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마타, 위빠사나 그리고 바라밀 >
우리는 깨달음 얻고자 이 수행을 하는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에서 부처님은 보편적으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을 말씀하셨다.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같이 가는 것이다. 일예를 들면, 관념을 통해서 사물의 실체를 보듯이 관념이 없으면 우리는 사물의 실체를 볼 수가 없다. 이 몸을 통해서 몸이 가지고 있는 느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몸이라고 우리는 말을 해야 하지 않는가? 몸이라고 하는 이 물질은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관념이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의 과정을 거쳐서 간다. 그러면 바로 깨달음의 과정으로 간다는 것이 팔정도(八正道)로서 제시되어 있다.
그렇다고 보면, 사마타와 위빠사나만 있는 것인가? 그 이전에 우리에게는 또 한 단계의 과정이 있다. 이 과정을 수행자인 우리는 이외로 생략하고 간과하는 수가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 이전의 전 단계에서, 아니면 이것과 함께 병행해서 가야할 길, 이것이 바로 바라밀이다. 바라밀이 없으면, 바라밀이 전제되지 않으면 수행이 발전할 수 없다.
지금까지 우리는 통상적으로 바르게 살아가야한다 하는 길을, 그리고 수행을 한다는 사실을,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두 가지로 규명했는데 이제부터는 세 가지로 규정해보기로 하자.
바라밀을 쌓는다, 그 바라밀은 원래 보디싸트바, 보살(菩薩)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 선업을 쌓는 것을 말한다. 바라밀이란 의미는 사실 수행이 배제된 의미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열반에 들어가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바라밀은 부처가 되기 위해서 오직 바라밀을 쌓고 보살행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바라밀은 아라한이 되는 것 하고는 상관이 없다. 하지만 아라한이 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이 바라밀은 필요하다.
그러므로 바라밀의 본래 의미는 보살이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보살행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넓은 의미로 보면 아라한이 되기 위해서도 함께 쌓아야 한다. 왜 이 말이 가능한가하면 부처가 부처이면서 한편으로는 아라한이기 때문이다. 부처가 보살로서 부처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보살행을 중요시 하는 것이다. 부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보살행을 해서, 바라밀 공덕의 과보로 되었기 때문이다. 아라한도 마찬가지다.
바라밀은 구체적으로, 첫째 보시, 그리고 둘째로는 지계, 셋째 출가를 말한다. 그래서 출가는 넓은 의미로 선원에 와서 8계를 지키고, 집중 수행을 하는 것을 포함한다. 꼭 머리를 깎아야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출가는 출세간의 생활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 상좌 불교 권에서는 일시 출가자라고 해서 도노바 비구가 있다. 지키기 어려운 것을 지키는 자, 계정혜(戒定慧) 3학을 지키는 자라고 해서 하루, 이틀 삼일, 일주일의 상관없이 계율을 받고 수행을 한다. 그래서 더욱 청정해진다. 재가자가 일정한 기간에 선원에 와서 머리를 깎고 지키기 어려운 계정혜 3학을 지키는 것이다.
그래서 출가의 의미는 매우 포괄적이다. 이 때 여기서 말하는 바라밀의 출가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것과는 상관 없다. 그저 선원에 와서 계율을 지키면서 마음을 청정히 하는 것을 뜻할 수도 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지혜를 얻는 것이다. 그 지혜는 이미 말씀드린 낮은 단계의 지혜에서부터 높은 단계의 아라한의 지혜까지를 말한다. 여기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지혜를 말하지 않는다. 일상의 삶 속에서 현명하게 사는 방법, 그것을 의미한다. 또 정직, 인내, 진실, 단원, 자비, 평정, 이런 것들을 바라밀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한다.
자, 그렇다고 본다면, 수행자의 자격을 3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바라밀을 쌓는 수행자도 있을 것이고 사마타 수행을 하는 수행자도 있을 것이며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로서 선업의 공덕으로서 선택되어지는 것이지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바꾸어 이야기 하면 갓바위 가서 기도하는 것도 일종의 바라밀 공덕이라고 본다면 그런 차원에서도 하나의 수행이라고 존중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까지도 우리는 수행이라고 하자는 것이다. 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그 노력이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단계에서는 그 사람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절대절명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사명감, 목표,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바라밀이란 것을, 그 차원에서, 수행과는 어긋나지만 하나의 행위로서 수용을 하자는 것이다. 바꾸어 이야기 하면 염불을 외운다고 하는 경우,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그것을 보고, '무엇 하는 일이야' 하며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지 말자는 이야기다. 천배, 만배 절하는 사람들을 보고, ;그러면 방아깨비도 부처 되겠네' 하지 말자는 것이다. 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그 한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다만 내가 지혜가 열리면 열린 대로 행위를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지혜가 나서 부적을 쓴다’, ‘내가 지혜가 나서 자식의 합격을 위해 어디에 엿을 붙였다’. 그것은 자기 수준의 지혜이고 오히려 필요해서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일상사에서 그것이 악업이 아닌 어떤 선업의 과정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우리는 배척하지 말고 바라밀로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두고 보자는 것이다.
'묘원법사님(한국명상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일상생활에서의 위빠사나 수행...묘원 (0) | 2019.02.17 |
---|---|
[스크랩] 바라밀 공덕의 당위성 ...묘원 (0) | 2019.02.17 |
[스크랩] 깨달음은 순간의 정신적 상태...묘원 (0) | 2019.02.17 |
[스크랩] 네 가지에 대한 알아차림 ...묘원 (0) | 2019.02.17 |
[스크랩] 대념처경이란...묘원 (0) | 2019.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