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The Influence of Yu’an(元) Dynasty’s Seon(禪) & Development of Two Seon School(山門) in the Latter Koryo Dynasty 저자 (Authors) 황인규 Hwing In-Gyu 출처 (Source) 중앙사론 23, 2006.6, 77-110 (34 pages) CHUNG-ANG SARON : Journal of Chung-Ang Historical Studies 23, 2006.6, 77-110 (34 pages) 발행처 (Publisher)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Institute for Historical Studies at Chung-Ang University URL http://www.dbpia.co.kr/Article/NODE01270963 APA Style 황인규 (2006).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중앙사론, 23, 77-110. opyright Information Copyright of all literary works provided by DBpia belongs to the copyright holder(s)and Nurimedia does not guarantee contents of the literary work or assume responsibility for the same. In addition, the literary works provided by DBpia may only be used by the users affiliated to the institutions which executed a subscription agreement with DBpia or the individual purchasers of the literary work(s)for non-commercial purposes. Therefore, any person who illegally uses the literary works provided by DBpia by means of reproduction or transmission shall assume civil and criminal responsibility according to applicable laws and regulations.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122.46.157.*** 2018/05/09 07:19 (KST) - 77 -
목차
머리말 Ⅱ. 迦智山門과 元나라 禪風 Ⅰ. 闍崛山門과 元나라 禪風 맺음말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황 인 규1)**
머 리 말
신라하대 선종의 전래이후 선종계는 9山門을 중심으로 전개 발 전하였으나 고려전기 선종의 산문의 활동상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 없다. 고려 전시기를 통하여 9산문 가운데 그 실체를 알 수 있는 것 * 본고는 지난 4월 21일(금) 중앙대에서 열린 동국대 동국사학회와 중앙대 한국중 앙사학회의 연합학술대회인 ‘한․중불교문화교류’에서 발표한 것을 수정 보완한 논고임을 밝혀둔다. 아울러 본고는 필자의 그간의 고려후기 선종계 연구를 원나 라 선종계의 관계에서 논의한 것이다. **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78 - 은 闍崛山門과 迦智山門 그리고 羲陽山門의 3개 산문에 지나지 않는 다. 그 가운데 희양산문에 관련된 기록은 단편적인 기록 몇 건에 불 과하고 사굴산문도 修禪社系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결국 고려후기 선종계는 사굴산문 수선사계와 迦智山門系가 주도하였다고 할 수 있 다.1) 필자는 고려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 던 사굴산문 수선사계와 가지산문의 중요 고승을 중심으로 두 산문 의 실체와 그 활동에 대해서 검토한 바 있다.2) 두 산문의 전개 내지 활동의 浮沈에는 山門의 내적환경도 작용했을 것이나 외국 불교계 의 교류 등 외적요인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된다. 특 히 元간섭기 80여 년 동안은 그 어느 때 보다 활발한 교류가 있었고 새로운 사상 또는 선풍이 유입되어 山門의 氣風을 진작시켰다. 그리하여 선종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무신집권기초 지방 남단 에 위치한 순천과 강진에서에서의 結社運動이 일게 되었다. 특히 知 訥(1158~1210)의 수선사 결사운동은 그의 문도들에 의해 계승되어 이 른바 그를 포함한 16국사를 배출하면서 고려후기 선종계 뿐만 아니 라 불교계를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향후 불교계의 뚜렷한 대지주 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굴산문계 수선사도 고려후기 내내 불교 계를 주도하였던 것은 아니고 사세의 부침이 있었다. 즉 普照國師 知 訥(1158~1210)과 그의 문도인 眞覺國師 慧諶(1178~1234)이 수선사를 주 1) 나말여초 산문에 대한 연구는 적지 않으나 고려시대 산문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고 다음의 논고들 정도만 있을 뿐이다. 김방룡, 고려시대 가지산문과 사굴산 문에 대한 연구 종교사연구 9, 2001; 황인규, 목우자 지눌과 고려후기 조선 초 불교계 고승 보조사상 19, 2003; 김상영, 고려 중․후기 선종계의 선문 인 식 한국선학 9, 2005; 황인규, 고려후기․조선초 불교사연구 혜안, 2004 ; 황인규, 고려후기․조선초 가지산문계 고승의 동향 구산논집 8, 2003 ; 황인 규, 고려말․조선전기 불교계와 고승연구 혜안, 2005. 2) 황인규, 위의 논저들을 참조하기 바람.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79 - 도하였고, 그 이후 수선사 4․5세인 眞明國師 混元(1191~1271)과 圓悟國師 天英(1215~1286)에 이르러 그 사세가 절정에 달하였다.3) 수선사의 사세는 崔氏政權이 몰락한 1258년(고종 45) 이후인 混 元과 天英 말년부터 쇠락하기 시작하여 圓鑑國師 冲止(1216~1293) 이후 급속히 쇠락하여 갔다.4) 이러한 때 迦智山門의 普覺國尊 一然 (1206~1289)과 그의 문도인 寶鑑國師 混丘(1250~1322), 그리고 혼 구의 제자 忠坦으로 이어가며 사세를 확장하였고, 일시적으로 妙蓮 寺 계통과 교권장악을 위해 대립하기도 하였다. 원나라의 간섭이 안 정기에 들어선 수선사 10세 慧鑑國師 萬恒(1249~1319)과 제13세 覺 巖國師 復丘(1270~1356) 때에 이르러 수선사의 사세가 회복되고 있 었다.5) 즉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사굴산문의 사세가 퇴조를 보일 때 一然과 그의 문도들에 의해 가지산문이 선종계 뿐만 아니라 당시 불 교계를 주도하였고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난 공민왕대 이후 사굴 산문과 더불어 圓應國師 太古普愚와 그의 문도들이 선종계를 주도하 였다. 그러한 가운데 고려후기 원간섭기 후반에 이르러 性理學界와 마 찬가지로 불교계 일각에서도 自覺 내지 自靜運動의 물결이 일고 있 었다. 원나라와의 유착을 통한 보수화 내지 폐쇄성을 가져온 것이라 기보다 自己淨化 내지 革新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전기의 4大 宗派가 다시 부상하기 시작하였으며, 3) 한편 白蓮社는 了世(1163~1245) 이후 天因(1205~1248)․天頙(생몰년 미상)에 의하여 계승되었으나 원나라의 干涉期인 1284년(忠烈王 10) 충렬왕과 齊國大長 公主의 원찰인 妙蓮寺가 건립되면서 白蓮社의 사상적 전통이 변질되었다.(채상 식, 묘련사의 창건과 성격 고려후기불교사연구 일조각, 1991, 99쪽) 4) 채상식, 一然의 생애와 단월의 성격 앞의 책, 39~47쪽. 5) 李齊賢, 益齋難藁 권7, 慧鑑國師碑銘 ; 李達衷, 覺眞國師碑銘 東文選 권 118 및 朝鮮金石總覽 上.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80 - 그 가운데 일부 선각자들은 性理學者들의 抑佛運動의 전개에 대응하 거나 조선왕조의 건국사업에 즈음하여 참여하였다.6) 이러한 불교 계 내지 선종계의 부침에는 중국 불교계와의 교류, 특히 禪思想이나 禪風의 수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보인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신라말에 전래된 선종은 나말여초에 이 르러 9山禪門으로 성립되었고 그것이 고려시대에 이르러 山門的 傳 統을 이어가는 가운데 고려중기 이래 네 차례에 걸쳐 중국의 禪風이 수용되었다. 즉 고려중기에 大鑑國師 坦然(1069~1158)이 북송 臨濟宗 僧인 育王介諶(1080~1148)과 교류하였고 무인집권기에 普照知訥이 看 話禪을 수용하였다. 또 원간섭기에 蒙山德異(1232~?)와의 교류가 있 었고 마지막으로 공민왕대를 전후한 시기에 중국의 臨濟禪風의 수 용이 있었다. 본고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원나라 선풍은 몽산선풍과 雪巖祖欽 의 臨濟宗 禪風이다. 이미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몽산선풍은 13 세기 후반에 활동한 몽산덕이의 선풍이다. 몽산은 南宋初에 번성한 임제종의 黃龍派와는 달리 남송말부터 주도적인 종세를 나타낸 臨濟 宗 楊岐派에 속하였다.7) 몽산선풍의 특징은 철저하게 看話禪의 公案 6) 필자는 여말선초 불교사에 대한 연구를 각 종파별로 진행시킨 바 있다. 여말선 초 선승과 불교계의 동향 백련불교논집 9, 1999; 고려말 백련결사 정신의 변 질과 그 계승 백련불교논집 10, 2000; 여말선초 화엄종승의 동향 불교학연 구 1, 2000; 앞의 책(2004) 참조. 