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배사 이하부터 여섯 가지 법문은 모두 무너지지 않는 법(不壞法)에 속한다. 불괴법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관찰하는 선(觀禪)이고 둘째는 단련하는 선(鍊禪)이며 셋째는 훈숙하는 선(熏禪)이고 넷째는 정교하게 가다듬는 선(修禪)이다. 팔배사·팔승처·십일체처의 세 가지 문은 모두 관선에 속하고 구차제정은 언선이며 사자분신삼매는 훈선이고 초월삼매는 수선이다.
팔배사란 ① 내유색상외관색(內有色相外觀色), ② 내무색상외관색(內無色相外觀色), ③ 정배사신작증(淨背捨身作證), ④ 허공처(虛空處)배사, ⑤ 식처(識處)배사, ⑥ 불용처(不用處)배사, ⑦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배사, ⑧ 멸수상(滅受想)배사이다.
배사에서 '배(背)'란 정결한 오욕(五欲)을 등지는 것이고, '사(捨)'란 집착하는 마음을 떨쳐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사를 이루면 해탈을 얻는다. 욕계의 색· 성· 향· 미· 촉은 거칠고 피곤하게 하는 법인데 이 법에 탐착하여 삼악도에 빠지는 것을 깨끗하지 않은 오욕(不淨五欲)이라 하고, 욕계정·사선·사공정에 맛들여 집착을 내는 것을 깨끗한 오욕(淨潔五欲)이라고 한다. 이 배사법은 능히 정결한 오욕을 등지고 집착심을 떨쳐내는 것이다.
첫 번째 배사를 설명하겠다. 안팎의 색을 무너뜨리지 않고 안팎의 색의 모습이 소멸되지도 않은 채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마음(不淨心)으로 색을 관찰하는 것을 초배사(初背捨)라고 한다. 왜 그런가. 중생에게는 애행(愛行)과 견행(見行)의 두 가지 결박하고 부리는 번뇌가 있다. 애착이 많은 사람은 즐거움에 집착하여 대부분 밖의 번뇌에 속박되므로 바깥 몸이 부정하다고 관함을 닦아야 한다. 소견이 많은 사람은 대부분 자아가 있다는 견해(身見)에 집착하여 안의 번뇌에 묶이기 때문에 안몸이 부정하다고 관함을 닦아야 한다. 그러므로 배사관을 닦는 것이다.
번뇌는 대부분 안에서 먼저 일어나므로 안을 관찰한 뒤에 부정하다는 마음으로 밖을 관찰한다. 어떻게 안을 관찰하는가· 수행자가 몸을 단정하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엄지발가락을 잘 관찰해 보면, 마치 콩과 같이 검게 불어나고 또 누에와 같은 모양으로 생각된다. 이런 모양이 되는 것을 보고 나서는 다시 생각이 불어나 아기배(梨豆)만해지고 또 계란만해진다. 이어서 모든 발가락과 발바닥까지 보고, 그리고 나서는 오른쪽 발도 이와 같이 관찰한다. 이어서 차례로 온몸을 두루 보는데 사지와 배와 등과 모든 마디와 모든 구멍에 이르기까지 곳곳이 불어나는 것을 본다. 머리에서부터 발에 이르고 발에서부터 머리에 이르며 온몸을 두루 관찰하는데, 다만 부르터서 불어난 것만을 보니 마음에 싫어함이 생긴다. 다음에 무너지는 모습을 본다. 썩어 문드러지고 피로 더럽혀지며 벌레와 고름이 흘러나오고, 배가 터져 모든 내장이 드러난다. 이와 함께 서른여섯 가지 부정물의 냄새나고 썩는 더러움을 보게 되면 마음에 싫어함이 생긴다. 그리하여 자기 몸을 보면 길가에 죽어 쓰러진 개와 다름이 없다.
밖으로 사랑하는 남녀의 몸을 관찰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러면 사랑할 수도 즐거워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이 구상(九想)의 방법과 같으나 다만 산상(散想)과 소상(燒想)의 두 가지가 없다는 것이 다른 뿐이다.
