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보름이 지난 뒤'
한 스님이 물었다.
“마침 열엿새일 때(正當二八時)에는 어떻습니까?”
“동쪽은 동쪽, 서쪽은 서쪽이지(東東西西)."
“무엇이 동쪽은 동쪽, 서쪽은 서쪽입니까?”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이 선문답의 한문 원문을 보면, 한 스님이 '정당28시(正當二八時)에는 어떻습니까?' 라고 물었는데, 여기에 나온 '2.8시'의 의미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는 듯 합니다. 염송설화를 보면 여러가지 해석이 나오는데, ‘2와 8은 중국에서는 둘 다 불길한 수로서 흉(凶)한 괘(卦)를 나타낸다. 또는 2는 음력 2월, 8은 음력 8월을 가리켜 봄, 가을을 의미한다는 해석, 또는 2 X 8 16일은 보름 바로 다음 날로서 달이 이지러짐이 없이 환하고 둥근 때를 말한다’는 해석 등이 있습니다.
운문문언선사의 법문 중에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이란 말이 있습니다. 운문이 어느 날 스님들을 모아 놓고, "그대들에게 지난 15일 전의 일은 묻지 않겠다. 그러나 앞으로 15일 이후의 일에 대하여 한마디씩 해보라." 고 말했습니다. 그러곤 스스로 말하기를,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즉 '날마다 좋은 날'이라고 말하곤 방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15일 이후의 일(事)은 매일 매일 좋은 날이다'. 이것도 훌륭한 화두로 깊이 참구해볼만 합니다.
여기서도 '2.8시(時)'의 의미를 운문의 15일 이후 즉, 보름이 지난 뒤의 일로 해석해 봅니다. 무슨 소린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분에게는 죄송하지만 음력 보름이 지나 환히 밝은 달이 두둥실 떠올랐다는 이 말씀입니다.
자, 둥근 보름달이 이지러지지 않고 계속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둥근 달이 그려지기는 합니까? 이 둥근 달을 잡아채야 합니다. 가슴으로 콱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 매일 좋은 날이고, 동쪽, 서쪽 전혀 가릴 것 없이 두루 통하고, 또 한편으로는 동쪽은 동쪽이고, 서쪽은 서쪽이어야만 합니다. 이는 말과 생각이 갈 곳이 끊어진 경지에서 알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횡설수설 하냐고요? 위 스님 말처럼 “동쪽은 무슨 동쪽이고, 서쪽은 무슨 서쪽이냐?” 한다면, 조주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다.” 고 했는데, 나는 '그대는 동쪽이고 서쪽이고 보이느냐?'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왜 볼 수 없느냐 물어오면 원래 없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136. '모른다니 정말 좋다'
한 스님이 물었다.
“제가 전혀 알지 못할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나는 더 모른다.”
“큰스님께서는 도리가 있는 줄을 아십니까?”
“나는 나무토막이 아닌데 어찌 모르겠느냐?”
“알지 못한다 하시니 정말 좋습니다.”
조주선사는 손뼉을 치며 웃었다.
바로 위 대화와 계속 연결되는 듯 한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전혀 알지 못할 땐 어찌해야 합니까?” 무엇을 전혀 알지 못할 때를 말하는 것입니까? 위 대화와 연관 지어 보면, '동쪽은 동쪽, 서쪽은 서쪽이다'는 말의 뜻을 모른다는 것이고, 선(禪), 마음 공부하는 측면에서 보면 이 선, 도(道), 즉 마음을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만약 후자일 경우라면 '저는 도(道)를 전혀 모르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란 뜻으로 물은 것입니다. 조주는 '그대가 전혀 모를 뿐더러 나는 더욱 모른다'고 답했습니다. 옛 부처라고까지 불리는 조주가 왜 자기는 더 모른다고 했을까요? 도(道)는 알고 모르고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고 해야 할까요?
