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ㅊ ― 8>*초기불교의 깨달음과 대승불교의 깨달음의 차이

수선님 2024. 4. 7. 13:15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ㅊ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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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의 깨달음과 대승불교의 깨달음의 차이---미국의 저명한 불교학자인 UCLA 로버트 버스웰(Robert E. Buswell, 1953~ ) 교수는 어떤 선사의 법문보다도 매우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한다.

“절대적인 진여의 관점에서 볼 때, 마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항상 깨달은 상태이다. 이를 ‘본각(本覺, original enlightment)’이라 한다. 그러나 통상적인 현실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수행을 통해 변화시켜야 하는 무지한 중생들이다.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실현되고 얻어져야 하는 것으로 본다. 이를 성취된 깨달음, 속세의 깨달음, 조건 지어진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이를 얻어진 깨달음, 즉 ‘시각(始覺, acquired enlightment)’이라 한다.”

이와 같이 버스웰 교수는 본각과 시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에 있는 내용이다. 설명에서 우리는 이미 깨달은 존재라 했다. 그래서 모두 부처라 한다. 단지 자신이 깨닫지 못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깨달음의 과정이라 한다. 그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자신이 이미 깨달은 존재임을 믿는 것이라 한다. 그래서 선불교에서는 간화선의 3요체 중의 하나인 대신심(大信心)을 요구한다.

그런데 정견(正見)에 대해서, 선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이 있고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정견이 있는데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선불교에서는 본래불(本來佛)을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하고, 초기불교에서는 사성제(四聖諦)를 아는 것이 정견이라 한다. 이런 차이는 두 갈래 길을 연상하게 한다.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정견이 다르면 깨달음도 달라진다. 길이 다르니 목적지가 다른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에 대해 버스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원효 대사는 물, 바람, 파도라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깨닫지 못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불각(不覺)에서 완전한 깨달음의 단계인 구경각(究竟覺)까지 이루었다 할지라도 결국 깨달음은 우리가 새롭게 창조해낸 것이 아니라 늘 거기에 있었던 것을 재발견한 것뿐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즉, 깨달음의 실현은 우리가 본생적으로 깨달은 존재라는 진리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본 것이다. 버스웰 교수에 따르면 대승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자신이 본래 부처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라 한다.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이다. 그래서 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재발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본래적으로 깨달은 존재임을 확인만 하면 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단계가 <대승기신론>에 설명돼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승기신론>에서 깨달음의 단계―

1. 본각(本覺,original enlightment) - 마음은 본질적으로 이미 항상 깨달은 상태 - 모든 존재는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이를 인식하기만 하면 됨.

2. 시각(始覺, acquired enlightment) - 속세의 깨달음, 얻어진 깨달음 - 중생의 입장에서 볼 때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 성취돼야 함을 의미함.

3. 불각(不覺, nonenlightment) - 지금 여기 이 순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 - 불각의 상태를 자각해야만 함.

4. 상사각(相似覺, pseudo-enlightment) - 허위, 가짜의 깨달음 - 도덕, 윤리를 수행의 출발점으로 하는데 - 원효는 이를 소승불교의 깨달음이라 함.

5. 수분각(隨分覺, approximate enlightment) - 대략 깨달은 단계 - 깨달음이 이미 내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단계 - 여전히 이분법적 아상에 집착하고 있는 단계임.

6. 구경각(究竟覺, final enlightment) - 마지막 깨달음, 궁극적 깨달음 - 이분법적 분별이 사라진 단계.

위에서 본각이 있음은 우리가 본질적으로 깨달은 존재임을 말한다. 그리하여 대승불교에서는 가장 먼저 우리가 본래 깨달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신심을 먼저 내라고 한다. 이렇게 본래 부처임을 굳게 믿었을 때 초발심한 것으로 본다.

이렇게 초발심 했을 때 대승불교에서는 이미 깨달은 것으로 본다.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인만 하는 과정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 기간이 한 달이 될 수도 있고, 1년이 될 수도 있다. 또 10년, 20년, 30년이 될 수도 있다. 아니 평생 걸릴 수 있고, (많은 사람이) 이 생에서 확인하지 못할 수도 있다. 스님들이 선방에서 10년, 20년, 30년 심지어 평생 화두참구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성계>에 따르면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 했다. 이 말은 ‘처음 깨달음의 마음을 내는 그 순간에 이미 깨달음이 성취돼있다’는 뜻이다. 다만 과정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초전법륜경(S56;11)>이라 하겠다. 이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두 번 깨달음이 있게 된다.

하나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꼰단냐 존자가 법안(法眼)이 생겨났을 때의 깨달음이다. 그때 꼰단냐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S56:11).”

경에 따르면 꼰단냐에게서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라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생겨났다’라는 말이다. 이는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난 것을 말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 내재돼 있다’거나 ‘우리는 본래불’이라는 것과 다른 말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진리의 눈이 생겨난 것이다. 발생된 것이다. 없던 것에서 새롭게 생겨난 것이다. 이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난다.

그런 법안은 다름 아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진리이다. 일견 매우 단순해 보일지 몰라도 이 한 구절로 인해 꼰단냐 존자는 사성제(四聖諦)를 모두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사성제를 이해했기 때문에 성자의 흐름에 든 것이다. 수다원이 된 것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정견(正見)은 사성제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 된다. 그래서 본격적인 수행이 시작된다. 남아 있는 번뇌를 소멸하기 위한 수행이다. 그 과정이 사다함과 아나함의 단계이다. 마침내 번뇌가 소멸됐을 때 깨달음이 완성된다. 이때 다음과 같은 ‘아라한 선언’을 하게 된다.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S56:11).”