한편 고려말 불교계는 신진사류의 숭유억불운 동을 펼칠 때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불교계 일각에서는 자정 내 지 자각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필자의 무학대사연구여말선 초 불교계의 혁신과 대응 혜안, 1999 ; 고려말 이성계의 불교계 세력기반 한 국불교학 28, 2001; 조선전기 불교계의 고승탄압과 순교승 불교사연구 4․5 합, 중앙승가대 불교사학연구소, 2004; 조선전기 천태고승 행호와 불교계 한국 불교학 35, 2003; 앞의 책(2005) 참조. 7) 남권희, 몽산덕이와 고려인물들과의 교류 도서관학논집 21, 한국도서관․정 보학회, 1994.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81 - 으로서만 의미를 부여하는 無字話頭의 看話一門과 宗師親見을 강조 하는 것이다.8) 14세기를 전후하여 제 2의 수선사인 禪源社를 중심으로 몽산선풍 이 수용되었고, 몽산덕이의 제자인 鐵山紹瓊은 우리나라에 3년간 방 문했던 바 있는데 그는 몽산덕이의 제자이면서 설암조흠과 그의 제 자 高峰原妙의 법을 사사받았다. 따라서 고려 원간섭기의 선종계는 몽산덕이의 선풍과 고봉원묘 의 선풍을 수용한 상태에서 원간섭기 말엽 고봉원묘의 법형제인 及 庵宗信의 문도들인 石屋淸珙과 平山處林의 선풍을 수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원나라의 선풍이 고려말 이래 조선의 禪風의 주류 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른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결국 元나라 불교계의 선풍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선풍은 몽산덕 이의 선풍과 설암조흠의 문도인 급압종신의 선풍과 고봉원묘의 선 풍이라 하겠다. 고려후기 원나라 선풍을 선종계를 주도했던 사굴산 문 수선사계와 가지산문의 수용 실태와 그로 인한 산문의 선풍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9) 8) 인경, 몽산덕이와 고려후기 선사상연구 불일출판사, 2000, 409-410쪽. 9) 본고는 필자가 그동안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 불교사를 공부하면서 대외관계부 분을 깊이 천착하지 못하였다. 금번 기회에 여원불교에 대하여 정밀 연구를 하고 자 하였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다고 본다. 이는 필자의 중국불교사 내 지 여원불교에 대한 일천한 지식 때문이다. 하지만 史庫全書 를 비롯한 중국측 자료를 열람하고 나름대로 분석을 하였는데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지만 단편적이 거나 사실관계를 설명하는데 적절치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일부만 취하고 그동 안의 연구 성과를 재해석하여 정리한 글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그리고 본 논문에 서는 원나라 선풍 자체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았고 라마교에 대한 검토는 하지 않았다. 이는 고려후기 선종사에서 주류라기보다 부분적인 영향을 지녔다고 보 기 때문이다. 다만 지공의 선풍은 고려말 선종계에 끼친 영향이 크지만 본고에서 는 가능한 다루지 않았다.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82 - Ⅰ. 闍崛山門과 元나라 禪風 고려후기 闍崛山門은 迦智山門과 더불어 선종계를 주도한 대표적 인 중요산문이다. 무신집권기초 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사에서 수선 사결사운동으로 부각되어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15국사를 배출하는 등 선종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고려중기 혜소국사 담진과 대감국 사 탄연이 선종을 부흥하고자 하였고 무신집권기초 사굴산문의 지 눌이 지방의 송광사에서 주석하면서 결사운동을 전개하여 사굴산 문의 중심지는 단연 순천의 修禪社와 그 분원인 강화도를 禪源社를 중심으로 하면서 그 사세가 확산되었다. 수선사는,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결사운동을 전개하면서 그의 문도들이 선종계를 주도하였다. 그들은 지눌의 선풍을 계승하면서 도 중국 원나라의 선풍을 수용하면서 산문을 이어갔다. 처음으로 원 나라 선종계와 접촉사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수선사의 사세가 퇴 락해 갔던 圓鑑國師 冲止代에서 찾을 수 있다.10) 충지는 수선사의 사 세를 회복하고자 元나라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였고11) 직접 원나라 의 황제의 초빙을 받아 다녀왔다.12) 그 밖에 圓玉이라는 선사가 중 국에 다녀온 적이 있으나13) 선풍의 수용과는 별반 관련이 없어 보 10) 冲止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 참조. 진성규, 원감국사 충지의 생애 부산사학 5, 1981; 충지의 우국정신 군사 2, 1981; 원감록을 통해 본 충지의 국가관 역사학보 94 95합, 1982. 11) 동문선 권37, 表箋, 上大元皇帝謝賜復土田表 ; 권40, 表箋, 上大元皇帝表 . 12) 金曛 , 조계산 수선사 6세 贈諡圓鑑國師碑銘 원감국사어록 부록.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83 - 인다. 정작 수선사에서 본격적으로 元나라의 선풍을 수용한 것은 수선 사 제10세 법주 慧鑑國師 萬恒(1249~1319)대이다. … 中吳 異蒙山이 그의 글과 偈를 보고선 칭찬하기를 마지아니하여, 열 몇 편을 화답하고 이어 편지를 보내어 ‘古潭’이란 雅號를 지어 주었 다.… (李濟賢, 益齋亂藁 권7, 慧鑑國師碑銘 ) 만항은 蒙山을 흠모하여 글과 게송을 보냈는데 몽산이 열 몇 편 의 답장을 보내고 古潭이라는 호도 지어 보냈다는 것이다. 다음의 글은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14) 좀 더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있다. … 中吳 休休庵의 蒙山德異는 向上의 宗眼을 갖추었고 祖師의 정맥을 계승하여 고금에 籠羅하고 바르고 그름을 衡鑑하는 데 추호도 남김 없어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신망을 얻고 있다. 널리 크게 온전한 古本을 얻어 서 판각하고 전하여 誠外之乳로 많은 사람들의 입을 적시었다. 또한 그 法施를 널리 하고자 大德 2년 봄에 상인을 통해 부쳐와 널리 法施가 유통되기를 부촉하였다. 나 역시 가볍게 여기지 않고 이것을 기 뻐하여 마침내 거듭 새겨서 널리 유통되기를 바란다. 參玄하는 선비들이 책을 펼치기 전에 다만 살아 있는 눈을 얻고 부처의 慧命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삼가 더럽혀진 구절과 잘못된 말로 부처의 宗旨를 멸하지 말라. 간행하는 뜻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4년 庚子 七夕 住花山禪源 萬 恒 跋題 ( 六祖大師法寶壇經 靑巖寺 刊本 跋文) 위의 刊記를 통하여 만항이 1298년(충렬왕 24) 商人을 통하여 六祖 大師法寶壇經 을 구하여 1300년에 禪源社에서 간행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만항이 제 2의 수선사인 선원사의 주지로 있을 때였다. 13) 충지, 圓鑑國師歌頌 圓玉上人 倒山中 告歸上國 記其所道之語作一篇 以贐行 . 14) 1558년 淸巖寺에 간행된 덕이본 육조단경 의 발문에서 찾아지고 있다. 박상국, 육조단경의 간행과 유통 육조단경의 세계 민족사, 1989, 183쪽.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84 - 그에 앞서 冲止도 선원사 주지시 거란본 대장경 을 수선사로 옮겨 봉안한 적이 있었는데,15) 만항이 선원사에서 六祖大師法寶壇經 을 간행한 것은 모두 수선사의 사세를 진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 한 만항의 노력은 그의 문도들에 의해 계승되었으리라 여겨지지만 수선사에서는 밝혀지는 사실이 없고 선원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만항보다 25년 뒤에 태어난 圓明國師 冲鑑은 몽산선풍을 수용하는데 앞장섰다. 국사는 諱는 冲鑑이요, 字는 絶照이며, 호는 雪峯이다. 어려서부터 이 미 素食하였으며, 뭇 아이들과 유희를 하는데도 포백으로 袈裟를 만들어 佛事놀이를 하였고, 점차 자라서는 부모에게 명을 받고 禪源寺에서 머리 를 깎고는 慈悟國師에게 예를 드리고 스승으로 삼았다. 나이 19세에 僧科를 보아 上上科에 올랐으나 어느 날 크게 탄식하여 말하였다. “비록 다시 저 十方에 있는 모든 부처님의 淸靜한 敎理를 恒河沙와 같이 읽고 외운다 하더라도 스스로 노고만을 더할 것이다. 어찌 無偏果 닦는 것만 하랴.” 마침내 하던 일을 버리고 옷을 털고 일어나 사방에 노닐었는데, 吳楚 에 머물다가 鐵山瓊禪師의 道行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맞아 동 국으로 돌아와서 3년 동안 제자의 예로 모셨다. 瓊禪師가 심히 그에게 기대하였다. 瓊禪師가 하직하고 돌아가게 되자 국사는 龍泉寺의 주지가 되어 처음 으로 百丈海禪師의 禪門淸規를 취하여 이를 행하였고, 뒤에 禪源寺의 住 持로 15년 동안 있으면서 宗旨를 크게 선양하여 온 나라의 모범이 되었 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7, 忠淸道 林川郡 佛宇 普光寺) 冲鑑(1274~1388)은 호는 雪峰16)으로 圓明國師이다. 1280년(충 15) 동문선 권112, 丹本大藏讚疏 . 