ←이 말의 속뜻은 조사스님들이 밝힌 見聞覺知가 是眞佛이다. 見聞覺知하는 그 놈이 곧 부처라고 하는 이것하고 아주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겁니다. 어린 아이가 모래사장에 가서 오줌을 싸가지고 모래를 뭉쳐서 불상이라고 해놓고 예배하는 것만으로도 皆已成佛道니라.

“다 이미 성불해 마쳤다.” 법화경방편품에서 우리가 수차 봐 왔지 않습니까? 그 말이 뭡니까? 조사스님들이 말하는 見聞覺知하는 그 능력 그대로가 조금도 손색이 없는 부처라는 그 말이거든요.

 

  어록에서 흔히 인용하는 대주혜해스님이 마조스님을 찾아 갔을 때,

“네가 여기까지 왜 왔느냐?”

“성불하려고 왔습니다. 공부해서 부처되려고 왔습니다.”

“자기 보물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쓸데없이 돌아다니기만 한다.”

“내 보물이 뭡니까?”

“네가 궁금해서 나에게 묻는 그 놈이 진짜 보물이다. 진짜 부처다.” ←이 대화가 만고에 절찬입니다. 더 이상 드러낼 수없는 불교의 궁극의 가르침이라고 해서 선사스님들이 입만 떼면 마조와 대주혜해선사가 나누는 돈오입도요문에 나오는 그 얘기를 의례히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아주 명확하게 세워 놓고 그 다음에 소승경을 보든지 대승경을 보든지 무슨 경을 보든지 이 종지가 바로 서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그 부분. 또 그 경전이 어떤 근기에게 어떤 이치를 이야기하려고 했는가 하는 것. 그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최소한도 법화경을 우리가 공부할 때는 수기 중심으로 되어있는 경전.

한 마디로 법화경을 수기경이라고 할 정도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래서 언제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이렇게 미래지향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내용은 “이미 부처다.”라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는 좀 더 발전된 법화경 이해라고 보고 공부해야 된다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것만 우리가 확실하게 마음에 다가서면 크게 어려울 것이 없지 않은가? 기타 소소한 것은 전부 교리적인 이야기다.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나눠드린 유인물이 “法華七喩와 火宅의 비유에 나타난 번뇌” ←이렇게 했는데, 이제 비유품에 들어갔으니까 법화경은 7가지 비유가 유명합니다. 7가지 비유가 유명한데 처음에 만나게 되는 비유가 火宅喩品이있고,

窮子喩ㆍ藥草喩ㆍ化城喩ㆍ衣珠喩ㆍ髻珠喩ㆍ醫子喩. 의사와 아들의 비유라는 뜻이지요. ←이런 등등 7가지 비유가 아주 유명합니다.

비유만을 추려서 한권의 경으로, 한권의 책으로 이야기를 해도 한 권 가지고는 아니 될 정도지요. 아주 좋은 소재지요. 그러니까 공부하시는 분들은 그런 것을 염두에 두시라고 하나의 자료 제공으로서 제가 드리는 말씀입니다.

 

  수기는 또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사실은 부처님의 자식.

부처님의 자식이라고 하는 자각입니다.

부처님의 자식이 아닌데 어떻게 모래를 가지고 불상이라고 장난하는 그것으로서 이미 부처를 지어 마쳤다. 皆已成佛道. 불도를 이뤄 마쳤다는 표현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부처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부처 앞에서 고개 한번 끄덕였다든지, 손 한번 들었다든지, 절을 삼배 했다든지, “나무 불” 한 마디 했다든지 하는 그것으로서 어떻게 다 이미 성불해 마쳤다고  표현할 수 있느냐? 이겁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슴에 와 닿아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수기 받은 겁니다. 우리는 부처님 앞에 천번 만번 수억 만 번 기도 했고 염불했고, 예배했고 경배해 마쳤습니다. 법화경에 표현 된 그런 어떤 인연으로 비교하자면 수만 배 수십만 배 수억만 배를 우리는 이미 선행을 했습니다. 그러고도 우리가 스스로 佛子. 부처님의 자식이라고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당연히 우리는 부처님의 자식이니까요. 그대로 佛子라고 하는 표현. 부처님의 자식이면 곧 부처님입니다.

그런 자각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 법화경을 공부하면서 우리가 구축해야할 중요한 사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내용도 법화경 비유품안에도 자주 등장을 합니다. 비유품에 첫 구체적인 수기가 나오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됩니다.

 

  아직은 법을 설한 내용이 덜 끝났지요?

科目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과목을 보더라도 譬喩品 첫 머리에 아직도 法說周가 이어지고, 정식으로 법을 설한 것은 방편품이고, 그 다음에 상근기가 그것을 이해하는 그런 내용으로 쭉 이어져갑니다. 

