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도론

대지도론 279. 8승처(勝處)

수선님 2019. 7. 28. 12:55

대지도론 279. 8승처(勝處)

 

 

[문] 이 세 가지 배사와 여덟 가지 승처와 열 가지 일체처는 곧 실관(實觀)인가, 아니면, 득해의 관[得解觀]인가? 만일 실관이라면, 몸에는 피부와 살이 있는데 무엇 때문에 백골로 된 사람만을 본다는 것인가?

또 서른여섯 가지 물건[三十六物]14)이 합해서 몸을 이루거늘 무엇 때문에 분별해서 산관(散觀)하는가?

4대(大)는 각각 스스로의 모양이 있거늘 무엇 때문에 세 가지 대는 없애고 지대(地大)15) 하나만을 관하는가?

네 가지 색깔이 모두 청색은 아니거늘 무엇 때문에 모두 청색의 관만을 짓는가?

14) 36물(物)이란, 몸 안에 있는 서른여섯 가지 부정한 요소들을 말한다. 곧 머리칼․털․손톱․이빨․눈곱․눈물․침․가래․소변․대변․때․땀과 간․쓸개․창자․위․비․신장․심장․폐․생장(生藏)․적담(赤痰)․백담(白痰)과 피(皮)․부(膚)․피․살․근육․핏줄․뼈․골수․지방․고(膏)․뇌․막 등이다.
15) 범어로는 pṛthivīmahabhūta. 물질의 굳은 성질을 말한다.
[811 / 2071] 쪽

[답] 실관도 있고 득해관도 있다.

몸의 모양은 실로 청정하지 않은 것이므로 이것은 실관이 된다.

바깥 법에서는 청정한 갖가지 색상(色相)이 있으니,

이것은 실로 정관(淨觀)이 되지만,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은 것은 바로 실관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약간의 청정한 것으로써 “일체가 모두 청정하다”고 널리 관하고, 이 한 웅큼의 물을 취하여 “일체는 모두 물이다”고 두루 관하며, 이 약간의 푸른 모양을 취하여 “일체가 모두 푸르다”고 두루 관하니, 이러한 것들은 바로 득해관으로 실관이 아니다.

네 가지 무색의 배사16)는 4무색정(無色定) 중의 관찰과 같으니, 배사를 얻고자 해서 먼저 무색정으로 들어간다. 무색정은 바로 배사의 첫 문이니, 색이라는 대상17)을 등져버리면 한량없는 허공처(虛空處)18)이다.

[문] 무색정도 역시 그러하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가?

[답] 범부는 이 무색정을 얻으면 바로 색이 없다[無色]고 여기지만,

성인은 깊이 마음으로 무색정을 얻으면 한결같아 다른 생각을 내지 않으니, 이것을 배사라 한다.

나머지 식처(識處)19)․무소유처(無所有處)20)․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21)도 역시 그와 같으며, 느낌[受]과 생각[想]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을 등져 없애면 이것을 멸수상배사(滅受想背捨)22)라 한다.

[문] 무상정(無想定)23)은 무엇 때문에 배사라 부르지 않는가?

[답] 삿된 소견[邪見]을 지닌 이는 모든 법의 허물을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곧장 선정[定] 가운데 들어가서 이것을 열반(涅槃)이라 여기나, 선정에서 일어날 때는 도리어 후회하는 마음을 내면서 삿된 소견에 떨어지게 되는데, 이런 까닭에 배사가 아니다.

16) 범어로는 ārūpyavimokṣa. 곧 무색정을 대상으로 해서 얻는 해탈이다.
17) 범어로는 rūpyālambana. 곧 색이라는 대상을 말한다.
18) 범어로는 ākāśānantyāyatana. 공무변처(空無邊處)라고도 한다.
19) 범어로는 vijñānānantyāyatana.
20) 범어로는 ākiñcanyāyatana.
21) 범어로는 naivasaṁjñānāsaṁjñāyatana.
22) 범어로는 saṁjñāveditanirodhavimokṣa. 느낌과 생각이 멸해 얻게 되는 해탈의 상태이다.
23) 범어로는 asaṁjñisamāpatti.
[812 / 2071] 쪽

느낌과 생각이 사라지면 산란한 마음을 싫어하기 때문에 정에 들어가 휴식하는 것이 마치 열반의 법을 닮았고, 몸 가운데 드러나고 몸으로 얻기 때문에 몸으로써 증득한다[身證]고 한다.