16) 충감의 호가 설봉이었는데 문집류에 다음과 같은 승려들도 설봉이라는 호를 가 지고 있음이 확인된다. 즉 獨谷集 에 나오는 雪峰覺演( 獨谷集 권상, 送覺演禪 師二首 別號雪峰 )와 剔若齋學吟集 과 耘谷行錄 四佳集 에 나오는 梅竹軒 雪峰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85 - 렬왕 6) 7세에 선원사에서 출가하여 圓悟國師 天英(1215~1286)에게 사사받고 1292년(충렬왕 18)에 승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1304년 몽산의 제자 鐵山紹瓊을 고려에 초빙하여 3년간 모셨 을 만큼 蒙山의 선풍을 수용하는데 앞장섰다. 高麗國大藏移安記 에 의하면 철산은 귀국할 때에 대장경을 가지고 돌아갔는데 고려의 선 종계 뿐만 아니라 신도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17) 철산이 방문하 였을 때에 왕은 承旨 安于器를 보내 영접하게 하고 그의 설법을 들었 다.18) 안우기의 아버지와 아들에게서도 그러한 면모를 읽을 수 있 다. 즉 그의 부인 安珦은 元瓘(1247~1316)19)과 함께 대장경 1부를 四明山 天童禪刹에 봉안한 적이 있으며20), 그의 장남은 출가한 대선 사 頂音으로 만항의 문도였다.21) 따라서 몽산이나 그의 문도인 鐵山 丘僧統( 剔若齋學吟集 권상, 戱寄元典住持 ; 耘谷行錄 권5, 寄右街雪峰丘僧 統 , 寄雪峰丘僧統 )이다. 설봉구 승통은 승계로 보아 교종승려이고, 혹 독곡집 의 설봉각연이 충감일 수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17) 허흥식, 1306년 고려국 대정국이안기 앞의 책. 18) 고려사 권32, 세가 32, 충렬왕 30년 7월 기묘. 19) 윤관이 혜인사에 대장경을 봉안한 것은 그의 묘지명에 다음과 같은 두 글로서 알 수 있다. “… 또 江浙에서 대장경 한 부가 만들어져서 杭州의 惠因寺에 모셔 두었는데, □ 실로 萬世의 보물이었다. 이를 아울러 사들이면서 □田□藏, □白 粲(白米) 15□를 바쳤다. 몇 년에 걸쳐 토지와 노비[田藏]의 경비를 들여 기울여 장수를 비는 비석을 세우니, 강남의 道人과 俗人이 노래를 지어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 시를 이은 것이 한 軸이나 되었는데 이를 보내왔다.….”( 元瓘墓 誌銘 ). “… 지금 (황경) 2년(충선왕 5, 1313) 봄에는 재상인 退翁 元공이 하인 李 孝道, 高□才를 시켜 시주물을 가지고 杭州에 와서 대장경 1질을 인쇄하여 옻칠 한 함에 담아 寶輪藏에 두게 하였다. 또한 다시 성 바깥의 좋은 밭을 사서 (사찰 의) 常住에 넣어 승려들의 밥 먹을 비용으로 하여 해마다 대장경을 독송하게 하 였으니 경전[法]과 음식[食]의 시주를 모두 갖추었다.…” 慧福, 杭州高麗慧因寺 土地喜捨記 , 李飛侯, 玉岑山慧因高麗華嚴敎寺志 ; 中國佛寺誌叢刊 56. □는 결 락자임. 20) 閔漬,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 (李翥, 玉岑山慧因高麗華嚴敎寺志 6). 21) 안축, 謹齋集 ; 安于器墓誌銘 .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86 - 의 禪風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여겨지며, 아울러 만항의 제자 정음을 통하여 그러한 선풍이 수선사에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만항의 문 도로 나타나고 있는 송광사의 승려 小止는 훗날 중국에 유학을 가게 되는 無學自超의 출가사였고22) 또한 만항의 대표적인 제자 景瑚는 指空禪賢과 법을 겨루고 중국의 유력했던 釋瑚라고 추정된다.23) 무엇보다도 禪源社가 몽산선풍의 메카였다는 것은, 충감이 수선 사 사주 원오국사 천영에게 출가하고 15년간 선원사에 주석하였다 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24) 그의 선풍의 영향으로 충감이 처음으로 백장선사의 禪門淸規를 실천 보급하였던 데에서 알 수 있 는데, 이는 공민왕대 太古普愚와 龜谷覺雲에게 계승되게 되는 것이 다.25) 그리고 다음 장에서 살펴볼 迦智山門의 混丘와 그의 문도에게 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 혼구는 직접 몽산을 찾아 알현 하고 그의 문도인 冲坦이 선원사 주지로 있었다.26) 선원사는 충감 전에 선원사 주지였던 복암이 그의 문인 전인을 시켜 불사에 사용될 채색을 사오게 하는 등27) 중국의 채널이 되었 던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환암혼수의 스승인 息影庵이나 충감 의 제자이면서 나옹혜근의 고제인 宏演이 선원사 주지였다.28) 그리 고 선원사의 승려 法蘊은 1348년 江折에서 구해온 大藏經 을 개경의 報法寺에 봉안하였고29) 수선사 13세 각암국사 복구의 문도 가운데 22) 변계량, 묘엄존자탑명 조선금석총람 하. 23) 이제현, 익재난고 권5, 序, 送大禪師瑚公之定慧社詩序 釋瑚 ; 동문선 권85 序. 24)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7, 忠淸道 林川郡 佛宇 普光寺. 25) 황인규, 앞의 논문(2003); 앞의 책(2005). 26) 이계영, 尹珤妻朴氏墓誌銘 . 27) 東文選 권65, 선원사 비로전 단청기 . 28) 황인규, 환암혼수의 생애와 불교사적 위치 경주사학 18, 1999 참조. 29) 이색, 牧隱文藁 권6, 보법사기 .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87 - 白華는 선원사 출신 승려였다.30) 사실 선원사는 一然이 그곳에 머물면서 知訥의 법을 이었다고 하 거나 그의 입적을 지켜본 승려가 선원사 승려 頂이었으므로31) 일찍 부터 반도의 중심부 서해안에 위치한 선원사가 일찍부터 그러한 역 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2) 수선사에서 몽산선풍을 계속 수용하고 있었던 것은 수선사 13세 復丘대에 이루어지고 있다. 1341년과 1353년에 열린 轉藏法會에 문 인 之牧 등과 더불어 諸山의 장로 1000여 명이 참여하였는데33), 그 가운데 몽산덕이를 찾아 갔을 때 그로부터 10송이라는 이름을 받았 던 승려들이 찾아진다. 了巖 覺圓上人 覺性上人 妙浮上人( 白巖山淨土寺事蹟 , 조선사찰사 료 상) 了庵 元明長老 新松 戒松 定松 惠松 行松 願松 靈松 妙松 知(松) 古松 ( 法門景致 ). 了巖은 了岩元明長老과 동일인물로 생각되며, 1340년 당시 大維 那知圓明大禪師 覺圓34)도 몽산을 찾아간 覺圓上人과 같은 인물로 추 정된다.35) 최근에 요암장로는 최근에 발견된 몽산법어 8번째 普說 30) 東文選 권118, 각진국사비 . 31) 민지, 군위인각사 보각국존 정조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4) 264쪽. 禪源 頂 선사는 일연의 비문 가운데 가야산본에만 나온다. 32) 선원사에 대해서는 황인규, 고려후기 선원사의 창건과 고승들 경주사학 21, 2002) 참조. 33) 백양사의 고려말 전장법회에 대한 논고로는 이병희, 고려말 조선초 白羊寺의 중창과 경제문제 한국사연구 99․100, 1997 참조. 34) 白巖寺 轉藏法會 堂司榜 조선사찰사료 상, 175쪽에 의하면 1340년 당시 大 維那知圓明大禪師 覺圓으로 나타나고 있다. 35) 여기서의 원명은 원명국사 충감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또한 원명은 충숙왕 7 년(1320) 12월, 元나라가 충선왕을 吐蕃으로 유배 보낼 때 방해를 한 승려가 원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88 - 에서 전라도 수선사 고승으로 밝혀진 바 있다.36) 元貞二年丙申四月旦日 高麗國全羅道修禪寺了庵明長老 請祝贊駙馬高麗 國王 丙申上甲普說(북경도서관본, 보조사상 19 부록 몽산화상보설 ) 1296년(충렬왕 22) 4월 了庵明長老가 충렬왕을 위한 설법을 청하자 몽산이 설법한 것이다. 여기서 了庵明長老가 고려 修禪寺(社)의 승려 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그리고 몽산이 호칭한 10송 가운데 前淨 慧社主 定松 惠松이 일치하고 있는데 그들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또한 戒松도 幻庵混修의 출가사인 繼松이 아닐까 하며37) 지송도 知 浮가 아닐까 추정된다. 특히 轉大藏智識 知浮는 1340년 복구의 명을 받아 1340년 백암사 주지 心白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대장경 을 구 하러 다녀오기도 하였다.38)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수선사계인 원명국사 충감이 몽산의 제자 철산소경을 직접 초빙하였지만 본사인 수선사계에서도 직접 몽산의 선풍을 주도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복구의 문도 가운데 元珪․拙庵演溫․息影淵鑑 등은 모두 太古普愚의 문도였으므 로 迦智山門에도 몽산선풍이 유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몽산선풍 이후 새롭게 원나라의 선풍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게 되 명으로 나온다. 즉 ‘덕릉이 吐蕃으로 갈 때 공의 아들 文度가 난을 듣고 달려가, 길에서 공을 만나서 함께 關西까지 쫓아갔지만 승려 圓明의 배반으로 中南에서 병사에게 막혀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최성지묘지명 )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 다. 여기서의 원명은 원나라 고승이라 여겨진다. 36) 최연식․강호선, 몽산화상 보설의 내용과 고려후기 불교계와 관계 보조사상 19, 2003. 필자는 수선사의 논고를 발표하면서 요암이 수선사 승려라는 사실을 밝혔고(황인규, 앞의 논문(2003) 참조), 같은 학술발표장의 다음의 발표에서 최연 식과 강호선이 북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몽산보설 을 학계에 처음으로 소개 하였다. 