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불조(佛祖)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조사와 부처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조사와 부처가 아니다.”
“가까이하지 못하는 걸 어찌합니까?”
“그대에게 조사와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 것이다 라고 말하면 되겠느냐?”
“그게 무엇입니까?”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조사이거나 부처이거나 중생이다.”
“그렇게만 말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그대하고는 이야기가 안 되겠다.”
“조사와 부처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자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천기를 한번 누설하겠습니다. 제가 찢어진 입이라고 말로 한 업(口業)으로 인해 지옥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더라도, 한 명이라도 곧 바로 깨어나라는 노파심으로 말씀드립니다.
청정법신(淸淨法身), 비로자나불이라고 하죠, 우리 자성(自性)은 조사와 부처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러면서 모든 조사와 부처가 체득한 그 자리입니다. 위 '누구'에 대한 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를 알아챌 수 있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물건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약칭 이뭐꼬? 라는 유명한 화두가 있습니다. 위에서 조주는 "조사도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물건도 아닌 것이라고 하면 되겠느냐?” 라고 말했는데, 이것과 다른 것이 있습니까? 결국 한 통속입니다. 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수행자가 “그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조주는, “만약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조사나 부처나 중생일 것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정말 모순되는 말이죠. 조사도, 부처도, 중생도, 물건도 아니라고 해놓고선, 또 다시 번복하여 이름을 붙이자면 조사나 부처나 중생이라고 하니 이 스님은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 핀잔을 늘어놓습니다. 여러분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를 어떻게 말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까? '물은 물이 아니고, 산은 산이 아니다. 그러다가 종국엔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 라고 한다면 이 말과 같습니까? 다릅니까? 모든 만물은 만물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그렇게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그 실상(實相)은 모두 고요하고 텅 빈 것일 뿐입니다. 이를 깨치지 못하면 결국 “그대하고는 안 되겠다.” 억!
147. '평상심은 늑대, 여우'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평상심(平常心)입니까?”
“늑대나 여우다.”
‘평상심(平常心)’. 저 앞에서 여러 번 나왔습니다. 그저 일상의 평범한 이 마음, 그것인데 참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말이기도 합니다. 아무런 때가 묻지 않은 마음, 또는 나고 없어지는 문(生滅門)을 여읜 마음, 고요하고 텅 빈 그 마음, 배고프면 밥을 찾고 목마르면 물을 찾게 되는 그 마음, 절을 하면 목례로 받아 주고, 손을 흔들면 따뜻한 눈길을 주는 마음, 마음이 가난한 자를 보면 마음을 나누어 주려는 그 마음.
여기서 조주는 늑대나 여우같은 야생동물이라고 했는데, 아무 분별심 없이 본능대로 행동하는 동물이 가장 적절한 정의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엄동설한에 추운 줄도 모르고 뛰노는 어린 아이들의 곱은 손(手), 그것이라 한다면 더욱 금상첨화일 것 같습니다.
148.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것'
한 스님이 물었다.
“무슨 방편을 써야만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은 그만두고 이제껏 무얼 들어왔느냐?”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죠. 질문 속에 답이 있으니 아시겠습니까? 또한 아직 본 적도 없고, 느낀 적도, 맛본 적도 없는 그것, 바로 우리의 참된 마음, 진심(眞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을 때까지 알라고 한, 그러면서 결국 알지 못하고 죽은 그 '너 자신', 한번 죽음을 맛보더라도 알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 마음입니다.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 그것을 듣고 싶다는 그 수행인의 하소연에 대하여, 조주는 달마대사가 2조 혜가에게 '너의 아픈 마음을 가져와 봐라'고 한 것처럼, "아직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은 그만두고, 이때까지 무얼 들어왔는지 그것을 가지고 와 보라.”고 대답합니다.
혜가가 '아무리 찾아보아도 아픈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고 하니 '내가 이미 네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느니라.'고 한 달마대사의 말씀에 혜가가 즉시 깨달은 것처럼 그 수행인도, 여러분도 바로 깨달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보다 쉬운 말로 한다면, '만약 네가 마음을 체득해 보고 싶다면 느껴보고 싶다는 그 마음을 가져와 보라!'
149. '달라지지 않는 구슬'
한 스님이 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빛깔 따라 달라지는 마니주(摩尼珠) 라는 것이 있다는데 무엇이 본래 색깔입니까?”
조주선사가 그 스님의 이름을 부르니 “예” 하고 대답하자,
“이쪽으로 오너라.” 하니,
그 스님은 가까이 와서 다시 물었다.
“무엇이 본래 색깔입니까?”
“자, 색깔 따라 달려가거라.”
'마니주(摩尼珠)'는 보배 구슬(寶珠), 여의주라고도 합니다.
