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時)와 훌륭함과 미진(微塵)과
연(緣)에 의하여 세간을 분별하니,
세간과 종자는 식(識)으로
저 인(因)에 의지해서 생기니라.
벽에 의지한 그림 모양과 같아서
사실을 알면 바로 없어지리니,
사람이 환상을 보는 것과 같아
생사(生死)를 본 것 또한 그러하네.
어리석은 사람은 어둠에서
속박과 해탈이란 생각을 일으키니,
안과 밖의 여러 가지와
모든 법과 인연이네.
이와 같이 관찰하고 수행하여
고요한 곳에 머무르고
훈습(薰習)에서 무심(無心)하면
마음이 훈습과 함께 하지 않는다.
마음은 차별상(差別相)이 없는데
훈습이 마음에 얽힌 것이니,
때[垢]와 같은 훈습으로
의(意)는 식(識)을 따라 난 것이네.
비단[帛]과 같이 마음도 또한 그러하여
훈습에 의하여 나타나지 않으니,
물건과 같고 물건 없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허공과 같다'고 말한다.
아리야(阿梨耶)의 몸에는
물건이 있고 없음을 떠났으니,
의식(意識)이 전멸(轉滅)하면
마음이 혼탁한 법을 떠날 것이다.
일체법을 깨달았기에
나는 심불(心佛)이라 말한다.
3세(世)를 끊었으며
유무(有無)법을 떠났네.
세상 법은 넷이 상응(相應)하며
모든 유(有)는 모두 환(幻)과 같으니,
이 두 법의 체상(體相)이요,
7지(地)는 마음에서 난다네.
다른 지위도 또한 성취(成就)이고
2지(地)와 부처님의 지위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와
욕계(欲界)와 열반이여,
일체가 마음의 경계요
몸 가운데를 떠나지 않았다.
만약 모든 법의 생김을 본다면
이는 미혹인 법을 낸 것이리.
자심(自心)에 미혹임을 깨달으면
이는 모든 법의 생(生)함이 아니다.
무생(無生)은 법의 체상이요
생(生)은 곧 세간에 집착함이네.
모든 상을 환(幻)과 같이 볼 것이니,
법의 체상은 이와 같다.
자심(自心)에서 허망하게 취함이니
모든 법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이를 위하여
3승(乘)과 일승을 말했으며,
또한 무승(無乘)을 말했으니,
모든 성인이란 고요함이라네.
나의 법엔 두 가지 있으니
상법(相法)과 증득함이다
네 가지의 침량(斟量)하는 상(相)으로서
양(量)과 상응(相應)법을 세웠노라.
형체와 모양과 수승함과 종자로서
미혹함을 보게 되어
명자(名字)와 행처(行處)를 분별하지만
성행(聖行)은 실로 청정하다네.
분별과 분별에 의하여
그러므로 분별상이 있으니,
분별과 분별을 떠나면
실체이고, 성인의 경계라네.
떳떳하고 진실하고 변함이 아니어서
자성(自性)의 사법(事法)이며 실체(實體)이다.
진여(眞如)는 심법(心法)을 떠났으며
분별을 멀리 떠났다네.
만약 청정한 법이 없으면
또한 더러움도 없으리니,
청정한 마음이 있으므로
더러운 법이 있음을 본다.
청정함은 성인의 경계이기에
그러므로 진실인 사법도 없으니,
이 모든 법의 체상(體相)이
성인의 경계라네.
인연으로부터 세간이 생겼으니
모든 분별을 떠나서
환과 꿈과 같다고 하면
법을 보고 해탈을 얻으리라.
번뇌의 훈습 여러 가지가
마음과 함께 상응하여 나기에,
중생은 바깥 경계만을 보고
심법(心法)의 체성을 보지 못한다.
심법은 항상 청정하여
미혹으로 생김이 아니다.
미혹은 번뇌로부터 일어나니
그러므로 마음을 보지 못하네.
미혹이 곧 진실이니
다른 곳이란 얻을 수도 없다.
음(陰)도 아니요 다른 곳도 아니니,
음과 행(行)을 여실(如實)로서 관찰하리.
견(見)과 능견상(能見相)을 떠나서
만약 유위(有爲)법을 보고
자심(自心)과 세간을 본다면,
저 사람은 능히 상(相)을 떠날 것이다.
