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스크랩] 대지도론 263. ★ 공의 모습에 집착할 때는 무상문(無相門)을 배워야 한다.

수선님 2019. 3. 3. 12:00

[문] 중생이 공하고 법이 공하지 않다면 이는 믿을 수 있겠지만, 법의 자상이 공하다 함은 믿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법의 자상이 공하다면 생도 멸도 없을 것이요, 생멸이 없다면 죄도 복도 없을 것이요,

죄와 복이 없다면 어찌 도를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답] 법의 공함이 있는 까닭에 죄와 복이 있다.

만일 법의 공함이 없다면 죄와 복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법이 실로 자성이 있다면 가히 무너뜨릴 수 없으며,

성품과 모습이 인연을 따라 생기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인연을 따라 생긴 것이라면 이것은 만들어진 것[作法]이니,

만일 법성이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는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법성이 지을 수 있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옳지 않다.

성품이란 지어지지 않는 법을 이르는 말이니, 인연을 기다려서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법에는 자성이 있고, 자성이 있다면 곧 날 것이 없으리니, 성품이 먼저부터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남이 없으면 멸함도 없고, 남과 멸함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고,

죄와 복이 없기 때문에 도를 배울 필요도 없다.

 

만일 중생에게 참성품이 있다면 능히 해칠 이도 없고 이롭게 할 수도 없나니, 자성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이라면 은혜도 의리도 알지 못하고, 업도 과보도 파괴한다.

 

법의 공함 가운데에는 법이 공하다는 모습도 없거늘

그대는 법의 공함을 얻으려는 마음에 집착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다.

 

이 법공은 부처님들께서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애욕의 매듭을 끊고 삿된 소견을 제해 주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777 / 2071] 쪽
  

또한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은 능히 모든 괴로움을 멸하나니, 이는 모든 성인들의 진실한 수행처이다.

만일 이 법공에 성품이 있다면, 일체법의 공을 말할 때 어떻게 자신마저도 공해질 수 있겠는가.

 

만일 법공의 성품이 없는 것이라면 그대는 무엇을 힐난하려는가?

 

이 두 가지 공으로써 모든 법의 공함을 관찰하여 마음이 모든 법을 여읠 수 있고,

세간이 거짓되어 허깨비 같은 줄도 알게 된다.

 

이렇게 공을 관찰하고서 이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을 집착한다면

이러한 인연으로 교만 등 번뇌를 일으키고는 말하기를 “나는 능히 모든 법의 실상을 아노라” 한다.

 

이럴 때에는 무상문(無相門)을 배워야 하나니, 공의 모습을 취하려는 마음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만일 무상(無相) 가운데에서 희론을 일으키면 분별하여 지은 바 있기를 원해 이 무상에 집착하게 된다.

이때는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착각했구나. 모든 법은 공하고 모습도 없거늘 어찌하여 모습을 얻고 모습에 집착되어 희론을 하는가.

이럴 때엔 공과 모습 없음을 따라 몸․입․뜻으로 짓는 바가 있게 하지 말아야 한다.

지음 없는 모습을 관찰하여 삼독을 멸하고, 몸․입․못의 업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며,

삼계 안에 태어나기를 구하지 않아야 하리라.’

 

이렇게 생각할 때에 도리어 지음 없는 해탈문에 들어가나니,

이 3해탈문은 마하연 가운데서는 동일한 법이건만 수행의 인연에 따라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법이 공하다고 관찰함이 공이다.

공 가운데서는 모습을 취할 수 없나니, 이때 공은 모습 없음이라 바뀌어 불린다.

 

모습 없음에는 어떤 작위(作爲)나 삼계에 태어날 일이 있을 수 없나니,

이때 모습 없음은 작위 없음[無作]이라 바뀌어 불린다.

 

비유하건대 성에 세 문이 있는데 한 사람이 동시에 세 문으로 들어갈 수는 없어서 들어가려면 한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과 같다.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이 열반의 성인데, 그 성에 공ㆍ모습 없음․지음 없음이라는 세 개의 문이 있는 것이다.

  
[778 / 2071] 쪽

어떤 사람이 공의 문으로 들어가서 이 공을 얻거나 모습에 집착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곧장 들어가 일을 마치기 때문에 나머지 두 문이 필요치 않다.

 

그러나 이 공의 문으로 들어가서 모습을 취하여 이 공을 얻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문이라 할 수 없고,

트인 길이 도리어 막힌다.

 

만일 공의 모습을 제하면 이때에 모습 없음의 문을 통해 들어가게 된다.

 

만일 모습 없음의 모습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어 희론을 일으키면

이때에 무상의 모습을 제하고 지음 없음의 문[無作門]으로 들어가게 된다.

 

아비담의 이치에서는 이 공의 해탈문은 고제(苦諦)를 반연하고 5중을 포섭한다.

모습 없음의 해탈문은 한 법을 반연하나니, 이른바 수효와 반연의 다함이다.

지음 없음의 해탈문은 세 가지 진리[三諦]를 반연하고 5중을 포섭한다.

 

마하연의 이치에서는 이 3해탈문은 모든 법의 실상을 반연하며,

이 3해탈문으로써 세간이 곧 열반이라고 관찰한다.

 

왜냐하면 열반은 공ㆍ모습 없음․지음 없음이며, 세간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대지도론 263. ★ 공의 모습에 집착할 때는 무상문(無相門)을 배워야 한다.

출처 : 출리심 보리심 공
글쓴이 : - 해탈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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