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들 이야기 169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8. 한암중원 - 경허스님 법맥 이은 ‘한국불교 나침반’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8. 한암중원 경허스님 법맥 이은 ‘한국불교 나침반’ 맑고 깨끗한 계행과 넓고 깊은 학문 그리고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정진으로 수행 승가의 참 모습을 보여 준 한암중원(漢巖重遠, 1876~1951)스님. 한암문도회(회장 현해스님)와 오대산 월정사(주지 정념스님)는 어른스님의 선양사업을 꾸준히 전개하고 있다. 한국불교의 방향을 제시한 한암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유효한 출가사문의 나침반이다. 내장사 조실 동성스님과 조계종 원로의원 현해스님의 증언과 을 통해 한암스님의 수행을 살펴보았다. 선교능통 / 한학조예 경허스님 법맥 이은 ‘한국불교 나침반’ ○…스님은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할 다섯 가지 덕목으로 참선, 염불, 간경, 예식, 가람수호 등 승가오칙(僧伽五則)을 제시했다. 어느 ..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7. 석두보택 - 번뇌 망상 끊어지면 생사도 끊어지는 것이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7. 석두보택 번뇌 망상 끊어지면 생사도 끊어지는 것이다 올해 탄신 120주년을 맞이하는 효봉(曉峰,1888~1966)스님은 일제 강점기 판사직을 던지고 도인(道人)을 찾아 나섰다가 금강산 법기암에 스승을 만난다. “호랑이 눈에는 호랑이만 보인다”고 했다. 시대를 풍미하며 수행의 기준을 몸소 보이며 불법을 널리 편 효봉스님이 가능했던 것은 은사 석두보택(石頭寶澤, 1882~1954)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석두스님 제자인 석정(石鼎)스님의 생생한 증언으로 선지식의 삶을 복원했다. “번뇌 망상 끊어지면 생사도 끊어지는 것이다” 효봉.향봉.석정 스님 등 ‘한국불교 동량’ 길러 참선 수행과 검소한 생활로 후학들에게 귀감 돼 “화상은 어디서 나오셨습니까?” ○…1909..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6. 성암석구 -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물처럼 살아라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⑥ 성암석구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물처럼 살아라 동안거 해제이다. 겨울이 물러가고 봄이 오고 있다. 어김없이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가는 무상(無常)의 도리를 확인하는 시기이다. 분초를 쪼개 치열하게 수행하며 후학을 인되杉� 한 스님이 있었다. 높은 학식에 자만하지 않고 참선과 자비행을 실천한 성암석구(性庵錫九, 1889~1950) 스님의 삶을 원로의원 성수(性壽)스님의 증언을 통해 복원했다. “만년이 가도 변하지 않는 물처럼 살아라” ‘일일부작 일일불식’ 백장청규 지켜 참선 정진 자비실천으로 후학 인도 “거지야 따라 오너라” ○… 풍요로운 농사를 위해 만든 저수지가 3년 만에 터지는 참담한 일을 겪은 뒤 집을 나왔다. “내가 그릇이 작아 주민에게 피해를 끼쳤으니, 더 ..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5. 석우보화 - 수심결 첫 대목 읽고 출가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⑤ 석우보화 “진정한 도는 부처님 문중에 있구나” 고결한 성품과 자상한 언어로 대중을 인도했던 석우보화(石友普化, 1875~1958)스님.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스님은 비록 불혹(不惑)이 가까운 나이에 출가했지만 수행 정진은 그 누구보다 치열했다. 수행자의 본분사(本分事)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던 석우스님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올해 입적 50주기를 맞이한 스님의 수행을 되돌아 보았다. “진정한 도는 부처님 문중에 있구나” 조계종 출범 당시 종정으로 추대 동화사 금당선원 개설해 수좌 ‘지도’ 수심결 첫 대목 읽고 출가 ○…동래 범어사에 머물던 스님은 고려 말 보조국사가 지은 ‘수심결(修心訣)’ 첫 대목을 읽고 출가를 결심했다. “삼계를 윤회하는 고통은 마..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 만공월면 - 덕숭산 머물며 선풍 올곧이 세운 ‘대 자유인’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4. 만공월면 덕숭산 머물며 선풍 올곧이 세운 ‘대 자유인’ 불교에서 달은 깨달음을 상징한다. 에는 “달을 보라고 하니 손가락을 본다”는 구절이 나온다. 부처님 가르침은 깨달음에도 얽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강을 건너면 뗏목이 필요 없듯 정각을 성취한 수행자는 자유로워야 한다. 전월사(轉月舍). ‘달을 굴리는 집’이란 뜻이다. 경허스님 법맥(法脈)을 계승한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스님이 만년(晩年)에 머물던 곳으로, 선지식의 경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불교 선풍(禪風)을 일으키고, 자유자재하게 살았던 만공스님 처럼 눈이 내려앉은 덕숭산을 찾았다. 덕숭산 머물며 선풍 올곧이 세운 ‘대 자유인’ 경허 법맥 이어‘진리의 길’로 납자 인도 조선 독립 염원하며 일본 ..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 만암종헌 - 도제양성.총림 개설로 한국불교 위상 제고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목차 바로가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3. 만암종헌 도제양성.총림 개설로 한국불교 위상 제고 조선 팔경의 하나로 으뜸 경치를 뽐내는 장성 백암산 백양사. 사계절 언제나 아름다운 도량이다. 백양사가 지금의 사격(寺格)을 갖춘 것은 만암종헌(曼庵宗憲, 1875~1957)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부분 전각이 만암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불사한 건물이다. 또한 광성의숙과 심상학교, 정광중고등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왜색불교에 맞서 조선불교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조선불교 교정과 대한불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하는 등 불교중흥의 원력을 실천했다. 한없는 자비심으로 대중을 인도한 만암스님의 삶을 지난 16일 영광 불갑사에서 전법제자 수산스님(고불총림 방장)에게 ..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 용성진종 - 모든 것이 무상하고 만법이 다 고요하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목차 바로가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 용성진종 모든 것이 무상하고 만법이 다 고요하다 지난 11일 서울에 첫 서설(瑞雪)이 내린 날 종로 대각사를 찾았다. 서울을 하얗게 덮은 흰 눈을 맞으며 들어선 대각사는 용성진종스님(龍城震鐘, 1864~1940)이 창건한 도량으로, 스님의 향기와 온기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조선 말기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관통하며 독립운동과 부처님 가르침을 펼치기 위해 정진했던 스님의 일생은 우리 민족과 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치열하게 정진했던 스님의 발자국은 눈밭 위에 고스란히 흔적을 남겨 지금도 후학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모든 것이 무상하고 만법이 다 고요하다” 평생 독립운동과 佛法 선양으로 ‘조국의 미래’ 준비 헌신 3.1운..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 경허성우 -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목차 바로가기☜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 경허성우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세상의 인간사야 모두 다 모두 다 부질없는 것, 덧없이 왔다가 떠나는 인생은 구름 같은 것…”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던 가수 방실이의 노래 ‘서울탱고’ 가운데 일부다. 투병 중인 그녀는 지난 연말 한 공중파 방송에 출연해 동료들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보였다. 동료와 시청자들도 눈물을 훔쳤다. 누구도 부럽지 않은 명예와 재산을 가졌던 그녀의 쓸쓸한 모습은 한번 뿐인 인생에 집착하며 다투는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삼천 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동학사.천장암 정진후 호서 영호남 돌며 선풍 다시 일으켜 혜월.수월.만공.한암 스님 등 법맥 계승 한국..