부처님은 아라한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면 누구나 아라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라한이 됐을 때 번뇌가 소멸되고 청정하게 된 것을 자신이 알게 된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이 없고 윤회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성제의 가르침은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의 단계, 즉 깨달음의 이해에서부터 완성까지의 과정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수다원에게 남아 있는 ‘감각적 욕망’ 등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사다함과 아나함의 과정을 거치면서 소멸되고, 아라한이 됐을 때 ‘색계에 대한 집착’ 등 오상분결(五上分結)이 모두 소멸된다. 그래서 완전한 열반에 들면 더 이상 윤회하지 않게 된다.

선불교와 초기불교는 정견(正見)이 다름으로 인해 목적지도 달라짐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의 정견은 우리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초발심시변정각이라 해서 믿기만 하면 깨달음은 이미 성취된 것과 같다고 한다. 다만 내가 부처임을 확인하는 과정만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번뇌의 소멸과 같은 구체적인 말은 보이지 않는다. 또 나 자신이 부처임을 확인했을 때 이분법적 분별이 사라진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하나가 됨을 말한다. 그래서 본래불(本來佛)과 내가 다름없음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는 다시 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번뇌를 남김없이 소멸해 마음의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청정범행을 닦아 해탈과 열반을 실현했을 때 깨달음이 완성되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정견이 다르면 깨달음의 내용도 다른 것이다. 그런데 초기불교의 정견과 깨달음이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철저하게 부정됐다는 사실이다. 특히 <반야심경>에서 그렇다. - 진흙속의 연꽃 ---→반야심경 참조.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과 불교---물질은 끝없이 쪼개도 계속 쪼개기는 연속적인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쪼개지지 않은 가장 작은 알갱이가 있는지는 수 없는 논쟁을 일으켜 왔다. 전자를 연속설(連續說) 후자를 입자설(粒子說)이라 하는데, 17C 들어오면서 입자설은 과학의 중심부에 자리 잡으면서 20C 중반까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입자 물리학이 지금까지 밝힌 물질을 이루는 최소의 알갱이는 소립자(素粒子-쿼크/Quark)였다.

그러나 초(超)끈이론에서는 그 소립자가 더 미시(微視-플랑크길이:10-33cm)의 끈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끈의 진동으로부터 소립자가 탄생하고 더 나아가 우주의 모든 물질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하고 있다. 초끈이론은 우리의 우주를 끈이라는 오케스트라의 향연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존의 입자물리학을 대신해 물리학의 중심부에 자리 잡게 됐다.

초끈이론에 나타나는 10차원의 시공간이나 다중우주론[多重宇宙論(Multiful Univers)]등의 독특한 세계관은 기존의 우주론(Big bang theory)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인데, 놀랍게도 불교 경전인 <화엄경(華嚴經)>에 나타나는 세계관과는 일맥상통하고 있다. 초끈이론이 난해한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화엄사상 역시 고도의 논리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점 때문에 화엄사상은 일반 대중에게는 멀게만 느껴졌는데, 이 벽을 허문 이가 신라의 의상(義湘) 대사였다.

의상 대사는 680년 칠언 삼십구(210자)의 <법성게(法性偈)>를 완성했는데, 이 반시(槃詩) 한편에 화엄사상의 전체 요지가 압축돼있다. 이 <법성게>를 읽어 가면 구절구절마다 초끈이론이 밝혀낸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는데, 마치 <법성게>가 초끈이론의 압축 파일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초르텐(Chortens)---티베트 혹은 부탄 불교에서 부처님을 상징하고 기리는 탑(사리탑)은 스투파(stupas)라 하고, 고승의 기념탑은 초르텐(Chortens)라고 한다. 초르텐은 우리나라에선 부도답(浮屠塔)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부탄의 해발고도 3,140m에 위치한 도출라 고개(Dochu-ra Pass)에는 108개의 초르텐(Chorten)으로 이루어진 ‘드룩 왕갈 초르텐(Druk Wangyal Chortens)’이 늘 안개 속에 신비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사자를 기리는 초르텐이라고 한다.

*초명(鷦螟)---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鳥]라고 하는 상상의 새. <장자(莊子)>에서 언급하고 있는 새로서, 초명(焦螟)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새를 장자가 언급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열자(列子)의 저서인 <열자(列子)> 제5편 〈탕문(湯問)〉에서 언급돼 있다.

*초발심보살(初發心菩薩)---→‘보살(菩薩)의 구분’ 참조.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법성게>에 나오는 말이다. ‘초발심을 했을 때가 문득 정각이다’라는 말로서, 깨달음을 이루려는 맨 처음의 결심이 깨달음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혹은 처음 발심 한 그것이 변치 않고 그대로 있으면 곧 부처의 경지라는 말이다. 누구나 처음 시작할 때 가진 마음이 순수하고, 지극하며, 애틋해서 이때의 마음가짐을 오래 지속하면 그것이 믿음의 핵심이고, 성불하는 길이라는 말이다. 일반사회에서 ‘초심으로 돌아가서’라는 말을 곧잘 하는데, 이와 비슷한 말이다.

