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없는 가르침 91

고익진 교수님 특별법문(mp3) : 3종외도, 12처, 3법인설, 업설, 4무량심

한국 불교 근현대사에서 최고의 불교석학이셨던 동국대학교 고 고익진 교수님 특별법문으로 1986년 서울 불광사에서 대중설법을 통해 불교교리의 가장 근간이 되는 12처 업설에 대하여 설법하신 내용을 인터넷에 공개되어 25년만에 우리들에게 다시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불자로서 오랜동안 공부하였더라도 어딘지 모르게 헛점이 있다고 판단하거나, 불교공부 무엇부터 시작하여야 할지 방황을 하였다면, 반드시 이 설법을 들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보다 더 세부적인 공부는 안심정사 토요법회에서 강의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찬불가가 나온 후 설법이 진행됩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진지하게 경청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일승 합장 차례 제 1부 눈이 없는 세계 1. 불교를 접하게 된 인연 2. 반야심경에서 만난 화두 3. ..

위없는 가르침 2020.08.23

불교의 무아사상

- “우리가 집착할 만한 자아란 없다” 중국의 3대 석굴의 하나인 운강석굴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여행코스에 운강석굴이 들어가 있을 때에는 우리여행의 주목적지가 아니므로 그냥 ‘양념’으로 집어넣었으려니 짐작하고, 애초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드렁한 기분으로 운강석굴에 들어갔는데, 제1굴에서 놀라고, 제2굴에서 탄복하고, 제3굴에서 17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불상을 보고는 그 웅장함에 그만 기가 꺾여버렸습니다. 그리고 제5굴과 제6굴의 불상은 이런 것도 보았냐는 듯이 그 웅장함과 정교함을 한껏 뽐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큰 충격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자랑으로 삼고 있던 불교미술이 대부분 운강석굴에서 그 원형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 너무도 실망을 했습니다. 그 예로..

위없는 가르침 2020.08.09

고요한 마음

《법구경(法句經)》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방일한 마음을 스스로 금하여 그것을 물리친 자 현자라 하네. 그는 이미 지혜의 누각에 올라 근심도 벗어놓고 안락을 얻어 어리석은 무리를 내려다본다. 마치 산 위에서 아래를 보듯. 자기의 마음을 잘 다스려 지혜를 얻은 사람은 모든 근심을 여의고 안락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리석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돈이라는 것이 그저 일상생활에서 약간의 불편을 덜어주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모르고 과도한 욕심을 내어 온갖 부정을 저지르기도 하고 심지어는 부모도 살해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어느 한 사람에 집착합니다. 그래서 ..

위없는 가르침 2020.08.09

이승과 저승

세존께서 죽림정사에 계실 때이다. 쿤다라는 이름의 돼지잡이 백정이 있었다. 그는 마흔 다섯 살의 중년남자였다. 한창 흉년일 때 그는 수레에 쌀을 가득 싣고는 시골로 가서 싼 값에 돼지새끼들을 거두어 오곤 했다. 그의 집 뒷켠 허술한 돼지움막 속에서는 어린 돼지새끼들이 오물과 배설물들을 뒤집어쓰고 먹고 자고 있었다. 쿤다는 돼지가 잘 자라면 이렇게 도살했다. 돼지를 기둥에 꽁꽁 묶고는 육모 방망이로 때려잡는 것이었다. 살코기를 부풀게하고 연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턱을 벌려 젖히고 칼로 자갈을 물리고 입 속으로는 펄펄 끓는 물을 부어넣었다. 물은 돼지의 뱃속으로 들어가 똥물을 씻어 항문으로 쏟아내는 것이다. 항문에서 나오는 물이 맑아지면 이번에는 끓는 물을 돼지의 등에다 쏟아 검은 털가죽을 벗겨냈다..

위없는 가르침 2020.08.09

육조단경

1. 실상을 본다. 본성이 어떠한가에 대한 논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이 없이 있어왔다. 이에 대해 대체로 선하다고 하는 주장이 많지만 악으로 보는 사람도 없지 않고, 中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육조단경에서는 자성은 원래 공하다고 본다. 공하다는 것은 어떻게 규정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것은 선도 악도 아니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고저장단도 없다. 生(생)한 바도 없거니와 생한 바가 없으므로 滅(멸)할 바도 없다. 본래 淸靜(청정)하다고 한 것도 더럽다는 말의 상대 개념이 아니라 空(공)하다는 뜻이다. 또한 공하다고 하는 것은 공한 모습도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자성을 佛性이라고 한다. ​ 그러나 어떤 因이 주어지면 그에 맞게 결과를 낸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다. 맑은 거울이 ..

