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修行助道法
普詣十方諸世界호대 而於方處無所取하며
嚴淨國土悉無餘호대 亦不曾生淨分別이로다
시방의 모든 세계 두루 나아가
그러나 어느 지방 취함이 없고
국토를 장엄하여 남김없지만
깨끗하다는 분별을 내지 아니하네
*
수행조도법(修行助道法) :부처님 조도(助道)의 법을 닦다
*
보예시방제세계(普詣十方諸世界)호대 : 시방 모든 세계에 널리 나아가되
이어방처무소취(而於方處無所取)하며: 그 방처에서 취하는 바가 없으며. 시방세계가 방처다.
스님들이 공찰에서 소임을 살면 4년마다 임기가 한 번씩 바뀐다.
그러면 언제든지 내놓고 떠날 생각을 하고 살아야 되는데, 여러 가지 신도조직이라든지 사찰 일에 공을 들이고 마음을 쓰고 심혈을 기울여서 절을 잘 가꾸다 보면 그새 때가 묻는다.
공은 공이지만 어떻게 보면 자기에게는 때다.
때가 묻으면 떠나기 싫은 것이다.
그래서 비구 비구니 할 것 없이 문제가 많이 일어난다.
그런 문제는 비구들 사이에서 좀 더 많이 일어나고 비구니 사회에서 일어나면 더 독하다.
지금 부산에도 큰 절이 하나 해결이 안 된 상태에서 그런 문제가 있고, 그런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아프다.
취하는 바가 없어야 되는데 말처럼 쉽지 않은 모양이다.
어느 큰 절에도 그런 문제가 생기고 있는데, 곳곳에 그런 역사가 무수히 벌어진다.
엄정국토실무여(嚴淨國土悉無餘)호대 : 국토를 엄정히 해서 남음이 없게 하되. 깨끗이 장엄한다. 청정하게 장엄한다.
역불증생정분별(亦不曾生淨分別)이로다: 또한 일찍이 엄정하게 청정하게 장엄했다고 하는 분별을 내지 않는다. 자기가 공을 많이 들였어도 공을 들였다 하는 생각을 안 낼 수만 있으면 오죽 좋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그 공은 진짜 얼마나 크겠는가.
그런데 중생인 이상 공이 들어가고 자기의 피땀이 들어가다 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인가보다. 내가 전에 큰 절의 주지를 두 번이나 한 사람이 그런 일에 휘말려서 ‘아유 그거 뭐 골치 아픈데 내놓지’ 이 한마디를 했다가 혼이 났다.
‘무비스님이 절 내놓으라고 하더라’고 했다는 것이다.
본래 공찰이고 자기가 지은 절도 아닌 역사가 1300년이나 된 절인데, 나는 본인 좋으라고 편안하게 살자고 ‘그거 골치아프게 왜 하느냐’고 했던 말이 섭섭했던 모양이다.
오뉴월 핫바지도 벗으라면 섭섭하다고 한다. 오뉴월에 겨울 핫바지는 얼른 벗어야 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벗으려면 섭섭하다고 하니 하물며 다른 공 들인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것도 또 그나름대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한다.