변정각(便正覺)에서 변(便)자는 ‘같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각(正覺)은 바르게 깨닫는다는 말이다. 깨달으면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만, 깨달음에도 차이가 있다. 깨달을 오(悟)의 경우, 오도(悟道)라고 하는 것은 성품을 깨닫는다는 뜻이며, 정각(正覺)은 바르게 배우고 깨닫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초발심시변정각이라 함은 처음 발심을 하게 되면 그 서원이 부처의 마음과 일치가 됨에 부처의 깨달은 마음과 같다는 것이며, 그 같은 마음이 육바라밀과 십바라밀을 통해 공덕을 원만성취해 정각을 이루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정각의 경지에 드는 것을 등각(等覺) 혹은 묘각(妙覺)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초발심자경문>은 불교 입문서로서 세 가지 글로 이루어져 있다. 즉, 고려시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계초심학인문>, 신라 원효(元曉) 대사의 <발심수행장>, 그리고 고려 후기 야운(野雲) 스님의 <야운자경서>, 이렇게 세 가지를 엮어 <초발심자경문>이라 했다.

조선 초기 태조 6년(1397년)에 태조의 뜻에 따라 흥천사(興天寺) 상총(常聰) 선사가 이 세 가지 글을 한 권으로 엮어 <초발심자경문>이라 해서 모든 사찰의 청규법(淸規法)으로 정해 시행했다고 한다. 그 이래로 오늘날까지 무려 600년 넘게 승려교육의 기본 교과서로 이용돼왔다.

•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은 불교에 처음 입문한 초심학인이 알아야 할 범절과 수행에 관한 내용이고, 크게 계초심학인(誡初心學人)과 계수행대중(誡修行大衆)의 내용으로 요약된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知訥) 스님이 조계산에서 수선사(修禪社)를 세우고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을 때, 처음 불문에 들어온 사람과 수선사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본문 907자로 구성된 한국판 백장청규(百丈淸規)라 하겠다. 수선사는 송광사(松廣寺) 이전의 옛 이름으로 불사 전에는 작은 암자에 불과했다.

•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은 원효(元曉) 대사가 출가 수행자를 위해 지은 발심(發心)에 관한 글이다. 체계는, 수행인이 부처 될 마음을 일으켜 거룩한 행을 닦는 요긴한 말을 총 706자의 사언절구(四言絶句)로 적은 짧은 글이다. 내용은, 애욕을 끊고 고행(苦行)을 할 것, 참된 수행자가 될 것, 늙은 몸은 닦을 수 없으니 부지런히 닦을 것 등이 서론, 본론, 유통분(流通分)의 순으로 구성돼있다. 즉, 수행의 중요성과 수행의 방법 등에 관한 내용이 기술돼 있으며, 사욕고행(捨欲苦行-탐욕을 버리고 고행함)과 사문출가(沙門出家)와 일생근수(一生勤修)의 내용으로 요약된다.

• <야운자경문(野雲自警文)>은 수행하는 출가 대중이 알고 지켜야 할 법규에 대해 쓴 것이다. 자경서(自警序)와 자경십문(自警十門)과 보위중생(普爲衆生-널리 중생을 위함)의 내용으로 요약된다.

자경(自警)이란 신삼(身三), 구사(口四), 의삼(意三)을 잘 단속해서 경계하라는 말이다. 즉, 몸으로는 살생, 도둑질, 간음 세 가지를, 입으로는 거짓말, 독설, 이간질, 모략중상 등 네 가지를, 뜻으로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등 세 가지를 저지른 자신을 참회하고, 깨닫는 그날까지 잘못된 모든 행위를 돌이켜 자비한 마음으로 뭇 생명을 사랑하고 베풀어주며, 깨끗한 행을 닦고 마음을 살펴 몸과 입과 뜻을 항상 경계하라는 것이다.

*초선천(初禪天)---색계(色界) 사선천(四禪天)의 첫째 하늘. 여기에 범중천(梵衆天) ․ 범보천(梵輔天) ․ 대범천(大梵天)이 있다.---→색계(色界), 삼계(三界) 참조.

*초심(初心)---처음에 결심한 마음, 처음에 가졌던 마음, 처음에 다짐하는 마음, 처음으로 깨달음을 구하려고 한 마음, 처음으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려고 한 마음을 말한다. 그러한 초심이란 본래의 참마음, 동심 혹은 첫사랑의 마음, 겸손한 마음, 순수한 마음, 배우려고 하는 마음이라 하겠는데, 처음으로 돌아가서 살피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니 초심은 처음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즉 본심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발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초발심이 곧 깨달음이라 해서 <법성게>에서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이라 했고,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이라 해서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전 나의 참모습(본래면목)은 무엇인가 하는 말 등으로 초심(初心)을 말한다. 이러한 초심을 강조하는 글이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다.---→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便正覺) 참조.

*초월지(超越智, 빠알리어 abhiññā)---빠알리어 아빈냐(abhiññā)는 abhi(넘어서, 대해서)+√jñā(알다)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넘어서 안다’는 문자적인 뜻에서 보통의 여섯 감각기능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뛰어넘어 안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범속한 앎을 넘어선 지혜란 뜻의 초범지(超凡智)라고도 번역했다. 보통 경에서는 높은 지혜로, <청정도론>과 아비담마에서는 초월지(超越智)의 의미로 쓰인다. 그리고 신통지(神通智)의 의미로 쓰일 때는 오신통(五神通)을 지칭한다.