유심(唯心)법을 보지 말며
외의(外義)를 분별하지 말고
진여관(眞如觀)에 머물러서
마음의 경계를 벗어나야 하리.
마음의 경계를 벗어나고는
모든 고요함도 멀리 떠나서
수행하여 고요함에 머무르면
수행자의 고요함에 머무름이리라.
마하연(摩訶衍; 大乘)을 보지 아니해도
저절로 고요하리니
모든 원(願)이 청정함에 의하여
지(智)와 무아(無我)도 고요하리라.
마땅히 마음의 경계를 관찰하며
또한 지혜의 경계도 관찰하고
지혜로서 경계를 관찰하여
상(相)에 미(迷)하지 아니하리.
마음의 경계는 고제(苦諦)이고
지혜의 경계는 집(集)이며
2제(諦)와 불지(佛地)는
반야(般若)의 경계라네.
과(果)의 얻음과 열반과
또한 8성도(聖道 : 8正道)로
일체법을 깨달아서
청정한 불지(佛智)를 얻으리.
눈(眼)과 색(色)과 밝음과
허공과 심(心)과 의(意)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식(識)이 아리야(阿梨耶)로부터 난다네.
능취(能取)와 가취(可取)와 수(受)는
이름도 사법(事法)도 없는 것이니,
인(因)이 없이 분별하는 자여,
비각(非覺)을 취하는 것과 같다.
뜻[義]에도 이름[名]이 없으며
이름 속에 뜻도 그러하여
인(因)과 무인(無因)이 생기니,
분별하고 분별하지 말지어다.
일체법은 진실함이 없고
언어도 또한 그러하며
공(空)과 불공(不空)의 뜻도 그러한데
어리석은 이 법을 보고 옳게 여겨
'진실에 머무른다'고 허망하게 생각하여
사견(邪見)으로 거짓이름을 말하네.
한 법이 다섯 가지로 되니
여실히 멀리 떠나야 하네.
다섯 가지는 마(魔)의 법이니
초월하여 유무(有無)를 벗어나야 하네.
이는 수행의 경계가 아니요
외도의 법이다.
유(有)와 삿된 법을 구하지 않으며
또한 상(相)·견(見)·아(我)도 없어야 하리.
짓는 것 스스로 떳떳한 법이라 함은
오직 말로서만 난 것이네.
실제(實諦)는 말할 수도 없는데
적멸(寂滅)로서 법을 나타내니,
아리야식(識)에 의지하여
의식(意識)이 능히 굴러나네.
의지함이란 심의(心意)에 의지함이니
능히 전식(轉識)을 낸다.
의지하는 곳은 허망하게 이루어졌으나
진여(眞如)는 심법(心法)이라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자는
능히 심성(心性)의 자체를 알리라.
항상됨과 무상(無常)함과
의상(意相)과 사법이며
생(生)과 불생(不生)을 분별함을
행자(行者)는 마땅히 취하지 않으리.
두 법을 분별하지 말 것이니
식(識)은 아리야(阿梨耶)로부터 나온다.
한 뜻[一義]에서 두 마음[二心]이 생함은
이와 같이 생함을 알지 못하고
하나·둘의 법을 취하니,
이는 범부의 경계라네.
말하는 이와 말함이 없고
불공(不空)으로 마음을 보지만,
자심(自心)에서 보지 못하였기에
그러므로 견(見)의 그물이 생한다.
모든 인연은 불생(不生)이며
모든 감관(根)도 이와 같으니,
계(界)와 5음(陰)도 없으며
탐(貪)도 유위(有爲)도 없다네.
본래 업을 짓는 것도 없고
지음도 유위(有爲)도 아니며,
제(除)함도 없고 속박도 없고
속박도 해탈도 없다네.
무기(無記)도 물건도 없고
법도 비법(非法)도 없으며
시간도 열반도 없고
법체도 또한 없다네.
부처도 실제(實諦)도 없으며
인(因)도 과(果) 또한 없고
전도(顚倒)와 멸(滅)도 없으며
멸(滅)도 생(生) 또한 없네.
12지(支)도 또한 없고
변(邊)과 무변(無邊)도 또한 그러하여
모든 사견(邪見)을 떠났으니,
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한다.