30, 力과 無所畏
衆生是處若非處와 及以諸業感報別이여
隨順思惟入佛力하야 於此一切悉了知로다
一切世間種種性과 種種所行住三有와
利根及與中下根이여 如是一切咸觀察이로다
淨與不淨種種解와 勝劣及中悉明見하며
一切衆生至處行과 三有相續皆能說이로다
禪定解脫諸三昧와 染淨因起各不同과
及以先世苦樂殊를 淨修佛力咸能見이로다
衆生業惑續諸趣와 斷此諸趣得寂滅과
種種漏法永不生과 幷其習種悉了知로다
如來煩惱皆除盡하사 大智光明照於世하시니
菩薩於佛十力中에 雖未證得亦無疑로다
중생의 옳은 곳과 그른 곳이며
업(業) 지어 과보(果報)받기 다 다른 것을
생각하고 부처님 힘 속에 들어가
여기서 온갖 것을 모두 다 아네
온갖 세계 가지가지 성품이 달라
여러 가지 행으로 삼계에 나며
근성의 상품(上品)임과 중품(中品) 하품(下品)과
이러하게 온갖 것 다 관찰하며
깨끗하고 부정하고 모든 이해와
승(勝)하고 열(劣)한 것을 분명히 보고
온갖 중생 행으로 이르러 갈 곳
삼유(三有)가 계속함을 능히 말하며
선정과 해탈이며 모든 삼매의
물들고 깨끗한 인(因) 각각 다르고
전세(前世)의 고(苦)와 낙(樂) 같지 않음을
부처님 힘을 닦아 능히 다 보고
중생의 혹(惑)과 업으로 육취(六趣)가 계속하고
끊으면 모든 갈래 고요해져서
가지가지 번뇌가 나지 않으며
습기와 종자 번뇌 다 아느니라
여래는 모든 번뇌 다 제멸하여
지혜 광명 세상에 밝게 비추니
보살이 부처님의 열 가지 힘에
증득하지 못했으나 의심은 없네
*
력(力)과 무소외(無所畏): 부처님의 힘과 무소외(無所畏)를 닦다
*
십력(十力)으로 부처님을 표현한다. 자주 등장하는 이야기다.
*
중생시처약비처(衆生是處若非處)와 :시처 도리에 맞는 것이고 비처는 도리에 안맞는 것이다.
앉을 자리 설 자리를 아는 것이 십력 가운데 1번이다.
떠나야 할 것인가 눌러 붙어야 할 자리인가 부처님은 그거 잘 아신다고 딱 여기 첫구절에 써놓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한 나무 밑에서 세 밤을 자지 말고 두 밤만 자고 떠나라고 하였다.
나무 밑이라도 세 밤만 지나면 벌써 착(着)이 생긴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의 심정을 속속들이 꿰뚫고 계셨기 때문에 그 말씀이 정말 이치에 맞고 구구절절이 옳은 말씀이다.
급이제업감보별(及以諸業感報別)이여 : 중생의 여러가지 업과 그 업에 의해서 보를 받는 것을 감득한다. 감(感)은 감득한다. 내가 받는 것이다.
보를 받는 것이 각각 다른 것도 부처님은 환하게 안다.
우리는 자기가 지은 것도 모르고 자기가 지어서 받는 것도 모른다.
법문 할 때는 환하게 아는 것처럼 하면서 정작 자기 앞에 불똥이 떨어지면 하나도 몰라서 캄캄하다. ‘내가 이렇게 해서 이러한 과보를 받는구나’ 하지않고 남을 원망한다.
그런데 부처님의 두 번째 힘은 그러한 사실을 환하게 아는 것이다.
부처님도 정업난면(定業難免)이라고 해서 결정된 업은 면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업을 이겨내는 보살이 있다. 이 보살은 멸정업진언을 한다. 결정된 업도 소멸하는 지장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의 진언은 멸업장진언이다. 그냥 업장을 멸하는 진언이다.
그런데 지장보살은 멸정업진언이다. 대단하다.
그래서 지장기도는 아주 뜨거운 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고 불러대야 업장이 술술 더 잘 녹는다. 그런 것이 딱 매칭이 된다.
백중에 맞춰서 하니까 지장기도는 꼭 여름에 더울 때 하는데 신도들도 그걸 좋아한다.
땀 뻘뻘 흘리면서 지장보살을 한 두시간 부르고 나면 아주 속이 시원해 한다. 업장이 어느 정도 소멸되니까 그런 것이다.
수순사유입불력(隨順思惟入佛力)하야 : 그런 도리를 전부 수순해서 사유해서 부처님의 힘에 들어간다.
시처(是處)와 비처(非處), 도리와 도리아닌 것, 이치와 이치가 아닌 것을 아는 것이 부처님의 힘이고, 무슨 업을 지어서 무슨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각각 다름을 아는 것도 부처님의 힘이다.
음식을 똑같이 먹었는데 소화하는 것도 다르고 그사람의 표현도 다르다.