만해선사

1879(고종 16)~1944. 승려ㆍ 시인ㆍ 독립운동가. 본관은 청주(淸州).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萬海, 卍海).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응준(應俊)이다. 유년 시대에 관해서는 본인의 술회도 없고 측근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년 시대는 대원군의 집정과 외세의 침략 등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시기였다. 그 불행한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여건은 결국 그를 독립운동가로 성장시킨 간접적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세 때 임오군란(1882)이 일어났으며, 6세 때부터 향리 서당에서 10년 동안 한학(漢學)을 익혔다. 14세에 고향에서 성혼의 예식을 올렸다. 1894년 16세 되던 해 동학란(東學亂)과 갑오경장이 일어났다. 나는 왜 중이 되었..

명랑대사

다음 해에 당의 고종이 인문을 불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가 우리의 병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였는데 우리를 해하니 무슨 이유이냐?" 하고 감옥에 가둔 다음, 군사 50만을 훈련시키고 설방을 장수로 하여 신라를 치게 하였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 조에 당 고종은 이근행을 안동진무대사에 임명하여 신라를 경략케 하였으며, 또한 설인귀가 천성을 공격하다가 패주한 사실이 보인다.). 이 때 의상법사가 유학을 하러 당에 들어왔다가 인문을 찾아 나아가 보니 인문이 그 사실을 말하였다. 의상이 곧 돌아와서 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왕은 매우 두려워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 대책을 강구할 때 각간 김천존이 아뢰기를, "근자에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어가서 비법을 전수하고 돌아왔으니 청하여 물어보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