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 169

초기불전에 나타난 구업의 유형과 대처방안 / 한성자

초기불전에 나타난 구업(口業)의 유형과 대처 방안 / 한성자 특집 | 좋은 말 나쁜 말 그리고 불교 1. 머리말 항간에서는 요즈음 정치권이 연루된 사건을 둘러싸고 진실공방 또는 거짓공방으로 연일 시끄럽다. 공방의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까지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 여러 사람이 각자의 진실을 주장하고 상대방의 거짓을 비난한다. 하루가 멀다고 매스컴에서 묵은 뉴스에 조족지혈의 새 소식을 보태서 떠들어대니, 거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일반 사람들조차 은연중 나름의 잣대로 어느 쪽이 진실인가를 가늠해 보게 된다. 개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나라의 앞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한갓 가십거리로 넘겨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제 일처럼 진실 찾기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11>

정진이 너무 조급하면 그 들뜸만 늘어나고, 너무 느슨하면 사람을 게으르게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평등하게 닦고 익히고 거두어 받아, 집착하지도 방일하지도 말며 모양을 취하지도 말라 “이 경의 끝부분에서 붓다는 아라한과를 증득한 소나의 태도에 대해 칭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추켜세우지도 않고 또한 남을 낮추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명확히 설명했다. 모든 비구들도 이렇게 분명하게 법을 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지도 못했으면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자랑한다. 이런 사람들은 붓다시대에도 있었고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이 경의 교훈은 여기에 있다” 이십억이경(二十億耳經) [원문] (二五四)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尊..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8>

모든 수행자는 항상 선정을 닦고 익혀 마음을 고요히 해야 생경(生經) [원문] (六六)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常當修習方便禪思, 內寂其心. 所以者何? 修習方便禪思, 內寂其心已, 如實觀察. 云何如實觀察? 如實觀察此色·此色集·此色滅; 此受·想·行·識, 此識集·此識滅. 云何色集? 云何受·想·行·識集? 比丘! 愚癡無聞凡夫不如實觀察色集·色味·色患·色離故, 樂彼色, 讚歎愛著, 於未來世色復生; 受·想·行·識亦如是廣說. 彼色生, 受·想·行·識生已, 不解脫於色, 不解脫於受·想·行·識. 我說彼不解脫生·老·病·死·憂·悲·惱·苦純大苦聚, 是名色集, 受·想·行·識集. 云何色滅, 受·想·行·識滅? 多聞聖弟子如實觀察色集·色滅·色味·色患·色離, 如實知. 如實知故, 不樂於色, 不讚歎色, 不樂著..

불교의 수행법 - 삼학을 중심으로 -

불교의 수행법 - 삼학을 중심으로 - 이 정 모(태원)/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 목 차 • Ⅰ. 서론 Ⅱ. 삼학에 의한 수행 1. 삼학의 근원과 발전 2. 계율의 수행 3. 선정의 수행 4. 지혜의 발현 Ⅲ. 맺음말 Ⅰ. 서 론 인간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종교의 문을 두드려 길을 찾으려는 것이라 본다. 이 행복이 어떤 것이냐는 질문에는 사람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여러 가지의 답이 있을 수 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내면으로는 마음의 안정, 밖으로는 안정된 삶 속에 즐거움이 흐르는 상태가 행복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래서 이에 ‘安樂’이라는 단어가 적당할지 모르겠다. 안과 밖이 안락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반되어야 할 것이 마음의 안정이라 본다. 마음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밖으로 한없는 욕망을 쫓아가기 ..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 <7>

오온의 무상·고·무아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면 오온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 일으키고 탐욕 떠나 해탈하게 돼 색(色)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모든 색은 나도 아니요, 나와 다른 것도 아니며, 나와 나 아닌 것이 함께 있는 것도 아니다’고 알아야 하나니, 이것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如實知]이라 하느니라. 수(受)·상(想)·행(行)도 마찬가지이며, ‘식(識)은 과거에 속한 것이건 미래에 속한 것이건 현재에 속한 것이건, 안에 있는 것이건 밖에 있는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아름답건 추하건, 멀리 있는 것이건 가까이 있는 것이건, 그 모든 식은 나도 ..