*초의(草衣, 1786~1866)---전남 나주 출신인 스님의 속성은 장(張)씨로, 법명은 의순(意恂)이고, 자(字)는 중부(中孚)이며, 법호는 초의(草衣) 또는 일지암(一枝庵)이다. 스님은 삼장(三藏)에 통달했고, 선교(禪敎)의 학문뿐 아니라 유학과 도교 등 제반 학문과 다도에까지 조예가 깊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 홍석주(洪奭周) 등 당대의 대학자들과 폭넓은 교유를 가졌던 것만 봐도 그의 덕망과 학문의 깊이를 이해할만 하다. 그의 선사상은 <사변만어(四辯漫語)>에, 다도는 <동다송(東茶頌>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스님은 조사선 여래선의 입각처를 선(禪)과 교(敎)에 두고 있다. 깨달으면[悟心忘言] 교가 선이 되고 미혹하면[滯言迷心] 선이 교가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義理禪)과의 관계를 선과 교와의 관계로 보고 그 입각처를 밝힘으로써 근본적 일치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추사 김정희와의 개인적인 교유와 친분은 문화사적으로도 많은 일화와 작품으로 승화돼 오늘에까지 훈훈한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초전법륜(初轉法輪, Dhamma-cakka-pavattana)---초전법륜이란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후 행한 최초의 설법을 말한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어서 남방 빠알리어 삼장 <상윳따니까야>와 북전 아함의 <잡아함경 제379경 - 전법륜경>에 전한다.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직후에, 자신이 깨달은 진리는 매우 심오하고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욕망과 쾌락에 젖어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그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피로하고 성가시고, 가르침의 성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범천왕(梵天王) 사함파티(Sahampati)가 멀리서 이런 붓다의 의중을 살피고 와서는 이렇게 아뢴다.

“세존이시여, 바라옵건대 법을 설해 주소서. 중생들 중에는 덜 더럽혀진 자도 있기에 만약 법을 듣지 못한다면 타락하고 말 것입니다. 만약 법을 얻어 듣는다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범천이 법을 설해주실 것을 세 번 요청했다. 이를 일러 범천 권청(梵天勸請)이라 한다.

이러한 범천의 권유에 마음이 흔들린 붓다는 생각했다.

마치 연못 속의 청련, 홍련, 백련 등이 물속에서 자라나 때로는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물속에 잠겨 있거나, 때로는 물 위로 솟아나 더러움을 떨치고 꽃을 피우기도 하듯이, 이 세상에는 어리석은 사람도 있고 선한 사람도 있으며,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이 있는 반면에 가르치기 쉬운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드디어 붓다는 진리를 널리 펴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의 문을 열겠다.’면서 깨달음의 사자후를 토하게 된다. 즉, 붓다께서 6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은 다음, 7일 동안 마음의 정리를 끝내고 이제 포교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것이 범천이 붓다께 진리를 펴기를 권해 붓다가 진리를 펴게 됐다는 범천(梵天)이 권청(勸請)한 설화이다.

붓다가 스스로 어렵사리 깨달은 진리를 욕망의 때에 젖어 있는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어도 쉽게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붓다의 진리가 세속적인 욕망의 세계와는 대극점(對極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범천 권청’에 의해 설법을 하기로 결심한 붓다가 세상 사람들에게 진리를 베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리하여 길에서 맨 먼저 아지비카(Ajivaka, 사명외도) 교도인 우파카(Upaka, 優陀)와 마주쳤다. 우파카는 극도의 고행을 행하는 아지비카 교도인데, 환하게 빛나는 부처님의 얼굴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존자여 당신의 얼굴은 참으로 광명에 넘쳐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따라 출가했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셔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그 때 붓다는 우파카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파카여 나는 일체에 뛰어나고 일체를 아나니 무엇에도 더렵혀짐이 없도다. 모든 것 다 버리고 해탈했도다. 스스로 깨침을 얻었거니와 누구를 가리켜 스승이라 하랴. 나에게는 스승이 없고, 이 세상에 같은 자가 없으며, 비할 자도 없도다. 나는 곧 성자요, 최고의 스승이며, 나 홀로 깨침을 이루어 고요롭다. 이제 법을 설하러 카시 마을(베나레스)로 가거니와 어둠의 세상에 감로의 북을 울리리라. 벗이여 나는 번뇌가 없나니, 나 같은 승자 세상에 없도다. 나는 사악한 세력에 승리했으니 우파카여 나는 승자이니라.”

즉, 나는 스승이 없으며, 나와 동등한 이도 찾을 수 없고, 신들의 세상에도 나와 같은 이는 없다. 내가 가장 존귀하고 내가 가장 뛰어난 스승이며, 홀로 완전히 깨달았고, 평정한 니르바나를 얻었다. 나는 지금 법륜을 굴리고자 카시 마을로 간다. 무지한 세상에 불사의 북을 치리라고 했다.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세상에 펼치기 시작한 붓다, 그의 음성은 무지를 깨뜨리는 불사의 북소리였다.

그런데 누구에게 포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닥쳤다. 붓다는 깨달은 진리가 너무 어려워 지혜를 가진 자(智者)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믿고 고행시절 한때 스승으로 모셨던 알라라 깔라마(Alarakalama)와 우드라까 라마뿌뜨라(Udraka Ramaputra)에게 제일 먼저 설법하고자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는 사실을 알고 결국 녹야원의 다섯 비구를 찾아가게 된 것이다.