소위 사음수성독(蛇飮水成毒)하고 우음수성유(牛飮水成乳)라고 하였다.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을 이루고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기가막힌 문장이다. 이치에 딱 떨어진다.
똑같은 물인데도 뱀이 물을 마시면 독이 되지만 소가 물을 마시면 우유가 된다. 그러한 것들을 다 아는 것도 부처님의 열 가지 힘에 해당된다.
어차일체실요지(於此一切悉了知)로다: 어차(於此)는 보리심을 발한 데서라는 뜻이다. 지금 초발심공덕품을 공부하고 있으니까 처음 보리심을 발한 여기에서 그 일체를 다 요지한다는 뜻이다. 부처님이 아는 열 가지 힘을 다 요지한다.
*
일체세간종종성(一切世間種種性)과 : 일체 세간의 가지가지 성품과
종종소행주삼유(種種所行住三有)와: 가지 가지 행한 바로써 삼유에 머문 것과, 삼유는 욕계, 색계, 무색계라고 하는 삼계를 말한다.
이근급여중하근(利根及與中下根)이여 :영리한 근기 중간근기 하근기 소질 따라서 다 그런 근기가 있다.
공부에는 하근기인데 노는 데는 상근기가 있고, 노는 데는 하근기인데 또 공부에는 상근기가 있고 여러 가지다. 또 다른 일에도 예를 들어서 밭일을 한다든지 다른 사중 일을 한다든지 봉사활동을 한다든지 하는 데에도 상중하 근기가 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니까 어느 한가지를 잘 못하는 사람을 보면 ‘아 저사람은 여기에서 잘못하는 걸 보니까 다른 데는 아주 뛰어난 부분이 있겠구나’ 하는 것도 알아야 된다.
요즘 자녀들 교육을 하는데도 자녀들이 진정 무엇에 소질이 있어서 평생을 해도 싫증안내고 잘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는지 제대로 알아서 찾아주는 것이 중요하다.
부모들이 자기가 못다한 한을 푼다고 아무 소질도 없는 아이를 피아노학원에 계속 보내서 결국 피아노로도 성공하지 못하고 돈만 쓴다거나, 그림을 그리라고 미술학원에 보내서 그림엔 성공도 못하고 시간을 다 보낸다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여시일체함관찰(如是一切咸觀察)이로다: 이와같은 일체를 다 관찰함이로다.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스님들이 이런 대목을 가지고 사찰에서 법문하면 좋은 포교 소재가 된다. 이런 구절을 큼직하게 뽑아서 거기에 부연 설명을 하면 좋다. 근기를 아는 것도 부처님의 열 가지 힘에 들어간다.
*
정여부정종종해(淨與不淨種種解)와: 정과 부정 종종해, 청정한 것, 청정하지 못한 것, 중생들 의 업이 청정한 것인가 청정하지 못한 것인가 하는 것과 가지가지 이해와
승열급중실명견(勝劣及中悉明見)하며: 그 이해 가운데 수승한 것, 하열한 것 그리고 중간가는 것. 모든 사람들이 업을 짓는 것도 역시 그렇고, 분야분야에 따라서 수승한 인연도 있고, 하열한 면도 있고 중간가는 사람도 있다.
승열중은 상중하처럼 삼단계인 셈인데 제대로 이것을 세분하면 9품이 있다.
하지하 하지중 하지상 중지하 중지중 중지상 상지하 상지중 상지상 이렇게 9품으로 나누는 것이 좀더 세분화된 것이다.물론 그것을 가지고도 사실은 다 만족하게 나눠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을 실명견하며
일체중생지처행(一切衆生至處行)과 :중생이 죽어나서 어디가서 태어나는가 하는 것과
삼유상속개능설(三有相續皆能說)이로다 : 욕계 색계 무색계에 상수하는 것을 다 능히 설함이로다. 삼유가 여러 번 나온다.
부처님의 힘가운데 이것도 들어간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면 내생의 내 인생도 다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법은 오늘 금생에 열심히 지은 대로 내생이 귀착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밖에 믿을 것이 없다.
그것이 정법이어서 그것을 믿고 우리가 산다.