이 관을 닦을 때에 욕계의 번뇌가 아직 다 그치지 않았다면 이 관에 오래 머물러 싫어하는 마음이 완전히 익게 하여 탐애심을 여의어야 한다. 그런 뒤에 더 나아가 백골관을 닦아야 한다. 일심으로 고요하고 안정하여 미간을 잘 관찰하면서 피부와 살이 찢어져서 열리는 것을 상상한다. 그러면 백골이 드러나는데 손톱크기만한 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차차 마음을 위로 향하면서 살가죽을 열면 이마뼈가 보이고 머리카락 밑의 뼈가 보인다. 마침내 정수리뼈의 피부와 살을 벗겨내는데 이르면 해골이 완전히 드러난다.
다시 생각을 머리에서부터 아래로 내려 피부와 살을 모두 마음을 따라 벗겨내면서 자츰 발에 이른다. 그러면 단지 뼈만 남은 사람이 마디와 마디가 서로 이어져서 단정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수행자가 이때 마음을 안정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이 뼈도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발가락뼈로 인하여 발뼈(足骨)가 지탱하고, 발뼈로 인하여 복사뼈(·骨)가 지탱하며, 복사뼈로 인하여 정강이뼈(·骨)가 지탱하고, 차례로 서로 의지하여 무릎뼈(·骨), 넓적다리뼈(·骨), 볼기뼈(·骨), 허리뼈(腰骨), 등뼈(脊骨), 갈비뼈(肋骨)에 이른다. 또한 등뼈로 인하여 위로는 목뼈(項骨)가 지탱되고 목뼈로 인하여 턱뼈( 骨)가 지탱되며 턱뼈로 인하여 치아가 지탱되고 그 위에 해골이 있게 된다. 또한 목뼈로 인하여 어깨뼈가 지탱되고 어깨뼈로 인하여 위팔뼈(臂骨) 아래팔뼈(腕骨) 손바닥뼈(掌骨) 손가락뼈(指骨)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서로 의지하면서 360개의 뼈마디가 있다. 이들을 하나하나 잘 살펴 큰 것과 작은 것, 단단한 것과 부드러운 것을 안다. 이 뼈들은 똑같이 서로 임시의 현상(假)에 의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니 이 가운데에는 주재하는 이도 없고 나도 없는데 어떻게 이곳에 자아가 있다는 견해(身見)가 생기겠는가.
들이쉬고 내어 쉬는 숨은 바람기운이지 몸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느낌(受)과 마음 내지 법을 관찰하면 모두 거짓된 것으로서 주재하는 이도 없고 자아도 없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관찰하고 나면 아견(我見)을 타파하고 오욕이 없어지게 된다. 이때에 다시 머리에서 발로, 발에서 머리로 몸을 따라 자세히 관찰하면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백골관(白骨觀)을 깊이 연마하면 힘줄과 뼈가 모두 다해 버려 뼈 빛이 흰 마노나 조가비와 같아진다. 이렇게 깊이 관찰하기를 쉬지 않으면 뼈 위에 흰 광채가 번쩍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양을 보고 나서 미간을 자세히 살펴보면, 또 빛나는 흰 광채가 모두 마음으로 향하는 것을 본다. 이때에 이 빛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다만 마음을 미간에 고정시킨다. 그리하여 아주 편안하게 뜻대로 마음이 머물 수 있으면 선근이 개발되어 미간에서 여덟 가지 색깔이 빛이 빙글빙글 돌아 나와 시방을 두루 비추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빛은 모두가 밝고 깨끗하다. 여덟 가지 빛이란 지(地)·수(水)·화(火)·풍(風)·청(靑)·황(黃)·적(赤)·백(白)색인데 이러한 색깔의 빛은 세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때는 마음이 안온하게 안정되어 기쁨과 즐거움이 한량없다.