즉, 옛날의 도반이었던 다섯 수행자들에게 먼저 가르침을 줄 것을 결심하고 부다가야에서 바라나시(Varanasi, 현재의 베나레스) 근처 이시빠따나(Isipatana, 仙人住處)에 있는 녹야원(鹿野苑, 미가다야/Migadaya, 현재 지명은 Sarnath)까지 1백 60km의 길을 걸어서 그들을 찾아갔다. 붓다는 제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먼저 먼 길을 걸어서 그들을 찾아 나선 것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원시림 속을 누비며 홀로 걸식을 하면서 맨발로 긴 여행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 상대가 “가르쳐 주십시오”하고 청한 것도 아니고, 스승이 먼저 제자를 찾아가서 “너희들은 배워라”고 한 사례는 인류역사상 그 유례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자기가 조금만 잘나도 권위의식으로 상대를 무시하기 일쑤인데, 인류 역사상 최고의 스승이 제자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맨발로 먼 길을 걸어가서 제자를 가르치러 갔다는 사실에는, 바로 붓다에게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붓다가 녹야원에서 수행 중이던 다섯 비구들을 먼저 찾은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불교의 본래목적으로서 ‘중생구제’를 위한 첫 걸음과는 거리가 멀다고 볼 수 있다. 그보다는 자신이 발견한 진리(연기법)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이해와 공명(共鳴)을 얻고, 또한 자신이 깨달은 내용이 모든 사람에게 소통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행보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 같은 역사적 접근은, 곧 불교는 붓다가 진리를 깨친 것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녹야원을 찾아 5명의 옛 도반들에게 첫 설법을 함으로써 이들이 붓다의 진리를 모두 이해하게 되면서 비롯됐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다섯 비구에 대한 교화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야사(Yasa) 등 54명의 청년이 그의 가르침을 받아 깨달음을 얻고 출가하게 되면서 비로소 붓다는 자신이 깨달은 진리(법)에 대한 확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교화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로부터 붓다의 대중교화행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른바 “만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전도를 떠나라”는 전도선언(傳道宣言)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붓다가 태어난 룸비니가 ‘육신의 탄생지’라고 한다면, 깨달음을 성취한 보드가야를 ‘진리(법)의 탄생지’라 하겠고, 녹야원은 비로소 ‘불교가 시작된 곳’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해서, 붓다가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예전에 함께 수행했던 다섯 도반들을 만나 최초로 설법을 했음을 최초로 법의 바퀴[법륜(法輪)]를 굴렸다고 해서 초전법륜이라 한다.

법륜은 본래 고대 인도에서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소유한 수레바퀴 모양의 무기인 ‘윤보(輪寶)’에 비유해 이름 한 것이다. 세간을 통치하는 전륜성왕이 윤보를 굴려 산과 바위를 부수고 천하를 통일하는 것처럼 진리의 왕인 붓다가 설법을 통해 삼계(三界)를 구제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설법행위를 법의 바퀴, 즉 법륜을 굴린다(轉法輪)고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붓다가 녹야원의 다섯 비구를 찾은 일, 그리고 그가 설한 연기법을 다섯 비구가 이해할 수 있었던 사실은 불교역사상 가장 큰 사건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붓다의 만 중생을 향한 설법교화는 이로부터 시작됐고, 붓다의 그러한 행보를 우리는 전법륜(轉法輪)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섯 도반은 차례로 최초의 다섯 비구가 됐다. 즉, 아래 다섯이다.

①꼰단냐(Kondanna:倧蓮如) - 카운딘야(Kauṇḍīnya), 콘다냐, 교진여(橋陣如), 아야교진여(阿若橋陳如)라고도 한다.

②와빠(Vappa:婆頗) - 바슈파(Bāṣpa), 바파(婆頗, Vappa), 바수라, 뱌시파, 다사발라 카샤파(Dasabala Kasyapa, 십력가섭/十力迦葉)이라고도 한다.

③밧디야(Bhaddhiya:婆提) - 바드리카(Bhadrika, 발제(跋提), 바제(婆提)라고도 한다.

④마하나마(Mahanama:摩訶男) - 마하나만(Mahānāman) -마하마남, 마하남이라고도 한다. 석가족으로 부처님의 사촌동생이다. 구리태자(俱利太子)라고도 한다.

⑤아싸지(Assaji:阿說示) - 아슈와지트(Aśvajit), 아슈바짓(Asvajit), 알비(頞鞞), 아설시, 마승(馬勝)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다섯 명이다.

“초전법륜의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경전이 이를 갖가지로 전하고 있으며, 또 후대의 경전은 사성제(四聖諦), 팔정도(八正道), 중도(中道), 무아설(無我說), 12인연(十二因緣) 등 체계화된 불교 교리의 모든 것이 여기서 설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교적 오래됐다고 생각되는 전승을 보면 쾌락과 고행 두 가지 극단을 떠난 중도를 설하고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팔정도(八正道)의 가르침과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이 초전법륜의 골자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성 스님

초기경전 중 율장 <마하박가(Maha-vagga)> 제1장에는 붓다가 최초로 설법을 할 당시 상황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한 다섯 비구는 매우 기뻐했다. 무아(無我)의 법문을 들은 다섯 비구는 집착이 사라져 모든 번뇌에서 해탈했다. 그때 이 세상에 아라한은 (붓다를 포함해)여섯이 됐다.” 그리하여 불교라는 종교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났음을 말하고 있다.

