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없는 가르침 91

<방편(方便, 산스크리트어 upaya)>

불교에는 ‘방편(方便)’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어찌 보면 불교 전부가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현묘한 이치를 드러내지만 역시 방편이다. 이 내용을 담는 그릇일 뿐 이치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고준한 조사 스님들의 법어라 하더라도 역시 말씀이고 문자이기 때문에 방편이다. 그렇다고 방편이라고 해서 시시하게 함부로 취급할 일이 아니다. 방편은 방편대로의 큰 덕을 가졌기 때문이다. ‘방편(方便)’이란 산스크리트어 우파야(upāya-)를 번역한 말이다. ‘방편이라고 한역한 산스크리트어 ‘우파야(upāya)’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 수단, 접근하다, 도달하다는 뜻의 말이다. ‘방편’은 초기 논장 등에도 등장하지만 크게 주목받지 못한 개념이었다. 그러다가 대승불교가 흥기..

위없는 가르침 2022.12.25

법계 교리 문답

1. 연기법-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란? 인연생기(因緣生起)의 법으로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된 일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수시로 변화하는 여러 가지 조건에 의존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라는 생기(生起)와 소멸(消滅)의 법칙을 말한다. 즉 모든 현상은 무수한 인(因)과 연(緣)의 상호관계에 의해서 성립되기에 독립ㆍ자존적인 존재는 없으며, 조건과 원인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설이다. 소위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의식(意識)이 있다. 이렇게 전개되어 고통이 쌓이고 모이는 것이다. 이런 이치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거나 나오지 않거나 현상계의 변하지 않고 존속하는 이치이며 현상계의 근원적인 원리로서, 부처님은 다만 이 법을 스스로 깨닫고 알아서 보편타당한 깨달음[等正覺]..

위없는 가르침 2022.10.02

[불자가 꼭 알아야 할 100가지] 열반·입적·원적 등의 뜻은?

「그러면 승들이여! 이별이다. 모든 것은 변하는 것이다. 게을리 하지 말고 노력하라.」 석존께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라수 숲속의 그루 나무 사이에 마련한 침상 위에 누우셔서 이 사바세계를 떠나가셨습니다. 그 날을 우리는 열반기(涅槃忌)라고 하며, 음력 2월 15일 입니다. 부처님의 죽음을 이라 합니다. 이것은 을 의미합니다. 또한 를 가리키기도 하구요. 결국 깨침에 도달하게 되면 모든 번뇌(煩惱)는 무너져 꺼진 상태로 변합니다. 모든 것이 소멸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깨침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보리수 아래에서 처음 깨침을 얻었던 것도 열반이라고 해야 마땅하지만 보통은 죽음에 당도할 때를 이릅니다. 따라서 육신이 있고서 깨침에 이르른 것과 죽어서 육신이 멸하..

위없는 가르침 2022.08.14

교진여 등 오비구(五比丘)

오비구(五比丘) 최초로 석가에게 귀의한 다섯 명의 비구. 콘단냐(Kondanna:倧蓮如)·아사지(Assaji:阿說示)·마하나마(Mahanama:摩訶男)·밧디야 (Bhaddhiya:婆提)·바파(Vappa:婆頗)의 다섯 비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석가가 성도하 기 전 함께 수행하였고, 성도 후에는 초전법륜(初轉法輪)을 듣고 최초로 석가에게 귀의했다. 이들은 본래 우다카(Uddaka) 교단의 수행자였다. 태자 시절의 석가가 우다카 라마푸타라는 스승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였다가 만족하지 못하여 떠날 때 석가를 따라 네란자라강[尼連禪 河]까지 와서 같이 수행을 하였다. 석가는 5년 간의 고행을 마치고 얼마 동안 수자타라는 비구 니가 우유와 꿀에 쌀을 넣고 끓인 우유죽을 받아 먹었다. 덕분에 석가는 기력을 회..

위없는 가르침 2022.07.17

삼세(三世) - 불교에서의 시간의 구분

삼세(三世) 불교에서의 시간의 구분. 과거·현재·미래, 또는 전세·현세·내세를 말한다. 또한 이(已)·금(今)·당(當)이라고도 하며, 전제(前際)·중제(中際)·후제(後際)의 3제로도 표현하기도 한다. 삼세에 관한 논의는 일종의 시간론(時間論)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사상(思想)에서는 상당히 복잡하게 변천하고 있다. ① 원시불교시대에는 우리의 삶을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로 분석하여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확립하여 넓게는 자연계의 인과관계, 즉 시간적인 선후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논리적 또는 윤리적·종교적 가치를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후 부파불교(部派 佛敎:소승불교)시대에는 ..

