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스님 23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1. 한국불교를 깨운 맑은 바람 ‘돈점논쟁’ ~ 65. 종정이란 고깔모자를 쓰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61. 한국불교를 깨운 맑은 바람 ‘돈점논쟁’ 『“성철의 돈오돈수(頓悟頓修) 이론은 외적인 모순과 억압 속에 와해되어가는 승단의 재건을 위한 이념적 토대의 필요성이라는 한국불교의 시대적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비유컨대 세 종류의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현재·미래의 나고 죽음의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를 건지고(人天小乘敎와 같음),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緣覺中乘敎와 같음),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大乘圓頓敎와 같음) 함께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가르침의 순서이다. 그 가운데 한 물건이 있어서,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고, 발톱은 무쇠 창날과 같으며, 눈은 햇빛을 쏘고 입으로는 바람과 우레를 내뿜는다...

성철스님 2023.08.06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6. 중도(中道) ~ 60. 돈오돈수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6. 중도(中道) 『“흔히 ‘중도’라 하면 ‘중도는 중간이다’ 하는데 그것은 불교를 꿈에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라 하는 것은, 모순 대립된 양변인 생멸을 초월하여 생멸이 서로 융화하여 생이 즉 멸이고, 멸이 즉 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참다운 평화의 세계를 이루려면, 진정한 자유를 얻으려면 양변을 버려야만 합니다. 모순상극의 차별세계를 버려야 합니다. 양변을 버리면 두 세계를 다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 부처님이 도를 이루고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했다. 율장 초전법륜편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세존이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출가자는 이변(二邊)에 친근치 말지니 고(苦)와 낙(樂)이니라. 여래도 이 이변을 버린 중도를 정등각이라..

성철스님 2023.07.30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1. 30년 만에 가야산으로 돌아가다 ~ 55. ‘가야산 호랑이의 사자후’ 백일동안 이어지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51. 30년 만에 가야산으로 돌아가다 『“성철은 일찍이 이를 간파하고 패싸움의 폐해를 지적했다. 정화란 모름지기 안으로부터 내실을 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성철은 정화운동 초기에 15명으로 구성된 정화대책위원에 선임되었지만 이를 박차고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종단은 ‘세 불리기’에 엄청난 후유증을 앓게 되었다.” 』 성철은 해인사 백련암에 들었다. 1966년 가을이었다. 해인사 주지 자운 스님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였다. 자운이 제자들에게 말했다. “김룡사에서 어렵게 지내신다 들었네. 백련암을 비워놓았으니 이제 그만 해인사로 오시라고 말씀드리게. 해인사는 성철 스님이 출가한 곳이니 법 고향이 아니겠는가.” 성철은 처음 삭발한 곳으로 돌아왔다. 돌아보면 30년 동안 제방..

성철스님 2023.07.23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6.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 50.“내 법어는 여러분 기도에 비하면 사족에 불과하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6.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성철은 10년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세상을 향한 철조망을 쳤지만 그 작은 공간이 한 세상이었다. 성철이 제자 천제와 나눈 대화가 하나의 상징이다. ‘철조망으로 둘러쳤으니 이제는 완전히 갇힌 것입니다.’ ‘아니지, 자물쇠가 안쪽에 있으니 갇힌 곳은 반대쪽이야. 우리가 세상을 가둔 것이야.”』 “대구 파계사 성전암에 있을 때는 어떻게나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지 산으로 피해 달아나기도 했지요. 그러면 산에까지 따라옵니다. 한 말씀이라도 해 달라 하거든요. ‘그럼 내 말 잘 들어, 중한테 속지 말어. 나 같은 스님네한테 속지 말란 말이야.’ 이 한마디밖에 나는 할 말이 없어요.” (성철 인터뷰) 사람들..

성철스님 2023.07.16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1. 천제굴에서 ‘전쟁’을 씻기고 삼천배를 시키다 ~ 45.“쓸모없어야 도를 이룬다” 딸의 법명을 불필이라 짓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41. 천제굴에서 ‘전쟁’을 씻기고 삼천배를 시키다 『“성철은 천제굴을 찾는 이들에게 삼천배를 시켰다. 이때부터 성철을 만나려면 부처님께 삼천배를 올려야 했다. 한국 불교사에 ‘삼천배’란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승려란 결국 부처님을 대행할 수 있는 사람이지 부처는 아니었다. 그래서 성철은 삼천배를 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찾지 말고 부처님을 찾으시오. 나는 해줄 게 없습니다.”』 성철은 1952년 창원 성주사에서 동안거를 했다.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봉암사 결사를 이어받은 성주사 대중이 성철을 모셔왔다. 성주사는 불모산(佛母山)에 있다. 불모는 금관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을 지칭한다고 한다. 인도에서 ‘불교’를 싣고 온 왕비가 아들 7명을 입산시켜 승려로 만들었다 해서..