다시 마음을 거두어 이마를 자세히 관찰하면서 마음을 대상 가운데 머물게 하면 또 여덟 가지 색의 빛이 돌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안정하여 머리카락 밑동과 정수리, 두 귓구멍, 눈썹 뼈, 눈뼈, 코와 입, 치아, 턱뼈, 목 앞 뼈와 목 뒤 뼈 등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차례로 관찰하면 삼백육십 개의 모든 골절에서 빛이 돌면서 나옴을 볼 수 있다. 온몸에서 빛을 발하여 일체를 비추는데 그 빛은 모두 밝고 깨끗하다. 이때 수행자는 선정의 마음 가운데 희지(喜支)와 낙지(樂支) 등 다섯 가지 특징(五支)이 모두 갖추어지니, 이것을 초배사를 증득한 모습이라고 한다.
안으로는 뼈만 남은 사람의 모습이 없어지지 않았으므로 '안에 색의 모습이 있다'고 한다. 밖으로 여덟 가지 빛과 욕계의 부정한 경계를 보므로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마음(不淨心)으로 바깥 색을 관찰한다'고 한다. 수행자가 안팎의 깨끗하지 않은 색을 보기 때문에 욕계를 등지고 버리지만 마음으로 기뻐하거나 즐거워하지 않는다. 여덟 가지 깨끗한 색을 보므로 초선은 무명에 덮여 있어 경계가 추하고 열등함을 아니 능히 버리고 마음이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정결한 오욕을 등지고(背)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捨)이라고 한다.
두 번째 배사는 안의 색상을 무너뜨려 없애고 바깥의 색상은 없애지 않은 채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바깥 색을 관찰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 배사 가운데서 뼈만 남은 사람이 빛을 내는 것이 완전히 온몸에 퍼지면 수행자는 2선의 내정지(內淨支)에 들어가고자 하여 안의 뼈만 남은 사람을 무너뜨려 없앤다. 그러나 여전히 바깥 백골의 깨끗하지 않은 모습을 관찰하기 때문에 부정심으로 바깥 색을 관찰한다고 한다.
수행자는 초배사가 깊어졌을 때(後心), 각(覺)과 관(觀)이 어지럽게 움직이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안몸의 뼈만 남은 사람을 자세히 관찰한다. 그것은 알맹이가 없어 텅 빈 채 가설된 것이며 안과 밖이 비고 서로 통하니 오로지 무너져 흩어지고 닳아 없어지는 모습만을 취하여 관한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그 뼈대가 점점 썩어 문드러지고 부서져서 마치 먼지처럼 흩어져 허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되니 안의 색은 보이지 않게 된다. 이때 다만 마음을 거두어 선정에 들어가 바깥의 광명과 부정한 대상에 반연하고 마음을 오로지 이 대상에만 두어 느낌과 관찰을 감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곧 안의 마음이 활연히 밝고 깨끗해지며 삼매에 바로 들어가 큰 기쁨이 함께 일어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여덟 가지 빛이 안의 깨끗함으로부터 나와서 시방을 밝게 비추는 것이 전보다 곱절로 뛰어나다.
이미 이 법을 증득했다면 곧 제2선이 헛되고 거짓되며 거칠고 열등함을 알아서 싫어하고 물리쳐서 집착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배사라고 하며, 또한 무루(無漏)의 제2선이라고 한다.
세 번째는 정배사(淨背捨)를 몸으로 증득하는 것이다. 깨끗함을 반연하기 때문에 '깨끗함'이라 하고, 온몸으로 즐거움을 느끼기 때문에 '몸으로 증득한다'고 한다. 왜 그런가· 수행자가 두 번째 배사의 후심에서 바깥의 부정함을 관찰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무너뜨려 남김이 없고, 또한 큰 기쁨이 용솟음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마음을 거두어 찬란히 빛나는 여덟 색의 빛을 자세히 관찰하여 깊은 삼매에 들어간다. 이 여덟 가지 색을 단련하여 지극히 밝고 깨끗하게 하여 마음을 대상 가운데 머물면 곧 다 없어진 듯이 선정에 들어가며 즐거움도 함께 생겨난다. 여덟 가지 색의 빛은 맑고 밝고 깨끗하여 묘한 보배의 광명처럼 온 세계에 가득 찬다. 비추는 마음이 밝고 깨끗하면 즐거움이 점점 늘어나 몸 가운데 두루 가득하여 온몸이 기쁘게 된다. 이 법을 증득하고 나면 근본선을 버려서 마음으로 좋아하거나 집착하지 않으므로 깨끗함을 등져 버린다(淨背捨)고 하며 또한 무루의 제3선이라고도 한다.