 

   妙法蓮華經 弟二卷 譬喩品 第三

 

1. 爾時 舍利弗 踊躍歡喜 卽起合掌 瞻仰尊顔 而白佛言 今從世尊

   이시 사리불 용약환희 즉기합장 첨앙존안 이백불언 금종세존

   聞此法音 心懷踊躍 得未曾有(문차법음 심회용약 득미증유)

그 때에 사리불이 踊躍歡喜해서, 방편품에서 이야기하는 그 어떤 행위도 행위한 그 자체만으로서도 부처라고 하는 그 사실입니다.

그것을 듣고는 踊躍歡喜한 것이지요. 그래서 곧 일어나서 合掌을 하고서 瞻仰尊顔이라. 부처님을 우러러 瞻仰하고 而白佛言하사대, 今從世尊하와 지금 세존으로부터 聞此法音하고, 이 법의 소리를 듣고, 心懷踊躍하여 마음에 뛸 듯이 기뻐하는 것을 품고 未曾有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환희입니다. 3가지 기쁨이 있는데 이것이 첫째 환희입니다.

스스로 환희하는 것입니다.

 

  3아승지겁을 닦아야 되고, 아라한은 세세생생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상식에 떨어져 있다가, 성문도  부처가 된다 이 겁니다.

聲聞도 그대로 부처라는 소리를 듣고, 정말 거기에, 그 문제에 인생을 다 걸고 살아왔던 사리불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心懷踊躍 得未曾有. 뛸 듯이 기뻐한다. 心懷踊躍. ←이런 표현들이요.

그냥 쓴 글이 아닙니다. 이보다 훨씬 더, 어떤 기쁨에 넘쳤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조선시대에 從으로 대대손손 내려오다가 어느 날 양반으로 등급이 떡 되었다  겁니다. 종에서 풀려났다  겁니다.

그 때에 그 기분이 어떠하겠습니까? 자자손손 從으로, 종의 자식으로서 공부를 잘해도 등용도 못되고, 어디가도 종의 자식으로 천대 받다가 어느 날 양반으로 등급이 딱 돼 버린 겁니다. 그날부터 양반입니다.

당당하게 양반이 되었  겁니다. 그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사실 이것은 그것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아라한이 부처가 된다고 하는, 앞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미 부처다.”라고 했다면 이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

방편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 所以者何 我昔從佛 聞 如是法 見 諸菩薩 受記作佛 而我等

   소이자하 아석종불 문 여시법 견 제보살 수기작불 이아등

   不預斯事 甚自感傷 失於如來 無量知見

   불예사사 심자감상 실어여래 무량지견  

所以者何오. 까닭이 무엇인가? 我昔從佛하와, 내가 옛날에 부처님으로부터 이와 같은 법을 들었는데, 여러 보살들은 부처가 된다고 하는 수기 받는 것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보살들은 부처가 된다고 하는 소리를 듣고, 그런 사실도 보았다. 그러면서 ‘아이, 저것은 보살들의 몫이야. 내 몫은 아니야.’←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양반들 몫이지 종의 몫은 아니다 이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我等은 不預斯事. 그래서 우리들은 이 일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래서 甚自感傷이라. 심히 스스로, 感傷이라는 말은 아주 슬프고 소외감 들어 가지고 마음이 상해서 정말 죽을 맛이 여기서는 感傷입니다.

마음이 완전히 상했  겁니다. 똑 같은 사람인데 저 사람들은 공부 많이 했다고 부처된다고 하고, 우리는 거기 참여 못해가지고서 너무 슬프고 소외감을 느껴서 失於如來 無量知見이라. 여래의 한량없는 지견을 우리는 잃어버린 사람이다. ←이렇게 그냥 정말 비관에 떨어져 살았는데,

 

3. 世尊 我常獨處 山林樹下 若坐若行 每作是念 我等 同入 法性

   세존 아상독처 산림수하 약좌약행 매작시념 아등 동입 법성  

   云何如來 以小乘法 而見濟度 是 我等咎 非 世尊也

   운하여래 이소승법 이견제도 시 아등구 비 세존야

세존이시여, 我常獨處 山林樹下. 저는 항상 山林樹下에서 홀로 해가지고서 若坐若行. 앉거나 행함에 每作是念호대, 매양 생각을 하되,‘우리들도,’사실 따지고 보면 同入法性입니다.

우리도 법의 성품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진리의 세계 속에 다 들어 있다고요. 어느 누구 진리의 세계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그 유명한 대화 있지요. 멸치가 용왕보고 바다가 뭐냐고, 바다, 바다 하는데 도대체 바다가 뭐냐고 그렇게 물으니까 용왕이 참 기가 차거든요. 바다에서 태어났고, 자기 아버지 어머니도 바다고, 선조도 바다고, 일체가 바다입니다. 멸치 그 자체도 바다고, 용왕 그 자체도 바다고 용궁도 바다고 전부가 바다인데, 거기에 들어가지고 바다가 뭐냐고 멸치가 물으니 용왕이 기가 차는 겁니다. 同入法性입니다. 다 바다 속에 들어있다고요. 진리의 세계 속에 산다. 뭐 보살만 진리 속에 살고, 아라한은 안 산다는 것은 말도 아니지요.