번뇌와 업과 몸이며
짓는 자와 과보(果報)여
꿈과 아지랑이와
건달바 성(城)들과 같다네.
심법(心法)에 머물러
그리하여 모든 법상(法相)을 내고,
심법에 머무르므로
단(斷)과 상(常)을 본다.
열반에는 음(陰)도 없고
아(我)도 상(相)도 또한 없으며
능히 유심(唯心)에 들어가서
해탈하여 상을 취하질 않는다네.
자리[地]를 보임이 무슨 허물이겠는가.
중생은 바깥을 보기 때문이다.
마음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지만
훈습 때문에 나타나질 아니하네.
때[垢]에는 흰 것이 보이지 않고
흰 것엔 때가 보이지 않으니,
구름이 허공을 덮은 것 같아서
그러므로 마음이 나타나질 않네.
마음은 능히 모든 업을 짓고
지(智)는 그 속에서 분별하며
혜(慧)는 능히 고요함을 관찰하여
크고 묘한 법체(法體)를 얻는다네.
마음은 경계에 의해 얽매이고
지(智)는 각관(覺觀)에 의해 나며,
고요함인 수승한 경계는
혜(慧)가 그 속에서 행한다.
심(心)과 의(意)와 의식이
상(相)에서 분별하니
분별 없는 체(體)를 얻어야 하리.
2승(乘)은 참 제자(弟子)가 아니라네.
고요하고 수승한 사람에겐
부처님의 지혜가 청정하네.
능히 승의(勝義)를 내고서
이미 모든 행상(行相)을 떠났네.
법체가 있다고 분별하며
타력(他力)의 법은 없다고 하여
미혹에서 분별함을 취하니
타력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모든 대(大)에 색(色)이 있는 것 아니며
색이 있는 것은 모든 대가 아니요,
꿈과 환과 건달바이며
짐승이 물이 아닌 것을 갈애(渴愛)함이다.
때(時)와 훌륭함과 미진(微塵)과
연(緣)에 의하여 세간을 분별하니,
세간과 종자는 식(識)으로
저 인(因)에 의지해서 생기니라.
벽에 의지한 그림 모양과 같아서
사실을 알면 바로 없어지리니,
사람이 환상을 보는 것과 같아
생사(生死)를 본 것 또한 그러하네.
어리석은 사람은 어둠에서
속박과 해탈이란 생각을 일으키니,
안과 밖의 여러 가지와
모든 법과 인연이네.
이와 같이 관찰하고 수행하여
고요한 곳에 머무르고
훈습(薰習)에서 무심(無心)하면
마음이 훈습과 함께 하지 않는다.
마음은 차별상(差別相)이 없는데
훈습이 마음에 얽힌 것이니,
때[垢]와 같은 훈습으로
의(意)는 식(識)을 따라 난 것이네.
비단[帛]과 같이 마음도 또한 그러하여
훈습에 의하여 나타나지 않으니,
물건과 같고 물건 없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허공과 같다'고 말한다.
아리야(阿梨耶)의 몸에는
물건이 있고 없음을 떠났으니,
의식(意識)이 전멸(轉滅)하면
마음이 혼탁한 법을 떠날 것이다.
일체법을 깨달았기에
나는 심불(心佛)이라 말한다.
3세(世)를 끊었으며
유무(有無)법을 떠났네.
세상 법은 넷이 상응(相應)하며
모든 유(有)는 모두 환(幻)과 같으니,
이 두 법의 체상(體相)이요,
7지(地)는 마음에서 난다네.
다른 지위도 또한 성취(成就)이고
2지(地)와 부처님의 지위와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와
욕계(欲界)와 열반이여,
일체가 마음의 경계요
몸 가운데를 떠나지 않았다.
만약 모든 법의 생김을 본다면
이는 미혹인 법을 낸 것이리.
자심(自心)에 미혹임을 깨달으면
이는 모든 법의 생(生)함이 아니다.
무생(無生)은 법의 체상이요
생(生)은 곧 세간에 집착함이네.
모든 상을 환(幻)과 같이 볼 것이니,
법의 체상은 이와 같다.