이로써 그러한 사실이 확증되었다. 37) 황인규, 앞의 논문(1999) ; 앞의 책(2004). 38) 백암산정토사사적 조선사찰사료 상, 165쪽.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89 - 는 것은 고려말 麗末三師와 그들의 문도들에 의해서였다. 그 가운데 사굴산문의 수선사계는 懶翁惠勤과 그의 문도들이 선풍의 수용을 위해 앞장을 섰다. 나옹혜근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至正 甲申年에 회암사로 가서 주야로 홀로 앉아 정진하다가 홀연히 깨달음을 얻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국에 가서 선지식을 參訪하고 유학할 뜻을 굳히고, 출국하여 戊子年 3월 燕都에 도착하여 指空스님을 참방하 고 法을 물었는데 서로간의 문답이 契合하였다. 10년 … 그 해 봄에는 남쪽으로 江浙 지방을 두루 순례하고 8월에는 平山處林을 친견하였다. … 이 때 평산은 雪庵이 傳授한 及庵宗信의 法 衣와 拂子를 信物로 주었다. 辛卯年 봄에는 寶陁洛迦山에 이르러 관세음보살상에 예배하고, 壬辰年 에는 伏龍山에 이르러 千巖스님을 친견하였다. … 그리고 그 해에 북방 으로 돌아가서 연도 법원사에 있는 지공스님을 두 번째로 친견하였다. … 戊戌年 봄에는 지공스님을 하직하고 기별을 받아 귀국길에 올라 동쪽 으로 돌아왔다. …. (이색, 檜巖寺禪覺王師碑 조선금석총람 상 : 교감 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 4, 1997) 나옹혜근은 원나라에 유학을 가서 범승 지공선현, 及庵宗信의 제 자 平山處林, 中峰明本의 제자 千巖元長 등 당대의 선승들과 조우했으 나 그에게 가장 중요인물은 지공과 평산이다. 그는 평산처림의 선풍 을 수용하였으나 범승 지공의 대표적 계승자였다. 여기에는 그의 문 도인 無學自超와 竺源智泉(1324~1395)도 함께 몇 년 후 원나라로 가서 나옹과 조우하고 귀국하였다. … 다음 해인 갑오년 1월 원나라 연도에 있는 법천사에 이르러 앞서 입원한 나옹스님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나옹스님이 한 번 보고 깊은 법기로 여겼다. 무령을 유람하고 오대산 을 거쳐 서산 영암사에서 다시 나옹스님을 만났다. 그곳에서 수 년 동안 머물렀는데 그가 한번 선정에 들면 공양할 때가 되어도 알지 못했다.…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90 - 나옹이 이르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내가 너를 속이지 못하는 줄 알았다. ” 하였다. … tm님의 소득처인 견해를 질문해보면 자못 의심할 바가 없었다. 그런 데도 스님은 산천을 두루 다니면서 선지실과 도반 찾기를 계속하였다. 장차 절강지방을 참방하려고 하였으나 때마침 남방에 변란이 일어나 길 이 막혔으므로 참방 路程을 중지하였다. … 스님이 돌아 온 뒤에 나옹스 님 역시 지공의 삼산양수의 위치에 절을 창건하라는 수기를 가지고 돌아 와 천성산 원효암에 주석하고 있었다. … (변계량, 회암사 묘엄존자탑명 조선금석총람 하) … 至正 계사년에는 지금의 王師인 無學과 함께 燕京에 들어가 法雲 寺에서 指空을 배알하였는데, 당시 懶翁은 앞서 들어가 지공의 印可받아 道의 명성이 이미 드러나 있었다. 두 선사는 모두 그에게 나아가 사사하 고 같이 종유하며 연마하여 조예가 더욱 높아졌다. 또 五臺山에 들어가 碧峯和尙을 배알하였는데, 그때 名士인 趙仲穆이 선사에게 竺源이란 두 大字를 篆書로 써 주었으니, 이는 선사의 法號였다. 병신년(공민왕 5, 1356년)에 귀국하였다. … (권근, 용문사 정지국사 조선금석총람 하) 자초는 혜근의 대표적인 문도였는데, 이는 혜근과 자초의 遭遇事 實에서 더욱 명확해진다. 자초는 원나라에서 혜근과 처음 조우한 이 래로 입적할 때까지 몇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종하였다.39) 축 원지천은 자초의 도반으로 그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지공과 혜근에 게 인가를 받고 귀국하였으며 조선초에 正智國師로 추증된 고승이 었다.40) 그 외의 나옹의 문도로 중국에 유력했던 승려는 野雲覺牛, 仲英覺 雄, 幽谷覺宏 같은 승려들도 중국에 유력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 다.41) 39) 이에 대해서는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 한국불교학 23, 1997 ; 앞의 책(1999) 참조. 40) 권근, 용문사 정지국사비 조선금석총람 하, 727쪽. 41) 황인규, 앞의 논문(1999). 그 외에 나옹의 문도로 중국에 유력했던 것으로 보이 는 승려는 다음과 같으나 더 이상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다. 즉 나옹화상어록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91 - 夢巖老人 野雲覺牛는 懶翁慧勤의 대표적인 제자 가운데 한 인물 로, 혜근의 侍者였다. 그는 1376년(우왕 2) 혜근이 입적하자 도반인 仲英覺雄42)과 함께 중국으로 들어가 법을 구하려 했다.43) 그는 현재 우리나라 승려의 所依經典인 自警文 1권을 지었으며44) 나옹화상어 록 을 교수하고 이색에게 서문을 청하였다.45) 그리고 1370년 幽谷 覺宏도 강절 지방으로 유학을 갔다 왔다.46) 無學自超의 문도47)들 가운데 寂峯信圓, 竹溪軒 信廻 같은 승려들 도 중국에 유학을 갔다 왔다. 淸風軒 寂峯信圓은 1389년 나옹혜근의 종풍을 흠모하여 중국 지방을 유력하고자 하였다. 그의 평생 숙원인 중국 유력의 뜻은 스승인 혜근과 자초의 유람한 뜻을 새겨서 이름난 스승을 찾아보고 宗旨를 뚫어 밝히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의 도는 三觀의 이치와 般若의 쓰임을 갖추었음을 말하고 있다. 신원 보다 2년 뒤인 1391년 竹溪軒 信廻도 중국 강절 지방에서 유력했다.48)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말 이래 나옹혜근과 무학자초 그리고 자초의 문도들로 이어지는 사굴산문의 고승들은 중국에 유 에 의하면 참방하러 떠나는 谷泉謙선사를 보내며 , 남방으로 행각길을 떠나는 璉 侍者를 보내면서 , 강남으로 돌아가는 通禪人을 보내면서 , 강남으로 가는 蘭禪者를 보내면서 , 강남으로 가는 고산승수좌를 보내면서 의 게송이 그렇다. 42) 李穡, 牧隱文藁 권10, 說, 仲英說 . 43) 權近, 陽村集 권15, 贈玗野雲上人後序 ; 李崇仁, 陶隱集 권2, 題野雲詩卷 ; 己和, 涵虛堂得通和尙語錄 贈懶翁侍者覺牛號野雲 ; 李穡, 牧隱詩藁 권6, 爲 玗師題璥菴卷 ; 李崇仁, 圃隱集 권2, 題牛師野雲軒詩卷 ; 金九容, 惕若齋學吟 集 下, 野雲軒 ; 金宗直, 佔畢齋集 권23, 贈野雲吾方外友螺上人之門徒也… . 44) 이지관, 한국불교 소의경전연구 보련각, 1969 ;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한국 불교 찬술문헌목록 동국대 출판부, 1975 ; 김영태, 三師 合集 初發心自警 한 국불교 고전명저의 세계 민족사, 1994, 270-273쪽. 45) 李穡, 普濟尊者語錄序 나옹화상어록 ( 한국불교전서 6, 702쪽). 46) 원천석은 그의 나이 41세 되던 해인 1370년 江浙지방으로 떠나던 覺宏을 보내 면서 시를 짓고 병서를 지었다( 耘谷行錄 권2, 送雲遊子覺宏遊江浙幷 ). 47) 황인규, 무학자초의 문도와 그 대표적 계승자 삼대화상연구논문집 3, 2001. 48) 元天錫, 耘谷行錄 권5, 送竹溪軒信迴禪者江遊詞 幷序 .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92 - 력하면서 선풍을 받아들이고 있음에 비해 태고보우의 문도들은 그 의 스승과는 달리 대부분 원나라에 유학하지 않았다. 또한 가지산문 계 보우의 문도들이 고려말 공민왕대 이후 조선건국 전까지 불교계 를 주도하였음에 비해 사굴산문계 고승들이 조선의 건국사업에 참 여하고 건국 후 자초를 중심으로 하는 문도들이 조선전기 불교계를 주도하였는데 이는 선풍의 수용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Ⅱ. 迦智山門과 元나라 선풍 가지산문은 신라말에 선종이 유입된 이래 도의국사와 그의 제자 체증이 산문을 개창하였으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가지산문계 선승 들의 활동을 별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침체했던 것 같다. 고려중엽 의 圓應國師 學一(1052~1144)과 그의 문도들에 의해 가지산문이 잠간 부흥하였다. 그 후 원간섭기 보각국존 一然(1206~1289)이 등장하여 그 의 원간섭기에 이르면서 지방의 수선사의 법주를 중심으로 하는 사 굴산문계의 사세는 그런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백련사의 묘 련사파가 등장하면서 불교계를 주도할 무렵에 一然(1206~1289)이 등장하여 불교계를 주도하였고49) 그의 문도 보감국사 혼구와 그의 49) 고려중엽 선종을 부흥시켰던 원응국사 학일 이후 150여년 만에 처음으로 국존 으로 책봉될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가지산문의 부흥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일 연이 1283년(충렬왕 9) 국존으로 책봉되었는데, 그의 국존 책봉은 인종대 학일이 왕사로 책봉된 이후 처음이며, 공민왕대 태고보우가 왕사와 국사에 책봉된 징검 다리 역할을 하였다고 여겨진다.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93 - 제자인 충탄이 등장하면서 가지산문의 사세가 부각되었다. 그 후 원 나라 간섭이 일탈되는 시기인 공민왕대 태고보우가 등장하면서 고 려말까지 선종계 뿐만 아니라 불교계의 중요한 산문이 되었다. 이러 한 사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일연은 1216년(원종 2)에 왕의 부름을 받고 선월사(선원사)에 머물면서 목우자의 법을 이었다고 하였다.50) 이는 일연이 혜심의 제자 몽여에게 重編曹洞五位 를 편찬하여 그에게 점검을 받았던 사 실과 궤를 같이 한다. 