네 번째 허공배사(虛空背捨)는 다음과 같다. 수행자가 욕계정 뒤에 이미 자기 몸의 피부와 살의 깨끗하지 않은 색을 없앤다. 초배사 다음에는 안몸의 백골의 색을 없애 버리고, 제2배사 다음에는 바깥의 온갖 깨끗하지 않은 색을 물리쳐 오직 여덟 가지 깨끗한 색만 있게 된다. 제4선에 이르면 이 색은 모두 마음을 의지하여 머무르니 비유하면 허깨비의 색이 허깨비 마음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것과 같다. 만일 마음으로 색을 버리면 색은 곧 물러나 사라지고, 일심으로 공을 연하여 공과 서로 응한다. 그러면 곧 가없는 허공처에 들어가니 이것은 색을 사라지게 하는 방편이다.
수행자가 허공배사에 들어가려면 마땅히 먼저 공처정에 들어가서 색을 등져서 버리고 무색을 연하여야 한다. 여기서 여덟 가지 성스러운 관법을 닦으면 곧 무색법도 무상하다고 안다. 그러므로 비록 공처정에 머무르지만 허공정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것을 허공배사라고 한다.
다섯째 식처, 여섯째 무소유처, 일곱째 비유상비무상처배사는 모두 위의 법과 같으니 앞의 예를 비추어 보면 알 수 있다.
여덟 번째 멸수상배사(滅受想背捨)는 느낌(受) 연상(想) 등의 온갖 심법과 심소법을 물리쳐 없애는 것이다. 왜 그런가? 비유상비무상처배사 가운데는 비록 거친 번뇌는 없으나 네 가지 음(四陰), 두 가지 입(二入), 세 가지 계(三界)의 열 가지 미세한 심소법을 갖고 있다. 어떤 것이 열 가지인가? ① 느낌(受), ② 연상(想), ③ 행(行), ④ 접촉(觸), ⑤ 사유(思), ⑥ 의욕(欲), ⑦ 이해(解), ⑧ 기억(念), ⑨ 선정(定), ⑩지혜(慧)이다.
느낌(受)이란 무엇인가? 식으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연상(想)이란 무엇인가? 식으로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다. 행(行)이란 무엇인가· 법경에 대한 행의 작용이다. 접촉(觸)이란 무엇인가? 의근에 접촉하는 것(意觸)이다. 어떤 것이 사유(思)인가? 법을 사유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의욕인가? 선정에 들어가고 나옴을 말한다. 어떤 것이 이해함인가? 법을 이해함이다. 어떤 것이 기억인가? 삼매를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선정이라고 하는가? 마음이 법 그대로 머무름을 말한다. 어떤 것을 지혜라고 하는가? 지혜의 뿌리(慧根)와 지혜의 몸(慧身)을 말한다.
수행자가 비상비비상배사 가운데 비록 비상비비상처정을 집착하지는 않으나 모든 심소법을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멸수상배사에 들어간다. 일심으로 진제에만 반연하여 오온, 십이입, 십팔계를 끊으면 온갖 행의 인연이 다 사라진다. 느낌으로부터 지혜에 이르기까지 온갖 심소법이 다 사라지고, 심소법이 아닌 것 또한 사라진다. 지금 여의어 버리고자 하면 다시 모름지기 진제를 관찰하는 느낌이나 연상 역시 궁극의 고요함이 아님을 깊이 알아서, 관찰하는 주체(能觀)로서 선정의 느낌과 지혜의 연상(慧想)을 버린다. 이렇게 진제에 반연하는 선정과 지혜의 두 가지 마음을 버리기 때문에 멸수상정의 온갖 심소법을 등진다고 한다.
출처 : 초보자를 위한 선(禪) / 월창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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