자심(自心)에서 허망하게 취함이니
모든 법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어리석고 지혜가 없는 이를 위하여
3승(乘)과 일승을 말했으며,
또한 무승(無乘)을 말했으니,
모든 성인이란 고요함이라네.
나의 법엔 두 가지 있으니
상법(相法)과 증득함이다
네 가지의 침량(斟量)하는 상(相)으로서
양(量)과 상응(相應)법을 세웠노라.
형체와 모양과 수승함과 종자로서
미혹함을 보게 되어
명자(名字)와 행처(行處)를 분별하지만
성행(聖行)은 실로 청정하다네.
분별과 분별에 의하여
그러므로 분별상이 있으니,
분별과 분별을 떠나면
실체이고, 성인의 경계라네.
떳떳하고 진실하고 변함이 아니어서
자성(自性)의 사법(事法)이며 실체(實體)이다.
진여(眞如)는 심법(心法)을 떠났으며
분별을 멀리 떠났다네.
만약 청정한 법이 없으면
또한 더러움도 없으리니,
청정한 마음이 있으므로
더러운 법이 있음을 본다.
청정함은 성인의 경계이기에
그러므로 진실인 사법도 없으니,
이 모든 법의 체상(體相)이
성인의 경계라네.
인연으로부터 세간이 생겼으니
모든 분별을 떠나서
환과 꿈과 같다고 하면
법을 보고 해탈을 얻으리라.
번뇌의 훈습 여러 가지가
마음과 함께 상응하여 나기에,
중생은 바깥 경계만을 보고
심법(心法)의 체성을 보지 못한다.
심법은 항상 청정하여
미혹으로 생김이 아니다.
미혹은 번뇌로부터 일어나니
그러므로 마음을 보지 못하네.
미혹이 곧 진실이니
다른 곳이란 얻을 수도 없다.
음(陰)도 아니요 다른 곳도 아니니,
음과 행(行)을 여실(如實)로서 관찰하리.
견(見)과 능견상(能見相)을 떠나서
만약 유위(有爲)법을 보고
자심(自心)과 세간을 본다면,
저 사람은 능히 상(相)을 떠날 것이다.
유심(唯心)법을 보지 말며
외의(外義)를 분별하지 말고
진여관(眞如觀)에 머물러서
마음의 경계를 벗어나야 하리.
마음의 경계를 벗어나고는
모든 고요함도 멀리 떠나서
수행하여 고요함에 머무르면
수행자의 고요함에 머무름이리라.
마하연(摩訶衍; 大乘)을 보지 아니해도
저절로 고요하리니
모든 원(願)이 청정함에 의하여
지(智)와 무아(無我)도 고요하리라.
마땅히 마음의 경계를 관찰하며
또한 지혜의 경계도 관찰하고
지혜로서 경계를 관찰하여
상(相)에 미(迷)하지 아니하리.
마음의 경계는 고제(苦諦)이고
지혜의 경계는 집(集)이며
2제(諦)와 불지(佛地)는
반야(般若)의 경계라네.
과(果)의 얻음과 열반과
또한 8성도(聖道 : 8正道)로
일체법을 깨달아서
청정한 불지(佛智)를 얻으리.
눈(眼)과 색(色)과 밝음과
허공과 심(心)과 의(意)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여
식(識)이 아리야(阿梨耶)로부터 난다네.
능취(能取)와 가취(可取)와 수(受)는
이름도 사법(事法)도 없는 것이니,
인(因)이 없이 분별하는 자여,
비각(非覺)을 취하는 것과 같다.
뜻[義]에도 이름[名]이 없으며
이름 속에 뜻도 그러하여
인(因)과 무인(無因)이 생기니,
분별하고 분별하지 말지어다.
일체법은 진실함이 없고
언어도 또한 그러하며
공(空)과 불공(不空)의 뜻도 그러한데
어리석은 이 법을 보고 옳게 여겨
'진실에 머무른다'고 허망하게 생각하여
사견(邪見)으로 거짓이름을 말하네.
한 법이 다섯 가지로 되니
여실히 멀리 떠나야 하네.
다섯 가지는 마(魔)의 법이니
초월하여 유무(有無)를 벗어나야 하네.
이는 수행의 경계가 아니요
외도의 법이다.