그가 가지산문계이면서도 불교계의 위상이 높 았던 수선사를 표방한 것을 의미하지만51) 한편 선종계를 주도했던 지눌의 선교 융화적이고 포용적인 선풍의 전개 때문이라 생각된다. 수선사의 제 2사주 혜심이 금장선사를 가르쳤고 선사의 선풍이 혼 구에게 전해졌던 사실이 밝혀진 것도 그러한 맥락이다.52) 이처럼 수선사의 승려가 가지산문의 승려에게 선풍을 전하는 주목할 만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1284년(충렬왕 10) 9산 문도회를 두 차례 개최하였다. 고려중 기 이래 9산 문도회의 개최는, 1251년(고종 38) 최항이 당시 국도인 강 화도에 보제사의 별원을 짓고 9산선문의 선사를 불러 모으고 수선 사 법주 원오국사 天英이 개최한 이래 처음이다.53) 그는 국존으로 책봉된 후 인각사를 하산소로 삼고 여기서 9산 문도회를 개설하였 다.54) 이는 당시 불교계를 통합 주도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가 남긴 저서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계를 아우 50) 민지, 군위인각사 보각국존 정조탑비문 . 51) 채상식, 일연의 출현과 가지산문의 추이 앞의 책 참조. 52) 천책, 호산록 권3, 奇金藏大禪師 ; 황인규, 목우자 선풍과 고려후기 조선초 고승들 보조사상 19, 2003. 53) 이익배, 승주 불대사 자진 원오국사비 . 54) 민지, 군위인각사 보각국존 정조탑비문 .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94 - 르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의 전통성 내지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 다.55) 일연은 가지산문이었으나 지눌의 사상을 표방하였던 것도 이 러한 시도에서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임제종뿐만 아 니라 조동종이나 우리나라의 고유의 민간신앙을 존중하는 등 다양 한 사상을 수용하고자 하였으며,56) 그러한 선풍이 그의 제자인 혼 구에게 이르러서는 몽산의 선풍까지 수용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의 문도는 매우 많았으리라 생각되며, 실제 그의 비 음기의 문 도명이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으나 제대로 알려진 인 물은 거의 없다. 다만 대선사 선린이나 선원 정, 보제사의 승려 대선 사 法流, 비를 세운 청분(혼구) 등에 불과하다.57) 그 가운데 혼구는 그의 행장이 남아 있으며 단편적인 기록이 찾 아지므로 그에 대한 행적이나 활동을 정리할 수 있다 中吳의 異蒙山禪師가 일찍이 無極說을 지어 선박편에 부쳐왔었는데, 국사가 묵묵히 그 의미를 터득하여 스스로 호를 ‘無極老人’이라 하였다. (이제현, 益齋亂藁 권7, 碑銘, 曹溪宗慈氏山瑩源寺寶鑑國師 碑銘 幷序 ) 混丘 (1250~1322)는 일연에게 사사하여 법을 사사받았고 1289년 무 렵 운문사 주지가 되었고 1293년 무렵 내원당과 연곡사 주지로, 1295 년 대선사로서 내원당 주지와 보경사 주지로 있었다. 충숙왕 때인 1313년 왕사로 책봉되었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일연의 법을 이었던 가지산문의 고 55) 일연은 그동안 전승되었던 설화 야사를 口碑 정리하였고, 이를 우리문화로 다 듬었다는 점에서 그는 전통문화의 계승자요, 창조자라고 할 것이다. 56) 일연에 대해서는 김상현, 三國遺事에 나타난 一然의 佛敎史觀 한국사연구 20, 1978 참조. 57) 민지, 군위인각사 보각국존 정조탑비문 음기.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95 - 승으로 1313년 왕사로 책봉되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왕사나 국사로 책봉된 인물을 살펴보면 가지산문계의 일연이 1282년 국존으로, 그 의 문도 혼구가 1313년에 왕사로 책봉되고 1308년 천태종승 정오가 국통으로 책봉되었다.58) 이와같 이 충숙왕이 즉위할 무렵인 1313년에 백련사의 묘련사계 와 선종의 가지산문계에서 국통국일대선사와 왕사로 각기 책봉되 면서 양 종파가 당시 불교계를 주도했다. 당시 충렬왕은 만승회를 개최할 정도로 대단한 호불 군주였다. 묘련사를 창건하여 정오 등의 백련사의 고승을 개경으로 초빙하여 묘련사파를 이루게 하였고 조 계종의 일연이나 그의 제자 혼구 등의 가지산문계는 물론 수선사의 만항 등 사굴산문의 승려들을 우대하였다.59) 더욱이 주목되는 사실 은 혼구가 새로운 선사상으로 떠오르고 있던 몽산선풍을 적극적으 로 수용하였다는 것이다. (1296년, 충렬왕 22) 겨울에 고려의 萬壽上人이 와서 말하기를 高麗國 內願堂 大禪師 混丘․靖寧院 公主王氏 妙智․明順院 公主 王氏 妙惠․前 都元帥 上洛公 金方慶․侍中 韓康․宰相 廉承益, 宰相 金昕, 宰相 李混, 尙武 朴卿, 尙武 柳裾 여러분이 재삼 편지를 보내서 다음과 같이 부탁하 였다( 法門景致 ).60) 혼구는 1295년 대선사로서 내원당 주지와 보경사 주지를 겸하였 는데 그 이듬해인 1296년 내원당의 대선사 혼구도 몽산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였다. 이렇듯 몽산의 선풍은 가지산문뿐만 아니라 수선사 와 그 분원인 선원사에서 앞장서서 수용하였던 것인데 여기에는 일 58) 고려사 권34, 세가 34, 충숙왕 즉위년 11월 무자. 59) 고려사 권34, 세가 34, 충숙왕 즉위년 10월 병자. 60) 남권희, 필사본 제경촬요에 수록된 몽산덕이와 고려인물들의 교류 도서관학 21, 1994 부록 法門景致 재인용.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96 - 연의 문도인 혼구도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것이다. 혼구를 비롯한 고려인들은 1295년 휴휴암으로 갔다가 그 이듬해 10여 명의 고려인들이 다시 휴휴암으로 가서 몽산을 방문하였다. 즉 1296년 9월 충렬왕과 齊國大長公主는 590명의 신료들을 거느리고 원 나라에 가서 머물다가 1297년(충렬왕 23) 3월에 고려로 돌아오기 위해 燕京을 떠났다. 당시 그들의 원나라 방문은 1296년 11월에 있었던 세 자와 元 晉王의 딸과의 혼인과 그 이듬해 정월의 賀正에 참석하기 위해서 였다.61) 몽산을 참례한 10여명의 고려인들은 충렬왕을 수행 하여 入元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休休庵에 머물고 있던 蒙山을 방문하자 몽산은 그들에게 입문을 허락하였다. 그런데 1319년(충숙왕 6) 무렵 고려의 승려들이 원나라에 들어가 高峰原妙나 그의 제자인 中峰明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명본은 스 승 원묘가 중시하였던 ‘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들어 설법하였고 고려의 승려인 收․樞․空․昭․聰 다섯 장로에게 내린 법어에서 大 信心과 大疑情을 강조하였다.62) 大信根과 大疑情은 大慧선사 이래 많 이 강조되었으나 원묘가 다시 大憤志를 첨가하여 看話禪을 참구하는 데 보다 체계적인 수행방법론을 제시하였다.63) 고려의 승려인 收․ 樞․空․昭․聰 다섯 장로는 아마도 가지산문계였다고 여겨진다. 당 시 혼구의 몽산선풍의 수용은 수선사나 제 2의 수선사인 선원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직접 원나라를 방문하여 직접 선승들과의 교유하기도 하였던 사실에서 짐작된다. 혼구의 문도로 추정되는 如璨은 다음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61) 고려사 권31, 세가 31, 충렬왕 22년 9월 정해, 11월 임진 ; 23년 1월 갑자, 3월 신미. 62) 天目中峰和尙廣錄 권4상, 示高麗收樞空昭聰五長老 . 63) 조명제, 고려후기 간화선연구 혜안, 2004, 168쪽.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97 - 중봉명본이 머물렀던 天目山에 갔다 왔다. … 3남은 어려서 출가하여 如璨이라 하고 가지산문에 투신하였다. 네 번이나 수좌로 뽑혔고 상상과에 합격하여 속세를 벗어나 장한 뜻을 펼쳤 으며 남녘을 순례하며 天目山에 이르렀다가 돌아오니 선사로 임명하는 등 글(批)이 내려와 있었다.64) 여찬은 시중 金就礪의 손자인 金賆(1249~1301)의 4남으로, 어려서 가지산문에 출가하여 네 번이나 수좌에 뽑혔고 승과의 상상과에 합 격하여 수행하다가 천목산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여기의 천목산은 중국의 천목산으로, 天目 中峰明本이 거주하였던 사찰이라 생각되며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정된다.65) 그의 아버지인 김변은 1270년 무렵 충렬왕이 원나라에 볼모로 갔을 때 4년간 모셔 충렬왕이 즉위 하자 이등공신에 책봉되어 知都僉議司事와 集賢殿 大學士 同修國史에 오른 인물이며 그의 큰형의 넷째 딸은 충렬왕의 비인 淑昌院妃가 되 었다.66) 1302년 원나라에서 無禪師가 오자 가서 법요를 들었으며 선 원사의 원명국사 설봉충감이 원나라에 가서 몽산덕이의 제자 철산 소경을 모셔오자 1304년 소경에게 가서 대승계를 받았다. 그런데 無선사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으나 철산소경에게 대승계 를 받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미 내원당 대선사 混丘가 몽 산덕이를 찾아뵙겠다고 편지를 쓰고 직접 원나라에 가서 몽산을 만 났던 바도 있었는데, 가지산문에 출가하였던 여찬의 어머니도 소경 으로부터 계를 받았다.67)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여찬은 혼구 64) 김개물, 김변의 처 허씨묘지명 . 