그래서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인댄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라’고 하였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짓는 바가 바로 그것이니라’ 라는 말이다.
우리가 그래도 전생에 이만한 인연이 있었기에 금생에 와서 이렇게 공부를 한다.
전생에 인연이 없었으면 이런 공부는 어림도 없다.
이런 공부처가 이웃에 있어서 소문을 많이 듣고 잘 알아도 공부하러 오지 않는다.
한 두번 왔다가 또 안오는 사람도 있다. 멀리 있어도 열심히 오는 분들도 있다.
그래서 오시는 분들에게 내가 늘 마음으로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모른다.
여러분 앞에 대놓고는 말 안해도 다른 자리에서는 내가 너무 고맙게 생각한다.
*
선정해탈제삼매(禪定解脫諸三昧)와 : 선정 해탈 삼매 이것도 부처님의 열 가지 힘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염정인기각부동(染淨因起各不同)과: 염,정,인으로 일어나는 것이 각각 부동하다.
이 역시 중생들의 업을 말한다. 물든 업을 지었으면 물든 작용이 일어나고. 청정한 업을 지었으면 청정한 것이 씨앗이 되어서 청정한 현상을 일으킨다. 그것이 각각 부동한데 부처님은 그것을 환히 꿰뚫고 있다. 우리는 그저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인댄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라고 한다.
전생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우리가 받고 있는 것, 지금 하고 있는 것이 전생에 우리가 지은 업이다. 이것은 누구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딱 맞는 이치다.
부처님이 아셔서 우리에게 가르쳐줬지만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모든 인생사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부처님은 아실 뿐이다. 그걸 듣고 우리가 가만히 혼자 사유해 보면 아주 맞는 말씀이다.
염의 인, 정의 인으로 일어나는 것이 각각 부동하다는 것도 부처님의 열가지 힘이다.
급이선세고락수(及以先世苦樂殊)를 : 먼저 세상에서 고통받고 살았는가 낙을 받고 살았는가 이것이 다른 것을
정수불력함능경(淨修佛力咸能見)이로다: 청정하게 부처님의 힘, 불력을 닦아서 다 능히 보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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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업혹속제취(衆生業惑續諸趣)와 : 중생의 업혹, 업의 미혹으로써 제취에 계속되는 것과.
요것도 십력가운데 또 들어간다. 제취나 제유는 언제나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다.
이런 곳에는 죽어서만 가는 것이 아니다. 죽어서도 가겠지만 그보다도 눈 번히 뜨고 바로 오늘 하루에도, 금생에도 우리가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서 그 업이 계속된다.
단차제취득적멸(斷此諸趣得寂滅)과: 이것은 반대로 끊는 것이다. 이 모든 갈래를 전부 끊어서 적멸을 얻는 것과
종종누법영불생(種種漏法永不生)과 : 종종법과 영불생과 두 가지로 봐야한다. 누법은 생법이고 영불생은 생멸이 없는 법이다.
병기습종실요지(幷其習種悉了知)로다: 그리고 아울러 그 습기와 종자.
우리가 익힌 습기가 종자가 된다. 종자는 싹을 틔우는데 그것이 현행이다.
습기 종자 현행, 습기 종자 현행이 계속 뺑뺑이 돈다.
우리가 익힌 것이 종자가 되고 종자는 현행으로 밖으로 나온다.
농사를 지어보면 그런 것을 환히 안다.
우리가 어떻게 가꾸었느냐에 따라서 종자가 실할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 종자에 따라서 현행이 달라진다. 싹을 틔우는 것이 달라진다.
동물도 종돈 종마 종우 다 있다.
소도 종자소 돼지도 종자돼지 말도 종자말 왜 그렇게 골라서 하겠는가?
종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종마 종우 종돈을 만들려면 아주 잘 키운다. 잘 키우는 것이 바로 습이다.
잘 키우면 좋은 새끼가 나오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현행이다.
습기 종자 현행 이것이 수없이 반복이 되는 것이 우리 삶의 현상이다.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면 거기 따라서 또 공부한 만치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실요지 하는 것도 부처님의 십력가운데 하나다.