유(有)와 삿된 법을 구하지 않으며
또한 상(相)·견(見)·아(我)도 없어야 하리.
짓는 것 스스로 떳떳한 법이라 함은
오직 말로서만 난 것이네.
실제(實諦)는 말할 수도 없는데
적멸(寂滅)로서 법을 나타내니,
아리야식(識)에 의지하여
의식(意識)이 능히 굴러나네.
의지함이란 심의(心意)에 의지함이니
능히 전식(轉識)을 낸다.
의지하는 곳은 허망하게 이루어졌으나
진여(眞如)는 심법(心法)이라네.
이와 같이 수행하는 자는
능히 심성(心性)의 자체를 알리라.
항상됨과 무상(無常)함과
의상(意相)과 사법이며
생(生)과 불생(不生)을 분별함을
행자(行者)는 마땅히 취하지 않으리.
두 법을 분별하지 말 것이니
식(識)은 아리야(阿梨耶)로부터 나온다.
한 뜻[一義]에서 두 마음[二心]이 생함은
이와 같이 생함을 알지 못하고
하나·둘의 법을 취하니,
이는 범부의 경계라네.
말하는 이와 말함이 없고
불공(不空)으로 마음을 보지만,
자심(自心)에서 보지 못하였기에
그러므로 견(見)의 그물이 생한다.
모든 인연은 불생(不生)이며
모든 감관(根)도 이와 같으니,
계(界)와 5음(陰)도 없으며
탐(貪)도 유위(有爲)도 없다네.
본래 업을 짓는 것도 없고
지음도 유위(有爲)도 아니며,
제(除)함도 없고 속박도 없고
속박도 해탈도 없다네.
무기(無記)도 물건도 없고
법도 비법(非法)도 없으며
시간도 열반도 없고
법체도 또한 없다네.
부처도 실제(實諦)도 없으며
인(因)도 과(果) 또한 없고
전도(顚倒)와 멸(滅)도 없으며
멸(滅)도 생(生) 또한 없네.
12지(支)도 또한 없고
변(邊)과 무변(無邊)도 또한 그러하여
모든 사견(邪見)을 떠났으니,
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한다.
번뇌와 업과 몸이며
짓는 자와 과보(果報)여
꿈과 아지랑이와
건달바 성(城)들과 같다네.
심법(心法)에 머물러
그리하여 모든 법상(法相)을 내고,
심법에 머무르므로
단(斷)과 상(常)을 본다.
열반에는 음(陰)도 없고
아(我)도 상(相)도 또한 없으며
능히 유심(唯心)에 들어가서
해탈하여 상을 취하질 않는다네.
자리[地]를 보임이 무슨 허물이겠는가.
중생은 바깥을 보기 때문이다.
마음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지만
훈습 때문에 나타나질 아니하네.
때[垢]에는 흰 것이 보이지 않고
흰 것엔 때가 보이지 않으니,
구름이 허공을 덮은 것 같아서
그러므로 마음이 나타나질 않네.
마음은 능히 모든 업을 짓고
지(智)는 그 속에서 분별하며
혜(慧)는 능히 고요함을 관찰하여
크고 묘한 법체(法體)를 얻는다네.
마음은 경계에 의해 얽매이고
지(智)는 각관(覺觀)에 의해 나며,
고요함인 수승한 경계는
혜(慧)가 그 속에서 행한다.
심(心)과 의(意)와 의식이
상(相)에서 분별하니
분별 없는 체(體)를 얻어야 하리.
2승(乘)은 참 제자(弟子)가 아니라네.
고요하고 수승한 사람에겐
부처님의 지혜가 청정하네.
능히 승의(勝義)를 내고서
이미 모든 행상(行相)을 떠났네.
법체가 있다고 분별하며
타력(他力)의 법은 없다고 하여
미혹에서 분별함을 취하니
타력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모든 대(大)에 색(色)이 있는 것 아니며
색이 있는 것은 모든 대가 아니요,
꿈과 환과 건달바이며
짐승이 물이 아닌 것을 갈애(渴愛)함이다.
한 사람을 위해 설법함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설법하지 않음이니,
사람의 병이 같지 않으므로
의사(醫師)의 약 처방이 다르듯이
부처님의 중생을 위함도
마음 따라 모든 법 말하고
외법(外法)인 종자에 의하여
현법(現法)을 분별하여 말한다네.
