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록(趙州錄)

조주록 강해 32(142~145)

수선님 2020. 1. 26. 12:55

조주록 강해


원문출처


142. '그대의 가풍이 드러났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큰스님의 가풍(家風)입니까?”

“나는 귀가 어두우니 큰 소리로 물어라.”

그 스님이 다시 묻자 조주선사가 대답했다.

“그대가 나의 가풍을 물으니 내가 그대의 가풍을 알겠구나.”

한 스님이 조주선사의 가풍(家風)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선가(禪家)에서의 가풍이란 한 조사(선사)의 독자적인 가르침이나 지도 방법을 말하는 것이라고 불교사전에 나와 있습니다.

​ "큰 스님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니 조주는 “내 귀가 어두우니 더 크게 말해라.”고 대답합니다. 정말로 조주의 나이가 너무 많아(물론 그때 100세 전후는 되었을 겁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어둡다고 했을까요? 이런 것이 깨달음을 향한 선사의 가르침이자, 수행자에게는 건너서 넘어야할 함정입니다. 여기서 알아채십시오. 왜 귀가 어두우니 더 큰 소리로 물으라고 했는가를 의심하십시오. 의심이 만병통치약입니다.

그 스님은 다시 큰소리로 조주의 가풍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내 가풍을 묻는걸 보니 네 가풍을 알겠구나.” 조주의 대답입니다. 여기서 그 수행자가 ‘띵호아!’ 손가락이나 한번 튕기곤 조주에게 삼배를 올렸다면 조주의 표정은 어땠을까요? 그대 가풍이 조주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귀를 열고 의심해야 합니다.

143. '선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한 스님이 물었다.

"온갖 경계가 한꺼번에 일어날 때는 어떻습니까?”

“온갖 경계가 한꺼번에 일어난다.”

“한번 묻고 한번 대답함은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좌선의자(禪床)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 스님이 막 절하려는데 조주선사가 물었다.

“문답을 기억하겠느냐?”

“기억합니다.”

“어디 한번 기억해 보아라.”

그 스님은 조주선사의 말씀을 의심했다.

“만 가지 온갖 경계가 한꺼번에 일어날 때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온갖 사물과 생각이 맑고 밝은 의식을 가로막고, 번뇌 망상이 시도 때도 없이 들고 일어날 때는 당연히 귀신이 잡아가도 못 알아챌 테죠.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미신행위가 성행했습니다.

조주는 이 스님의 질문에 “온갖 경계가 한꺼번에 일어난다.”고 대답했습니다. 온갖 경계가 한꺼번에 일어날 때는 말 그대로 한꺼번에 일어난다. 무슨 두말 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 말이죠.

그러자 다시, '한번 묻고 한번 대답함은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나지 않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선사와의 일문일답은 서로의 생각이 오고 가는 것이니까 이미 마음속에 한 생각 일어난 것이죠. 그런데 선사들은 마음 공부하는 수행자들에게 '한 생각 일으키면 벌써 틀려버린다'고 하여 분별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냐고 묻자 조주는 '내가 앉는 좌선의자(禪床)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대답합니다.

조주는 진실로 그 의자를 염두에 두고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단적으로, 의자이기도 하고, 의자일리는 만무하기도 합니다. 그러자 그 수행인은 조주에게 절을 하려고 했는데 무엇을 알아채서 예배를 하려 한 것입니까? 조주는 그 자를 다시 시험해 봅니다.

“문답을 기억하겠느냐?” “기억합니다.” 하니 “어디 한번 기억해 봐라”고 말합니다. 조주는 문답 가운데 무엇을 기억해 보라고 하는 겁니까? 기억해 봤자 '선상(禪床)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밖에 없네요. 이게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기에 기억해서 말해보라고 했을까요? 그 스님은 아마도 '물론 의자가 저절로 일어날 리는 만무하지' 하고 생각했지만 별 뜻 없는 말로 간주하곤,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기억해 보라고 하니 무슨 소린가 하고 의심이 들었지만 도무지 알지 못합니다.

조주가 '선상(禪床)은 일어나지 않는다.' 고 말한 것은 뜻이 다른데 있습니다. 괜히 말 못하는 사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 뜻을 제대로 알아야 선문답이 끝나는 것입니다. 의심하십시오. 조주는 어째서 좌선의자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는지를. 바로 그대 마음일 뿐입니다.

144. '눈앞의 부처란?'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눈앞의 부처(佛)입니까?”

“불전(殿)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습만 있는 부처입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음 그대로가 그것이다.”

“마음 그대로라 해도 그것은 한정된 것입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음 없는 것이다.”

“마음 있음과 마음 없음을 제가 가려내도 되겠습니까?”

“마음 있음과 마음 없음이 이미 그대에게서 다 가려졌는데 더 이상 내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냐?”