 

  그래서 우리도 同入法性이어늘 云何如來가 以小乘法을,

그런데 왜 부처님께서는 小乘法으로서 우리를 제도를 보이는가?

우리에게 小乘法가지고 우리를 제도하느냐 이 겁니다.

是 我等咎라. 그렇다고 내가 부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겁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허물이지 여래의 허물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4. 所以者何 若我等 待說所因 成就阿縟多羅三藐三菩提者 必以大乘

  소이자하 약아등 대설소인 성취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 필이대승

而得度脫 然 我等 不解方便 隨宜所設 初聞佛法 遇便信受 思惟取證

 이득도탈 연 아등 불해방편 수의소설 초문불법 우변신수 사유취증

所以者何오 까닭이 무엇이냐? 만약에 우리들이 待說所因하야 원인되는바 설함을 기다려서, 그랬습니다. 원인되는 바는 보리의 인. 菩提의 定因이지요. 般若의 實智. 반야의 참다운 지혜를 所因이라고 합니다.

되는바를 설해 주는 것을 기다려서 成就阿縟多羅三藐三菩인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진댄, 必以大乘으로 반드시 대승으로서 度脫을 얻을 수 있거늘, 그러나 우리들은 方便과 隨宜所設을 알지 못하고 또 初聞佛法커늘 처음에 부처님의 법을 듣고는 그대로, 遇便信受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을 하든지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어릴 때 울면 “밖에 호랑이 왔다.” 그러면

‘아이고 호랑이 왔는가 보다.’ 하고 울음 딱 그쳐버리는 그 식으로 살았다 이겁니다. 遇便이라는 것은 그 말입니다. 만나자마자 곧 바로. 듣자마자 곧 바로 믿고 받아들여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니까, 부모가 말씀하시는 것이니까, 어린아이야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요.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니까 저것이 방편으로 저렇게 우리 근기를 성숙시키기 위한 소승법인지 대승법인지 그것을 분별할 겨를이 없는 겁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스님들이 아무 것도 모르는 신도들에게 뭐라고 이야기해도 아이고 우리스님이 말씀하셨다고. 아, 주지스님이 말씀하셨다고. ←이래 가지고는 평생 그것이 그 사람의 법이 되고, 그 사람의 살림살이가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불교적 안목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그것은 승복입고 머리 깎고 근사하게 차려 놓으면 사기 치기 참 좋아요.

그냥 바로 믿으니까요. 부처님의 빽으로 90%는 따고 들어가는 겁니다.

여기도 보면 부처님말씀 듣자마자 遇便信受입니다.

만나자마자 곧 바로 그냥 믿고 받아들여서, 思惟取證호이다.

그것을 思惟해 가지고서 진리를 취했습니다.

그러니까“열반이 최고야”←이러면 열반 그것을 그대로 공부해 가지고 열반만 취해 가지고선 그것을 자기 살림살이로 삼았다.

그러면 좋다고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꾸짖은 말씀 중에 擔麻棄金(담마기금)이라는 말이 있지요.

담마기금. 삼을 짊어지고 금을 버린다는 것이지요.

옛날 강원도 산골에 어떤 청년들 둘이 삼을 잘 키워서 시내에 가져가서 팔려고 짊어지고 한참 갔어요. 고개를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는데 길가에 구리가 있는 겁니다. 구리가 잔뜩 놓여있어요.

한 사람은 구리가 삼보다는 값은 비싸기는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짊어지고 온 그 공이 아까워, 그것을 “前功이 可惜”이라고 그래요. 앞에 들인 공이 가히 아깝다. 그래서 그 사람은 ‘에이 값이야 좀 더 나가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짊어지고 온 의리가 있으니까 그냥 삼 그대로 짊어지고 시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삼을 얼른 버려 버리고 구리로 한 짐 짊어졌어요.

가격은 배가 차이 났지요. 한참 가다 보니까 은이 한 무더기가 있어요.

그러나 삼을 짊어지고 온 사람은 그 의리 때문에 “전공이 가석”이라.

삼을 짊어지고 온 그 공이 아까워서 계속 또 삼을 짊어지고 가고,

구리로 바꿨던 사람은 얼른 버려 버리고 은으로 짊어지고 가는 겁니다.

이제 엄청난 차이가 난 것이지요. 그 다음 마지막에 금이 한 무더기 나타났는데 삼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끝내 삼을 짊어지고 가고, 은으로 바꿔 짊어졌던 사람은 결국은 은을 버려 버리고 금을 한 짐 짊어지고 가는 겁니다.

 

  그래 부처님이, 의리니 그런 것으로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도 있는데,

법을 공부하는 마당에 있어서 그런 것은 참 큰 잘못된 생각입니다.

얼른 버려 버리고 새로운 법. 좀 차원이 높은 것.

소견이 툭 터지고 바른 법. ←이것을 얼른 받아들이는 그런 자세가 참 필요합니다. 그것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삼을 짊어지고 가고 금을 버렸다는 표현으로 부처님이 꾸중을 했는데, 여기 사리불 같은 사람도 지금 그런 갈등의 순간입니다.

 

   - 4강 -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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