65) 천목산에 어떻게 누구와 다녀왔는지, 중봉묘본과 어떤 관련이 있었는지 심도 있는 고찰이 요구된다. 66) 김훤, 김변묘지명 ; 김개물, 김변의 처 허씨묘지명 . 67) 김개물, 김변의 처 허씨묘지명 .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98 - 의 제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혼구의 제자로 景楚라는 승려도 역시 원나라에 유력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68) 혼구의 문도인 여 찬과 경초와 더불어 원나라의 선풍을 계승한 고승은 충탄에게도 찾 아 볼 수 있다. 3남 冲坦은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었는데 지금 鑑智王師 丘乙堂 아래에서 禪 社의 주지 선사로 있다. 69) 충탄은 가지산문 혼구의 문도였으며, 선원사의 주지를 하였다. 沖坦은 윤보의 3남이었는데, 출가하여 1321년(충숙왕 8)년 무렵에 鑑 智王師 丘乙堂 아래에서 禪□社의 주지로 있다는 것이다. 鑑智王師 丘 乙堂은 혼구를 지칭하는 것으로, 그의 스승 일연이 선원사에 머물렀 던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禪□社는 바로 선원사로 추정되며, 1321년 혼구가 선원사에서 법주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일연뿐 만 아니라 그의 제자 혼구도 선원사에 법주로 있었다. 이는 수선사의 고승이 무신집권기 불교계를 주도할 만큼 사세가 컸던 전통이 있었고 원간섭기의 불교계를 주도하였던 가지산문계 일연과 그의 제자 혼구가 왕실과 밀접했던 선원사의 주지로 취임하 거나 주석하게 된 것이라고 풀이된다. 더욱이 이러한 원나라 선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다음의 글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가종과 더불어 가지산문계의 일연 그리고 혼구에 이어 충탄이 당시 불교계를 주도하였다. 이는 普照國師 知訥 에서 普覺國尊 一然 그리고 圓應國師 太古普愚로 이어지는 조계종의 68) 이곡, 稼亭集 권14 古詩, 次無極師韻 送其徒景楚歸錢 . 69) 이계영, 尹珤妻朴氏墓誌銘 .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99 - 正脈을 복원하는 내용으로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병자일에 상왕이 승려 2천 명에게 음식을 먹이고 연경궁에서 2천 개 의 燃燈을 5일간 계속하였다. 그리고 銀甁 1백 개를 절에 기증하고 상왕 이 손수 향로를 받들고 伶官(악공)들을 시켜 주악하면서 禪僧 沖坦과 敎 僧 孝楨을 맞아다가 설교하게 한 후에 두 승려에게 각각 은 한 근씩 주 었고 나머지 중들 2천 명에게는 은 20근을 주었다. 일찍이 상왕이 1백 8 만 명의 승려들에게 음식을 먹이고 1백 8만 개의 등에 불을 켤 것을 발 원한 바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날마다 2천 명의 승려들에게 음식을 먹 이고 2천 개의 등불을 켜기로 하였으니 5일간이면 승려와 등의 수가 1만 씩 되므로 기어코 발원을 성취할 것을 기약하였다. 이 행사를 萬僧會라 고 이르는 바 그 비용은 이루 기록할 수 없었다( 고려사 권34, 세가 34, 충숙왕 즉위년(1313) 10월 병자). 상왕인 충렬왕이 충탄과 효정이라는 인물을 초빙하여 설교하게 하였다. 효정은 혜영의 제자 승통 深智洞解 五明大師 孝楨이며, 그의 立碑를 주관한 인물로 금산사와 동화사 주지를 역임했던 인물인데 왕실의 총애를 받아 개성에 초빙되었듯이 개경에 진출한 것을 볼 수 있다.70) 태고보우는 여찬이나 충탄과 거의 동시대 인물로 조금 후배였기 때문에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 … 19세부터 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를 들어 참선하였다. 원통 계유년 (1333, 충숙왕 2) 城西의 감로사에서 지내다가 어느 날 만법귀일에 대한 의단이 각락하고 8구의 송을 지었으니 “불조가 산하와 더불어 입이 없지 만 모두 삼켜 버렸다.” 함이 그 결구이다. 그 후 후지원 정축년(1337, 충숙왕 복위 6)에 스님의 나이 37세에 되 던 겨울에 전단원에 안거하는 동안 조주의 무자화두를 참구하였다. 이듬 해 1월 7일 5경에 활연 대오하고 8구의 송을 지었으니 “굳은 조관을 타 70) 황인규, 여말선초 유종종승과 불교계의 동향 동국사학 39, 2003 ; 앞의 책.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100 - 파하고 나니 청풍이 태고에서 불어오더라” 라는 것이 그 결구이다. … 至正 丙戌年에 스님의 나이 46세 때 元나라 燕都로 入元하였다. 竺源 永盛禪師의 고명함을 듣고 南巢로 찾아갔으나, 그는 이미 입적한 후였다. 그리하여 다시 방향을 바꾸어 湖州에 있는 霞霧山으로 가서 石屋淸珙禪 師를 친견하고, 자신이 얻은 바를 낱낱이 아뢰고 아울러 太古庵歌를 바 쳤더니, 石屋이 이를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큰 法器로 여겼다. 이어 日用 事를 묻는 데 대하여 스님은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또 여쭙기를 “지금 스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것 이외에 더 일러주실 말씀이 있나이까?” 하 니, 石屋이 이르기를 “老僧도 이와 같고 三世諸佛도 또한 이와 같을 뿐 이니라.” 하면서 드디어 信表로서 袈裟를 전해주고는 이르기를 “老僧이 이젠 다리를 뻗고 편안히 잠잘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였으니, 石屋은 臨濟의 18대 法孫이다. 스님이 그곳에서 보름 쯤 있다가 떠나올 때 柱杖子를 주면서 “길 조 심하여 잘 가라”고 당부하므로 스님은 주장자를 받고 하직 인사를 하고 다시 燕都로 돌아오니, 스님의 도덕에 대한 명성이 널리 전파되어 있었 다. 天子가 이 소문을 듣고는 永寧寺에서 受法한 開堂法會를 열기를 청 하였다. 이 때 順帝임금은 金襴袈裟와 沈香木으로 만든 拂子를 하사하였 고, 皇后와 皇太子는 香과 폐물을 바쳤으며, 王公과 士女들도 앞을 다투 어 찾아와 禮拜를 올렸다. 戊子年 봄 귀국하여 迷源莊의 小雪山에 들어가 직접 경작하면서 4년 간 부모를 侍養하였다.(이색,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문 조선금총람 상, 유창, 태고화상 행장 태고화상어록 ; 한국불교전서 4) 보우는 19세에 ‘만법귀일 일하귀처’의 화두를 참구하였는데, 보우 가 석옥청공의 스승인 급암종신의 도반인 고봉원묘의 선풍도 계승 한 것을 알 수 있다.71) 그가 분심을 내어 정진하였다는 것도 高峰原 妙가 工夫의 3要說로서 제시한 大信根․大憤志․大疑情 가운데 하나 이다.72) 71) 이색, 양주 태고사 원증국사탑비문 . 72) 指正, 示衆 고봉화상선요 통광 역주, 불광출판부, 1993. 이러한 고봉의 선풍 적 요소는 조선중기 청허에게서 다시 강조되고 있다. 그렇지만 정작 보우가 법을 계승했다는 청공화상의 법어록에는 이러한 면을 찾을 수 없다. 따라서 본고에서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101 - 이처럼 태고보우는 이미 고려에서 수용된 고봉의 선풍을 수용했 으며73), 보우가 선승이면서 華嚴選에 합격한 것은 당시 불교계의 통 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74) 보우를 비롯한 당시의 선사들이 스승을 찾아 중국으로 향하였던 것도 ‘無字話頭’와 ‘悟後印可’를 강조하였던 몽산선풍의 영향이다. 보 우는 원나라에 가서 임제종 고승 石屋淸珙75)을 비롯한 뛰어난 선사 들을 찾아 인가를 받았다.76) 그런데 당시 불교계는 수선사 13세였던 覺巖國師 復丘가 등장하 여 송광사를 동방제일 도량으로 사세를 진작시킬 무렵이었는데 복 구는 이존비의 아들이었고 졸암연온의 외조카였으므로 보우도 복 구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보우와 더불어 당시 가지산문계의 우뚝 솟은 선승은 白雲景閑이 문제를 제기한 바와 같이 보우의 선풍을 이해하는데 좀 더 다양하게 이해할 필 요가 있다. 73) 指正, 開堂普說 앞의 책. 74)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화엄종 고승 천희가 몽산선풍을 수용하고 있다 는 사실이다. 즉 千凞(1307~1382)는 1319년(충숙왕 6) 13세에 體元이 주법으로 있던 般龍寺의 주지 一非에게 출가하였다. 그의 스승 일비와 체원은 반용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법수사에 주석했으므로, 그들 간에 서로 교유했을 것이며, 따라 서 그는 체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천희는 1364년(공민왕 13) 가을부터 1366 년 봄까지 중국에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는 중국에서 抗州 休休庵에 봉안된 임 제종의 蒙山德異의 영당에 참배하고 2년 후인 1366년 봄에 臨濟宗의 聖安寺에 머물고 있는 萬峯時藯를 참례하고 만봉의 제자를 물리치고 袈裟와 棒을 받았다. 이처럼 화엄종승인 천희가 몽산의 선풍을 수용하였다. 그는 귀국직후 공민왕의 환대를 받고 國師로 책봉될 수 있었다. 고려 명종 때 玄悟國師 宗璘(1127~1179) 이 국사로 추증된 이래 화엄종승으로는 유일한 것이었다(황인규, 앞의 논문 (2000). 이는 고려말에 산문간의 통합뿐만 아니라 종파간의 융합현상이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조선 태종 세종대 불교교단의 정비도 위정 자의 승정시책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불교 교단내의 자기정리 등등의 사정도 반 영된 것이라는 시각도 필요하다. 75) 이색, 태고사 원증국사비명 . 76) 황인규, 태고보우와 14세기 불교계의 동향 미주현대불교 37․38, 2001․ 2002.