 

8승처(勝處)라 함은,

안으로 색상이 있고 밖으로 색이 적음을 관[內有色相外觀色少]하면서 혹은 아름답거나[好] 혹은 추하거나[醜] 간에 이 색을 두드러지게 알고[勝知] 두드러지게 관[勝觀]하니, 이것을 첫 번째 승처라 한다.

안으로 색상이 있고 밖으로 색이 많음을 관[內有色相外觀色多]하면서 혹은 아름답거나 혹은 추하거나 간에 이 색을 두드러지게 알고 두드러지게 관하니, 이것을 두 번째 승처라 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도 역시 그와 같다. 다만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색을 관[內有色相外觀色]하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또한 안으로 색상이 없고 밖으로 모든 색인 청․황․적․백을 관하니, 이것이 여덟 가지의 승처이다.

안으로 색상이 있고 밖으로 색을 관한다 함은 안 몸을 무너뜨리지 않은 채 바깥 대상이 적음을 보는 것을 말한다. 대상이 적은 까닭에 적다[少]고 하나니, 관하는 도[觀道]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적은 인연을 관한다.

곧 많은 대상을 관하게 되면 거두기 어려울까 두렵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마치 사슴을 놀게 할 때에 아직 길들이지 못했으면 멀리 내놓는 것은 옳지 않는 것과 같다.

아름답거나 혹은 추하다 함은 처음 배우는 이가 마음을 대상 가운데 매어 두거나 혹은 미간, 혹은 이마, 혹은 코끝에다 두고서 안몸[內身]의 청정하지 않은 모양과 안몸 가운데 있는 청정하지 않은 모양으로 바깥의 모든 색의 착한 업보(業報)를 관하기 때문에 아름답다[好] 하고, 착하지 않은 업보이기 때문에 추하다[醜]고 한다.

또 수행하는 이가 스승으로부터 받은 바 그대로 바깥 대상의 갖가지 부정함을 관하면 이것을 추한 색이라 하며, 수행하는 이가 때로는 억념하기를 잊어버리는 까닭에 청정한 모양[淨相]을 내면서 청정한 색을 관하면 이것을 아름다운 색이라 한다.

[813 / 2071] 쪽

또 수행하는 이가 자기 몸 속에 마음을 한 곳에다 매어 두고 욕계(欲界)의 색을 관함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능히 음욕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능히 성을 내는 것이다.

능히 음욕을 낸다 함은 바로 청정한 색으로, 일컬어 아름답다[好]고 한다.

능히 성을 낸다 함은 바로 청정하지 않은 색으로, 일컬어 추하다고 한다.

대상에 대해 자재롭고 두드러지게 알고, 두드러지게 보는 것이다.

수행하는 이가 음욕을 낼 수 있는 단정한 색(色)에 대해 음욕을 내지 않고, 성을 낼 수 있는 나쁜 색에 대해서 성을 내지 않으면서 다만 색을 관찰하기를 “4대(大)가 인연화합하여 생긴 것이며, 마치 물거품과 같아 견고하지 않다”고 본다. 이것을 일컬어 혹은 아름답다고 하고 혹은 추하다고 한다.

승처(勝處)라 함은 수행하는 이가 이 청정하지 않은 문 가운데 머무르면서 음욕과 성냄 등의 모든 결사가 온다 해도 아직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있다면, 이것을 승처라 하는 것이다.

이는 청정하지 않은 가운데서 청정하다고 여기는 뒤바뀐 생각 등의 모든 번뇌의 적을 이기기[勝] 때문이다.

 

 

 

 

 

 

 

 

 

https://blog.naver.com/jati108/70171857162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