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169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7.동고문성 - 계율 청정해야 ‘깨달음의 집’ 지을 수 있어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7.동고문성 계율 청정해야 ‘깨달음의 집’ 지을 수 있어 감찰원장을 여러 차례 지내며 종단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던 동고문성(東皐汶星, 1897~1997)스님. 수행자의 위의를 잃지 않고 정진한 우리 시대의 스승인 문성스님은 은사인 대강백 서응스님과 만해스님의 영향을 받아 친일승려를 척결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문성스님의 삶을 제자 수진스님(부산 해인정사 주지.전 해인사 강주)의 증언을 통해 재구성했다. “계율 청정해야 ‘깨달음의 집’ 지을 수 있어” 만해스님 영향으로 ‘친일불교 척결’ 운동 휘문 축구선수로 활약 · 정화불사도 참여 ○…문성스님 생애에서 빼 놓을 수 없는 ‘대사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조선 전체를 경악시켰던 ‘친일승려 강대련의 명고축..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6.초월동조 - 이 몸이 부서져 없어져도 조선독립을 이루겠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6.초월동조 이 몸이 부서져 없어져도 조선독립을 이루겠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오직 ‘조선독립’의 열망을 실천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초월동조(初月東照, 1878~1944)스님. 평소 지인들에게 “내 이 몸이 부서져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독립이 되도록 결심했다”고 의중을 밝힌 초월스님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고초를 겪어야 했다. 스님은 독립운동 뿐 아니라 후학을 지도한 강사였으며, 삶과 수행이 일치한 선사였다. 부천대 김광식 교수의 논문 ‘백초월의 삶과 독립운동’ 등의 자료를 통해 초월스님의 삶을 조명했다. “이 몸이 부서져 없어져도 조선독립을 이루겠다” 만해·석전스님 등과 임제종 운동 전개 동학사 강원 등에서 후학 지도한 ‘강사’ ○…한일강제병합후 친일승려들이 ..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5.만해용운 - 조선엔 만해가 있으니 청년은 만해를 배워라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5.만해용운 조선엔 만해가 있으니 청년은 만해를 배워라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까지 격동의 세월을 살면서 민족의 미래를 제시했던 만해용운(卍海龍雲, 1879~1944)스님. 비록 난세에 머물렀지만 걸림 없이 살았던 대자유인이었다. 수행자이면서 독립운동가였고, 또한 명시(名詩)를 남긴 시인 만해스님의 삶을 비문과 각종 자료를 참고해 정리했다. “조선엔 만해가 있으니 청년은 만해를 배워라” 난세에 머물며 민족 미래 개척한 ‘선구자’ 수행자 - 독립운동가 - 시인으로 맹렬 활동 ○…설악산 오세암에 머물며 수행할 때이다. 몇몇 도반과 정진하는데, 입방 조건을 갖추지 못한 한 스님이 방부를 들이려고 했다. 정중히 거절했는데, 서운한 마음을 지닌 그 스님이 밤중에 찾아와 장검(長..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4 용악혜견 - 산과 바다 같은 원력으로 ‘깨달음의 성’ 넘는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4 용악혜견 산과 바다 같은 원력으로 ‘깨달음의 성’ 넘는다 조선 건국 당시 창건된 안변 석왕사에 머물며 팔만대장경 유포의 원력을 갖고 남방으로 주석처를 옮긴 용악혜견(龍岳慧堅, 1830~1908)스님. 용악스님은 10만 편을 암송하는 등 교학을 깊이 공부했으며, 지극정성으로 수심(修心)하여 깨달음의 향기를 널리 전했다. 용악스님의 삶을 순천 송광사에 있는 비문과 등을 참고해 정리했다. “산과 바다 같은 원력으로 ‘깨달음의 성’ 넘는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인경불사 원력 성취 ‘금강경’ 10만편 독송 등 수행정진 귀감 ○…용악스님의 신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간절한 기도와 간경은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특히 10만 편(遍)을 암송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지극정성으로..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3. 효동환경 - 동산아래 누웠으니 밝은 달은 빈뜰을 채운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3. 효동환경 동산아래 누웠으니 밝은 달은 빈뜰을 채운다 효동환경(曉東幻鏡, 1887~1983)스님은 철저한 수행과 정진으로 귀감이 됐다. 또한 스님은 음양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해인사 사명대사 비를 복원했다. 환경스님의 생애를 김연호 제천 진주동물병원장이 소장한 자료와 등을 참고하여 정리했다. “동산틔� 누웠으니 밝은 달은 빈뜰을 채운다” 만해스님 인연으로 ‘독립운동’ 적극 참여 가야산 입구 바위에 글 새기는 등 ‘명필’ ○…비록 13살의 어린 나이였지만, 당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살펴본 ‘소년 재상’은 입산을 결심했다. 고향집을 나와 해인사 백련암으로 가는 길에 한편의 시를 지었다. “大界深深妙一天(대계심심묘일천) 瓊月林風僧共眠..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2. 