“큰스님께서는 도리가 있는 줄은 아십니까?” 하 고 다시 물었는데, 유(有)와 무(無)의 경계를 안다면 유무를 벗어날 수 있음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현상적으로 보이는 존재(有)와 절대적인 공(空=無)의 세계에 통달했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임을 마음으로 철저하게 체득했다는 말이겠지요. 그러자 조주는 '내가 아무런 인식도 하지 못하는 나무토막이 아닌 바에야 어찌 모르겠는가?' 라고 대답했는데,
그 스님의 제법 극적인 반전이 재미있습니다. 이 말이죠, “알지 못한다 하시니 정말 좋습니다”. 마치 달마대사가 처음 중국으로 와서 양무제를 만났을 때, 양무제가 달마에게 "제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알지 못합니다(不識)." 라고 한 대답을 연상시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순간에서 조주의 말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 말을 할 줄 아는 그 수행인을 보고 조주는 손뼉을 치며 웃었습니다. 그 스님의 깨달음의 경지는 그만두고 유쾌한 선문답입니다.
137. '도인(道人)은 깨달은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사람이 도인(道人)입니까?”
“내가 전에는 깨달은 사람(佛人)이라고 말했었지.”
'도인(道人)은 어떤 사람일까요?' 조주선사는 전에는 깨달은 사람(佛人)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도인은 그냥 깨달음(佛) 그 자체이죠. 맞습니까? 온 몸이 깨달음으로 똘똘 뭉쳐있는 각(覺)이란 말입니다. 선(禪), 도(道), 불(佛), 각(覺), 심(心) 모두 한 자로 두루 쓰입니다.
138. '점심 먹고 차마시지 않았다.'
한 스님이 물었다.
“말을 꺼낸다거나 손발을 꿈쩍거리기만 해도 그 모두가 저의 그물 가운데 떨어집니다. 큰스님께서는 이것을 떠나서 말씀해 주십시오.”
“나는 점심을 먹고 아직 차를 마시지 않았다.”
'말을 꺼내든지 손발을 꿈쩍거리기만 해도 모두 저의 그물 속에 떨어집니다.' 언구(言句)를 사용하거나 손짓, 발짓 무슨 제스처를 쓰든 자신의 부처님 손바닥 위에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그 스님은 자기는 완전히 깨달은 자이니 말을 떠나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진 곳에서 한 마디 해달라고 대단한 호기를 부리네요.
그러자 조주선사는 “나는 점심을 먹고 아직 차를 안마셨다.”고 대답했는데, 그 수행자의 그물에 떨어졌습니까? 떨어지지 않았습니까? 보지 않아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듯한 그 중의 표정이 눈에 선하네요. 엉터리 같으니라구!
139. '누가 수행하는가?'
마대부(馬大夫)가 물었다.
“큰 스님께서도 수행(修行)을 하십니까?”
“내가 만약 수행한다면 큰일 나지요.”
“큰스님께서 수행하지 않으시면 누구더러 수행하라 하십니까?”
“대부야말로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어찌 수행한다 하겠습니까?”
“대부가 만약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찌 사람의 왕(人王)의 자리에 있을 수 있겠소? 굶주림에 허덕이며 꽁꽁 얼어붙은 경지에서 풀려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오.”
대부는 이에 눈물을 흘리며 절하고 물러났다.
대부(大夫)는 옛 중국의 상류계급을 일컫는데, 마대부란 양반이 조주 큰스님도 도를 닦기 위해 계속 수행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조주는 자기가 수행하면 큰 화가 된다고 했는데 사실일까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 말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대부는 ‘큰 스님은 수행하지 않으면서 그럼 왜 후배들에게는 수행하라고 가르칩니까?’ 라며 따지듯 묻습니다. 따질게 따로 있지 이걸 따져?
조주는 마대부야 말로 수행인이라고 말합니다. 그 뜻은 과거생에서 열심히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전생에 덕(德)을 쌓으면서 세상을 이롭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백성의 우두머리로 군림하지 못했을 거라는 말이죠. 그러면서 미래생에 나찰지옥에 빠져 굶주림에 허덕이고, 몸이 꽁꽁 얼어붙어 빠져나올 기약도 없지 않으려면 이 생에서 더욱 덕을 많이 쌓고 수행하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30(135-139)|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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