3000년 전 붓다가 인도 영취산에서 대상에 따라서 색깔이 변하는 마니주를 보여주면서 제자들에게 "이 구슬은 무슨 색깔이냐?"고 물으니 제각각 다른 빛깔이라고 말했는데, 석가는 구슬을 옷소매 속에 넣고 손을 들며 물었다고 합니다. "이 구슬은 무슨 빛깔이냐?" 그러자 제자들은 "부처님의 손에는 구슬이 없는데 어디에 빛깔이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때 석가는 말했습니다. "내가 세상의 구슬을 보여줄 때에는 청색이니, 적색이니, 녹색이니 억지로 말을 지어 내더니, 내가 참된 보배 구슬을 보여줄 때에는 도무지 모른다고들 하는구나." 이 때 많은 제자들이 그 자리에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 설법을 보아도 이미 석가모니도 그 당시 말과 생각을 떠난 도(道)의 가르침을 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선(禪)은 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와 이상하게 변질된 것이라고 평하는 불교인들은 정말로 크게 참회해야 하고, 앞으로 서로 비방하는 사람들은 동전값을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참된 보배 구슬을 아십니까? 모두가 하나씩 다 가지고 있는 옛 구슬(珠)입니다. 부처인 바로 우리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기를 마구 누설해도 알아채지 못하면 언제나 깨닫겠습니까? 지금 바로 눈을 뜨십시오. 나머지 말은 모두 군더더기일 뿐입니다. 조주의 그 어떤 법어(法語)도.
그래도 이해를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하는 말인데, 조주가 그 수행자에게 '마니주의 색깔을 따라 달려가 보라' 고 말한 의미를 깊이 의심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위 문답에서 조주에게 왔다 갔다 해 본들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아보았죠?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150. '다른 사람의 문전은 어떤가?'
한 스님이 물었다.
“평상심이 된 사람도 교화(敎化)를 받습니까?”
“나는 다른 사람의 문전은 밟아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쪽 사람을 침몰시킨 것이 아닙니까?”
“아주 훌륭한 평상심이다.”
평상심 이야기가 또 나오는군요. 평상심이 된 사람은 수행이 깊어 이미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교화(敎化)를 받는다는 말은 도(道)의 가르침을 받아 자기 몸과 마음을 구원(제도)하는 것입니다. 조주 같은 선사가 다시 교화를 받을 리는 없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문전은 밟아보지 않았다.” 내 청정자성을 지키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말이지만, 또한 다른 선사들은 자신도 완전하게 모른다는 뜻도 있을 것입니다. 깨닫는 방법도 제각각 다르고, 마음속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는 그 경지도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수행자는 “그러시면 저쪽 사람을 침몰시킨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했는데, 선(禪)적인 뉘앙스가 물씬 풍깁니다. 이 말은 조주는 '남의 문전은 밟아보지 않았다'고 말했는데, 그러면 저쪽 사람, 저 피안의 붓다들을 모두 짓밟아 버린 것이 아니냐고 묻는 뜻입니다. 붓다라면 6신통을 모두 갖추어서 다른 사람의 마음 속도 다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의미를 품은듯 합니다.
이에 조주는 “아주 훌륭한 평상심이군.” 하고 말했는데, 부처도 조사도 모두 뿌리치고 짓밟아 버릴 정도로 아무 개념도 분별도 남지 않았다면 훌륭한 평상심이 된 것이니, 그외는 이러쿵 저러쿵 해본들 도(道)와 무슨 상관 있겠느냐는 뜻인 것 같습니다. 문답이 여기서 끝나서 매우 아쉬운 장면인데 부디 그 수행자가 확철대오 하길 바랄 뿐입니다.
151. '보림할 물건'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제가 보림(保任)할 물건입니까?”
“미래제(未來際)가 다하여도 가려내지 못한다.”
'보림(保任)'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음공부를 하여 깨달은 후에도 우리 마음에는 아직 과거와 현생에 묵은 때(습기)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완전히, 철저하게 깨달으면 모든 번뇌망상을 벗어나 습기라곤 아기 배내옷에 스며든 모유 냄새 정도 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고, 운문선사 말씀처럼 처음 깨달았을 때에는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새가 붉은 핏줄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처럼 아직은 애송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서서히 털도 나고 걷는 법, 나는 법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깨달은 후에도 5년이든 10년이든 물가나 토굴 속에서 묵은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열심히 정진해 왔습니다. 이를 깨달은 후(悟後)의 보림(保任)이라고 합니다. 깨달음 자체를 깨뜨리지 않게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보림은 커녕 그 문턱에라도 이미 다다랐기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아직은 그 어떤 물건을 가지고 보림을 하는 것인지조차 전혀 눈치 채지를 못한 듯 합니다. 그 한 물건이 무엇인지 찾고 있으니 하는 말씀입니다. 조주선사는 그 물건은 “미래제(未來際)를 다한다 하더라도 가려낼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의 수명을 훨씬 넘은 120세까지 생존했던 조주의 말씀이니 아직 일천한 저로서는 덧붙일 이야기가 없군요. 알 수도 없고, 가려내지도 못하는 그것이 이 한 물건입니다. 덧붙여 '보림이란 깨달은 후에도 항상 선정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설봉선사의 제자 현사스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입니다.