*
여래번뇌개제진(如來煩惱皆除盡)하사 : 여래께서 번뇌를 다 제하사
대지광명조어세(大智光明照於世)하시니: 큰 지혜 광명이 세상을 환히 비추시니, 대지 광명이라는 말은 참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초파일에 등을 밝혀서 불을 켜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징하는 것이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빛이다.
그래서 오늘날 전깃불이 발달했음에도 기어이 그 의미를 되살리려고 꾸역꾸역 등을 켠다.
그 의미를 우리는 늘 되새겨서 거기 맞게 살아야 된다.
보살어불십력중(菩薩於佛十力中)에 : 보살이 부처님의 십력 가운데 앞에서 설명한 여러가지 역가운데
수미증득역무의(雖未證得亦無疑)로다: 비록 증득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거기에 대해서 의심은 없다.
아무리 발심을 철저히 한 보살이라 하더라도 보살은 그것을 100퍼센트 자기 살림살이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래도 의심하지는 않는다.
우리도 이렇게 공부하다 보니까 그런 이치에 대해서 의심은 없고 환히 알수 있다.
이러한 내용이다.
(박수소리)
하강례
이 아름다운 사람들
이번 학기 서울 동국대에서 강의를 하시는 회장스님은 큰스님께 올릴 스승의 날 행사를 맞추기 위해서 휴강을 하고 내려오셨다고 했다.
공부는 일찍 끝냈지만, 노래를 부르는 것 말고는 특별하게 준비한 것이 없는 스승의 날 행사가 조금 밋밋하게 시작되려고 했는데 ‘스승의 은혜’를 선창하신 스님이 하도 간곡하게 염불식으로 노래를 부르셔서 따라부르는 스님들이 모두 웃음바다가 되었고 행사의 열기가 높아졌다.
재무스님께서 큰스님께 하얀 장미꽃이 가득한 바구니를 올리셨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촘촘하게 순결하게 담겨있었다.
기념선물을 부회장스님께서 올리셨다.
“광명각품에 보면 애자라는 표현과 정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애자나 정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님이 항상 우리를 위해서 존재하시는 것 같고 우리를 위해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것 같고 우리를 위해서 끝임없는 시간을 책상앞에 앉아계시고 강단에 계신 것 같습니다. 너무 감사드립니다 큰스님”
하고 회장스님께서 큰스님께 한 말씀을 청하셨다.
“저야 뭐 평소에 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저 미안할 뿐입니다. 오늘 이런 시간이 있기까지 늘 감사드리지만 여러 스님들이 불원천리하고 이렇게 바쁜데도 동참해 주셔서 이런 법회가 이루어졌습니다. 그 다음에 또 잊어서는 안될 분들이 한 20여분 가까이 되는 봉사하시는 분들입니다. 늘 우리가 설엔가 여러가지 선물도 하고 그렇지만 그거 선물 한 두 번으로 은혜를 다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공덕을 봉사하시는 분들에게 돌립니다. 박수 한 번 칩시다. 고맙습니다.”
큰스님께서 봉사하시는 분들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참 이런 법회가 세상에 있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해요. 사실은. 여기가 무슨 자격증이 부여됩니까? 뭐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순수한 여러분의 신심으로 봉사하시는 분이나 여러 스님들이나 그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이 법회가 지금 벌써 화엄경만이 4년이고 법화경 까지 하면 6년이 넘었어요. 아무튼 꾸준히 지속되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20년이고 30년이고 계속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 공부가 너무 적어서 조금 섭섭하기는 합니다만은 일이 또 그렇게 되었으니 그렇게 알고 차담들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셨다.
회장스님이 문수선원 공부 시작이래 스님들이 제일 적게 와서 걱정했는데 지금보니 구름처럼 모여왔다고 하셨다. 구름같이 많으신 스님들이 선 채로 박수를 오래도록 치셨다.
그 모습들이 아름답고 깊고 정겨웠다. 밋밋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의 가슴에 화엄의 법륜이 새겨져 빛났다.
그물속에 찬란한 빛
서로를 비추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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