마음이 타력(他力)법에 의하기에
가취(可取)는 분별이니,
마음 종자에 의지하여
바깥 경계를 관찰하고 취한다.
두 가지로 미혹을 굴리는 것이요
다시 제 3의 인(因)이 없으니
미혹이 나지 않기 때문에
어느 법에 의해 나지 않음이다.
60·18법이기에
그러므로 유심(唯心)이라 말한다.
자심에서 바깥 법을 보고
저를 보고서 아(我)를 떠나네.
만약 마음의 분별에 들어가면
능히 모든 법상(法相)을 떠나리라.
아리야(阿梨耶)에 의하여
능히 모든 식(識)을 낸다.
어리석은 이 내신(內身)에 드는 것을
마음이 밖에 드는 것을 보인 것이라 하고
별과 털 바퀴를 취하여
꿈속에서 보는 색(色)과 같다하네.
유위(有爲)와 무위(無爲)가 떳떳하다고
분별함에는 이러한 것이 없으니
건달바성과 환상과
새와 짐승이 물에 애착함과 같다.
이와 같이 보는 것 있지 않으니
타력(他力) 법도 또한 그러하네.
아(我)와 모든 감관과 형상을
나는 세 가지 마음이라 말한다.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이
자체상(自體相)을 떠났으며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이
타체상(他體相)도 떠났다네.
심과 의와 의식은
아(我)도 없고 2체(體)도 없다.
5법의 자체상은
부처님의 경계라네.
성취하는 상에는 세 가지가 있지만
한 훈습의 인(因)에 의하니,
채색(彩色)은 한 가지이지만
벽 위에 여러 가지가 보이는 것과 같네.
두 가지 무아(無我)인 마음과
의(意)와 모든 식의 모양과
다섯 가지 법의 체상인
아성(我性 : 佛性)에는 이러한 것이 없다네.
모든 심상(心相)과 식(識)을 떠났고
의(意)의 모양도 떠나서
모든 법체가 이와 같으니
이는 나의 경계라네.
모든 법체를 떠난 것은
이 여래의 체성이다.
몸과 입과 의업(意業)이여
그는 백법(白法)을 짓지 못하네.
여래의 체성은 청정하여
모든 수행함을 떠났으니,
자재하고 청정한 모든 신통과
삼매의 힘으로 장엄하였네.
여러 가지 뜻대로 나는 몸이여,
이는 청정한 여래 성(性)이라네.
속 몸의 지혜는 때[垢]를 떠나고
모든 인상(因相)도 떠났다네.
8지(地)와 불지(佛地)는
이 여래의 성(性)이며
원행지(遠行地)와 선혜지(善彗地)와
법운지(法雲地)와 불지(佛地)여,
이는 부처의 체성이요,
다른 지위는 3승과 섞임이라네.
중생 몸의 차별에 의하고
또는 어리석은 모양을 위함이었으니,
일곱 가지 지위를 말하였고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심지(心地)를 말씀하셨네.
입과 몸과 마음의 모든 장애는
7지(地)에는 이것이 없느니라.
8지(地)의 묘한 몸은
꿈에 폭포수 모양인 것과 같다네.
8지와 5지에서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네.
일체 여러 불자(佛子)는
3유(有) 가운데에 왕(王)이 되는데,
생(生)과 불생(不生)과
공(空)과 불공(不空)을 분별하지 아니하네.
실(實)과 불실(不實)이여,
심중(心中)에는 이러한 것이 없으니
이는 실(實)이며 이는 실이 아니라고
이런 일을 분별하지 말지어다.
연각과 성문은
불자(佛子)가 아니라고 말하네.
유(有)와 무(無)는 진실이 아니요
또한 공한 모양도 없다네.
거짓 이름과 진실법은
마음 가운데엔 일체 없다네.
세제(世諦)에 의해 법이 있고
제일의(第一義)에는 모두 없다네.
진실법과 미혹은 없으니
이는 모두 세제(世諦)법이네.
일체법과 무법(無法)을
나는 거짓이름이라 말하네.
언어와 수용(受用)을
어리석은 이는 진실로 보지만,
언어의 법으로부터
경계가 실로 있다는 것이네.