즉, 붓다가 법륜을 처음으로 굴려, “(자신을 포함해서) 이 세상에 6명의 아라한이 있다!”고 선언한 것이다.

붓다 생애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초전법륜(初轉法輪)을 꼽는 것은 이 설법으로 불교역사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6명의 훌륭한 아라한으로 승가는 첫 발을 내딛었고, 이후 진리는 온 세상을 비추며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으로 퍼져나갔다.

물론 초전법륜이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미가다야(Migadaya)에 이른 붓다를 옛 친구들은 결코 반기는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붓다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보라, 저기 오는 것은 사문 고타마이다. 그는 사치에 빠져 고행을 포기했다. 그가 와도 일어서서 맞아 주지는 않으리라. 의발(衣鉢)도 받아주지 않으리라.” 라고 서로 이야기했다. 그런 형편이었으므로 붓다가 그 깨달은 바를 아무리 말해도 그들은 귀조차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붓다가 고행을 포기한 일을 가지고, 그를 경멸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옥신각신한 끝에, 그때 붓다가 한 말씀을 경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일찍이 내 안색이 이리도 빛나는 것을 본적이 있는가!”

그 얼굴에는 새로이 얻은 깨달음과 그것으로 말미암은 자신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렇다면 시험 삼아 들어보겠다는 그들(다섯 수행자)을 상대로 붓다의 첫 설법이 시작됐다. 그 내용을 <여래소설경(如來所說經)>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출가한 이는 두 극단, 즉 욕망의 격정에 몸을 맡기는 생활태도인 쾌락주의와 고행에 의해 도를 닦고자 하는 금욕주의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오로지 집착함은 비열하고 천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않고 또한 무익하다. 그리고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은 다만 괴로울 뿐 성스럽지 못하며 또한 무익하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깨달았다.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寂靜)과 증지(證智)와 등각(等覺)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즉, 중도를 설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쌍윳다니까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올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 새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비구들이여, 그것이 내가 깨달은 중도여서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과 증지와 등각과 열반에 도움이 된다. …(S56:11)” 즉, 팔정도를 설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초전법륜에서 중도(中道)와 팔정도(八正道), 그리고 사성제(四聖諦)를 설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부경전26, 성구경>은 그 동안의 그들의 생활을 묘사해, 이런 일절을 남기고 있다.

“이리하여 붓다가 두 사람의 비구에게 설명하고 있을 때에는 세 사람의 비구가 탁발해 그들이 얻어 온 것으로 여섯 명이 생활했다. 또 세 사람의 비구에게 가르치고 있을 때에는 두 사람의 비구가 탁발해 그들이 얻어 온 것으로 역시 여섯 명이 생활했다.”

이런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다섯 비구의 한 사람인 꼰단냐(憍陳如)가 마침내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했다. 그것은 본인에게도 큰 기쁨이었을 것임에 틀림없거니와, 아울러 어쩌면 그 이상으로 붓다의 기쁨이기도 했을 것이다.

“꼰단냐는 깨달았다. 꼰단냐는 깨달았다.!” 붓다의 그때 이런 환성이 무엇보다 그 기쁨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윽고 나머지 네 명도 차례차례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기에 이른다. 그것으로써 붓다의 사상적 교의가 숱한 난관을 뚫고 마침내 성공한 셈이다.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Dhamma-cakka-pavattana sutta, S56;11)---<초전법륜경>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다섯 비구들에게 설법한 최초의 법문으로, 불교의 초석이자 핵심인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가 집약돼 있는 아주 중요한 경이다. 초전법륜이란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후 행한 최초의 설법을 말한다. 남방 빠알리어 삼장 <상윳따니까야>와 북전 아함의 <잡아함경 제379경 - 전법륜경>에 전한다. 내용은 위의 초전법륜(初轉法輪)을 참조할 일이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고려시대 최초로 조성된 대장경을 말한다. 고려에서는 불력(佛力)으로 거란침입을 물리치고자 중국 송나라 판 대장경[개보판(開寶板)]을 저본(底本)으로 해서 우리나라 최초로 목판대장경을 조성했다. 현종 2년(1011년)에 시작해 선종 4년(1087년)에 완성했는데, 이 대장경을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이라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대구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보관되던 것이 고려 고종 19년(1232) 몽고침입으로 인해 불타버렸고, 현재 그 인쇄본 일부가 남아있는데, 글씨는 오히려 해인사 팔만대장경보다 뛰어나다고 한다.

*초중후선(初中後善)---경전에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의리(義利), 문구(文句)가 구족(具足)된 법을 설하라.” 이런 말이 자주 나온다. 부처님의 전도 선언문에도 이 말과 같은 뜻을 가진 말이 나온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에서는 이와 같거나 유사한 내용들이 자주 반복되고 있다. 한역에서는 이를 ‘초중후선(初中後善)’으로 번역한다.

부처님의 설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는 것이니, 결국 시종일관(始終一貫)해 있어서 그 사이에 단 하나의 모순이 있다거나 앞뒤 말이 맞지 않는 부분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어서 의리(義利), 문구(文句)가 구족(具足)된 법이라는 것은 뜻이 심오하고 표현에 과부족(過不足)이 없는 진리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의리(義利)라는 것은 의리(義理)로도 표현될 수 있으며, 이는 여래의 설법이 그러하니 듣는 중생들은 그 뜻과 표현을 빠뜨림 없이 잘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경계의 말씀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 실론섬

*초지보살(初地菩薩)---보살이 부처에 이르기 위해 수행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그 중 <화엄경>에서 천명한 52위 중 제41에서 제50까지의 10지(地)와 천태종(天台宗)의 통교(通敎) 10지(地)가 있다. 이 10지 중 맨 처음을 초지(初地) 혹은 환희지(歡喜地)라 하며, 이 초지를 닦는 보살을 초지보살 혹은 초지성인(初地聖人)이라 한다.

