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없는가르침 88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 기초 튼튼, 불교교리 한 토막 17 2008년 11월 통권 409호 / 목경찬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범부가 보는 세상과 부처님이 보는 세상은 같은가, 다른가? 같다면 범부와 부처님이 어떻게 차별되며, 다르다면 부처님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노승이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을 보면 산이었고 물을 보면 물이었다. 그 뒤 훌륭한 선지식을 만나게 되어 선정에 들어가 보니 산을 보아도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아도 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진실로 깨달음을 얻고 나니 예전과 다름없이 산을 보면 단지 산이고 물을 보면 단지 물이다. - 『속전등록(續傳燈錄)』 제22권, 청원 유신(靑原 惟信) 선사 게송 이 게송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그 ..

위없는 가르침 2021.04.11

[경론]불교의 체계적 이해 - 고익진, 새터, 1994(전문)

[경론]불교의 체계적 이해 - 고익진, 새터, 1994(전문) 제1부 불교의 근본 교설 1. 진리성 주장의 문제 불교가 일어날 무렵(B.C. 5세기 경)의 인도 사회는 여러 가 지 종교 사상이 발생하여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 립 상황이 어느 정도였는가는 인간의 생사 괴로움에 대한 각 파의 견해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정통파 바라문교(Brahmanism)에서는 우주의 창조주이며 본질 이기도 한 범(brahman)이라는 천신(天神)에 대한 절대적인 신 앙과 공희(供犧)를 통해서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설 하였다. 그러나 그 계통에서도 우파니샤드(upanisad) 철인들 은 인간의 자아(atman)와 범(梵)은 동일하다는 범아일여(梵我 一如)의 알음(智)을 통해서만이 인간은 생사윤회..

위없는 가르침 2021.03.28

계율

계율! 불자들이 지켜야 할 규범이다.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삼귀의계다.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 삼귀의계의 수지 여부는 불자와 비불자를 가르는 1차적인 기준이 된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오계를 받는다. “살생을 하지 않겠습니다. 도둑질을 하지 않겠습니다. 삿된 음행을 하지 않겠습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겠습니다.” 삼귀의를 다짐하고 살긴 하지만 오계 받기를 망설이는 불자들이 있다. 특히 다섯 번째 조항인 ‘불음주계’가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다. 회사에서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하고, 친목을 도모할 때 술이 윤활유 역할을 한다. 친구든 친척이든 모여서 식사할 때면 ‘건배’를..

위없는 가르침 2021.03.28

대기설법(對機說法)과 차제설법(次弟說法)

대기설법(對機說法) 부처님이 가르침을 펴실 때 각각 중생의 근기와 처지에 따라 맟추어 거기에 가장 알맞은 내용과 방법으로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인도하신 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바로 중생들이 앓고 있는 가지가지 병에 따른 처방으로서의 약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 을 응병여약(應病如藥), 즉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차제설법(次弟說法) 이것은 사다리나 계단을 오르듯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점차적으 로 수준을 높여 나아가는 포교 방법이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시론(施 論) - 계론(戒論) - 생천론(生天論) - 제욕(諸欲)의 과환(過患) - 출리 (出離)의 공덕 - 사제(四諦) 등을 순서에 따라 설법하셨다. 초기경전(아함경)에 흔히 볼 수 있는 ..

위없는 가르침 2021.03.28

전변설(轉變說)과 적취설(積聚說)

불교이전(佛敎以前)의 인도사상(印道思想) 불교는 인도사상(印道思想)의 한 조류(潮流)로서 서기전(西紀前) 6세기경에 발생한 것이니 그것은 갑자기 성립한 것이 아니었고, 그 시대의 환경과 사상이 양(陽)으로 음(陰)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성립된 것이다. 물론 석존(釋尊)과 같은 위대한 인물은 시대조류를 지배하고 새로운 사상을 창조(創造)할 수 있지마는, 역시 시대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최초의 불교를 설명하기 위하여서는 특히 당시의 인도 사상계(思想界)에 있어서 불교가 어떠한 지위에 있었던가를 우선 아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그러면 당시의 사상은 어떠하였는가 하면 그의 대표적인 것이 두조류(二潮流)가 있으니 즉 바라문의 전변설(轉變說)과 사문의 적취설(積聚說)을 들수 있다. (1) 전..