152. '수행 많이 한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이가 수행을 많이 한 사람(大修行人) 입니까?”
“이 절 안의 유나이다.”
대수행인(大修行人),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은 그냥 도(道)를 닦는 사람이죠. ‘누가 대수행인인가?’ 조주선사는 관음원 안에서 군기반장이자 총무 노릇을 맡은 스님인 유나(維那)라고 합니다. “이 절 안의 유나이다.”
그런데 조주가 말한 절 안의 유나는 실제로 총무스님을 말씀한 것일까요? 유나일 수도 있고, 유나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니 유나뿐만 아니라 조주도, 그 스님도, 저도, 여러분도 모두 대수행인입니다. '유나야, 차나 한잔 해라'
153. '모른다니 참 좋다'
한 스님이 물었다.
“저는 이제 막 왔기 때문에 집안 일이 어떤지 전혀 모릅니다.”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가?”
“혜남(惠南)입니다.”
“모른다는 그것이 참 좋구나(大好不知)!”
한 스님이 이제 처음 조주선사를 만나서 '저는 집안 일을 아무것도 모르니 가르침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스님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만 해주십시오, 이 말입니다. 조주는 그 스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대 이름이 뭐지?” 목소리도 낭랑하게, “혜남(惠南)입니다.”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조주의 재미난 대답, “대호부지(大好不知), 참 좋은 모릅니다구나!” 모른다는 그 말이 참 좋다고 칭찬하는 모양새입니다.
6조 혜능조사는 육조단경에서 말하기를,‘깨닫는 자는 곧 아무 생각도 없고, 기억도 없고, 집착도 없어서 헛된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기억도 없다는 것은 ‘모른다’는 말과 딱 부합되는 말입니다. 달마대사도 중국으로 처음 와서 모른다고 했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소크라테스도 ‘너 자신을 알라’고 주창하면서 ‘나는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니 그도 다른 각도(角度)에서 이긴 해도 마음을 꽤 열심히 관찰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스승 없이 홀로 생각하다 보니 궁극적인 깨달음에 도달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뿐이다’는 말을 많은 사람들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소크라테스가 매우 겸손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창천! 창천!
그러나 사람의 이름(名), 모양(相)은 명상(名相)이 아닙니다. 그저 사람이 이름 지었을 뿐입니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나, 절에서 내려준 법명(法名)은 참 자기가 아닌 것이죠. 조주는 그 스님의 참 이름(眞名)을 물은 것인데, 그 스님은 자신의 법명을 자랑스럽게 그대로 밝힙니다. “저 혜남(惠南)입니다.”
도는 마음의 절대적인 본질(本質)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 본질과 현상이 딱 계합되어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서로 아무 구애없이 이리 통하고, 저리 통하는, 참으로 모르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자신있게 대답했는데도 '참 좋은 모릅니다구나' 라는 핀잔 소리를 듣는 것을 면합니다.
154. '이름이 뭔가?'
한 스님이 물었다.
“제가 배우려고 하면 그것은 큰스님을 비방하는 것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비방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가?”
“도교(道皎)입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거라. 이 쌀통아!”
한 수행자가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조주선사에게 ‘무엇인가 배우려고 하면 큰스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니, 어떻게 해야 비방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 경전에서 붓다(석가)에게서 한 법이라도 얻었다 하면 이는 석가를 비방하는 것이라 설하고 있죠. 마찬가지로 무심(無心)에서 나오는 조사, 선사의 가르침을 배웠거나 법을 얻었다고 하면 이는 도(道)를 모르는 소리라고 합니다.
위 문답처럼 처음 만난 스님인 것 같습니다. 이름을 물으니 도교(道皎)라, 이 교(皎) 자는 달빛이 고요한 것을 뜻합니다. 옛날 시(詩)에도 교교(皎皎)한 달빛이라고 많이 씁니다. 자신의 이름을 도교라 하니 조주에게서 '고요한 곳으로나 가거라. 이 멍충아!' 라는 질책을 듣습니다.
그럼 '그대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했을까요? 이것은 그대의 본래면목이 무엇인지 물어본 것입니다. 옛날에 현사는 '고기잡이 사씨네 셋째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그러면 도인이 다 된 것입니다.
[출처] 조주록 강해 33(146~154)|작성자 byunsd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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