불교 경전의 결집 과정과 논쟁점 / 조준호

불교 경전의 결집 과정과 논쟁점 / 조준호 상좌불교, 무시할 것인가 포용할 것인가 1.들어가는 말 오래된 불교 문헌에 의하면 인도불교사에 있어 불멸(佛滅) 후 네 차례에 걸친 석가모니 붓다의 말씀에 대한 편집 또는 편찬회의가 있었다. 이 가운데 상좌불교(Theravāda)의 빠알리(Pāli) 전승 문헌에는 세 차례가 언급된다. 불멸 후 처음으로 라자가하(Rājagaha)에서 500 아라한에 의한 제1차 결집, 불멸 100년 후 웨살리(Vēsalῑ)에서 계율상의 문제가 쟁점이 된 제2차 결집, 이후 모리야[Sk. Maurya] 왕조의 아소까 왕 때 적주비구(賊住比丘) 축출이라는 교단 정화적 차원의 제3차 결집이 그것이다. 본고는 기획 주제에 따라 빠알리 전승의 문헌에서 전하는 세 차례의 결집까지를 살펴보는..

붓다가 본 세상살이1_ 물질의 소유

붓다가 본 세상살이1_ 물질의 소유 탐욕 경계할 뿐 소유 부정하지 않아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꼭이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들판 위에 빨간 상의를 입은 여배우가 두 손을 입에 모으고 소리친다. 속까지 후련한 이 멘트는 그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CF카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때 속물적인 느낌 때문에 ‘돈’이라는 말을 쉽게 내뱉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 돈은 개인의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었다. 1997년 IMF이후 대량해고가 발생했다.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의 씨앗은 사방으로 흩어져 우리 주변에 수풀처럼 자라났다. 불안은 생존이란 명분아래 나눔보다 소유를, 이웃보다 개인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이제 앞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조차 없다. 나의 빈곤은 온전히 내 책임이므로, 소유에만 관..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6>

오온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탐욕을 완전히 없애며, 어떤 번뇌도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바르게 해탈하면 이것이 비구의 ‘현법열반’ “지혜로써 제법의 무상·고·무아를 통찰해서 자아에 대한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은 있다·없다, 영속한다·단멸한다 는 견해의 그물에 걸리고 만다. 삼매나 선은 그 자체로써는 결코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지혜로써 해탈·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 향법경(向法經) [원문] (二七)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有異比丘來詣佛所, 頭面作禮, 각住一面, 白佛言: “如世尊說法次法向, 云何法次法向?” 佛告比丘: “善哉! 善哉! 汝今欲知法次法向耶?” 比丘白佛: “唯然, 世尊!” 佛告比丘: “諦聽! 善思! 當위汝說. 比丘! 於色向厭·離欲·滅盡, 是名..

마성스님의 아함경 강의<5>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관찰하게 되면 교만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붓다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은 오온이 ‘나[我]’라고생각하고 오온에 집착한다. 이처럼 오온에 집착하는 것을 오취온(五取蘊, pancupadanakkhandha)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오온에 대한 집착, 즉 오취온 때문에 모든 괴로움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二三) 如是我聞: 一時, 佛住王舍城迦蘭陀竹園. 爾時, 尊者羅후羅往詣佛所, 頭面禮足, 각住一面, 白佛言: “世尊! 云何知·云何見我此識身及外境界一切相, 能令無有我·我所見·我慢·使·繫著?” 佛告羅후羅: “善哉! 善哉! 能問如來: ‘云何知·云何見我此識身及外境界一切相, 令無有我·我所見·我慢·使·繫著?’耶?” 羅?羅白佛言: “如是, 世尊!” 佛..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가?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가? 불교평론에 발표표된 김나미님의 '깨달음과 열반의 상관관계' (불교평론 2011 봄호)라는 글은 이전에 홍사성님이 쓴 '깨달음이 불교의 목적인가 (불교평론 2004년 봄호)’, ‘깨달음에 대한 몇 가지 오해, 그리고 진실 (불교평론 2009년 6월)’ 과 호진스님이 쓴 책 '성지에서 쓴 편지 (2010년 도피안사)’에서 거론된 내용들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이들은 하나같이 한국불교의 깨달음지상주의가 불교의 목표인 열반을 외면하며, 단지 열반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깨달음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 병폐를 낳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과연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가?' 나에게 누가 묻는다면 나는 '같다'.라고 답할 것이다. 또한 누가 깨달음과 열반은 다른가?라고 묻는 다면 '다르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