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102 - 다. 그와 친분이 두터웠을 태고보우가 1347년 원나라에 가서 당시 임 제종 고승인 석옥청공을 만나 사사받자 그로부터 불과 5년 후인 1351 년에 원나라로 들어갔다. 보우가 국내의 선풍을 받아들여 見性하고 원나라에 갔듯이 경한도 국내의 선풍을 수용하여 깨달음을 이룬 후 원나라에 갔다. 이는 ‘悟後印可’의 蒙山禪風을 수용한 그들로서는 당 연히 인가받기 위해 고승을 찾았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 음과 같은 글로서 알 수 있다. 이미 산에 은둔하면서 單傳의 뜻을 참선하며 진리를 연구하였으며, 그 깨달음의 믿음이 심오함에 이르러 중국의 절강성으로 가서 그 인가를 구 하고자 원나라 至正 辛卯年(1351년, 공민왕 즉위년)에 중국 강남 호주 하 무산에 있는 석옥청공선사를 찾았다.(成士達, 直指 序 , 이세영 편 직지 ) 경한은 湖州 霞霧山 天湖庵에 나아가 석옥화상에게 語句를 바치 고 질문을 던지자,77) 석옥으로부터 그 유명한 直指 를 전해 받았 다.78) 그는 불교계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수행에 몰두하면서 지공 의 선사상에 보다 충실하였고, 따라서 경한의 사법사는 선사상의 계 승이라는 측면에서는 淸珙의 법을 계승했지만 보우보다는 청공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그러나 불교계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스승 은 慧勤 다음으로 指空의 충실한 제자였다. 위에 살펴본 바와 같이 가지산문의 고승들은 元나라에 가서 새 로운 臨濟禪風을 수용한 普愚에 비해 국내 在地 출신이었다. 다만 광 복군 종정이나 계조연진은 원나라에 유학을 다녀와 새로운 임제선 77) 백운화상어록 至正 신묘년 5월 17일 스승이 호주 하무산 천호암에 가서 석옥 화상에게 올린 글 . 78) 成士達, 직지 서문 직지 권상.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103 - 풍을 수용하였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79) 즉 野雲은 철산 이 고려에 오자 머리를 깎고 스승으로 섬긴 權㫜이다. 그의 손자인 宗頂80)이 출가하여 曹溪宗 都摠攝大禪師 兩街都摠攝이 되었고 廣福君 에 봉해졌다.81) 따라서 그가 가지산문계 고승으로 판단된다.82) 繼祖演眞은 대표적인 권문세족인 蔡洪哲(1262~1340)의 셋째 아 들이다.83) 채홍철이 栴檀園을 설치하여 보우를 초빙하고 그의 아들 을 대선사 繼祖演眞이 보우에게 출가하였으므로 연진도 가지산문계 일 것이다.84) 결국 계조연진이나 광복군 종정의 경우처럼 철산소경 과 교류하였던 혼구와 직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승려였다는 점에 서 이들이 가지산문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여말선초 불교계를 주도하였고 가지산문의 태고보우와 백 운경한, 사굴산문의 나옹혜근 두 산문의 경향성을 보게 되면, 보우 의 문도들이 그의 스승과는 달리 대부분 원나라에 유학하지 않았음 에 비해 나옹혜근의 대표적 계승자인 자초를 비롯한 문도들은 대부 분 원나라에 가서 법을 사사받았다. 또한 보우의 문도들이 고려말 공민왕대 이후 조선건국 전까지 불교계를 주도하였으나 자초를 중 심으로 나옹의 문도들이 조선왕조의 건국사업에 참여하고 건국 후 에 자초를 중심으로 하는 문도들이 향후 조선불교계를 주도하였 다.85) 79) 태고화상어록 에 의하면 강남으로 가는 珦선인을 보내다 , 강남으로 가는 思 禪和를 보내면서 라는 게송을 통해 보면 보우의 문도인 듯한 향선인과 사선화도 중국을 유력한 듯하나 더 이상 확실한 내용은 알 수 없다. 80) 종정은 권보의 손자이자 그의 아들인 菊齋 權溥(1262~1346)의 아들이다. 81) 이제현, 권보의 처 유씨 묘지명 . 82) 권보의 묘지명은 그와 함께 4학사로 활동하였던 이진이 지었는데, 역시 그와 4 학사로 활동하였던 박전지도 철산화상과 교유하였다. 83) 이곡, 稼亭集 권12, 채홍철묘지명 . 84) 이곡, 稼亭集 권11, 제문, 順川君 蔡公墓誌銘 . 85) 이에 대해서는 황인규의 앞의 논문(1997)과 앞의 책(1999) 참조.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104 - 그러나 한 편으로는 두 산문이 융합해가는 현상을 엿 볼 수 있다. 이는 고려중기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의 통합의 노력이 있었고 이미 산문간의 대립이 완충 내지 통합되어 가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만큼 가지산문계의 사세가 진작되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복구의 제 자인 원규가 보우의 제자로 나오며86) 보우의 문손으로 비정된 구곡 각운도 복구의 제자였다.87) 그리고 보우나 혜근이 회암사에 출가하 거나 주석하였던 사실, 보우의 제자 혼수가 혜근에게 사사받은 사 실, 송광사(수선사)의 주지에 나옹혜근이나 태고보우의 문도인 남 전부목․석굉 등이 부임하였던 사실,88) 조선초 보우의 문도인 상총 이 송광사의 선풍을 진작시킬 것을 상소하였던 사실89) 등등이다. 뿐만 아니라 교리상 천태종과 임제종이 서로 접근하고 있었고90) 화 엄종이나 천태종간의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당연히 9산문 문도회의 개최, 9산문의 통합의 노력 등 산문내의 노력의 결과였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원나라의 선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였다. 맺 음 말 86) 동문선 권118, 각진국사비 . 87) 이재열, 오교양종과 조계종통에 관한 고찰 불교사상 1․2․3․4․5․6호 (1973. 11~) ; 한국조계종의 성립사 연구 민족사, 263-269쪽. 88) 남전부목은 연화사 주지를 지낸 적이 있으며, 조계종 진각국사의 은법제자였다. 그는 환암혼수 다음으로 1376년(우왕 2)에 제18대 송광사 주지를 하였고, 그 후 釋宏(1320~1399)이 주지를 하였다. 이색, 牧隱詩藁 권4, 寄蓮花禪師(夫牧) , 送南田禪師夫牧 ; 권17, 奉夫牧和尙寄茶 ; 권31, 奉答夫牧大禪師 . 89) 태조실록 권14, 태조 7년 5월 기미. 90) 허흥식, 천태종의 형성과정과 소속사원 앞의 책, 282쪽.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105 - 오늘날 한국불교계를 대표하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선풍은 이름하여 看話禪風이라 할 수 있다. 그 전통은 신라하대에 전래된 9 산문의 선종에서 연원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고려후기 闍 崛山門 修禪社系와 迦智山門의 그것에 연유한다. 우리의 선종 산문은 대부분 남종선의 전통을 받아 들였고 그 이 후 중국의 선종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였는데 고려후기의 최대 산문 에 영향을 가장 많이 끼친 것은 蒙山德異와 雪巖祖欽의 선풍이다. 설 암조흠의 문도 가운데 高峰原妙의 선풍은 中峰明本을 거쳐 千巖元長 으로 이어지는 중국의 정통계가 있고 고봉의 선풍이 고려로 이어졌 다. 따라서 원간섭기 이래 몽산선풍과 급암종신의 선풍이 가미된 것 이라 하겠다. 몽산선풍은 ‘宗師印可’와 ‘無字話頭’의 강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고 고봉선풍은 공부의 3요소로 ‘大信根․大疑情․大憤志 ’와 ‘萬法歸一 一 歸何處’라는 화두를 강조하고 있다. 현 학계에서는 고려말 선종계가 及庵宗信의 문도인 石屋淸珙과 平山處林의 선풍의 새로운 臨濟禪風을 받아들였고 나아가 印可를 받아 법맥까지 이었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고려의 선종의 제자 입장에서 인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기 선풍의 확신 내지 자신에서 오는 것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선풍의 수용은 선종계 선풍의 참신성을 유지하게 하여 산문의 사세를 진작시켰고 당시 사회의 건전한 기풍을 유지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고 보고 있다. 선종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 였던 가지산문과 사굴산문계 수선사 모두 사세의 진작을 위해 새로 운 선풍을 수용하였다. 그것이 원나라 간섭이 본격화되는 14세기초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106 - 의 몽산선풍의 수용과 원나라의 간섭이 심화되는 14세기 중반 설암 조흠의 선풍이었다. 원나라와 고려의 두 문화의 교류는 이른바 몽고 풍과 고려양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문화나 사상적 고착화는 고려뿐 만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특히 중국 한족의 불교가 아닌 몽골의 민간신앙과 습합된 라마 교의 대두는 여원문화에 참신성보다는 퇴폐성을 지녀서 적지 않은 문제가 노출되었다. 