언어로부터 생긴 법이요
법에는 이와 같은 것이 없느니라.
벽을 떠나서 그림이 없는 것과 같고
또한 그림자의 본형을 떠남과 같네.
본래 깨끗한 식(識)도 또한 그러한데
물의 파도이기에 나타나지 않네.
환과 같은 마음도 또한 그러하며
의(意)는 교활한 자와 같다네.
식(識)이 다섯 가지와 함께 하여
분별하는 견(見)은 채색함과 같네.
이는 참 법의 훈습이라 하나
있는 바 모여 변화로 되었네.
이는 제불(諸佛)의 근본이요
나머지는 응화불(應化佛)이라네.
마음이 가견(可見)에 어리석으니
가견은 마음속에 없는 것이네.
몸과 살림살이와 주지함은
바로 아리야(阿梨耶)에서 나타난 것이네.
심(心)과 의(意)와 의식과
실체와 다섯 가지 법이며
두 가지 무아(無我)가 청정함은
불·여래의 말씀한 것이네.
허망한 각(覺)의 경계도 아니요
성문도 또한 그러하네
이는 속 몸의 경계이니
불·여래께서는 그를 말하네.
길고 짧은 것들이 상대하여
피차가 서로 의지하여 나기에
유(有)는 능히 무(無)를 이루고
무는 능히 유를 이루며
또는 미진(微塵)을 분별하나
색(色)의 자체는 분별하지 아니하네.
다만 이 마음이라 말하여도
사견(邪見)은 능히 깨끗하지 못하리.
이 가운데엔 분별이 공했고
불공(不空)도 또한 이와 같다네.
유무(有無)는 다만 분별인 것이니
말할 법엔 이와 같은 것이 없다네.
공덕이 미진(微塵)과 합했다 하여
어리석은 이는 색(色)으로 분별하네.
낱낱 미진(微塵)은 없으니
그러므로 뜻이 없는 것이네.
자심에서 형상을 보고
중생은 밖에 있다고 보네.
밖에는 가견(可見)의 법이 없으니
그러므로 이러한 뜻이 없느니라.
마음은 털 바퀴와 환상과
꿈과 건달바성과 같네.
불 바퀴와 새 짐승이 물에 애착함은
실로 없는데도 사람은 보지만,
상(常)과 무상(無常)과 1과
2와 또한 2 아닌 것을
끝없는 허물에 묶인 바로서
어리석은 이는 미혹해서 분별하네.
나는 3승을 말하지 않고
다만 일승을 말한 것은
중생을 포섭하기 위함이니,
그러므로 일승을 말했노라.
해탈에는 세 가지가 있거니와
또한 법무아(法無我)도 말했노라.
평등한 지혜와 번뇌는
해탈에 의해서 분별함이네.
또한 물 속의 나무가
물결에 표류(漂流)함과 같이
이와 같은 어리석은 성문은
모든 상(相)에 표탕(漂蕩)하기에,
그는 구경처(究竟處)가 없으며
또한 환생(還生)하질 아니하네.
적멸(寂滅) 삼매를 얻어서
한량없는 겁(劫) 동안 깨어나지 못하니,
이는 성문의 정(定)이요
나와 보살의 정(定)은 아니다.
모든 수번뇌(隨煩惱)는 떠났지만
훈습 번뇌에 속박하여
삼매락(樂)의 경계에 취(醉)해서
저 무루계(無漏界)에 머무르네.
세간에 술 취(醉)한 사람이
술기운이 없어진 후에 깨어나듯이
저 사람도 그러한 후에
나의 불법신체(佛法身體)를 얻으리.
코끼리가 깊은 진흙에 빠져서
몸이 동서(東西)로 동요하듯이
이와 같이 삼매에 취(醉)한
성문이 빠진 것도 그와 같다네.
'분별을 떠나라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분별을 떠나라. (0) | 2018.07.08 |
---|---|
[스크랩] 분별을 떠나라. (0) | 2018.07.01 |
[스크랩] 분별을 떠나라. (0) | 2018.07.01 |
[스크랩] 분별을 떠나라. (0) | 2018.06.24 |
[스크랩] 분별을 떠나라. - 아주 중요 (0) | 2018.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