위없는 가르침 2022.07.03

불구부정 (不垢不淨)

♡.불구부정 (不垢不淨)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3 가지가 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의 세계다. 이제 까지는 불생불멸에 대한 것을 많이 살펴보았다 오늘은 불구부정에 대하여 깊은 성찰과 높은 안목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불구부정(不垢不淨)-깨닫지 못한 세계 에서는 깨끗한 세계, 더러움의 세계가 있다. 목욕하고 세수하여 깨끗한 것도 말 하지만 그 보다 한 차원 높은 의미의 뜻 으로 하는 말이다 정(淨)-의 뜻은 깨끗한 것을 뛰어 넘어 신성하다는 것을 말 한다. 정.의 의미는 성스럽다는 것을 내포한다. 구(垢)-의 뜻은 성스럽지 못하다는 말이다. 더럽다 할 때 위생적인 것도 포함 되지만 더 철학적으로 깊이 살펴 볼 때의- 문제로서 부정하다는 뜻을 내포하는 것이다 부정 탄다 - 부정하다는 말이다 네팔에 가면 꾸..

위없는 가르침 2022.06.19

불교교리 -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교리 - 부처님의 가르침 제1장 불교의 핵심 교리 1. 연기법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는 연기법(緣起法)이다. 부처님은 인생과 우주의 진리를 깨치신 분이며, 그 진리의 내용 은 바로 ‘연기’이다. 부처님은 경에서 이 연기법을 아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라고 하셨다. 앞으로 설명할 5 온(五蘊), 12처(十二處) 등 일체법(一切法)의 분류, 삼법인(三法印)과 사성제(四聖諦)도 모두 연기법을 다양한 관 점에서 정리한 가르침이다. 불교 교리가 한없이 복잡한 듯하지만,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연기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지 않는다. 12연기(十二緣起)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연기법이 경전에 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 장의 마지 막 부분에서 다루기로 하고 우선 연기법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 알아보자. ..

위없는 가르침 2022.06.05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엇을 의미하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인도의 옛말인 범어의 아눗타라삼먁삼보디를 한문으로 번역했을 때 소리나는 대로 음사한 표기어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줄여 아뇩삼보리라고도 합니다. 범어를 뜻으로 풀어 번역한 경우에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 무상정변지(無上正知)라고 씁니다. 또 줄여서 흔히 정등각(正等覺)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아눗타라삼먁삼보디는 부처님이 되는 지혜의 깨달음으로, 더 이상의 수승한 경지가 없는 평등원만한 깨달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또한 이러한 위없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보살의 의지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라 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내용이며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평등원만한 지혜는 연기즉공 (緣起卽空)의 도리입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위없는 가르침 2022.05.22

무쟁삼매와 아란나행

[무쟁삼매와 아란나행] 각오-2012-01-27(금)09;10 출처 : 큰스님의 금강경 핵심강의p127 무쟁삼매(無爭三昧); 다툼이 없는 삼매, 즉 번뇌와의 다툼이 없음을 뜻한다. 산란하고 어지러운 마음이 없어 항상 망령된 생각을 떠나 있다. 분별, 갈등의 마음이 없으며 번뇌가 없는 무아의 상태를 말한다. 아란나(阿蘭那)행; 무쟁삼매에 들어가는 수행을 말한다. 아란나는 적정처(寂靜處), 무쟁처(無爭處)의 장소이다. 이런 조용한 곳에서 일체의 욕망과 번뇌를 버리는 수행을 아란나행이라 한다. 만일 얻음이 있으면 마음의 다툼이 있고 마음 속 다툼이 있으면 청정한 길이 못된다. 얻음이 없는 마음을 행하는 것이 다툼이 없는 행이다. [무쟁삼매와 아란나행] [무쟁삼매와 아란나행] 각오-2012-01-27(금)09;..

위없는 가르침 2022.05.22

불이중도

우리는 보통 여기에 '나'가 있고, 내 바깥에 외부의 독자적인 세계, 대상이 있다고 여깁니다. ​ 그래서 내가 세상을 인식한다고 여기지요. ​ 오늘 절에서 떡국을 먹었는데요, 어떤 사람은 이 떡국을 짜다고 느끼고, 다른 사람은 싱겁다고 느낍니다. ​ 그러면 그 싱겁다거나 짜다는 것은 떡국 속에 실체적으로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나에게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까요? ​ 나에게 그렇게 느껴질 뿐입니다. 내 바깥에 짜거나 싱거운 떡국이라는 실체가 있어서, 내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짜거나 싱겁다는 인식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서 나옵니다. ​ 다른 사람은 다르게 인식하기에 다른 사람에게는 나와는 다른 떡국이 있는 것입니다. ​ 한 여인을 봅니다. 한 사람은 너무 예쁘다고 하고, 다른 사람은 너무 밉다고 ..

위없는 가르침 2022.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