위없는 가르침 2021.03.28

아라한은 어떤 사람인가

- 감정의 오르내림이 없고 ‘번뇌와 집착’을 떠난 분 게송 90) 여정을 마치고, 슬픔에서 벗어나고, 모든 면에서 해탈하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욕망의) 고뇌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김: 그는 윤회의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윤회를 종식하였다. 다시 태어나지 않으니 이 세상의 걱정과 슬픔에서 벗어났다. 모든 번뇌에서 온전히 해방된 자유인이 되었다. 사람을 옭아매는 물질이나, 명예, 출세, 집착, 이득의 속박, 그리고 모든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평정에 이르렀다. 그러니 그에게는 그 어떤 고뇌도 없다. 이 게송은 아라한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준다. 고뇌는 빠리라하(paril.쮄ha)의 번역인데 ‘열, 열병, 불탐’의 뜻을 갖으며, 온갖 욕망의 열병, 온갖 번뇌의 열병, 온갖 집착의 열병, 온갖 욕..

위없는 가르침 2021.02.12

사랑과 미움 없으면 얽매임도 없다

게송 210)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말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도 결코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보지 못함이 괴로움이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보는 것이 또한 괴로움이다. 새김 : 여기에서 사랑하는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만나지 말라는 말은 기회를 일부러 만들어 만남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부러 이런 만남을 만들고 계속 만나다 보면 결국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강하게 집착하게 되고, 그 집착의 결과는 소유와 속박이다. 그리고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한편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색깔이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라 만나면 감정이 상하고 서로 다투게 된다. 이런 감정은 번뇌와 괴로움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아예 만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서로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서로 ..

위없는 가르침 2021.02.12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

유위법(有爲法, 범어 samskrta), 무위법(無爲法 , asamskrta-dharma)이란 유위(有爲)란 위작(爲作), 조작(造作)의 뜻으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의미이고, 바로 ‘연기(緣起)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우주의 일체 존재는 모두가 연기된 것이다. 이와 같이 갖가지 인연에 의한 결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을 유위라 일컫는다. 즉,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것, 어떤 힘에 의해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유위법이다. 우리의 몸을 위시해서 언어, 교육, 창작, 학문, 정치, 경제 등 인위적인 활동과 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 그리고 4계절의 변화 등의 자연현상까지도 유위법이다. 우리가 만들고 표현하는 것, 현실적으로 보고 들으며, 느끼고 아는 것 등 사람이 하..

위없는 가르침 2021.01.03

열반(涅槃)

열반(涅槃) ​ 열반은 불교 수행의 최고 경지를 표현하는 말이지만, 그 언어적 인상은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소극적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생의 맹목적 의지라고 할 수 있는 탐(貪)·진(瞋)·치(痴)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불교에서는 열렬한 구도를 위해서 재가보다는 출가를 권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불교는 염세종교라든가 허무적멸의 도라는 평을 종종 들어 왔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과연 열반의 참다운 뜻을 이해한 것일까. 선과 악은 성질이 상반하므로 한 인간의 행위 위에 동시에 나타날 수는 없다. 악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선은 있을 수 없고, 선이 행해지고 있을 때는 악이 있을 수가 없다. 선과 악의 이러한 상반성은 악을 끊으면 곧 선이 되고, 선을 끊으면 곧 악이 된다는 판단을 끌어낸..

위없는 가르침 2020.12.06

초기경전 (중아함경)

멸성제(滅聖諦)는 고의 원인인 번뇌가 소멸된 경지 곧 열반을 뜻하는 말이다. 소멸되어 없어졌다는 뜻이다. 보통 열반을 범어의 음대로 니르바나(Nirvana)로 읽는 수가 있는데 이 어원이 가지고 있는 뜻은 ‘불어서 껐다’는 뜻이다. 불이 붙고 있는 상태에서 그 불꽃을 불어서 꺼버렸다는 말로 번뇌 또는 욕망을 불꽃에 비유하여 그것을 꺼버렸다는 것이다. 때로는 적멸(寂滅), 원적(圓寂) 등으로 의역하기도 하는데 고요해진 상태로 번뇌에서 벗어나 영원하고 무한한 고요한 경지에 들어간 것을 말한다. 이것이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말하자면 니르바나(Nirvana)는 불교에서 제시하는 이상향(Utopia)이다. 이 열반에 들어갔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없어지고 운명의 굴레도 벗어난다는 것이다. 불교는 중생들을..

위없는 가르침 2020.11.22