'눈 앞(目前)의 부처는 무엇인가?', 확실히 철저하게 깨달으면 이 세상에 부처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화엄경에 보면 수십억, 수백억의 부처가 나무 잎사귀 하나 위에 나타난다고 하는데, 모든 것이 부처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부처를 볼 수 있겠습니까?

미운 것도, 싫은 것도, 지겨운 것도, 괴로운 것도, 무생물도 모두 보리요, 부처임을 깨달아야 세상 속에서 세속을 훨훨 털고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주가 '불전(佛殿) 안의 불상이 부처'라고 하니까, 이 스님은 '그것은 모양만 있는, 무늬만의 부처이지, 참 부처란 형상이 없는 것이라고 들었으니 다른 부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마음 그대로가 부처다' 라고 하니, '마음 그대로라 해도 이미 그것은 테두리가 있어 한정된 것이니 또 다른 부처를 보여 달라'고 합니다. 마음은 온 누리에 두루 하여 가두어 둘 수도 없는 것이라고 들었으니, '마음 그대로 부처'라 하면 이미 하나의 개념에 갇혔다는 아주 깊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이 스님도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그러면 마음 없는 것(無心)이다' 라고 하니, 이 수행자는 '그러면 제가 마음 있음(有心)과 마음 없음(無心) 가운데 가려내면 부처를 알려주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어떻게 유심과 무심을 분별해서 자기 마음대로 쓰겠다는 것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조주는 “그래 유심이든 무심이든 이미 그대가 다 가려냈으니 모두 네 것이다. 네 마음대로 쓰라. 그렇지만 나에게 더 이상 말을 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심이든 무심이든 한갖 말장난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쓰면 됩니다. 더 이상 물을 필요 없이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마음을 쓰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까요? 대부분 마음에 이끌려서 마음의 쓰임을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요즘 저도 마음을 완전히 굴복시키려 노력하고 있는데, 솔직히 아직은 마음이 조금씩 뻗대면서 반항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시간문제일 뿐임을 압니다. 눈을 뜨는 게 중요하지, 뜨고 난 뒤에 계속 정진하면 마음은 결국 항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145. '사람에게 설하지 않는다'

한 스님이 물었다.

“멀리서 와서 큰스님께 의지하려 하는데 무엇이 큰스님의 가풍입니까?”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이다(不說似人).”

“무엇 때문에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으십니까?”

“이것이 나의 가풍이다.”

“큰스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아도 이미 4해(四海)에서 몰려들어 스님께 귀의하는 것은 어찌합니까?”

“그대는 바다일지라도 나는 바다가 아니다.”

“바닷 속의 일은 어떻습니까?”

“내가 한 마리 낚아 올렸다.”

​ 조주의 가풍(家風)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저 멀고 먼 곳에서 수천리 길을 걸어 조주를 찾아온 수행자가 처음 만나자마자 조주의 진면목을 알려 달라고 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가풍을 알려 달라고 하니까, 조주는 내 가풍은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는 것이다(不說似人).”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말해 주지 않으면 다른 축생, 아수라, 천생 등 육도(六道) 중생들에겐 말해 준다는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사람에게는 말해주지 않는다' 라는 이 말에 깊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정도면 곧 바로 알아챌 수 있지 않습니까? 아직도 오리무중이면 계속 의심하십시오.

조주는 “사람들에게 말해주지 않는 것이 내 가풍이다.” 라고 말합니다. 참 조주의 가풍도 시시각각 변하죠? 저 위에서는 “내 귀가 어두우니 더 크게 물어라.”고 하더니 여기선 또 다른 소리니 헷갈릴 수밖에요. 그러나 선사의 가풍은 우리 집 안의 가훈(家訓)과는 달리 정해진 게 없습니다. 그것이 불법입니다. 석가도 49년 내내 정해지지 않은 법(不定法)을 설한 것입니다. 설함이 없이 설교하고, 가르침 없이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스님은 '사해 바다, 사방팔방에서 선객(禪客)들이 큰 스님을 찾아와서 가르침을 구하는 바에야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다시 물으니, 조주는 꼬투리 하나를 잡았습니다. 바로 바다(海)입니다. 선사는 수행자의 말꼬리 하나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방편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이죠. “그대는 바다일지 몰라도 나는 바다가 아니다.” 바다를 바다라 하지 말라, 물은 물일 뿐이니라!

그러자 그 수행자가 “바다 속의 일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는데, “노승이 한 마리 낚아 올렸다” 라니, 이 무슨 아닌 밤중에 홍두깨 잡는 소리인가요? 그 수행자가 진짜로 바다 속의 일을 알아서 조주는 '내가 한 마리 낚았다'라고 했을까요? 미끼에 물린 피래미일 뿐이지요.

저도 안개 속에서 오리를 잡으려 손발을 휘젓고 있습니다. 제발 조주에게 하나라도 낚이길 소원합니다. '조주야! 물 위로 올라오너라!' 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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