진하축원 - 조선불교의 혜명이 지금에 이르러 단절됐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2. 진하축원 조선불교의 혜명이 지금에 이르러 단절됐다 조선시대 숭유억불로 희미하게 이어진 불법(佛法)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냈다. 더구나 나라가 혼란에 빠진 조선후기 불교 상황은 처참했다. 쓰러진 불교를 일으키고 혜명을 잇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진하축원(震河竺源, 1861~1925)스님. 선교율(禪敎律)을 겸비한 스님은 높은 수행력과 뛰어난 교학을 근간으로 후학을 양성했으며, 제자들은 한국불교의 대들보가 되었다. 보은 법주사에 있는 비와 일제강점기 발행된 등의 자료를 참고해 진하스님의 생애� 살펴보았다. “조선불교의 혜명이 지금에 이르러 단절됐다” 만해 석전 진응 청호 석상스님 등 ‘지도’ 公私 구별 엄격…“자경자행하며 수행하라” ○…1924년 4월에 발행된 3호에..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1. 청담순호 - 자비심으로 생명을 아끼면 평화가 온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1. 청담순호 자비심으로 생명을 아끼면 평화가 온다 평생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한 청담순호(靑潭淳浩,1902~1971)스님. 늘 가사를 수하고 육환장을 들고 대중을 맞이한 청담스님은 ‘수행자의 표상’이었다.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던 스님의 모습을 와 비문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했다. “자비심으로 생명을 아끼면 평화가 온다” 신구학문.내외전.선교 두루 ‘섭렵’ 빈부귀천 없이 누구에게나 근기설법 ○…출가 전의 일이다. 삼동(三冬)의 추위가 살을 파고들던 어느 날 옷을 훌훌 벗은 채 진주 남강에 들어갔다. 얼굴만 내밀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여기고 “젊은 사람이 추운 날씨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있는가”라고 물었다. 답변은 이러했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0. 경봉정석 - 물처럼 우주 만물에 이익 주는 사람이 되라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0. 경봉정석 물처럼 우주 만물에 이익 주는 사람이 되라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조국해방,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관통하며 ‘중생들의 정신적 귀의처’ 였던 경봉정석(鏡峰靖錫, 1892~1982)스님. 수행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엄격했지만 한 없이 자애로운 모습으로 대중을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경봉문도회장 원산스님(전 교육원장)의 증언과 경봉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한 명정스님(통도사 극락암 선원장)이 펴낸 등의 자료를 참고해 경봉스님 수행일화를 정리했다. “물처럼 우주 만물에 이익 주는 사람이 되라” 근기설법으로 ‘중생의 갈길’ 열어 준 低� 통도사 극락암 선원서 납자와 불자 ‘제접’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해 교학 연찬에 집중하던 스님은 “하루 종일 남의 보..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9. 효봉학눌 - 그대들은 밥도둑이 아닌가… 어찌하여 방일한가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9. 효봉학눌 그대들은 밥도둑이 아닌가… 어찌하여 방일한가 판사라는 ‘화려한 직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한 효봉학눌(曉峰學訥, 1888~1966)스님. 스님은 생사문제 해결을 위해 오직 참선수행에 몰두하며, 후학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했다. 과 비문 등의 자료를 참고하여 효봉스님의 수행일화를 정리했다. “그대들은 밥도둑이 아닌가… 어찌하여 방일한가” 판사로 사형선고후 생사문제 ‘관심’ 촛농 모아 촛불 밝힐 정도로 ‘검소’ ○…“사람이 사람을 벌 할 수 있는가. 범부인 내가 어떻게 같은 사람을 벌할 수 있단 말인가.” 1923년 평양복심법원 판사로 근무하던 스님은 직책상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해야만 했다.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고뇌를 거듭한 결과 아무리 세속에서 출세가..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8. 석상신수 - 굶주린 이 먹을 것 주고 목마른 이 마실 것 준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8. 석상신수 굶주린 이 먹을 것 주고 목마른 이 마실 것 준다 세속을 떠난 곳 속리(俗離)에 ‘법이 머무는 도량(法住)’이 속리산 법주사이다. 신라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의신(義信)스님이 천축(天竺,인도)에서 경전을 구해 귀국한 후 창건한 고찰이다. 석상신수(石霜信首,1872~1947)스님은 10여년간 법주사 주지를 역임하며 도제양성과 중생구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의 생애와 수행일화를 비문 등을 참고하여 구성했다. “굶주린 이 먹을 것 주고 목마른 이 마실 것 준다” ‘탈속한 천진보살’로 대중의 존경 받아 조국해방 원력으로 미륵대불 조성 추진 ○…법주사 경내에 있는 석상스님 비문에는 한글로 스님의 모습을 기록해 놓았다. 제자 호경(湖鏡)스님이 194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