성철스님 2023.07.09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6. 불멸의 결사, 4종정 7총무원장이 나오다 ~ 40. 성철은 몽둥이로 말했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6. 불멸의 결사, 4종정 7총무원장이 나오다 『“대중을 무섭게 다그친 만큼 성철은 자신에게 엄격했다. 결사 중에도 생식을 계속했다. 쌀 두 홉을 물에 담갔다가 간을 하지 않고 씹어 먹었다. 일체 찬도 없었다. 성철은 이때도 장좌불와(長坐不臥)를 계속했다. 성철의 방엔 목침이 없었다. 누구도 이불 위의 성철은 본 적이 없었다.”』 봉암사는 희양산 흰 바위만큼이나 높이 솟았다. 봉암사에서 일어난 일은 금방 퍼져나갔다. 선승들이 전국에서 찾아왔다. 부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절 살림은 어떻게 꾸려가야 하는지, 선방에서는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고 싶고 보고 싶었다. 봉암사 스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은 그대로 본보기였고 기준이었다. 객들은 그들의 수행정진에 자신을 빗대보기도 했..

성철스님 2023.07.02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1. 깨달음 후 수행은 닦음이 아니다, 대자유 속 펼침이다 ~ 35. 봉암사의 전설, 그곳의 시간은 따로 흘렀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31. 깨달음 후 수행은 닦음이 아니다, 대자유 속 펼침이다 『“성철이 7년 동안 제방에서 머물고 있었음은 어떤 기간을 정해놓고 보임을 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절인연이 그를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성철이 봉암사로 간 까닭은 불법을 바로 세우고 부처님 제자를 양성하여 지혜와 자비를 전파하려 했음일 것이다.”』 성철은 깨친 후에도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장좌불와 수행을 계속하며 흐트러짐이 없었다. 송광사, 수덕사, 간월암, 법주사, 도리사, 대승사, 통도사 등 제방에서 안거를 했다. 1940년 오도송을 외친 이후 7년 동안 안거를 거르지 않았다. 이를 오후보임(悟後保任)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면 돈오돈수, 즉 한번 깨달으면 더 이상 닦을 필요가 없는 대해탈경..

성철스님 2023.06.25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6. 비구니 묘엄이 탄생하다 ~ 30. 일어나 봉암사를 바라보았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6. 비구니 묘엄이 탄생하다 『"청담은 성철에게 편지를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출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녀의 마음을 돌려보기로 했다. 청담은 떠오르는 많은 생각들을 다시 지우고 있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간청으로 하룻밤 파계를 한 후 얼마나 많은 참회 수행을 했던가. 그런데도 아직 마음이 저리는데 그 인연이 자신을 따라왔으니 무슨 말을 할 것인가. "』 1945년 늦봄, 14세 소녀가 대승사 산문을 넘어왔다. 청담의 둘째 딸 인순이었다. 인순은 ‘인간 사냥’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일제는 조선 부녀자들을 색출해서 일본군위안부로 끌고 갔다. 조선이라는 이름만 남았지 남아있는 것은 없었다. 심지어 의병조차 사라졌다. 둘러봐도 불러봐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슬픈 산하..

성철스님 2023.06.18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1. 간월암에는 성철의 달이 떠올랐다 ~ 25. 쌍련선원의 두 연꽃, 성철과 청담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1. 간월암에는 성철의 달이 떠올랐다 『"만공의 뱃길을 따라서 성철은 1942년 봄 간월암에 들었다. 그것은 자신을 크게 가두는 일이었다. 작은 암자를 세상으로 알고 1년 동안 정진했다. 경허가 천장암에 숨어든 것처럼 외딴 섬에 자신을 부렸다."』 성철은 정혜사에서 동안거를 마치고 내포지역 산사를 둘러봤다. 가야산, 상왕산, 연암산을 두루 찾아갔다. 특히 자신이 출가한 가야산이 충청도에도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가야산(678m)은 서산시 해미· 운산면, 예산군 덕산· 봉산면, 홍성군 갈산면, 당진군 면천면에 걸쳐있었다. 그리고 이곳 가야산이야말로 일찍이 100개가 넘는 절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신라에 남산이 있었다면 백제에는 가야산이 있었던 것이다. 실로 부처님..

성철스님 2023.06.11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6.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 20. 회갑잔치 날 아버지가 울었다

[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16. 그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성철은 계속 무자 화두를 들었다. 성철은 말이 줄어들었다. 눈빛은 형형했고, 특히 좌복 위에서 새벽을 맞았다. 다른 선승들은 홀로 깨어있는 성철이 무섭게 느껴졌다."』 1940년 2월, 일제 총독부가 조선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라 했다. 이른바 창씨개명이다. 겉으로는 권장한다고 했지만 실상은 강요였고 협박이었다. 우리 민족에게 성은 목숨처럼 귀한 것이었다. 조상이 물려주었으니 하늘이 내린 것이었다. 따라서 성을 바꾸라는 것은 피를 속이는,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식민지 백성들은 성과 이름을 고쳐야 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는 사람은 입학과 취직도 할 수 없고, 관청에도 출입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광수는 자신의..

성철스님 2023.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