위없는 가르침 2020.08.02

지혜로운 자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괴로워하지 않는다 어느 법우님이 말했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여자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나이 든 사람에 대하여 여자로 보다는 사람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중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법우님은 “우리는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사람이기는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 남성성은 점차 약화되고 여성화 되어 간다. 여성 역시 나이가 들면 점차 남성화 되어 간다. 나이가 든 노부부를 보면 알 수 있다. 등이 굽을 정도로 늙었을 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사람을 오온으로 본다면 사람보다는 오온(五蘊)이 나을 듯 하다.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을 다섯 가지로 분석하여 설명했다. 색, 수,..

위없는 가르침 2020.07.19

악마는 내 마음 속에도

악마는 내 마음 속에도 미인이라도 화내는 모습을 보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시기와 질투 하는 모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 백설공주에서 계모왕비는 미녀이다. 미녀가 화를 내는 모습을 보았을 때 마녀(魔女)처럼 보인다. 마녀는 다름 아닌 악마의 다른 이름이다.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아무리 미남이라도 분노하는 분노하는 모습을 보면 악마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마음의 거울이 있다면 분노를 먹고 사는 존재가 있다. 야차(yakkha)는 분노의 대명사와 같다. 그래서일까 이미지가 매우 추악하고 흉폭하다. 상윳따니까야 ‘추악한 용모의 경’(S11.22)에 야차와 제석천 이야기가 있다. 어느 날 야차가 제석천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이를 본 삼십삼천의 신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올랐다. 그런데 신들..

위없는 가르침 2020.07.19

재가불자의 조건

불교에서 말하는 재가신자(우바이. 우바새)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참다운 재가 신자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담은 경전이 있다. 빠알리어 니까야에는 [앙굿따라니까야 A.25, 마하나마경]이며 같은 내용으로 [잡하함경 929. 일체사경(一切事經)]이 있다. 간단하게 내용을 알아보자. 하마나마라는 재가신자가 붓다를 찾아와 재가불자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하신 것이다. "세존이시여, 어떤 사람을 가리켜 재가신자라 합니까?" "집에서 청정하게 살면서 '목숨을 마칠 때 까지 삼보에 귀의하는 우바새(우바이)가 되겠습니다. 이를 증명하여 주십시오' 라고 다짐한 사람들을 말한다." "세존이여, 어떤 것을 모든 우바이(우바새)가 원만하게 조건을 갖춘 것이라고 합니까?" "마하나마..

위없는 가르침 2020.07.19

[空] 모든 법의 실상은 공이다.

제법(諸法)의 실상을 관찰해야 하니 제법의 실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 모든 것[一切法]이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왜냐면 일체법은 자성이 공(空)이어서 중생도 없고 개아(個我)도 없으며, 또한 일체법은 환상[幻]과 같고 꿈과 같으며, 메아리와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아지랑이 같고, 허깨비와 같기 때문이다. 《대품마하반야바라밀경》 제27권 상제품, 불광출판부, 505쪽 일체의 유위법은 별같고 그늘같고 등불같고 허깨비같고 이슬같고 거품같고 꿈같고 번개같고 구름같으니 마땅히 그와 같이 보아야 한다. 《금강반야바라밀경》 한글장243책 149쪽. 유마의 빈 방 문수사리가 물었다. “거사님, 이 방은 무슨 까닭으로 텅 비어 있으며 시자도 없습니까?” 유마힐이 답하였다. “공(空)하기 때문에 텅 ..

위없는 가르침 2020.07.19

[空] 공을 실천하는 보살

보살은 능히 일체 중생을 대신하여 모든 고뇌를 받고 또한 다시 일체의 복된 일과 모든 중생을 버리기 때문에 보살이라 한다. 《승사유범천소문경》제4권, 한글장244책 509쪽 인간의 것이든 천상의 것이든 욕락을 떠난 것이든 세간에 있는 온갖 즐거움의 도구는 모두 보살에게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보살도를 실천할 때에 육바라밀다에 머물러서 스스로 보시를 실천하고, 또한 보시로써 중생의 이익을 성취시켜 주고, 나아가 스스로 반야바라밀다를 향하여 가서 또한 이 반야바라밀다로써 중생의 이익을 성취시켜 주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이러한 까닭에 보사마하살은 모든 중생들을 안락케 하기 위하여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 것이다. 《마하반야바라밀경》 제2권 한글장203책 45쪽. 보살이 육바라밀을 행하..

위없는 가르침 2020.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