*초팔제호묘경(超八醍醐妙經)---<법화경>의 별칭이다. <법화경>은 화의사교(化儀四敎)와 화법사교(化法四敎) 밖에 있다고 해서 초팔(超八)이라 했고, 화의사교ㆍ화법사교 8교보다 뛰어나게 훌륭한 것이 마치 제호(醍醐)의 맛과 같다고 해서 <초팔제호묘경>이라 했다. 즉, 그만큼 <법화경>이 일불승과 일체중생 성불을 가르치는 가장 뛰어난 경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제호(醍醐)란 우유를 발효시켜 맛을 낸 것으로 오늘날 요구르트와 비슷한 유제품이다.

*촉(觸, 산스크리트어 sparśa, 빠알리어 phassa)---불교에서는 우리 인간은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를 좀 더 세분하면, 우리 인간은 육근(6根)이라 해서 안(眼-눈) ․ 이(耳-귀) ․ 비(鼻-코) ․ 설(舌-혀) ․ 신(身-몸) ․ 의(意-정신)의 여섯 기관으로 형성돼 있다고 본다. 여기서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 신(身)는 육체이고, 의(意)는 정신이므로 육체와 정신으로 이루어졌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육근이 각각의 감각대상인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ㆍ법(法)이라는 육경(6境)을 만날 때, 각각의 감각장소(육근)를 통해서 각각의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인식을 육식(6識)이라 한다. 즉, 안식(眼識) ‧ 이식(耳識) ‧ 비식(鼻識) ‧ 설식(舌識) ‧ 신식(身識) ‧ 의식(意識)을 6식(六識)이라 한다. 초기 불교에서는 6식까지만 있는 것으로 봤다.

여기서 촉은 접촉을 말한다. 육근의 신(身根-몸)이 상대의 몸에 닿자(觸境), 내 몸에 무엇에 닿았다는 인식(身識)이 일어나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때의 촉은 대상 물질이다.

그런데 12연기에도 촉(觸)이란 게 있다. 12연기에 있어서 무명(無明)을 이어서 행(行)이 일어나고, 행(行)을 이어서 식(識)이 일어나며, 식(識)을 이어서 명색(名色)이 일어나고, 명색(名色)을 이어서 6입(六入)이 일어나며, 육입(六入)을 이어서 촉(觸)이 일어나고, 촉(觸)을 이어서 수(受)가 일어나며, 수(受)를 원인으로 애(愛)가 일어난다.… 이와 같이 설명하는 과정에서 촉은 12연기의 여섯 번째 단계로 일어나는데, 이때의 촉 역시 ‘접촉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때의 접촉은 감각접촉으로서 정신적인 것이다.

그런데 좀 더 시야를 넓게 해서 보면, 촉(觸)은 근 ․ 경 ․ 식(根ㆍ境ㆍ識)이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즉, “6근(根). 6경(境). 6식(識) 등 3요소가 어울리는 것을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 하는데, 삼사(三事)라 하면 18계가 된다. 이 같은 삼사가 화합하는 것이 촉이란 말이다[성촉(成觸)]. 다시 말하면, 여섯 가지 인식(감각)기관인 육근(六根-내입처)과 여섯 가지 인식(감각) 대상인 육경(六境-외입처)이 만나면 여섯 가지 인식(六識)이 생긴다. 그리고 6근(根). 6경(境). 6식(識)이라는 세 가지[18계]가 어울리는 것을 촉(觸)이라고 한다.

육근이 발달하면 개인의 경우, 이것은 꽃, 이것은 과자, 이것은 아빠, 이것은 엄마라고 식별(識別)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식별은 근 ․ 경 ․ 식(根ㆍ境ㆍ識)이 접촉(接觸)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촉(觸)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촉이 있게 되는데, 촉(觸)이라고 하는 것은 심리학적 표현을 빌리면 감각(感覺)이다. 촉이란 접촉을 말하며, 감각이란 접촉을 통해 일어난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도 접촉이다. 촉이란 지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심적인 힘이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육입)이 밖의 경계(境界-육경)에 접촉하는 ―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촉(觸)은 마음작용들 가운데 하나로 근(根) · 경(境) · 식(識) 3사(三事)의 화합으로 이루어진다.

즉, 눈(眼根)이 여자(色境)을 보고 아! 여자구나 하는 인식(眼識)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 귀(耳根)에 무슨 소리(聲境)가 들려와서 아! 기적소리구나 하는 인식(耳識)이 일어나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 몸(身根)에 상대의 몸이 닿자(觸境) 내 몸에 다른 사람의 몸이 닿았다는 인식(身識)이 일어난다. 그 후에 의식의 도움을 받아 “그래서 좋다 혹은 싫다” 하는 감정이 뒤따르게 된다.