때문에 여원불교계는 나름대로 자기성찰이 일 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실과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새로운 사상이라 고 생각되는 성리학을 수용한 주체와 그 시기가 불교계의 그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리학을 수용하고자 한 儒 者나 새로운 선풍을 수용하고자 한 승려는 같은 인물류이거나 같은 범주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儒佛’이라는 차원에서 깊이 천착할 문제이지만 흔히 고려불교의 비대화와 그로 인한 보수화 내 지 퇴폐상을 지적하면서 유불교체의 필연성을 제기하지만 그것조 차 지나친 도식적 이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최근에 원나라의 문화나 사상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눈 여겨보아야 할 것이며, 고려후기의 문화나 사상에 대해서도 역시 재 해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더욱 유의할 것은 일반의 역사를 전 공하는 자의 경우는 사상 내지 불교사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상사나 불교사를 전공하는 이들조차 고려후기 불교의 보수화 내지 퇴락화, 그로 인한 성리학의 수용이라는 이분법 적 구도의 마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떠하든 선풍의 수용으로 인하여 산문내의 변화가 일기 시작하 였고 그것이 바로 산문간의 교류와 융합과 문도중심으로의 변화이 다.91) 山門間의 교류 또는 융합은 새로운 선풍의 영향이었다고 생각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107 - 된다. 특히 몽산선풍의 수용 중심지인 선원사에는 수선사뿐만 아니 라 가지산문계 고승들도 주석하였던 사실이 그것을 단적으로 대변 한다. 이러한 산문간의 交流 또는 融合은 그동안의 山門的 傳統마져 허 물게 하였다. 이는 원간섭기 후반에 수용한 선풍이 석옥과 평산의 선풍이 급암종신의 선풍에서 나온 것이고 중국 선풍의 정맥을 잇는 고봉의 선풍 역시 급암과 고봉의 스승인 설암조흠의 선풍에서 나왔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문간의 경계는 허물어지게 되고 그동안 지켜져 왔던 山門 중시의 원칙에서 門徒중심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어 본래 ‘師 資相承’의 전통의 부활 내지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는 산문내의 산문 을 융합하려는 9山 門徒會의 개최나 9산문 統合의 승정시책도 한 몫 을 했지만 선풍의 영향이 더 컸다. 그러한 선풍의 수용은 모방단계 에서 고려적인 선풍으로의 전환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가 억압받는 세종대에는 새로운 산문이라고 할 불교 계 전체를 아우르는 본산체제가 시행되게 되고 그러한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門徒중심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는 조선불교를 중흥시켰다는 淸虛休靜이나 그의 문도들이 불교계를 재정립하고자 불교계의 정통 내지 정맥을 고려의 산문에 서 찾기보다 중국의 선종에서 찾아 연결시킴으로서 한국불교계 내 지 사상계를 왜곡․굴절시켰다는 점이다. 이는 제후국이라 스스로 91) 이러한 인식은 필자가 이미 1999년 이래 주장한 이래 후속 논고에서도 확대 심 화하여 발표한 바 있다.( 환암혼수의 생애와 불교사적 위치 경주사학 18, 1999) 최근에 개최된 한국선학회(2005.10.20)에서 현각 스님이 조선선법의 특징 이라는 논문에서 門中槪念과 人物中心의 선법을 논하였다.(최현각, 조선시대의 선법 한국선학 12, 2005) 필자의 ‘산문중심에서 문도중심으로 변화’하였다는 주장과 내용상 맥락이 닿아 공감하는 바 컸다.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108 - 자처했던 조선왕조에 있어서의 지배관념인 中華思想의 영향이라 하 지 않을 수 없고, 후대 청나라의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자기문화나 사상에 대한 주체적 인식을 하였던 北學派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 다. 주제어 : 수선사, 선원사, 천영, 충지, 만항, 충감, 혼구, 몽산덕이, 철산 소경, 나옹혜근, 태고보우, 백운경한, 석옥청공, 평산처림, 고 봉원묘, 중봉명본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고려후기 禪宗山門과 元나라 禪風 - 109 - The Influence of Yu’an(元) Dynasty’s Seon(禪) & Development of Two Seon School(山門) in the Latter Koryo Dynasty Hwing, In-Gyu This study aims to trace expansion of two Seon school in the latter period of Koryo dynasty. Especially the writer tried to work into development in which up Koryo Seonjong(禪宗) during the period of Mongol Influence changed into a Seon oriented Buddhism. I have paid attention to the Imje(臨濟) school that has exercised influence upon the Koryo Seonjong sect such as Sooseonsa(修禪社) of Sagulsanmoon(闍崛 山門), Gajisanmoon(迦智山門). After the domination of the Yu’an(元) Dynasty supported by sixteen Kuksa(National Preceptor 國師) such Sakulsanmoon(闍崛山門)’s masters Koryo Buddhism under ; Wongam Choongji(圓鑑冲止), Hyegam Manhang(惠鑑萬恒) and Gakgin Bokgoo(覺眞復丘). After the latter part of Koryo Dynasty Sooseonsa-seon continuned the main streams centered around different masters. they were Gajisanmoon(迦智山門)’s masters ; Bogak Iryeon(普覺一然)․Bogam Hongoo(寶鑑混丘), Even though they were related to Sooseonsa-seon, tried to spread tradition Seon. For instance, Seonwonsa(禪源社) temple was the second temple of Suseonsa (修禪社 or Songgwangsa temple). It was a important temple that was appointed the resident head preist of Suseonsa(修禪社) Temple. And It was recepted Mongsan Dukyi(蒙山德異)’s thought of seon that was forming Kan hua seon(看話禪) in the Korean Buddhism, who were Manhang(萬恒) and Seolbong Chonggam(雪峯冲鑑). 중앙대학교 서울캠퍼스 | IP: 122.46.157.*** | Accessed 2018/05/09 07:19(KST) 中央史論 23집 - 110 - Mongsan Dukyi(蒙山德異) and his disciples- Cheolsan Sogyung(鐵山紹瓊)’s thought of Seon(禪) exerted an influence in the development of the ideas of the three Masters. During the reign of King Kongmin in the latter period, they were three main master: Master Taego Bowoo(太古普愚), Master Naong Hyeguen(懶翁惠勤) and Master Baekwoon Kyeonghan(白雲景閑). Their thoughts emphasized Mooja hwadoo(wordless topic of meditation 無字話 頭) and the acknowledgement of one’s master Inga(印可), dependent upon one’s realization of enlightenment, was also regarded as important. They were influenced of Seokok Cheonggong(石屋淸珙) and Pyeongsan Cheolim(平山處林) who were direct descendants of Seolam Joheum(雪庵祖歆) and Joongbong Myeongbon(中峰明本) who were direct descendants of Gobong Wonmyo(高峰原妙). They leaded to Buddhism in the latter period of Koryo Dynasty and the early Choseon Dynasty. Since three outstanding masters’s activities in the Koryo dynasty (麗末三師), Chanyeong(粲英) and Honsoo(混修) of Gajisanmoon(迦智山門) initiated in leading Buddhist circle. Hyekeun(慧勤) and his disciples reformed their buddhist doctrines suitable for new eras. key words : Sooseonsa(修禪社), Seonwonsa(禪源社), Cungji( 止), Manhang(萬 恒), Choonggam( 鑑) Hongoo(混丘), Taego Bowoo(太古普愚), Naong Hyeguen(懶翁惠勤), Baekwoon Kyeonghan(白雲景閑). Mongsan Dukyi(蒙山德異), Cheolsan Sogyung(鐵山紹瓊), Seokok Cheonggong(石屋淸珙) Pyeongsan Cheolim(平山處林), Gobong Wonmyo(高峰原妙), Joongbong Myeongbon(中峰明本)
[출처] 황인규 고려후기 선종산문과 원나라 선풍|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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