그리고 촉이란 이와 같은 단순한 접촉이나 자극만이 아니라 더 넓게, 여러 인식(認識)의 성립을 나타낸 말이기도 하다. 피부접촉에 있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스킨십만이 아니라 어떤 물건을 손에 얹어놓고 그 무게를 측정하는 것이라든지, 온천수에 몸을 담갔을 때의 온도를 인식하는 것이라든지, 가시에 찔렸을 때의 느끼는 고통, 도공이 흙을 반죽해서 그 반죽의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라든지, 발로 공을 마음먹은 방향으로 차는 것 등도 모두 신식이 제6식 의식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생활하면서 몸의 촉감을 통해 인식하는 영역이 실로 광범위하다.

그리고 꼭 육체적 접촉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접촉까지를 확대해서 생각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내 생각과 다른 남의 의견에 부딪쳤을 때 당황하거나 불쾌할 경우가 있고, 그런 과정을 거쳐 의견충돌로 발전하거나 내 의견을 수정하는 것까지 상정할 수 있다.

그런데 6근(根). 6경(境)이라는 12처에서 6식(識)이 발생해 18계가 성립하는 것은 욕구나 관심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난생 처음으로 무지개를 봤다고 하자. 이때 관심이 있으면 보는 자신(주관)과 보이는 대상(무지개)이 의식 속에 뚜렷이 나타날 것이다. 이와 같이 주관, 대상, 의식이 함께 나타날 때 사물을 인식할 수 있으며, 이러한 인식은 관심이나 욕구가 있어야 성립한다는 말이다. 무지개가 뭔지 모르는 사람은 무지개를 봐도 관심이 없어 그냥 지나친다. 그러나 무지개를 아는 사람은 무지개를 보고 좋아한다. 오늘 무지개를 봐서 재수가 좋겠구나! 하면서 무지개를 유심히 보면서 기뻐한다.

이와 같이 내(근)가 무지개(경)를 봐서 기분이 좋다(식)고 하면 삼사화합이 제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인식의 바탕에는 욕구와 관심이 있어야 나타난다는 말이다. 다만 어떤 욕탐이나 관심을 가지고 보고, 생각하느냐에 따라 보는 나(주관), 보이는 사물(대상), 이것을 분별하는 의식에 의해 각기 다른 존재가 나타난다. 이것이 촉이다.

예컨대, 여기에 나무로 만든 궤짝이 있다고 하자. 여기에 ‘책을 놓고 보자’라고 하는 욕구를 가지고 보면 그 궤짝은 책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음식을 놓고 먹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보면 밥상으로 인식되고, 불을 피우려는 의도로 보면 그 궤짝은 땔감으로 인식된다. 촉은 이렇게 모든 존재가 성립하는 근거가 되는 의식 상태이기도 하다. 18계라는 의식세계 속에 있는 의식내용을 ‘존재’, 즉 ‘있는 것’으로 드러내는 것이 촉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일체(一切)]은 촉을 근거로 하고 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오온(五蘊)으로 분류하므로 촉은 오온의 근원이기도 하다.

즉, 촉(觸)이라는 것은 ‘부딪치다’ 혹은 ‘닿는다’는 말인데, 남과 서로 부딪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여러 가지 촉이 있지마는 가령 남녀 간의 촉이 제일 무겁다. 의복도 좋은 것, 부드러운 것, 비단을 입으면 몸뚱이 촉감이 좋아지고 색정(色情)이 통한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거친 옷을 입으라고 하셨다.

이런 얘기가 있다. 부자인 칠십 노인이 아들ㆍ딸도 없이 홀로 사는데, 어떤 처녀가 스스로 자원해서 시집을 갔다. 그리고 처음에 부드러운 명주옷을 해 입혀서 색정을 회복시켜 가지고, 아들을 낳아서 큰 인물로 길렀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수행 정진을 해서 수다원과(須陀洹果)만 얻어도 이런 촉법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촉에 의한 촉식은 우리에게 즐거움도 주지만 슬픔도 준다. 예컨대, 신근(身根)이란 우리의 피부를 말하는데, 사람들에겐 피부 접촉이 굉장히 중요하다. 흔히 스킨십이라고 한다. 피부 접촉이 많을수록 정이 드는 법이다. 그래서 어린아이 때, 엄마가 얼마나 많이 보듬어 주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이 훨씬 더 영향이 커다는 게 그래서 나오는 말이다. 기른 정은 피부 접촉을 말한다. 피부 접촉을 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강한 유대감을 갖게 된다. 남ㆍ녀 간에도 피부 접촉이 많아야 사랑이 깊어진다. 심지어 애완동물과도 스킨십을 많이 해야 서로 간에 신뢰가 쌓인다.

이러한 촉식에 의한 사랑은 우리에게 많은 즐거움도 주지만 많은 갈등과 괴로움을 주기도 한다. 촉식이 엄청난 번뇌를 쏟아낸다. 그래서 출가자는 독신을 고집하게 되고, 편한 잠자리, 맛있는 음식, 고운 옷을 기피하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물질적인 접촉이 있고, 정서적인 접촉이 있다.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처(六處)에서 촉(觸境, photthabba-대상)은 물질을 말하고, 12연기에서의 촉은 마음작용인 감각접촉(phassa)이 돼서 마음작용(cetasika)에 속한다. 이렇게 구분해야 한다. 다만 남ㆍ녀 간의 교접은 물질적인 접촉이자 감각접촉이기도 한 것이다. 대개 스킨십은 물질적인 접촉과 정서적인 감각접촉을 겸하게 된다.

 

 

 

 

 

 

 

아미산 <불교 용어 해설, ㅊ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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